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20 오전 8:48:30)http://blog.somang.net/holylove/7895
변화를 기대하십시오.
본문: 요 2:1-11, 찬송가: 289장(통) 208장, 찬송 421장(통 210장)
철저하게 기독교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우습게 여기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핍박하던 친척이 있었습니다. 그는 두 개의 회사를 경영하며 별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진찰을 받았는데 탁구공 크기의 뇌종양이 생겼고 말기로 판명되었습니다. 소생의 희망은 거의 없었고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술 날짜를 정한 이틀 전 토요일 저녁에 한 전도자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으며, 통증이 멎었고 무엇인가 자기 몸에 큰 변화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월요일 아침 수술을 받기 직전에 의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다시 사진 촬영을 했는데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생활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붙들리면 누구나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 22- 24)
형 에서와 부친 이삭을 속인 야곱이 고향을 떠나 외삼촌집으로 도망한 후에 2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는 거기서 4명의 여자에게서 11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고, 소와 양이 심히 많은 거부가 됐습니다. 그가 외삼촌집을 도망쳐 나와 얍복강 나루에 이르렀을 때, 강 건너에서 에서가 4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칼을 빼들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강을 건너기 전에 홀로 남았습니다. 인간의 관계를 깨달으며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사자를 붙들고 자기를 축복해 달라며 매달렸습니다. 천사가 그의 환도 뼈를 쳐서 위골시켰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라 하였습니다. 간교한 옛 야곱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부활생명으로 거듭났습니다. 내가 변할 때 상대방도 변합니다. 역사의 강을 건너기 전에 구습을 좇는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새 역사는 새 사람의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 10절에 나오는 세상 속의 세리장 삭개오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가졌으나, 자기 인생에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을 통해서 구원과 생활의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예수님을 만나면 다 해결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변화 시킵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 생명의 능력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는 이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듯이, 인생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고인 물은 썩지만, 포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값어치가 나갑니다.
어떻게 변화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항아리의 손 씻는 물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극상품의 포도주로 변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만난 인생은 변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언제 변화합니까? 순종할 때 변화합니다. 잔치집의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항아리에 물을 채웠고, 연회장에게 떠다 주었을 뿐입니다.
정말 변화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변화를 기대하십시오. 변화는 기대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데서 그들은 실망하고,그 실망은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무엇일까요? 미국 하버드 대학 교육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목마름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애타게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변화를 기도하고,기대하십시오.
* 기도: 날마다 새로운 삶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우리의 속된 것, 죄악된 것을 바꾸어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온전히 거듭나게 하사 주님의 것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댓글[0]
행복
(2013-07-14 오후 6:01:35)http://blog.somang.net/holylove/7891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본문: 시144:15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복을 추구하며, 아니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행복할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아니하며, 불평불만에 집중하고 있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쾌락과 방종 혹 강인한 무언가에 자신의 몸을 의지한 채 잠시간의 행복감(?)을 갖기도 합니다.
“저는 행복을 몰랐습니다. 행복한지 불행한지 제 마음과 제 감정을 정말 몰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행복과는 상관없이 살았던 것 같네요. 늘 아버지한테 죽을 만큼 맞고, 형한테도 지독하게 맞고,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삶이었어요. 그래서 그랬나봅니다. 아내한테도 자식한테도 늘 비난만 하고, 모든 게 다 거슬리고… 이제는 가족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가 되었어요. 제 감정을 억누르고 살았는데, 이제 그것을 알겠네요…. 이제라도 행복하게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의 노인이 상담실을 찾아와 비통한 심경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는 황혼 이혼을 요구하고 있고, 자녀들은 모든 불행을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면서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10년 혹은 20년 더 남았다면 늦지 않았습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노인은 70평생에 한 번도 울지 못한 울음을 목 놓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학대 받았던 경험,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버림받고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눈칫밥을 먹었던 기억,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가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고생했던 기억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고 늘 무시만 당해왔던 수많은 고통의 기억들을 들추어내면서 그동안 억제하고 참고 참았던 분노와 슬픔의 눈물을 쏟아내었습니다.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해야 했는지, 왜 그토록 뭔가에 집착했는지, 아내를 못 살게 굴었는지, 자녀들을 그렇게 매몰차게 대하고 심하게 매질을 했는지, 왜 그토록 쫓기듯 살았는지, 왜 그렇게 열흘 굶은 것처럼 늘 마음이 공허하고 텅 빈 것 같았는지, 그 모든 것들을 탐색해가면서 자신의 억눌러져서 곪아터진 마음 밑바닥의 감정과 정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보니, 자신의 옆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어 더욱 외로워지고, 자녀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심경을 토로할 수 없는 아픔을 진솔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상담 치료를 하는 동안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분의 마음에 평안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도 미세하나마 이분의 변화를 눈치채기 시작했습니다. 행복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 14)
어느 해 국내 굴지의 그룹의 회장 딸이 미국에서 자살했다는 내용의 뉴스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부자집 딸이고 명문대학에 유학 중인 그녀가 무슨 힘든 일이 있기에 스스로 자살한 것일까. 그 이유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촌 어디에도 인간의 삶 가운데는 진정한 행복이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이룰 수 없던 그 행복이 주어지는 곳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와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마음의 불행을 걷어내면 행복한 느낌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거나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그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두렵기 때문입니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감정 자체가 두렵습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느낌을 먼저 느껴야 불행에 대한 수많은 심리적 파편들이 치료가 되어집니다. 행복은 늘 우리들 곁에 있습니다. 단지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불행이나 고통의 감정을 부인하면 행복도 느낄 수 없습니다. 슬픔, 고통, 수치심, 열등감, 우울감, 분노 등의 수많은 부정적 감정은 회피하면 할수록 우리들 마음 내부를 휘저어 놓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행복한 감정을 못 느끼도록 방해를 합니다. 자신의 진짜 감정과 만나서 그것을 주님 앞에 꺼내어 놓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행복감과 만나게 됩니다.
벨기에의 극작가 마테를링크는 1908년 파랑새라는 동화극을 발표했습니다.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 형제가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하며 파랑새를 찾았지만, 파랑새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형제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 그렇게 헤매고 찾아다니던 파랑새는 자기 집 새장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옛말에 길은 가까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행복도 가까운 데 있지만. 사람들은 그 행복을 가까운 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먼 곳에서 찾으려 애를 씁니다. 행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34:9)
행복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모습일까요? 돈 많은 부자, 모든 권세를 가진 사람,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남자, 많은 지식을 가진 부모, 외로운 고아, 아무것도 없는 거지,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행복 추구방법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직접적인 복을 주시기보다는 좀 더 한걸음 나아간 행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를 들면, 기도를 하고 말씀을 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되고 찬양하는 중에 나의 것들을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며, 전도중에 오는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예수님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동참하였다는 뿌듯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가 나의 노래가 되고, 찬양이 나의 생활이 되고 예배가 나의 주권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백성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 16- 18)
행복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행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행복을 심고, 행복의 농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포도나무이십니다. 말씀은 영원한 생명나무입니다. 마음에 예수를 심는 자, 마음에 말씀을 심는 자는 그 나무로부터 날마다 기쁜 노래, 복음의 노래를 듣게 될 것입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리라”(잠16:20)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행복지수가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Helper's high 라고 명명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봉사와 사랑의 대명사 같은 존재입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실험한 바로는 마더 테레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침에 들어있는 면역항체가 뚜렷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반면 근심이나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침이 마르면서 이 면역항체가 확실히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남을 사랑하고 돕는 활동을 통해 일어나는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변화에 대해 ‘마더 테레사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남을 위해 봉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의 선행을 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 기능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이릅니다.
행복은 인생의 정도를 갈 때에만 비로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내 가까이에 있는 행복의 씨앗을 어떻게 심고 가꾸는 가에 달려있습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시편 1장 말씀대로 환경과 여건에 관계없이 주 안에서 의롭고 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마5: 3-5)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세계의 많은 명화 중 우리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19세기 작품인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만종'이라 하겠습니다. 한 젊은 부부가 하루 종일 밭에서 땀흘려 일하다가 황혼이 될 무렵 하던 일을 멈추고 엄숙하고 경건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은 인간의 숭고한 사랑과, 노동과 종교가 혼연일체가 된 성스러운 면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가정도 원만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요소가 반드시 구비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노동을 떠나서는 생명을 유지, 보존할 수 없고 사랑이 없는 노동은 고역스러울 뿐인데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국의 식민 정치가였던 '쎄실 존 로즈'는 건강 관계로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가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고 큰 거부가 되었던 사람인데 그의 재산은 600만 파운드의 다이아몬드를 옥스포드 대학의 장학기금으로 기증할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잠시 영국으로 귀환하였을 때에 구세군의 2대 대장이었던 부드 장군과 기차로 여행할 기회가 있어 담화하던 중, 부드 대장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고 생각되십니까?"하고 묻자 로즈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행복이라니요?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하고 반문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드 대장은 다시 말하기를, "천하에 진실로 행복한 곳은 오직 한곳뿐인데 그 곳은 주님의 십자가 슬하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만이 우리의 죄가 사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전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인생일기'란 책에도 보면 프랑스의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의 말을 인용,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속세적인 행복을 찾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기진맥진 한 두 팔을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씀했고,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이전에 바라고 따르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한때 인간들은 자연을 공경의 대상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이유는 자연을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움직이는 자존적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헤라클레토스가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라고 한 다음부터 진정한 행복을 영원불변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에 두고 그 세계로 가기 위해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선행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부정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성도가 몸은 세상에 속해 있어도 마음은 천국에 두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시민권이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밀려오는 파도에 쉬 무너지는 모래성을 쌓는 것이 행복일수 없듯이 쉽게 없어지는 인생의 탑을 쌓는 것 역시 행복일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예수 안에 살면서 천국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존 웨슬레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이란 없다”고 했고, 아브라함 링컨도 “행복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므로, 서로 사랑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사는 인생의 행복자, 신앙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행복의 근원되신 주님! 주님을 믿음으로 행복을 찾고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물질에 매여 진정한 행복을 상실하지 않도록 인도하소서. 돈을 사랑치 말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따름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서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댓글[0]
행복
(2013-07-14 오후 6:01:35)http://blog.somang.net/holylove/7890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본문: 시144:15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복을 추구하며, 아니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행복할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아니하며, 불평불만에 집중하고 있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쾌락과 방종 혹 강인한 무언가에 자신의 몸을 의지한 채 잠시간의 행복감(?)을 갖기도 합니다.
“저는 행복을 몰랐습니다. 행복한지 불행한지 제 마음과 제 감정을 정말 몰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행복과는 상관없이 살았던 것 같네요. 늘 아버지한테 죽을 만큼 맞고, 형한테도 지독하게 맞고,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삶이었어요. 그래서 그랬나봅니다. 아내한테도 자식한테도 늘 비난만 하고, 모든 게 다 거슬리고… 이제는 가족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가 되었어요. 제 감정을 억누르고 살았는데, 이제 그것을 알겠네요…. 이제라도 행복하게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의 노인이 상담실을 찾아와 비통한 심경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는 황혼 이혼을 요구하고 있고, 자녀들은 모든 불행을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면서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10년 혹은 20년 더 남았다면 늦지 않았습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노인은 70평생에 한 번도 울지 못한 울음을 목 놓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학대 받았던 경험,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버림받고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눈칫밥을 먹었던 기억,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가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고생했던 기억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고 늘 무시만 당해왔던 수많은 고통의 기억들을 들추어내면서 그동안 억제하고 참고 참았던 분노와 슬픔의 눈물을 쏟아내었습니다.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해야 했는지, 왜 그토록 뭔가에 집착했는지, 아내를 못 살게 굴었는지, 자녀들을 그렇게 매몰차게 대하고 심하게 매질을 했는지, 왜 그토록 쫓기듯 살았는지, 왜 그렇게 열흘 굶은 것처럼 늘 마음이 공허하고 텅 빈 것 같았는지, 그 모든 것들을 탐색해가면서 자신의 억눌러져서 곪아터진 마음 밑바닥의 감정과 정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보니, 자신의 옆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어 더욱 외로워지고, 자녀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심경을 토로할 수 없는 아픔을 진솔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상담 치료를 하는 동안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분의 마음에 평안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도 미세하나마 이분의 변화를 눈치채기 시작했습니다. 행복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 14)
어느 해 국내 굴지의 그룹의 회장 딸이 미국에서 자살했다는 내용의 뉴스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부자집 딸이고 명문대학에 유학 중인 그녀가 무슨 힘든 일이 있기에 스스로 자살한 것일까. 그 이유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촌 어디에도 인간의 삶 가운데는 진정한 행복이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이룰 수 없던 그 행복이 주어지는 곳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와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마음의 불행을 걷어내면 행복한 느낌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거나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그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두렵기 때문입니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감정 자체가 두렵습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느낌을 먼저 느껴야 불행에 대한 수많은 심리적 파편들이 치료가 되어집니다. 행복은 늘 우리들 곁에 있습니다. 단지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불행이나 고통의 감정을 부인하면 행복도 느낄 수 없습니다. 슬픔, 고통, 수치심, 열등감, 우울감, 분노 등의 수많은 부정적 감정은 회피하면 할수록 우리들 마음 내부를 휘저어 놓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행복한 감정을 못 느끼도록 방해를 합니다. 자신의 진짜 감정과 만나서 그것을 주님 앞에 꺼내어 놓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행복감과 만나게 됩니다.
