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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실화 댓글[0]
음악 (2013-08-07 오전 11:21:40) http://blog.somang.net/revlsi/7930
출처카페 > 교수선교회원문http://cafe.somang.net/sofamis/165218



-감동적인 실화-

누가 로또 2등에 당첨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자살을 기도하던 30대 가장 두 명이 로또 당첨되고,

이를 둘러싼 미담이 인터넷을 통해 뒤늦게 알려지면서
국민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달 27일 한강대교 북단 다리 아치위에서 시작됐다.
성북구 장위동에 사는 김씨(38)는

이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자살을 하기위해
한강대교 다리 아치 위에 올라 갔다.

마침 자살을 기도하던 박씨(38세, 영등포구 대방동)를 만났다.
그러나 주민 신고를 받고 119구조대와 용산경찰서가 긴급 출동해

1시간 만에 자살소동은 종료됐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지난해 8월 건설업을 하는 친구 원씨(37)의 보증을 섰다가
3억원의 빚을 떠안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박씨는 두 달 전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는 슬픔을 당했지만
죽은 아내가 가해자로 몰리자
법정 싸움에 지쳐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을 찾은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경찰은 다시는 이 같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후

두 사람을 훈방 조치했다.

서로의 처지를 알게 된 두 사람은
이날 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그후로도 자주 만나 술을 마시며 절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다 그 달 7일 김씨와 박씨는 당첨되면 반씩 나눌 것을 약속하고

각각 1만원씩 내 강남대로 한 판매점에서 로또복권 20장을 샀다.
그 중 한장이 2등에 당첨돼 3억원을 받게 된 김씨와 박씨.
천성이 착한 두 사람은 그 돈으로
가정을 수습하라며 서로에게 건네줬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자 우선 김씨가 당첨된 로또용지를 갖게 됐다.

그날 밤 김씨는 자신의 마음을 적은 편지 속에
당첨된 로또 용지를 넣어 대방동 박씨 집 편지함에 넣고 왔다.

*박씨와 김씨가 주고 받은 편지 내용 일부*
박씨 "이보게 친구.제발 내 마음을 받아주게나.

나야 아이 하나고 다시 돈 벌어 빚 갚고 살아가면 되지만
자네는 상황이 나다 좋지 않아.
아이들 엄마 그렇게 떠난 것도 큰 슬픔인데.

엄마 없이 아이들하고 어찌살려고 그러나.
우선 이 돈으로 가정을 추스르고 내일을 모색해 보게나.

자네 자꾸 이러면 다시는 자네 안 볼 걸세.명심하게."

김씨 "무슨 소린가 친구.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지.
우선 이 돈으로 자네 빚부터 갚게나.
나는 아직까지는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지 않은가?

우선 자네 빚부터 갚고 살길을 찾아봐야지.
빚 때문에 고민하다가 또 한강다리에 올라갈텐가?
그렇게 자네를 잃기 싫네.
제발 이러지 말게나.
어찌 그리 내 마음을 몰라주는가."

다음 날 이 사실을 안 박씨 또한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정성스레 편지를 써 장위동 김씨 집 편지함에
로또 용지와 함께 편지를 놓아뒀다.
친구를 배려하는 '감동의 다툼'은 이후에도 서너 차례 반복됐다
.
그런데 이날도 거하게 술이 취한 김씨가
박씨의 편지함에 넣는다는것이
엉뚱한 집 우편함에 편지를 넣고 온 것이
또 다른 사건의 발단이었다.

박씨 빌라 바로 위층에 사는
진선행씨(28세 여)가 뜻하지 않은 횡재를한 것.
그러나 편지속의 애틋한 사연을 알게 된 진씨는
당첨된 로또용지와 함께 편지를
모 신문사에 제보했고

감동의 미담은 인터넷을 통해 삽시간에 번졌다.

미국의 CNN방송은
"한국사람의 배려와 인정은 전 세계 최고다" 라는 타이틀로
이 소식을 긴급 타전했다.

영국의 BBC방송도

"자살기도자 2명 로또 당첨으로 절친한 사이 되다"라고 보도했고,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 인터넷 판은

"두 사람의 배려,끝은 어디인가" 라는 제목으로
이 소식을 톱기사로 올렸다.
자살을 위해 한강을 찾은 두 사람, 이렇게 친구가 됐다.

한편 국민뱅크 측은당첨금 3억원과는 별도로

김씨의 보증 빚 3억원을 대신 갚아주는 한편

억울하게 교통사고 가해자로 몰린 박씨 가족에게
국내 최고의 변호인단을 무료로 선임하는 등
대대적인 법적 자문을 통해 박씨 가족의 억울함을 풀어줬다.

국민뱅크 대외협력팀 유선한 팀장은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연찮게 타인으로 만난 두 사람의 우정이 눈물겹고
또한 자신이 이득을 취하지않고 제보를 해 준
양심 바른 진씨에게 무척 감사드린다" 며
이번 조치 배경을 설명했다.

또한 좋은나라 운동본부 김진실 대표는
"로또 당첨되면 가족끼리도 불화가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까지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에 눈물이났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편 이들의 감동실화를 접한 영화제작사 한 관계자는

"이 감동을 그냥 가슴속에서만 간직하기엔
너무 아까워 영화로 만들 계획" 이라며
"감동사연의 실제 주인공 두 명을 섭외해

주연 배우로 출연시키는 방안을 적극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우리의 옛 의좋은 형제의 동화같은 현대판 실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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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낡은 구두 (두자녀의 아름다운 효심) 댓글[0]
음악 (2012-05-03 오후 5:00:32) http://blog.somang.net/revlsi/7339
출처카페 > 소망선교산악회원문http://cafe.somang.net/709/92661

