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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 이상임씨 댓글[0]
아름다운 세상 (2005-06-18 오후 3:08:29) http://blog.somang.net/koenonia/1511

[인물 포커스]3대가 자원봉사하는 이상임씨

이상임 씨가 서울 강남구 수서동 서울시여성보호센터에서 한 노인의 목욕을 도와주고 있다. 그는 5년간 각종 시설에서 목욕 봉사를 해 오고 있다. 권주훈 기자
종갓집 맏며느리, 4남매 중 맏딸, 3남매의 엄마 역할에 사업가인 남편 뒷바라지까지…. ‘주부’ 이상임(李上姙·49) 씨는 그런 와중에서도 각종 시설에 수용된 치매노인이나 장애아를 찾아 목욕시켜 주는 ‘목욕봉사’를 5년째 해오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은 어김없이 목욕봉사를 나가는 이 씨는 ‘때 아줌마’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가 자주 가는 서울시 여성보호센터에는 앞을 못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이 씨의 목소리만 들어도 “때 아줌마 왔다”며 환호성을 지른다.

“처음엔 다들 ‘한두 달이나 할까’라고 생각했나 봐요. 제 앞에서 옷도 잘 안 벗고, 말도 안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제가 가면 너무나 반가워해요. 그 중 몇 명은 저한테만 자신의 이름을 얘기해 줄 정도로 친해졌어요. 처음 시설에 입소할 때 이름을 얘기하지 않아 ‘부 영등포(영등포에서 발견한, 신원확인이 안된 사람이라는 뜻)’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던 정신지체인이 자기의 진짜 이름을 말해줄 때 얼마나 감격했는지 몰라요.”

그가 봉사 중에서도 가장 힘든 봉사로 꼽히는 목욕봉사를 택한 데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있는 시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병 수발을 20년째 하고 있어요. 유난히 목욕하는 것을 싫어해 한번 목욕을 시켜 드리려면 온 가족이 총동원돼야 했죠. 한동안 집에서 모시다가 상태가 악화돼 지금은 요양원에 가셨는데, 시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목욕봉사를 합니다.”

그는 1981년 남편 박종철 씨(51)와 결혼한 뒤 줄곧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10여 년 전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치매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시어머니의 대소변 받아내는 수발을 도맡아 했다.

“남들은 오랫동안 그 고생을 했으면서 왜 또 자청해서 그러느냐고 말리지만 전 이 일이 그냥 좋아요. 밉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어쨌든 시어머니도 같이 벗고 목욕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어요. 지금도 시어머니는 딸보다 저를 더 찾으세요. 그렇게 목욕하기 싫어하지만 막상 목욕 후에는 당신의 몸에서 풍기는 비누 향을 좋아하시죠. 다른 분들께도 그런 기쁨을 주고 싶었어요.”

그가 매주 월요일 찾아가는 서울시 여성보호센터는 주로 치매 또는 장애를 갖고 있는 노인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는 이곳 외에도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서울시 아동복지센터와 시각장애인 보호시설인 루디아의 집에서도 목욕봉사를 하고 있다. 1년 전부터는 장애인 아버지와 떨어져 사는 중고등학생 두 형제의 실질적 엄마 노릇도 하고 있다. 이 씨는 최근 서울 강남구청에서 주는 ‘올해의 자원봉사상’을 받았다. 그는 내년부터는 대학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복지문제를 공부할 계획을 갖고 있다.

선행을 하는 데에도 집안 내력이 있는 것일까. 그의 친정아버지 이부종 씨(72)와 박민선(23) 재은(21) 정수(20) 3남매가 그를 도와 함께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법무사 일을 오랫동안 하다 10년 전 은퇴하신 친정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한약이라도 지어주고 싶다며 오랫동안 수지침이랑 한의학을 공부하셨어요. 아버지께 가족들을 위해서만 쓰지 마시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죠. 그렇지 않아도 제가 하는 일을 두고 ‘몸 생각은 않고…’라며 마뜩찮아 하시던 아버지는 처음엔 ‘나까지 끌어들이느냐’고 역정을 내셨어요. 그래도 자꾸 권하니까 마지못해 나섰는데, 지금은 저보다 더 열심히 하세요.”

친정아버지 이 씨는 ‘한우물봉사단’ 고문으로 장애를 가진 노인들을 찾아 의료봉사를 해 온 공로로 서울시장이 수여하는 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큰딸 민선 씨와 공대에 다니는 둘째딸 재은 씨는 엄마가 목욕봉사를 하고 있는 서울시 아동복지센터를 매주 정기적으로 방문, 아이들의 심리치료 및 학습을 도와주고 있다. 영국에 유학 가 있는 아들 정수 씨도 방학 때마다 귀국해 아이들의 영어공부를 돕는다.

