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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와 푯대를 뚜렷이 정하고 달려가세요 댓글[0]
소망, 희망 (2014-05-25 오전 9:57:50) http://blog.somang.net/holylove/8147
목표와 푯대를 뚜렷이 정하고 달려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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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빌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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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년이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 농촌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땀을 흘리며 밭을 가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도와드릴 생각이 나서 소년은 소를 몰고 밭을 갈았습니다. 서투른 쟁기질로 한참 갈다 보니 아버지가 간 밭의 고랑은 똑바르나 자기가 간 고랑은 구부러졌습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보고 “처음 보습질을 할 때는 앞에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야 똑바로 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년은 그 말씀을 마땅히 여겨서 둑에 풀을 뜯고 있는 황소에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역시 고랑은 똑바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황소가 자꾸 움직이니까 너의 고랑도 구부러지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은 것에 목표를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앞에 우뚝 솟은 포플라 나무에 목표를 두고 밭을 갈았더니 비로소 똑바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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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나 목표를 갖지 못하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생의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과 정열을 다 바칠 수 있는 목표나 신념을 가질 때 우리는 생의 충실감과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 심령 속에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목표나 방향이 없이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이 귀중한 생명이 삶의 목표로서의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만날 때 그것은 더욱 빛나고 힘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푯대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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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개미떼들은 무엇인가를 얻고자 그토록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고 있었던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는 그 개미떼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왔다갔다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 잠시 사무실 창가에 서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개미떼처럼 저 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저렇게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것일까?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을 위해서 일까? 그렇지 않으면 썩어 없어질 헛된 것을 위해서 일까?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 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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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재산을 쌓아둔 채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그 재산의 위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휘두르다가 세상을 떠나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복잡한 문제들과 그로부터 파생된 갈등을 겪는 유가족을 대하면서 “과연 그 사람은 자신의 죽음 뒤에 이같은 복잡한 문제들과 갈등이 뒤따를 줄 알면서 죽어간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알지 못한 채 죽어간 것일까”하는 의문이 생기곤 합니다.
그 사람이 평생 동안 달음질하여 얻은 것, 그것은 결국 “썩을 면류관”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사람은 불쌍하고 무책임한 사람이요, 몰랐다면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니, 어느 쪽이든 불쌍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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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 보이는 저 많은 사람들이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저렇게 분주하게 달음질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것 즉,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 의와 생명과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달음질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생활을 보면 칠십 년을 아무 목표도 없이 삽니다. 그런 사람의 생활은 마치 산 위의 풀과 같이 바람이 부는 대로 요동합니다. 지조를 찾을 수 없고 의리와 절개도 없게 됩니다. 이런 생활이 실패로 돌아갈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또 목표를 정하기는 정하지만 잘못 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령 학생들은 지식을 탐구하며 열심히 공부하지만 지식이 방패는 될 수 있어도 일생의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일류대학입학, 결혼, 돈, 세상에서의 출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일시적이요 헛된 것이며,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썩을 면류관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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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중에 해바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향해 자란다고 해서 해바라기입니다.

옛날 인도의 왕이 중죄를 지은 사형수에게 “기름이 가득 담긴 그릇을 주면서 이 그릇의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온 성을 한 바퀴 돌고 오면 죄를 사면하리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죄수는 온 정신을 그릇에 집중하며 복잡한 성 밖 목표 지점을 돌아왔습니다.
왕은 죄수가 정말 다녀왔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고 어디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물어보았습니다. 죄수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왕은 그것도 모르면서 갔다 왔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냐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때 죄수는 분명히 말하기를 “왕이여, 나의 생명이 이 그릇에 달려 있는데 어찌 한눈을 팔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직 그릇만 보고 다녀왔나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때야 임금은 죄수의 성실함을 인정하여 죄를 사면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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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곳곳에서 다가오는 유혹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믿는 우리들은 오직 주만 바라보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합시다. 오직 성경이라는 그릇만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주바라기가 됩시다.
자신이 목표한 일,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의 푯대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유혹의 손짓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참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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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플로렌스 채드윅(Florence Chadwick, 19181995)이란 여성 장거리 수영모험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1950년에 당시 기록인 13시간 20분 만에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수영해 건넜고, 1951년에는 16시간 22분 만에 영국에서 프랑스로 수영해 건넘으로 영국 해협을 양방향으로 수영해 건넌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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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7월 4일, 그녀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카탈리나 섬에서 롱비치까지 34킬로의 수영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출발 후 15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몸은 찬 바닷물로 거의 얼었습니다. 게다가 짙은 안개로 건너편 땅을 볼 수 없었고, 심지어는 안내선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어들은 주위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TV를 통해서 그녀를 격려했고, 배 위에서는 어머니와 트레이너가 목표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포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목표를 800미터 남겨두고 포기했습니다. 몇 시간 후, 그녀는 방송 리포터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땅만 보였어도 저는 이 일을 해낼 수 있었을 거예요.” 실패의 제일 원인은 피로나 추위가 아니라 목표를 볼 수 없게 한 안개였습니다.
2달 후, 그녀는 다시 같은 코스에 도전했습니다. 그때도 역시 짙은 안개로 해안선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마음속에서 “땅이 저 건너편에 있다”는 목표의식을 잃지 않았습니다. 결국 13시간 47분에 그곳을 건너 당시 남자 기록을 2시간이나 단축시켰습니다. 한 번의 실패를 통해 형성된 강한 목표의식이 성취의 동인이 된 것입니다. 성공은 실패의 옷을 거꾸로 입을 때 나타납니다. 성공은 운명보다 목표가 크게 보일 때 모습을 드러냅니다. 목표를 잃지 않고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 때, 실패는 성공으로 변합니다. 뚜렷한 목표는 삶에 활력과 극복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까닭 없이 힘들고, 쉽게 지치고, 몸과 마음이 처진 느낌이 들 때는 목표를 새롭게 할 때입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자신의 생애를 걸만한 목표와 푯대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 분야에 관심은 많고 정보도 많지만, 소중하고 뚜렷한 목표와 푯대가 없습니다. 목표와 푯대가 뚜렷하지 않으면 잘 낙심하게 되고, 잘 기다리지 못하게 됩니다. 목표가 희미하면 유능함도 소용이 없습니다. 진짜 유능함은 마음속에서 목표의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목표가 뚜렷하지 않으면 실패가 뚜렷해지고, 목표가 뚜렷하면 성공도 뚜렷해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숨이 찰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요즘은 유치원생도 바쁘게 여러 학원을 뜁니다. 그런데 대개 뚜렷한 목표도 없이 그냥 열심히 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은 좋지만 목표 없이 뛰는 것은 낭떠러지를 향해 뛰는 것입니다. 땀과 성실은 인생의 목표가 뚜렷할 때만 가치를 발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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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적인 것 움직이는 것, 일시적인 것을 목표로 하여 시간과 정력을 다 소모하되 얻는 것이 별로 없는 후회스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참되게 살려는 사람들은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을 푯대로 정하고 인생의 모험을 실천하며 후회 없는 삶을 삽니다.
인생의 역사와 교회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사들과 성인(현인)들은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바른 푯대를 향해서 달라간 분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좌나 우나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그것을 잡으려고 일편단심으로 달려간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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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대를 아직도 정하지 못하셨습니까? 정했다고 할지라도 흔들리는 것을 목표로 정하셨습니까? 이제 여기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모든 인생의 참된 푯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영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과 인류사회에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어느 날 장사꾼들이 큰 바다를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바다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훌륭한 길잡이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의 길잡이를 구해 바다로 나갔습니다. 바다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 심한 파도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사람을 죽여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이곳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습니다." 이에 장사꾼들은 회의를 열었습니다.
"나에겐 처자식이 있네. 내가 죽으면 우리 노부모는 누가 모시겠는가 ?"
장사꾼들은 각각 살기 위해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가. 그러니 어떻게 우리중의 누구를 죽이겠는가. 차라리 저 길잡이를 죽여 제물로 쓰도록 함세"
그들은 곧 길잡이를 죽여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요행히도 파도는 멈추고 바다는 잔잔해 졌습니다. 그러나 길잡이를 죽인 그들은 얼마 안 가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방황과 굶주림으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길잡이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영적 길잡이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옳은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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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사랑의 주님, 날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적극적인 마음으로 살도록 해주옵소서. 목표를 향해 서두르지 말고 거기서 돌아서지도 말고 희미한 과거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슬퍼하지도 말고 숨겨진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물러서지도 않고 내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기쁨에 찬 마음으로 주님을 푯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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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allcome, http://cafe.naver.com/newgal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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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확장과 성령 충만의 은사 댓글[0]
천국, 지옥, 낙원 (2014-05-05 오전 8:28:28) http://blog.somang.net/holylove/8138
하나님 나라 확장과 성령 충만의 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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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1: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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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예수원에서 사역하셨던 대천덕 신부님은 성공회 신부님이신데 그분 할아버지인 R. A. 토레이 목사님의 글에는 성령 충만이 자주 강조됩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한다. ‘하나님! 성령 충만하게 도와주십시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오늘 하루 나는 너무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가 성령 충만하다고 느끼지 못할 때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성령 충만하지 않을 때 말하면 실언이 되기 쉽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제가 성령 충만하지 않을 때 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저의 결정은 잘못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R. A. 토레이 목사님은 이처럼 성령 충만을 사모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부패한 인간의 죄성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실패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사모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주관하시면 우리는 감정을 다스릴 수 있고 내 안에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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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우리의 가장 큰 사명은 하나님 나라 확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꼭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 17)

주기도문을 보세요.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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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교회와 내 안에 사랑이 없고,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없다면 이는 죽은 교회요 죽정이 교인입니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과연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합니까? 아니면 청년들이 세상에서 창업하듯이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 사업을 위해 세워진 교회입니까?
모든 교회가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길이 있고, 넓은 길도 있습니다. 주여! 주여! 부른다고 다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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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어거스틴의 책 가운데 ‘신의 도성’ 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있습니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당시로 보면 절대로 멸망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도끼를 휘두르면서 벌거벗은 채로 쳐들어오는 야만인 오트족한테 로마는 함락됩니다. 아우성과 화염 속에서 거대한 로마성이 무너지는 순간에 어거스틴은 굉장한 고민을 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이 나라가 무너지고, 저 야만인들이 점령하게 되는가? 그 때 모든 기독교인들이 고민을 합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유명한 역사관을 내어놓게 됩니다. ‘사람이 세운 이 세상 나라는 무너진다. 무너지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무너지는 로마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어 가는 것을 그는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칠흙같은 캄캄한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어두움을 치른 후에야, 아침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우리는 때로 어린이들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어요?'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저 하늘에 있단다."
"하나님 나라는 네 마음에 있단다."
이런 답을 하십니까? 그러나 그 어린 아이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을 때, 어떤 답은 거짓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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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곳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사상은 하나님의 지배라는 뜻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 있는 통치를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사탄의 손에 빠져 있는데, 하나님의 지배가 임하시는 때, 사탄과 그 아래 있는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사랑과 의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에덴 동산이라 할지라도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할 때,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일 수 없습니다. 그가 타락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사탄의 말을 들을 때, 사탄이 대신 ‘이 세상 임금’으로 되었습니다(마 4:8-10, 요 14:30). 하나님 말씀이 다스리지 않은 곳은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담을 에덴을 떠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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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방주를 지었을 때, 그 말씀대로 지어진 방주는 하나님의 나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그 방주를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 방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방주는 심판이 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택정되고(삼상 16:1-13), 다윗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손에 의해 통치될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참 사람이며 또는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계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입니다(행15: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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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과 세 친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그가 풀무불에 들어가도, 사자굴에 들어가도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일 수 있습니다. 사자도 풀무불도 그들을 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의 임함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교회’의 주인이시며 머리가 되셨습니다. 살아계셔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태로선, 임하지 않습니다(눅17:20, 21, 롬14:17).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 신자는, 현재, 지상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습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 안에서 현재, 지상에 임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척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한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일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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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의 복음전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눅9: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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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부터 갈릴리 3차 전도 사역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명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제자들로 하여금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를 불러 모아서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그들은 당시에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난 오늘 돌이켜 볼 때, 그보다 값진 결단이 없습니다. 그들보다 존경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부르시고 보내신 그들의 생애에 하나님께 순종하여 나아간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열두 제자들은 세상에서 어부였습니다. 세리였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평범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들은 하나의 새로운 신분을 더 부여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 신분으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원인 것입니다. 로마 식민지 국가의 무엇이 아닙니다. 유대 갈릴리 지역의 어부나 세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한 구성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특권입니다. 모세는 그 일원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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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에 내어 보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합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갈 때, 그곳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채색 옷을 입고 사랑을 받는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불러내어 애굽의 군대장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또 옥살이를 하게 하십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함으로 그가 가는 곳은 감옥이라 할지라도, 감옥이 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 1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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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곳에 이루어집니다.
