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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과 거짓을 분별하라 댓글[0]
정직, 진실 (2014-10-30 오전 8:34:11) http://blog.somang.net/holylove/8208
참과 거짓을 분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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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일4:1- 6
「사랑하는 자들아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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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용한 마을 옆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도로 공사측에서는 공사관계로 고속도로의 사용을 중단시키고 우회도로를 사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임시로 도로 표지판을 만들어 세워 두었습니다. 그런데 악동들이 이 도로 표지판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차들이 엉뚱한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한 주민은 그때 일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한 밤중쯤 되었을 겁니다. 많은 차량들이 우리 마을로 몰려온 것입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습니다. 사실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교통혼잡을 빚었고, 고속도로 관리원이 많은 시간을 허비한 후에야 표지판이 거꾸로 되어 잇는 것을 발견하고 바로 돌려놓았습니다. 더구나 악동들은 중간쯤에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표지판까지 세워 놓았습니다. 밤중이라 아무도 그것을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여하튼 그 거짓 정보로 인해 큰 혼란이 생겼던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이런 위험으로부터 면제된 사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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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길을 버리고 허탄하고, 거짓된 길을 좇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분명히 마지막 때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지금 많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들이 나타났습니다.(요일2:18, 벧후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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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일생동안 속는 일이 많습니다. 한번 두 번이 아닙니다. 인생 전체를 속는 일도 많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머리가 좋고 능력이 있어도 속는 데는 예외가 없습니다. 안 속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 속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속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습니다. 물질에도 속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속습니다. 어떤 여자분이 좋은 대학을 나왔습니다. 학교 선생님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류대학을 나온 줄 알고 한 남자를 사귀었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초등학교 밖에 못나왔어요. 진작 그런 말이라도 하지 자기는 인생을 속았다는 것입니다. 너무 원통하게 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속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애인이 몸이 아파서 입원을 했다고 해서 병원에 갔습니다. 자기만 애인인 줄 알았더니 가보니 애인이 삼십 명씩 찾아왔더래요. 웬 애인이 그렇게 많은지 속은 것입니다. 우리는 웃을 일이지만 본인은 큰 절망인 것입니다. 돈 다 주고 인생을 다 바쳤는데 이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혼만 그렇게 속습니까? 다른 면으로 얼마나 속습니까? 인생을 속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후반부에 가서 모두 후회합니다. 원통하고 애통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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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인 것을 알기에 길을 가다가 누구하고 부딪힐 것만 같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필요도 없는 등불이지만 눈뜬 사람들이 그의 등불을 보고 비켜갈 수 있도록 등불을 켜서 들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는 등불을 들고 밤거리를 나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떤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눈도 없소?」 장님이 소리치자 상대방은 어리둥절합니다. 「어두워서 보지를 못했습니다.」 「내 등불도 안보인다는 말이오?」 그제야 그 사람이 자세히 살펴보니 장님은 불꺼진 등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거짓된 선지자를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등불이 꺼진 줄도 모르고 들고 다닐 뿐만 아니라, 애당초 자기는 못 보면서 다른 사람을 볼 수 있게 하겠다고 꺼진 등불을 들고 다니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먼저 내 눈을 밝힌 연후에 남을 밝히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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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거짓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 낫습니다. 여행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게 되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엉뚱한 기차를 타게 되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 고향 옆으로는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주 정부에서는 공사 관계로 임시로 도로 표지판을 만들어 세워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장난꾸러기들이 이 도로 표지판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차들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이런 위험으로부터 면제된 사람은 없습니다. 마귀는 이 세상의 수많은 인쇄물, 텔레비전, 라디오, 카세트 테이프, 강단 등을 통하여 자기의 주장을 전파합니다. 도슨 트로트맨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90%는 진리이고 10%는 거짓인 것과, 10%는 진리이고 90%는 거짓인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위험합니까?』 아마도 90%는 진리이고 10%는 거짓인 것이 더 위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분별하기가 훨씬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진리의 옷으로 위장할 수 있습니다. 벽돌공들은 다림줄에 맞추어 벽돌을 쌓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다림줄은 성경입니다. 우리의 삶을 이 성경의 기준에 따라 설계할 때, 우리는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며, 거짓된 것들을 퍼뜨리는 자들로부터 돌아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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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 빛과 어두움, 진품과 짝퉁이 혼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양과 염소, 알곡과 쭉정이, 선한 목자, 삯꾼 목자, 성도와 사탄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들이 나타났습니다.(벧후2:1-3) 그들도 제각기 자기가 가장 훌륭하고 참된 지도자요 선생임을 주장하고 자랑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지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며, 우리는 다 형제입니다.(마23:8)

예수님 이외에는 모두가 소경입니다. 목사도 중도 신부도 모두가 소경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따라가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집니다.(마15:14) 그런데 거짓 선지자와 선생들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거나 의의 일꾼으로 자처합니다.(고후11:13-14) 양의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마7:14-15) 그리고 겉으로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이고, 사람에게 옳게 보입니다.(갈1:10) 그러나 안으로는 모든 더러운 것과 불법이 가득합니다.(마23:23-25) 또한 저들도 성경과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면서 자기는 율법을 범합니다.(롬2:17-24)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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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교회 안에서 독재자가 되어 교인들에게 충성과 헌물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우고, 자신은 교회의 높은 자리에 앉아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마23:3-8, 눅20:46-47) 또한 저들은 부자교인의 헌물로 배불리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면서 가난한 교인은 돌보지 않습니다.(겔34:2-4) 삯꾼은 목자도 아닙니다. 양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요10:11-17) 오직 삯을 위해 일하므로 패역과 어그러진 길로 인도합니다.(유1:11) 뿐만 아니라 천국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마23:13). 양과 염소, 알곡과 죽정이는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무엇으로 분별할까요? 참과 거짓 지도자를 분별하는 방법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뿌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뿌리는 땅속에 묻혀 사람 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로되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으니, 그 열매를 보면 그 뿌리와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마7: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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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인도자와 그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건설하고 확장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주인(왕)이시고(많은 사람들이 돈, 명예, 권세, 자기 자신, 인간, 쾌락, 가족 등을 주인으로 섬기고 우상화하고 있음),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입니다.(롬14:17) 또한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맺습니다. 즉 참된 인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고아와 과부와 외로운 나그네가 거할 곳을 마련하여 주고, 양무리를 사랑가운데서 전심의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되, 사람들 앞에 거룩과 경건함으로 모범을 보이고 겸손과 순종으로 주의 뜻을 실행하며, 인내로서 남을 가르칠 뿐 아니라 때로는 양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합니다. 그러나 거짓 지도자와 그 집단은, 세상 것과 육신의 일에 빠져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입니다.(갈5:19-23) 거짓 선지자들은 입술로만 좋은 말을 하고, 하나님의 뜻은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희생이 없고, 고난이 없으며, 사랑이 없습니다. 다만 외식과 경건의 모습만 있습니다. 세상권세와 부귀영달을 부러워하고 그런 것을 추구하며 높아지려는 무리가 많은 교회는 거짓 선지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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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이단종파의 특징을 요약하면
(1) 자신들의 교리를 새로운 진리로 내세운다. 즉 성경의 권위를 능가하는 권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2)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한다.
(3) 자신들의 교주를 신격화한다. 즉 나사렛예수님 이외의 다른 예수를 내세운다. 자신들의 교주를 “메시야” “하나님의 사자”라고 말한다.
(4) 교리가 모호하거나 표리부동하다.
(5) 행위구원을 주장한다.
(6) 경제적으로 착취한다.
(7) 조직에 사람을 옭아맨다.