 
                         아빠의 낡은 구두와 두 자녀의 아름다운 효심
아빠의 낡은 구두

아빠의 낡은 구두 버려도 전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낡고 찌그러진 아빠의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하고 슬프기만 했습니다. 내가 이런 비참한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빠가 실직한 이후 부터였습니다. 아빠의 실직 이유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아빠는 그 일로 몹시 괴로워 하셨습니다. 주무 시다가도 몸을 부르르 떠시는 모습은 마치 활동 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실직 하신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아빠는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입사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전 회사와는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였는지라 아빠 에게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었나 봅니다. 입사하신지 1개월이 조금 지나 아빠는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던 출장근무를 자원하셨고 그후 늘 출장만 다니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3일 4일이었던 출장이 조금 지나서는 1주일 2주일씩으로 늘어났고, 요즘에는 1달에 한 번씩 겨우 집에 들어오십니다. 아빠가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아빠의 구두는 검정색인지 황토색인지 분간 하기가 어려울 정도 였습니다. 아빠는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거의 매일을 걸어 다니심이 분명 했습니다. 그나마 그 구두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본래 낡았던 구두가 어느 샌가 뒷굽도 다 닳고, 앞으로는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구두를 몇 번이나 수선 했지만 끝내 더 이상 수선조차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아빠는 가장 값싼 운동화를 사 신으셨습니다. 우리 남매를 키우시느라 구두를 살 형편이 되지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운동화 역시 한번 출장을 다녀오시자 금방 낡은 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빠의 그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아빠 생신 때에는 반드시 구두를 선물해 드리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용돈을 따로 받아 모을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학교 오갈때 버스 타는 대신 걸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금새 2000원이 모였습니다. 몸은 피곤 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수북이 쌓인 은행잎들을 밟으며 중앙청 앞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중, 저 앞에 웬 키 작은 남학생 한 명이 낙엽을 터벅터벅 밟으며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로 중학교 1학년인 남동생 이었습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동생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습니다. "너 왜 자꾸 누나 말 안 듣니? 넌 아직 어려서 걸어 다니면 피곤해서 성적 떨어지니까 반드시 버스 타고 다니라고 했잖니?" 동생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럼 난 아빠 구두 값을 어떻게 모으란 말이야?" 나는 동생에게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누나가 다 모을 테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라고 누나가 몇 번이나 말했니?" 갑자기 동생이 표정을 바꾸며 물었습니다. "누나, 누난 얼마 모았어?" 7500원이란 나의 대답을 들은 동생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모은 거랑 합치면 웬만한 구두 살 수 있겠다. 누나 나 그 동안 2000원 모았어. 나 잘했지?" 나는 동생이 너무 대견스러워 하마터면 대로변에서 울음을 터뜨릴 뻔했습니다. 그 다음 토요일 동생과 나는 동대문 시장에서 10,000원짜리 구두를 샀습니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한 다음 며칠 남지 않은 아빠의 생신일을 기다렸습니다. 아빠가 그날은 꼭 집에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마침내 아빠의 생신일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먼저 온 동생이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너 왜 그러니? 어디 아프니?" "아빠가 오늘 못 오신대. 그러니깐 구두를 드릴 수도 없잖아."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 낡아빠진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지금도 어느 도시, 어느 길 위엔가를 걷고 계실 아빠를 생각하자 어느새 내 눈에도 뜨거운 이슬이 한 방울씩 맺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쉬움의 눈물이었을 뿐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빠께 드릴 새 구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 [옮긴 글] *--
아~ 빠~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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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음악 (2010-12-04 오후 7:35:00) http://blog.somang.net/revlsi/6412
 


 



 

괜찮은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

괜찮은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깊이의 잣대가 필요없는

가슴 넓이의 혜아림이 필요없는 마음

 

자신을 투영시킬 맑은 눈을 가진

그런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이 버거워 휘청거릴 때

조용히 어깨를 내어주고

 

사심없는 마음으로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괜찮은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우울 할때 마주않아

나누는 차 한잔 만으로도

부자가 될수 있고

 

삶이 외롭고 쓸쓸하여

몹시도 허탈한날

조용한 음악 들으며

 

웃음과 함께 진심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모습 전부를 보여 주고

보여 준것이 되려 단점으로 되돌아와

돌아서서 "후회" 라는 단어가

떠올리지 않아도 될사람

 

일상에서 문득 그 모습 떠올려 지면

그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빙그래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서로가 작은 꿈 하나씩을 가슴에 묻고

아름다운 성취를 위해 함께 노력 할수 있는

서로 이해하는 사람이 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름 없는 들 꽃을 아끼는 마음으로

서로의 영혼을 감싸 안을줄 아는

가슴이 따뜻한 그런 사람.

 

서산 해가 너울너울 질때

노을과 함께 벤치에 않아서

넉넉한 마음으로 흘러가는 세월과

자연의 이치를 대화 할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아무 조건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 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아낌없이 베풀수 있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둘이서 한곳을 바라보며

더 나은 삶을 향해 행복을 저축할수 있는

서로 괜찮은 사람이 되어

 

사랑의 길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에게

참 괜찮은 사람이 였으면 좋겠습니다.

 

- 좋은글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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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감동적입니다.) 댓글[0]
음악 (2010-07-21 오후 5:24:47) http://blog.somang.net/revlsi/5991
출처카페 > 교수선교회원문http://cafe.somang.net/sofamis/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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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 버 지, 손 양 원 목사 댓글[0]
음악 (2009-10-01 오후 3:49:15) http://blog.somang.net/revlsi/5380
출처카페 > 소망선교산악회원문http://cafe.somang.net/709/113050
 

 

16.jpg 

 
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
 

우리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비 없어서 낮에는 신문배달, 만두장사를 해서 야간학교에 다녔다. 어머니와 결혼 후에 1937년 7월14일에 나병환자 수용소인 애양원에 전도사로 부임 하였다. 그때 나병 환자 수는 1200명이 있었다.
나환자들은 가지 각색 흉측한 모습들이다.