요즈음에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 보면, 일종의 형식이 있습니다. 신학교육과 목사 안수 등의 자질과 신분을 갖춥니다. 선교지의 정보를 모아 교육합니다. 선교비를 확보합니다. 선교사 파송식을 가집니다. 이런 신중한 절차를 따라서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좀 색다릅니다. 그냥 12명의 제자를 '불러 모아 내어 보냅니다.' '세상에 던져버렸다!'는 표현과 같습니다.'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벌 옷을 가지지 말며'(눅9:3, 막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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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파송함을 받은 그 당시의 제자라면,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두둑하게 선교비를 주신 것도 아니요, 비자카드라도 만들어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무런 보장이 없이 세상에 보내시는 예수님의 제자 파송은 요즈음 선교 관점에서 보기에는 참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스쳐가지 않습니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전도자로 파송되어 길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여행 장비들이 있습니다. 여행 경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숙식을 위한 기본적인 의류나 식량, 또 험로를 대비한 지팡이 따위가 그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같이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하고 교통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러한 여행에 필요한 장비들을 일체 금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처럼 보편적으로 여행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장비들을 금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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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지팡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거친 들에서 여행자를 보호하기도 하고 높은 곳을 오르는 데 큰 힘이 되어 줍니다. 그리고 어쩌다 넘어졌을 경우 용이하게 일어설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지팡이 소지를 금하셨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가 의지해야 할 것은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다윗도 내게 부족함이 없노라고 노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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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 역시 여행자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입니다. '양식'이 없어 배를 곯습니다. '돈' 또한 생활 필수품입니다. '주머니'란 요즈음 여행가방 정도입니다. 여기에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담습니다. '두 벌 옷' 정도는 여행하는데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필수품들을 의지하지 말라 명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보기에 일차적인 필수품이지만, 하나님 나라 측면에서 보면, 2차적인 문제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이지요. 이 모든 필수품이 되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양식'이 주린 영혼을 채우지 못합니다. '돈'으로 그 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주머니'에 영혼의 양식을 담을 수 없습니다. '두 벌 옷'도 벌거벗은 영혼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몇 번이고 망설입니다. 이름도 주시고, 이적도 주시지만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합니다. 대 선지자 예레미야의 경우도 이런 망서림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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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파송은 하나님나라의 일원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이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책임지십니다. 이것이 귀합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는 헤롯의 태도로 보아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능력과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권세는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으로 그 능력을 시행할 권리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는 열 두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 행하시던 사역의 연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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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고 하나님 나라 확장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 일꾼으로 부름 받아 그 일을 감당할 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 어두움의 권세가 떨게 됩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팔레스틴 전역에 퍼져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중에서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도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분봉왕 헤롯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그가 당황한 것은 일차적으로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분봉왕 헤롯은 대 헤롯의 아들로서 세례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왕권의 새로운 시작이 그를 본능적으로 위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분봉왕 헤롯은 어두운 권세자의 표상적 인물입니다. 그는 에돔인으로서 당시 유대 사회의 권력을 관장하고 있던 사두개 교도였으므로 죽은 자의 부활 같은 것은 전혀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통치 관할 구역인 갈릴리에서 예수의 명성이 높아가고 그를 추종하는 백성들이 많아지자 예수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으며, 그의 제자들도 놀라운 일을 행하자 그 소문은 즉시 헤롯에게로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어두움의 권세도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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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나메이커는 미국 제23대 대통령 벤자민 해리슨 정부의 내각요원으로서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며 큰 발전과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또한 워나메이커는 미국의 백화점을 초기에 본격적으로 운영했던 백화점 왕으로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아주 훌륭한 생활과 헌신을 한 사람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워나메이커 체신장관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워나메이커씨, 당신은 그 큰 사업에 바쁠 뿐만 아니라 체신장관의 업무를 수행하고 또 다른 일들이 많을 터인데 어떻게 4천명의 주일학교 학생들을 다루는 주일학교 교장직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워나메이커는 정색을 하고 답변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을! 주일학교가 나의 정작 본 사업입니다. 그 외의 다른 일들은 그저 일들입니다. 나는 이미 45년 전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의 말씀을 확실히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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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나의 변화나 사회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전12장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곡해하여 자기가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있으니, 자기는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입으로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말하고 있지 실제로는 자기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또는 돈, 가족 등이 내 삶의 주인(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멉니다. 내(자아)가 죽어야 내 안에서 하나님이 왕노릇하실 수 있습니다.(마16:24, 눅14:26)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4,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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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없이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내 안에 구주로 모실 수 없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받으려면 먼저 돌감람나무가 죽어야 합니다.(롬11:17- 24)

본문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그런데 성령의 은사를 받고 거기에 머무르고 안주하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 2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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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았어도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도리어 화가 있습니다. 마25장 14- 30절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1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에 묻어 두었다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했습니다.
저는 방언과 예언과 환상과 치유의 역사 등을 볼 수 있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가 있다고 해서 가본 적이 있습니다. 성도가 20여명 정도되는 교회인데 성도의 대다수가 방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계시를 듣는 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맛보는 데 그치고 교회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는 힘쓰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들도 전도에 힘쓰고 있으나 그 전도는 교인수 확장을 위해 하는 것이지 진정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비단 이 교회뿐만 아니라 많은 기존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조차 모르고 전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역자(인간) 중심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 확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1서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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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왕과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주인이 되거나 인간이거나 물질이나 우상이라면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런 교회로 전도한다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까?
내게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주신 목적과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능력을 통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왕으로 모신 곳으로 불신자를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오순절 성령의 은사를 받고 제일 처음 한 것이 의와 평강과 희락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 42-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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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복음전파에 힘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내 것을 희생하며 동행하고 따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8장 2-3절을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는 ‘여인들이 자신들의 소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겼다.’는 말을 강조합니다.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으로 치유받고 주님을 따른 여인들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이 주의 능력으로 치유되어 자신의 소유로 주님을 섬기며, 주의 나라 확장에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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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확장은 그냥 가만히 있는 데 이루어지 않습니다. 기도만 한다고 이루어지지 않고, 기도한 만큼 내가 희생하고 손해 볼 때 이루어집니다. 열정만 있어도 안 됩니다. 내 것을 드리는 헌신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주의 나라가 확장되는 역사를 보면, 많은 신앙인들이 물질과 명예를 버리고, 가족과 생명까지 버리며 헌신하였습니다. 내 것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제자들 중 일부, 또는 여인 중 몇 명의 헌신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은 헌신된 개개인이 하나가 되어 사역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8장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열 두 제자, 어떤 여자들, 다른 여러 여자! 예수님을 제외한 한 단어도 단수형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이들의 삶은 참으로 열악하고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여인들이 귀신이 들려서 고생하였고, 각종 질병으로 앓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사도들을 보아도, 어떤 이는 세리출신이고, 어떤 이는 어부 출신이었고, 어떤 이는 열심당원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그들의 삶이 주님께 온전히 헌신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헌신된 개개인이 하나가 될 때, 결국 주의 나라가 힘 있게 확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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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주신 것은 자신의 명예를 높이고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쓰라고 주셨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았어도 내가 준비된 그릇 만큼만 받은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내가 받은 은사만을 고집하고 다른 이들의 받은 은사를 무시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능력을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 나라 확장하는데 사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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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갈릴리 공동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가 되고, 우리 모두가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영육간에 복주시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 받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갈릴리 공동체를 통하여 병든 자가 치료받게 하시고 낙심가운데 있는 자가 기쁨과 소망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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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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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알기를 힘쓰라 댓글[0]
학문, 지식, 책 (2014-05-01 오전 8:48:04) http://blog.somang.net/holylove/8132
하나님 알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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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호세아 6:1- 6, 찬송: (453장 <구>506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3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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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알 필요가 없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마음을 편안히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지식에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인지... .
혹 차가 고장났다고 합시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고장난 차를 고칠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고장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광대한 정보를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문을 통해서, 또는 컴퓨터를 통해서 우리들의 궁금한 것들을 다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그 문제만은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알아야 하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넘치는 정보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많은 정보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만이 지혜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은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삶이 추구해야 할 최상의 목표이며, 또한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을 알도록 노력합시다. 그분을 알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지식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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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한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9:24)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한1서 4: 6)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 9-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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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에딘버러 의과대학에 제임스 심슨 경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부터 150여 년 전에 마취제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까지는 수술을 할 때 마취를 하지 않고 그대로 생살을 찢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하는 사람들의 공포심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심슨 경이 발견한 클로로포름 덕분에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수술의 공포감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제자들이 찾아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평생을 통해서 가장 위대한 발견을 했다고 한다면 무엇을 들겠습니까???. 그들은 그가 ??마취제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것이 내 생애 최대의 발견이었다.??하고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너무나 뜻밖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내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발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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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의 많은 지식을 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믿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절망합니까?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잘못 삽니까?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헌신을 모릅니까?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하나님의 길을 잘 모르고, 하나님의 약속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는 것 같아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하여 많이 그리고 올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열심은 사나운 말과 같습니다. 빈 깡통이 가장 요란한 말을 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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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1장을 보면 입다가 믿음으로써 이방 나라를 물리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그런 승리를 하는 과정에서 그가 잘못된 서원을 함으로써 자기의 무남독녀를 번제의 제물로 불태워 죽이는 너무나 슬프고 불행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입다는 큰 용사였고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그도 역시 부족함이 있고 연약함이 있는 인간으로서 하나님 백성답지 않은 크나큰 실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입다는 만약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승리하고 돌아오는 그 날에 자기 집 문을 열고 나와서 자기를 가장 먼저 환영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해 주시면 나의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번제란 희생 짐승을 잡아 통째로 제단에서 불태워 신에게 드리는 제사로서, 구약 율법에 나오는 5대 제사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제사가 바로 이 번제의 제사입니다. 그러나 율법에서는 번제의 제사를 드리되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짐승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했지, 사람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 한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그 사건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나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불태워서 바치는 그런 번제를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가르치신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사람을 불에 태워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인신(人身) 제사라고 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신 제사를 명백하게 금지하고 계십니다. 즉 신18:9-12에서 보면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일이 가나안 족속들과 그 주변 민족들 사이에서는 행해지고 있었는데, 그런 제사를 하나님은 가증한 행위라고 하시며, 바로 그런 가증한 일 때문에 가나안 족속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입다는 그런 인신 제사를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입다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열심 가운데에는 지식을 따르지 않은 인간적인 열심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집 문에서 나오는 사람이란 입다와는 가족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식구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런 사람 중에 하나를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겠다고 서원하는 것은 대단한 열심이며 대단한 헌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게 되었을 때, 입다의 승리를 기뻐하며 환영하러 나온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자기의 무남독녀 외딸이었을 때 입다는 얼마나 큰 슬픔과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입다는 그 서원을 이행합니다. 즉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 딸을 번제로 바치고 맙니다. 많은 주석가들이나 설교자들은 이처럼 입다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인신 제사를 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서원을 이행한 사실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견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원한 것을 성실하게 지킬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고 계십니다(시15:1-4절 참고). 그러나 그 서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의 서원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원치도 않으시며 오히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어떤 일을 서원해 놓고 그것을 이행하는 것을 우리는 신실한 것이라고 칭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깡패들이나 조폭(組暴)들 사이에 맺어지는 의리와 충성을 아름답다고 동경하며 칭찬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릇된 서원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무지한 종교적 열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입다는 분명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을 만한 훌륭한 면모들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이방인 방식의 인신 제사를 서원하고, 또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는 성실하게 이행한 것은 한마디로 무지한 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번제를 드리거나 서원의 제물을 바치라고 명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입다에게 그가 어떤 서원을 하거나 번제를 드리면 승리를 주시겠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입다가 그런 서원을 합니다만, 그 앞 절에 보면 이미 입다에게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신이 임하신 것은 그 자체가 이제부터 하나님이 입다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그런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열심으로 무언가를 하나님께 더 드리면 하나님이 더욱더 자기와 함께 해주시리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열심은 그의 가정에 크나큰 불행과 슬픔을 가져오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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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역경을 이기고 자기 민족을 구원해 낸 영웅입니다. 그리고 믿음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암흑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부족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고서도 공연히 자기 딸을 잃는 슬픔 속에서 살다가 일생을 마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입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알아 가는 일에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종교 생활을 할 수도 있고, 더러는 대단한 열심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빗나간 열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식 없는 믿음, 지식 없는 열심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날마다 말씀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온전한 지식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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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타락한 종교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종교적인 본능은 인간이 무언가 귀중한 것을 신에게 바치면 신이 은총을 주시고 자비를 내려 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흔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이것은 인간이 신에게 무언가를 먼저 드려서 신으로부터 은총을 얻고 복을 얻는다는 인간 종교 본능의 표현입니다.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 석을 바쳤더니 천지신명이 감동하여서 아버지 심봉사가 눈을 떴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종교 논리입니다. 더 나아가면 유대교의 율법주의가 바로 이런 타락한 인간 종교 본능과 열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와 율법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 열심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어리석고 불행한 민족이 되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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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똑바로 알아야 하나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도 못한 이를 사랑할 수 없고 듣지도 못한 이를 찬양하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시34: 1- 8)
믿지 아니하는 자는 부를 수 없고 듣지도 못한 이(예수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또한 전파하는 자가 없이 들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10:1-17) 그리고 이단에 속지 않고, 영적 분별력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경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시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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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이 우주와 땅을 주관하시며 영원한 세계의 주인이 되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우리를 찢고 치기도 하시지만 언제나 우리를 싸매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 힘쓰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은혜가 오고 치유가 올 것입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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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1. 나 자신을 모릅니다(피조물임을 깨닫지 못함)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100:3)
2. 자신의 죄를 모릅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못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
3. 죄의 종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갈4:8)
4. 하나님을 모르면 영의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므로 영이 죽습니다. 영이 죽으면 짐승과 같이 됩니다. 짐승과 같은 자는 진리를 듣지 않습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잠12:1)
5.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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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어서 망하는 것도 아니고, 기회가 없어서 망하는 것도 아니고, 권세가 없어서 망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 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삯꾼 목자나 성령의 은사도 없이 성경을 어설프게 알고, 인도하는 지도자를 경계하십시오. 그런 사람들은 소경된 인도자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집니다.(마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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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님을 똑바로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 까요?
