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14 오후 9:31:48)http://blog.somang.net/holylove/7939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
본문: 마11: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루는 무디 선생님이 설교를 하다가 손에 컵을 들고 가르키며 말했습니다. ‘이 컵에서 공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사람들은 공기펌프로 빼야 한다느니 하며 여러 가지 방법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때 무디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컵에서 공기를 빼면 진공상태가 되여 컵이 깨져 버립니다. 컵이 깨지지 않게 공기를 제거 하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공기대신 다른 것을 채우면 됩니다.’ 하면서 주전자를 들고 컵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속에 모든 죄를 자복하고 회개를 하고 새사람이 되어 살려고 해도 그것이 결국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고 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깨끗이 비우기는 하지만 그 안에 다른 어떤 것을 대신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내안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워야 됩니다. 불교는 비움의 종교입니다. 단지 비움에서 끝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채우기 위해서 비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컵을 비워야 합니다. 거기에 믿음을 채워야 합니다. 소망을 채워야 합니다. 사랑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야 합니다. 기도로 채워야 합니다. 찬송으로 채워야 합니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는 마음으로 채워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온유, 절제, 자비, 양선, 충성, 오래 참음)로 채워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예수님 마음으로 채우지 않으면 더 악한 마음이 들어오게 됩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요13:4- 7),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요한 또한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하며 주님 앞에서 겸손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 하였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온전히 낮아졌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 45)
사도바울은 육체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빌3:5,6) 그런 그가 예수님을 믿은 후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이 성숙할수록 더욱 겸손하여졌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15:9)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그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지나자 그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하였습니다. 즉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 겸손하여지고, 신앙연륜이 깊어질수록 낮아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많이 할수록 더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인데, 자기가 주인노릇을 하려는 목사와 장로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목사와 장로간에 싸움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교회의 주인을 진정으로 예수님으로 모시려면 교회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도 모두가 평등해야 합니다. 그래서 위임목사나 장로도 한 번 선출되었다고 70세까지 할 것이 아니라 재신임투표 제도로 바꾸는 것이 바림직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 6)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17: 18- 19) 그리고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잠15:33) 또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잠22:4) 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 5- 8)
우리 다함께 찬송가 455장, <통> 507장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 자’을 부르겠습니다.
1.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2. 주 모습 내 눈에 안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3.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4. 주예수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날엔 뭇성도 변화하여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후렴>
주님의 마음 본 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누가복음 4:38~ 44에 보면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으셨는데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리의 여러 마을을 거쳐 가버나움에 이르신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십니다. 이어 심한 열병을 앓고 있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의 능력과 치유의 능력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해 질 무렵에는 예수님의 주위가 온갖 병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이미 예수께서 하루 종일의 수고로 인해 지친 때였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끝까지 모든 병자들을 기쁘게 맞으시며 일일이 그들의 몸 위에 손을 얹어 고쳐주셨습니다. 말씀으로도 그들을 고칠 수 있는 능력자이셨지만, 누구도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픈 부위를 만져가며 고쳐주셨습니다. 죄인이라 불리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에겐 이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파하고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이 긍휼의 마음은 마침내 십자가로까지 낮아지셔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금잔고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상을 받았는가도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목적을 달성했는가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랑을 나누며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읽었던 글이 떠오릅니다. “오늘 나는 해가 지고 난 다음 내가 가게 될 아름다운 나라를 생각해본다. 내 옆을 지키시는 그분의 크신 은총을 받을 때 내 관에는 별이 하나라도 있을 것인가? 저녁에 해가 지고 났을 때 내 관에는 별이 하나라도 있을 것인가? 평온의 큰 저택에서 축복받고 잠 깨었을 때 내 관에는 별이 하나라도 있을 것인가?” 서로 불쌍히 여깁시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의 진정한 가치는 신앙의 자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겸손하여 섬기는 자가 되고 온유하고 거룩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등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받기 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고 낮아져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참 평안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복되게 하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손함을 제 마음에 가득 담기 원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신뢰하고, 오직 기도함으로 해결을 얻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주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댓글[0]
마음, 정신, 생각
(2013-08-14 오후 9:31:47)http://blog.somang.net/holylove/7938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
본문: 마11: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루는 무디 선생님이 설교를 하다가 손에 컵을 들고 가르키며 말했습니다. ‘이 컵에서 공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사람들은 공기펌프로 빼야 한다느니 하며 여러 가지 방법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때 무디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컵에서 공기를 빼면 진공상태가 되여 컵이 깨져 버립니다. 컵이 깨지지 않게 공기를 제거 하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공기대신 다른 것을 채우면 됩니다.’ 하면서 주전자를 들고 컵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속에 모든 죄를 자복하고 회개를 하고 새사람이 되어 살려고 해도 그것이 결국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고 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깨끗이 비우기는 하지만 그 안에 다른 어떤 것을 대신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내안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워야 됩니다. 불교는 비움의 종교입니다. 단지 비움에서 끝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채우기 위해서 비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컵을 비워야 합니다. 거기에 믿음을 채워야 합니다. 소망을 채워야 합니다. 사랑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야 합니다. 기도로 채워야 합니다. 찬송으로 채워야 합니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는 마음으로 채워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온유, 절제, 자비, 양선, 충성, 오래 참음)로 채워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예수님 마음으로 채우지 않으면 더 악한 마음이 들어오게 됩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요13:4- 7),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요한 또한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하며 주님 앞에서 겸손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30) 하였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온전히 낮아졌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 45)
사도바울은 육체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빌3:5,6) 그런 그가 예수님을 믿은 후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이 성숙할수록 더욱 겸손하여졌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15:9)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그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지나자 그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하였습니다. 즉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 겸손하여지고, 신앙연륜이 깊어질수록 낮아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많이 할수록 더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인데, 자기가 주인노릇을 하려는 목사와 장로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목사와 장로간에 싸움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교회의 주인을 진정으로 예수님으로 모시려면 교회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도 모두가 평등해야 합니다. 그래서 위임목사나 장로도 한 번 선출되었다고 70세까지 할 것이 아니라 재신임투표 제도로 바꾸는 것이 바림직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 6)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17: 18- 19) 그리고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잠15:33) 또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잠22:4) 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 5- 8)
우리 다함께 찬송가 455장, <통> 507장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 자’을 부르겠습니다.
1.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2. 주 모습 내 눈에 안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3.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4. 주예수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날엔 뭇성도 변화하여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후렴>
주님의 마음 본 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누가복음 4:38~ 44에 보면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으셨는데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리의 여러 마을을 거쳐 가버나움에 이르신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십니다. 이어 심한 열병을 앓고 있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의 능력과 치유의 능력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해 질 무렵에는 예수님의 주위가 온갖 병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이미 예수께서 하루 종일의 수고로 인해 지친 때였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끝까지 모든 병자들을 기쁘게 맞으시며 일일이 그들의 몸 위에 손을 얹어 고쳐주셨습니다. 말씀으로도 그들을 고칠 수 있는 능력자이셨지만, 누구도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픈 부위를 만져가며 고쳐주셨습니다. 죄인이라 불리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에겐 이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파하고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이 긍휼의 마음은 마침내 십자가로까지 낮아지셔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금잔고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상을 받았는가도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목적을 달성했는가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랑을 나누며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읽었던 글이 떠오릅니다. “오늘 나는 해가 지고 난 다음 내가 가게 될 아름다운 나라를 생각해본다. 내 옆을 지키시는 그분의 크신 은총을 받을 때 내 관에는 별이 하나라도 있을 것인가? 저녁에 해가 지고 났을 때 내 관에는 별이 하나라도 있을 것인가? 평온의 큰 저택에서 축복받고 잠 깨었을 때 내 관에는 별이 하나라도 있을 것인가?” 서로 불쌍히 여깁시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의 진정한 가치는 신앙의 자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겸손하여 섬기는 자가 되고 온유하고 거룩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등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받기 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고 낮아져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참 평안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복되게 하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손함을 제 마음에 가득 담기 원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신뢰하고, 오직 기도함으로 해결을 얻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주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댓글[0]
친구, 벗, 우정
(2013-07-28 오후 6:46:36)http://blog.somang.net/holylove/7916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본문 : 막2: 1- 5
미국 프로농구 NBA 보스턴 셀틱스란 팀에 케빈 멕켈이랑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선수는 코칭스태프 중 케이시 존스라는 코치를 특히 존경했는데 그는 항상 선수들이 실수하고 어려운 때에 찾아와 칭찬해주고 격려를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케빈 맥켈은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케이시 코치가 승리의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들에게는 전혀 칭찬을 하지 않고 결승골을 놓치거나 팀을 지게 만든 선수들에게만 다가가서 격려를 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자신도 큰 실수를 저질렀을 땐 언제나 가장 먼저 다가와 ‘괜찮아, 신경쓰지 마 다음에 잘하면 되’라고 말해주었던 것이 케이시 코치였습니다. 그 이유를 궁금하게 여긴 케빈은 코치를 따로 만나 물어 보았습니다.
「코치님, 왜 우리가 잘했을 때는 칭찬이나 축하를 해주지 않고, 어째서 실수했을 땐 가장 먼저 다가와 격려를 해주는 거죠?」
「자네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팀을 승리로 이끌 땐 모두가 자네 칭찬을 한다네, 수많은 관중들이 자네의 이름을 부르고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지, 하지만 실수를 했을 때는 자네 혼자 남게 되지, 진정한 친구란 바로 그럴 때 필요하다네.」
성도가 사귀어야 할 진정한 친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1. 예수님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3- 15)
진정한 친구란 힘들고 외로울 때 찾아와주는 친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십니다. 혼자 남아있는 것 같이 느껴져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믿으십시오. 또한 이웃에게 주님과 같은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2.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18:1)
옛날에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은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하며 날만 새면 밖으로 나가곤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대접 하느라고 돈을 낭비 하는 것을 예사롭게 여겼습니다. 아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을 불러 놓고 타일렀습니다.
"얘야, 너도 이제 집안일을 돌볼 생각을 하거라. 어째서 날이면 날마다 밖으로만 돌아다닌단 말이냐?"
「아버지, 제가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친구들이 모두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 친구들은 제가 없으면 재미가 없대요. 여러 친구들에게 그렇게 환영을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버지.」
아들은 오히려 아버지가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는 것이 야속 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친구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할 일은 아니다. 웃는 얼굴로 어울리는 친구는 많아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진정한 친구는 드문 법이니까... 혹시 네 친구들이 너를 좋아하는 것은 너에게 받는 것에 재미를 들여서 그러는 것은 아니냐?」
「아버지는 제가 아직 어린애인 줄 아시는군요. 하지만 저도 그런 일쯤은 잘 알고 있어요. 제 친구들은 모두 진실한 친구 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제 친구들을 그렇게 생각 하신다면 저는 정말로 섭섭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친구를 사귐에 참으로 성공하였는지 아닌지를 이 애비가 시험해 보아도 되겠느냐?」
「아이 참, 아버지! 아버지는 평소에 친구가 없으셔서 저희들의 우정을 이해하실 수가 없으신 거예요. 하지만, 좋습니다! 이 기회에 저의 친구들이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여 드릴 수가 있을 테니까요.」
「그래 그럼 너는 오늘 밤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약속한 아버지는 그날 밤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거적에 쌌습니다. 그리고는 밤이 깊었을 때 그것을 둘러메고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맨 먼저 아들과 가장 친하다는 집으로 갔습니다.
「자아, 내가 시킨 대로 해 보아라.」
아들은 친구 집의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잠시 후 친구가 얼굴을 내밀고 말했습니다.
「아니, 이 밤중에 무슨 일인가? 지금은 몹시 피곤하니 웬만하면 내일 만나세.」
「이보게, 일이 다급하게 되었으니 나를 좀 도와 주게. 저어....., 실은 조금 전에 내가 실수하여 사람을 죽였네. 그래서 여기 시체를 가지고 왔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좀 도와 주게.」
「뭐라고 시체를 가지고 왔다고? 이거 왜 이러나? 나는 그런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 내 집에서 냉큼 사라지게.」
「이보게, 우리는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닌가. 이 일은 나 혼자 해결하기에 너무 벅찬 일이어서 자네의 도움을 받고자 이렇게 온 것일세. 우정을 베풀어 주게나.」
「우리가 친구 사이라고? 그 그런 말 말게. 나는 살인자를 친구로 둔 적은 없네. 여러 말할 것 없이 어서 내 집 앞에서 사라져 주게.」
아들의 친구는 끝까지 냉랭하게 거절했습니다. 아들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다른 친구의 집을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역시 냉정하게 문전 박대를 당하였습니다. 아들은 그 뒤에도 몇몇 친구의 집을 더 찾았으나, 어디에서나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습니다.