벨기에의 극작가 마테를링크는 1908년 파랑새라는 동화극을 발표했습니다.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 형제가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하며 파랑새를 찾았지만, 파랑새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형제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 그렇게 헤매고 찾아다니던 파랑새는 자기 집 새장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옛말에 길은 가까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행복도 가까운 데 있지만. 사람들은 그 행복을 가까운 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먼 곳에서 찾으려 애를 씁니다. 행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34:9)
행복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모습일까요? 돈 많은 부자, 모든 권세를 가진 사람,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남자, 많은 지식을 가진 부모, 외로운 고아, 아무것도 없는 거지,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행복 추구방법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직접적인 복을 주시기보다는 좀 더 한걸음 나아간 행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를 들면, 기도를 하고 말씀을 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되고 찬양하는 중에 나의 것들을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며, 전도중에 오는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예수님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동참하였다는 뿌듯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가 나의 노래가 되고, 찬양이 나의 생활이 되고 예배가 나의 주권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백성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 16- 18)
행복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행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행복을 심고, 행복의 농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포도나무이십니다. 말씀은 영원한 생명나무입니다. 마음에 예수를 심는 자, 마음에 말씀을 심는 자는 그 나무로부터 날마다 기쁜 노래, 복음의 노래를 듣게 될 것입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리라”(잠16:20)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행복지수가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Helper's high 라고 명명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봉사와 사랑의 대명사 같은 존재입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실험한 바로는 마더 테레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침에 들어있는 면역항체가 뚜렷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반면 근심이나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침이 마르면서 이 면역항체가 확실히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남을 사랑하고 돕는 활동을 통해 일어나는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변화에 대해 ‘마더 테레사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남을 위해 봉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의 선행을 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 기능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이릅니다.
행복은 인생의 정도를 갈 때에만 비로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내 가까이에 있는 행복의 씨앗을 어떻게 심고 가꾸는 가에 달려있습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시편 1장 말씀대로 환경과 여건에 관계없이 주 안에서 의롭고 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마5: 3-5)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세계의 많은 명화 중 우리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19세기 작품인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만종'이라 하겠습니다. 한 젊은 부부가 하루 종일 밭에서 땀흘려 일하다가 황혼이 될 무렵 하던 일을 멈추고 엄숙하고 경건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은 인간의 숭고한 사랑과, 노동과 종교가 혼연일체가 된 성스러운 면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가정도 원만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요소가 반드시 구비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노동을 떠나서는 생명을 유지, 보존할 수 없고 사랑이 없는 노동은 고역스러울 뿐인데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국의 식민 정치가였던 '쎄실 존 로즈'는 건강 관계로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가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고 큰 거부가 되었던 사람인데 그의 재산은 600만 파운드의 다이아몬드를 옥스포드 대학의 장학기금으로 기증할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잠시 영국으로 귀환하였을 때에 구세군의 2대 대장이었던 부드 장군과 기차로 여행할 기회가 있어 담화하던 중, 부드 대장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고 생각되십니까?"하고 묻자 로즈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행복이라니요?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하고 반문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드 대장은 다시 말하기를, "천하에 진실로 행복한 곳은 오직 한곳뿐인데 그 곳은 주님의 십자가 슬하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만이 우리의 죄가 사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전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인생일기'란 책에도 보면 프랑스의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의 말을 인용,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속세적인 행복을 찾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기진맥진 한 두 팔을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씀했고,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이전에 바라고 따르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한때 인간들은 자연을 공경의 대상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이유는 자연을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움직이는 자존적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헤라클레토스가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라고 한 다음부터 진정한 행복을 영원불변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에 두고 그 세계로 가기 위해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선행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부정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성도가 몸은 세상에 속해 있어도 마음은 천국에 두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시민권이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밀려오는 파도에 쉬 무너지는 모래성을 쌓는 것이 행복일수 없듯이 쉽게 없어지는 인생의 탑을 쌓는 것 역시 행복일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예수 안에 살면서 천국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존 웨슬레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이란 없다”고 했고, 아브라함 링컨도 “행복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므로, 서로 사랑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사는 인생의 행복자, 신앙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행복의 근원되신 주님! 주님을 믿음으로 행복을 찾고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물질에 매여 진정한 행복을 상실하지 않도록 인도하소서. 돈을 사랑치 말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따름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서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댓글[0]
마음, 정신, 생각
(2013-07-12 오후 6:30:25)http://blog.somang.net/holylove/7885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본문: 고전13: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차 두 대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고통받는 사람을 도와 주려고 달리는 앰블런스였고, 또 한 대는 최신식 모델의 세단이었으나, 차선을 마구 달리면서 다른 차를 추월하고 중앙선을 침범하여 위험스럽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남의 귀중한 생명을 빼앗을 사고를 저지르고 말 형세였습니다. 이들 두 대의 차량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에서 왔을까요? 엔진? 차체의 모양? 값의 차이? 아닙니다. 유일한 차이는 누가 운전석에 앉아 있느냐 였습니다. 하나는 사랑과 봉사의 목적을 가진 사람이었고 또 하는 술취한 운전사였습니다.
부정적이고 더럽고 악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과 긍정적이고 성령 충만하여 좋은 열매가 가득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과의 삶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삶의 운전석에 앉아서 운전을 하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우리는 1초 후의 일도 알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운전수는 창조주이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까? 아니면 유한하고 지치고 무거운 짐진 괴로운 나 자신입니까? 허물과 질병, 미움과 질투의 교차로를 달리면서 생의 목적지도 모른 채 황급하게 내달리기만 하려 하는 나 자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영생의 지도인 성경을 펴놓고 인도하시는 사랑의 목자 예수님이신가요? 삶의 운전석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마음의 조정실의 열쇠를 전능하신 사랑의 왕 예수님께 드리고 그 보좌에 앉으시게 하십시오. 그가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왕좌인 심령에 거처를 가지실 뿐 아니라 그 보좌에 앉아 결정자가 되게 하십시오. 마음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습관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내 마음을 주님께서 운전하게 하십시다. 그리하면 영원한 생명의 길, 복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시편 37편 4- 6절에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그리고 잠언 23장 7절을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너더러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니라'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 곧 그 사람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가치있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려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까요?
1. 육적인 생각을 영적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옆을 보니 "POISON"(독약이라는 뜻)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배가 아프기 시작하여 병원으로 달려 갔습니다. 이제 곧 창자가 다 녹아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의사는 진단을 마치고, 또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껄껄 웃었다. "'POISON'은 영어로는 '독약'이지만 불어로는 '낚시금지'라는 말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나이아가라 폭포 옆에서 하도 많이 낚시질을 해서 프랑스 사람들 보라고 'POISON'이라고 적어 놓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그 사람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독약이 그를 아프게 했다가 치료가 그를 안아프게 한 것이 아니라, 그를 아프게 한 것도 안 아프게 하였던 것도 모두 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육신의 일만 생각합니다. 즉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높은 지위를 차지할까? 어떻게 하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어떻게 하면 기도와 전도를 많이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성경에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잠24:9) 라고 하였고,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시끄럽고 살기 어렵습니까? 흔히 환경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환경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악하고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고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10)
성도 여러분, T.V 너무 자주 보지 마십시오. 우리나라 T,V 제작진은 대부분 비기독교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T.V를 통해 세상의 악한 마음과 생각을 심어 줍니다. 이 시대에 가장 힘있는 권력자는 누구일까요? 사람이 아닌 텔레비전이라는 기계입니다. 텔레비전은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고, 보여주지 못하면 시청률이 떨어져서 사람들의 외면을 받습니다. 정상적인 것을 보여줘서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은 언제나 비정상적인 것, 자극적인 것, 호기심을 끄는 것들을 찾아 보여주기에 급급합니다. 예를 들어 개가 사람을 물면 그것은 뉴스거리도 안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개를 물었다 하면 금방 호들갑스러운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인 것 마냥 사람들의 뇌 속에 정보가 저장됩니다. T.V에서는 부동산 투기로 돈번 것을 성공과 축복으로,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이 전통문화요, 미풍양속으로, 진화론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말합니다. 이런 T.V를 보면 세상의 악한 생각이 자신도 알게 모르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오염시키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어느새 '바보상자'에 길들여지고 텔레비전이 하는 말은 진리이고 법이고 표준이고 기준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는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2:16)
사탄은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악한 생각을 주어서 악한 일을 하게 하고 음란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음란한 생각을 주어 음란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거짓된 사람에게는 거짓된 생각을, 불의한 사람에게는 불의한 생각을 자꾸 넣어줍니다. 교만한 사람에게 자랑하는 생각을 주어 잘난 체하게 합니다. 모든 문제는 부패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우리 마음에 성령 충만한 생각으로 가득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귀히 쓰십니다. 즉 교만, 거짓, 음란, 탐심, 나태한 생각을 버리고,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절제, 양선, 충성, 자비, 오래참음, 긍휼, 청결, 의로운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2.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어떤 곳에 아들 둘을 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우산 장사이고 작은아들은 짚신장사였습니다. 이 할머니는 두 아들의 장사 때문에 매일 매일을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날이 개여 햇볕이 쬐는 날이면 큰아들의 장사가 안될 것을 걱정해야 했고, 그러다가 비라도 쏟아지는 날이라면 작은아들의 장사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해가 떠도 걱정, 날이 흐려도 걱정이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한 동네 청년이 할머니를 위로하며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날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할머니, 그렇게 나쁜 것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좀더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여, 만일 해가 뜨면 작은아들의 장사가 잘 될 것을 기뻐하고 비가 오면 큰아들의 장사가 잘 될 것을 기뻐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비가와도 걱정이 없고 해가 떠도 걱정이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똑같은 현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따라 가지게 되는 생각"입니다. 즉 현재의 상황만 보고 판단하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홍해 앞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고, 가나안을 정탐한 10명의 정탐꾼들이 그랬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보았을 때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대기업에서 아프리카 진출을 위한 시장조사를 위해 2명의 사원을 현지에 보냈습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 신발을 수출하기 위한 사전 조사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조사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사장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발을 신은 사람이 없습니다. 무한한 시장성을 갖고 있습니다."라는 긍정적인 보고와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켤레의 신발도 팔 수 없습니다."라는 부정적인 보고였습니다.
술이 반쯤 들어있는 컵을 보고 어떤 사람은 반 밖에 안 남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고 말합니다. 같은 사물이라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예수 안경으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 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전10:2)
성도들은 현재의 상황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삶과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현재의 환경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하나님께서 살리고자 하시면 살리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불안을 가져오고 쓸데없는 근심 걱정에 빠지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고 말씀하셨고 성경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늘 좋으신 분이시며 평안과 소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에 대해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만 찾으면 살 길이 열립니다. 진심으로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하나님을 만날 것이며 우리를 널리 용서하고 축복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참으로 좋으신 아버지"이시며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욥이 그랬고 요셉과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랬습니다. 결국 모든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는 "마음과 생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잘못된 생각은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며, 기운을 뺍니다. 용기를 없애며, 담력을 잃게 합니다. 또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환란과 절망의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
3. 소극적인 생각을 적극적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미국이 경제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펜실베니아에 월터 하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직장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는 뉴욕에만 3백93개의 체인점을 가진 약국에 3백93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약국에서 성실하게 일하겠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나 단 한통의 답장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월터 하비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입사 지원서를 들고 약국을 찾아갔습니다. 직원에게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월터 하비입니다...." 담당직원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찾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이곳에 선생님이 보낸 3백93 통의 편지를 모아놓았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처럼 적극적인 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월터는 그날부터 약국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최고 관리직에 올랐습니다. 기회는 노력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기회의 문이 항상 열려있습니다. 성공과 승리와 행복의 비결은 적극적인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정신의 소유자라야 세상에서 큰 업적을 이루고 사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됩니다.
학교에서 보면 적극적인 학생은 앞자리에 앉고 공부도 잘합니다. 연애도 적극적인 사람이 결혼을 잘합니다. 교회에서도 적극적인 성도가 전도도 잘하고 신앙생활도 잘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미국의 소매상협회에서 세일즈맨의 거래실적과 집념의 상관관계를 연구, 공개했습니다. 물건을 판매할 때 세일즈맨 중 48%는 단 한번 권유하고 포기합니다. 두 번 권유하는 사람은 25%였습니다. 세 번 권유하는 세일즈맨은 15%였습니다. 세일즈맨 중 오직 12%만이 네 번 이상 권유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네 번 이상 권유하는 12%의 세일즈맨이 전체 판매량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88%의 세일즈맨이 판매한 상품은 고작 20%에 불과했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습니다. 상품을 판매하는데도 이런 무서운 집념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물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야 오즉하랴. 어떤 사람은 서너 번 전도해 보고 낙담해 '안 믿으면 저만 손해지, 뭐'라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성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프로 세일즈맨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프로는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내하며 최선을 다합니다.
영국의 정신병 학자인 하드필드가 밝힌 실험 결과는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그의 실험은 사람의 정신 암시가 육체의 힘에 얼마만한 영향을 주는 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3명의 남자에게 보통의 상태에서 힘껏 악력계를 쥐게 했을 때 그들의 평균 악력은 101파운드였는데 그들에게 '당신은 참으로 약하다.'고 암시를 준 후 다시 재어보았더니 겨우 29파운드로 보통 힘의 1/3 이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당신은 강하다.'는 암시를 준 후 재어 보았더니 무려 142파운드에 달하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실험은 나는 강하다는 적극적인 정신 상태로 충만해지자 그들의 체력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었던 상태 때보다 무려 500%나 그 힘이 증가했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난 약하다, 난 못한다.'는 마음으로 포기하려는 유혹만큼 우리를 쉽게 쓰러뜨리는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난 강하다, 난 해낼 수 있다.'는 마음으로 바꾸기만 한다면 포기해버릴 때보다 다섯 배는 나아질 것입니다.