1. 체험과 행함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어떤 청년이 의과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는 도중에 교통 사고를 목격했습니다. 많은 응급환자들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급히 의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응급 치료에 대한 지식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치료를 하려고 하니 두려움도 생기고 손이 떨려서 잘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책으로 공부한 것만으로는 절대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차를 운전하기 위해 운전에 관한 책을 여러 권사서 모두 읽은 후 운전과 자동차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에서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적인 책을 많이 읽고 성경적인 지식을 많이 습득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지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에도 지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많은 체험이 있어야 확고하고 온전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체험이 없는 지식만의 신앙으로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리거나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도 체험을 통해 습득될 때 살아있는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체험 중에서도 특히 신앙으로 인해 고통과 수모, 손해를 당할 때 예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나 인격적인 미성숙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가장한 무계획성이나 용기를 가장한 무모함, 열정을 가장한 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 진정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다??고 했고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자기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배운 지식이야말로 진정으로 살아있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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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자신이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스스로 자부하기도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의 입구에서 천사가 ??너는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어거스틴이며 그리스도인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다가와 어거스틴을 자세히 보더니 말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네 머리 속에는 키케로의 철학으로 가득 차 있어.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라고 호통을 치며 내려가라고 했습니다. 놀라서 눈을 떠보니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그는 그 꿈으로 인해 철저하게 회개하였으며 결국엔 성자가 되었습니다. 체험과 행함으로 얻은 것은 참으로 귀중한 지식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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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욥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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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염소는 사람들이 잘 기어오르지 못하는 가파르고 위험한 곳을 잘 오를 수 있습니다. 필요하면 그들은 뒷발로 일어서기도 하며 좁고 작은 곳에서도 완전히 회전할 수 있는 재주 있는 등산가입니다. 일반적으로 싸움을 좋아하는 동물은 아니지만 염소는 뿔을 매우 잘 사용합니다. 그 뿔로 화난 회색곰과 싸우기도 하며 짐승과 싸워 이기기도 합니다. 이따금 염소는 외로운 생활을 합니다. 매우 춥고, 곤충과 동물이 거의 살지 않는 높은 곳에서 삽니다. 새끼 염소는 태어나기 전에 어미 배에서 5달을 지냅니다. 태어난 지 4시간 후면 새끼는 뛰고 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날 때부터 털이 많이 나있으며 눈도 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염소가 냄새가 난다고 하여 싫어하지만, 염소는 아주 유용한 동물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소의 젖보다는 염소젖을 더 많이 마시고 있습니다. 염소젖은 위에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좋습니다. 염소 가죽은 아주 좋은 피혁 제품을, 그 털은 좋은 섬유를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이 귀중한 동물이 어떻게 유능한 등산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뒤꿈치는 지면을 고무와 같이 부드럽게 느끼도록 하는 뒷받침이 밑에 붙어 있으며 발굽은 바위를 움켜쥐는 강한 집계와 같은 역할을 하므로 염소는 견고하게 설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발" 을 가진 염소는 거의 수직으로 바위를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염소를 연구해 보면 재미있는 점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느냐? 염소가 어떻게 태어나는 줄 아느냐?" 하고 욥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염소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역시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현명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예배와 성경말씀을 통하여 날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더하므로 지혜로워지시고 열심을 품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잠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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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활용해야 합니다.
지혜는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입니다. 지식을 활용하려면 먼저 지식을 축적해야 합니다. 지식이 깊어지면 지혜가 됩니다. 지식이 소중한 까닭은 영감을 주고 통찰력을 주고 지혜를 창출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생명입니다. 기생 라합은 비록 기생이었지만 지식을 소유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소유한 지식을 잘 사용함으로써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을 알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정탐꾼을 감추어 주고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라합은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몸에서 보아스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지식은 사용되기까지는 땅에 심지 않은 씨앗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과 같은 지식을 활용하는 순간 그 지식은 파워가 됩니다. 라합도 지식을 사용했기에 생명을 얻었습니다. 지혜는 지식의 소유가 아니라 그 지식을 실천함으로써 드러납니다. 지식은 과거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학습을 통해 습득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놀라운 자원입니다. 우리는 많이 아는 사람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많이 아는 사람에게 가서 배웁니다. 특별히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많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만큼 볼 수 있고 아는 것만큼 느낄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것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칩니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영향력을 끼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을 생명처럼 여깁니다. 좋은 지식을 선별할 줄 알고 활용할 줄 압니다.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 가운데 좋은 지식을 선별하고 활용하는 것은 지혜의 열매입니다. 좋은 지식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실체화하십시오.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도 실체화된 지식을 빼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지식을 단순히 소유하지 말고 실체화하십시오. 소유양식이 아닌 실체양식으로 지식을 체득하십시오. 무엇보다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삶 속에 활용하는 지혜를 얻도록 하세요. 그때 당신의 삶은 성화되고 보배로운 지혜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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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삶은 '배우기를 거부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더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는 것'입니다. 요새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알지 못하는 것'에서 생기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신앙이 있고 봉사도 잘한다고 하는 한 집사님이 '새롭고 신기한 얘기를 해주는 영성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세미나를 1년 동안 다니니까 자기만 영성이 높은 것 같고 다른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영성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들도 거의 다 영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결국 기존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황하는 영적인 보헤미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더 많이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것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책을 한 권만 읽지 말고 계속해서 많이 읽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무서운 사람은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폭넓게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더 배워야 삽니다. 모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서 호세아는 호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3가지를 꼭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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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칩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찢습니까?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줏대 없는 호인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엄하게 벌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를 죽이려는 데 있지 않고 우리는 살리려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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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고,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신다"는 말은 신속하게 우리를 일으켜주신다는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만신창이가 되어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는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삶이 힘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가운데서도 사는 길이 있습니다. 넘어진 곳이 일어서는 곳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때가 가장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때입니다. 요즘 경제가 많이 어렵다고 합니다. 살아가기가 옛날보다 많이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곁 같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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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움이 깊어 질식할 것 같았는데 여지없이 하나님은 샛별처럼 일정하게 다시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소망의 길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늦을 수는 있지만 없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늦게 주어지는 은혜가 더욱 풍성한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한곁 같으십니다. 그처럼 한결같은 하나님, 한결같은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도 한결같은 모습, 한결같은 인격, 한결같은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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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어떤 분은 예배를 잘 드립니다. 그러나 너무 인색합니다. 그 사는 모습에는 자비와 인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드리는 예배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까요? 하나님은 인애가 없는 자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4-5절).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인애를 보여주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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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주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고 계심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키가 자라고, 체중이 늘어나기를 위해서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도록 해 줍니다. 그리고 자녀가 성장해 가면서 지혜가 자라고 세상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조언과 여건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장성하면 출가시켜 그들 스스로가 살림을 꾸려 나가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곧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속히 성장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훈련시키시고, 원수 마귀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시기 위해 각종 은사와 능력으로 덧입혀 주시고, 그리고 성장하였을 때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도록 만드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시는 분은 갈릴리공동체로 오세요
성경을 바로 가르치고 교제와 은혜를 충만하게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동행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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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지혜와 지식의 근원이 되신 주님!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더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저의 삶 속에서 저는 감추어지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길 원합니다. 우리가 얄팍한 세상 지식을 자랑하지 않게 하시고, 겸손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게 하소서. 기도가 변질되고 말씀이 약화될 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던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기쁨으로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을 알기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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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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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와 견고한 가정 댓글[0]
가정, 부모, 부부 (2014-04-26 오전 8:49:43) http://blog.somang.net/holylove/8125
가정예배와 견고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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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문: 신4: 6- 10, (찬송가 559장, <통> 305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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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화가가 가장 아름다운 것을 그리기 위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먼저 예배당 종탑이 보였습니다. 그 화가는 교회에 들어가 목사님께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믿음’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또다시 순례의 길을 걷다가 행군하는 병사를 만나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 병사는 지체 없이 ‘평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화가는 한창 깊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이제 화가는 오랜 시간동안 아름다운 것을 찾아 헤매다가 몸도 마음도 지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예쁜 딸이 달려와 “아빠!” 소리치며 자신의 품에 안겼습니다. 아내는 해맑은 웃음을 띠며 먼 길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을 격려하고 맞아 줍니다. 집안의 익숙한 소파에 털썩 앉으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화가는 마침내 자신의 가정에서 믿음과 평화와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아,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가정이로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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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가정이야말로 기쁨의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가정이 될 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넘쳐나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끊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가득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존 하워드 페인은 1852년, 알제리에서 사망했습니다. 31년 만에 그의 시신이 군함으로 뉴욕에 돌아오게 되던 날 항구에는 미국 대통령, 국무위원, 상원위원들과 수많은 국민들이 나와 모자를 벗고 조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과연 그는 어떤 업적으로 추앙받았던 것일까요? 그것은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를 작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 뿐이리 이 노래는 전 세계적으로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가정은 행복의 창고입니다. 우리가 애써 가꾸고 소중하게 지켜야 할 보물. 그것은 바로 가정입니다. 원래 “가족”(Family)의 어원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Father And Mother, I Love You.” (아버지와 어머니, 나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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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든든히 세우는 길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무한경쟁을 하는 세계에서, 나라를 든든히 세우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대부분의 나라들은 경쟁력과 군사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제대국이 되기에 힘쓰고, 군사대국이 되기에 힘씁니다. 대한민국은 경제대국이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세계에 내놓을 최고 브랜드의 상품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 외화를 많이 보유하여 금융안정을 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북한은 군사대국이 되기 위해서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국민은 굶주려 죽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많은 돈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모두 경쟁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경제력과 군사력이 약해서 주변 강대국애게 짓밟혔고, 급기야 나라가 망하기까지 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힘을 기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세계 모든 나라가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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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든든히 세우는 길은, 군사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과연 이스라엘이 군사력을 의지하였을 때에는, 강대국에게 나라가 망하고, 국민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포로 생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때에는, 군사력 자체가 아예 없었어도, 강대국에서 해방되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사력을 의지하던 크고 작은 나라들은 모두 멸망하였습니다. 결국 나라를 든든히 세우는 길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에 가정을 든든히 세우는 길은, 경건한 자손을 키우는 것에 달려 있다고 말씀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하면 가정이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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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든든히 세우는 길은, 경건한 자손을 키우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무한경쟁을 하는 시대에 가정을 든든히 세우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경제력과 경쟁력 있는 자녀들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정 경재를 든든히 하기 위해서, 땀흘려 일하고 또 투자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심지어는 투기를 꾀하고 대박을 노립니다. 재산을 늘리고 가정 경제를 든든히 하기 위해서 비윤리적인 방법까지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경쟁력 있게 키우기 위해서, 교육에 힘씁니다. 입시에 전력투구하고, 교양 있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예체능 교육도 시키고, 조기 유학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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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경은 가정을 든든히 세우는 길은, 경건한 자손을 키우는 것에 달려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고 부르짖었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하면 가정이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재능과 은사를 잘 발견하고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녀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여, 사회에 기여하고 영향력을 미치는 인재로 서는 것이야말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지 않으면, 자신의 재능을 잘못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극도의 이기주의 생각을 가지고 활동하면 파멸의 길로 가게 됩니다.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줍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활동하면, 사회에 큰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가정도 계속해서 화목하고 건전한 가정으로 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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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신앙으로 세우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우선순위와 경중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믿음으로 세우는 것이 우선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자녀의 재능을 계발해서 활동할 수 있도록 세우는 일은 그 다음입니다. 후자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순위와 경중을 잘 가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의 재능을 계발하는 일은 눈앞에 보이고 시급한 일로 생각 됩니다. 반면에 신앙으로 세우는 일은 당장 급하지 않은 일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우선순위를 혼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선순위를 분별하는 일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자녀를 신앙으로 세우는 일을 우선하고, 신앙을 기초로 삼지 않으면 사상누각이 되고 만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세워서 가정을 든든히 세워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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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정예배는 성숙한 부부와 견고한 가정의 비결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을 하면 부부가 되고 가정에 됩니다. 그러나 저절로 성숙한 부부관계가 되고, 견고한 가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끔 외식을 하거나, 선물을 주고받거나 여행을 하는 것이 사랑과 가정의 행복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견고한 가정을 세우는 일은 일상에서 꾸준히 지속해서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꾸준히 만나고,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나누고, 대화하는 것은, 성숙한 부부관계와 견고한 가정을 만드는데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이것이 가정예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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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대인의 가정예배
유대인은 안식일이나 모든 절기 때마다 정성스럽게 식사를 합니다. 떡을 떼면서 토라를 자녀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절기 식사 시간에 부모와 자녀가 함께 매주 할당된 분량의 토라를 가족단위로 공부합니다. 유대인의 식사 시간은 먹기 위한 시간이라기보다는 먼저 성경공부와 율법을 실천하기 위한 시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음식이 없는 곳에 토라도 없고, 토라가 없는 곳에 음식도 없습니다. 이는 식사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식탁은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사28:8)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의 상이라 하더라"(겔41:22).