(8) 건강, 물질 축복 등으로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다. 이러한 잘못된 길에서 하루속히 돌아서기를 바랍니다. 넓은 문을 버리고 좁은 길을 찾으세요.(마7:1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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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은 분별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합니다.(고후1: 17- 20) 우리가 무엇을 분별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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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영과 거짓 영을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겔22:26). 그리고 창조주의 것과 피조물의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분별의 기준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든 성경을 인용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한 것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의 말을 기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듣는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도대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느냐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 안에서의 말이라면 다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하려고 합니다. 교리가 천국가게 하는 것이 아님만큼 하나님을 말한다면 다 같은 기독교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세대에서 사랑과, 포용이라는 단어로서 기독교의 차원 높은 행위로서 인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별이란 성경을 이용해서 타인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습니다. 분별은 누군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의지로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분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적인 어두움(사6:9, 10, 사44:18, 19)과 완고한 마음(잠29:1, 렘7:24, 렘13:7, 행7:51, 엡4:18) 그리고 말씀에 대한 무지(벧후3:16) 와 불신앙(요8:35, 46) 때문입니다.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으시기 바랍니다.(고전12:20)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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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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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사할 때, 학교를 선택할 때, 직장을 선택할 때, 결혼할 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망이나 돈이나 환경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으로 고려해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일 다른 것은 다 좋은데 하나님의 뜻과 다른 선택을 했다면 우리의 길은 형통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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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미워하시는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믿음, 정직, 의와 공평, 회개, 예배, 선행, 구제, 찬송과 감사, 사랑, 순종, 전도, 겸손, 화평, 청결, 온유 등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교만, 음란, 거짓, 탐심(우상숭배), 나태, 불신, 분노, 미움, 시기, 이기심, 분쟁, 외식, 술취함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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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516장 (통 265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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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세계 만민이 의의 길
이 길 따라서 살길을 온 세계에 전하세 만백성이 나갈길
2. 주 예수 따르라 승리의 주 세계 만민이 돌아갈
길과 진리요 참생명 네 창검을 부수고 다따르라 화평왕
3. 놀라운 이 소식 알리어라 세계 만민을 구하려
내주 예수를 보내신 참 사랑의 하나님 만백성이 따를길
4. 고난 길 헤치고 찾아온 길 많은 백성을 구한 길
모두 나와서 믿어라 온 세상이 마침내 이 진리에 살겠네
<후렴>
어둔 밤 지나서 동튼다 환한빛 보아라 저빛
주예수의 나라 이땅에 곧 오겠네 오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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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와 삯꾼 목자들에게 속지 말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날 거짓 복음, 짝퉁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교주나 담임목사가 교회를 통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복음전파가 하나님 나라 확장이 아니라 개교회 주의 가운데 화려한 교회건물, 교인수 증가와 교회 예산 등에만 두고 있는 교회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보다 물질, 쾌락, 권세, 스포츠 등을 우상화하고 섬기는 짝퉁 교인은 얼마나 많습니까? 거짓과 이단을 좇은 결과는 심판을 받고, 멸망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속히 진리의 길 의의 길로 돌아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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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수많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극성을 부리고 있나이다. 여러 이단이 나타나 진리를 어둡게 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나이다. 하오니 아버지 하나님이여!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과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지혜의 눈을 허락하시어 사탄의 궤계를 분별하여 보게 하시고 이단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교회들을 더욱 능력 있게 만들어 주시고 담대히 주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케 하옵소서. 우리가 능히 어떻게 이단들을 대적할 수 있을지 깨닫게 하옵시고 또한 어떻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지도 깨닫게 하옵소서. 이 땅의 교회들이 정말 교회다워지도록 기도합니다. 먼저 교회 지도자들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옵소서. 허탄한 것에 마음을 두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의 나라의 영광만 구하게 하옵소서.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질 줄 알게 하시고 주의 뒤만 따르는 신실한 주의 종들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사이비 종교와 이단 종교의 유혹에 빠져 있거나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들에게 속아 넘어간 무리들까지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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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댓글[0]
십자가, 순교 (2014-08-02 오전 8:22:58) http://blog.somang.net/holylove/8177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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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브리서 13: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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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에서 약400년간의 침묵 시대(신구약 중간기)는 영적 암흑기입니다. 바벨론이 망하면서 메대와 바사가 등장하고, 메대와 바사는 바사 곧 페르시아로 통합됩니다. 페르시아는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망합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헬라 제국은 수하의 네 장군에 의해 애굽지역의 톨레미, 시리아 쪽의 셀레우코스, 소아시아의 리시마쿠스, 그리스 쪽의 카산더로 나뉩니다.
처음 이스라엘은 종교 탄압을 하지 않았던 톨레미에 속했으나 전쟁으로 셀레우코스에 넘어갑니다. 셀레우코스는 헬라화를 주장하며 이스라엘 땅에 헬라 문화를 심고자 했고, 전성기에 이르렀던 안티오쿠스4세는 이스라엘성전에 제우스 신상까지 세우고 성전 마당에서 격투기,레스링등의 올림픽경기를 열었습니다. 고대 올림픽은 제의(際儀)의 성격을 가졌고, 옷을 벗고 경기했기에 남자들만 입장 가능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저항하자 안티오쿠스4세는 입구에 돼지고기를 매달아 놓고는 한 번씩 핥지 않으면 못 들어가게 하고 성전 번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드리는 등 그의 신성모독은 극에 달했습니다.
또한 톨레미와 전쟁으로 입은 국고의 손실을 보충하려고 이스라엘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 종교적, 경제적으로 막대한 핍박을 가하고 학대했습니다. 이런 핍박과 학대에 이스라엘사람들은 메시아를 대망하게 됩니다. 다니엘서 마지막 장의 예언은 묵시 문학에서의 카운트로 이젠 주님이 오셔서 해결하기만을 기다리라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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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히틀러정권은 유태인의 학살을 비롯한 장애자와 연약한 환자들까지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1940년 4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살려둘 가치가 있다'와 '살려둘 가치가 없다'로 선별하였습니다. 이른바 '환자우송공익유한회사'를 설립한 다음 장애인들을 안락사 시설로 옮겨다가 그곳에서 살해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잡았습니다. 프리츠는 자신의 시설에 수용된 장애환자들에 대한 존재의 가치를 주장하며 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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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억울하게 갇힌 자와 아동학대, 여성학대, 동물학대, 노인 학대뿐만 아니라 신앙 때문에 학대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북한 땅에서는 많은 백성들이 자유와 인권을 잃고, 굶주리고, 학대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에 학대받고 핍박과 박해 받기를 스스로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핍박과 박해를 받지 않고서 성장. 성숙한 종교 또한 없습니다. 학대받고 핍박과 박해는 괴롭고 아픈 것이지만 인격의 성숙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입에 쓴 약'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이라.’(마태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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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의 경우 많은 아이들이 거리를 헤맨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구걸을 하기도 하고, 갱단에 가입해서 소매치기가 되기도 합니다.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은 그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어서 거리에서 죽는 아이들은 매년 수천 명에 달하지만 이들을 돕는 손길은 많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캄보디아 아이들은 관광객을 보면 일 달러를 외칩니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구걸하는 법부터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아프가니스탄은 평균 수명이 44세이고, 국민의 53%가 밥을 먹기 어려운 가난한 나라입니다. 여성의 3%만이 글을 읽을 수 있으며 30분마다 임신 질환으로 여성이 한 명씩 죽는 나라입니다.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여자들은 여전히 일을 할 수도 없고, 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특히 지방에 사는 여자들은 거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집안의 빚에 팔려 노인의 몇 번째 아내가 되는 일은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아편의 3/4을 수출하는 나라입니다. 아편으로 인한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북한 등지에는 학대받고, 빈궁과 질병과 열악한 환경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 빈곤층과 학대받는 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확장하기에 힘씁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하시려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서 학대받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와 평등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슬픈 자를 위로하며 고통받는 자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사61:1-3)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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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되면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의 주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는 10일이 세계 인권선언의 날이란 점에서 인권적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25일이 성탄절이란 점에서 구주 강생의 의미와 연관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학대받는 자의 입장과 자기를 동일시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동병상련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소자와 자기를 동일시하여 그들에게 한 것이 바로 자기에게 한 것이라고 말한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학대받는 자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몸을 가졌는데 동일한 대우를 받으므로 같은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든지 세상에 태어날 때 똑같은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출생했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본래의 기본권을 유린당한 채 인간이 인간에게 학대받는 상황이야말로 결코 있어서 안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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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약한 자를 말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학대받는 법은 없습니다. 언제나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이는 세상입니다. 만일 여기에 그 사회가, 법이, 제도가 약한 자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강한 자의 세상이요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노예로 전락되어 인권이 짓밟히고 온갖 학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은 나보다 약한 자가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나서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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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현재 곤란 중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여러 가지 제약과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자를 말합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런데도 한 제사장이 지나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가버렸고 한 레위인도 역시 그리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의 상처에 붓고 싸매어 응급조치를 한 다음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여기서 강도 만나 죽어가던 사람이야말로 곤란한 처지에 떨어진 학대받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은 위기와 곤란에 직면한 이웃들에게 냉담하지 말고 훈훈한 인정을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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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억울하게 당하는 자를 말합니다. 아무리 호소해도 통하지 않은 채 손해를 보는 경우를 말합니다. 사실 세상에는 원통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억울한 옥살이에서 심지어 사형당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원통함을 신원해 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입니다. 오히려 강자의 편을 들어 그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방치하거나 묵살해 버리면 우리마저 그들을 억울케 하는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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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고통당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땅에는 고통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병중에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물질에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마실 것이 없어서, 입고 쓸 것이 없어서 가난 가운데 고통당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인권상 고통당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부당하게 정치적 박해를 당하고, 인신을 속박 당한 채 물리적 행사를 통하여 고문 받는 일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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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병중 고통이건, 옥중 고통이건, 물질적 고통이건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자를 도와줘야 합니다. 똑같은 인신을 가진 자로서 얼마나 부자유스럽고 자존심이 상하며 몸이 고통스러울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내 살 꼬집어 아프면 남의 살 꼬집어도 아픈 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고난 받는 이웃을 돌본 자는 오른편에, 외면한 자는 왼편에 두어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합니다(마25: 31- 46). ?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시74:21)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욥3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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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엉클 톰스 캐빈’이나 ‘뿌리’ 등의 작품에 나오는 백인들의 노예 학대가 보여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노예제도는 어디까지나 기독교 복음을 왜곡하고 변형시킨 데서 발단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참된 기독교 복음은 소자들의 것이요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에서 이것을 삭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복음이야말로 학대받는 자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간직하는 것임을 인식해야합니다.