4. 나 중심의 생각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큰 성전을 짓는데 세 사람이 석공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임금을 받으며, 똑같은 일을 합니다. 한 사람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왜 그렇게 힘든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한 명은 "돈 벌기 위해 일하고 있다고 했고, 또 한 명은 집짓기 위해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 모두의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누가 가장 즐겁고 가치있는 생각을 가지고 일하고 있을까요?
빌립보서 1:21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하였습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고전10:31)
마가복음 8장 35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였습니다. 나를 위해 살지 말고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남(이웃)에게 사랑과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남에게 사랑을 베풀고 주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항상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과 악의 갈림길은 나 좋은 것, 나 원하는 것만 생각하면 악으로 넘어가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면 선으로 넘어 갑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언행은 그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옵니다. 즉 그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에게서 나오는 말과 행실도 악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마음과 정신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실로 중요합니다. 즉 마음은 나의 주인이요, 근본이고 정신은 인생의 방향타요, 운명의 운전수요, 생활의 지배자입니다. 인생은 마음을 갈고 닦는 도장이요, 정신을 다듬는 수련장입니다. 칼이 의사의 손에 쥐어지면 사람의 생명을 건지는 수술도가 되고 어머니의 손에 쥐어지면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강도나 도둑놈의 손에 쥐어지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흉기로 전락합니다. 칼이 선의 도구가 되느냐 악의 도구가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칼 자체가 아니고 칼을 쓰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바리세인과 서기관 중 몇이 예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힐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못하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시며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막7:1-23)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회개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합니다.
5. 어린 아이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처럼 이제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은 생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리심이라"(빌2: 5- 8)
옛날 교회 전도지를 보면 사람 가슴판에 뱀, 돼지, 여우, 개, 늑대 등이 그려져 있고 후에 말씀과 복음이 들어가자 이 동물들이 다 쫓겨나고 그대신 가슴에 예수님이 좌정하는 그림이 들어있는 전도지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개, 돼지, 뱀, 여우, 늑대 등을 내 쫓아야 합니다. 즉 우리 마음을 더럽히는 음욕, 탐심, 시기질투, 교만, 분노와 혈기, 미움, 거짓, 도적질, 간음, 살인 등을 깨끗이 회개하고 비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깨끗이 하여 그냥 비워두면 안됩니다. 그냥 비워두면 더 악한 것들이 들어옵니다. 그릇이 그냥 빈 채로 있으면 무엇이든 담기게 됩니다.
마태복음 12장 43- 45절과 누가복음 11장 24- 26절에 더러운 귀신이 나가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자 저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잠언4: 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하였습니다. 마음을 지키려면 마음속에 올바른 마음, 좋은 생각으로 채워져야 새사람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 가? 입니다. 수양이나 교육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다소의 영향을 주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야 올바른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마태복음 11장 29절을 모두 찾으시고 읽어봅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찬송가 507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1.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2. 주 모습 내 눈에 안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3.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주님의 마음 본 받음이라
4.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날엔 뭇성도 변화하여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후렴]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 거짓, 음란, 탐욕, 의심 등을 쫓아 버리고 그 대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 충만 즉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절제, 양선, 충성, 자비, 오래 참음, 긍휼, 청결, 의로운 마음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곧 성령의 마음이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음속에 있습니다. 내 마음을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고, 성령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과 사랑이 가득한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하나님 나라의 것으로 변화하면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유가 그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예수님의 마음과 가까웠기 때문입니다.(행13:22, 삼상13:14)
마틴 루터는 "우리가 매일 거울을 보고 수염을 깎듯이 우리 마음을 다듬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성경을 자주 보고 마음을 깨끗이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의 방입니다. 마음에 무엇을 담아 두느냐, 마음에 누가 함께 하고 있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들이 지내는 방에 밥상을 놓으면 식당이 됩니다. 책상을 갖다. 놓으면 공부방이 되지요 방석을 깔면 응접실이 되고, 이불을 깔면 침실이 됩니다. 요강을 갖다 놓으면 화장실도 되고 화투를 치려고 담요를 깔아 놓으면 금세 도 박장이 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는 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 지에 따라 많이 달라지지요 우리들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을 우리 마음의 방에 영접하면 평안가운데 삶이 새로워집니다. 변화된 삶 속에 확신이 생깁니다. 날마다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기쁨이 넘치며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옆에 앉아 계신 성도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우리 적극적인 마음을 가집시다. 우리 긍정적인 마음을 가집시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읍시다."
좋은 것이 좋게 여겨지지 않고 감사 할 것이 감사함이 아니라 불평으로 짜증으로 지겨움과 싫음으로 내 생활 속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상황 때문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내 마음이 문제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부모탓이고 상대 때문이지 내 마음의 잘못은 아니라고 철저하게 믿습니다. 내 마음에 평화와 즐거움이 사라지고 주변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고 감미로운 음악도 귀에 거슬릴 뿐이라면 사는 것이 재미가 없고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뭔가를 놓치고 있거나 잘못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하루 하루를 겨우겨우 지탱하고 있으려니 사는 것이 얼마나 따분하고 지겹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만난 문제를 깊이 생각하길 귀찮아하고 해결책을 찾아보고 개선책을 마련하기보다는 대충대충 지나가려는 게으름의 병이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루도 새로운 날이 없이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똑같이 무감각과 무책임 속에서 살다보니 몸은 젊은데 마음은 이미 꿈을 잃고 늙어버린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좀더 잘해보자 좀더 달라져보자는 욕심을 가질 때 그 사람은 일이나 공부에 의욕이 생기게 되고 의욕을 가진 사람은 모든 일에 적극적입니다. 그 결과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고 현실에 편안하게 머물러 있기보다는 앞을 향해 가는 힘을 스스로 갖게 됩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나의 미래는 바뀌게 되어 있고 몸도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만나는 모든 일들이 모든 사람들이 새롭고 다릅니다. 잘못된 생각, 비뚤어진 생각이 나를 엉망으로 만들고 싸구려 인생으로 전락시키고 손해도 보게 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에 나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기쁨이 없다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환경이나 내 주변의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서 한 부분이 고장을 일으켜 모든 것을 시들하고 재미없게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고치고 나의 생각을 고치면 사는 것이 달라지고 재미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게 되고 견딜 수 없는 고통마저도 견디게 되는 힘이 생깁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사람을 바꾸는 지름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시대를 바로 잡고 치료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고 순결해질 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셨던 원래의 그 마음, 새 마음으로 돌아갈 때 가정도 사회도 나라도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무너져 가는 교육도 학생들의 마음을 치료해 주고 회복시켜 줄 때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축복과 보화는 마음에 있습니다. 구원받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이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도 마음입니다. 천국은 마음 안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주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은 천국이 되고, 주님이 함께하는 성도의 생활은 항상 부유하고 행복하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물질에서 찾고 마음 밖에서 찾지만 세상의 것을 다 가진다해도 행복과 만족이 내 마음 안에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을 돌보지 않아서 우리의 마음은 너무 황폐하고 병들고 더러워지고, 원망, 불평, 교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쓸모 없이 되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로마가 멸망한 것은 사람이 비인격적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세계를 점령하고 군사력도 세계에서 제일 막강했던 로마였지만 정신적으로 타락하고 인격이 무너지고, 감사와 평안이 없고 쾌락을 좋아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할 때 그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아무리 많이 발전해도 우리의 인격과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잘못되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탈리아의 문인 파프니가는 "오늘날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다"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얼마나 잘 먹고 건강을 잘 챙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아무리 잘 먹고 건강해도 병은 마음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건강한 사람이 되고 마음이 복을 받아야 복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마음은 두 마음을 함께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나쁜 마음과 함께 주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유함을 얻어서 내 원수라도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복된 마음이 되며, 이 마음이야말로 참으로 귀하고 부유한 재산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대적이 우리 마음을 넘어뜨리려 할지라도 내 마음을 끝까지 잘 지키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격언에도 "마음이 앞서면 발걸음도 가볍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가면 모든 것이 가게 되고 피곤하거나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안 가면 괴롭고 힘이 듭니다. 우리는 흔히 "잘 살면 마음도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편히 살면 마음을 다스리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내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주님이 주신 은혜를 내가 잘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제 내 마음의 관리를 잘 할 때 이 사회, 이 나라가 좋아질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내 마음을 찾고 내 마음을 잘 지킬 때 자신도 행복해지고 가정과 교회도 잘되고, 사회도 아름답게 됩니다. 이 나라가 잘 되는 길은 예수님 잘 믿고 예수님 본받아 사는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천국을 이루어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죄 때문에 심판 받고 지옥 갈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저의 죄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아 주신 것을 믿습니다. 이 시간 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제 마음 속에 오셔서 지금부터 저의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시고 천국갈 때까지 나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나의 죄를 씻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겸손과 온유와 순종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예’만 하셨듯이 우리도 긍정적인 생각과 삶의 자세로 복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오직 예수님만이 댓글[0]
하나님, 창조
(2012-11-03 오후 7:20:26)http://blog.somang.net/holylove/7592
오직 예수님만이
본문: 요14: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탈리아의 한 화가가 도자기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최후의 만찬을 그려서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도하고자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온갖 정성을 들여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정말 영감 있는 주님의 모습, 빛나는 주님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 그려진 도자기를 본 친구는 그녀가 그린 예수님의 모습은 본 척도 않고 도자기의 아름다움만을 칭찬했습니다. 그 화가는 친구의 말을 듣고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고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얼굴은 가리워지고 도자기만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친구가 떠난 뒤, 그림을 붓으로 다 지워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도자기만 아름답게 보여, 주객이 전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예수님 외에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것, 예수님 외에 찬란하게 빛나 보이는 것, 예수 외에 앞장서 나타나 보이는 모든 것을 지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에 처음 되시고 먼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전해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뜨거운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는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1.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십니다
세상에 살면서 길을 잃은 경험을 한 두 번쯤은 누구나 겪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연합군들이 중동 사막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사막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뜨거운 태양 아래서 타는 목마름으로 신기루를 보았습니다.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아 물이 없는데도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출렁이는 호수가 보입니다. 군인들은 그것이 진짜 물인줄 알고 첨벙첨벙 들어가서 물을 마셨는데 실상, 물을 마신 것이 아니라 뜨거운 모래를 잔뜩 먹고 기도가 막혀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을 찾아온 후속부대가 보니 모두 입 안 가득 모래를 물고 죽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길을 잃는다는 것은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길을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고 에덴의 낙원에서 쫓겨 사람들의 영이 죽고 그들은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인생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서 무덤으로 들어갈 때까지 정체불명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그저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다가 그냥 죽습니다. 인생의 길을 안내한다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상은 그들 자신도 길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모든 성인들과 교주들 역시 올바른 길을 찾는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공자는 ??아침에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인도 평생 도를 찾는 자일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자기가 길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우리나라 신흥종교는 500여 개이며 이에 속해 있는 신도들은 200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단 교주들은 거의 모두가 공통적으로 자신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합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20여 명이나 되고 재림주라 주장하는 사람도 50여 명 있습니다. 이 외에도 자신을 보혜사 성령, 엘리야, 다윗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구원으로 가는 길의 안내자 혹은 길 자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사람들 자체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불쌍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만이 길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신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올라갈 목적지인 천국에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돌아갈 길을 알고 계십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천국에 올라간 경험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길로 돌아갈 수 있으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그 길로 돌아가는 길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강림하심이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어두움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죄인에게는 용서의 빛을, 마귀에게 잡힌 자에게는 해방의 빛을, 병든 자에게는 치료의 빛을 주셨습니다. 절망자에게는 소망의 빛으로 죽은 자에게는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빛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은 곧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자체가 바로 길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길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죽고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나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이 죄를 누가 청산해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청산해 주시지 않고는 우리 영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죽은 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수양을 쌓고 도덕과 고행을 해도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슨 도를 전하고 수양과 도덕의 길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의 빚을 청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그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예수님만이 길이 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그리스도만이 진리와 생명의 길이신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3~15절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만이 돌아갈 길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우리 죄를 청산하시고 부활하셔서 당신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인해 우리를 하늘에서 인도하여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용서받고 의인이 되는 길이 되십니다. 거룩하고 성령 충만을 받는 길, 병에서 고침 받고 건강을 얻게 되는 길, 우리가 저주에서 해방을 얻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장차 부활하여 천국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 역시 예수님입니다. 공자는 아침에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했고, 석가는 길을 찾기 위해 집을 나와 10년간을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을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길을 찾으신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길이요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용서와 의를 얻는 길을 찾으며 거룩함과 성령 충만의 길을 찾고, 치료와 건강의 길, 축복과 형통의 길을 찾으며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길을 찾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모두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만이 절대 진리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해야 되는 것은 예수님만이 절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비슷한 상대적 진리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절대 진리로 그와 비교하여 동등하게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진리는 없습니다. 상대적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마귀는 자기가 진리라고 말하지만 거짓 투성입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속여 선악과를 따먹도록 하여 하나님을 배반토록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된다고 거짓을 말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마귀의 거짓말을 믿었다가 그 영이 죽고 하나님께 버림받아 에덴의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길 되시고 진리 되시는 주님을 속이지는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40주야를 금식하고 나왔을 때 마귀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들어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떠한 마귀의 꾀임에도 유혹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러한 마귀를 말씀으로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온 세상은 마귀에게 속아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마귀가 온 세상을 점령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해 모든 것은 물질 밖에 없다는 유물론을 주장합니다. 또한 인간은 원시 생물체인 아메바에서 진화됐다는 진화론,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며 역사의 주인 역시 인간이라는 인본주의와 물질만이 삶의 목적이라는 물질만능주의,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는 쾌락주의 등의 잘못된 사상으로 인간을 미혹합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유를 선포하고 이성과 과학을 무한 발전시켜서 인간의 힘으로 지상에 천국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 이후로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발전시킨 것은 인류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살상무기 밖에 없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온 세계가 초토화되고 겨우 이에서 회복되자마자 다시 2차 세계대전으로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후, 전세계는 냉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죽었으며 오늘날은 전 세계를 수십 번이라도 폭파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인간이 말하는, 인간이 자랑하는 이성과 과학의 결과입니다.