이 말씀에 나타난 '여호와 앞의 상'은 여호와 앞의 제단을 뜻합니다. 유대인은 식탁을 제단으로 여깁니다. 제단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있어야 하듯이 성도의 식탁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식탁에 앉아 토라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면 모든 것이 깨끗한 식탁에서 먹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절기 식사 때마다 그 절기에 맞는 순서와 교훈이 담긴 책자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만든 책자로 이 책자들에 의하여 각 절기들이 진행됩니다.
이러한 식사 시간의 성경 교육은 유대인만의 전통은 아니었습니다. 유럽에서 건너온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도 식사 시간에 성경공부를 시켰습니다. 그 예로 정신과 의사이며 달라스 신학교 실천신학과 마이어 교수의 교수의 회고를 들어보면.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가정에서 매일 드린 식탁 가정 예배 경험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저녁식사 때 테이블에 둘러앉아 매일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이 예배 때 우리는 찬송가를 부르고 약 1장 정도의 성경 말씀을 읽은 다음 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 각자 바라는 것들을 위하여 기도드립니다. 그것이 바로 나에게 25년 동안 나의 교육을 계속하도록 영향을 준 배경이었으며 육적인 가정보다는 영적인 가정이 되도록 돕고 싶은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 정신과 의사가 되게 해준 배경이다."
가정에서 식사 시간이 성경 공부 시간인 것은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신약의 초대 교회 때에도 가정마다 떡을 떼며 사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행 20:7,11). 이 시간은 물론 주님의 성찬식으로도 쓰였지만 초대 교인들이 유대인처럼 식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정에서 식사 시간에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성서적입니다. 이런 좋은 전통이 현대에 들어오면서 퇴색해졌습니다. 이제 우리도 가정마다 식사 시간에 성경공부 시간을 갖는 전통을 세워가야 합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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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정예배가 주는 유익
1) 우리 가정의 참된 주인을 만나게 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일관된 삶의 양식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주님)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 42)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규칙적인 가정예배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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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정적으로 주의 인도를 경험하게 됩니다.
순종하는 개인들을 주께서 인도하시고, 순종하는 공동체 또한 주께서 인도하십니다. 가정제단은 온 식구들이 말씀의 장에 함께 서서 순종을 격려하는 장이어야 하고, 이곳에 주의 인도가 함께 하심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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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녀 교육의 최선의 마당일 수 있습니다.
지속적이고 규칙적인 가정예배는 자녀 교육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규칙적인 말씀 나눔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가정 제단이야말로 우리들의 자녀들을 노엽게 아니하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는 최선의 마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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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든 가족들에게 창조적 대화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초점이 없는 대화는 종종 뜻없이 표현하는 언어의 낭비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있고 기도와 찬양이 있으며 성령님의 임재가 계신 곳에서의 우리들의 대화같이 거룩하고 진지한 대화의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 27 : 9).
하물며 말씀을 통한 가족들의 사랑스러운 권고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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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견고한 가정의 6가지 특성
1) 헌신 : 가정의 단합을 중요시하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 서로가 헌신합니다.
2) 서로 알아주고 인정함 : 서로의 가치를 인정, 가족의 존재를 고맙게 생각하고 이를 표현합니.
3) 대화 : 훌륭한 대화술을 가지고 있음.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4) 시간을 함께 보냄 : 의미있는 시간들을 함께 가집니다.
5) 영적 헌신 : 종교적 헌신의 깊은 신앙을 가짐. 매일의 삶 속에서 체험적인 신앙을 가집니다.
6) 직면해서 극복하는 능력 : 위기, 좋지 않은 상황, 그리고 스트레스를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긍정적인 방법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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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바쁘고 함께 시간을 만들기 어렵다면 주 1회로 시간을 정해서 가정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가족이 모두 가정의 날(Family Day)로 정해서 시간을 맞춥니다. 온 가족이 함께 찬송하고, 말씀을 나누면서 대화하고, 기도하고, 식사를 함께하는 날로 지킵니다. 가정의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삼습니다. 때로는 함께 성경책이나 신앙서적을 읽은 것을 나누거나, 함께 기독영화를 보고 나누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렇게 가정 예배를 통해서 부부의 관계가 더 친밀해지고, 자녀들에게 믿음을 이어주고 가정이 견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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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이 땅의 가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불행의 가시덤불을 제거하시고 행복의 꽃이 피어나는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특별히 말씀 안에서 튼튼한 기초를 세워가는 가정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남편과 아내가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부모와 자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섬기는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어가게 하소서. 참된 사랑으로 섬기지 못한 것을 용서하시고 그로 인한 상처를 성령으로 치유해 주소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하기에 소홀했던 부모들을 용서하소서. 우리 가정이 오직 말씀 위에 세워져 하나님 나라의 복을 드러내고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소서. 우리 가정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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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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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마음을 가지라 댓글[0]
겸손, 온유, 교만 (2014-04-15 오후 4:36:25) http://blog.somang.net/holylove/8121
온유한 마음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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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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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라는 말은 온화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격과 태도를 뜻합니다. 하지만 명확히 정의된 한글과 한자의 뜻과는 달리 세계적으로 온유라는 뜻은 매우 비슷하면서도 다양한 뜻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우선 영어만 해도 온유를 나타내는 단어가 ´gentleness, mildness, tenderness, docility, clemency, warmth´로 총 여섯 개나 되며 미묘한 뜻의 차이에 따라서 서로 다른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아프리카의 모레 부족은 온유한 사람을 ´그늘진 마음의 소유자´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더운 아프리카의 태양빛을 피하게 해줄 그늘을 다른 사람에게 제공한다는 뜻입니다. 케냐의 원주민들은 온유를 ´천천히 행동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은 욕심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반대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며...교만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남태평양의 카바라 부족은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나라마다 표현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종합해보면 온유는 겸손한 사람, 그리고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온유하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을 온유함으로 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남을 생각하는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십시오. 반드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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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에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가 있는데 거기 여덟 번째 열매가 온유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온유와 화평의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그를 가리켜 ‘부담 없는 사람’이라 부르는데, 수많은 성경인물 가운데 이삭처럼 부담 없고 마음에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삭의 온유한 성품을 말해 주는 대표적 사례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그 하나는, 그가 1년 강우량이 300㎜에도 못 미치는 가나안 남방(Negev)에 거주할 때, 자기가 판 우물을 세 번이나 블레셋 사람에게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모습입니다(창26:12∼33).
또 하나는, 그가 열 살 때쯤, 땔감을 등에 지고 갈 정도(창22:6)의 나이에,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금지옥엽처럼 사랑하던 아버지(아브라함)가 자신을 모리아산까지 데리고 가서 희생제물로 삼아 결박하고 죽이려 할 때 전혀 저항하지 않고 어린 양처럼 자기 목숨을 아버지 손에 맡기는 모습입니다(창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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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세를 보세요. 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세상에 날 때부터 그 천성이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하는 데를 나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감독이 이스라엘 사람을 이유 없이 학대하는 것을 볼 때 너무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인 감독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민중을 영도하여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는 도중 모세는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간이나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 모세가 여러 날 보이지 않게 되니까 아론에게 찾아가서 우리 지도자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아론을 충동해서 그들이 애굽을 떠날 때 가지고 나온 금붙이를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말하니 거기서 춤을 추고 먹고 마시며 야단이 났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세는 너무 기가 막혀서 어깨에 둘러메고 내려오던 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땅바닥에 내던지지 않았습니까? 그것 보면 모세의 본성이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불의한 것을 보면 마음에 불이 붙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온유했다는 것은 그의 본성과는 전혀 반대였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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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도 가만히 보면 날 때부터 그렇게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데 예수님을 잡으려고 대제사장의 종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너무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분한 김에 옆에 찼던 칼을 뽑아 그 종의 귀를 쳐 서 떨어뜨렸습니다. 이런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베드로가 그처럼 온유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편지를 읽어보면 온유한 성품의 베드로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8절를 보십시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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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도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회개하기 전에는 온유한 사람이 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기 교만에 꽉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혈통을 자랑했습니다. 그의 가문을 뽐냈습니다. 그의 신앙심을 내놓았습니다. 그의 학벌을 자랑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모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눈앞에는 보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성품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처치하는 일에 앞장을 섰고 거기에서 쾌감을 느꼈습니다. 이와 같은 성품의 소유자인 바울이 어떻게 그처럼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열매인 온유함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여성의 강함은 부드러움 속에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부드럽고 순한 대답, 즉 유순한 대답이 분노를 쉬게 하고(잠15:1),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 즉 「온량한 혀는 생명나무가 된다」(잠15:4)고 지혜의 말씀인 잠언을 통해서도 온유와 부드러움에서 오는 강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온유는 성도가 마땅히 지녀야 할 성품임을 잊지 맙시다.(딤후2:24-25, 딛3: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골3:12)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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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공 요인에서 지능이나 기술 훈련보다는 대인관계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직무수행의 실패보다는 대인관계의 실패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만큼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방법은 단순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려면 ‘온유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면 됩니다. 온유한 자는 말 그대로 부드러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황폐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관계를 풍성하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단점이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일입니다. 조금만 서로 섬기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잘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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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함이 강함을 이깁니다. 옛날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태양과 바람이 지나가는 사나이의 오바를 벗기는 내기를 했습니다. 바람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내 입김으로 한번 큰바람을 내면 저 사나이의 오바를 당장에 벗길 수 있어」 그러나 아무리 큰바람을 불어 대도, 사나이는 단추를 확인하고 두 손으로 움추리며 오히려 옷이 벗겨질 까봐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오바를 못 벗겼는데, 태양이 슬슬 웃으면서 뜨거운 열을 쏟으니 사나이는 그만 「이거 웬일이야! 어이구 더워...」 하면서 오바를 벗어 들었습니다. 강제의 힘보다 따뜻함이 이긴 것입니다. 거북이의 목을 강제로 빼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거북이의 체중이 불과 25-40 파운드 밖에는 안 되나 150-200파운드를 가진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빼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북이의 목을 빼내려면 따뜻한 화롯불 가까이에 놓아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북이가 당장에 목을 뽑는다는 것입니다.