기독교 복음은 루터의 말처럼 ‘가장 낮은 날품팔이하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목사와 꼭 같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사회에서 지위가 어떠하든지 간에 자기 의무를 수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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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재앙의 날에 하나님께서 저를 건지십니다. 그러나 학대받고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는 자는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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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자의 입장에서 갇힌 자를 생각하고, 학대받는 심정으로 학대받는 이웃을 바라보고 내가 고난당하는 심정으로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생각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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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여러분, 이 땅에서 억울하게 갇힌 자와 의로 인해 핍박받고, 연약하고 힘이 없어 학대받는 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찾아가 돕고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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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학대받고, 가난과 질병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을 주시고 이들에게 하루속히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 나라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시고, 범사에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뜻이 이 땅에 임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하옵시고. 소외되고 궁핍한 자들을 주님처럼 섬김과 베품의 자세로 대하게 하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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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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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댓글[0]
십자가, 순교 (2014-08-02 오전 8:22:58) http://blog.somang.net/holylove/8176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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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브리서 13: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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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에서 약400년간의 침묵 시대(신구약 중간기)는 영적 암흑기입니다. 바벨론이 망하면서 메대와 바사가 등장하고, 메대와 바사는 바사 곧 페르시아로 통합됩니다. 페르시아는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망합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헬라 제국은 수하의 네 장군에 의해 애굽지역의 톨레미, 시리아 쪽의 셀레우코스, 소아시아의 리시마쿠스, 그리스 쪽의 카산더로 나뉩니다.
처음 이스라엘은 종교 탄압을 하지 않았던 톨레미에 속했으나 전쟁으로 셀레우코스에 넘어갑니다. 셀레우코스는 헬라화를 주장하며 이스라엘 땅에 헬라 문화를 심고자 했고, 전성기에 이르렀던 안티오쿠스4세는 이스라엘성전에 제우스 신상까지 세우고 성전 마당에서 격투기,레스링등의 올림픽경기를 열었습니다. 고대 올림픽은 제의(際儀)의 성격을 가졌고, 옷을 벗고 경기했기에 남자들만 입장 가능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저항하자 안티오쿠스4세는 입구에 돼지고기를 매달아 놓고는 한 번씩 핥지 않으면 못 들어가게 하고 성전 번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드리는 등 그의 신성모독은 극에 달했습니다.
또한 톨레미와 전쟁으로 입은 국고의 손실을 보충하려고 이스라엘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 종교적, 경제적으로 막대한 핍박을 가하고 학대했습니다. 이런 핍박과 학대에 이스라엘사람들은 메시아를 대망하게 됩니다. 다니엘서 마지막 장의 예언은 묵시 문학에서의 카운트로 이젠 주님이 오셔서 해결하기만을 기다리라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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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히틀러정권은 유태인의 학살을 비롯한 장애자와 연약한 환자들까지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1940년 4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살려둘 가치가 있다'와 '살려둘 가치가 없다'로 선별하였습니다. 이른바 '환자우송공익유한회사'를 설립한 다음 장애인들을 안락사 시설로 옮겨다가 그곳에서 살해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잡았습니다. 프리츠는 자신의 시설에 수용된 장애환자들에 대한 존재의 가치를 주장하며 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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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억울하게 갇힌 자와 아동학대, 여성학대, 동물학대, 노인 학대뿐만 아니라 신앙 때문에 학대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북한 땅에서는 많은 백성들이 자유와 인권을 잃고, 굶주리고, 학대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에 학대받고 핍박과 박해 받기를 스스로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핍박과 박해를 받지 않고서 성장. 성숙한 종교 또한 없습니다. 학대받고 핍박과 박해는 괴롭고 아픈 것이지만 인격의 성숙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입에 쓴 약'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이라.’(마태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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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의 경우 많은 아이들이 거리를 헤맨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구걸을 하기도 하고, 갱단에 가입해서 소매치기가 되기도 합니다.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은 그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어서 거리에서 죽는 아이들은 매년 수천 명에 달하지만 이들을 돕는 손길은 많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캄보디아 아이들은 관광객을 보면 일 달러를 외칩니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구걸하는 법부터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아프가니스탄은 평균 수명이 44세이고, 국민의 53%가 밥을 먹기 어려운 가난한 나라입니다. 여성의 3%만이 글을 읽을 수 있으며 30분마다 임신 질환으로 여성이 한 명씩 죽는 나라입니다.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여자들은 여전히 일을 할 수도 없고, 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특히 지방에 사는 여자들은 거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집안의 빚에 팔려 노인의 몇 번째 아내가 되는 일은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아편의 3/4을 수출하는 나라입니다. 아편으로 인한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북한 등지에는 학대받고, 빈궁과 질병과 열악한 환경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 빈곤층과 학대받는 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확장하기에 힘씁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하시려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서 학대받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와 평등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슬픈 자를 위로하며 고통받는 자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사61:1-3)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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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되면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의 주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는 10일이 세계 인권선언의 날이란 점에서 인권적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25일이 성탄절이란 점에서 구주 강생의 의미와 연관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학대받는 자의 입장과 자기를 동일시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동병상련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소자와 자기를 동일시하여 그들에게 한 것이 바로 자기에게 한 것이라고 말한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학대받는 자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몸을 가졌는데 동일한 대우를 받으므로 같은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든지 세상에 태어날 때 똑같은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출생했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본래의 기본권을 유린당한 채 인간이 인간에게 학대받는 상황이야말로 결코 있어서 안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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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약한 자를 말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학대받는 법은 없습니다. 언제나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이는 세상입니다. 만일 여기에 그 사회가, 법이, 제도가 약한 자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강한 자의 세상이요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노예로 전락되어 인권이 짓밟히고 온갖 학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은 나보다 약한 자가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나서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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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현재 곤란 중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여러 가지 제약과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자를 말합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런데도 한 제사장이 지나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가버렸고 한 레위인도 역시 그리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의 상처에 붓고 싸매어 응급조치를 한 다음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여기서 강도 만나 죽어가던 사람이야말로 곤란한 처지에 떨어진 학대받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은 위기와 곤란에 직면한 이웃들에게 냉담하지 말고 훈훈한 인정을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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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억울하게 당하는 자를 말합니다. 아무리 호소해도 통하지 않은 채 손해를 보는 경우를 말합니다. 사실 세상에는 원통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억울한 옥살이에서 심지어 사형당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원통함을 신원해 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입니다. 오히려 강자의 편을 들어 그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방치하거나 묵살해 버리면 우리마저 그들을 억울케 하는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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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고통당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땅에는 고통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병중에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물질에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마실 것이 없어서, 입고 쓸 것이 없어서 가난 가운데 고통당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인권상 고통당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부당하게 정치적 박해를 당하고, 인신을 속박 당한 채 물리적 행사를 통하여 고문 받는 일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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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병중 고통이건, 옥중 고통이건, 물질적 고통이건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자를 도와줘야 합니다. 똑같은 인신을 가진 자로서 얼마나 부자유스럽고 자존심이 상하며 몸이 고통스러울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내 살 꼬집어 아프면 남의 살 꼬집어도 아픈 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고난 받는 이웃을 돌본 자는 오른편에, 외면한 자는 왼편에 두어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합니다(마25: 31- 46). ?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시74:21)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욥36:15)
 
?