 

이들은 인간들에게 소외되고 부모 형제 처자식들에게 외면 당하고 죽지못해서 찾아온 곳이다. 이들은 여기 오기 전에는 누구나 한번은 자살을 시도하거나 생각하였던 사람들이다. 아버지는 나환자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버지가 지은 시에 이런글이 있다. "오주여 이들을 사랑하되 내 처자식보다

더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몸이 저들과 같이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표현속에 아버지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버지와 나환자들은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이어져서 행복한

나날들이 계속 됐다. 이렇게 살고 있었는데 1940년 9월25일(수) 일본 형사들 둘이

들이 닥쳐 아버지를 체포하여 갔다. 아버지의 죄목은 신사참배 거부였다.

 

신사참배라는 뜻은 하나님의 십계명 중에 제 1, 2계명을 어기는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일본은 신사 참배를 놓고 우리 믿음의 성도들을 괴롭혔다.

신사 참배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갖가지 고문을 가해 가며

다스렸다. 그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죽어 갔고 신사참배 때문에 문을 닫은 교회가 하나둘이 아니 였으며 우리 아버지가 다니던 평양신학교도 폐교를

당해서 아버지의 33회 졸업장도 우편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첫감옥에 끌려 가셨을 때 나이는 39살이 었다. 여수 경찰서, 광주 형무소,

광주 구치소, 경성구금소, 청주 교도소등 만 5년동안 감옥에서 당하신 고난에 대하여 내 입으로 다 말 수 있겠는가? 특히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죄수들에게 전도를 하자 간수들이 입을 때렸다.

그래도 전도하자 독방에 가두고 감식을 하여 너무나 배가 고파서 두눈 점점 멀어

갔으며 그 곳에 계실 때 온 편지를 보면 글씨체가 엉망이었다.

 

그리고 한겨울는 너무나 추워서 손발이 얼고 얼다가 또 얼고 이것이 반복 되다가

나중에 열 개 손톱과 발톱이 짓물러서 빠져 버렸다.

그때 아버지는 추위와 허기에 사경을 헤매셨으며 검사와 판사 앞에 불려 갈때도

걸을 기력이 없어서 들것에 실려서 갔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의 출소일이 되어서 형무소에 갔다 그러나 서산에 해가 넘어갈때까지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는 나오시지 않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형무소 안에 들어 가셨다, 한시간 쯤에 돌아오시는 어머니는 넋이나간 분인냥 되어서 이럴 수 없다며 통곡하셨다.

 

아바지는 마지막으로 형무소 소장과의 면담에서 소장이   "신사참배하면 될텐데 당신은 헛수고 했소"하자 아버지는 "헛수고는 당신이 했소 신사참배 할 것 같으면 내가 왜 감옥 생활을 했겠소 우상숭배하는 나라는 망하오 그래서 일본도 망할것이요"
하자 다시 재판해서 종신형을 언도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감옥에 있는 동안 우리 7식구는 산산히 흩어져서 살아야만 했다.

당시 애양원 원장은 미국 월슨박사와 원가래 선교사 부부였는데 일본인들의 등살에

미국으로 추방 되었고 아버지가 감옥에 가자 일본인 안또가 왔는데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쫓겨 나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부산(범내골)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큰오빠가 군대를 가야 한다는 영장이 나왔다.
이 문제는 우리 가정에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전쟁에 참여 한다는 것 보다는 군대는 신사참배가 의무화 되었으며 거부하는 사람은

총살형이 었다. 그래서 우리가족은 흩어지기로 하였다.

할아버지는 만주로 어머니와 어린동생은 남해 깊은 산골짜기로 그리고 나와
또 어린동생은 고아원으로 오빠들은 나환자들이 사는 산속으로 들어 갔다.


이때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45년 8월15일에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전쟁에서 계속하여 지자 일본 정부는 신사참배을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과
목사 때문이라하여 기독교인과 목회자! 들을 전부 죽이기로 한 날짜가 8월17일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하신지라 8월15일에 해방 시키신 것이다.

 


이렇게 해방이 되어서 아버지는 감옥에서 출소하게 되었고 그토록 그립던 우리 가족은
옛날에 살던 애양원 사택으로 되돌아와서 한가족이 오랜 만에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내평생 소원으로 학교 한번 다녀 봤으면 했는데 우리 형제들은 학교도 다니게 되어
남부럽지 않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후 3년이 지난 1948년 10월 19일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내나이 16세 되던 때이다. 정말 뜻밖에 공산 게릴라들과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청년 학생들에 의하여 여수 순천 이란 곳에서 대폭동이 일어 났다.

 

이 폭동은 걷잡을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어 참혹한 양민학살의 유혈극을 몰고

왔다. 그들은 여수와 순천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꼭 1주일만에 끝을 냈다.

이 작은 도시에서 1주일간 죽은 사망자 숫자는 3500명이며 행방불명이 500명이나

되었다. 이때 내 오빠는 큰 오빠가 25세요 작은 오빠가 19세였을 때다.

 

 

난데 없이 오빠의 같은 학교 학우들인 좌익학생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 닥쳤다. 두 오빠를 끄집어 내어 땅바닥에 엎어 놓고는 얼굴이고 머리고 닥치는대로 짓밟아았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된 두오빠를 끌고 사형집행장인 순천경찰서로 갔다. 순천 경찰서 뒤뜰에 사형대를 설치 해놓고 오빠를 묶었다.


그리고는 "동인아! 너 지금이라도 그 지독한 예수사상 뽑아 버리고 우리 공산주의를
받아드려 우리와 같이 협력 할 수 있으면 살려준다 어떻게 할 테냐?"하고 물었다.