강한 치아보다 부드러운 혀가 더 오래갑니다. 노자는 죽으면서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는 임종이 다가오자 제자들을 앉혀 놓고 입을 벌리고는 "내 입에 뭐가 보이는고?"하고 물었습니다. "예, 아무것도 안 보이고 물렁물렁한 혀만 보입니다."
"그렇지, 내 치아는 다 빠졌어. 젊은 시절에 내 치아는 아주 튼튼했지만, 사나워서 혀를 물어뜯고 아주 교만하게 굴더니 다 빠져버렸지. 물어뜯기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참고 살아온 혀만 남은 것이야."
그러면서 단단한 것은 죽음이요, 온유한 것만이 생명이라고 설파했습니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여사가 다니는 교회에서 한 동물원 원장을 초청,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동물원 원장은 각 동물들의 특성과 수명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질문시간이 되었을 때 미우라 여사가 "동물이나 생물 중 어느 것이 빨리 죽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동물원 원장이 대답했습니다. "호전적이고 성질이 급한 놈, 덩치가 큰 놈들은 빨리 죽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동물들은 오래 삽니다. 또 곤충 가운데서도 투구벌레처럼 등딱지가 딱딱한 놈들이 빨리 죽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굳세고 강해야만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약육강식의 경쟁사회에서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통용되기 때문에 강한 자만 살아 남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자녀 교육에서도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식들을 강하게 만들까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혹, 밖에서 다른 아이에게 맞고 들어오기라도 하면, 다음부터는 어떻게든 남에게 맞기보다는 때리며 살도록 전의를 북돋워 주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마음이 따뜻하여 남에게 잘 해주고 성격이 부드러워 남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아이의 그 품성을 키워 주고 격려해 주기보다는, "너는 그렇게 나약해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그러니?" 하면서 오히려 꾸중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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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온유한 성품을 지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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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주를 닮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욥15:11, 시18:35, 시4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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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예수님께서 온유하셨기 때문입니다.(사53:7, 고후10:1, 벧전2:23)
우리는 가장 온전한 형태의 온유함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누이실 때부터 온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십자가에서 온전히 나타났습니다. 원수들이 욕하고, 비웃고, 저주했지만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사53:7) 온유하게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온유가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겼으며, 결국 우리가 그 승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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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이기 때문입니다.(살전2:7, 딤전3:3, 딛3:2, 약3:17)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2: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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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는 온유한 자가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먼저 거듭난 성품을 요구하십니다. 변화된 예수의 성품을 소유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서 ‘온유’는 짐승을 길들여 주인 뜻대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으로 해석하면 죄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길들여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한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의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인생의 험난한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승자가 되어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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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대통령 당시의 국방장관 스탠턴은 유능했지만 고약한 성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링컨, 그 사람 바보구먼”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이를 보고 받은 링컨은 태연하게 답변합니다. “스탠턴이 나를 바보라고 했다면 정말 바보일 거요. 그 사람 말은 대개 맞으니까.”나중에 스탠턴은 링컨의 죽음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기 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죽었으니 이 어인 불행인고!”
온유한 자만이 궁극적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온유야 말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무기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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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온유한 자에게 친구가 있고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교육학에는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 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는 철사로 엄마 원숭이처럼 만들어 그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 그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러자 아기 원숭이들은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 인형의 우유만을 먹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서로 찾습니다. 같은 재능, 같은 기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기 마련입니다. 온유한 마음이 있는 곳에 훈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건전한 사회생활이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팔복 중 하나입니다.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경직된 관계도 부드러워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감도 깊어져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사랑이 충만해지며 화평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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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신앙인들에게는 2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온유함입니다. 전문분야의 탁월한 실력자이지만 자랑하지 않고 겸손한 미소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또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스스로 의로움과 진실, 경건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외유내강(外柔內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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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온유해야 합니다만 더욱 온유로 무장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억울한 환경 속에서(시37:1),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딤후2:24), 죄를 범한 자에게(갈6:1),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약1:21), 전도할 때(벧전 3:15), 공동체의 조화를 위해 온유해야 합니다(엡4:1∼3).
그러나 무엇보다 가족간에 온유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온유함으로 사랑하십시오. 아내는 남편에게 온유함으로 순복하십시오. 부모는 자녀들을 온유함으로 양육하십시오. 참된 온유를 위해서는 온유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온유를 간구하십시오. 예수 십자가 때문에 참을 수 있고 긍휼히 여길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이 진정 인생 승리의 비결이요 예수 잘 믿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 한 구절을 다함께 봉독하고 마치겠습니다.「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2-3)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온유의 열매를 맺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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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겸손하고 온유하신 주님!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주님의 뜻을 온전히 펴는 우리가 되게 하옵시고, 악이나 불의가 득세할 때 우리로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게 하옵소서. 온유한 자가 결국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즐기게 됨을 믿게 하옵소서. 마음속의 감정과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때때로 분을 내고 교만해지는 우리의 마음에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주옵소서.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겸손이 모든 것을 품는다는 것을 알고 그 진리대로 살아갈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주님의 온유를 배우고 또 따라 살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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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allcome, http://cafe.naver.com/newgal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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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성경이 말하는 온유의 자세를 찾아 배우고 또 실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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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목표와 비전 댓글[0]
길, 인도, 홍보 (2014-04-15 오후 1:29:41) http://blog.somang.net/holylove/8120
하나님 나라의 목표와 비전
 
본문: 마가복음 4: 30- 32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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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공동체는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마6:10, 눅17:21)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리는 나라이며,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고, 사랑이 넘치는 나라입니다.(롬14:17) 그리고 갈릴리 공동체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즉 갈릴리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지점이며 모델하우스가 될 것입니다.(비전)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입니다.(빌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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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공동체의 비전과 목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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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갈릴리 공동체는 예수님이 주인이신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우상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돈, 권세, 사람(자식, 지도자) 등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는 갈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마10:37, 막10:15, 마5:20, 마19:23, 마6:33)
오늘날 많은 교회가 말로는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요 머리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담임목사가 교회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국도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임무가 엄연히 분리되어 있었고, 월권 행위를 할 때에는 재앙이 임했습니다.(대하26:16- 26, 삼상13: 8- 13) 목사와 성도는 일반입니다.(호4:9) 지도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며, 모두가 한 형제입니다.(마23:8-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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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갈릴리공동체는 의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불의와 죄악이 없는 나라입니다. 악인과 죄인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 10)
하나님 나라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의로운 자만 들어가는 곳입니다(막1:15, 롬4:6-8).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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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의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정직과 공평, 정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돈과 장수, 성공한 자가 행복하고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습니다.(마5:6, 10) 갈릴리공동체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들이 모이는 의로운 공동체입니다.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12:28)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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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갈릴리공동체는 믿음으로 평강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강의 나라입니다. 미국의 어느 돈 많은 부자가 잭슨이라는 흑인 아주머니를 가정부로 두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돈 문제도 있었지만 가정 문제도 복잡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다투고 근심하여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이루고 술을 마셔야 하는 형편이었는데, 잭슨이라는 아주머니는 언제나 평안하고 찬송하며 명랑했습니다. 주인이 물어봤습니다.
“나는 이렇게 돈이 많아도 걱정이 많은데 아주머니는 남의 집에 살면서 늘 기쁘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주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돈이 없으니 잃어버릴 염려 없고, 집이 없으니 불이 날까 걱정 없고, 명예가 없으니 누가 나에게 욕할까 하는 걱정이 없고, 이미 병들어 죽을 몸이니 건강 때문에 걱정할 것 없고, 이제 다시 아프면 불편한 몸 벗어버리고 하나님께로 가니 아무 걱정도 없고,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슬픔은 사라지고 기쁨만 가득하게 됩니다. 주님의 평안을 누리십시오.(시29:11, 빌4:9)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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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갈릴리공동체는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희락의 나리입니다.
미국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던 사람이 주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통경찰에게 교회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경찰은 멀리 보이는 한 교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까운 곳에도 교회가 있을 텐데, 왜 저렇게 먼 데 있는 교회를 가르쳐 주십니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경찰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이 근처에 있는 교회들보다도 저쪽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훨씬 기쁘고 즐겁게 보였습니다. 나는 불신자이지만 그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이고 참된 교회인 것 같아서 소개한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은혜받은 얼굴과 은혜받지 못한 얼굴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평안하고 기쁜 환경에서 나오는 감사보다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 나오는 감사가 더욱 값진 감사입니다. 설령 우리의 삶에 많은 힘겨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은혜받은 백성에게는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며 우리 영혼을 즐겁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야겠습니다.(시40:16, 빌4:4, 살전5:16)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하나가 희락입니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70:4)
 
갈릴리공동체는 함께 즐거워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입니다.(신26:11, 렘31:13, 롬12:15, 고전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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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갈릴리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에서 식사하는 풍경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음식이나 환경이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천국과 지옥에서 먹는 음식은 모두 같았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긴 젓가락을 쓰는 것도 같았습니다. 밥 먹는 시간이 되자 드디어 천국과 지옥의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에서는 밥을 먹으려고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각자 자기 입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긴 젓가락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 서로 짜증을 내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그 긴 젓가락으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다정하게 먹여 주면서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기에도 너무도 평화롭고 즐거운 식사시간이었습니다.(눅14:15)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십니다. 사랑이 없는 곳이 곧 지옥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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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쩨, 우리 갈릴리 공동체의 목표와 사명은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제자 삼는 것입니다. (행28:31, 눅9:2, 60))
마태복음 28장 18- 20절에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빛된 삶을 통하여 많은 영혼을 옳은 길, 의로운 길로 인도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단12:3)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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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사명이 있습니다.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고 구제할 사명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예배드릴 사명이 있습니다.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하여 이 사명을 완수해야 하겠습니다.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할 책임이 있습니다.(마24:45-47, 마25:21- 23, 눅16: 10- 12)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9-10)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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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갈릴리공동체는 초대교회의 성령충만하고 하나된 삶을 본받고자 하는 공동체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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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초대교회에서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이러므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였습니다.