우리는 ‘엉클 톰스 캐빈’이나 ‘뿌리’ 등의 작품에 나오는 백인들의 노예 학대가 보여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노예제도는 어디까지나 기독교 복음을 왜곡하고 변형시킨 데서 발단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참된 기독교 복음은 소자들의 것이요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에서 이것을 삭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복음이야말로 학대받는 자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간직하는 것임을 인식해야합니다.
기독교 복음은 루터의 말처럼 ‘가장 낮은 날품팔이하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목사와 꼭 같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사회에서 지위가 어떠하든지 간에 자기 의무를 수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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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재앙의 날에 하나님께서 저를 건지십니다. 그러나 학대받고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는 자는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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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자의 입장에서 갇힌 자를 생각하고, 학대받는 심정으로 학대받는 이웃을 바라보고 내가 고난당하는 심정으로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생각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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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여러분, 이 땅에서 억울하게 갇힌 자와 의로 인해 핍박받고, 연약하고 힘이 없어 학대받는 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찾아가 돕고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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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학대받고, 가난과 질병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을 주시고 이들에게 하루속히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 나라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시고, 범사에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뜻이 이 땅에 임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하옵시고. 소외되고 궁핍한 자들을 주님처럼 섬김과 베품의 자세로 대하게 하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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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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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화목케 하는 자가 되자 댓글[0]
화목, 좌평, 전쟁 (2014-07-28 오후 1:26:16) http://blog.somang.net/holylove/8174
이웃과 화목케 하는 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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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태복음 5: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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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을에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일곱 식구인데도 조용하며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고, 다른 한 집은 세 식구밖에 안 되는데 항상 시끄럽고 말썽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세 식구인 집 가장이 일곱 식구인 집 가장을 찾아가서 묻기를 "댁은 많은 식구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명랑하고 화목 하게 지내고 계시는데 무슨 비결이 있으면 가르쳐주십시오." 그러자 일곱 식구댁의 가장이 대답하기를 "댁은 잘난 사람들만 모여 살기 때문에 그렇고 우리 집은 모두가 못난 사람들만 모여 살고 있으니 조용할 수 밖에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세 식구의 가장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그것을 본 일곱 식구의 가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덧 붙였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누가 컵을 깨뜨렸을 때 깨뜨린 사람이 제 잘못이라고 사과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아니야 내 잘못이야. 내가 컵을 그곳에 놓지 않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이 저마다 제 잘못이라고 구실을 달아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세 식구의 어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거참 진리는 가까운 데 있었군요. 우리 집은 그 반대였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면 저마다 제 잘못은 없고 상대방만 탓했습니다. '왜 조심성이 없느냐', '왜 그런 곳에 두었느냐', '왜 나만 야단치느냐'
하면서 서로 소리를 질렀으니까요"라며 참으로 좋은 교훈을 얻었다면서 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족들이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면 가정은 저절로 화목해 진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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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복의 말씀 일곱 번째 복은 화평(평화)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싸움보다 평화를 견디지 못합니다. 마음에 평화를 이루십시오. 그러면 다툼을 그치게 하며 화평케 할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과 갈등하고 있는 분들은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이르면 진정한 내적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이 평화의 마음으로 화평케 할 궁리를 하십시오.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노는 평화를 위한 창조적 상상력을 기르십시오. 그러한 이는 평화를 누릴 뿐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하늘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그러한 이가 이 땅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이중적 사랑은 진리의 양극과 음극 같은 것입니다. 두 극이 모두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동력을 갖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무익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고 하나님의 화평을 가진 자라면,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은 의와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삶입니다. 이런 화평의 삶이 바로 천국의 삶인 것입니다.(롬14:17) 그러므로 우리는 화목을 청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화목의 손을 내미십니다. 우상숭배로 극도로 악해진 아합에게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자 ‘옷을 찢고, 굵은 베를 허리에 동이고 금식하며 그 걸음도 천천히 걷는 겸비한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십니다(왕상 21:27∼29). 죄인 중 죄인이었던 아합의 그 작은 겸비함만을 보시고도 하나님께서는 먼저 화목의 손을 불쑥 내미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든지 화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볼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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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로 인해 고통 받고 망하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십자가의 주님으로 오셔서 그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손을 꼭 잡아주시며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원하는 분입니다. 그 주님의 손을 꼭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평의 방법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말씀합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성령의 감동과 감화가 이루어지고 말씀이 믿어집니다. 그리고 믿음의 말씀을 붙잡을 때 성령을 받고, 삶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저희 교회 5세 된 한 아이의 입에서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 하도다"란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예배 중 어머니의 무릎에서 배운 찬양이었습니다. 그 찬양을 통해 그곳에 함께한 선생님들과 모두에게 하나님의 화평이 임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임했던 복이 믿음으로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도 크게 임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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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정치 지도자들의 다투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에 안타깝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은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당리 당략으로 분쟁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그들을 왜 뽑아 주었는 지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은 경제로 하는 것이지만 화평케 하는 일은 공평하게 나누는 분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경제가 잘된다고 결코 화평함이 찾아들지는 않습니다. 육선이 가득하다고 곧 행복한 가정이 되지 아니함과 같습니다. 그리고 발전은 경쟁으로 이루는 것이지만 한 마음이 되는 것은 덕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산업화는 자연을 정복함으로 이룩되는 것이지만 선진화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통하여 새로운 가치와 행복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정신문화를 창조함으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지도자만이 책임질 일이 있으니 화평케 하는 일과 한 마음이 되게 하는 것과 시대를 앞서 때를 읽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지도자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입니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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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므로 우리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화목케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과 화목케 하는 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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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화목케 하는 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 평안함입니다.(엡4:3)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시37:37)
2. 희락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9가지 중 희락과 화평이 있습니다.(갈5:22) 서로 같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잠12:20)
3.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에서 떠나게 합니다.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2:6)
4. 복이 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있은 일입니다. 두 나라가 서로 싸웁니다. 가만히 보니 더 싸우다가는 두 나라가 다 망하게 생겼습니다. 이것을 알고 어느 지혜로운 사람이 중간에 나타나 가지고 이쪽 나라에 가서 왕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유해 말하건대 이 나라는 만월같고 저 나라는 초생달 같습니다. 큰 나라가 되어서 굳이 조그마한 나라를 왜 치려고 하십니까?’ 듣자니 왕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 ‘아, 그러면 그만두지 뭐...’하고는 전쟁을 그만두게 되는데, 이 사람이 이번에는 저쪽 나라에 갔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 사람 보더니 ‘뭐라고? 그 나라는 만월이고 우리는 초생달이라고? 이 사람이 우리를 영 무시하는 구만!’하고 대듭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십니까? 만월은 이제부터 기울 것이고 초생달은 이제부터 커질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내가 당신네를 무시한 것입니까.’ ‘오, 그렇구만!’ 그래서 두 나라 사이의 싸움이 그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 한마디로 화해가 이루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만, 화평케하기 위해서는 대개 많은 희생이 요구됩니다.