“온 가족이 함께 봉사활동을 하면서 더욱 화목해졌어요. 어쩌면 봉사는 남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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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처럼 살아온 인생 85년 댓글[0]
아름다운 세상 (2005-06-14 오후 9:03:42) http://blog.somang.net/koenonia/1500
    빛과 소금처럼 살아 온 인생 85년

    옛날 드라마에서나 볼까 말까 한 낡은 병원, 원장실이라고 해 봐야 눈 씻고 찾아봐도 새 것이라고는 없다. 어디 하나 번드르르 하게 꾸민 것 없이 담박하고 정갈할 뿐이었다. 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아온 ‘상계동 슈바이처’ 김경희 원장(85세)이 일하고 있는 서울 상계동 은명내과 원장실의 풍경이다. 6대를 이어 온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김 원장은 열여섯 살 때 깊은 신앙적 깨달음을 얻은 뒤 평생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살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세브란스 의전 2학년 재학시절부터 답십리의 조선보육원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한 그는 지금껏 그 초심을 지키며 살아왔다. 대학 졸업 후부터 만리동에서 영세민들을 위해 무료진료 활동을 했고 1972년부터 답십리, 청계천, 망원동 등 판자촌 골목골목 환자를 찾아다녔다. 1984년부터는 상계동에 터를 잡고 지금껏 ‘은명내과의원’을 꾸려오고 있다. 그가 상계동에 자리를 잡은 까닭도 ‘돈 없고 배경 없는 이웃들’ 때문이었다. 당시 망원동 한강 뚝방에서 무료진료를 하던 김 원장은 정부의 도시계획에 의해 주민들이 강제 철거를 당하자 그들을 따라 상계동으로 왔다. 의료보험 혜택이 없던 시절, 그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천 원짜리 한 장만 받고 진찰, 투약 그리고 주사에 검사까지 해결해 주었다.

    “원래 무료로만 하려고 했는데 어려운 사람만 오는 것도 아니고, 무료라서 그런지 안 좋은 약을 쓰는 줄 알고 그냥 버리고 그러더라구. 그러던 차에 주변 약국을 보니까 돈 없는 사람들이 병이 나면 천 원짜리 하나 들고 약을 사 먹더라고요. 차라리 그 돈으로 진찰도 하고, 약도 주고, 주사도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야 그 사람들 자존심도 지켜 줄 것이고.”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은 의료 봉사로 그치지 않았다. 진료를 받던 환자 중 등록금을 내지 못해 힘들어 하던 학생의 수업료를 대신 내준 것을 계기로 설립한 ‘은명장학회’를 통해 그는 2천여 명이 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그저 장학금만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무료 독서실을 만들어 손수 생일카드를 보내 주는 다정한 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1996년에는 모교에 53억원 상당의 전 재산을 내 놓았다. 뿐만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무의탁 노인과 장애인의 병원동행이나 심부름, 무료 차량 제공 등의 서비스를 실시해 왔고, 2001년 5월에는 노원구 중계동에 ‘은명마을‘을 설립해 100여 세대 주민의 대부가 되었다. 영세민을 위한 무료 급식, 위로 관광, 생활비 보조 등 그가 이웃을 위해 펼치는 선행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지금도 그는 월 두 차례 직접 무료 진료소로 왕진을 나간다. 김 원장은 힘들게 살던 이들이 행복한 삶을 찾아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경기도 화성에서 온 한 심장병 아이는, 아버지가 알콜중독자라서 이장이 데려 왔어요. 이 아이가 나중에 수술을 해서 다 나으니까 그 아버지가 기분이 좋아서 술을 끊었대요. 그러자 이번엔 부인이 집나간 지 3년 만에 돌아왔지요. 남편이 술 끊고 자식이 병 나으니까 한 가정이 다시 살아난 거지요. 정말 기쁜 일이지요?”

    나이 여든다섯, 남들 같으면 여생을 즐기며 일부러 일손을 놓았을 텐데 김 원장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봉사활동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유일한 수입원인 병원 진료를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일만으로도 너무나 바빠 다른 일엔 관심도 없고 취미를 가질 겨를도 없다고 했다. 평생을 그래 왔다. 타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어면서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인색한 김 원장은 40여 년 전에 마련한 왕진가방을 아직까지 쓸 정도로 검소하다. 그렇게 남에게 퍼 주고 나면 남는 게 뭐 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것이 어딨어. 난 관리자라고. 이건 죄다 하늘이 나한테 맡겨 놓은 거지, 내가 가질 것들이 아니에요. 관리자가 관리만 잘 하면 됐지, 본디 내 것도 아닌데 욕심 부릴 수가 있나?” 아직 웬만한 젊은이보다 귀도 밝고 잔글씨도 너무 잘 보인다는 김경희 원장은 “내일 죽더라도 이웃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유일한 사명”이라고 몇 번을 다짐하듯 말했다.

    ◑꿈이 자라는 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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