오래전에 다윗은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자를 복있다 했으며,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노래하였습니다.(시133:1)
"우는 자들과 같이 울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마가의 다락방의 오순절 역사 등은 함께 모여 같이 사는 공동생활의 기초적 삶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마음을 같이 하고 열심히 모여 떡을 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한국 신앙공동체가 배워야 할 중요한 목표라고 봅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남남이 아닙니다. 한 형제는 부모의 보호 아래서 지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아래 함께 동거동락하며 살아야 할 줄 압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믿음의 형제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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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공동체는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공동체가 되고자 합니다. 즉 당신을 영육간에 끝까지 사랑하고 돌보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공동체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찌들고, 병들고, 상처받고 멸시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고...(마25:40) 이 시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올바르게 빛을 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릴리 공동체의 일꾼으로 당신을 부르십니다. 천국 혼인잔치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갈릴리 공동체는 세상의 권력자나 부자나 지식이 높은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버림받고, 멸시 받고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찾고 환영합니다. 갈릴리 공동체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갈릴리 공동체의 모퉁이 돌로 삼고자 합니다. 남녀노소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귀한 사명과 직분을 맡길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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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공동체의 가족은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기를 힘쓰고 거듭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갈릴리 공동체의 가족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 2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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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갈릴리공동체의 목표가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황당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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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는 25세에 예수를 믿고,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출세의 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대영제국의 노예제도를 폐지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정치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30세에 영국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후로 오직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가 48세 되던 해, 영국의회는 노예무역폐지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노예폐지의 비전을 세운 지 35년 만인 62세가 되던 해에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그는 64세에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그의 나이가 72세 되던 해에 대영제국 전역에서 노예해방법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예해방법이 통과된 지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오로지 노예제 폐지라는 한 가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희생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나를 일평생 재촉하신 이는 주님이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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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은 어렸을 때 “노예해방”을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이를 위해 정치계에 투신하여 여러 차례의 실패를 딛고 마침내 꿈을 이루었습니다.
노예해방이란 목표는 그 당시 사회에서는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 윌비포스와 링컨은 마침내 꿈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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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어렸을 때 “인도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일생을 어려운 인도 국민을 위해 살았습니다. 어떻게 연약한 어린 소년 간디가 이룰 수 있는 비전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그의 꿈은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이룩했습니다.
미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살아있는 신과 같은 교황의 막강한 권력과 제도에 도전한다는 것은 죽음만이 기다리는 것일뿐이었지만 마침내 개신교 탄생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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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처럼 우리는 겨자씨를 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겨자씨가 자라 우뚝선 큰 나무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인도하시고 예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비전과 꿈을 가져야 합니다.

목표가 있으면
(1) 어떤 고난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인내력이 생깁니다. 즉 쉽게 포기, 단념하지 않습니다.
(2) 추진력이 생기고 미리 미리 준비하고 전진합니다.
(3) 집중력을 가져다주고, 방황하지 않습니다.
(4) 선택을 잘 할 수 있습니다.(직업, 배우자, 책 등)
(5) 불필요한 시간낭비를 막습니다. 허송세월하지 않게 됩니다.
(6) 목표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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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목표를 선택하느냐, 얼마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인생도 달라집니다. 목표가 같은 사람이 모여서 협력하면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인생의 목표는 “많은 사람을 옳은 길,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것”(단12:3)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남은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고,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기쁨과 희망과 복음(진리) 전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후일 내가 하나님 앞으로 간 후에 후손들이 나를 가리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 평가해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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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예수님과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순교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 7, 8)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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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세상에서 무엇을 목표로 하고 사시렵니까? 여러분이 소망하고 있는 것은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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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공동체는 예수님과 복음을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전하며 당신을 영원히 믿음의 형제, 자매로 모시고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과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저 합니다. 우리가 모여 힘을 합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룩합시다. 이와 같은 뜻을 함께하여 동역을 원하시는 분은 연락바랍니다.
생명과 진리로 인도하는 좁은 문인 갈릴리 공동체를 찾으세요.
매주 일요일 5시에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모임이 있습니다. 당신을 초청합니다. 의, 식, 주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마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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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를 이 땅에 세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하셨습니다. 자비와 사랑의 주님,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귀히 쓰임받는 도구 되게 하옵소서. 갈릴리 공동체를 통하여 많은 영혼이 구원받고 사랑이 충만한 역사가 나타나게 하소
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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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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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목표와 비전 댓글[0]
길, 인도, 홍보 (2014-04-15 오후 1:29:41) http://blog.somang.net/holylove/8119
하나님 나라의 목표와 비전
 
본문: 마가복음 4: 30- 32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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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공동체는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마6:10, 눅17:21)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리는 나라이며,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고, 사랑이 넘치는 나라입니다.(롬14:17) 그리고 갈릴리 공동체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즉 갈릴리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지점이며 모델하우스가 될 것입니다.(비전)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입니다.(빌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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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공동체의 비전과 목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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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갈릴리 공동체는 예수님이 주인이신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우상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돈, 권세, 사람(자식, 지도자) 등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는 갈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마10:37, 막10:15, 마5:20, 마19:23, 마6:33)
오늘날 많은 교회가 말로는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요 머리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담임목사가 교회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국도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임무가 엄연히 분리되어 있었고, 월권 행위를 할 때에는 재앙이 임했습니다.(대하26:16- 26, 삼상13: 8- 13) 목사와 성도는 일반입니다.(호4:9) 지도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며, 모두가 한 형제입니다.(마23:8-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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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갈릴리공동체는 의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불의와 죄악이 없는 나라입니다. 악인과 죄인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 10)
하나님 나라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의로운 자만 들어가는 곳입니다(막1:15, 롬4:6-8).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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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의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정직과 공평, 정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돈과 장수, 성공한 자가 행복하고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습니다.(마5:6, 10) 갈릴리공동체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들이 모이는 의로운 공동체입니다.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12:28)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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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갈릴리공동체는 믿음으로 평강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강의 나라입니다. 미국의 어느 돈 많은 부자가 잭슨이라는 흑인 아주머니를 가정부로 두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돈 문제도 있었지만 가정 문제도 복잡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다투고 근심하여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이루고 술을 마셔야 하는 형편이었는데, 잭슨이라는 아주머니는 언제나 평안하고 찬송하며 명랑했습니다. 주인이 물어봤습니다.
“나는 이렇게 돈이 많아도 걱정이 많은데 아주머니는 남의 집에 살면서 늘 기쁘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주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돈이 없으니 잃어버릴 염려 없고, 집이 없으니 불이 날까 걱정 없고, 명예가 없으니 누가 나에게 욕할까 하는 걱정이 없고, 이미 병들어 죽을 몸이니 건강 때문에 걱정할 것 없고, 이제 다시 아프면 불편한 몸 벗어버리고 하나님께로 가니 아무 걱정도 없고,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슬픔은 사라지고 기쁨만 가득하게 됩니다. 주님의 평안을 누리십시오.(시29:11, 빌4:9)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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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갈릴리공동체는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희락의 나리입니다.
미국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던 사람이 주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통경찰에게 교회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경찰은 멀리 보이는 한 교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까운 곳에도 교회가 있을 텐데, 왜 저렇게 먼 데 있는 교회를 가르쳐 주십니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경찰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이 근처에 있는 교회들보다도 저쪽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훨씬 기쁘고 즐겁게 보였습니다. 나는 불신자이지만 그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이고 참된 교회인 것 같아서 소개한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은혜받은 얼굴과 은혜받지 못한 얼굴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평안하고 기쁜 환경에서 나오는 감사보다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 나오는 감사가 더욱 값진 감사입니다. 설령 우리의 삶에 많은 힘겨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은혜받은 백성에게는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며 우리 영혼을 즐겁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야겠습니다.(시40:16, 빌4:4, 살전5:16)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하나가 희락입니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70:4)
 
갈릴리공동체는 함께 즐거워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입니다.(신26:11, 렘31:13, 롬12:15, 고전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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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갈릴리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에서 식사하는 풍경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음식이나 환경이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천국과 지옥에서 먹는 음식은 모두 같았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긴 젓가락을 쓰는 것도 같았습니다. 밥 먹는 시간이 되자 드디어 천국과 지옥의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에서는 밥을 먹으려고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각자 자기 입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긴 젓가락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 서로 짜증을 내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그 긴 젓가락으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다정하게 먹여 주면서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기에도 너무도 평화롭고 즐거운 식사시간이었습니다.(눅14:15)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십니다. 사랑이 없는 곳이 곧 지옥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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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쩨, 우리 갈릴리 공동체의 목표와 사명은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제자 삼는 것입니다. (행28:31, 눅9:2, 60))
마태복음 28장 18- 20절에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빛된 삶을 통하여 많은 영혼을 옳은 길, 의로운 길로 인도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단12:3)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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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사명이 있습니다.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고 구제할 사명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예배드릴 사명이 있습니다.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하여 이 사명을 완수해야 하겠습니다.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할 책임이 있습니다.(마24:45-47, 마25:21- 23, 눅16: 10- 12)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9-10)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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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갈릴리공동체는 초대교회의 성령충만하고 하나된 삶을 본받고자 하는 공동체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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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초대교회에서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이러므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였습니다.
오래전에 다윗은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자를 복있다 했으며,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노래하였습니다.(시133:1)
"우는 자들과 같이 울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마가의 다락방의 오순절 역사 등은 함께 모여 같이 사는 공동생활의 기초적 삶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마음을 같이 하고 열심히 모여 떡을 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한국 신앙공동체가 배워야 할 중요한 목표라고 봅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남남이 아닙니다. 한 형제는 부모의 보호 아래서 지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아래 함께 동거동락하며 살아야 할 줄 압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믿음의 형제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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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공동체는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공동체가 되고자 합니다. 즉 당신을 영육간에 끝까지 사랑하고 돌보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공동체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찌들고, 병들고, 상처받고 멸시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고...(마25:40) 이 시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올바르게 빛을 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릴리 공동체의 일꾼으로 당신을 부르십니다. 천국 혼인잔치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갈릴리 공동체는 세상의 권력자나 부자나 지식이 높은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버림받고, 멸시 받고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찾고 환영합니다. 갈릴리 공동체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갈릴리 공동체의 모퉁이 돌로 삼고자 합니다. 남녀노소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귀한 사명과 직분을 맡길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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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공동체의 가족은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기를 힘쓰고 거듭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갈릴리 공동체의 가족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 2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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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갈릴리공동체의 목표가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황당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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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는 25세에 예수를 믿고,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출세의 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대영제국의 노예제도를 폐지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정치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30세에 영국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후로 오직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가 48세 되던 해, 영국의회는 노예무역폐지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노예폐지의 비전을 세운 지 35년 만인 62세가 되던 해에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그는 64세에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그의 나이가 72세 되던 해에 대영제국 전역에서 노예해방법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예해방법이 통과된 지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오로지 노예제 폐지라는 한 가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희생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나를 일평생 재촉하신 이는 주님이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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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은 어렸을 때 “노예해방”을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이를 위해 정치계에 투신하여 여러 차례의 실패를 딛고 마침내 꿈을 이루었습니다.
노예해방이란 목표는 그 당시 사회에서는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 윌비포스와 링컨은 마침내 꿈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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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어렸을 때 “인도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일생을 어려운 인도 국민을 위해 살았습니다. 어떻게 연약한 어린 소년 간디가 이룰 수 있는 비전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그의 꿈은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이룩했습니다.
미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살아있는 신과 같은 교황의 막강한 권력과 제도에 도전한다는 것은 죽음만이 기다리는 것일뿐이었지만 마침내 개신교 탄생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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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처럼 우리는 겨자씨를 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겨자씨가 자라 우뚝선 큰 나무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인도하시고 예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비전과 꿈을 가져야 합니다.

목표가 있으면
(1) 어떤 고난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인내력이 생깁니다. 즉 쉽게 포기, 단념하지 않습니다.
(2) 추진력이 생기고 미리 미리 준비하고 전진합니다.
(3) 집중력을 가져다주고, 방황하지 않습니다.
(4) 선택을 잘 할 수 있습니다.(직업, 배우자, 책 등)
(5) 불필요한 시간낭비를 막습니다. 허송세월하지 않게 됩니다.
(6) 목표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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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목표를 선택하느냐, 얼마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인생도 달라집니다. 목표가 같은 사람이 모여서 협력하면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인생의 목표는 “많은 사람을 옳은 길,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것”(단12:3)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남은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고,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기쁨과 희망과 복음(진리) 전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후일 내가 하나님 앞으로 간 후에 후손들이 나를 가리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 평가해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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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예수님과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순교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 7, 8)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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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세상에서 무엇을 목표로 하고 사시렵니까? 여러분이 소망하고 있는 것은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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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공동체는 예수님과 복음을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전하며 당신을 영원히 믿음의 형제, 자매로 모시고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과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저 합니다. 우리가 모여 힘을 합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룩합시다. 이와 같은 뜻을 함께하여 동역을 원하시는 분은 연락바랍니다.