친구 중에는 도와주기는 커녕 날이 새면 관가에 고발하겠다고 호령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들의 뒤를 멀치 감치 따라다니며 그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자아, 이번에는 내 친구를 찾아가 보기로 하자.」
두 사람은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리자 아버지의 친구가 나왔습니다.
「아니 이 밤중에 웬일인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뜻밖의 방문을 받은 아버지의 친구가 말했습니다. "큰일났네. 실은 내가 실수하여 사람을 죽였네. 그래서 이렇게 시체를 메고 자네의 도움을 받으러 왔네."
「저런! 자네가 어쩌다가.... 아무튼 어서 들어오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은 해결 방법이 있을걸쎄.」
두 사람은 친구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조금 있으면 날이 샐 것이니, 이 시체를 지금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야. 그러니, 당분간 저 나무 밑에... 자네는 내 옷으로 갈아 입게나.」
아버지의 친구는 거적에 쌓인 것을 번쩍 둘러메고 자기 집 마당으로 갔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껄껄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친구여, 미안하네. 그 거적에 쌓인 것은 시체가 아니라 돼지 고기라네. 내가 돼지를 한 마리 잡아 왔네 그려."(그리고 밖에 하인들이 지게에 돼지 3마리 가지고 대기중 이라네!)
「뭐야? 에잇, 짓궂은 친구 같으니!」 아버지의 친구는 '휴우' 하고 한숨을 쉬면서 몹시 다행스러워 했습니다.
「내가 이 아이에게 우리의 우정을 본보기로 보여 주고 싶었네. 자아, 우리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서 술이나 한 잔 하세.」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날이 새도록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담을 나눴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알았을 것이다. 친구가 많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요. 친구를 날마다 만나는 것도 반드시 좋은 일이 아니니라. 형편이 좋을 때는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많으나, 위급한 처지에 있을 때 도와주는 친구는 많지 않는 법이니라. 그것은 참된 우정을 나눈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말없이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교훈 삼아 참된 친구를 사귀는 지혜를 기르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잠17:17)
3. 친구의 잘못을 비방하지 않고 진심으로 충고해 주는 사람입니다.
酒食兄弟 는 千個有 로되
急難之朋 은 一個無 니라.
술과 음식을 먹을 때에는 형이니 아우니 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많으나, 위급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와주는 친구는 하나도 없도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을 계산하며 주판알을 튕기고 친구를 사귀는 사람이 많습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27:6- 12)
4. 형제보다 친밀하고 친구를 위해 수시로 기도해주는 사람입니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18:24)
독일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뒤러는 소묘 900점, 목판화 350점을 비롯해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서도 대표작은 현재 뉴른베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져 있는 <기도하는 손>입니다. 이 그림에는 위대한 사랑과 믿음을 내용한 자신들의 이야기가 담겨진 그림이었습니다. 즉 그림공부에 뜻은 두었으나 가난했던 뒤러는 친구 하나와 약속을 했습니다. 한 쪽이 그림공부를 하는 동안 한 쪽은 노동을 해서 학비를 돕기로 했는데 뒤러가 먼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름을 얻게 되자 친구를 공부시키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친구는 마침 기도 중이었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뒤러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심한 노동으로 손이 굳어져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오나 내 친구 뒤러만은 화가로서 성공하게 해주옵소서." 뒤러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연필을 꺼내어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했습니다.
5. 친구의 고통과 아픔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친구입니다.
위스콘신의 밀워키에 살고 있는 한 십대 소년이 암으로 수주일 동안 입원하여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을 받았습니다. 입원 중 소년은 머리털이 다 빠졌습니다.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걱정했습니다. 암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대머리가 되어 학교에 갔을 때 당할 부끄러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가발 같은 것은 쓰지 않기로 벌써 결심했습니다. 그가 집에 도착하여 현관에 들어서서 전등을 켰을 때였습니다. 놀랍게도 50명이나 되는 그의 친구들이 소리치며 뛰어왔습니다. "퇴원을 축하해!" 소년은 방안을 돌아보며 그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50명이나 되는 그의 친구 모두가 머리를 밀어버렸기 때문입니다.
6. 희노애락을 끝까지 함께 하고 동행해주는 친구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세 친구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왕이 어떤 사람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지금 당장 왕궁으로 들어오라는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와는 아주 친했고, 두 번째 친구와는 조금 친했으며, 세 번째 친구는 그럭저럭 친한 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왕이 자기를 왜 부를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는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왕궁으로 가서 자기를 변호케 하고 싶었습니다. 동행해 줄 것을 요청받은 첫 번째 친구는 무턱대고 그 일은 못하겠다고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를 찾아갔더니 궁전 앞까지는 따라갈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야지! 자네는 그 동안 아무 나쁜 짓도 하지 않았으니 염려할 것이 없네. 내가 자네와 함께 왕께 가서 말해주겠네.」
그는 그제야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누구인지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친구란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 위로와 힘이 되어주는 친구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되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영원한 우리의 위로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십시오.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아5: 16)
7. 고난과 어려움 중에도 변함없이 함께하고 돕는 친구입니다.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됐을 때, 스타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 지 3년이 된 건물을 헐게 되었답니다. 지붕을 벗기던 인부들은 꼬리 쪽에 못이 박힌 채 벽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집주인은 인부들을 불러 그 못을 언제 박았느냐고 물어 보았지요. 그랬더니 인부들은 한결같이 집을 짓던 3년 전에 박은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3년 동안이나 못에 박힌 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습니다. 사람들은 이 신기한 사실의 전말을 알아보기 위하여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도마뱀을 지켜보기로 했답니다. 그랬더니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마뱀은 3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못에 박힌 친구를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먹이를 가져다 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오륜(五倫)에도 朋友有信(붕우유신) 이 있는데 그만큼 친구의 중요함을 말해주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외국의 어느 한 출판사에서 '친구' 라는 단어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을 공모한 적이 있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밤이 깊을 때 전화하고 싶은 사람, 나의 아픔을 진지하게 들어 주는 사람,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 등 여러 가지 정의를 내렸지만 그 중 1등을 한 것은 바로 이 내용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등지고 떠날 때 나를 찾아올 수 있는 사람.」
사람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친구 또한 아무나 될 수 있지만 아픔과 슬픔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는 아무나 될 수 없는 법이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시기에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 바랍니다. 좋은 친구는 평생 갑니다. 좋은 친구만큼 우리 인생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장거리 인생길을 친구 없이 가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런 일입니다. 좋은 길동무는 인생길에 웃음을 선사하고 즐거움을 줍니다.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것은 바로 좋은 친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러므로 잠언 27:17에서는??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좋은 친구를 갖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광야 같은 쓸쓸하고 험악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 꿈과 우정을 나눌 친구가 없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친구가 4명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의 몸이 중풍 병을 앓게 되어 슬픔 가운데 있었지만, 그 슬픔을 함께 나눌 좋은 친구들이 있으니 어찌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고,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고침 받은 병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이스라엘 온 지방으로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병들을 고치셨기 때문에 병든 사람 사이에서는 그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발 딛을 틈도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중풍병자가 4명의 친구들에 의하여 들것에 실려 그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달아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갑자기 지붕 위에서 들것이 내려와 예수님 앞에 놓이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염치를 불구하고 자신의 친구가 살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감당할 태세였습니다. 이들의 우정이 실로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본문 5절을 보면서, 깜짝 놀랄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중풍병자의 병이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친구들의 믿음으로 나았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누구의 믿음을 보았다고요? 예,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내 자신의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의 믿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사실 구원이란 내 자신의 믿음이나 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8절에서 우리의 믿음조차 우리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론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타난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모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친구가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친구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자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자신의 친구가 중풍 병이 들어 더 이상 친구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에도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 그 아픔을 나눴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중풍 병이 든 친구가 없습니까? 없다고요? 그러겠지요. 그러나 영적인 중풍 병이 든 친구는 많을 것입니다. 혹시 송명희 시인을 아십니까? 뇌성마비의 장애를 극복하고 700여 편의 신앙시를 지은 귀한 사람입니다. 그분의 시중에서 ??참 소경??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참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보는 사람인가? 참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보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못보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소경이 아닌가? 앉은뱅이 누구인가? 이 땅을 못 걷는 사람인가? 앉은뱅이 누구인가? 이 땅을 못 걷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께 못 가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앉은뱅이 아닌가? 참 병신이 누구인가? 세상을 모르는 사람인가? 참 병신이 누구인가? 세상을 모르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모르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병신이 아닌가? 벙어리가 누구인가? 유창히 말못하는 사람인가? 벙어리가 누구인가? 유창히 말 못하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기도를 못하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벙어리 아닌가? 참 죄인이 누구인가? 자기죄 슬퍼하는 사람인가? 참죄인이 누구인가? 자기 죄 슬퍼하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자기 죄 모르는 사람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죄인이 아닌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다 참 소경이요 병신이요 중풍병자란 사실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친구 중에 이런 중풍병자는 없습니까? 그 친구를 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들의 진정한 친구라면 속히 그를 들것이라도 메어 달아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친구의 모습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믿음이 없을지라도 여러분의 믿음으로 친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증명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병들어 죽어가는 친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그대로 나 둘 수 없습니다. 친구의 영혼을 위하여 울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친구가 되어 여러분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여러분의 중풍 병든 친구를 주님 앞으로 데려오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친구는 그 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를 주님 앞으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 친구를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성경 사무엘상 14장에 보면 또 아름다운 친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 간의 친구이야기입니다. 요나단은 자기 부친 사울왕에게 다윗을 위해 변호하고,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나쁜 계획을 다윗에게 알려주어 살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삼상 18장 1절에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하였습니다. 요나단이 사울과 함께 전사하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친구의 사랑을 잊지 않고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궁중에서 살게 하고 함께 식사하게 했습니다. 중병병자의 친구와 다윗과 요나단의 친구보다 더 귀하고 좋은 친구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친구, 내가 최악의 환경에 처해도 떠나지 않는 친구, 나를 대신하여 감옥에도 갈 수 있고 대신 죽어주는 그런 친구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에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만왕의 왕께서 우리를 친구로 여겨주시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예수님을 친구로 사귀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가장 좋은 친구이신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것은 바로 그들을 회개시켜 천국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해줄 만한 친구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친구뿐입니다. 내 친구 되시는 예수님과 깊이 사귈수록 죄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 친구를 가까이 사귈수록 예수님 인격을 닮아가게 되고 내 안에는 하늘의 능력이 더욱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슬픔을 당한 자의 친구이십니다. 예수님은 개인뿐만 아니라 군중들까지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무리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와 같이 사회적인 약자의 슬픔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슬픔도 모른 체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너무 크고 심각해서 해결할 엄두를 못내고 슬픔과 실의에 빠진 자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친구가 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비밀이 없으신 친구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하늘의 중요한 비밀들을 모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영적 비밀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비밀만 알려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인 모든 비밀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비밀을 알고 난 후에 우리 인간과 예수님의 대하시는 모습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교제는 처음에는 좋았는데 끝이 좋지 않은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 성품, 나약한 부분, 단점, 허물진 모습을 다 아시면서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친구이십니다. 그래서 안심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친구입니다. 절대로 그분에게 버림받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사람 앞에서 맹세하면서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그를 미워하셨습니까. 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똑같은 사랑으로 베드로를 대해 주셨습니다. 또 나를 위해 변치 않는 우정으로 희생하는 친구이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세상에서 친구를 위해 대신 죽는 우정은 최고의 사랑이요, 최고의 희생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십니다.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우리가 건강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 할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이런 친구 되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는 분이십니다. 천지가 변하고 모든 이가 내 곁을 떠나도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주시는 친구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사랑의 주님, 진정한 친구 되시는 주님께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님과 같은 친구되게 하소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덕을 베풀게 하소서.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을 만날 때는 위로하고, 그들의 손을 붙잡고 용기를 주게 하소서 시험 당하고 있는 자들을 만날 때는 그들이 시험과 싸워 이길 수 있게 커다란 힘이 되게 하소서.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는 그들을 기꺼이 도와주게 하소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좋은 친구가 되게 하소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는 동역자를 더 많이 허락하소서. 저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찬송하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 나의 참 친구 ??
1.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없네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없네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없네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없네
괴로울 때 다가와서 마음에 평화주는 신실하신 나의 참친구
외로울 때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랑 많은 나의 참친구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2. 예수 사랑 참 좋은 예수 사랑 예수 사랑 참 좋은 예수 사랑
예수 사랑 참 좋은 예수 사랑 예수 사랑 참 좋은 예수 사랑
세상에서 제일 가는 금으로 유혹해도 예수님만 사랑하겠네
세상에서 제일 높은 명예를 준다해도 예수님만 따라가겠네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
▣ 묵상:
0 나에게 진정한 친구는 누구인가?