 그러나 오빠의 대답은 "그건 할 수 없다. 왜 같은 동족이 꼭 이렇게 해야만 하나
너희들도 이런 악한 짓 하지 말고 예수를 믿어야 이 나라가 복을 받지 너희들은 비록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 없다"고 하자 누군가 할 수 없군 하며 큰오빠의 두 눈을 수건으로 가린후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당시 오빠는 노래를 잘하는 성악가였다. 큰오빠는 찬송을 한곡 부르고 죽겠다하며

 "하늘가는 밝은 길이"찬송을 부르고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하는 순간 날아오는 총알을 받고 쓰러 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작은오빠는 피를 흘리고 쓰러진 큰오빠 시체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대성 통곡하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좌익 학생들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왜 죄 없는 사람을 죽입니까? 나도 내 형이 간 천국에 가겠다. 내 신앙도 형님의 신앙과 같다. 이 더러운 세상 살기 싫다."하며 양팔을 펴들고 "자 총을 맞을 테니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쏠려면 쏘아라!" 하고 외치자 또 수발의 총탄이 날아와서 작은 오빠마저 큰 오빠 곁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강철민(가명)이라는 사람이 총을 들고 두 오빠에게 다가 가서 확인사살까지 하였다. 그후 두오빠의 시체는 애양원 나환자 촌에 운반 되었다.

 

 

이때 어머니는 두 오빠의 시체를 끌어 안고 "동인아 동신아"하며 울다가 울다가
결국 기절하여 쓰러지고 또 쓰러 졌다.


 

온 애향원 나환자들도 두 오빠 시체를 앞에 놓고 애향원이 떠나가도록 통곡을 하였다.
그 울음 소리는 하늘 끝까지 닿았을 것이다.

 

 

두 오빠 장례식장에서 우리 아버지 손양원목사는 9가지 감사를 하였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게 하시니 감사.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서 이런 보배를 나에게 주셨으니 감사.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귀중한 장남과 차남을 바치게 하였으니 감사.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이 순교하였으니 감사.


다섯째, 예수 믿고 와석종신해도 복이라�! � 했는데 전도하다 총살 순교했으니 감사.


여섯째, 미국 가려고 준비했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감사.


일곱째, 내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여덞째, 내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을 믿으면서 감사.


아홉째, 역경 속에서도 하 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수 있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두 오빠의 장례식이 마치고 1주일이 지났다.
여기저기서 소문이 들려 왔다. 동인이 동신이를 죽인 놈이 잡혔다고-

그놈은 오빠와 같은 학교 3학년 강철민(가명)으로 밝혀 졌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내 손으로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생각은 내 생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실제로 따르려고 하셨다.

설마 했는데 결국 아버지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아들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난 여기에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난 펄펄 뛰며 울면서 말했다.


 

"아버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습니까? 하늘 아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아버지는 항상 별난 예수를 믿습니까?" 하며 어쨌든 이 일만은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설득하였다.

 

"동희야! 날 쳐다 보아라 내 어차피 하나님의 제1-2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감옥에서 고생했고 너희들까지 고생 시켰는데 강철민 그 학생을 안 잡았으면 모르되
 일단 그 학생을 잡았단 말을 듣고는 이대로 모른척 할 수 없구나
 제 1,2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째서 저 명령은 순종하고
 이 명령은 순종하지 않! 는다면 얼마나 큰 모순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 만일 안지킬 것 같으면 과거 5년간 감옥살이 헛살았고
 너희들 5년간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 시킨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넘어질 수 없구나!"하며 아버지는 나를 설득 시켰다.

 

그러나 아무리 아버지가 좋은 말로서 나를 설득하셔도 그말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아버지와 대판 싸웠지만 결국 난 아버지 생각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같은 것이 100명이 아버지를 설득 시킨다해도 아버지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의 말보다 하나님 한 분의 말씀을 더 무서워 하시는 아버지란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결국 난 아버지께 항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최고 악성으로 분류되어서 사형 선고를 기다리던 강철민을 극적으로 구하여 냈다.
그리고 기어이 내 오빠가 되었다.


그런데 강철민을 구하는데는 그리 쉽지 안했다.

이기관 저 기관에다가 아버지의 뜻을 전했지만 진지하게 들어 주는 이가 없었다.
또한 강철민이가 워낙 악질로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며칠동안 이리뛰고 저리뛰고하여 간신히 힘들게 구해 내었다. 그리고 아들로 삼았다.


 

이 일에는 그 동안 우리집 일을 내일처럼 도와 주시던 나덕환 목사님의 열심히 이루어 질 수가 있었다.
나목사님은 해방이 되어서야 학교에 갈 수 있었던 우리들이었지만 나이 때문에
학교에 들어 갈 수 없게 되자 요소 요소 부탁하고 설득하여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하신 분이다.


이번에 [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라는 책을 내는데도 나덕환 목사님의 아드님이신 나재민 오빠의 증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는 강철민을 너무 사랑했고 그를 부산 고려 고등 성경학교에 입학 시켜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두 오빠가 죽고 2년 뒤, 1950년 6월25일 이날에 갑자기 이북에서 공산당들이 남쪽을 향해 물밀 듯이 쳐내려 왔다.
아버지와 친구 목사님들이 피난 가자고 몰려 왔고 강철민도 달려와서 아버지의 피신을 간곡히 권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이 이상 큰 영광이 어디 있나 이 난국에
가장 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양을 먹이던 목자가 내 양떼 신앙을 지켜야지


더구나 몸이 성치 않는 나환자들을 버리고 나 혼자 살자고 어디로 피난 가겠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면서
결국 아버지는 나환자들 때문에 피난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환! 자들을 모아 부흥회를 열었다.

 

마지막 날 아버지는 설교 할때 계2:17절을 본문으로 하고
"순교를 각오하라 때가 왔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대접을 받았으니
 이젠 예수이름으로 순교 할 때다 잘살려고 노력 말고 잘 죽기를 원하라"라고 말씀 하셨다.

 

9월13일이었다.

이날 아버지는 새벽 집회를 마치고 교회에서 한참 기도하고 있을 때 공산당원들이
쳐들어와서 기도하고 계시던 아버지를 잡아갔다.
이들은 미국놈 스파이, 앞잡이, 그리고 공산당을 악선전한 놈 등의 이유로 죽도록 패고는 어느 과수원으로 끌고 가서 총살을 시켰다.
이때 나이 48세 였다.