대구에서 있었던 일인데 한 엄청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이 너무 많아 밤마다 새벽이 가깝도록 수판을 놓고 다닥 거리는 소리를 내어 건너 방에서 자는 며느리의 잠을 설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쓸 줄은 모르고 모으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아 부었습니다. 굉장한 거부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재산이 축이 날까 겁나서 자녀와의 사이에도 좋지 못한 얘기들이 오고 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으고 또 모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그의 인생도 늙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멀리 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이 늙은 아버지는 그 아내를 잃게 되었습니다. 젊은 여인을 다시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쌀독의 열쇠까지 자기가 쥐고 때마다 쌀을 자신이 퍼내 주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 동안 그 많던 재산이 이리 저리 쏟아지며 줄어들더니 세상을 떠난 그의 시신마저 둘만한 장소가 없어서 그가 다니던 교회 일 층 한방에다 관을 두고 있었습니다.
마치 솔로몬의 전도서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물질 만능주의와 쾌락주의가 가져온 것은 파멸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만이 참되십니다. 마귀는 현재 달콤한 것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지만 후에 다가올 쓰디쓴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을 지으신 이가 만물을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우주를 만들고 그 모든 내용을 일일이 아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실을 알고 진리이십니다.
사도행전 14장 15절에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장 17절에는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사야 44장 6절에는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경험한 사람은 공산주의가 얼마나 인정도 없고 무서운가를 잘 압니다. 그들을 동족이란 이름으로 같은 민족을 처참하게 죽인 살인집단일 뿐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한 세대는 이를 잘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하지 못한 요즘의 젊은이들은 쉽게 그들과 우리를 동족이라는 말로 무조건 얼싸안으려 합니다. 공산주의에게는 동족이란 없습니다. 그들에게 동족이란 것은 하나의 가면에 불과합니다. 공산주의는 오직 혁명적 통일만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도 거기에 속으면 안되는데 공산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는 이러한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진리는 경험해야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진리입니까?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로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우주를 지을 때부터 시작해서 우주를 완성하고,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으므로 우리가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는 죽음의 문제도 확실히 알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는 죽음도 알고 삶도 아십니다. 진리는 두 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버금가는 다른 진리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철학과 윤리, 도덕, 사상 등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진리인 것은 영원불변하기 때문입니다. 천상천하에 변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남아있는 진리는 예수님 오직 한 분이십니다.
오늘날은 종교도 많고 진리도 많고 가르침도 많습니다. 그러나 모두 죽음 저 건너편에 갔다온 사람은 없습니다. 상상할 뿐입니다. 마호메트는 60세에 한 여인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소크라테스는 70세에 사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석가모니는 8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플라톤도 80세까지 살다가 죽었습니다. 세계 성인이요 종교의 창시자였던 이들이었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꿇고 죽고 난 다음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 저 건너편에서 돌아왔습니다. 죄악의 빚을 잔뜩 짊어지고 무덤으로 들어간 사람은 그 빚을 갚아야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성인군자나 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죽음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다시는 나오지 못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죄를 갚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의 값을 갚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감옥으로 들어갔으나 사흘만에 모두 청산하고 너끈히 살아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진리되십니다.
3.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인간은 원래 죽지 않게 지어졌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죽는 것은 하나님 앞에 버림받고 죄를 지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생하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처음 지음 받았을 때는 죽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원래 죽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고통과 괴로움, 슬픔을 가지고 죽음에 대해 반발합니다. 죽음을 원치 않습니다. 죽음을 싫어합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하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 죄값으로 이제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도 죽고 육도 죽는 것은 죄값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값으로 죽었기 때문에 우리보다 먼저 죽은 마귀가 이 세상 임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서 먼저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사망의 장자입니다. 그 마귀가 이제 우리가 죄 짓고 죽으니까 우리를 점령하고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사망의 세력을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를 청산하고 사망을 멸해 버리면 마귀는 무장해제됩니다. 그 때문에 마귀가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이 십자가요,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마귀는 무장해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어찌하든지 절대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죄 없는 예수님은 죽을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생명의 대왕입니다. 그 증거로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달리다굼」 한마디로 살리셨습니다. 나인성의 과부 아들이 죽어 관을 메고 가는데 관뚜껑을 열고 ??청년아 일어나라??하시자 그가 일어났습니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날 때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말씀으로 나사로가 살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대왕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을 필요가 없으신 분이신데 우리를 위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죄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습니다. 「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이처럼 부르짖으셨습니다. 처참한 죄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고 보혈로 우리 죄를 청산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어서 죄를 다 갚으셨으므로 사흘만에 사망을 철폐하고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는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구세주 예수님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유일한 생명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25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예수님만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한 토인이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추장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추장은 화가 치밀어 죄인을 사형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선교사는 비싼 보화를 싸 가지고 가서 추장에게 주면서 죄인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추장은 보기보다 완고하고 냉담했습니다. "저런 물건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상아나 금, 은, 노예 따위는 부럽지 않소. 그런 것들은 저쪽 부락에 가면 얼마든지 빼앗아올 수 있소. 더구나 백인의 물건은 갖지 않겠소. 내가 오직 필요로 하는 것은 피요. 다른 것은 소용없소." 추장은 다시 부하에게 죄인을 죽일 것을 명했습니다. 화살이 시위에서 떠나려는 순간 선교사의 가슴에는 연민의 정이 가득하여 자신도 모르게 죄인 앞을 가로막고는 자기가 화살에 맞았습니다. 순간 선교사는 쓰러졌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화살을 뽑아 땅에 던졌습니다. 선교사의 몸에서는 피가 솟구쳤습니다. 그는 이러한 몸으로 추장에게 다가갔습니다. "자, 당신이 구하고 있는 피요. 받으시오. 그리고 그를 살려 주시오." 선교사의 행동에 감동한 추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좋소. 당신은 당신의 피를 가지고 그를 샀소. 그는 당신의 것이오." 그 때에 죄인은 선교사의 발밑에 엎드려 감격에 떨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은 피로 저를 사셨습니다. 아무쪼록 오늘부터 어디를 가시든지 제가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후 선교사가 가는 곳마다 그 토인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에도 결코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습니다.(피로 산 죄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꽤 큰 부자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고령의 할머니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있습니다. 이 할머니가 예수님 믿고 중생한 후 어느 날 손녀의 손목을 잡고 장거리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불쌍한 사람이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그에게 얼마를 주고 가다 보니 또 누군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물론 이 할머니는 그에게도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구세군의 자선남비에도 얼마를 집어넣고 ... 이런 식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손녀가 말합니다. "할머니, 오늘 참 손해 많이 보시네요 ?" 할머니는 그 어린 손녀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이렇게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님 믿은 후에 급한 성격도 버렸고, 남 흉보던 말도 버렸단다. 세상 쾌락도, 욕심도, 이기심도, 질투도, 남을 비판하는 마음도 다 버렸단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예수님뿐이란다"
우리도 예수님 믿고 다 잃어버렸다고 고백합시다. 오직 예수님뿐이라고 고백합시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라고 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합시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주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오직 주님만 위해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결혼할 수 있지만 결혼하지 않았고, 재산도 모을 수 있지만 모으지 않았고, 부귀영화를 포기했습니다. 사도로서 교회에서 대접받고 영광을 얻을 수 있지만 전부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사도 바울처럼 살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그렇게 살 수 있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원해서,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해서 기쁨으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십니다. 헌금을 해도 인색한 마음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면 주님께서 감동을 받으십니다. 그뿐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 주님이 한없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게 되었을 때 이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울 것이 없고, 죽음도 두렵지 않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어 오늘날 이 땅에 수십억의 기독교인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우리들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고 섬기는 자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길입니다. 무능한 사람을 유능한 사람으로, 우둔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쓸모없는 사람을 꼭 필요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능력의 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섬기는 자들로 하여금 행복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받들어 섬기는 사람들을 풍요로운 곳으로 인도하시는 길이십니다. 이토록 존귀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 기도: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사랑되신 주님, 귀한 주님의 이름을 찬양드립니다.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주님만이 나의 생명이요 전부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내게는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나는, 가장 행복한 자요, 부요한 자인 것을 또한 믿습니다. 그러나 가끔 세상의 정욕과 교만으로 주님을 잊어버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지 않은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을 위하여 늘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오직 예수님만이 댓글[0]
하나님, 창조
(2012-11-03 오후 7:20:25)http://blog.somang.net/holylove/7591
오직 예수님만이
본문: 요14: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탈리아의 한 화가가 도자기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최후의 만찬을 그려서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도하고자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온갖 정성을 들여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정말 영감 있는 주님의 모습, 빛나는 주님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 그려진 도자기를 본 친구는 그녀가 그린 예수님의 모습은 본 척도 않고 도자기의 아름다움만을 칭찬했습니다. 그 화가는 친구의 말을 듣고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고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얼굴은 가리워지고 도자기만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친구가 떠난 뒤, 그림을 붓으로 다 지워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도자기만 아름답게 보여, 주객이 전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예수님 외에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것, 예수님 외에 찬란하게 빛나 보이는 것, 예수 외에 앞장서 나타나 보이는 모든 것을 지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에 처음 되시고 먼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전해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뜨거운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는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1.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십니다
세상에 살면서 길을 잃은 경험을 한 두 번쯤은 누구나 겪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연합군들이 중동 사막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사막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뜨거운 태양 아래서 타는 목마름으로 신기루를 보았습니다.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아 물이 없는데도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출렁이는 호수가 보입니다. 군인들은 그것이 진짜 물인줄 알고 첨벙첨벙 들어가서 물을 마셨는데 실상, 물을 마신 것이 아니라 뜨거운 모래를 잔뜩 먹고 기도가 막혀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을 찾아온 후속부대가 보니 모두 입 안 가득 모래를 물고 죽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길을 잃는다는 것은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길을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버림을 받고 에덴의 낙원에서 쫓겨 사람들의 영이 죽고 그들은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인생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서 무덤으로 들어갈 때까지 정체불명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그저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다가 그냥 죽습니다. 인생의 길을 안내한다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상은 그들 자신도 길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모든 성인들과 교주들 역시 올바른 길을 찾는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공자는 ??아침에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인도 평생 도를 찾는 자일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자기가 길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우리나라 신흥종교는 500여 개이며 이에 속해 있는 신도들은 200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단 교주들은 거의 모두가 공통적으로 자신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합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20여 명이나 되고 재림주라 주장하는 사람도 50여 명 있습니다. 이 외에도 자신을 보혜사 성령, 엘리야, 다윗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구원으로 가는 길의 안내자 혹은 길 자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사람들 자체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불쌍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만이 길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신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올라갈 목적지인 천국에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돌아갈 길을 알고 계십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천국에 올라간 경험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신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길로 돌아갈 수 있으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그 길로 돌아가는 길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강림하심이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어두움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죄인에게는 용서의 빛을, 마귀에게 잡힌 자에게는 해방의 빛을, 병든 자에게는 치료의 빛을 주셨습니다. 절망자에게는 소망의 빛으로 죽은 자에게는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빛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은 곧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자체가 바로 길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길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죽고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나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이 죄를 누가 청산해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청산해 주시지 않고는 우리 영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죽은 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수양을 쌓고 도덕과 고행을 해도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슨 도를 전하고 수양과 도덕의 길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의 빚을 청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그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예수님만이 길이 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그리스도만이 진리와 생명의 길이신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3~15절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만이 돌아갈 길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우리 죄를 청산하시고 부활하셔서 당신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인해 우리를 하늘에서 인도하여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용서받고 의인이 되는 길이 되십니다. 거룩하고 성령 충만을 받는 길, 병에서 고침 받고 건강을 얻게 되는 길, 우리가 저주에서 해방을 얻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장차 부활하여 천국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 역시 예수님입니다. 공자는 아침에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했고, 석가는 길을 찾기 위해 집을 나와 10년간을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을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길을 찾으신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길이요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용서와 의를 얻는 길을 찾으며 거룩함과 성령 충만의 길을 찾고, 치료와 건강의 길, 축복과 형통의 길을 찾으며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길을 찾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모두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만이 절대 진리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해야 되는 것은 예수님만이 절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비슷한 상대적 진리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절대 진리로 그와 비교하여 동등하게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진리는 없습니다. 상대적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마귀는 자기가 진리라고 말하지만 거짓 투성입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속여 선악과를 따먹도록 하여 하나님을 배반토록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된다고 거짓을 말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마귀의 거짓말을 믿었다가 그 영이 죽고 하나님께 버림받아 에덴의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길 되시고 진리 되시는 주님을 속이지는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40주야를 금식하고 나왔을 때 마귀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들어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떠한 마귀의 꾀임에도 유혹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러한 마귀를 말씀으로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온 세상은 마귀에게 속아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마귀가 온 세상을 점령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해 모든 것은 물질 밖에 없다는 유물론을 주장합니다. 또한 인간은 원시 생물체인 아메바에서 진화됐다는 진화론,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며 역사의 주인 역시 인간이라는 인본주의와 물질만이 삶의 목적이라는 물질만능주의,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는 쾌락주의 등의 잘못된 사상으로 인간을 미혹합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유를 선포하고 이성과 과학을 무한 발전시켜서 인간의 힘으로 지상에 천국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 이후로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발전시킨 것은 인류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살상무기 밖에 없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온 세계가 초토화되고 겨우 이에서 회복되자마자 다시 2차 세계대전으로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후, 전세계는 냉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죽었으며 오늘날은 전 세계를 수십 번이라도 폭파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인간이 말하는, 인간이 자랑하는 이성과 과학의 결과입니다.