0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친구는?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친구는?
0 당신이 어려움 중에 있을 때 함께 할 친구는 누구일까요?
0 교회에서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입니까?
0 교회 친구끼리 모이면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0 우리 교회 중 고등부에서 서로의 우정은 어떤 상태라고 생각합니까?
0 교회에서나 학교에서 친하지 않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들 중 예수님께서 교제하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떻게 그의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세요. 힘들었던 순간마다 함께 하셨던 주님을 회상하고 더 굳건히 믿으십시오.
0 친구의 슬픔을 내 등에 짊어진 적이 있었다면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0 친구가 나와 함께 짊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나의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었나요?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댓글[0]
친구, 벗, 우정
(2013-07-28 오후 6:46:35)http://blog.somang.net/holylove/7915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본문 : 막2: 1- 5
미국 프로농구 NBA 보스턴 셀틱스란 팀에 케빈 멕켈이랑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선수는 코칭스태프 중 케이시 존스라는 코치를 특히 존경했는데 그는 항상 선수들이 실수하고 어려운 때에 찾아와 칭찬해주고 격려를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케빈 맥켈은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케이시 코치가 승리의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들에게는 전혀 칭찬을 하지 않고 결승골을 놓치거나 팀을 지게 만든 선수들에게만 다가가서 격려를 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자신도 큰 실수를 저질렀을 땐 언제나 가장 먼저 다가와 ‘괜찮아, 신경쓰지 마 다음에 잘하면 되’라고 말해주었던 것이 케이시 코치였습니다. 그 이유를 궁금하게 여긴 케빈은 코치를 따로 만나 물어 보았습니다.
「코치님, 왜 우리가 잘했을 때는 칭찬이나 축하를 해주지 않고, 어째서 실수했을 땐 가장 먼저 다가와 격려를 해주는 거죠?」
「자네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팀을 승리로 이끌 땐 모두가 자네 칭찬을 한다네, 수많은 관중들이 자네의 이름을 부르고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지, 하지만 실수를 했을 때는 자네 혼자 남게 되지, 진정한 친구란 바로 그럴 때 필요하다네.」
성도가 사귀어야 할 진정한 친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1. 예수님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3- 15)
진정한 친구란 힘들고 외로울 때 찾아와주는 친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십니다. 혼자 남아있는 것 같이 느껴져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믿으십시오. 또한 이웃에게 주님과 같은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2.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18:1)
옛날에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은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하며 날만 새면 밖으로 나가곤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대접 하느라고 돈을 낭비 하는 것을 예사롭게 여겼습니다. 아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을 불러 놓고 타일렀습니다.
"얘야, 너도 이제 집안일을 돌볼 생각을 하거라. 어째서 날이면 날마다 밖으로만 돌아다닌단 말이냐?"
「아버지, 제가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친구들이 모두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 친구들은 제가 없으면 재미가 없대요. 여러 친구들에게 그렇게 환영을 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버지.」
아들은 오히려 아버지가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는 것이 야속 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친구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할 일은 아니다. 웃는 얼굴로 어울리는 친구는 많아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진정한 친구는 드문 법이니까... 혹시 네 친구들이 너를 좋아하는 것은 너에게 받는 것에 재미를 들여서 그러는 것은 아니냐?」
「아버지는 제가 아직 어린애인 줄 아시는군요. 하지만 저도 그런 일쯤은 잘 알고 있어요. 제 친구들은 모두 진실한 친구 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제 친구들을 그렇게 생각 하신다면 저는 정말로 섭섭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친구를 사귐에 참으로 성공하였는지 아닌지를 이 애비가 시험해 보아도 되겠느냐?」
「아이 참, 아버지! 아버지는 평소에 친구가 없으셔서 저희들의 우정을 이해하실 수가 없으신 거예요. 하지만, 좋습니다! 이 기회에 저의 친구들이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여 드릴 수가 있을 테니까요.」
「그래 그럼 너는 오늘 밤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약속한 아버지는 그날 밤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거적에 쌌습니다. 그리고는 밤이 깊었을 때 그것을 둘러메고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맨 먼저 아들과 가장 친하다는 집으로 갔습니다.
「자아, 내가 시킨 대로 해 보아라.」
아들은 친구 집의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잠시 후 친구가 얼굴을 내밀고 말했습니다.
「아니, 이 밤중에 무슨 일인가? 지금은 몹시 피곤하니 웬만하면 내일 만나세.」
「이보게, 일이 다급하게 되었으니 나를 좀 도와 주게. 저어....., 실은 조금 전에 내가 실수하여 사람을 죽였네. 그래서 여기 시체를 가지고 왔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좀 도와 주게.」
「뭐라고 시체를 가지고 왔다고? 이거 왜 이러나? 나는 그런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 내 집에서 냉큼 사라지게.」
「이보게, 우리는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닌가. 이 일은 나 혼자 해결하기에 너무 벅찬 일이어서 자네의 도움을 받고자 이렇게 온 것일세. 우정을 베풀어 주게나.」
「우리가 친구 사이라고? 그 그런 말 말게. 나는 살인자를 친구로 둔 적은 없네. 여러 말할 것 없이 어서 내 집 앞에서 사라져 주게.」
아들의 친구는 끝까지 냉랭하게 거절했습니다. 아들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다른 친구의 집을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역시 냉정하게 문전 박대를 당하였습니다. 아들은 그 뒤에도 몇몇 친구의 집을 더 찾았으나, 어디에서나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습니다.
친구 중에는 도와주기는 커녕 날이 새면 관가에 고발하겠다고 호령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들의 뒤를 멀치 감치 따라다니며 그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자아, 이번에는 내 친구를 찾아가 보기로 하자.」
두 사람은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리자 아버지의 친구가 나왔습니다.
「아니 이 밤중에 웬일인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뜻밖의 방문을 받은 아버지의 친구가 말했습니다. "큰일났네. 실은 내가 실수하여 사람을 죽였네. 그래서 이렇게 시체를 메고 자네의 도움을 받으러 왔네."
「저런! 자네가 어쩌다가.... 아무튼 어서 들어오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은 해결 방법이 있을걸쎄.」
두 사람은 친구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조금 있으면 날이 샐 것이니, 이 시체를 지금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야. 그러니, 당분간 저 나무 밑에... 자네는 내 옷으로 갈아 입게나.」
아버지의 친구는 거적에 쌓인 것을 번쩍 둘러메고 자기 집 마당으로 갔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껄껄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친구여, 미안하네. 그 거적에 쌓인 것은 시체가 아니라 돼지 고기라네. 내가 돼지를 한 마리 잡아 왔네 그려."(그리고 밖에 하인들이 지게에 돼지 3마리 가지고 대기중 이라네!)
「뭐야? 에잇, 짓궂은 친구 같으니!」 아버지의 친구는 '휴우' 하고 한숨을 쉬면서 몹시 다행스러워 했습니다.
「내가 이 아이에게 우리의 우정을 본보기로 보여 주고 싶었네. 자아, 우리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서 술이나 한 잔 하세.」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날이 새도록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담을 나눴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알았을 것이다. 친구가 많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요. 친구를 날마다 만나는 것도 반드시 좋은 일이 아니니라. 형편이 좋을 때는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많으나, 위급한 처지에 있을 때 도와주는 친구는 많지 않는 법이니라. 그것은 참된 우정을 나눈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말없이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교훈 삼아 참된 친구를 사귀는 지혜를 기르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잠17:17)
3. 친구의 잘못을 비방하지 않고 진심으로 충고해 주는 사람입니다.
酒食兄弟 는 千個有 로되
急難之朋 은 一個無 니라.
술과 음식을 먹을 때에는 형이니 아우니 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많으나, 위급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와주는 친구는 하나도 없도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을 계산하며 주판알을 튕기고 친구를 사귀는 사람이 많습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27:6- 12)
4. 형제보다 친밀하고 친구를 위해 수시로 기도해주는 사람입니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18:24)
독일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뒤러는 소묘 900점, 목판화 350점을 비롯해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서도 대표작은 현재 뉴른베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져 있는 <기도하는 손>입니다. 이 그림에는 위대한 사랑과 믿음을 내용한 자신들의 이야기가 담겨진 그림이었습니다. 즉 그림공부에 뜻은 두었으나 가난했던 뒤러는 친구 하나와 약속을 했습니다. 한 쪽이 그림공부를 하는 동안 한 쪽은 노동을 해서 학비를 돕기로 했는데 뒤러가 먼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름을 얻게 되자 친구를 공부시키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친구는 마침 기도 중이었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뒤러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심한 노동으로 손이 굳어져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오나 내 친구 뒤러만은 화가로서 성공하게 해주옵소서." 뒤러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연필을 꺼내어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했습니다.
5. 친구의 고통과 아픔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친구입니다.
위스콘신의 밀워키에 살고 있는 한 십대 소년이 암으로 수주일 동안 입원하여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을 받았습니다. 입원 중 소년은 머리털이 다 빠졌습니다.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걱정했습니다. 암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대머리가 되어 학교에 갔을 때 당할 부끄러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가발 같은 것은 쓰지 않기로 벌써 결심했습니다. 그가 집에 도착하여 현관에 들어서서 전등을 켰을 때였습니다. 놀랍게도 50명이나 되는 그의 친구들이 소리치며 뛰어왔습니다. "퇴원을 축하해!" 소년은 방안을 돌아보며 그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50명이나 되는 그의 친구 모두가 머리를 밀어버렸기 때문입니다.