 

그리고 이렇게 순교한 아버지는 9월28일 두 오빠의 무덤 뒤에 묻히 셨다.

지금 애향원 나환자 촌 안에 3개의 무덤은 말없이 잠들고 있다.
한 알의 씨앗은 그 씨가 반드시 죽어야만 그 결실의 열매가 백배 혹은 천배가 된다.


 

두 오빠와 아버지는 비록 죽었지만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뿌린 씨는 지금 싹이 나고 움이 터서 이 땅에 수많은 영혼들을 깨우치는
하나님의 뚜렷한 [믿음의 본]이 됐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한다.



본문출처: http://cafe.daum.net/moneymom/CgRp/82
음악출처 : http://blog.daum.net/hynlee67/1794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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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댓글[0]
음악 (2009-03-21 오후 2:22:30) http://blog.somang.net/revlsi/4689
출처카페 > 4지구 산소 같은 사람들...원문http://cafe.somang.net/with/103261

집으로 집으로... razaq v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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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알게 된다면,
누구든 이 세상에서 네 명 이상의

친구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파스칼



Take Me Home - Phil Cou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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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무엇인가? 댓글[0]
음악 (2009-03-07 오후 5:44:54) http://blog.somang.net/revlsi/4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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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무엇인가?



 




What is life? - Mother Teresa
삶은 무엇인가? - 테레사 수녀

Life is an opportunity, benefit from it.

삶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통하여 은혜를 받으십시오.

PAR256889.jpg

Life is a beauty, admire it.
삶은 아름다움입니다, 이 아름다움을 찬미하십시오.



Life is bliss, taste it.

삶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맛보십시오.



Life is a dream, realize it.

삶은 꿈입니다, 이 꿈을 실현하십시오.



Life is a challenge, meet it.

삶은 도전입니다, 이 도전에 대응하십시오.



Life is a duty, complete it.
삶은 의무입니다, 이 의무를 완수하십시오.


Life is a game, play it.

삶은 놀이입니다, 이 놀이에 함께 하십시오.



Life is costly, care for it.

삶은 값어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소중히 대하십시오.



Life is wealth, keep it.

삶은 풍요롭습니다, 그 풍요로움을 지키십시오.



Life is love, enjoy it.

삶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만끽하십시오.



Life is mystery, know it.
삶은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깨달으십시오.



Life is a promise, fulfill it.
삶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지키십시오.



Life is sorrow, overcome it.
삶은 슬픔입니다, 이 슬픔을 극복하십시오.



Life is a song, sing it.
삶은 노래입니다, 삶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Life is a struggle, accept it.
삶은 투쟁입니다, 이 투쟁을 받아들이십시오.



Life is a tragedy, confront it.

삶은 비극입니다, 이 비극을 대적하십시오.



Life is an adventure, dare it.

삶은 모험입니다,  담대하게 대하십시오.



Life is luck, make it.
삶은 행운입니다. 이 삶을 행운으로 만드십시오.



Life is too precious, do not destroy it.

삶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니, 이 삶을 파괴하지 마십시오.


Life is life, fight for it !
삶은 삶이니, 멋진 삶을 위하여!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

본명 : Agnes Gonxha Bojaxhiu
출생 : 1910년 8월 27일
사망 : 1997년 9월  5일
출신지 : 유고슬라비아
경력 : 워싱턴 입양센터 테레사의 집 설립
사랑의 선교수사회 교황 직속 조직 됨
수상 : 1979년 노벨평화상 수상
대표작 : 저서 마더 데레사의 아름다운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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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잔같은 프랑스 소녀 티피 댓글[0]
음악 (2009-03-07 오후 5:40:35) http://blog.somang.net/revlsi/4578
출처카페 > 소망선교산악회원문http://cafe.somang.net/709/102925






타잔 같은 프랑스 소녀 Tippi



동물과 대화하는 아이 티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1.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교감!

자연과 인간이 하나된 경이로운 장면을 담은 사진산문집 《동물과 대화하는 아이 티피》가 도서출판 이레에서 나왔다. 아프리카에서 나고 자란 프랑스 아이 티피가 온갖 야생 동물과 친구나 형제처럼 장난치고 살을 맞대면서 우정을 쌓는 놀라운 장면을 티피의 부모는 수천 장의 사진으로 포착하고 그 가운데 120장을 골라 책으로 묶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어울렸던 먼 옛날, 그 희미해진 과거로 우리를 돌아가게 하는 이 아름다운 사진산문집은 야생으로 떠나는 놀라운 여행이자 아프리카 정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2. 동물과 대화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의 아프리카 일기

야생 동물을 전문으로 찍는 프랑스 사진가의 딸로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태어난 티피는 부모와 함께 일정한 거주지 없이 나미비아와 보츠나와의 거대한 동물보호구역에서 십 년을 살았다. 새끼 사자 곁에서 낮잠을 자고 뱀과 다정히 살을 맞대며 “나는 한 번도 동물이 두려웠던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티피는 부모님이 기막히게 사진으로 포착한 이 자기 세계의 비밀들을 순박하면서도 놀랄 만큼 성숙한 언어로 우리에게 털어놓는다. 이 책에서 티피는 야생 동물과 친밀한 관계에 도달하는 방법을 들려준다. 책 한줄 한줄에서는 티피가 모든 생명체에 갖는 존중과 동물과의 삶에서 얻는 즐거움이 내비친다.

3. 잃어버린 과거와 미래로 떠나는 경이로운 여행!

꾸밈없는 자연과 인간을 경계하는 동물들에게 다가가는 티피의 모습은 줄곧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동물에게 말을 걸고, 우리 마음과 영혼에 말을 거는 이 기이한 꼬마 소녀와 함께, 근원으로 돌아가는 듯한 여행에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소녀 Tippi의 새로운 모습
이 소녀의 부모님은 프랑스의 사진작가라고 해요.













딸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생활하면서
이렇게 좋은 사진을 많이 남겨서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합니다.