생명과 진리로 인도하는 좁은 문인 갈릴리 공동체를 찾으세요.
매주 일요일 5시에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모임이 있습니다. 당신을 초청합니다. 의, 식, 주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마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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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를 이 땅에 세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하셨습니다. 자비와 사랑의 주님,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귀히 쓰임받는 도구 되게 하옵소서. 갈릴리 공동체를 통하여 많은 영혼이 구원받고 사랑이 충만한 역사가 나타나게 하소
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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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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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갈 목표 하나님 나라 댓글[0]
천국, 지옥, 낙원 (2014-04-12 오전 8:25:06) http://blog.somang.net/holylove/8118
달려갈 목표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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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빌3: 12- 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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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 저지주의 상원 의원인 모르우씨가 뉴욕시를 떠나는 기차를 탔을 때 그는 기차표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차표를 제시하기를 기다리던 역무원이 「모로우씨,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상원의원이신데 설마 표를 안 사셨겠어요. 그러나 후에 표를 찾으시면 우편으로 보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모로우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어려움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제가 가는 행선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기차표를 지금 꼭 찾아야만 합니다.」 미상원의원 모로우씨는 정확한 행선지를 모른 채 기차에 탔던 것입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삶의 분명한 목표가 없이, 인생을 아무런 계획성도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시세에 따라 이리저리 요동하면서 살다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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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쉬임없이 지금도 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는 종착역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는 운전을 열심히 하되 목적지 없이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운전자가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자입니까? 열심히 달리고 또 기름을 새로 채워 달리지만 목적지를 모르는 채로 달리는 운전자,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운전자가 되기를 결코 바라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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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학에서는 지능지수, 학력, 환경 등의 조건이 비슷한 젊은 사람을 25년 동안 조사하였습니다. 조사내용은 ‘목표가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조사대상자 가운데 3%는 분명하고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10%는 분명하지만 단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60%는 목표가 모호했으며 27%는 목표가 없었습니다. 25년 뒤, 이 조사대상자들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분명하고 장기적인 목표를 갖고 있던 3%는 거의 모두 사회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성공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나 업계의 지도자, 사회의 저명인사가 된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분명하지만 단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10%는 대부분 사회의 상류층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각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의사, 변호사, 기술자, 고위경영자 등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목표가 모호했던 60%는 거의 모두 사회의 중류층이나 하류층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머지 목표가 없었던 27%는 대부분 사회의 최하위에 속한 삶을 살았습니다.
목표는 집중력과 추진력을 가져다 주고, 불필요한 시간낭비를 막습니다. 그리고 목표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어떤 목표를 선택하느냐, 얼마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인생도 달라집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꾸준히 노력하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고전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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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목표를 가지되 움직이지 않는 목표,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가져야합니다. 어떤 소년이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 농촌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땀을 흘리며 밭을 가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도와드릴 생각이 나서 소년은 소를 몰고 밭을 갈았습니다. 서투른 쟁기질로 한참 갈다 보니 아버지가 간 밭의 고랑은 똑바르나 자기가 간 고랑은 구부러졌습니다. 아버지는 이것을 보고 "처음 보습질을 할 때는 앞에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야 똑바로 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년은 그 말씀을 마땅히 여겨서 둑에 풀을 뜯고 있는 황소에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역시 고랑은 똑바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황소가 자꾸 움직이니까 너의 고랑도 구부러지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은 것에 목표를 두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앞에 우뚝 솟은 포플라 나무에 목표를 두고 밭을 갈았더니 비로소 똑바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야고보서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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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지도자의 꿈과 목표가 화려한 교회건물이나, 많은 교인수, 풍요한 교회재정,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 등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과 열정을 두고 있다면 이는 소경된 인도자요, 거짓 선지자요, 삯꾼 목자입니다. 정치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치 목표가 국민소득 몇 만 불 시대를 이루겠다는 목표보다는 우리나라를 정의로운 나라, 모든 국민이 평안하고, 기쁨이 넘치는 나라가 되도록 하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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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어느 시골노인이 서울 사는 딸네 집을 찾아왔습니다. 몇 년 사이에 어찌나 변했는지 이 집이 저 집 같고, 저 집이 이 집 같아서 노인은 당황해 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친절한 젊은이가 노인에게 도와드릴 것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노인은 딸네 집을 찾아왔는데 도무지 어느 집인지 모르겠다고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젊은이는 주소도 모른다는 노인의 말에 난처해져서 그럼 혹시 딸네 집에 다른 집과 달랐던 무슨 특징이 없었던가를 물었습니다. 노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무릎을 탁 치며 「이제 됐다.」 싶은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있었지, 있었고말고. 내가 그때 기억해 두기를 잘했지. 우리 딸네 집 담장 위에 누런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네.」 노인은 보이는 것이 영원하리라는 생각으로 표적을 삼았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비 본질의 것들에 현혹되어 삶의 목표를 그것에 둘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천국, 사랑, 믿음, 소망 그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크리스천 삶의 목표들입니다. 우리가 잘못 된 삶의 목표, 헛된 꿈들은 결국 삶을 절망으로 이끕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무관한 것일 때 다 헛되고 무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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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나 목표를 갖지 못하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생의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과 정열을 다 바칠 수 있는 인생의 목표나 신념을 가질 때 우리는 생의 충실감과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 심령 속에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목표나 방향이 없이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이 귀중한 생명이 인생의 목표로서의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만날 때 그것은 더욱 빛나고 힘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푯대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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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로저 밥슨 기자가 아르헨티나의 한 정치지도자를 만났습니다. 국민들로부터 가장 추앙받는 그 지도자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밥슨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유럽의 백인들이 먼저 정착한 곳은 북미가 아니라 남미였습니다. 지하 자원과 물도 북미에 비해 부족하지 않습니다. 기후도 좋습니다. 그럼에도 왜 북미가 남미보다 잘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밥슨 기자는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지도자가 웃으며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남미는 스페인사람들이 황금을 구하러 찾아온 땅이다. 그러나 북미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을 위해 찾아온 땅이다. 여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인생과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한 인간의 삶도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엡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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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단편소설 『외투』의 이야기입니다.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노인에게 “당신의 평생 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매번 “아주 고급 외투를 갖는 것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노인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평생 열심히 일하며 저축을 했고, 드디어 그는 꿈에 그리던 그 외투를 샀습니다. 그날은 성공한 날이자 목적을 이룬 날이었기에 큰 기대감과 흥분된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외투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강도를 만나서 비싼 고급 외투를 강탈당했습니다. 그 노인은 절망했습니다. 단순히 고급 외투를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성공과 함께 행복을 강탈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그 노인은 좌절의 늪에 빠졌고 너무 속상한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소유가 결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데도 우리는 계속 속고 삽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소유한 것보다도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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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시카고의 에지와트 비치 호텔에 당시 미국 최대 부호였던 9명이 자리를 같이했을 때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들이 '20세기의 신화'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때는 황금 만능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돈만 번 것이 아니라 큰 회사의 사장들이었기 때문에 교육도 많이 받았고 명성도 있는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표준으로 볼 때 스타이고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25년 후인 1948년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는 미치고 셋은 파산해서 빛에 쫓겨 도피 생활을 하다 죽었으며 둘은 출옥해서 자살 직전에 있었고 셋은 자살했습니다. 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인생의 궁극 목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애의 기로 어디에선가 주님의 내게로 오라는 음성을 거부하고 다른 것을 목표로 상아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거나 허무주의로 살고 있습니다.
동양 최대의 성자이고 인도인의 태양이었던 간디도 죽기 전에 자신은 괴로운 사람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부지런히 뛰어 보았지만 그것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사람은 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구두닦이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푯대가 있고 초점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는 목표가 있는,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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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는 25세에 예수를 믿고,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출세의 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대영제국의 노예제도를 폐지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정치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30세에 영국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후로 오직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가 48세 되던 해, 영국의회는 노예무역폐지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노예폐지의 비전을 세운 지 35년 만인 62세가 되던 해에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그는 64세에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그의 나이가 72세 되던 해에 대영제국 전역에서 노예해방법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예해방법이 통과된 지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오로지 노예제 폐지라는 한 가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희생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나를 일평생 재촉하신 이는 주님이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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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은 어렸을 때 “노예해방”을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이를 위해 정치계에 투신하여 여러 차례의 실패를 딛고 마침내 꿈을 이루었습니다. 간디는 어렸을 때 “인도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일생을 어려운 인도 국민을 위해 살았습니다. 제 인생의 목표는 “많은 사람을 옳은 길,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것”(단12:3)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남은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고,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기쁨과 희망과 복음(진리) 전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후일 내가 하나님 앞으로 간 후에 후손들이 나를 가리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 평가해주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과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순교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 7, 8)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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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가시렵니까? 여러분이 소망하고 있는 것은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의 본질과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아무리 교회 다니며 헌신했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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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스릴 때 참된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내 자신이 인생의 주(主)가 되어 살려고 하면, 우리에게는 근심과 걱정, 두려움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시고, 왕이 되셔서 우리를 통치할 때 우리의 모든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고, 사랑이 넘치는 나라입니다.(롬14:17)
 이 땅 곳곳에 하나님이 주인되어 다스리시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게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입니다
 
갈릴리공동체의 목표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복음전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열방의 모든 민족과 세계의 모든 나라가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시기 바랍니다.(마6:33)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눅17:21) 그리고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마6:9- 10)
아무쪼록 성도여러분 모두가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의 목표에 헌신과 열정을 다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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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사랑의 주님, 나의 달려갈 목표와 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달려갈 길이 향방 없는 자처럼 내 달음질과 수고가 헛되지 않게 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성과 판단이 흐려져 어리석게 살지 않도록 지켜주옵소서. 날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적극적인 마음으로 살도록 해주소서. 목표를 향해 서두르지 말고 거기서 돌아서지도 말고 희미한 과거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슬퍼하지도 말고 숨겨진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물러서지도 않고 내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기쁨에 찬 마음으로 주님을 푯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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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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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겪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댓글[0]
고난, 역경, 시험 (2014-04-10 오후 4:54:13) http://blog.somang.net/holylove/8117
고난을 겪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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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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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후반 북한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학교의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에 전교생은 운동장에 집합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운동장에 집합한 모든 학생들의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인 북한에서는 일체의 종교 활동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불시검열을 통해 종교인을 탄압하곤 하였습니다. 소지품 검사에서 두 개의 성경책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남학생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학생의 것이었습니다. 성경책을 소지하고 있던 두 학생은 즉시로 교장실로 불려가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겁에 질려 남학생은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학생은 완강하게 “선생님, 전 기독교인입니다. 성경은 악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이 무슨 잘못인가요?”라고 말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학생은 퇴학당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여학생은 내무서로 끌려갔습니다. 그 후 수주일이 지나도록 여학생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학생은 그 여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그는 여학생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여학생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던 것입니다. 가마니에 싸인 채, 땅에 뉘어져 있는 그녀의 손목과 발목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신체의 어떤 부분은 절단되어 있었습니다. 남학생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 이 여학생은 용감했다. 그런데 대장부 남아인 나는 어떠했나? 양심에 반하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은 이 여학생에 비하면 나는...’ 남학생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오 하나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저 여학생이 가지고 있었던 용기를 저에게 주십시오. 저도 그 여학생처럼 순교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이 분이 훗날에 북한을 떠나 남한에 오셔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정부기관에서 일도 하다가 그것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어서 그 옛날 믿음을 지키느라 순교당한 여학생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서 한 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서울의 염광여자고등학교입니다. 