5.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14:19)
6.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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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이웃과 화평을 이루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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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화목 제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고난과 희생을 당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합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주님께 받으신 고난을 생각하면서 감사함으로 주님께 영광돌리게 하옵소서.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자들과도 더불어 화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옵소서. 우리 모두가 어디서든지 서로 양보하고, 겸손하고, 용서하고, 사랑하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이웃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고 화평케 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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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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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화목케 하는 자가 되자 댓글[0]
화목, 좌평, 전쟁 (2014-07-28 오후 1:26:16) http://blog.somang.net/holylove/8173
이웃과 화목케 하는 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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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태복음 5: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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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을에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일곱 식구인데도 조용하며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고, 다른 한 집은 세 식구밖에 안 되는데 항상 시끄럽고 말썽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세 식구인 집 가장이 일곱 식구인 집 가장을 찾아가서 묻기를 "댁은 많은 식구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명랑하고 화목 하게 지내고 계시는데 무슨 비결이 있으면 가르쳐주십시오." 그러자 일곱 식구댁의 가장이 대답하기를 "댁은 잘난 사람들만 모여 살기 때문에 그렇고 우리 집은 모두가 못난 사람들만 모여 살고 있으니 조용할 수 밖에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세 식구의 가장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그것을 본 일곱 식구의 가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덧 붙였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누가 컵을 깨뜨렸을 때 깨뜨린 사람이 제 잘못이라고 사과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아니야 내 잘못이야. 내가 컵을 그곳에 놓지 않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이 저마다 제 잘못이라고 구실을 달아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세 식구의 어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거참 진리는 가까운 데 있었군요. 우리 집은 그 반대였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면 저마다 제 잘못은 없고 상대방만 탓했습니다. '왜 조심성이 없느냐', '왜 그런 곳에 두었느냐', '왜 나만 야단치느냐'
하면서 서로 소리를 질렀으니까요"라며 참으로 좋은 교훈을 얻었다면서 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족들이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면 가정은 저절로 화목해 진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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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복의 말씀 일곱 번째 복은 화평(평화)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싸움보다 평화를 견디지 못합니다. 마음에 평화를 이루십시오. 그러면 다툼을 그치게 하며 화평케 할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과 갈등하고 있는 분들은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이르면 진정한 내적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이 평화의 마음으로 화평케 할 궁리를 하십시오.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노는 평화를 위한 창조적 상상력을 기르십시오. 그러한 이는 평화를 누릴 뿐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하늘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그러한 이가 이 땅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이중적 사랑은 진리의 양극과 음극 같은 것입니다. 두 극이 모두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동력을 갖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무익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고 하나님의 화평을 가진 자라면,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은 의와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삶입니다. 이런 화평의 삶이 바로 천국의 삶인 것입니다.(롬14:17) 그러므로 우리는 화목을 청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화목의 손을 내미십니다. 우상숭배로 극도로 악해진 아합에게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자 ‘옷을 찢고, 굵은 베를 허리에 동이고 금식하며 그 걸음도 천천히 걷는 겸비한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십니다(왕상 21:27∼29). 죄인 중 죄인이었던 아합의 그 작은 겸비함만을 보시고도 하나님께서는 먼저 화목의 손을 불쑥 내미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든지 화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볼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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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로 인해 고통 받고 망하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십자가의 주님으로 오셔서 그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손을 꼭 잡아주시며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원하는 분입니다. 그 주님의 손을 꼭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평의 방법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말씀합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성령의 감동과 감화가 이루어지고 말씀이 믿어집니다. 그리고 믿음의 말씀을 붙잡을 때 성령을 받고, 삶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저희 교회 5세 된 한 아이의 입에서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 하도다"란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예배 중 어머니의 무릎에서 배운 찬양이었습니다. 그 찬양을 통해 그곳에 함께한 선생님들과 모두에게 하나님의 화평이 임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임했던 복이 믿음으로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도 크게 임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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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정치 지도자들의 다투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에 안타깝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은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당리 당략으로 분쟁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그들을 왜 뽑아 주었는 지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은 경제로 하는 것이지만 화평케 하는 일은 공평하게 나누는 분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경제가 잘된다고 결코 화평함이 찾아들지는 않습니다. 육선이 가득하다고 곧 행복한 가정이 되지 아니함과 같습니다. 그리고 발전은 경쟁으로 이루는 것이지만 한 마음이 되는 것은 덕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산업화는 자연을 정복함으로 이룩되는 것이지만 선진화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통하여 새로운 가치와 행복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정신문화를 창조함으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지도자만이 책임질 일이 있으니 화평케 하는 일과 한 마음이 되게 하는 것과 시대를 앞서 때를 읽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지도자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입니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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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므로 우리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화목케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과 화목케 하는 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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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화목케 하는 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 평안함입니다.(엡4:3)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시37:37)
2. 희락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9가지 중 희락과 화평이 있습니다.(갈5:22) 서로 같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잠12:20)
3.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에서 떠나게 합니다.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2:6)
4. 복이 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있은 일입니다. 두 나라가 서로 싸웁니다. 가만히 보니 더 싸우다가는 두 나라가 다 망하게 생겼습니다. 이것을 알고 어느 지혜로운 사람이 중간에 나타나 가지고 이쪽 나라에 가서 왕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유해 말하건대 이 나라는 만월같고 저 나라는 초생달 같습니다. 큰 나라가 되어서 굳이 조그마한 나라를 왜 치려고 하십니까?’ 듣자니 왕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 ‘아, 그러면 그만두지 뭐...’하고는 전쟁을 그만두게 되는데, 이 사람이 이번에는 저쪽 나라에 갔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 사람 보더니 ‘뭐라고? 그 나라는 만월이고 우리는 초생달이라고? 이 사람이 우리를 영 무시하는 구만!’하고 대듭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십니까? 만월은 이제부터 기울 것이고 초생달은 이제부터 커질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내가 당신네를 무시한 것입니까.’ ‘오, 그렇구만!’ 그래서 두 나라 사이의 싸움이 그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 한마디로 화해가 이루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만, 화평케하기 위해서는 대개 많은 희생이 요구됩니다.
5.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14:19)
6.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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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이웃과 화평을 이루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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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화목 제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고난과 희생을 당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합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주님께 받으신 고난을 생각하면서 감사함으로 주님께 영광돌리게 하옵소서.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자들과도 더불어 화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옵소서. 우리 모두가 어디서든지 서로 양보하고, 겸손하고, 용서하고, 사랑하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이웃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고 화평케 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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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올바른 자녀교육 댓글[0]
교육, 훈련, 연습 (2014-07-26 오전 8:04:02) http://blog.somang.net/holylove/8172
사랑의 올바른 자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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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잠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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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의 교육에 관심을 갖습니다. 왜일까요. 유대인들이 부자이고 세계 권력을 쥐고 있고 대단한 학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교육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믿기에 유대인의 교육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는 완전히 실패한 교육입니다. 죄 용서함이나 구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위한 교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교육에는 그런 목표도 내용도 없습니다. 오직 출세와 성공을 위한 처세술 교육입니다.