티피는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에서 태어났고
사진에서 처럼 동물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티피의 부모 알랭과 실비는 이런 모습들을 수천장의 사진에 담았고
이 사진들 중에 120장을 골라서 책으로 냈다고 해요.



자연속에서 생활하면서 아기의 천진성으로 동물들과 친해지고
그래서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들이 탄생했답니다.


 야생 동물을 전문으로 찍는 프랑스 사진가의 딸로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태어난 티피는 부모와 함께 일정한 거주지 없이 나미비아와 보츠나와의 거대한 동물보호구역에서 십 년을 살았다.

티피가 성장한 세계는 특별하다. 티피의 세계는 카멜레온 레옹과, 코끼리 아부, 표범 J&B, 뱀, 비비원숭이, 사자, 타조 들로 이루어져 있다.

코끼리 아부는 그녀의 동생이고 카멜레온 레옹은 가장 오랜 친구이며 위험한 동물인 표범 J&B는 그녀의 놀이동무였다.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티피의 아주 별난 재능 덕에 가능해진 일이다.

티피는 정글북의 모글리처럼 야생 동물과 함께 성장하며 형제나 학교 친구 대신에 사자, 코끼리, 가젤영양, 얼룩말, 비비원숭이 들과 놀며 대화를 나눴다.

새끼 사자 곁에서 낮잠을 자고 뱀과 다정히 살을 맞대며 “나는 한 번도 동물이 두려웠던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티피는 부모님이 기막히게 사진으로 포착한 이 자기 세계의 비밀들을 순박하면서도 놀랄 만큼 성숙한 언어로 우리에게 털어놓는다.

금발의 소녀 티피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낯선 나라의 동화 같다. 이 책에 실린 글은 티피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서 티피는 야생 동물과 친밀한 관계에 도달하는 방법을 들려준다. 책 한줄 한줄에서는 티피가 모든 생명체에 갖는 존중과 동물과의 삶에서 얻는 즐거움이 내비친다. 코끼리는 늙으면 혼자서 어딘가로 죽으러 간다. 사람들은 코끼리들이 코끼리 무덤으로 간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무덤이 정말로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코끼리들은 아무도 안 보는 곳으로 가서 아무 데나 무덤을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코끼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맞히는 아주 쉽고도 재미있는 비결이 하나 있다. 아프리카에서 온 코끼리는 귀가 아프리카 지도 모양이다. 아시아에서 온 코끼리 귀는 인도 지도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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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가 많이 예쁘게 컷네요.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하기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태어나 10년을 나미비아와 보츠와나의 거대한 동물보호 구역에서 자라난 티피는 카멜레온 레옹, 코끼리 아부, 표범 J&B, 뱀, 비비원숭이, 사자, 타조, 가젤 영양, 얼룩말, 개구리를 친구로 알고 자랐다.

새끼 사자 곁에서 낮잠을 자고 뱀과 피부를 맞대며 코끼리를 타고 산책하는 티 피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데, 그것은 동물들과 말이 통한다는 것.




한번은 티피와 같이 자란 표범이 담장을 뛰어넘어 사람을 공격하자, 티피가 달 려가 표범의 뺨을 때리며 꾸짖어 흥분한 표범을 진정시키기도 한다. "나는 머리나 눈으로, 아니면 마음이나 영혼으로 동물에게 말을 건다. 그러면 동물들이 내 말을 알아듣고 나에게 대답하는 게 보인다. 동물들은 어떤 동작을 해보 이거나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 꼭 동물들 눈에 글자가 쓰이는 것 같다"

그렇지만 동물하고 대화하는 티피의 능력이 모든 동물에게나, 어디에서나 통하 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나는 참새와 개와 비둘기와 고양이, 그리고 소와 말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잘 되지가 않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아마도 진 짜 내 나라는 프랑스가 아니라 아프리카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나미비아에서 태어난 티피라는 소녀.. 그의 부모님들은 프랑스인이지만 나미비아에서 이 소녀를 낳았다고.. 티피를 낳고서 프리랜서였던 부모님들은 여러곳을 돌아다녔기에.. 티피에겐 특별한 친구가 필요했다.. 이때부터 동물들과 깊은 인연을 맺게되었는데.. 그게 바로 태어난지 10개월부터였다고..

프랑스 소녀 티피의 아프리카 밀림일기



프랑스 소녀 티피(Tippi)는 1990년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태어나, 야생동물을 촬영하는 부모와 함께 밀림에서 자랐다.
소녀는 밀림과 친했다. 타조와 같이 춤추고, 카멜레온, 개구리, 사자, 비비원숭이...  즐겁고, 아슬아슬하고 아찔하며, 환상적이며, 육체적인 아픔에 이르기까지 소녀의 기이하고 별난 모습은 결국 모두 소녀의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다. 소녀와 동물들 사이의 일화가 담긴 사진들은 사람들에게 자연보호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주고 있다.




원래 동물과 인간의 친화는 천부적인 것이며, 동물설화에서 이야기하듯이 사람은 동물과 서로 소통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동화되는 삶이야말로 진정하게 인간자신을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한다. 자연계의 모든 생명은 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 이름은 티피 벵자민 오강티 드그레"


부모님이 야생동물 사진작가이기 때문에 일정한 거주지 없이 아프리카의 거대한 동물 보호 구역에 살고 있는 10세짜리 여자아이 티피. 그녀의 이름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부모님이 좋아하는 영화 배우 티피 헤드렌(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의 여배우), 티피가 태어날 때 도와준 벵자민 아저씨, 나미비아 오밤보족 말로 몽구스를 뜻하는 오강티까지.



"내 재능은 동물이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티피는 어린 시절을 동물들과 함께 보내면서 그들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알았다.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코끼리 아부와 산책을 하고, 비비 원숭이 신디와 우유병을 함께 빨고, 새끼 사자 무파사에게 손가락을 빨리며 같이 낮잠을 자고, 카멜레온 레옹에게 뽀뽀를 하고, 사람을 해치는 표범 J&B에게 콧잔등을 때리며 따끔히 야단을 치기도 한다. 그리고 새로운 동물을 보면 한 번쯤 감정을 나누고 싶어 시도해 보곤 한다.