대구에서 있었던 일인데 한 엄청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이 너무 많아 밤마다 새벽이 가깝도록 수판을 놓고 다닥 거리는 소리를 내어 건너 방에서 자는 며느리의 잠을 설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쓸 줄은 모르고 모으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아 부었습니다. 굉장한 거부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재산이 축이 날까 겁나서 자녀와의 사이에도 좋지 못한 얘기들이 오고 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으고 또 모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그의 인생도 늙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멀리 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이 늙은 아버지는 그 아내를 잃게 되었습니다. 젊은 여인을 다시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쌀독의 열쇠까지 자기가 쥐고 때마다 쌀을 자신이 퍼내 주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 동안 그 많던 재산이 이리 저리 쏟아지며 줄어들더니 세상을 떠난 그의 시신마저 둘만한 장소가 없어서 그가 다니던 교회 일 층 한방에다 관을 두고 있었습니다.
마치 솔로몬의 전도서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물질 만능주의와 쾌락주의가 가져온 것은 파멸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만이 참되십니다. 마귀는 현재 달콤한 것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지만 후에 다가올 쓰디쓴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을 지으신 이가 만물을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우주를 만들고 그 모든 내용을 일일이 아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실을 알고 진리이십니다.
사도행전 14장 15절에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장 17절에는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사야 44장 6절에는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경험한 사람은 공산주의가 얼마나 인정도 없고 무서운가를 잘 압니다. 그들을 동족이란 이름으로 같은 민족을 처참하게 죽인 살인집단일 뿐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한 세대는 이를 잘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하지 못한 요즘의 젊은이들은 쉽게 그들과 우리를 동족이라는 말로 무조건 얼싸안으려 합니다. 공산주의에게는 동족이란 없습니다. 그들에게 동족이란 것은 하나의 가면에 불과합니다. 공산주의는 오직 혁명적 통일만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도 거기에 속으면 안되는데 공산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는 이러한 공산주의의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진리는 경험해야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진리입니까?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로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우주를 지을 때부터 시작해서 우주를 완성하고,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으므로 우리가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는 죽음의 문제도 확실히 알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는 죽음도 알고 삶도 아십니다. 진리는 두 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버금가는 다른 진리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철학과 윤리, 도덕, 사상 등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진리인 것은 영원불변하기 때문입니다. 천상천하에 변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남아있는 진리는 예수님 오직 한 분이십니다.
오늘날은 종교도 많고 진리도 많고 가르침도 많습니다. 그러나 모두 죽음 저 건너편에 갔다온 사람은 없습니다. 상상할 뿐입니다. 마호메트는 60세에 한 여인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소크라테스는 70세에 사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석가모니는 8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플라톤도 80세까지 살다가 죽었습니다. 세계 성인이요 종교의 창시자였던 이들이었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는 모두 무릎을 꿇고 죽고 난 다음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 저 건너편에서 돌아왔습니다. 죄악의 빚을 잔뜩 짊어지고 무덤으로 들어간 사람은 그 빚을 갚아야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성인군자나 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죽음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다시는 나오지 못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죄를 갚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의 값을 갚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감옥으로 들어갔으나 사흘만에 모두 청산하고 너끈히 살아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진리되십니다.
3.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인간은 원래 죽지 않게 지어졌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죽는 것은 하나님 앞에 버림받고 죄를 지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생하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처음 지음 받았을 때는 죽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원래 죽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고통과 괴로움, 슬픔을 가지고 죽음에 대해 반발합니다. 죽음을 원치 않습니다. 죽음을 싫어합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하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 죄값으로 이제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도 죽고 육도 죽는 것은 죄값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값으로 죽었기 때문에 우리보다 먼저 죽은 마귀가 이 세상 임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서 먼저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사망의 장자입니다. 그 마귀가 이제 우리가 죄 짓고 죽으니까 우리를 점령하고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사망의 세력을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를 청산하고 사망을 멸해 버리면 마귀는 무장해제됩니다. 그 때문에 마귀가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이 십자가요,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마귀는 무장해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어찌하든지 절대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죄 없는 예수님은 죽을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생명의 대왕입니다. 그 증거로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달리다굼」 한마디로 살리셨습니다. 나인성의 과부 아들이 죽어 관을 메고 가는데 관뚜껑을 열고 ??청년아 일어나라??하시자 그가 일어났습니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날 때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말씀으로 나사로가 살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대왕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을 필요가 없으신 분이신데 우리를 위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죄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습니다. 「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이처럼 부르짖으셨습니다. 처참한 죄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고 보혈로 우리 죄를 청산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어서 죄를 다 갚으셨으므로 사흘만에 사망을 철폐하고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는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구세주 예수님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유일한 생명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25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예수님만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한 토인이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추장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추장은 화가 치밀어 죄인을 사형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선교사는 비싼 보화를 싸 가지고 가서 추장에게 주면서 죄인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추장은 보기보다 완고하고 냉담했습니다. "저런 물건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상아나 금, 은, 노예 따위는 부럽지 않소. 그런 것들은 저쪽 부락에 가면 얼마든지 빼앗아올 수 있소. 더구나 백인의 물건은 갖지 않겠소. 내가 오직 필요로 하는 것은 피요. 다른 것은 소용없소." 추장은 다시 부하에게 죄인을 죽일 것을 명했습니다. 화살이 시위에서 떠나려는 순간 선교사의 가슴에는 연민의 정이 가득하여 자신도 모르게 죄인 앞을 가로막고는 자기가 화살에 맞았습니다. 순간 선교사는 쓰러졌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화살을 뽑아 땅에 던졌습니다. 선교사의 몸에서는 피가 솟구쳤습니다. 그는 이러한 몸으로 추장에게 다가갔습니다. "자, 당신이 구하고 있는 피요. 받으시오. 그리고 그를 살려 주시오." 선교사의 행동에 감동한 추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좋소. 당신은 당신의 피를 가지고 그를 샀소. 그는 당신의 것이오." 그 때에 죄인은 선교사의 발밑에 엎드려 감격에 떨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은 피로 저를 사셨습니다. 아무쪼록 오늘부터 어디를 가시든지 제가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후 선교사가 가는 곳마다 그 토인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에도 결코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습니다.(피로 산 죄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꽤 큰 부자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고령의 할머니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있습니다. 이 할머니가 예수님 믿고 중생한 후 어느 날 손녀의 손목을 잡고 장거리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불쌍한 사람이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그에게 얼마를 주고 가다 보니 또 누군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물론 이 할머니는 그에게도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구세군의 자선남비에도 얼마를 집어넣고 ... 이런 식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동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손녀가 말합니다. "할머니, 오늘 참 손해 많이 보시네요 ?" 할머니는 그 어린 손녀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이렇게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님 믿은 후에 급한 성격도 버렸고, 남 흉보던 말도 버렸단다. 세상 쾌락도, 욕심도, 이기심도, 질투도, 남을 비판하는 마음도 다 버렸단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예수님뿐이란다"
우리도 예수님 믿고 다 잃어버렸다고 고백합시다. 오직 예수님뿐이라고 고백합시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라고 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합시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주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오직 주님만 위해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결혼할 수 있지만 결혼하지 않았고, 재산도 모을 수 있지만 모으지 않았고, 부귀영화를 포기했습니다. 사도로서 교회에서 대접받고 영광을 얻을 수 있지만 전부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사도 바울처럼 살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그렇게 살 수 있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원해서,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해서 기쁨으로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십니다. 헌금을 해도 인색한 마음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면 주님께서 감동을 받으십니다. 그뿐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 주님이 한없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게 되었을 때 이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울 것이 없고, 죽음도 두렵지 않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어 오늘날 이 땅에 수십억의 기독교인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우리들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고 섬기는 자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길입니다. 무능한 사람을 유능한 사람으로, 우둔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쓸모없는 사람을 꼭 필요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능력의 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섬기는 자들로 하여금 행복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받들어 섬기는 사람들을 풍요로운 곳으로 인도하시는 길이십니다. 이토록 존귀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 기도: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사랑되신 주님, 귀한 주님의 이름을 찬양드립니다.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주님만이 나의 생명이요 전부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내게는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나는, 가장 행복한 자요, 부요한 자인 것을 또한 믿습니다. 그러나 가끔 세상의 정욕과 교만으로 주님을 잊어버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지 않은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을 위하여 늘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협동단결의 중요성댓글[0]
협동, 하나, 동역
(2012-08-30 오전 4:53:09)http://blog.somang.net/holylove/7452
협동단결의 중요성
본문: 전도서 4: 9 - 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아프리카 밀림에서 가장 강한 동물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개미’입니다. 개미들이 떼지어 이동하면 그 길이가 무려 10리나 됩니다. 밀림의 맹수들은 개미떼를 보고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숲으로 도망갑니다. 몸집이 가장 큰 코끼리도 겁을 먹습니다. 사자는 개미가 이동하는 반대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밀림에서는 개미가 가장 무섭습니다. 개미에게 잘못 걸리면 영락없이 놈들의 밥이 되고 맙니다. 수십만 마리의 개미가 동물의 몸에 붙어 살을 뜯어먹으면 그것을 견딜 짐승이 하나도 없습니다. 맹수들이 개미를 두려워하는 것은 힘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개미의 무서운 협동심 때문입니다. 개미는 지극히 작은 벌레에 불과하지만 수십만 마리가 힘을 합쳐 코끼리를 공격하면 단 하루만에 앙상한 뼈만 남습니다. 협동심은 가장 강한 무기입니다. 하나님이 가족을 주신 것은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해 삶의 맹수들인 위기와 고난을 물리치기 위함입니다.
사람을 인(人)이라고 합니다. 한국인, 미국인, 일본인, 중국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인(人)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두 사람이 서로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혼자 있으면 틀림없이 쓰러지고 맙니다. 서로가 서로에 기대어서 너는 나 때문에, 나는 너 때문에 안전히 서있을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림이 프랑스에 있습니다. 판데욘(Pantheon)이라는 그림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석하였던 전쟁의 영웅 6,000명 얼굴을 일일이 다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 참전하였던 나라 대통령 초상화 16명도 그려 넣은 대작입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그림은 혼자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103명 화가가 동원되었습니다. 4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릴레이로 그렸습니다. 대단한 작품입니다. 걸작품은 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대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만들어진 걸작품 인생입니다. 모세는 아론과 함께 만들어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챨스 웨슬레와 함께 만들어진 감리교 거인입니다. 루터는 멜란크톤과 함께 만들어진 종교개혁자입니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인물의 뒤에는 반드시 그를 위해 기도하고 도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위인과 걸작품은 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은 모든 것이 공존 할 때에 건강하고 질서가 잡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돕고 공존하며 관계가 아름답도록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잔디는 씨앗이 듬성듬성 뿌려지면 잘 자라지 못한다고 합니다. 씨앗이 서로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을 때 잘 자란다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잔디의 자라는 모습이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밀조밀 붙은 씨앗이 서로 경쟁을 하기보다는 양분을 나눠가지며 더불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이솝우화입니다. 얼룩 소, 검은 소, 붉은 소 세 마리는 언제나 함께 다녔습니다. 사자는 그 소들을 잡아먹고 싶어서 매일같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 마리의 소는 언제나 같이 다니면서 사자가 덤벼들면 셋이 한꺼번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서로 떨어져서 풀을 뜯고 있어서 한 마리에게 달려들면 다른 두 마리의 소가 달려와서 제 동무 소를 위해 덤비기 때문에, 사자는 싸우다가 지쳐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하루는 풀밭에 얼룩소가 따로 떨어져 있으므로 사자는 가까이 다가가서 은근한 목소리로 "세 마리의 소 중에서 가장 힘센 것은 자기라고 붉은 소가 뽐내더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얼룩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태까지 셋이 똑같이 힘을 합해 적과 대항해 싸워왔고 무슨 일이든지 함께 도와 왔는데 붉은 소가 모두 제 힘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을 했다하니 건방진 소리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자는 얼룩소에게 거짓말을 해 놓고는 붉은 소와 검은 소 있는 데로 가서는 또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세 마리 가운데서 얼룩소가 제일 기운이 세고 다른 짐승에게 지지 않는 것도 얼룩소 때문이라고 하니 그게 참말이냐?"고 두 마리 소에게 물었습니다. 두 마리의 소는 얼룩소의 말이 건방진 소리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붉은 소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얼룩소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얼룩소도 붉은 소가 자기가 제일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던 터이라 있는 힘을 다해 덤볐습니다. 검은 소가 말렸지만 두 마리의 소는 뿔이 빠지도록 싸웠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 중 어느 편이 정말 센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날부터 세 마리의 소는 같이 놀지를 않았습니다. 사자는 좋아라 하며 소들을 차례로 잡아먹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 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다 놀라며 예수님을 좇으려하자 이를 시기한 사람이 예수가 귀신을 내 쫓은 것은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하시면서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하셨습니다.