그들의 교육은 화려한 육의 사람을 만드는 데는 대성공의 교육일지는 몰라도 성경이 말하는 영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교육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유대인식 교육을 한다면 단 한 사람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유대인의 교육은 하나님이 보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만들어 낸 것이고, 유대인의 교육을 받은 원조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예수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세속적 성공자를 만드는 교육이 아닙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 영의 사람을 만드는 교육입니다. 인간의 부패와 하나님의 진노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교육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전하게 하는 영의 사람, 깊은 영성의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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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이 안고 있는 심각한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원인들은 무엇인가. 미국을 병들게 만든 원인 중의 하나는 1959년 미국의 공립학교에 행해지던 기도와 성경공부를 금지시켜서 인본주의적이고 뉴에이지적인 문화들이 미국의 청소년들에게 급속도로 번져가도록 방치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특히 1960년대에 아시아인들에 대한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힌두교의 무리들이 미국으로 몰려와 발생한 뉴에이지의 신비주의 문화가 청소년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도록 만들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문제를 통한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엡6:10)함에도 불구하고 신본주의에 입각한 교육이념을 버리고 인본주의적인 교육이념을 앞세워 청소년들을 세상문화에 대해 영적인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못된 열매들이 계속해서 맺히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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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학교행사 때 감사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인경구 교사가 징계를 받은 것은 미국의 경우처럼 점점 심각해지는 청소년 문제로 고민하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대안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교육계의 모순과 영적인 무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은 모세의 손이 올라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기고 내려갈 때는 아마렉이 이기는 그 전쟁에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사들이 모세처럼 두 손을 들고 청소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교육계가 그들이 피곤하지 않도록 아론과 홀처럼 그 팔을 붙들어 올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홀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출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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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실제로 있었다는 한 사형수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사형을 언도 받고 이제 집행을 당하게 된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그의 어머니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를 들은 교도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극악한 사형수라도 역시 마지막에는 어머니를 찾는 법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측은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형수가 만나고 싶어한 것은 모든 사람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형수가 마지막 작별키스를 나눌 때 어머니의 혀를 세게 물어뜯어 어머니의 입에서 피가 낭자하게 흘러 내릴 지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분노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형수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오늘날 사형수가 된 것은 어쩌면 어머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 어머니와 함께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에서 예쁜 장난감을 하나 몰래 집어 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 뒤 나는 그만 남의 것이지만 내 맘에 드는 것은 무엇이나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집어오게 되었고 나중에는 남을 헤치면서까지 내가 원하는 것을 빼앗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형수의 행동이 올바르다거나, 정당하다고 누구도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형수의 비극적인 마지막 고백을 들으면서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14)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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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의 인물로 이 사형수의 어머니와 동일한 실수를 범한 유명한 제사장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그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회막에서 수중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등의 악행을 알고도 이를 꾸짖고 금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죽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 자신은 목이 부러져 죽었고, 또 이러한 소식을 들은 며느리는 해산하다가 죽었다고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삼상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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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에 귀한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온 집안 식구가 그를 받들고 위해 주어 버릇없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그는 점점 크면서 동네 아이들을 못살게 굴고 때려서 곧잘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아들의 버릇을 고치지 못해 고민하는데, 동네 청년 한 사람이 자기에게 맡기라고 나섰습니다. 어느 날 아이는 같이 놀던 친구를 별 이유 없이 심하게 때렸고, 이것을 본 청년은 그를 불러 사정없이 몇 대 때렸습니다. 그 아이는 비록 친구를 때렸지만, 이 청년에게는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얻어맞았으니 억울하고 분하고 아프기도 해서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억울하고 아픈 줄은 몰랐어요. 지금까지 남을 때리기만 했지 맞아보기는 처음이니 맞는 사람의 심정을 처음 느꼈어요”라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다시는 친구들을 못살게 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을 때릴 줄만 알면 어찌합니까? 맞어서 아픈 것도 알아야 합니다. 남의 이를 부러뜨리는 것이 곧 내 이가 부러지는 것으로 연결만 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육방법을 보면 자식이 어릴 때는 매를 사용하되, 장성하게 되면 매를 들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같은 아이지만 그가 어릴 때는 매로 키우고, 점점 자라면 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아이의 수준에 따라서 사랑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부정적으로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고 강하게 훈계하고, 일단 자라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대상에 따라서 표현의 방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의 부정적인 표현일 뿐 내용은 같다는 말입니다.
새끼를 낳아 생존을 위해 먹고사는 방법만을 가르치는 동물의 관계를 어미와 새끼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에서는 어미와 새끼라 하지 않고 부모와 자식이라고 하는 데에는 먹고사는 방법만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고 영적 말씀을 배우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잠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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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의 아버지인 조지 뮬러 목사님이, 어느 날 어떤 청년의 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뮬러는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잘 모르는데 나를 잘못 초청한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저를 잘 모르시지만 저는 선생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23년 전 아홉 살 때였습니다. 학교로 가는 길에 과일 가게에서 먹음직한 사과 하나를 훔쳤습니다. 그때 누군가 나의 따귀를 호되게 때렸습니다. 돌아보니 바로 뮬러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너는 제 팔 계명을 모르느냐? 이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게 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후부터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착하게 살아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잘못을 깨우쳐주시고 교육시켜주신 것이 고마워서 오늘 이렇게 초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예쁘고 착하다고 버려두는 부모가 되지 말고 조지 뮬러 처럼 채찍을 들어서라도 잘못을 깨우쳐주고 가르쳐주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교훈과 지혜로 자란 자식은 나중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자기의 몫을 감당할 줄 아는 훌륭한 인격자로 성장해갈 것이고, 부모들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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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되도록 은혜를 베푸소서. 야곱과 같이 우리도 자녀에게 복을 빌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자녀를 위해 많은 기도를 저축하게 하옵소서. 자녀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게 하소서. 하나님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은혜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늘과 땅의 축복 받아 자자손손 세세 무궁토록 우리 성도들 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맡겨주신 자녀들을 믿음 안에서 양육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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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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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댓글[0]
학문, 지식, 책 (2014-07-06 오전 6:18:47) http://blog.somang.net/holylove/8159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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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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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의 그 진실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그 정성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답니다. 가끔씩 당신은 나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지만 따스한 그대의 눈빛은 안타까운 나의 마음을 믿음과 사랑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의 노여움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답니다. 돌아서는 사람의 그 마음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가끔씩 당신은 나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지만 따스한 그대의 눈빛은 안타까운 나의 마음을 믿음과 사랑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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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나 자신도 바로 알 수 있고, 자기 죄를 깨달아 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진리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가진 것이 있어야 남에게 주고, 베풀 수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서 이웃에게 전하고 나누어 줄 수 없고, 내가 모르면서 남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하나님을 배우고, 진리를 깨달아야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 확장과 진리를 가르치고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배우기를 힘씁니다. 사도행전 20: 35절에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나누어 주려면 열심히 배우고 알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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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우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인터넷을 통해 폭발한 엄청난 정보의 양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다 아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덩달아 하나님도 잘 아는 것 같은 착시현상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 그분 자신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저 사람은 진짜로 하나님을 잘 아는 구나!"하는 몇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초 집중합니다. 그것이 가장 급하고 소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과 진정성은 가장 먼저 기도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아질수록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은 더욱 커집니다. 고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거의 모른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2.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은 하나님은 개인과 세계 역사를 설계하신 분이시며, 그 마지막 계획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심을 알고, 그래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삽니다. 고로 세상 흐름에 너무 민감하여 왈가왈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의 모르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담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일반 불보다 일곱배나 더 뜨거운 용광로불 속에 들어가면서도 담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고로 이 세상 풍조를 따라가며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4.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큰 만족을 얻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나를 아는 관계는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함이 있으며, 그것은 내 얼굴에 하나님의 '평안'이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고로 이 세상을 원망하면서 찡그리며 삶을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여도 그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 불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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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진정 아는 자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는 지식을 당신 머리와 가슴 모두에 가득 채우십시오.
가장 근본이 되고 꼭 알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분이 어떤 분이시건, 그저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더 건강해지고 젊어지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오늘은 또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습니까? 사람들은 스스로 자랑으로 여기는 것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정성과 체력을 아낌없이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며 사랑하며 경외하며 경배하고 있는가를 돌아봅시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은 제대로 믿을 수도, 섬길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겠지만, 어떻게 자녀가 자기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모를 수 있겠습니까? 설령 안다고 해도,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의 한 성품만을 붙잡고 왜곡된 신의 형상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말씀과 교제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바르게 알려는 노력을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어야 할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오직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만이 승리합니다.

성도가 무엇보다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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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성경 말씀을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 14, 15)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 1, 2)
듣지도 알지도 못한 이를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10: 14, 롬10: 17)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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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17: 19)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2: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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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곧 온유하고 겸손을 배우고 본받아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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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5:8)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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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우리는 의를 배우고(시26: 9, 10), 열조의 지혜를 배우고(욥8:8),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배워야 합니다.(신5:1, 시119: 71- 73)
배우기를 싫어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잠30: 3,4), 미련하여 지고(잠17:16, 잠10:10), 축복을 놓치고(창25:32- 34),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이단(거짓)에 속기 쉬우며(딤후4:4), 괴로운 인생행로를 걷게 되며(시119: 105),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딤후3:15)
나무 몇 그루만 보고 숲을 평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설프게 성경을 아는 사람이 이단을 따르고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인 것처럼 주장하며 우선순위를 뒤바뀌게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 자는 망합니다.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무엇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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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고민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받기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삶의 근본적인 자세입니다. 조지 뮬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6가지 단계를 소개합니다.
