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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눈을 떠라
(계 3: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라는 말의 뜻은 ‘민중의 비위를 맞추다’입니다.
‘민중의 의와 판단, 혹은 민중의 즐거움’이라는 이름을 가진 라오디게아교회는 그야말로 그 이름에 걸맞게 하나님 대신 인간들이 주인이 된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나 사명에 무관심한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처럼 부요하고 평안한 교회는 없었습니다.
외적인 박해나 내적인 이단의 공격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물질적으로도 부요 했으며 문화적으로도 풍성한 환경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롭고 넉넉한 환경과 조건 때문에,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만 그리스도를 망각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주님은 영적 분별력을 소유하도록 힘써야 할 것을 권하셨습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보게 하라(요3:18)” 하셨습니다. 신앙의 눈을 뜨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성령의 시력, 판단력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물질과 문화 그리고 인간의 지혜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안목을 고치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안약은 바로 ‘회개와 믿음’뿐입니다. 그 회개와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웅장한 건물, 부유한 성도들이 교회의 재산과 생명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권세와 은혜를 떠난 교회란, 눈멀고 병들어 굶주려 죽어가는 걸인의 처지와 다를 바 없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증인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분신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교회는 오직 자신들의 물질적 번영과 평화에만 열심이었고,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교회가 선교의 사명에 무관심해지면 주님께서는 불로 연단을 하십니다.
라오디게아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20절).” 주님께서는 영적인 눈이 멀어버린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왜 두드리십니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두드리십니다.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두드리십니다.
주님께서는 영적인 눈이 멀어버린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우리에게,
신앙에 열심을 내라고 두드리십니다.
여기에 끝까지 참아주시는 예수님의 인내가 있습니다. 찾아와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넘어진 나를 일으켜주시는 주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 주님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음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문을 여는 자에게는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20절)”고 하신 주님의 약속, 하나님나라에서 누리게 될 친밀한 교제의 약속이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저와 저의 가족들에게 영적 진리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의 눈과 판단력을 주옵소서. 마음의 문을 열고 문 밖에 서서 계시는 주님을 영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아래 url을 click 하시면 베다니찬양대의 은혜로운 찬양(시원한 바람처럼)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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