저는 역사공부를 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때 신라가 통일시키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더라면 지금의 만주땅은 우리 것이 되었을 텐데 하며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고구려가 왜 망했는지 아십니까? 그 강성했던 고구려가 망한 이유는 막리지 연개소문에게 3아들이 있었는데 3형제가 서로 싸워 분쟁하는 통에 망한 것입니다. 이 3형제가 힘을 합하였더라면 결코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왜 협동 단결하여야 하는 가를 살펴봅시다.
첫째.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마을에서 가장 무거운 썰매를 끌 수 있는 건강한 말을 뽑는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대회에서 1 등을 한 말은 2,000kg이나 되는 썰매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2등을 한 말은 1,800kg이나 되는 썰매를 끌었습니다.
이 두 말의 주인들은 만약 두 말이 힘을 합하면 얼마만큼의 무게를 끌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두 말이 함께 썰매를 끌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5,500kg이나 되는 썰매를 끌 수가 있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 나누어 함께 하기를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혼자서 끙끙거리면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참으로 비능률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불어서 일하기를 권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의 짐은 가벼워지며,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서로 도우며 공생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코뿔소는 시력이 대단히 나쁩니다. 그러나 이 동물의 거친 살갗에 몰려드는 새들이 있습니다. 이 새들은 코뿔소의 등위에서 곤충들을 잡아먹는 대신 그들의 민감한 감지력으로 코뿔소에게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레이틀이라는 오소리의 일종과 두견새는 모두 꿀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둘은 같이 행동합니다. 아주 좋은 시력을 가진 두견새는 꿀이 있는 벌집을 잘 찾아내고 레이틀의 강한 발톱은 벌집을 파헤쳐 같이 꿀을 나누어 먹습니다.
저는 T.V에서 방영하는 동물의 세계를 자주 보는데 사자들을 비롯한 많은 동물들이 서로 협동하여 사냥도 하고, 협동하여 적을 물리치기도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처럼 서로 도우며 공생하는 것이 자연의 질서인데 이 질서가 이기주의에 의해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공멸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하나의 합창단과 같습니다. 그런데 종종 독창만 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손해가 나고,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고, 참고, 화합하여야 합니다.
출애굽기18:14-26절에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가 혼자서 백성들을 돌보느라 너무 힘들어하자, 모세에게 충고하여 천부장, 백부장 등을 세워 협력하게 하였습니다. 또 사도행전6장 1- 7절을 보세요. 초대 교회 때도 사도들이 집사들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일을 혼자하기에는 너무 벅차므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념(전무)하기 집사들의 협력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농촌에는 계, 향약, 두레, 품앗이 등의 좋은 협동단결의 풍속과 장신이 있었습니다. 한 예로 논밭을 갈 때 각자 뙤약볕에서 혼자서 끙끙거리며 자기 밭만을 가는 것과 이웃이 함께 모여 풍악을 울리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겁게 한 집 한 집 다니면서 논밭을 함께 가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쉽고 능률이 나겠습니까? 두레, 품앗이 등의 협동정신을 계승합시다.
셋째, 여럿이 힘을 합친 것이 혼자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어느 농부의 자식들이 싸우기를 잘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아무리 타일러도 싸움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말로 타일러서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끝에 이른바 실물교육을 할 수 있는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회초리 한 단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시키시는 대로 자식들은 각기 회초리 한 단씩을 가져왔습니다. 아버지는 먼저 그 회초리를 자식들에게 내어주면서 그것을 꺾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회초리 단을 꺾는 아들은 없었습니다. 자식들은 땀을 흘리면서 애를 썼으나 끝내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 회초리 단을 내려놓고 꺾을 수 없다고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는 그 회초리단을 풀어서 한 개비씩을 자식들에게 나누어주고 꺾어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자식들이 모두 힘 안들이고 그 회초리를 꺾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제 알겠느냐? 너희들은 서로 합심하면 결코 적에게 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들이 서로 싸우고만 있으면 적에게 패하고 말 것이다." 주안에서 한 지체가 되고, 한 형제 된 성도는 서로 사랑하고, 협동 단결해야 합니다. 협동은 환난 날에, 그리고 마귀의 핍박에서 이길 수 있는 훌륭한 비결입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서로 돕고 사랑하는 마음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전설 속에 나오는 피히 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피히새는 날개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수컷은 오른쪽 날개가 있고, 암컷은 왼쪽 날개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각각 떨어져 있을 때는 날개가 하나밖에 없기에 앞으로 날지 못하고 한참을 날아 이제는 산 넘어 왔겠지 하고 보면 그저 원을 그리며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할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컷과 암컷이 만나 사랑을 나누고 나란히 한 몸이 되어 날아가면 그들은 높은 곳이나 낮은 곳 그리고 먼 곳 어느 곳이나 훨훨 날아다닐 수 가있습니다. 서로 한 몸을 이루어 협동하고 서로의 날개짓을 격려해 줄 때 가장 아름답게 날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피히새처럼 서로 돕고 사랑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요 근래 독신주의를 주장하는 처녀, 총각들이 있는데 결혼 안 하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나이가 많이 들면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40이 넘은 노처녀, 노총각들이 얼마나 후회하는 지들 몰라요. 혼자보다 둘이 힘을 합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기러기들은 v자 대형으로 하늘을 납니다. 비행기와 망원경으로 기러기를 추적한 조류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1), 기러기는 혼자 나는 것보다 떼지어 날 때 71%나 더 오래 날 수 있다. (2), v자 대형을 이루는 것은 공기대가 형성되어 뒤따르는 기러기들의 비상이 쉽기 때문이다. (3), 날면서 계속 우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상대를 격려키 위한 것이다.
잠언30:24-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개미와 메뚜기에게서 지혜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개미와 메뚜기에게서 무엇을 배우라는 것입니까? 바로 협동 단결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기러기와 벌과 개미와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에게서 협동의 정신을 배웁시다.
작은 것이라도 모아지면 커집니다. 어떤 교회에서 바자회를 하는데 각 가정에서 쓰지 않는 헌옷, 책, 장난감을 모으고 여집사님들이 음식 장만하여 행사하는 데, 제법 큰돈이 마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찮은 것도 모아지면 귀중하게 쓰여집니다.
다섯째, 협동하지 않고 분쟁하면 둘 다 공멸하기 때문입니다.(마12:25, 딤전6:4)
독일 베벤하우젠 근처의 오래된 수도원에 가면 서로 엉켜 있는 두 개의 사슴뿔이 전시되어 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럴 때 원장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이 뿔은 여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입니다. 두 개의 뿔이 엉켜 있다는 것은 두 마리의 사슴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상대방의 뿔 속에 자신의 뿔을 쑤셔 넣음으로써 그만 떨어질 수가 없게 되었고 버둥대다가 끝내 둘 다 굶어 죽게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숲에 참새 집이 있었습니다. 참새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에 토끼가 와서 살았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싸움을 지켜보던 고양이 한 마리가 재판을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참새와 토끼는 고양이에게 재판을 부탁했습니다. 고양이는 자기 앞에서 또 한번 싸워보라고 요구했습니다. 악이 오른 참새와 토끼는 다시 싸움을 시작했고 고양이는 번개처럼 달려들어 참새와 토끼를 모두 잡아먹었습니다.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3:9)
여섯째, 협동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위기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새를 잡기 위해서 여기저기 그물을 쳐 놓았습니다. 어느 날 여러 마리의 참새들이 그물에 걸려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물에 걸린 참새 가운데 한 마리가 외쳤습니다. ‘이대로 잡힐 순 없다. 살아야 한다. 자아, 우리 모두 동시에 힘껏 날아올라 이 그물을 저 큰 나무에 걸어 보도록 하자. 그러면 우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참새들이 동시에 힘껏 솟구쳐 날아올랐습니다. 그러자 그 무겁게 쳐져 있던 그물이 움직였습니다. 참새들은 그물을 큰 나무에 걸고서 모두 빠져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참새처럼 모두가 한 곳에 힘을 합하면 힘든 일도 잘 풀리게 마련입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의 속뜻을 실감나게 합니다. 주어진 일에 체념만 하고 앉아 있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일곱째, 힘은 하나될 때에 강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힘의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됨(Unity), 둘째, 조화(Harmony), 셋째, 협력(Cooperation)입니다. 자동차 한대를 만들기 위해 약 2만 개의 부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2만 개가 모여서 하나의 자동차가 됩니다. 자동차 한 대가 제대로 되려면 그 부속품 하나하나가 전부 제구실을 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말썽을 부리면 안 됩니다. 어느 것 하나도 빼 놓고 달릴 수 없습니다. 2만 개의 부속이 똑같이 힘을 협력해야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아랍 편에 서는 것이 이스라엘 편에 서는 것보다 국가적인 이익이 크지만 이스라엘을 돕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국 내에 있는 유태인들이 협동단결하여 미국의 정책에 영향력이 끼치기 때문입니다. 협동하면 무서운 힘이 생깁니다. 하나의 힘과 둘의 힘을 합하면 셋의 힘이 되는 것이 힘의 원리로되, 협동의 원리는 넷이나 다섯의 힘이 생기는 것이요,(시너지 효과) 한 사람의 두뇌보다 두 사람의 두뇌를 합하면 엄청나게 큰 결과를 가져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12:15)
여덟째, 공동체 속에 있어야 보호받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에 레드우드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사막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공원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심한 더위와 가뭄 때문에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막에 어떻게 레드우드 공원과 같은 숲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물을 주기도 하지만, 여러 나무가 함께 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많은 나무가 함께 자라면서 바닥에는 늘 그늘이 지고 습기가 잘 증발 하지 않아서, 나무가 죽지 않고 숲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 울창했던 밀림의 나무들도 한 그루씩 자꾸 베어지면, 앞의 경우와는 반대로 점차 땅이 메마르게 되어 나머지 나무들도 전부 말라 죽고 맙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공동체 속에 내가 있지 않으면 말라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사랑한다는 것,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쉽고 당연한 일 같지만, 어찌 보면 그처럼 어렵고 힘든 일도 없습니다. 공동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실천하려면 자기희생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 3)
아홉째, 협동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느 궁궐에 아주 맛있는 과일이 열리는 신기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두 사람의 경비원을 채용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소경이었고, 한 사람은 난쟁이였습니다. 두 사람은 신비의 열매를 따먹고 싶었으나 너무 높은 곳에 과일이 열려 손이 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꾀를 냈습니다. 소경이 난쟁이를 목말 태우고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쪽으로 이동하며 실컷 열매를 따먹었던 것입니다. 임금님은 열매가 없어진 것을 알고 두 경비원을 문책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각각 울부짖으며 호소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제가 어떻게 열매를 품치겠습니까." "난쟁이가 어떻게 저 높은 곳의 열매를 따먹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님은 두 사람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비록 옳지 않은 일이라도 둘이서 힘을 합하면 묘안이 나오는 법입니다. 하물며 좋은 일을 위해 여럿이 힘을 모으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협동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꿉니다. 사람이 역경을 만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이웃과의 협력입니다.
열 번째, 우리는 모두가 연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목공소에 목공소 연장들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누군가 망치야, 너는 소리를 크게 내기 때문에 없어져야 한다고 했다. 망치는 내가 떠나면 톱도 떠나야 한다. 이것저것 무엇이든지 사정없이 잘라내니 말이다.라고 대꾸했다. 톱은 내가 떠나면 대패도 떠나야 한다. 대패는 항상 남의 깊은 속은 모르고 겉만 보고 깍아내니 떠나야 한다. 그러자 대패도 한마디했다. 내가 꼭 떠나야 한다면 자(尺)도 떠나야 한다. 자는 항상 자기 것만 옳다고 하며 모든 기준을 자기중심으로 해서 크고 작다고 평하기 때문이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렇게 목공소 연장들의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나사렛 목수가 들어와서 작업복을 갈아입으시더니 강대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사렛 목수는 강대상을 만들 때에 대패, 망치, 톱, 자 등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아니하고 모두 사용했다. 하나님은 쓰레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4절에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쓰여지기 위하여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은사와 직임이 서로 다르고 각자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다르다고 쓸데없다 하거나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고전12:4-27) 만약 한 지체라도 없으면 병신이 되거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목수에게는 톱, 자, 대패, 망치 모두가 다 필요합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없으면 만들고자 하는 물건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하늘나라를 건설키 위해서 주님은 어느 한 사람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던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부활과 승천하시는 구속사를 성취시키는 데 한 도구의 인간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중 어느 누구도 필요 없다 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용서와 이해, 인내와 사랑 가운데서 서로 협동하며, 몸 된 그리스도의 한 지체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이 지구도 하나뿐입니다. 우리도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주안에서 한 형제가 되고 협동단결하여 교회가 새롭게 부흥되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이 많으신 주님,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천하만민 중에서 저희들을 택하여 주시고 저희들에게 자유와 건강과 주를 경외하는 마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 우리의 마음이 주님 보시기에 너무나 악합니다. 저희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변화시켜 주시고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어 겸손과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차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고, 돕고 용서하는 마음을 주시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는 말을 하지 않도록 우리 입술을 지켜주시고 항상 친절하고 격려하며 도움되는 말과 입술이 되게 하소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인내로서 아무리 힘든 사명도 완수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게 히시고 성도들이 협동단결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이바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말과 행동이 일치되게 살자댓글[0]
실천, 행함
(2012-08-20 오전 8:38:36)http://blog.somang.net/holylove/7441
말과 행동이 일치되게 살자
본문: 요한일서: 3: 17- 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대문호 톨스토이의 글을 읽은 한 시골 청년이 너무나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농민과 노동자를 위해 쓴 사회 개량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청년은 그를 만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멀리서부터 그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드디어 톨스토이의 집 대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몇 만 평은 됨직한 넓은 정원과 화려한 주택이었습니다. 청년은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농민과 노동자의 벗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말로만 사회 개조를 부르짖는 사회 사상가가 아닌가.’ 그는 톨스토이를 만나자 격앙된 어조로 솔직하게 그를 비판했습니다. 이 양심적인 비판 앞에 톨스토이의 얼굴은 붉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토록 유창하던 그의 말문이 꽉 막혔음은 물론입니다.