첫째,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관한 나의 의사가 있지 않도록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한다.
둘째, 결과에 대해서는 나의 감정이나 이상을 개입시키지 않도록 노력한다.
셋째,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고자 하는 방향을 깨달으려고 노력한다.
넷째, 주변 상황을 고려한다. 종종 상황과 말씀과 성령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을 밝혀준다.
다섯째,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내게 보여주시기를 간구한다.
여섯째, 앞에 열거한 대로 하나님께로 향한 기도를 통하고, 성경 말씀과 묵상을 통한 뒤에 심사 숙고하여 다다르게 된 결론에 따라 행한다.
이때 내 마음에 평안이 따르면, 두세 번 더 기도한 다음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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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트루엣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은 비록 역경이 있다 할지라도 영원한 행복과 풍요로움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매일 매순간의 삶 가운데 우리의 무릎을 꿇고 주님의 뜻을 구합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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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53장(통 506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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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2.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소서
3. 성령의 감화 받아서 하나님 말씀 배우니
그 말씀 한절 한절이 내맘에 교훈 되도다
4. 예수가 계신 보좌는 영광에 둘려 있도다
평화의 왕이 오시니 그 나라 왕성하도다
<후렴>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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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혜 선생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수학 시간에 ‘4억 3200만’을 넣어 문장 만들기를 하는데, 우리 반에서 덩치가 제일 큰 녀석과 젤 작은 녀석 둘이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우리 아빠가 ○○장사를 하셔서 4년 동안 모으신 돈이 4억 3200만원’ 이라고 한 녀석이 썼는데, 다른 녀석 생각에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따진 겁니다. 아빠의 능력을 과대 혹은 과소평가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어쨌든 제 눈엔 둘 다 어찌나 귀엽던지요. 하하.
첨엔 하나님을 참 몰랐던 것 같아요. 막연히 어려운 분으로 알았을 땐, 매일 그 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썼지요. 내가 노력하는 만큼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그러다 무얼 잘 못해내면 너무 힘이 들었지요. 나의 무엇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원하시는 그는 내 ‘아버지’이심을 확실히 알았을 때부터 자유함을 누리기 시작했어요. 그가 원하시는 짐이 아니라 그를 잘 몰랐기에 스스로에게 지운 것이었지요. 그가 원하시는 일보단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더 소중함을 깨달았어요. 오랜 동안, 내가 일하면 가끔씩 도와주시는 분으로 알기도 했었지요. 내 머리와 가슴만큼 꼭 그 만큼만 그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았어요. 내가 계획한 일에 그를 부르지 않고, 그의 계획하심에 나를 맡기며 내 안에 그가 주신 소원을 또한 친히 이루실 것을 믿고 맡겼을 때 천국은 나의 크기가 아닌 그를 아는 만큼으로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날 위해 준비하셨지요.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나와 함께 하실 원하신다는 걸 알았습니다. 함께 얘기하고, 의논하고, 기쁨을 나누고, 그에게 짐을 맡겨주길 원하시지요. 자식들이 크면서 가끔은 그 녀석들을 통해 위로 받는 것이 좋더군요.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모든 능력이 그의 손에 있지만 그의 눈빛과 마음을 읽어 드릴 땐 고맙다 말씀해 주시는 소박한 내 아버지시지요. 그런 하나님을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를 아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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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 가를 종이에 써봅시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알고 배우기를 힘씁시다.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내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임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그 분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뜻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그 분이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기뻐하시는 줄 알고, 그분이 싫어하는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가까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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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찬송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가사처럼 하나님의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합니다. 성령이 스승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더욱 알게 하소서. 성령의 감화 받아서 하나님 말씀 배우니 그 말씀 한 절 한 절이 내 맘에 교훈이 됩니다. 내 평생의 소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알아 이웃에게도 널리 전하고 예수님 마음 본받아 겸손하고 온유하고 죽기까지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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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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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약속 (2014-06-24 오전 7:39:54) http://blog.somang.net/holylove/8158
최고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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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신명기30: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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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요 탁월한 물리학자, 수학자였던 파스칼은 “만일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잘 알지 못하고 기독교를 믿다가 죽고 보니 천국도 지옥도 없었다면 그 사람은 손해 볼 것 없는 본전이지만,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기독교를 믿은 사람은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이지만,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믿지 않고 있다가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그것보다 더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영생이 있음을 믿는 것은 최고의 선택이요, 가장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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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헌들이 몰은 “죽음에 임박해서 예수님 믿은 것을 후회하는 사람을 나는 본 일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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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직업선택, 배우자 선택, 지도자 선택, 진로선택, 구입할 물건 선택, 친구선택, 종교선택, 책 선택, 옷 선택, 음식 선택, 집 선택,...
한 TV 기자가 지하철 승객들을 향하여 질문합니다. 지금까지 사시면서 최고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의 답변은 제각기 달랐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남편, 자기 아내를 이야기 했고, 또 어떤 분은 금연, 금주한 것을 말했고, 또 다른 분은 건강 그리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은 것을 말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MP3를 이야기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왜냐고 물어보니 아내가 바가지 긁을 때 MP3가 피난처가 되고 위로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최고의 선택이 무엇입니까? 저에게 최고의 선택이 무엇이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신앙 곧 예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고 허탄한 것들을 신봉하고 추구하고 있습니까? 저는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물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선택한 것은 참으로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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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제16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행복은 숙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뒤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축복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 권리를 주신 것입니다.
동시에 행복은 환경이나 조건이 꼭 좋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조건과 상관이 없습니다. 돈 출세 외모 재주 능력 등이 행복한 삶에 도움은 줄 수 있지만 없어도 불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돈과 출세, 뛰어난 재능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말했습니다. “어려울 때 힘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도 타락하지 않았던가.”
전체 150편이나 되는 시편의 서론 격인 1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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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길, 의인의 길, 흥하는 길, 망하는 길, 믿음의 길, 불신의 길…. 삶의 행복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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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양자 택일 할 일이 많습니다.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이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시고 항상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먼저 주님의 나라와 공의를 생각하고 결정하는 믿음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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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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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약속 (2014-06-24 오전 7:39:53) http://blog.somang.net/holylove/8157
최고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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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신명기30: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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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요 탁월한 물리학자, 수학자였던 파스칼은 “만일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잘 알지 못하고 기독교를 믿다가 죽고 보니 천국도 지옥도 없었다면 그 사람은 손해 볼 것 없는 본전이지만,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기독교를 믿은 사람은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이지만,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믿지 않고 있다가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그것보다 더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영생이 있음을 믿는 것은 최고의 선택이요, 가장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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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헌들이 몰은 “죽음에 임박해서 예수님 믿은 것을 후회하는 사람을 나는 본 일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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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직업선택, 배우자 선택, 지도자 선택, 진로선택, 구입할 물건 선택, 친구선택, 종교선택, 책 선택, 옷 선택, 음식 선택, 집 선택,...
한 TV 기자가 지하철 승객들을 향하여 질문합니다. 지금까지 사시면서 최고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의 답변은 제각기 달랐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남편, 자기 아내를 이야기 했고, 또 어떤 분은 금연, 금주한 것을 말했고, 또 다른 분은 건강 그리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은 것을 말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MP3를 이야기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왜냐고 물어보니 아내가 바가지 긁을 때 MP3가 피난처가 되고 위로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최고의 선택이 무엇입니까? 저에게 최고의 선택이 무엇이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신앙 곧 예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고 허탄한 것들을 신봉하고 추구하고 있습니까? 저는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물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선택한 것은 참으로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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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제16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행복은 숙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뒤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축복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 권리를 주신 것입니다.
동시에 행복은 환경이나 조건이 꼭 좋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조건과 상관이 없습니다. 돈 출세 외모 재주 능력 등이 행복한 삶에 도움은 줄 수 있지만 없어도 불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돈과 출세, 뛰어난 재능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말했습니다. “어려울 때 힘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도 타락하지 않았던가.”