"넌 무섭지 않니? 어떻게 그렇게 겁이 없니?"



그런 티피에게 사람들은 늘 이렇게 신기하게 묻곤 한다. 하지만 티피는 동물 때문에 깜짝 놀란 적은 있지만 무서워한 적은 없다. 사람들은 왜 뱀을 한번도 만져 보지 않고 무섭다고 얘기할까? 겁내는 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선입관 때문이다. 두려움은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인간이 동물을 무서워하는 것은 동물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티피는 이야기한다. 티피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이야기하듯이 믿을 수 있는 동물과 이야기한다.



"나는 아프리카 피를 가지고 있다"



티피는 자라면서 본 모든 것을 편견없이 받아들였다. 아프리카의 동물과 나무와 사람, 자신이 자라면서 본 모든 것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나무가 착하다고 느껴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티피의 눈을 통해 보여지는 아프리카는 따뜻하고 솔직하며 기품 있다.



"나는 절대로, 절대로 길을 잃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교육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부러웠다. 10세 아이에게 이렇게 단단한 삶에 대한 희망과 상대에 대한 깊은 신뢰을 만들어준 것은 무엇일까. 티피가 동물과 함께 한 10년 동안을 수천 통의 사진으로 남긴 드그레 부부의 애정도 한몫했으리라. 책상 앞에서 노랗게 시들어 가는 우리 아이들이 읽고 넓은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



소녀 티피는 5톤이나 된 코끼리, 그녀보다 훨씬 크고 힘이 센 고양이들이 남매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와일드 한 소녀로 불리어 지고 있다. 이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실제 이야기다.



특히 아프리카 코끼리는 호전적이기로 유명하지만 티피에겐 친구일뿐이다. 맹수들과 친구인 꼬마 티피...



코끼리는 늙으면 혼자서 어딘가로 죽으러 간다. 사람들은 코끼리들이 코끼리 무덤으로 간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무덤이 정말로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코끼리들은 아무도 안 보는 곳으로 가서 아무 데나 무덤을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어떤 때는 더 못 참고 길에서 죽기도 한다. 죽음을 참으면서 가야 한다는 건 어쨌든 힘든 일이겠다.
코끼리들은 짠 눈물을 흘린다. 우리처럼.




나는 인종 차별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종 차별을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것은 대개 종교 때문이다. 누구나 세상 사람 모두가 자기 하느님을 믿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바보같다. 누구나 각자가 원하는 하느님을 믿을 권리가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인종 차별을 하는 사람들은 피부색이나 말이나 머리색이나 습관들이 서로 다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아프리카인의 피를 가지고 있지만 백인이다. 아프리카에는 백인이 많다. 피부색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지만 인종 차별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자고 내가 이 지구상에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동물 몇 마리를 구해낼 수 있다면 그것만 해도 잘 한 일일 것이다.




내 이름은 티피다. 나는 아프리카 사람이고 십년 전에 나미비아에서 태어났다. 인디언들의 티피(Tipi)를 뜻하는 그 티피냐?하고 묻는 사람들은 사전을 좀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내 이름(Tippi)에는 P자가 두개니까. 부모님이 내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티피 헤드렌이라는 미국 여배우 때문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아저씨의 너무 너무 무서운 영화 <새>에 나온 여배우 말이다.

넌 무섭지 않니? 어떻게 그렇게 겁이 없어? 이건 보는 사람마다 나에게 늘 하는 질문이다. 특히 어른들이 그런다. 물론 나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무섭다면 가까이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깜짝 놀랄 때는 있었지만, 동물을 무서워 한 적은 없다. 그건 같은게 아니다. 내가 동물을 아는 건 동물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위험한 녀석들을 일러주시기도 했다. 예를 들어 노란 코브라는 건드리면 죽는다. 그렇지만 왕뱀은 쓰다듬을 수도 있고 배를 간질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해치지 않는다. 그런 것만 알면 된다.




저 개구리인지 두꺼비인지,,, 눈빛을 보라.... 평온 그자체일쎄,,,



곰인형보다 포근한 나의 개구리!



침팬지 연구자 제인 구달의 어린 아들 그럽이 맨살로 만났던 아프리카 곰베의 느낌도 이러했을까?

『동물과 대화하는 아이 티피』는 야생동물 전문 사진작가의 딸로 아프리카에서 태어나고 자란 프랑스 여자아이 티피 드그레의 아프리카 일기이다. 티피는 부모와 함께 일정한 거주지 없이 나미비아와 보츠와나 사이의 동물 보호 구역에서 10년을 살았다. 이 책은 뱀은 징그러운 존재이고, 악어나 치타는 동물원의 맹수일뿐인 도시의 아이들과는 달리 야생의 힘바인 부족과 얼룩말, 치타와 악어를 친구나 이웃으로 삼아 살아가는 티피의 세계를 사진과 티피의 글로 보여준다.

티피는 뱀을 만지는 건 “부드러워서” 좋다고 하고, 자기 몸의 상반신 만큼 커다란 개구리를 보통의 아이들이 곰인형을 끌어안 듯 꼬옥 안아준다.

“힘바인의 재산은 염소와 암소와 황소다. …그들은 내가 진짜 힘바인이 될 수 있도록 내게 마법의 가루를 발라 주었다. 마법의 가루는 냄새가 좋지 않다. 염소 냄새가 난다.” 티피에겐 아프리카의 마법이 미개한 것이 아니며, 피부 색깔이나 종교로 사람을 차별하는 건 “바보 같다”.

금발 소녀(여성)를 야생과 대비시키는 구도는 서구 사진가들의 작품이나 영화에서 늘상 등장하는 소재라 진부한 면이 없지 않지만 티피의 천진한 모습을 보는 건 어쨋든 즐거운 일이다.