지도자의 모범은 언제나 절실합니다. 지도자일수록 솔선수범하여 절제하고 청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국민으로부터 더 이상 지지를 얻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절제와 청렴에 그 행위의 기틀을 다져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일수록 절제하고 청렴해야 합니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바로 여기에 그 바탕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일수록, 그리스도인일수록 할 일은 많습니다. 말과 행동에서 모범을 보이는 일이요, 모든 행동에 절제를 보이는 일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된다면 톨스토이처럼 얼굴이 빨개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단지 입술로만’ 이란 글을 소개합니다.
너희는 나를 주인이라 부르면서도 나의 말에 순종치 않았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도 나를 찾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도 그대로 걷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생명이라 부르면서도 나를 소망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지혜라 부르면서도 나를 따르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애인이라 부르면서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부하다고 하면서도 내게 요구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영원하다고 하면서도 나를 구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자비롭다고 하면서도 나를 신뢰하지 않았고,
너희는 나를 고귀하다고 하면서도 내게 예배하지 않았다.
마가복음3장 14~15절을 보면,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신 후 바로 그들을 훈련시키셨는데 그것은 ‘자기와 함께 있는’ 훈련이었습니다. 최대의 훈련은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따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제자 훈련을 하셨습니다. 참된 제자 훈련은 자기 생활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원론적 신앙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하고 의롭게 살고, 세상에 나가서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다 공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말과 행동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순종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같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며칠 전 어느 집사님댁에 심방을 갔다가 집사님이 손에 쥐어주는 사과 하나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오니 막내아들이 사과를 보곤 달라고 해 주었습니다. 아들이 사과를 하도 먹음직스럽게 먹길래 한 입만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과를 누가 준거니?’ 라면서 아무리 구슬려도 주지 않았습니다. 괘씸한 생각과 함께 욕심 많은 자식에게 뭔가 교육을 해야 할 것 같아 과일가게에 가서 먹음직한 사과를 사 들고 와서 아이가 보는 앞에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제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내팽개치고는 내 손의 사과를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떼를 쓰는 아이에게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는 걸 정성껏 설명했습니다. 그 일을 겪고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다고 할 때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순순히 내줄 수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 순간 아들의 모습이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싫다’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간디(1869- 1948)가 교회에서 쫓겨나면서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온갖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간디는 유연히 성경을 읽고 참으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 미개한 나라였고, 인종차별이 심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결심은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찾아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여러 차례 청했지만 어느 교회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간디의 이 날카로운 비판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유효한 말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 않아서 주님과 교회에 해(害)를 끼칩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외식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위선적 신앙을 빗대어 ‘비 없는 구름과 같고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이 바짝 말라버린 개울과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 ‘그것은 마치 연극배우가 왕의 복장으로 분장하여 무대 위를 늠름히 거닐다가 연극이 끝난 후에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가난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여 설교하였습니다. 위선자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뿐더러 명예를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외양은 마치 미려한 양장본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은 형편없는 책들처럼, 내적인 면을 소홀히 하고 외적인 면에 더욱 관심을 쏟는 사람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러서 먹고 낙타는 삼킨다’는 중동의 속담처럼, 위선자의 특성은 큰일을 등한히 하고 사소한 일에 구애된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 위선자의 특징은, 남에 대해서는 신랄할 만큼 비판적이고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치리 만큼 관대하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금욕적 생활과 경건한 외모로 신앙의 빛 좋은 허울을 쓰고 있어도 결코 속일 수 없는 것이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음속에서 발아하는 위선의 싹을 애초부터 뽑아버리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위선적인 신앙이야말로 복음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거짓된 삶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7:21)
한 시인이 사랑의 노래를 지었는데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노래를 많이 베껴서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가 한 번밖에 보지 못했던 산너머에 사는 젊은 여자에게도 보냈습니다. 이틀이 지나서 그 여자가 사람을 통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믿어 주세요, 저는 당신이 제게 써 보내 주신 사랑의 노래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지금 곧 제 부모님을 뵈러 와 주세요. 그러면 저희는 약혼식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러자 시인은 이렇게 답장을 했습니다.
‘아가씨, 그것은 시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모든 사람에게 불려지는 사랑의 노래일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편지를 다시 써서 보내왔습니다.
‘말로만 하는 위선자! 거짓말쟁이! 당신 때문에 나는 오늘부터 죽는 날까지 모든 시인을 저주할 거예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몇 년 전 한 기독교계 잡지에서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비 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의 모습은 ‘교회에선 어떤지 몰라도 이기적인 경우가 많았다’라는 응답에 31.4%의 비율이 나왔고, ‘생활에 성실하기는 하나 인격적으로는 문제가 있었다’라는 질문에 응한 사람의 비율은 22.9%였습니다. 그리고 ‘비 기독교인들보다 위선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였다’라는 질문에 18.6 %의 응답률을 나타냈으며 ‘모범적인 생활태도와 인격이 느껴져 사귀고 싶었다’고 응답한 사람은 17.1%에 불과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말과 행동의 일치가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도 말과 행동의 일치 즉 사랑의 실천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신 주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마음속으로만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도록 도와주소서.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하시고 주께서 말씀하시고 실천하신 사랑의 본을 따르게 하소서. 주의 본을 따르는 길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인내를 허락하소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자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이웃에게 행함과 진실함의 참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라 댓글[0]
편건, 오해, 착각
(2012-08-19 오전 9:13:58)http://blog.somang.net/holylove/7439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라
본문: 막6:1- 6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미국에 있는 UCLA라고 하는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이제 머지않아 의학 공부를 마치고 바로 현지 병원에 나가서 환자들을 진찰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중에 한 사례를 들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아이는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아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우리가 아는 악성 베토벤은 바로 그런 환경 가운데서 1770년에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요, 형제들도 다 병들어 그 모양이지마는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그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무릇 우리 인간이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되기 쉬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교수는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에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겸손하게 신중하게 할 것이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별을 따라 가지 않고 그리스도가 왕궁에서 나실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왕궁으로 찾아가 헤롯을 만난 결과 헤롯이 시기심으로..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부터 그 아래 사내아이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마2장)
우리는 말씀만을 보고 따라가야지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사람의 말을 더 믿고 의존하면 동방박사처럼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사고(생각)라는 것은 보고 듣고 경험하는 데서 비롯되는데 이것이 내부에서 하나의 틀을 만들어, 다시 새로운 사건에 부딪칠 때 먼저 경험했던 지식이 앞서가서 작용을 하게 되어, 굴절작용을 하므로 편견이 생기게 됩니다. 이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이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깨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태아는 어머니의 배속에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너무 춥지도 뜨겁지도 않은 알맞은 온도와 요람처럼 떠있기 좋은 알맞은 습도와 그리고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탯줄을 통하여 가장 알맞게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그곳에서 오래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열 달이 채워지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어둠의 터널을 지나서 태아는 거의 혼절하다시피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시 유일한 영양공급원이던 탯줄마저 끊겨버렸습니다. 태아는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이게 웬일일까요. 죽을 줄로만 알았던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내가 구축한 그 세상이 최고인 것으로 생각하며 어둠에 갇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나의 교만과 편견과 아집인 내 속에서 갇혀서... 내가 진정 의를 위하여 나를 깨치고 죽을 때 영원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는 자신의 목적, 삶의 가치관, 삶의 스타일, 삶의 모든 방법을 높이 평가하거나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이 부한 사람은 결코 천국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받으려면 그릇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 그릇 속에 이미 다른 것이 가득 담겨 있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그릇이 비어 있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속에 자기 주장, 가치관, 철학,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8복중에 첫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느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부유했습니다. 젊은이는 과분한 차를 몰고 다녔습니다. 술도 마셨습니다. 현란한 불빛 밑에서 춤도 추었습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등산도 가고 낚시도 가고 바닷가로 여행도 다녔습니다. 용돈도 많이 썼고 낭비와 사치가 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떤 건전한 모임에서 예쁜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가씨는 착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그 아가씨와 사귀기 위해 할 수 없이 교회당에 나가서 앉아 있기는 했지만 설교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이 너무도 마음에 들고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가장 멋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와 앉아 있을지라도 자기의 생각, 자기의 방법, 자기의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주님의 말씀을 좇아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전에 맛보지 못한 참된 평안과 자유와 기쁨도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을 다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해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이전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빌3:7-8) 우리는 이제까지 나의 교만과 편견과 아집인 내 속에 갇혀서 이제까지 구축한 세상의 지식과 경험만을 최고라고 생각하며 어둠에 갇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참된 진리를 깨닫고 영원한 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도바울처럼 과거의 잘못된 편견을 배설물처럼 과감히 버려야 하겠습니다.
한 부부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부는 언제나 손을 꼭 잡고 다녔습니다. 성찬시간에조차 이런 행동이 계속됐습니다. 성찬을 받기 위해 강단 앞으로 나올 때도 손을 잡고 나왔을 뿐 아니라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실 때에도 남편이 떡과 포도주를 부인의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행동을 보며 민망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부부 중 아내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목사님이 장례식에 참석해 위로해주었습니다. 그 남편은 그간의 사정을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놀랍게도 이 부부는 둘 다 시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히 아내의 눈은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찬식에서조차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치의 편견은 6백만의 유대인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렇게 크진 않더라도 우리 이웃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수많은 편견이 목격됩니다. 크든 작든 주관적으로 이웃을 판단하는 편견은 매우 잔인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장님들만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길을 걸으면서 이 마을의 여섯 사람들이 코끼리를 타고 오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섯 사람들은 코끼리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한 번도 가까이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코끼리를 타고 있던 사람에게 이 거대한 동물을 만져보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마을에 돌아가서 어떻게 생긴 동물인지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었습니다. 코끼리를 탄 사람은 이를 허락하고 여섯 사람이 각각 다른 부분을 만지게 했습니다. 모든 장님들은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분명히 알기까지 코끼리를 만져보기도 하고 두들겨 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경험을 보고하기 위해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코끼리의 옆구리를 만진 첫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코끼리랑 광대하고 두꺼운 벽 같이 생겼습니다.’
‘말도 안 돼.’하고 코끼리의 이빨을 만지고 온 둘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코끼리는 짧고, 둥글고, 매끄럽지만 날카로워요. 나는 코끼리를 벽보다는 창에 비교하겠습니다.‘ 코끼리의 귀를 만지고 온 세 번째 사람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것은 벽이나 창하고는 전혀 같지 않습니다. 차라리 두꺼운 털 양탄자 같은 것으로 만든 거대한 이파리 같아요. 그것은 손만 대면 움직입니다.’ ‘나는 찬성 못합니다.‘ 하고 코끼리의 코를 만지고 온 네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뱀과 같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이 맞지 않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는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 온 사람입니다. ’그것은 나무처럼 둥글고 두텁게 생겼어요.‘ 코끼리를 타본 여섯째 사람이 항의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코끼리를 사실대로 설명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코끼리는 확실히 커다란 움직이는 산처럼 생겼습니다.‘ 오늘날도 마을 사람들은 토론을 계속하며 아무도 코끼리가 어떻게 생긴 동물인지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편견은 무식의 소산이며, 차라리 무지가 편견보다는 진실에 가깝습니다.
페르시아에 네 아들을 둔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아들들을 불러놓고 한 가지 명령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내 말을 들어라. 첫째는 겨울, 둘째는 봄, 셋째는 여름, 넷째는 가을에 정원 뒤편의 망고나무를 관찰하라. 다른 계절에 망고나무를 보아서는 안 된다."
네 아들은 왕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1년 후 왕은 네 아들을 불러놓고 물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너희가 본 망고나무를 내게 설명해다오."
네 아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불에 타고 남은 폐허 같습니다. 잎이 푸르고 싱그럽습니다. 꽃은 장미처럼 아름답습니다. 주렁주렁 열린 열매가 탐스럽습니다." 왕은 네 아들의 손을 잡고 교훈을 주었습니다.