6. 희노애락을 끝까지 함께 하고 동행해주는 친구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세 친구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왕이 어떤 사람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지금 당장 왕궁으로 들어오라는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와는 아주 친했고, 두 번째 친구와는 조금 친했으며, 세 번째 친구는 그럭저럭 친한 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왕이 자기를 왜 부를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는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왕궁으로 가서 자기를 변호케 하고 싶었습니다. 동행해 줄 것을 요청받은 첫 번째 친구는 무턱대고 그 일은 못하겠다고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를 찾아갔더니 궁전 앞까지는 따라갈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야지! 자네는 그 동안 아무 나쁜 짓도 하지 않았으니 염려할 것이 없네. 내가 자네와 함께 왕께 가서 말해주겠네.」
그는 그제야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누구인지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친구란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 위로와 힘이 되어주는 친구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되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영원한 우리의 위로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십시오.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아5: 16)
7. 고난과 어려움 중에도 변함없이 함께하고 돕는 친구입니다.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됐을 때, 스타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 지 3년이 된 건물을 헐게 되었답니다. 지붕을 벗기던 인부들은 꼬리 쪽에 못이 박힌 채 벽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집주인은 인부들을 불러 그 못을 언제 박았느냐고 물어 보았지요. 그랬더니 인부들은 한결같이 집을 짓던 3년 전에 박은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3년 동안이나 못에 박힌 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습니다. 사람들은 이 신기한 사실의 전말을 알아보기 위하여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도마뱀을 지켜보기로 했답니다. 그랬더니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마뱀은 3년이란 긴 세월 동안 못에 박힌 친구를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먹이를 가져다 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오륜(五倫)에도 朋友有信(붕우유신) 이 있는데 그만큼 친구의 중요함을 말해주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외국의 어느 한 출판사에서 '친구' 라는 단어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을 공모한 적이 있었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밤이 깊을 때 전화하고 싶은 사람, 나의 아픔을 진지하게 들어 주는 사람,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 등 여러 가지 정의를 내렸지만 그 중 1등을 한 것은 바로 이 내용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등지고 떠날 때 나를 찾아올 수 있는 사람.」
사람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친구 또한 아무나 될 수 있지만 아픔과 슬픔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는 아무나 될 수 없는 법이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시기에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 바랍니다. 좋은 친구는 평생 갑니다. 좋은 친구만큼 우리 인생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장거리 인생길을 친구 없이 가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런 일입니다. 좋은 길동무는 인생길에 웃음을 선사하고 즐거움을 줍니다.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것은 바로 좋은 친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러므로 잠언 27:17에서는??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좋은 친구를 갖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광야 같은 쓸쓸하고 험악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 꿈과 우정을 나눌 친구가 없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친구가 4명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의 몸이 중풍 병을 앓게 되어 슬픔 가운데 있었지만, 그 슬픔을 함께 나눌 좋은 친구들이 있으니 어찌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고,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고침 받은 병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이스라엘 온 지방으로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병들을 고치셨기 때문에 병든 사람 사이에서는 그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발 딛을 틈도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중풍병자가 4명의 친구들에 의하여 들것에 실려 그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달아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갑자기 지붕 위에서 들것이 내려와 예수님 앞에 놓이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염치를 불구하고 자신의 친구가 살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감당할 태세였습니다. 이들의 우정이 실로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본문 5절을 보면서, 깜짝 놀랄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중풍병자의 병이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친구들의 믿음으로 나았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누구의 믿음을 보았다고요? 예,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내 자신의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의 믿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사실 구원이란 내 자신의 믿음이나 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8절에서 우리의 믿음조차 우리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론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타난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모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친구가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친구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자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자신의 친구가 중풍 병이 들어 더 이상 친구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에도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 그 아픔을 나눴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중풍 병이 든 친구가 없습니까? 없다고요? 그러겠지요. 그러나 영적인 중풍 병이 든 친구는 많을 것입니다. 혹시 송명희 시인을 아십니까? 뇌성마비의 장애를 극복하고 700여 편의 신앙시를 지은 귀한 사람입니다. 그분의 시중에서 ??참 소경??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참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보는 사람인가? 참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보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못보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소경이 아닌가? 앉은뱅이 누구인가? 이 땅을 못 걷는 사람인가? 앉은뱅이 누구인가? 이 땅을 못 걷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께 못 가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앉은뱅이 아닌가? 참 병신이 누구인가? 세상을 모르는 사람인가? 참 병신이 누구인가? 세상을 모르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모르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병신이 아닌가? 벙어리가 누구인가? 유창히 말못하는 사람인가? 벙어리가 누구인가? 유창히 말 못하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기도를 못하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벙어리 아닌가? 참 죄인이 누구인가? 자기죄 슬퍼하는 사람인가? 참죄인이 누구인가? 자기 죄 슬퍼하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자기 죄 모르는 사람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죄인이 아닌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다 참 소경이요 병신이요 중풍병자란 사실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친구 중에 이런 중풍병자는 없습니까? 그 친구를 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들의 진정한 친구라면 속히 그를 들것이라도 메어 달아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친구의 모습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믿음이 없을지라도 여러분의 믿음으로 친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증명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병들어 죽어가는 친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그대로 나 둘 수 없습니다. 친구의 영혼을 위하여 울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친구가 되어 여러분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여러분의 중풍 병든 친구를 주님 앞으로 데려오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친구는 그 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를 주님 앞으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 친구를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성경 사무엘상 14장에 보면 또 아름다운 친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 간의 친구이야기입니다. 요나단은 자기 부친 사울왕에게 다윗을 위해 변호하고,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나쁜 계획을 다윗에게 알려주어 살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삼상 18장 1절에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하였습니다. 요나단이 사울과 함께 전사하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친구의 사랑을 잊지 않고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궁중에서 살게 하고 함께 식사하게 했습니다. 중병병자의 친구와 다윗과 요나단의 친구보다 더 귀하고 좋은 친구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친구, 내가 최악의 환경에 처해도 떠나지 않는 친구, 나를 대신하여 감옥에도 갈 수 있고 대신 죽어주는 그런 친구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에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만왕의 왕께서 우리를 친구로 여겨주시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친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예수님을 친구로 사귀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가장 좋은 친구이신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사람들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것은 바로 그들을 회개시켜 천국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해줄 만한 친구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친구뿐입니다. 내 친구 되시는 예수님과 깊이 사귈수록 죄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 친구를 가까이 사귈수록 예수님 인격을 닮아가게 되고 내 안에는 하늘의 능력이 더욱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슬픔을 당한 자의 친구이십니다. 예수님은 개인뿐만 아니라 군중들까지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무리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와 같이 사회적인 약자의 슬픔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슬픔도 모른 체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너무 크고 심각해서 해결할 엄두를 못내고 슬픔과 실의에 빠진 자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친구가 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비밀이 없으신 친구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하늘의 중요한 비밀들을 모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영적 비밀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비밀만 알려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인 모든 비밀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비밀을 알고 난 후에 우리 인간과 예수님의 대하시는 모습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교제는 처음에는 좋았는데 끝이 좋지 않은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 성품, 나약한 부분, 단점, 허물진 모습을 다 아시면서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친구이십니다. 그래서 안심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친구입니다. 절대로 그분에게 버림받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사람 앞에서 맹세하면서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그를 미워하셨습니까. 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똑같은 사랑으로 베드로를 대해 주셨습니다. 또 나를 위해 변치 않는 우정으로 희생하는 친구이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세상에서 친구를 위해 대신 죽는 우정은 최고의 사랑이요, 최고의 희생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십니다.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우리가 건강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 할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이런 친구 되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는 분이십니다. 천지가 변하고 모든 이가 내 곁을 떠나도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주시는 친구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사랑의 주님, 진정한 친구 되시는 주님께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님과 같은 친구되게 하소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덕을 베풀게 하소서.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을 만날 때는 위로하고, 그들의 손을 붙잡고 용기를 주게 하소서 시험 당하고 있는 자들을 만날 때는 그들이 시험과 싸워 이길 수 있게 커다란 힘이 되게 하소서.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는 그들을 기꺼이 도와주게 하소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좋은 친구가 되게 하소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는 동역자를 더 많이 허락하소서. 저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찬송하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 나의 참 친구 ??
1.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없네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없네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없네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없네
괴로울 때 다가와서 마음에 평화주는 신실하신 나의 참친구
외로울 때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랑 많은 나의 참친구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2. 예수 사랑 참 좋은 예수 사랑 예수 사랑 참 좋은 예수 사랑
예수 사랑 참 좋은 예수 사랑 예수 사랑 참 좋은 예수 사랑
세상에서 제일 가는 금으로 유혹해도 예수님만 사랑하겠네
세상에서 제일 높은 명예를 준다해도 예수님만 따라가겠네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
▣ 묵상:
0 나에게 진정한 친구는 누구인가?
0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친구는?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친구는?
0 당신이 어려움 중에 있을 때 함께 할 친구는 누구일까요?
0 교회에서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입니까?
0 교회 친구끼리 모이면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0 우리 교회 중 고등부에서 서로의 우정은 어떤 상태라고 생각합니까?
0 교회에서나 학교에서 친하지 않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들 중 예수님께서 교제하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떻게 그의 친구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세요. 힘들었던 순간마다 함께 하셨던 주님을 회상하고 더 굳건히 믿으십시오.
0 친구의 슬픔을 내 등에 짊어진 적이 있었다면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0 친구가 나와 함께 짊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나의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었나요?
크리스천의 나라사랑댓글[0]
지유로운 글
(2013-07-24 오후 12:56:48)http://blog.somang.net/holylove/7910
크리스천의 나라사랑
본문: 시33: 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가리발디는 19세기 이탈리아의 개혁과 통일운동에 공헌한 국민적 영웅입니다. 어느 날 가리발디가 청년들을 모아놓고 민족을 위해 싸우자고 역설하자 한 청년이 나와서 "만일 내가 조국을 위해 사운다면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가리발디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칼에 베인 상처, 심한 부상, 끝내 죽음이 대가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대들의 상처와 죽음으로 이탈리아는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이요, 우리의 후손은 평화롭게 살 것입니다."
그리고 3 .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남궁억 선생님은 암울한 역사에 한 줄기 빛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황성신문 사장, 현산학교 설립자, 관동학회 회장 등으로 나라를 위해 일했습니다. 찬송가 580장(구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그의 작품입니다. 그는 특히 무궁화 심기 운동을 전개해 나라 사랑과 독립의지를 일깨웠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순국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런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시체를 불살라 곱게 가루 내어 무궁화나무에 거름으로 주게 하라" "누가 진정한 애국자인가?"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내리기는 참 어렵습니다. 지금처럼 세상이 어수선한 때는 더욱 애국자가 필요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애국자인 것 같은데 사실은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애국자로 자처하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 느헤미아는 직접 조국 건설에 헌신한 애국 선지자입니다. 그는 본래 바사나라 수산궁에서 높은 지위의 권세자로 있었습니다. 하나니와 몇 사람을 통해서 자기의 조국 예루살렘의 비참한 소식을 전해 듣고 조국을 위하여 슬피 울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느1:1-11) 진정한 애국자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백성들의 죄를 위해 참회의 눈물을 대신 흘릴 줄 아는 사람이 애국자인 것입니다. 백성들이 타락하면 결국 그 나라는 망하게 됩니다. 관리들은 부정부패를 일삼고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세상,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약자들의 신음소리가 세상에 진동하는 사회, 퇴폐업소가 늘어나고 정직한 사람들이 바보 취급을 당하는 현상.... 이런 현상들이 바로 멸망의 징조입니다.
느헤미아는 백성들의 죄를 가슴에 안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슴을 찢으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백성들이 당할 심판을 생각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큰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느혜미아의 눈물과 금식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한 나라의 흥망과 성쇠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우리의 미래는 암흑일 뿐입니다. 오늘날 이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헤입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버린 개인과 국가는 멸망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새벽마다 민족의 죄를 가슴에 안고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백성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성경에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14:34)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많고,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무속이 성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악한 세상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침체된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려면 성도들이 눈물로 회개하여 변화되고 용서받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간구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애국자입니다. 기도의 용병들이 버티고 있는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아의 기도를 나의 기도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애국자여야 합니다. 그리고 애국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이 민족의 죄를 모두 털어놓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도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할 일은 해야 되겠습니다. 국가는 비행기나 배와 같습니다. 비행기나 배가 위험하면 타고 있는 승객은 모두 위험합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눅7:5)
이철신 목사(영락교회)의 칼럼을 소개합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위험한 나라입니다. 호전적인 세력과 분단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계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전투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남북이 만나고 회담하고 합의하고 합의문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합의문은 간단히 휴지조각이 되고, 합의는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도 도발을 막을 수 없고, 전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아마 북한의 세습 독재체제에 굴복하면 전쟁위협이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단보다도 더 오랫동안, 더 극심한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더 위험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입니다. 주위의 아랍국가에 둘러싸여서 경제적, 외교적 제재를 받고 있습니다. 수시로 박격포 공격을 받고 테러를 당합니다. 전선이 없는 전쟁을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에 안전한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항상 전 국토가 위험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창업국가(Start- up Nation)"라는 책은, 이렇게 위험한 나라에서 어떻게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기술한 책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민자의 나라입니다. 이 위험한 나라에 전 세계의 유대인이 용감하게 이민해 왔습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할 당시 인구는 80만 명이었는데, 60년 만에 그 수는 9배가 되어 현재 인구는 710만 명에 이릅니다. 각국에 있는 탁월한 전문가들이 이 위함한 나라로 이민해 왔습니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서 자기 인생을 내던지며 도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이 벌어져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반 이스라엘 투쟁이 일어나고 로켓포가 날아오는 기간에도 경제성장률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리 포격이나 테러가 있어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미사일이 날아와도 직장에 출근하는 비율은 더 높았고, 방독면을 쓰고 일을 했고, 기업 생산성은 더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다브카(davca), 즉 “공격할 테면 해봐라. 우리는 오기로라도 더 성공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기업들은 자기 기업을 선전하는 것보다 이스라엘 나라를 더 많이 선전했습니다. 또한 기업인들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적 목적에 투자하는 “이익이 되는 애국”을 실천했습니다. 국민도 기업도 희생하고 헌신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가장 위험한 나라이면서도 가장 활기차고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의 크리스천은 대한민국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인도 한국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을 사랑해야 합니다. 기독교인 공무원은 정직해야 하고, 기독교 사업가는 이익이 되는 애국을 해야 하고, 기독교인 시민은 질서를 지키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소유, 은사 등 모든 것을 사용해서 한국을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도 한국을 사랑해야 합니다.
북한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습니다. 북한의 헌법에는 신앙의 자유를 명문화했고, 교회가 있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은 글자뿐이고, 교회는 자율성이 없는 전시용 교회입니다. 실제로 기독교인은 자신의 신앙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노동수용소나 감옥에 체포, 구금됩니다. 사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 체제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한국을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의 크리스천은 지유와 권리를 누리지만, 자신을 희생하고 절제해서, 나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국가적 목적을 위해서 자기 소유와 재능 등을 헌신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유대교 신앙을 가진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온갖 종류의 헌신을 합니다.