10살 꼬마와 동물의 교감 사랑ㆍ자연 무한 사진마다



동물사진 작가를 부모로 둔 덕에 아프리카 나미비아 대자연의 품에서 태어난 티피.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비비 원숭이 신디와 우유병을 나눠 먹었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살면서 티피는 동물들과 대화할 수 있게 됐다. 마치 정글북의 모글리처럼 티피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모두 동물들이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들 때문에 티피는 아주 피곤하다. 설명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글 쓰는 것, 그림 그리는 것, 노래하는 것처럼 동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재능”이라는 것이 아이의 깜찍한 정리다. 티피는 이 재능이 혼자만의 보물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책을 통해 동물과 대화하는 법을 조금씩 누설한다. 요지는 동물들과의 대화는 영혼으로 해야하며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재능이 필요하다는 티피의 말이 맞긴 맞는 것 같다.


티피에겐 동생이 있다. 바로 30세짜리 코끼리 ‘아부’. 티피가 이 코끼리와 토끼 인형 ‘노노’를 주고 받으며 놀고 있는 모습, 코끼리 코에 매달려 즐거워 하는 모습, 아부의 머리 위에 앉아 코끼리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분인 귀에 두발을 넣고 있는 모습이 ‘사진 사냥꾼’엄마 아빠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포착됐다. 뿐만 아니다. 절대로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표범 ‘J&B’와 노는 장면, 타조 ‘린다’의 등에서 우아하게 앉아 있는 모습, 새끼 사자 ‘무사파’의 입에 손가락을 빨리며 낮잠 자는 모습도 생생하다. 하나같이 인간과 야생의 교류를 보여주는 경이로운 사진들이다.


그렇다고 티피가 순진하게 이 동물들을 애완동물 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야생 동물과의 우정은 사람 사이의 우정과 아주 다르다”며 “야생이 완벽하다고 믿으면 안된다”고 티피는 충고한다. 티피는 분명 타조 ‘린다’를 사랑하지만 양념해서 말린 타조 고기도 아주 좋아한다고 스스럼 없이 말한다. 아이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부시맨의 얘기를 들려준다. “부시맨은 잡아먹기 위해 동물을 죽일 때 부족의 먹이로 생명을 내준 동물에게 항상 감사한다”고. 맹목적인 동물보호론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티피의 동물 사랑, 동물에 대한 이해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티피는 또 동물들의 사랑은 인간과는 달리 다투지 않는 사랑이며 “동물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만 가지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는데, 인간은 항상 다른 것을 바라기 때문에 문제”라고 인간사를 차분히 정리한다. 10세짜리 꼬마가 대자연에서 배운 것은 이처럼 무한하다.




“눈물자국만 봐도 치타와 표범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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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를 떠난.,두 수녀 이야기. 댓글[0]
음악 (2009-03-07 오후 5:38:34) http://blog.somang.net/revlsi/4577
출처카페 > 소망선교산악회원문http://cafe.somang.net/709/93210
 
 

소록도(少鹿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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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중앙공원


 

 




소록도 주민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일손을 놓고 성당에서 열흘 넘게 감사의 기도.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
마가레트(70) 수녀가 고국 오스트리아로 떠났기 때문.

마리안 수녀는 1959년,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
소록도에 첫발을 내딛었다.

두 수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채
환자들의 상처에 약을 발라줬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해 주고
한센인 자녀 영아원 운영 등 보육과 자활정착 사업.

정부는 두 수녀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을 수여.
두 수녀는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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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 온 
두 수녀가 마지막으로 남긴.,짤막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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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늘 말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일에 대해서
이 편지로(나마)., 용서를 빕니다”

 
 


김명호(56) 소록도 주민자치회장


“주민에게 온갖 사랑을 베푼
두 수녀님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였다”

“작별인사도 없이 섬을 떠난 두 수녀님 때문에
섬이 슬픔에 잠겨 있다” 
 

 

 


마가레트 수녀(왼쪽)
마리안 수녀(오른쪽에서 두 번째).


오스트리아 간호학교를 나온 두 수녀는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소속 수녀회를 통해 1962년과 66년 소록도에 왔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다.

오후엔 죽도 쑤고
과자도 구워 들고
마을을 돌았다 한다.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
꽃다운 20대부터 수천 환자의 손과 발로 살아
일흔 할머니가 되자 "할매"라 불리웠던 두 수녀.


숨어 어루만지는 손의 기적과, 주님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는 베품이 참베품임을 믿었던 두 사람 
인터뷰를 물리쳤고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사양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온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병이 나은 사람들에게 노자
 



" 이제는 70세가 된 마리안 수녀 "

두 분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어져가는 섬과 사람들을 멀리서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20대부터 40년을 살았던., 소록도였기에,
소록도가 그들에게는., 고향과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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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간 고향 오스트리아
도리어 낯선 땅이 되었지만,
 
3평 남짓 방 한 칸에 살면서
방안은 온통., 한국의 장식품.
소록도 꿈을., 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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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 성당 입구
"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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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주민들이 거주하는.,마을




소록도(少鹿島).,쪽빛 바다



녹동항과 소록도를 이어주는.,배
 






소록도 관문.,녹동항


 


 

 
고흥반도 지도
 
전라남도 동남부에서 남해안으로 돌출한 반도
전라남도 고흥군과 보성군 일부 지역에 속한다
고흥군 도화면에서 보성군 벌교읍까지 약 95km.




마리안 수녀 추억 속에 남아있을.,고흥 바닷가 풍경 -1
 

 
고흥 바닷가 풍경 - 2


 
고흥 바닷가 풍경 - 3

 
외나로도 포구 섬마을 풍경 - 4.
 


 

                                           순천만·보성만·득량만·여자만·해창만  - 5.

 
마리안 수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풍경들
 

우리나라의 전통정원이자

마리안 수녀 마음 속., 고향.



마리안 수녀(71)

 마거릿 수녀(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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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009-03-07 오후 5:23:54) http://blog.somang.net/revlsi/4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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