‘너희들의 대답은 모두 옳다. 망고나무는 계절마다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 가지 모습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선 안 된다. 이것이 너희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성급한 결론은 편견을 낳습니다. 편견은 분쟁을 일으킵니다. 어느 한 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화합을 깨트립니다. 한 가지 잘못으로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학교공부를 못한다고 그 사람이 모자라고 실패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박찬호, 박세리 선수를 보세요. 그 사람들은 학교 다닐 때 공부는 못했지만 얼마나 성공했습니까?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자다가 결국 아들 함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 일 한가지로 우리가 노아를 알콜중독자라고 말해야 합니까? 다윗이 부하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범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윗을 간음쟁이라고 평가해야 할까요?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거짓말장이라고 해야 합니까? 또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베드로를 비겁쟁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 전체를 평가하고,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편견입니다. 대개 사이비종교들이 성경 어떤 한 두 구절을 너무 고집하다가 이단이 되고 거짓종교가 되었습니다.(약3:14, 요일2:21) 예를 들면 구원파는 로마서의 말씀인 믿음만을 강조하여 우리는 이미 구원 얻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 등등의 이단 사설을 주장합니다. 안식일교는 구약의 율법 중 하나인 토요일 안식만을 주장하고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다 거짓이라고 주장합니다. 성경말씀은 모두 진리입니다. 로마서도 구약도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한 면만을 보고 그것만을 주장하면 큰일납니다. 한쪽만 치우치면 병신입니다. 머리만 크면 과분수입니다. 한쪽 다리만 커지면 걷기 힘듭니다. 가슴만 키워도 안되고, 지, 정, 의 (知情意)를 고루 갖추어야합니다.
어떤 물체든 단면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물과 물건은 입체로 형성되어 있고 내부와 외부가 있습니다. 사회 현상도 마찬가지이며 인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흔히 일면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외형만을 보고서 판단하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존재 또는 현상을 바라보는 안목에 있어서 어느 일면만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을 편견이라 합니다. 편견 또는 선입관에 사로잡히면 사리를 분별할 수 없으며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없습니다. S. 존슨은 ‘편견에 사로잡히면 항상 약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편견만큼 무서운 질병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소외시켜 사회를 혼란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편견은 무지의 소산이며 경솔한 행위의 원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편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조언과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명심보감에도 "한 편의 말만 들으면 친한 사이가 멀어지기 쉽다"고 하여 편견에 치우치는 태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는 성경 말씀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의 겉과 외모만 보지 말고 속을 통찰해야 합니다. 눈앞에 상황만 보지 말고 앞으로 미치는 파장을 예측해 보아야 합니다. 세밀한 관찰과 주의 깊은 사려를 통해서만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H. D. 도로우는 ‘편견을 버린다는 것은 언제라도 결코 늦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인생의 거울로 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그가 말하는 것을 종합적으로 경청할 수 있어야 하며,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판단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편견이라고 판단되면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과감하게 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일한 편견을 두 번 갖지 않아야 합니다. 본질을 보고 다양하게 생각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길러야만 편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간청으로 그 도시에서 이틀 동안 함께 유하셨습니다(요4:40).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의 정서로는 유대인 랍비가 개 취급 받는 사마리아인들과 며칠을 함께 지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처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좁은 편견을 넘어섭니다. 인종차별, 이기주의, 편협한 교파주의, 분파주의, 개교회주의 심지어 민족주의 속에 숨어있는 자만에 찬 우월감과 자신의 절대화는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편견에 찬 삶에 도전하셨고 잘못된 인간의 벽을 몸소 깨뜨려 멸시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배타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지방색이 강한 한국사람들은 마음의 폭을 넓혀 서로 수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로버트 리 장군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 그는 수도 워싱턴의 한 교회를 방문하여 성찬식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한 흑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이를 본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자, 리 장군은 ‘십자가 아래서는 모든 땅이 평평한 것이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편견을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편견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공평무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종과, 사회 계급과 성별에 관계없이 구원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요, 위로부터 난 지혜에 따라 살고 있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편견이란 모든 사실을 다 알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편견의 대상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죽게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따뜻한 햇살처럼 편견의 안개를 거두어줍니다. 당신은 매일 평평한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하십니까?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니의 오디션에 새로운 심사 시스템이 도입되었는데, 이름 하여 "장막 오디션"이었습니다. 심사 위원들이 지원자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장막을 가려 놓고 심사하는 제도로, 아무 편견 없이 순전히 음악 실력만 평가하기 위해 도입된 방법이었습니다. 그 시스템 도입 직후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지원자가 너무 뛰어난 실력을 보였는데, 막이 올라가고 보니 일본인이었던 것입니다. 장막 오디션은 남녀 성별의 편견도 허물어 버렸습니다. 그전까지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연주자는 100퍼센트 남자였습니다. 여자는 남자만큼 연주할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힘이 약하고, 폐가 튼튼하지 못하며, 손도 작고, 특정 악기를 다룰 수 있는 탄력도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1960년대 중반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오디션 시스템이 도입된 첫해에 선발된 네 명의 바이올리니스트 모두가 여자였습니다. 1980년 독일 뮌헨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오디션도 장막 오디션이었는데, 트롬본 부문에서 만장일치로 뽑힌 지원자가 아비 코난트라는 여성이어서 모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평생 장막 오디션의 마인드로 살아야 합니다. 눈을 감고 그 사람의 실력의 소리, 인격의 소리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외모나 나이, 학벌과 집안 배경은 뒷전에 제쳐 두고 말입니다. 우리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편견에 빠집니다. 편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에는 결코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편견의 눈을 깨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내신 최고의 순간을 놓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성경 요한복음 7장에는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인 사건 후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수군거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예수라는 분의 행한 것보다 더 많겠는가?’ 그런 수군거림을 듣고 기득권에 위협을 느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하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이 예수님에게 가보니까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감동을 받아 소리쳤습니다. ‘이분이 참으로 메시야다.’ 그러자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들이 별 반박거리가 없으니까 지역성을 부각시켜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 지역에서 나오겠는가?’(요 7:41) 그런 장면을 보면서 하인들이 예수님을 잡지 않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하인들에게 ‘왜 예수를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하인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서 보니 그분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분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소리쳤습니다. "너희들도 미혹되었느냐? 그 사람은 이단이야!" 그 바리새인들의 말의 듣고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무조건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사람의 행한 것과 그 말한 것을 가지고 냉철하게 판단합시다!’ 무조건 사람을 거부하지 말고 그 사람됨과 언행을 보고 판단하자는 말이 얼마나 옳은 말입니까? 니고데모의 바른 소리에 나머지 바리새인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한마디로 톡톡히 창피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창피를 당했으니 무슨 반박하는 말을 해야겠는데 어떻게 반박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굴절된 지역감정을 이용해 자신들의 주장을 교묘하게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요한복음 7장 5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니고데모! 당신도 갈릴리 출신이오? 생각해 보시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해요! 당신이 갈릴리 출신이니까 갈릴리 사람인 예수를 변호하는 겁니까?’
성경에는 니고데모가 어디 출신인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갈릴리 출신이기에 예수님을 변호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다만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따라 말한 것인데, 그 말에 대응할 말이 없으니까 ‘너도 갈릴리 출신이냐’고 편견을 앞세운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역적 편견을 고취시킴으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역으로 선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느 지역은 어떻다’라고 하면서 편견을 고취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변호하려는 모습이 종종 발견됩니다. 사람들이 가장 쉽게 실수하는 점이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그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일반화를 통한 자기 변호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는 다 늑대야! 여자는 다 여우야!’라는 식의 말들도 일반화의 전형적인 말들입니다. 20세의 한 처녀가 남자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모든 남자는 다 늑대라고 말할 권리가 있을까요? 인생 20에 얼마나 많은 남자를 만나 보았다고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해야 할까요? 이런 일반화의 편견에는 동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양심을 혼란스럽게 하고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도로 바리새인들이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실질적으로 갈릴리 지역에서 선지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요나, 나훔, 호세야,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등 이스라엘 역사상 유명한 선지자들이 갈릴리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얼마나 근거 없는 편견입니까?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편견 때문에 메시야를 거부하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처럼 편견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진정 바르고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일반화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물을 볼 수 있는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열린 마음, 성숙한 자세를 가지고 진리 가운데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죽음과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도 거절하는 나를 참으시고 모든 죄를 사하시고 받으셨으니 그 은혜를 기억하며 항상 복음을 전하며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우리가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진리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빛의 사자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댓글[0]
지혜, 슬기
(2012-08-07 오전 11:42:39)http://blog.somang.net/holylove/7432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본문: 엡 5: 15- 17
탈무드에 나오는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돈 많은 부자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녀라고는 아들 하나인데 그 아들은 예루살렘에서 공부하고(유학)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병이 들어 오늘 내일 죽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불러 유언할 시간도 없고 유서가 아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재산은 많은데 참으로 큰 일 났습니다. 모두 아들에게 준다고 유서를 써놓았댔자 종들이 작당하여 찢어 버리면 그만일 것입니다. 아들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지도 않을뿐더러 유서를 전해주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칫하면 재산을 종들에게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지혜를 냅니다. 많은 종 가운데 한 종을 불러 “너에게 내 모든 재산을 다 주겠노라”하고 간단한 편지 한 통을 써서 아들에게 전해 달라고 하고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산을 받은 종은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그 많은 재산이 이제는 모두 자기 것입니다. 그는 주인이 남긴 유서를 그 아들에게 가져다 줍니다. 아버지의 유서를 받아본 아들은 기가 막힙니다. 자기에게 남겨진 유산이라는 종 한 사람뿐입니다. 많은 종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만을 남겨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그 유서를 가지고 랍비에게 묻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종 한 사람만을 남겨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랍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 어리석은 자여, 네 아버지의 재산을 다 물려받은 그 종을 네 종으로 삼으면 될 것이 아니냐.” 종의 것은 모두 주인의 것입니다. 아버지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지혜를 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는 깊이 생각하는 마음이요 멀리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비로소 알게 되는 지식입니다. 지혜의 중요성을 알고 지혜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첫째는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입니다.(시111:10)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입니다.(시14:1)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서 어디에서 행복과 기쁨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혹 찾더라도 일시적이요, 허무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1:7, 잠9:10)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어려울 때마다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내가 알지 못했던 지혜가 떠오릅니다.
둘째,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을 회개하고 죄와 악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죄와 악은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반드시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다윗 왕은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으나, 세상사는 동안 그 죄로 인해 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악을 떠남이 명철이며, 지혜로운 자는 악을 두려워합니다.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욥28:28)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잠14:16)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
셋째,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아끼고 게으르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일이 때가 있고, 기한이 있습니다. 기회를 놓친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5-16)
우리의 생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의 끝에 또 다른 영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라면 우리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요? 아마도 곧 다가올 영원의 시간을 준비할 것입니다. 또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에게도 역시, 영원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 줄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우리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잔30: 24- 28)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잠10:5)
넷째,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입술을 지키며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잠14:3)
다섯째,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의 보고인 성경 말씀을 항상 가까이하고 묵상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한다”(시19:7-8)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며’(시119:105)
여섯째, 지혜로운 사람을 가까이하여 사귀고, 지혜로운 사람의 훈계를 듣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사귀어야 합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스승을 잘 만나야 하고,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훌륭한 지도자와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13:20)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잠8:33)
일곱째,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사모하여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잠2:4-6)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징계를 통해서 깨닫습니다. 또한 자기를 성숙시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징계의 의미를 압니다. 징계를 통해서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징계를 통해서 지혜를 얻습니다. 지혜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징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잃는 것이나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3:11- 18)
여덟째,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나됨의 본질을 먼저 생각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누구냐를 바로 알고 자기 나이를 아는 것은 지혜 중의 지혜입니다. 자기가 생애의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이밖에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는 복음서 중에 나타난 예수님의 교훈의 세 가지 비유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인가 알아봅시다.
첫째,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마7:24-27)
지혜로운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건축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건축한다고 하였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지 아니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대로 순종하지 아니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서 바람이 불어오면,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그대로 보존되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입니까? 똑 같은 재료를 가지고, 똑 같이 수고를 하였고, 똑 같은 시간과 정성을 드렸으나 그 기초를 바로 설정하고, 바로 설정하지 못한 결과는 이와 같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반석은 무엇이며, 모래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여기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모래는 이 세상 물질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의 집을 튼튼히 세우는 지혜로운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등에 기름을 준비한 사람입니다.(마25:1-13)
등에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는 지혜로운 신부이지만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는 어리석은 신부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등에 기름을 준비한 신부는 진실한 신자인 동시에 교회라고 하면, 등에 기름을 준비하지 아니한 신부는 형식적인 교인인 동시에 거짓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등에 기름을 준비했느냐 못했느냐에 따라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즉 등에 기름을 준비한 다섯 신부는 영광스러운 잔치에 영접을 받았으나, 등에 기름을 준비치 못한 다섯 신부는 그만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고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신부들은 똑 같은 시간, 똑 같은 장소에서, 똑 같은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등에 기름을 준비하고 못한 결과는 엄청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이 등은 신자들의 심정을 가리키고,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랑은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령에 성령 충만함을 받아 장차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재물을 하나님 중심에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눅12:16-21)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재물을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인생의 재물관은, (1) 그 소출이 풍성해지는 것이 자기의 탓인 줄로 착각을 범했고, (2) 그 많은 재물을 불안전한 이 세상에 쌓아 두려는 착각을 범했고, (3) 그 많은 재물을 자신의 평안과 행복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착각을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인생의 재물관은, (1) 자기 재물이 풍성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깨달았고, (2) 그 풍성해지는 재물을 세상에 쌓아 두려고 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쌓아 두려고 하였고, (3) 자신의 평안과 행복이 이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기를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28:26)
결론적으로 어리석은 인생은 훗날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심판을 받으나 지혜로운 인생은 장차 하나님께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지혜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삶이 복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지혜를, 세월을 아끼는 지혜를, 성령충만함과 찬송과 감사하는 삶의 지혜를 주옵소서. 지혜와 지식의 근본인 여호와를 경외하며 주신 말씀에 순종하므로 가족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지혜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