이와 같이 한국의 크리스천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발전합니다. 그리고 미래가 밝은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창조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눅17:33)
* 기도: 이 나라 민족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어둠 속에 잠겨있던 이 나라를 구원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끊이지 않는 갈등과 대립이 난무하고 도덕적 기준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이 나라를 떠나 이민을 가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말씀의 기준이 더욱 필요한 때임을 고백합니다. 무엇으로도 우리의 허물어져 가는 마음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너져가는 세상을 바로 세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의 기초를 다시 세워주셔서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되도록 해주옵소서.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새로운 소망을 허락해주소서. 불법과 불의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게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크리스천의 나라사랑댓글[0]
지유로운 글
(2013-07-24 오후 12:56:48)http://blog.somang.net/holylove/7909
크리스천의 나라사랑
본문: 시33: 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가리발디는 19세기 이탈리아의 개혁과 통일운동에 공헌한 국민적 영웅입니다. 어느 날 가리발디가 청년들을 모아놓고 민족을 위해 싸우자고 역설하자 한 청년이 나와서 "만일 내가 조국을 위해 사운다면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가리발디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칼에 베인 상처, 심한 부상, 끝내 죽음이 대가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대들의 상처와 죽음으로 이탈리아는 자유로운 나라가 될 것이요, 우리의 후손은 평화롭게 살 것입니다."
그리고 3 .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남궁억 선생님은 암울한 역사에 한 줄기 빛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황성신문 사장, 현산학교 설립자, 관동학회 회장 등으로 나라를 위해 일했습니다. 찬송가 580장(구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그의 작품입니다. 그는 특히 무궁화 심기 운동을 전개해 나라 사랑과 독립의지를 일깨웠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순국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런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시체를 불살라 곱게 가루 내어 무궁화나무에 거름으로 주게 하라" "누가 진정한 애국자인가?"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내리기는 참 어렵습니다. 지금처럼 세상이 어수선한 때는 더욱 애국자가 필요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애국자인 것 같은데 사실은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애국자로 자처하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 느헤미아는 직접 조국 건설에 헌신한 애국 선지자입니다. 그는 본래 바사나라 수산궁에서 높은 지위의 권세자로 있었습니다. 하나니와 몇 사람을 통해서 자기의 조국 예루살렘의 비참한 소식을 전해 듣고 조국을 위하여 슬피 울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느1:1-11) 진정한 애국자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백성들의 죄를 위해 참회의 눈물을 대신 흘릴 줄 아는 사람이 애국자인 것입니다. 백성들이 타락하면 결국 그 나라는 망하게 됩니다. 관리들은 부정부패를 일삼고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세상,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약자들의 신음소리가 세상에 진동하는 사회, 퇴폐업소가 늘어나고 정직한 사람들이 바보 취급을 당하는 현상.... 이런 현상들이 바로 멸망의 징조입니다.
느헤미아는 백성들의 죄를 가슴에 안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가슴을 찢으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백성들이 당할 심판을 생각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큰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느혜미아의 눈물과 금식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한 나라의 흥망과 성쇠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우리의 미래는 암흑일 뿐입니다. 오늘날 이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헤입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버린 개인과 국가는 멸망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새벽마다 민족의 죄를 가슴에 안고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백성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성경에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14:34)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많고,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무속이 성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악한 세상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침체된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려면 성도들이 눈물로 회개하여 변화되고 용서받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간구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애국자입니다. 기도의 용병들이 버티고 있는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아의 기도를 나의 기도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애국자여야 합니다. 그리고 애국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이 민족의 죄를 모두 털어놓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도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할 일은 해야 되겠습니다. 국가는 비행기나 배와 같습니다. 비행기나 배가 위험하면 타고 있는 승객은 모두 위험합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눅7:5)
이철신 목사(영락교회)의 칼럼을 소개합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위험한 나라입니다. 호전적인 세력과 분단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계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전투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남북이 만나고 회담하고 합의하고 합의문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합의문은 간단히 휴지조각이 되고, 합의는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도 도발을 막을 수 없고, 전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아마 북한의 세습 독재체제에 굴복하면 전쟁위협이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단보다도 더 오랫동안, 더 극심한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보다 더 위험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입니다. 주위의 아랍국가에 둘러싸여서 경제적, 외교적 제재를 받고 있습니다. 수시로 박격포 공격을 받고 테러를 당합니다. 전선이 없는 전쟁을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에 안전한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항상 전 국토가 위험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창업국가(Start- up Nation)"라는 책은, 이렇게 위험한 나라에서 어떻게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기술한 책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민자의 나라입니다. 이 위험한 나라에 전 세계의 유대인이 용감하게 이민해 왔습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할 당시 인구는 80만 명이었는데, 60년 만에 그 수는 9배가 되어 현재 인구는 710만 명에 이릅니다. 각국에 있는 탁월한 전문가들이 이 위함한 나라로 이민해 왔습니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서 자기 인생을 내던지며 도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이 벌어져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반 이스라엘 투쟁이 일어나고 로켓포가 날아오는 기간에도 경제성장률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리 포격이나 테러가 있어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미사일이 날아와도 직장에 출근하는 비율은 더 높았고, 방독면을 쓰고 일을 했고, 기업 생산성은 더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다브카(davca), 즉 “공격할 테면 해봐라. 우리는 오기로라도 더 성공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기업들은 자기 기업을 선전하는 것보다 이스라엘 나라를 더 많이 선전했습니다. 또한 기업인들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적 목적에 투자하는 “이익이 되는 애국”을 실천했습니다. 국민도 기업도 희생하고 헌신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가장 위험한 나라이면서도 가장 활기차고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의 크리스천은 대한민국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인도 한국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을 사랑해야 합니다. 기독교인 공무원은 정직해야 하고, 기독교 사업가는 이익이 되는 애국을 해야 하고, 기독교인 시민은 질서를 지키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소유, 은사 등 모든 것을 사용해서 한국을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도 한국을 사랑해야 합니다.
북한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습니다. 북한의 헌법에는 신앙의 자유를 명문화했고, 교회가 있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은 글자뿐이고, 교회는 자율성이 없는 전시용 교회입니다. 실제로 기독교인은 자신의 신앙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노동수용소나 감옥에 체포, 구금됩니다. 사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 체제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자유를 지킬 수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한국을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의 크리스천은 지유와 권리를 누리지만, 자신을 희생하고 절제해서, 나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국가적 목적을 위해서 자기 소유와 재능 등을 헌신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유대교 신앙을 가진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온갖 종류의 헌신을 합니다.
이와 같이 한국의 크리스천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한민국을 세우기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발전합니다. 그리고 미래가 밝은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창조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눅17:33)
* 기도: 이 나라 민족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어둠 속에 잠겨있던 이 나라를 구원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끊이지 않는 갈등과 대립이 난무하고 도덕적 기준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이 나라를 떠나 이민을 가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말씀의 기준이 더욱 필요한 때임을 고백합니다. 무엇으로도 우리의 허물어져 가는 마음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너져가는 세상을 바로 세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의 기초를 다시 세워주셔서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되도록 해주옵소서.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새로운 소망을 허락해주소서. 불법과 불의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게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진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알자댓글[0]
진리, 가치
(2013-07-24 오전 7:48:43)http://blog.somang.net/holylove/7908
진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알자
본문: 마13:44, ??찬송가 94장(통 102장), 366장(통485장)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미국 서부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농부가 자신의 밭에서 심하게 악취나는 웅덩이를 보고 늘 투덜거렸습니다. 소나 말에게도 물을 먹일 수 없었기에 농부의 불평은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결국 농부는 그 웅덩이가 딸린 농토를 남에게 사정하다시피 하여 팔아버렸습니다. [웅덩이와의 결별]이 있던 날 농부는 파티를 벌이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처분}은 농부에게 일생 최대의 실수가 되었습니다. 그 웅덩이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된 것입니다. 무가치하게 보이는 것이 [축복의 유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시다.
첫째, 시간의 귀중함과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사람이 70년을 살 경우 잠자는 데 20년, 일하는데 20년, 먹는 데 6년, 노는데 8년, 치장하는데 5년, 전화거는 데 1년, 차 속에서 7년, 사람을 기다리는데 3년 등이 걸립니다.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서도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을 미루고 늦장을 부릴 만큼 길지 않습니다. 우리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 상당한 시간을 허비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둘째, 건강의 귀중함과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돈, 권세, 명예, 지식을 아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것만 있으면 행복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건강을 잃으면 재산, 권세, 지식 등 아무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하다는 그 하나만도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셋째, 성경말씀의 소중함과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헨델의 일화 입니다. 어느 날 헨델이 길을 가다가 가발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시에 가발은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한참동안 난처해 하고 있을 때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의 가발을 찾아주었습니다. 알고보니 그녀는 근처 이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였습니다. 그 후 헨델은 고마운 마음으로 그녀를 자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헨델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오라토리오 ‘메시야’의 친필 악보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헨델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델은 그 이발관에 다시 들렀습니다. 그 아가씨는 헨델이 온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발을 하러 온 한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다른 이발사에게 “머리를 말게 악보 몇 장만 갖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헨델은 조용히 이발관을 나왔고 그 후로 다시는 그 이발관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헨델의 명작 ‘메시아’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지만 그 말씀을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한 진리를 담고 있으며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셔야만 그 깊이 있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저 한 권의 책으로 볼 뿐이며 하나님의 귀한 말씀임을 알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극심한 가난 속에 사는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여러 해 전에 미국으로 떠나 한 번도 할머니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할머니에게 아들이 한푼도 도와주지 않느냐고 곧잘 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얼굴을 붉히며 도와주지는 않지만 가끔 편지도 보내오고 그림도 보내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한 친구에게 자랑하듯 그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건 그림이 아니라 거액의 수표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오랜 세월 동안 쓸데없이 가난한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혹, 당신에게도 거액의 수표가 있다는 사실을 압니까? 성경에는 삶을 풍성하게 사는 비결이 담겨있습니다. 성경을 일반 책이나 휴지조각 정도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궁한 자원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넷째, 복음의 소중함과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오래전 영국의 뉴스에서 고속 화물로 어느 날 아프리카의 마을로 배달된 상자에 대한 이야기가 보도되었습니다. 수령인이 운임을 지불하려 하지 않아 약14년 동안 그 상자는 다른 임자 없는 화물들과 같이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호기심으로 그 상자를 싼값에 구입, 상자를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속에는 수 만 파운드의 영국 화폐가 들어 있었습니다. 수령인은 얼마 되지 않는 운임을 지불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청난 행운을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선물인 복음이 매 순간 우리에게 우송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아 그 가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진리)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은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 4)
다섯째, 자신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어떤 미국인이 프랑스를 방문해서 돌아다니다가 시골의 어떤 장터에서 싸구려 목걸이를 하나 사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세관에서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아주 싸구려 물건입니다” 했더니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고가의 고급 품목입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고가의 세금을 물고 왔습니다. 이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서 그 목걸이를 가지고 보석 감정 전문가에게 그 목걸이를 보였습니다. 감정가는 확대경을 가지고 한참 목걸이를 관찰하더니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손님, 이건 보통 목걸이가 아닙니다. 손님도 좀 보시지요.” 그래서 가만히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니 거기에 글자가 이렇게 새겨져 있더랍니다. “조세핀에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한 세기를 지배하던 나폴레옹의 사인 때문에 그 목걸이가 그렇게 고가품으로 인정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인과 하나님의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놀라운 기술과 계획, 하나님의 인치심 속에서 만들어진 인생으로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인생입니까! 더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피 흘려 구속받은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나의 존재를 묵상할 때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인생이라는 은총, 짧은 인생이지만 내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보석도 볼 줄 아는 사람에게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수록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보석입니다. 그것도 보통의 보석이 아니고, 하늘 아래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보석입니다. 그 가치를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아무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1)
어떤 세미나에서 한 강사가 20달러 짜리 지폐를 높이 쳐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돈을 갖고 싶겠지요?" 그리고는 갖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세미나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강사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 분 중에 한 사람에게 이 돈을 드릴 생각입니다만 그전에 먼저 여길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쳐들었던 20달러 짜리 지폐를 마구 꾸겼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러분은 이 지폐를 갖기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역시 동일하게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 강사는 "좋아요"라고 말한 다음 이번에는 그 20달러 짜리 지폐를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밟고 더럽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구 꾸겨지고 더러워진 그 20달러 지폐를 집어 들고, 아직도 그 돈을 갖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는 뜻으로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 후 그 강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한 가지 가치 있는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제가 아무리 이 20달러 짜리 지폐를 가지고, 마구 꾸기고 발로 밟고 더럽게 했을 지라도 그 가치는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달러 짜리 지폐는 항상 20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에 있어 여러 번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며, 더러워지는 일이 있습니다. 잘못된 결정에 의해서건, 환경에 의해서건 우리는 그런 일을 실제로 겪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건, 또 무슨 일이 일어나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신은 자신의 가치를 결코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낡고 보잘 것 없는 바이올린 하나가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한 사람이 1실링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방안에 폭소가 일어나더니 그 값으로 그에게 주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경매인은 잠시 방안의 분위기를 가라앉힌 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말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 바이올린으로 한번 연주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잠시 방안에 침묵이 흐른 뒤 한 노인이 앞으로 걸어나왔습니다. 그 노인은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몇 번 활을 시험해 음을 맞추고 나서 그 낡은 악기로부터 절묘한 선율을 캐내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에 매혹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끝났을 때 방안은 감동의 박수갈채로 진동하였습니다. 다시 경매인은 바이올린을 들고 값을 물었습니다. “5파운드” “10파운드” 결국 “100파운드”로 낙찰되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그것은 전과 다름없는 바이올린이었는데…. 그 낡은 바이올린은 대가에 의해 명품으로 바꾸어졌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한결같이 쓸모 없고 무능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가장 가치 있고 위대한 명품 인생으로 바뀔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여섯째, 하나님의 사랑을 매순간 받으면서도 잘 모릅니다.