전체 150편이나 되는 시편의 서론 격인 1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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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길, 의인의 길, 흥하는 길, 망하는 길, 믿음의 길, 불신의 길…. 삶의 행복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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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양자 택일 할 일이 많습니다.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이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시고 항상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먼저 주님의 나라와 공의를 생각하고 결정하는 믿음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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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댓글[0]
은혜, 구원 (2014-05-31 오후 7:41:26) http://blog.somang.net/holylove/8152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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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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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미국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도전을 주었던 어린 소년 ‘라이언 화이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라이언은 13살 때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았는데, 수혈을 잘못 받아서 그만 에이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어른들의 부주의로 소년의 인생은 죽음의 길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변함없이 밝게 학교 생활을 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였고, 그를 염려하는 부모님을 위로하면서 기쁘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신문 기자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소년의 이야기가 신문에 매일 게재되었습니다. 텔레비전 등의 매체에서도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라이언은 그렇게 5년 동안 살다가 결국 18세에 죽었습니다. 소년이 죽기 전에 그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내용이 한 기독교 잡지에 실렸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네게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빠, 전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아무도 아빠처럼 귀한 선물을 준 사람은 없었어요. 아빠는 저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선물로 주셨잖아요. 바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아빠 때문에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는걸요. 이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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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보다 위대한 선물은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담고 있는 복음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귀한 생명과 건강, 여러분의 자녀들, 그리고 직장과 사업,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무상으로 거져 주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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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 역시 선물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정성을 다한 선물로 인생들을 감동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은 너무나 많아 다 말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자연이라는 선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저 푸른 하늘, 눈부신 5월을 만드는 녹색의 신록들과 화사한 봄꽃들, 공기, 햇빛,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선물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가장 소중한, 독생자를 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당신의 사랑의 극치를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분께 나의 삶을 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분이 먼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최고의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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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최고의 선물이 있습니다. 바로 나의 부모님이십니다. 어머니가 없는 나, 아버지가 없는 당신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주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나의 어머니. 말없이 표현은 안하시지만 가슴 깊이 자식을 생각하고 언제나 힘이 되어 주신 나의 아버지.
그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모든 사람들을 다 돌볼 수 없어 어머니를 대신 보내주셨다’ 그렇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더할 수도, 대신할 수도 없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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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델라와 짐이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피차가 사랑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그들이 특별히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인 델라에게는 훌륭한 머리칼이었고, 남편 짐에게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금시계뿐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부인 델라는 남편 짐을 위하여 선물을 사야겠는데 가진 돈이라고는 몇 푼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델라는 그의 머리칼을 잘라 그것을 팔아서 남편의 백금 시계줄을 선물로 샀습니다. 짐을 사랑하는 아내 델라는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의 훌륭한 머리칼을 깎는 것도 아깝지 아니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온 남편 짐은 머리를 박박 깍은 그의 아내를 보고 깜짝 놀라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잠시 후에 짐은 그의 아내를 위해서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 선물은 아내의 훌륭한 머리칼에 꽂을 보석 장식품 그것도 자기의 금시계를 팔아서 마련한 선물이었습니다. 결국은 쓰지 못하는 선물들! 그 남편과 부인은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서로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기쁨마음으로 선물로 주었습니다.
성경에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19:14)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내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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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이 주신 많은 선물 중에서도 고귀한 선물로는 자녀를 주신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오래 전 중국 남방에 송(宋)씨 성을 가진 신실한 크리스천이 있었습니다. 그는 빈곤한 환경 가운데서도 교회에 헌신하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있었지만 기도를 거르는 일은 없었습니다. 특히 그는 네 명의 자녀들을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로 보고 희망 속에서 키웠습니다. 그 결과 아들 자문은 중국의 재정총장이 되었고 큰 딸 경령은 "중국의 위인" 손문의 아내가 되었으며 둘째 딸 애령은 남경정부 수석 공상희의 아내가, 셋째 딸 미령은 장개석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자식은 여호와의 선물이요, 태중의 소생은 그가 주신 상급이다"(시127:3) 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자기의 생명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지도, 질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식이 잘되면 자신의 일보다 더욱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의롭고 선한 행실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면, 그것이 아버지의 면류관이 됩니다. 또한 자식이 지혜로워서 모든 일을 잘 처리하면, 그 자식을 낳은 부모는 여간 자랑스럽고 기쁘지 않습니다. 실로 그 자식을 낳은 보람을 느끼고 참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육신의 부모에게 자랑이 되는 자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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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준 소중한 선물입니다.
남편은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준 소중한 선물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준 소중한 선물입니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준 소중한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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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대변인을 지냈던 토니 스노 씨는 결장암으로 인해 큰 수술을 여러 차례 받아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도대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슬픔과 참담함만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고통을 통해 남은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삶이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 선물을 귀하게 생각하고 사용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암에 걸린 뒤 대변인 생활을 하며 사이가 나빠졌던 기자들에게 먼저 화해를 청했으며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삶이란 선물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암이 완치될 것으로 확신하십니까?”라고 묻는 기자들의 대답에 “누구나 암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암에 걸림으로 인해 남은 인생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짐을 느꼈습니다. 암이 나을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 이제 주어진 시간을 행복을 위해 최대한 활용하려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삶이란 모두에게 주어진 값진 선물입니다. 그것을 늘 누리고 있기에 쉽게 깨닫지 못하지만 반드시 큰일을 당해야만 그것을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더 사랑하고 더 행복해지는데 사용하십시오. 삶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임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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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박 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바친 선물은 황금 유향 몰약입니다. 황금은 왕이신 예수님을, 유향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몰약은 사람으로 돌아가실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기 예수는 인간을 아끼고 사랑한 하나님의 선물 중의 선물입니다.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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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존경받는 정치인이자 유명한 작가였던 벨푸어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다음의 글을 썼습니다.
“그대의 원수에게는 용서를 주는 것이, 그대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관용을 보이는 것이, 그대의 친구에게는 자신의 모든 마음을 알리는 것이 가장 좋은 선물이다. 그대의 아버지에게는 섬기는 마음을, 그대의 어머니에게는 자신의 잘한 일을 알리는 것, 그대 자신에게는 존경과 애정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선물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비와 인자함을 보이는 것, 그것이 모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다.”
우리가 주님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복수보다도 용서를, 비난보다도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정결한 마음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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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는 12월이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부산해집니다. 그들은 성탄절에 맞추어 정성껏 선물을 준비해서 서로 주고받는 정겨움을 보입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백화점이나 쇼핑몰의 1년 매출의 50%를 12월 한 달 동안, 그것도 성탄절 전에 다 올린다고 합니다.
이처럼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비단 독일이나 유럽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에 대해서 한국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대단한 나라입니다. 성탄절 뿐 아니라 추석과 설날에도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이런 주고받는 문화는 명절 뿐 아니다.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경조사에 부조를 하는 것 역시 한국의 주요한 문화 현상입니다. 심지어 해서는 안 될 청탁과 함께 주는 선물, 이른바 뇌물이 아직도 일상화 되어 있어 사회를 병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평소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했던 부모, 형제, 부부, 스승, 연인, 친구, 지인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담은 작은 선물은 사람 사이의 정을 더 도탑게 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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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대통령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너희에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최고로 복 있는 사람은 은혜 입은 사람, 은총 받은 사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이 세 가지 최고의 선물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사업과 사역을 잘 감당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타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랑과 존경의 바탕입니다. 평강을 누리는 자가 최고 행복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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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하였고,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한일서 2:25)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심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행2:39)과 구원의 선물을 받으면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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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너무나 귀한 선물들을 많이 받았습니다. 은혜에 감사드리오며 우리도 선물을 받기만 하지 말고 이웃에게 좋은 선물을 많이 하게 하소서 “사랑해요” 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려운지요. 오늘은 가족에게 “사랑해요, 고마워요”라는 말을 꼭 전하기 원합니다. 추위에 떠는 이웃들을 사랑의 말, 사랑의 물질로 녹여 줄 수 있게 하소서. 우리 가족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영원히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 크신 은혜를 잊지 말고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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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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