톨스토이의 우화입니다. 물고기들이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라고 했습니다. 물고기들은 그토록 중요한 [물]이 어떤 것인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늙은 물고기를 찾아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물속에 살고 있다. 물은 곧 생명이다. 우리 몸은 항상 물에 적셔져 있으며 날마다 그 속에서 산다. 그러나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자의 사랑 속에서 호흡하면서도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일곱째,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축복을 받고도 잘 모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가면 헐스트 성이라는 것이 높은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이 성의 주인이었던 헐스트라는 사람은 신문의 왕이라고 할 정도로 여러 신문을 발행하는 신문재벌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별장이 지금은 사설 박물관으로 사람들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술품을 수집하는 수집광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 특히 유럽의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왕가에서만 사용되었다는 도자기의 자취를 추적했습니다. 얼마의 돈을 내고라도 그 도자기를 꼭 소유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는 여러 해 동안 갖은 수고를 다하면서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엘 갔더니 그가 찾는 그렇게 유명한 도자기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언론인 출신의 미국의 어느 사업가가 사갔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래서 헐스트는 그 사람이 누군가하여 찾아다녔습니다.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도자기를 산 사람은 바로 헐스트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이 오래 전에 이미 사서 가지고 있었던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수 없는 귀한 보물을 사서 자기 집 창고 속에 놔두고는 그 보물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것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입니까!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축복을 받고도 그 축복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햇볕, 맑은 공기와 비, 바람까지도 그 소중함과 가치를 잘 모르고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덟째, 예수님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강가에서 참외만한 연보랏빛이 나는 돌을 주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침 마을에서 수석전시회가 있어 그 돌을 들고 나갔습니다. 기괴하고 화려한 다른 수석들 사이에 볼품없는 그의 돌은 15달러의 낮은 가격을 붙여 놓았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해가 넘어가고 이제 곧 전시회를 끝내려는 순간 한 신사가 다가와 돌을 유심히 살펴보고 두들겨 보더니 얼마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돌의 주인은 가격표대로 15달러라고 하면 모처럼의 기회를 놓칠까봐 10달러에 가져가시라고 했습니다. 헌데 그 신사는 뒤늦게 가격표를 발견하고 지갑에서 15 달러를 꺼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세상은 하나의 돌덩이로 인하여 시끌벅적 난리가 났습니다. 브로커 웻스타인이라는 이름의 바로 그 노신사가 어디선가 15달러에 산 돌이 세계에서 제일 큰 사파이어로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보석의 무게는 1905 케럿, 가격은 우리 돈으로 약 20억 원이라니 어찌 시끌벅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은 마치 15 달러 가치의 돌처럼 그냥 봐서는 볼품없으신 분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15달러라도 벌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지 가늠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누구든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액수만큼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인정하는 만큼의 가치가 되어 주십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의 장로님은 재산도 꽤 많고 학식도 있는 분입니다. 기독교의 장 자리는 전부 붙여 놓아 이 사람의 직위는 무려 대여섯 개나 됩니다. 이 사람의 소지품은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다 만났을 때 하는 말이 '시계를 잃어버려 간밤에 한잠도 못 잤다'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볼 때 평소에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버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내버리고도 그 시계 하나를 잃어버린 만큼 마음이 아프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마음의 가치관은 예수님이 그 시계 하나만도 못하다는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가치는 그들의 시계하나 만도 못합니다.
여러분에게 누가 5000만 원짜리 다이아몬드 선물을 받았다고 해 봅시다. 가지고 다니기 불편해서 장롱 속에 깊이 넣어두었습니다. 어느 날 동창회에 갔더니 동창이 자기 남편이 사준 500만 원짜리 다이아 반지를 끼고 와서 자랑을 했다고 한다면 5000만원 짜리를 장롱속에 두고 온 자람은 그 동창이 부러울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뭐 겨우 500만 원짜리 반지를 가지고……. 나는 5000만 원짜리가 집에 있는데……." 그게 부럽지 않습니다. 마음이 흔들릴 것도 없고 말입니다. 왜입니까? 더 귀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좋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별 가치 없는 것들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보배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을 믿는 믿음, 그 분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선물, 그것은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셔 들이고, 그 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아홉째, 생명의 귀중함과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아프리카 오지의 황폐한 시골을 세 사람이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마차를 타고 길을 가다 땅에 떨어져 있는 이상한 양피지를 발견했습니다. 호기심에 가득한 그들은 마차에서 내려 그 양피지를 주워들었습니다.첫 번째 사람은 양피지 생산에 사용되는 복잡한 일련의 화학약품을 분석하는 화학자였습니다. 그는 그 양피지 앞뒤를 찬찬히 살피면서 원시인들의 그 정교한 솜씨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원시인들의 주목할 만한 심미적인 감수성과 색채와 명암 등이 신비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에 대해 크게 놀라워했습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게 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탄성을 연발하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원시인들의 언어를 알고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양피지에 그림으로 그려진 글자들을 떠듬 떠듬 읽어나갔습니다. 그 양피지로 된 문서에는, "우리 땅을 침범하는 침입자에게 죽음의 형벌을 가하겠다" 라는 경고가 적혀 있음을 알았습니다. 놀란 세 번째 사람은 달아나야 된다고 나머지 두 사람에게 고함을 지르면서 얼른 도망했지만 양피지의 정교한 솜씨에 감탄한 화학자와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라 놀라워하는 예술가는 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곳의 원시인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가치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열 번째, 천국과 진리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유럽의 탐험가들이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처음 갔을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바닷가에 갔더니 흑인들이 조개 속에서 번쩍이는 것을 물로 휙휙 던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해서 가까이 가보니 값진 진주였습니다. 약삭빠른 탐험가들은 가지고 간 빵과 장난감들을 주고 그것을 모아와 큰 부자가 됐습니다.보화도 주인을 잘 만나야 빛이 나는 법입니다. 무지한 사람에게는 값진 진주도 돌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미국 남북전쟁 말기에 살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당신은 남부에 살고 있으나 북부사람입니다. 전쟁이 끝나는 대로 북부로 이사할 예정입니다. 남부에 살면서 당신은 많은 남부 통화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북부가 전쟁에 이길 것과 전쟁이 곧 끝난다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남부 돈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당신이 현명하다면 답은 하나뿐입니다. 즉각 남부 통화를 미국 통화, 즉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가치를 지닐 유일한 돈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남부 통화는 당장 필요한 만큼만 두고서 말입니다. 우리는 세계 경제 상황에 닥칠 변화를 이미 성경을 통해 훤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거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순간, 세상의 돈은 가치를 잃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의 투자 전략은 남들과 완전히 달라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땅의 보물만 잔뜩 쌓는 것은 곧 소용없어질 남부 돈을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한참 미련한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과 진리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다말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곤 하던 화가가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이었지요. 쓰레기통에 내팽개쳐진 그림은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인생’이었으며‘버림받은 미운 오리새끼’였습니다. 그런 날이면 화가는 자신이 미워 화실 구석에 앉아 오랜 시간 비탄과 실의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면당한 인생, 미운 오리새끼를 모든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최상의 백조’로 변화시킨 공로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였지요. 그녀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그 ‘미완성의 꿈’을 치우지 않고 정성스럽게 펴서 말없이 이젤 위에 놓아두곤 했습니다. 그러면 화가는 한참 그 그림을 주시하다가 잃어버린 꿈을 되찾고 다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완성시킨 작품이 ‘전원풍경’, ‘목욕하는 여인’ 등입니다. 화가의 이름은 폴 세잔느. 하마터면 역사의 뒷전에서 유실될 뻔한 작품이 사려 깊은 아내의 말없는 격려와 사랑으로 지금까지 모든 이들의 가슴에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행복은 가치의 재발견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고 소중하게 가꾸는 사람에게 기회는 ‘최상의 백조’가 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천국의 비밀과 참으로 귀한 진리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립니다. 성경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7-9),"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히10:34)하였습니다.
천국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진 모든 소유보다 더 값진 것을 알아 주님 사업에 자기 모든 힘과 능력과 마음을 다 바칩니다. 성도 여러분이 소유한 재산, 시간,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팔아 천국 보화를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진리와 생명이 되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 당한 고난이 견디기 어려울지라도 극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주님을 따르는 일을 최우선에 놓게 하소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게 해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 묵상 및 토의
0 나는 복음과 진리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가?
0 나는 세상의 허무한 것들을 위해 귀중한 시간과 물질, 재능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0 나는 에서처럼 장자의 직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는 어리석은 자는 아닌가?
0 내가 평소에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 해보세요.
0 나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소중히 여깁니까?
0 나는 매주 토요일 갈릴리공동체 모임에서 배우는 말씀의 소중한 가치를 바르게 알고 있는가?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진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알자댓글[0]
진리, 가치
(2013-07-24 오전 7:48:43)http://blog.somang.net/holylove/7907
진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알자
본문: 마13:44, ??찬송가 94장(통 102장), 366장(통485장)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미국 서부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농부가 자신의 밭에서 심하게 악취나는 웅덩이를 보고 늘 투덜거렸습니다. 소나 말에게도 물을 먹일 수 없었기에 농부의 불평은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결국 농부는 그 웅덩이가 딸린 농토를 남에게 사정하다시피 하여 팔아버렸습니다. [웅덩이와의 결별]이 있던 날 농부는 파티를 벌이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처분}은 농부에게 일생 최대의 실수가 되었습니다. 그 웅덩이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된 것입니다. 무가치하게 보이는 것이 [축복의 유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시다.
첫째, 시간의 귀중함과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사람이 70년을 살 경우 잠자는 데 20년, 일하는데 20년, 먹는 데 6년, 노는데 8년, 치장하는데 5년, 전화거는 데 1년, 차 속에서 7년, 사람을 기다리는데 3년 등이 걸립니다.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서도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을 미루고 늦장을 부릴 만큼 길지 않습니다. 우리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 상당한 시간을 허비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둘째, 건강의 귀중함과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돈, 권세, 명예, 지식을 아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것만 있으면 행복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건강을 잃으면 재산, 권세, 지식 등 아무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하다는 그 하나만도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셋째, 성경말씀의 소중함과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헨델의 일화 입니다. 어느 날 헨델이 길을 가다가 가발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시에 가발은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한참동안 난처해 하고 있을 때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의 가발을 찾아주었습니다. 알고보니 그녀는 근처 이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였습니다. 그 후 헨델은 고마운 마음으로 그녀를 자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헨델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오라토리오 ‘메시야’의 친필 악보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헨델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델은 그 이발관에 다시 들렀습니다. 그 아가씨는 헨델이 온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발을 하러 온 한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다른 이발사에게 “머리를 말게 악보 몇 장만 갖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헨델은 조용히 이발관을 나왔고 그 후로 다시는 그 이발관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헨델의 명작 ‘메시아’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지만 그 말씀을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한 진리를 담고 있으며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셔야만 그 깊이 있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저 한 권의 책으로 볼 뿐이며 하나님의 귀한 말씀임을 알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극심한 가난 속에 사는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여러 해 전에 미국으로 떠나 한 번도 할머니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할머니에게 아들이 한푼도 도와주지 않느냐고 곧잘 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얼굴을 붉히며 도와주지는 않지만 가끔 편지도 보내오고 그림도 보내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한 친구에게 자랑하듯 그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건 그림이 아니라 거액의 수표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오랜 세월 동안 쓸데없이 가난한 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혹, 당신에게도 거액의 수표가 있다는 사실을 압니까? 성경에는 삶을 풍성하게 사는 비결이 담겨있습니다. 성경을 일반 책이나 휴지조각 정도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궁한 자원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넷째, 복음의 소중함과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오래전 영국의 뉴스에서 고속 화물로 어느 날 아프리카의 마을로 배달된 상자에 대한 이야기가 보도되었습니다. 수령인이 운임을 지불하려 하지 않아 약14년 동안 그 상자는 다른 임자 없는 화물들과 같이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호기심으로 그 상자를 싼값에 구입, 상자를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속에는 수 만 파운드의 영국 화폐가 들어 있었습니다. 수령인은 얼마 되지 않는 운임을 지불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청난 행운을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선물인 복음이 매 순간 우리에게 우송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아 그 가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진리)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은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 4)
다섯째, 자신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어떤 미국인이 프랑스를 방문해서 돌아다니다가 시골의 어떤 장터에서 싸구려 목걸이를 하나 사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세관에서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아주 싸구려 물건입니다” 했더니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고가의 고급 품목입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고가의 세금을 물고 왔습니다. 이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서 그 목걸이를 가지고 보석 감정 전문가에게 그 목걸이를 보였습니다. 감정가는 확대경을 가지고 한참 목걸이를 관찰하더니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손님, 이건 보통 목걸이가 아닙니다. 손님도 좀 보시지요.” 그래서 가만히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니 거기에 글자가 이렇게 새겨져 있더랍니다. “조세핀에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한 세기를 지배하던 나폴레옹의 사인 때문에 그 목걸이가 그렇게 고가품으로 인정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인과 하나님의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놀라운 기술과 계획, 하나님의 인치심 속에서 만들어진 인생으로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인생입니까! 더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피 흘려 구속받은 귀중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나의 존재를 묵상할 때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인생이라는 은총, 짧은 인생이지만 내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보석도 볼 줄 아는 사람에게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수록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보석입니다. 그것도 보통의 보석이 아니고, 하늘 아래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보석입니다. 그 가치를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아무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1)
어떤 세미나에서 한 강사가 20달러 짜리 지폐를 높이 쳐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돈을 갖고 싶겠지요?" 그리고는 갖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세미나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강사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 분 중에 한 사람에게 이 돈을 드릴 생각입니다만 그전에 먼저 여길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쳐들었던 20달러 짜리 지폐를 마구 꾸겼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러분은 이 지폐를 갖기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역시 동일하게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 강사는 "좋아요"라고 말한 다음 이번에는 그 20달러 짜리 지폐를 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밟고 더럽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구 꾸겨지고 더러워진 그 20달러 지폐를 집어 들고, 아직도 그 돈을 갖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는 뜻으로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 후 그 강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한 가지 가치 있는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제가 아무리 이 20달러 짜리 지폐를 가지고, 마구 꾸기고 발로 밟고 더럽게 했을 지라도 그 가치는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달러 짜리 지폐는 항상 20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에 있어 여러 번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며, 더러워지는 일이 있습니다. 잘못된 결정에 의해서건, 환경에 의해서건 우리는 그런 일을 실제로 겪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이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건, 또 무슨 일이 일어나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신은 자신의 가치를 결코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낡고 보잘 것 없는 바이올린 하나가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한 사람이 1실링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방안에 폭소가 일어나더니 그 값으로 그에게 주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경매인은 잠시 방안의 분위기를 가라앉힌 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말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 바이올린으로 한번 연주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잠시 방안에 침묵이 흐른 뒤 한 노인이 앞으로 걸어나왔습니다. 그 노인은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몇 번 활을 시험해 음을 맞추고 나서 그 낡은 악기로부터 절묘한 선율을 캐내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에 매혹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끝났을 때 방안은 감동의 박수갈채로 진동하였습니다. 다시 경매인은 바이올린을 들고 값을 물었습니다. “5파운드” “10파운드” 결국 “100파운드”로 낙찰되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그것은 전과 다름없는 바이올린이었는데…. 그 낡은 바이올린은 대가에 의해 명품으로 바꾸어졌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한결같이 쓸모 없고 무능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가장 가치 있고 위대한 명품 인생으로 바뀔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여섯째, 하나님의 사랑을 매순간 받으면서도 잘 모릅니다.
톨스토이의 우화입니다. 물고기들이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라고 했습니다. 물고기들은 그토록 중요한 [물]이 어떤 것인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늙은 물고기를 찾아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물속에 살고 있다. 물은 곧 생명이다. 우리 몸은 항상 물에 적셔져 있으며 날마다 그 속에서 산다. 그러나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자의 사랑 속에서 호흡하면서도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일곱째,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축복을 받고도 잘 모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가면 헐스트 성이라는 것이 높은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이 성의 주인이었던 헐스트라는 사람은 신문의 왕이라고 할 정도로 여러 신문을 발행하는 신문재벌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별장이 지금은 사설 박물관으로 사람들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술품을 수집하는 수집광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 특히 유럽의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왕가에서만 사용되었다는 도자기의 자취를 추적했습니다. 얼마의 돈을 내고라도 그 도자기를 꼭 소유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는 여러 해 동안 갖은 수고를 다하면서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엘 갔더니 그가 찾는 그렇게 유명한 도자기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언론인 출신의 미국의 어느 사업가가 사갔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래서 헐스트는 그 사람이 누군가하여 찾아다녔습니다.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도자기를 산 사람은 바로 헐스트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이 오래 전에 이미 사서 가지고 있었던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수 없는 귀한 보물을 사서 자기 집 창고 속에 놔두고는 그 보물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것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입니까!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축복을 받고도 그 축복을 알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햇볕, 맑은 공기와 비, 바람까지도 그 소중함과 가치를 잘 모르고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덟째, 예수님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강가에서 참외만한 연보랏빛이 나는 돌을 주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침 마을에서 수석전시회가 있어 그 돌을 들고 나갔습니다. 기괴하고 화려한 다른 수석들 사이에 볼품없는 그의 돌은 15달러의 낮은 가격을 붙여 놓았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해가 넘어가고 이제 곧 전시회를 끝내려는 순간 한 신사가 다가와 돌을 유심히 살펴보고 두들겨 보더니 얼마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돌의 주인은 가격표대로 15달러라고 하면 모처럼의 기회를 놓칠까봐 10달러에 가져가시라고 했습니다. 헌데 그 신사는 뒤늦게 가격표를 발견하고 지갑에서 15 달러를 꺼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세상은 하나의 돌덩이로 인하여 시끌벅적 난리가 났습니다. 브로커 웻스타인이라는 이름의 바로 그 노신사가 어디선가 15달러에 산 돌이 세계에서 제일 큰 사파이어로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보석의 무게는 1905 케럿, 가격은 우리 돈으로 약 20억 원이라니 어찌 시끌벅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은 마치 15 달러 가치의 돌처럼 그냥 봐서는 볼품없으신 분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15달러라도 벌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지 가늠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누구든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액수만큼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인정하는 만큼의 가치가 되어 주십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의 장로님은 재산도 꽤 많고 학식도 있는 분입니다. 기독교의 장 자리는 전부 붙여 놓아 이 사람의 직위는 무려 대여섯 개나 됩니다. 이 사람의 소지품은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다 만났을 때 하는 말이 '시계를 잃어버려 간밤에 한잠도 못 잤다'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볼 때 평소에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버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내버리고도 그 시계 하나를 잃어버린 만큼 마음이 아프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마음의 가치관은 예수님이 그 시계 하나만도 못하다는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가치는 그들의 시계하나 만도 못합니다.
여러분에게 누가 5000만 원짜리 다이아몬드 선물을 받았다고 해 봅시다. 가지고 다니기 불편해서 장롱 속에 깊이 넣어두었습니다. 어느 날 동창회에 갔더니 동창이 자기 남편이 사준 500만 원짜리 다이아 반지를 끼고 와서 자랑을 했다고 한다면 5000만원 짜리를 장롱속에 두고 온 자람은 그 동창이 부러울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뭐 겨우 500만 원짜리 반지를 가지고……. 나는 5000만 원짜리가 집에 있는데……." 그게 부럽지 않습니다. 마음이 흔들릴 것도 없고 말입니다. 왜입니까? 더 귀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좋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별 가치 없는 것들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보배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을 믿는 믿음, 그 분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선물, 그것은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셔 들이고, 그 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아홉째, 생명의 귀중함과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아프리카 오지의 황폐한 시골을 세 사람이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마차를 타고 길을 가다 땅에 떨어져 있는 이상한 양피지를 발견했습니다. 호기심에 가득한 그들은 마차에서 내려 그 양피지를 주워들었습니다.첫 번째 사람은 양피지 생산에 사용되는 복잡한 일련의 화학약품을 분석하는 화학자였습니다. 그는 그 양피지 앞뒤를 찬찬히 살피면서 원시인들의 그 정교한 솜씨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원시인들의 주목할 만한 심미적인 감수성과 색채와 명암 등이 신비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에 대해 크게 놀라워했습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게 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탄성을 연발하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원시인들의 언어를 알고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양피지에 그림으로 그려진 글자들을 떠듬 떠듬 읽어나갔습니다. 그 양피지로 된 문서에는, "우리 땅을 침범하는 침입자에게 죽음의 형벌을 가하겠다" 라는 경고가 적혀 있음을 알았습니다. 놀란 세 번째 사람은 달아나야 된다고 나머지 두 사람에게 고함을 지르면서 얼른 도망했지만 양피지의 정교한 솜씨에 감탄한 화학자와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라 놀라워하는 예술가는 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곳의 원시인들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가치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열 번째, 천국과 진리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유럽의 탐험가들이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처음 갔을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바닷가에 갔더니 흑인들이 조개 속에서 번쩍이는 것을 물로 휙휙 던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해서 가까이 가보니 값진 진주였습니다. 약삭빠른 탐험가들은 가지고 간 빵과 장난감들을 주고 그것을 모아와 큰 부자가 됐습니다.보화도 주인을 잘 만나야 빛이 나는 법입니다. 무지한 사람에게는 값진 진주도 돌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미국 남북전쟁 말기에 살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당신은 남부에 살고 있으나 북부사람입니다. 전쟁이 끝나는 대로 북부로 이사할 예정입니다. 남부에 살면서 당신은 많은 남부 통화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북부가 전쟁에 이길 것과 전쟁이 곧 끝난다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남부 돈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당신이 현명하다면 답은 하나뿐입니다. 즉각 남부 통화를 미국 통화, 즉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가치를 지닐 유일한 돈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남부 통화는 당장 필요한 만큼만 두고서 말입니다. 우리는 세계 경제 상황에 닥칠 변화를 이미 성경을 통해 훤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거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순간, 세상의 돈은 가치를 잃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의 투자 전략은 남들과 완전히 달라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땅의 보물만 잔뜩 쌓는 것은 곧 소용없어질 남부 돈을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한참 미련한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과 진리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다말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곤 하던 화가가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이었지요. 쓰레기통에 내팽개쳐진 그림은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인생’이었으며‘버림받은 미운 오리새끼’였습니다. 그런 날이면 화가는 자신이 미워 화실 구석에 앉아 오랜 시간 비탄과 실의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면당한 인생, 미운 오리새끼를 모든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최상의 백조’로 변화시킨 공로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였지요. 그녀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그 ‘미완성의 꿈’을 치우지 않고 정성스럽게 펴서 말없이 이젤 위에 놓아두곤 했습니다. 그러면 화가는 한참 그 그림을 주시하다가 잃어버린 꿈을 되찾고 다시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완성시킨 작품이 ‘전원풍경’, ‘목욕하는 여인’ 등입니다. 화가의 이름은 폴 세잔느. 하마터면 역사의 뒷전에서 유실될 뻔한 작품이 사려 깊은 아내의 말없는 격려와 사랑으로 지금까지 모든 이들의 가슴에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행복은 가치의 재발견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고 소중하게 가꾸는 사람에게 기회는 ‘최상의 백조’가 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천국의 비밀과 참으로 귀한 진리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립니다. 성경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7-9),"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히10:34)하였습니다.
천국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진 모든 소유보다 더 값진 것을 알아 주님 사업에 자기 모든 힘과 능력과 마음을 다 바칩니다. 성도 여러분이 소유한 재산, 시간,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팔아 천국 보화를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진리와 생명이 되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 당한 고난이 견디기 어려울지라도 극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주님을 따르는 일을 최우선에 놓게 하소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게 해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 묵상 및 토의
0 나는 복음과 진리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가?
0 나는 세상의 허무한 것들을 위해 귀중한 시간과 물질, 재능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0 나는 에서처럼 장자의 직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는 어리석은 자는 아닌가?
0 내가 평소에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 해보세요.
0 나는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소중히 여깁니까?
0 나는 매주 토요일 갈릴리공동체 모임에서 배우는 말씀의 소중한 가치를 바르게 알고 있는가?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진짜 크리스천댓글[0]
제자, 군사. 성도
(2013-07-22 오전 11:13:53)http://blog.somang.net/holylove/7903
진짜 크리스천
본문: 누가복음 14: 26- 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1000만이 넘는 기독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각 종 비리사건이 있을 때 마다 항상 기독교인이 연루되어 왔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옷 로비 사건이 그러하였고 얼마 전에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던 타이거풀스 비리사건 등에서 그러하였습니다.
왜 일까요? 바닷물은 3%의 소금으로 인하여 썩지 않고 유지되는데 우리사회의 25%가 기독교인인데 이 사회는 왜 보다 건강하여 지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4명중 1명이 기독교인이지만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크리스천은 어떠해야 합니까?
1. 진짜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 38)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합니다.(딤후3:1- 5)
그런데 진짜 크리스천의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우선하고 사랑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재물이 소중하지만 하나님과 재물은 함께 섬길 수가 없습니다.(눅16:13) 자기 사업이나 물질보다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가족과 가정이 소중하지만 하나님보다 먼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딤후2:4, 마10:37).
2.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보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마음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부딪칩니다. 그럴 때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작은 일이라도 말씀에 합당한 것인지를 알려면 성경 말씀을 모르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비전과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왜 대순진리회나 각종 이단들이 산속에서 모든 재산을 버리고 찬송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뭔가 임하긴 임했나보다 생각이 드는데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았다면 그렇게 이단에 미혹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모르기에 이교도들이 되고 이단에 빠지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 12- 17)
3. 진짜 크리스천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국이 낳은 청교도 신앙가 존 번연 목사님이 국왕의 명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옥사장이 번연 목사님께 윗사람 모르게 옥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가셔서 사모님과 식구들을 잠깐 뵙고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목사님이 되돌아오기에 왜 오셨냐고 묻는 옥사장에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호의는 고마우나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이 나라 국왕이 직접 감옥을 시찰하면서 존 번연 목사님을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때 옥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셨기에 목사님도 살고 나도 살았습니다. 이제 제가 언제 목사님께 가시라 오시라 하지 않을테니까 목사님의 마음에 비쳐오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시고 싶을 때 가셨다가 오시고 싶을 때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많습니다.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결코 내 고집이나 방법대로 생활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생활하십시오. 양심에 비쳐오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심에 비쳐오는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행동하십시오.
성령 받은 첫째 증거는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다는 것이요, 두 번째 증거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삶이 변화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 16- 18)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진짜 크리스천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 확장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4. 진짜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20세기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선다싱은 1889년 인도의 전통적인 시크교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회심한 후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그 중에 하나입니다. 하루는 많은 성도들과 함께 바다 백사장을 찾았습니다. 선다싱은 바다 속에 있는 돌 하나를 집어 들어 성도들에게 보이면서 물었습니다.
「이 돌의 한가운데가 물에 젖어 있을까요? 말라있을까요?」 그러자 많은 성도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으니 틀림없이 한가운데도 젖어있을 것이라고 했고, 일부 성도들은 돌 속은 말라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젖어 있는지 말라있는 지는 돌멩이 나름일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선다싱은 돌을 쪼개었습니다. 그런데 돌의 한가운데는 말라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어도 그 속은 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농촌에 오래 살았어도 농부가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수십 년을 다녔어도 성도가 아닌 교인들이 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즉 겸손과 온유와 순종의 마음을 품고 있고, 그 얼굴에는 늘 밝은 표정이 있고, 그 모든 행실에는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모습이 나타나야 참된 성도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성경책 들고 수십 년 교회에 다니면서도 성도가 아닌 교인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나는 참 그리스도인인가 무늬만 그리스도인인가 자신을 돌아봅시다.(요한 2서 1: 8)
5. 진짜 크리스천은 선(善)하게 바르게 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
미국 피츠버그에서 만난 성도님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유학 후 미국에서 직장을 얻어 30년 동안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그분은, 지난 세월 동안 상사나 주위 사람으로부터 탈법 혹은 부당 행위를 지시받거나 요구당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몇 해 전 그는 한국 관계 기관으로부터 경부고속전철 공사와 관련된 자문을 부탁받고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몇 달 지나지 않아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도 전에 스스로 계약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부당한 청탁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가 교회 장로임을 아는 크리스천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크리스천에게,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봐 달라고 부당 청탁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땅에 사는 크리스천들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2002년 10월, KBS 텔레비전의 ‘현장 출동’에서 세관 수사원들의 삶을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밀수꾼을 잡기 위해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전국을 추격의 무대로 삼아 밤낮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수고는 눈물겹기까지 했습니다. 젊은 세관원이 압수된 시계를 철판 위에 올려놓고 쇠망치로 일일이 깨부수었습니다. 그때 취재하던 PD가 아깝지 않느냐고 묻자, 그의 대답이 이랬습니다. “아까워 보이죠? 그러나 이게 아까우면 이 자리를 지킬 수 없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야 할 수 있죠.” 그렇습니다. 세상의 것이 아까우면 진짜 크리스천의 자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 진짜 크리스천이란 교회 안팎에서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자입니다.
무엇보다 진짜 크리스천은 이웃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5)
옥한흠 목사님의 글 중에 있는 내용입니다. 유명한 전도자인 휫필드가 한 번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목사님 저쪽에 서 있는 저 남자 분은 크리스천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휫필드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그의 부인 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았거든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동문서답처럼 들리지만, 그의 말에는 깊은 진리가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니며 입으로 주여 주여 한다고 다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가 진정한 크리스천인가를 알려면 가정에서 그의 인격이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를 그의 아내로부터 들어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교회 사람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거나 예수를 싫어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크리스천이면서도 이타주의로 살지 않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잘 살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때 나는 나의 아내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을까요?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한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의 배려였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실제로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그런 신앙인의 모습이 되길 원합니다.
6. 진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행실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명장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과 같은 이름을 가진 병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알렉산더 대왕의 귀에 이 병사에 대한 나쁜 소문이 들렸습니다. 이 병사의 행동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웃긴 꼴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병사가 잘못할 때마다 다른 병사들은 “알렉산더, 자네는 졸장부 같네”라며 나무랐습니다. 그의 행동이 알렉산더라는 이름에 먹칠을 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러한 사실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어느 날 이 병사의 막사로 찾아갔습니다. 그때에도 아니나 다를까 이 병사는 술에 취해 바닥에 뻗어 있지 않았겠습니까? 대왕이 오셨다는 소리에 그 병사는 놀란 토끼처럼 벌떡 일어나 경례를 했습니다. 그런 졸개 병사에게 알렉산더 대왕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병사 이름이 알렉산더인가? 나와 이름이 똑같군. 병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네 인생을 바꾸어라.”
우리에게도 병사와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즉, 이름은 그리스도인이지만 행동은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자칭 그리스도인은 아니신지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에베소서 4:1)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면서도 말과 행함이 다르고, 이기적이고, 양심을 속이고 거짓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말에 있지 않고 행함에 있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1:22)
그대가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어떠한 가운데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만일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치 않고 동류해서 살아가면 타락하고 부패해 가는 세상을 더 빨리 썩게 하는 효소 역할을 할 것이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기다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그대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선한 일을 함으로 만족하지 말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은혜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기뻐하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아무 일 없이 하루하루 평안히 살아가기를 소망하지 말고 주님 때문에 힘들고 분주함을 소망하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보다 많은 수입을 인해 기뻐하기보다 주님을 위해 보다 많이 소비함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이 세상 보화을 바라보며 기뻐하지 말고 하늘 보화를 바라보며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취함을 인해 기뻐하지 말고 더 나누어 줌을 인해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영광을 많이 받음으로 인해 기뻐하기보다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음으로 인해 기뻐하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평안하고 안일한 하루였음을 인해 기뻐하지 말고 그분의 나라를 위해 고달프고 힘든 하루였음을 인해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귀한 은사와 능력을 통해 큰일을 행함으로 기뻐하기보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됨을 인해 기뻐하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을 즐기고 사랑함으로 기뻐하지 말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사랑하고 소유함을 인해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타락하고 부패한 화려한 향락 문화를 즐기고 누림으로 기뻐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아골 골짝 빈들에 있음을 인해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기뻐하지 말고 주님의 제자됨을 인해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많을 사람들 앞에 선을 행함으로 기뻐하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서 보시는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신실한 크리스천이라면!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예배로 인해 기뻐하지 말고 산제물로 하나님께 바처 짐을 인해 기뻐하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신실한 크리스천이라면! 배부르고 화려한 곳에 있음 인해 기뻐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굶주리고 헐벗은 자와 함께 있음을 인해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외적인 미모를 아름답게 꾸미고 가꿈을 인해 기뻐하지 말고 속사람을 온유함과 믿음의 정절과 아름답게 꾸미기를 인해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누가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 생명을 버리는 자를 가르쳐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말하는 가!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주관 할 수 있음에 기뻐하지 말고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똑똑히 인식함을 기뻐하기 바랍니다.!
그대가 진정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면! 남이 듣지 못한 귀한 말씀을 들었음을 인해 기뻐하지 말고 그 귀한 말씀을 내게 주심을 감사하며 순종함을 인해 기뻐하길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믿는 사람답게 잘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형제들끼리 더욱 이해하고 사랑하고, 가정에서는 가족들끼리 서로 위해주고, 어디에 가든지 사랑과 평화를 전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 주님과 복음만이 유일한 인생의 대안임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항상 세상 속에서 진정한 크리스천답게 주님의 빛을 비추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말씀을 정리하면,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려면 첫째로 하나님을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둘째로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음을 통하여 진리의 말씀들이 나를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셋째로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며, 다섯째로 선하고 바르게 살고, 여섯째로, 하나님 이름 높이고 행실로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 여섯 가지가 이루어질 때 진짜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
* 기도: 저희를 주님의 제자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주님의 제자답게 항상 감사함으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겸손과 용서함과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옵소서. 저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관심과 온전하신 뜻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복음에 붙들려 살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와 역사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리스도를 전하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 곁에서 괴로움과 슬픔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하는 주님의 귀한 도구로 쓰여지는 삶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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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0 오전 8:48:30)http://blog.somang.net/holylove/7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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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 2:1-11, 찬송가: 289장(통) 208장, 찬송 421장(통 210장)
철저하게 기독교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우습게 여기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핍박하던 친척이 있었습니다. 그는 두 개의 회사를 경영하며 별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진찰을 받았는데 탁구공 크기의 뇌종양이 생겼고 말기로 판명되었습니다. 소생의 희망은 거의 없었고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술 날짜를 정한 이틀 전 토요일 저녁에 한 전도자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으며, 통증이 멎었고 무엇인가 자기 몸에 큰 변화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월요일 아침 수술을 받기 직전에 의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다시 사진 촬영을 했는데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생활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붙들리면 누구나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 22- 24)
형 에서와 부친 이삭을 속인 야곱이 고향을 떠나 외삼촌집으로 도망한 후에 2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는 거기서 4명의 여자에게서 11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고, 소와 양이 심히 많은 거부가 됐습니다. 그가 외삼촌집을 도망쳐 나와 얍복강 나루에 이르렀을 때, 강 건너에서 에서가 4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칼을 빼들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강을 건너기 전에 홀로 남았습니다. 인간의 관계를 깨달으며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사자를 붙들고 자기를 축복해 달라며 매달렸습니다. 천사가 그의 환도 뼈를 쳐서 위골시켰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라 하였습니다. 간교한 옛 야곱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부활생명으로 거듭났습니다. 내가 변할 때 상대방도 변합니다. 역사의 강을 건너기 전에 구습을 좇는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새 역사는 새 사람의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 10절에 나오는 세상 속의 세리장 삭개오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가졌으나, 자기 인생에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을 통해서 구원과 생활의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예수님을 만나면 다 해결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변화 시킵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 생명의 능력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는 이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듯이, 인생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고인 물은 썩지만, 포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값어치가 나갑니다.
어떻게 변화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항아리의 손 씻는 물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극상품의 포도주로 변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만난 인생은 변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언제 변화합니까? 순종할 때 변화합니다. 잔치집의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항아리에 물을 채웠고, 연회장에게 떠다 주었을 뿐입니다.
정말 변화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변화를 기대하십시오. 변화는 기대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데서 그들은 실망하고,그 실망은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무엇일까요? 미국 하버드 대학 교육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목마름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애타게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변화를 기도하고,기대하십시오.
* 기도: 날마다 새로운 삶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우리의 속된 것, 죄악된 것을 바꾸어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온전히 거듭나게 하사 주님의 것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