그리고 그 남학생은 바로 염광여자고등학교를 세운 김정렬 선생님이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 희생한 한 여학생의 순교가 한 남학생의 영혼을 일깨웠고 그 남학생은 일생을 바쳐서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우리 주님은 저 하늘에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름 모를 한 꽃 다운 여학생의 순교가 제물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주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섬김과 희생에는 남모르는 아픔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고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같은 아픔을 참아내며 끝까지 섬김의 자리를 지켜나갈 때 그 섬김에는 수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5: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5: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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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어마어마한 특권을 가졌기에 어떤 고난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며,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인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모든 일의 준비와 진행, 그리고 고난과 어려움은 하나님이 다 예비해 놓으셨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열매를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허락하시는 기간 동안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대사로 살면서 어떤 어려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 기독교에서 무시되거나 기피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신학, 고난의 신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은 기쁘고 평안하지만, 이는 이 세상 기준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영적 기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생으로 가는 길은 좁습니다. 의롭게 살려고 하는 자에게는 어려움과 핍박이 오기 마련입니다. 건강과 물질의 축복만 가르치는 신학은 분명히 잘못된 신학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고난의 불 시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종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고난을 피하려 하지만,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기꺼이 주님과 함께 어려움을 꿋꿋이 이겨 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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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이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씨가 땅에 뿌려지고 흙에 파묻혀야 합니다. 그렇게 씨가 땅속에 들어간 다음에는 썩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거기에 길이 있는 것입니다. 정치든 경제든 어떤 분야든지 땅속에 들어가서 자기가 깨어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또 자기를 누르고 있는 흙을 뚫고 나오는 아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거기에는 어머니가 아기를 출산하는 것 같은 고통이 있습니다. 싹이 나왔다고 다된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부딪히는 것이 진짜 어려움입니다. 비바람과 추위, 더위, 가믐, 질병 등을 그 연약한 싹이 다 이겨내야 합니다. 오랫동안 잘 참고 이겨내면 가을이 되어서 드디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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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난에 대하여 성경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 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 71)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시14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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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우리를 겸손케 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고난 뒤에는 상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고난을 겪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완성의 계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햇살뿐 아니라 구름과 폭우가 있어야 자연이 풍요로워지듯이,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요, 선한 것이요, 보람된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고난으로 인해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비관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이 당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승리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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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사랑의 하나님, 이 세상에 고난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깊은 차원의 진리를 찾게 하옵소서. 고난 중에 위로와 평화의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늘 참고 기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오는 고통 중에 삶의 의미를 찾고,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여 성장의 기회로 삼게 하옵소서. 고난은 축복을 받는 지름길인 줄 믿습니다, 고난 중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게 하시고 주님이 붙들어 주시고 승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가 고난당할 때 기도하게 하시고, 즐거울 때 찬송하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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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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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의지합니까? 댓글[0]
지유로운 글 (2014-04-04 오후 6:12:17) http://blog.somang.net/holylove/8115
무엇을 의지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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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렘17:7, 찬송가 542장 <통> 340장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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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 출신에다가 작가로서도 크게 성공하여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죄에 대한 공포로 불안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다가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는 한 시골 농부를 만났습니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다가가 당신의 그 평화로움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농부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지요. 그래서 제 마음은 늘 기쁘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때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하나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며 자신의 영혼을 받아주실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까?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삶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베풀어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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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누구나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무엇인가 붙잡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형제를 의지하고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혹은 지식이나 기술 재능 명예 권세를 붙잡고 삽니다. 인생은 원래 불안전하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붙잡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무엇을 붙잡고 누구를 의지하고 사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가 달려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영원한 축복과 승리를 얻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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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자기 명철이나 지식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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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슐러의 처남 프랭크벤드 마틴은 18세에 아버지가 경영하는 대장간에서 사고를 당하여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네 손가락을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나머지 손가락들을 사용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하기에 이르렀고 열심히 연습하여 오하이오주에 있는 수 카운티 교양악단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성도의 삶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에 개의치 아니하고 오히려 그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면 전화위복의 역사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즉 희로애락의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지도하심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편협한 지식을 너무 신뢰하면 곧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생깁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기도로 간구하는 것을 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조언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위험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시지 못하게 하는 것은 존귀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의존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정체성을 바로 판단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누구에게, 무엇에 의존하십니까?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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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성이나 경험, 지식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달팽이는 무척추 동물이기 때문에 뼈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려면 단단한 겉껍질 뼈가 필요합니다. 달팽이는 누가 건들면 얼른 집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집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달팽이집은 달팽이를 그리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척추동물은 뼈가 자신의 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재빠르게 도망쳐야 합니다. 딱딱한 껍데기 안으로 숨는 것과, 재빠르게 도망치는 것 중 어느 방법이 더 안전합니까? 당연히 도망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우리는 달팽이처럼 겉껍질만 너무 믿고 사는 것은 아닌가요?
사람에게 겉껍질이란 학연, 지연, 인간관계, 기득권 같은 것들입니다.
내 안에 힘이나 실력이 있으면 겉껍질을 의지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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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라는 영화에 보면, 한 사병이 일선에서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전쟁으로 지친 피곤을 풀고 온 가족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나눌 것을 생각할 때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폭격으로 건물은 다 파괴되었고 가족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선에서 남의 생명을 죽이기도 했고, 남의 생명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자살해 버린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으며, 전쟁으로 지금까지 자기가 믿고 있던 모든 질서와 가치와 도덕이 와해돼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낀 그는 어느 날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옛 스승 풀만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교수님, 아직도 우리가 믿을 만한 그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때 교수는 ‘아무렴 남아 있고 말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사병은 ‘그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고 풀만 교수는 엄숙한 태도로 ‘그것은 하나님이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님은 아직도 신을 믿습니까?’라고 묻자 ‘이러한 위기와 부조리에 처해 있기 때문에 더 믿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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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장학금을 받고 법과대학을 졸업한 가난한 청년이 사법고시를 치렀습니다. 이 고시생을 잘 아는 친구를 만나 시험이 어찌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미 합격해 연수를 받고 있다는데요.”
나는 너무 감격해 그토록 가난한 청년이 오직 부모의 기도 하나에 의지해 합격했다고 교인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한 주간 뒤 그 고시생으로부터 시험에 불합격했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그때만큼 괴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한 설교가 본의 아니게 거짓말 설교가 된 것입니다. 목사에게 이보다 더 큰 실수, 더 큰 괴로움은 없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1년 동안 강단 앞에 엎드렸습니다. 청년이 반드시 합격해 나의 설교가 거짓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음 해에 그 고시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습니다. 그 후 사람을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내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렘17:5).
무릇 부모, 자식, 친구나 성직자, 이웃이나 형제나 심지어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사람을 의지하고 믿으면 언젠가 실망하고 넘어집니다.(렘9:4, 미7:5)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변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누구도 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심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특히 한국의 정치인과 삯꾼 목자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쉽습니다. 작은 재물이나 말 한마디로 오랜 친구사이가 우정이 깨지고 떠납니다.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고 속이고 변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귀인(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시146:3)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2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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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현대과학이나 기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 배만은 침몰시킬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거대한 호화여객선이 있었습니다. 1911년 영국의 화이트스타 회사가 건조한 타이타닉호입니다. 이 배는 총46,328t, 길이 259.08m, 폭 28,19m,깊이 19.66m나 되는 것으로 시속이 무려 26노트나 되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른 배입니다.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배로서 선체 또한 이중으로 건조되어 있는 선박입니다. 따라서 설혹 어뢰를 맞는다고 할지라도 끄떡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니 교만한 인간들이 그렇게 까불거릴 만도 하지 않은가. 이 배가 영국의 사우샘프턴항에서 뉴욕을 향하여 처녀항해를 하던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경입니다. 배는 뉴턴들랜드 해역에 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배가 얼마나 튼튼하기에 나도 침몰시킬 수 없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인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배는 한 덩어리 얼음과 박치기를 했습니다. 이에 배는 2시간 40분 만에 허무하게 침몰했고 승선자 2,208명 중 힘깨나 쓰고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남자들 1,513명이 배와 함께 수장되고 어린이와 여인 그리고 노약자들 703명만 살아 남았습니다. 사상 유례 없는 해난사고입니다. 타이타닉호의 승선자들과 관련된 사람들, 이 엄청난 비보에 접하자 사랑하는 이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구름 떼처럼 뉴욕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때 그들 앞에는 두 개의 명단이 걸려 있었습니다. 하나는 죽은 사람의 명단이요 다른 하나는 산 사람의 것입니다. 이 명단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문자 그대로 희비쌍곡선을 그리는 난장판을 이루었습니다. 도대체 어느 명단에 들어 있는가. 실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언젠가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어느 쪽인가?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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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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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쾰른시. 독실한 신앙인으로 알려진 프랑케 부인의 부엌방에 6년 간 세들어 살고 있는 서른 여덟 살의 케테. 그녀의 인생은 온통 비극적이었습니다. 전화교환원인 남편은 가출했으며 남겨진 것은 가난에 중독된 창백한 세 자녀뿐이었습니다. 케테는 한 달에 한 번씩 지저분한 여관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가난과 고생으로 부쩍 늙어버린 남편을 향해 던지는 케테의 절규. ‘당신은 왜 이 절망적 상황에서 기도하지 않나요. 기도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당신도 알잖아요.’ ‘주님은 내게서 너무 멀리 있어.’ ‘아니예요. 지금 우리 곁에 있어요.’
이상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작품의 일부입니다. 세상에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어리석은 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자신이 진리라고 말하고, 자신만이 평안과 성공으로 안내할 것이라고 유혹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행4:12).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길이요 진리가 되십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의지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 곁에는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시편115: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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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인 페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사업에 투신했으나 심한 재정난으로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미시간 주 배틀 크릭에 있는 격리 병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낙망하고 좌절한 그에게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맥없이 그곳을 찾아갔더니, 어떤 건물 특별실에서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뒷자리에 앉아 있을 때 매우 친숙한 찬송 "너 근심 걱정 말아라" 가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 찬송을 듣는 순간 그의 마음에서 좌절감이 사라지고 큰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는 주님께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를 좀 돌봐 주시옵소서.’
그 후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무한한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마비된 심령으로 풀이 죽어서 그곳에 들어갔으나 해방되어 기쁜 마음으로 나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건강을 돌보아 주셔서 건강이 회복되었으며 다시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선하신 주님께서는 주님을 섬기고 의지하는 사람을 보호하시며 후손에게까지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않고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언젠가 자기 장막에서 뽑아지고 넘어지고(시49:6,7, 시52:5-7),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막10:25)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딤전6:17)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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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려움이 온다 해도 하나님만 의지하겠노라 결심한 허드슨 테일러에게 하나님은 물질적인 궁핍을 통해 시험하셨습니다. 그는 석 달에 한 번 나오는 봉급날이 훨씬 지나도록 돈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전도와 심방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테일러에게 가난한 남자 한 명이 찾아와 죽어 가는 자기 아내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이때 호주머니에 당장 식비로 쓸 반 크라운짜리 은화 한 개밖에 없음을 알게 된 테일러는 ??이 반 크라운짜리 은화 대신에 잔돈이 있다면 1실링을 줄 수 있을 텐데…?? 하며 그를 따라갔습니다.(당시 영국에서 1크라운은 5실링에 해당했다.)
초라한 방에는 네 명의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고, 냄새 나는 돗자리 위에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한 여인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감히 그들에게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만 간신히 꺼냈습니다. 그때??이 위선자야, 날마다 사랑과 봉사를 운운하면서 네 주머니 속의 은화는 그들에게 통째로 줄 수 없단 말이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비수처럼 그의 가슴에 꽂혔습니다.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은화를 그들에게 주면서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테일러의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집 주인이 소포 꾸러미를 하나 건네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10실링짜리 금화가 들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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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자기 자신의 권세와 힘, 재능, 마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1959년 9월 27일 주일이었습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 수상 후르시초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니 나와 함께 교회에 갑시다.”
후르시초프는 거절하였습니다. 아이젠하워는 한 시간 반만 기다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아이젠하워는 후르시초프를 만났습니다. 아이젠하워가 “한 시간 반 동안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고 묻자 후르시초프는 “내가 먼 길을 찾아왔는데도 교회에 가야 할 아이젠하워의 핑계가 무엇일지 생각했소”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초강대국인 소련의 수상을 초청해놓고 예배에 참석하느라고 그를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외교적인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잘못하면 외교 및 국가적인 손실과 분쟁으로 악화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아이젠하워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은 세계를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헛된 것을 붙들지 마십시오.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깊은 신앙을 통하여 은혜의 세계를 체험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세계를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십시오. 말씀에 의지하여 신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십시오.
자신의 힘과 결심과 마음을 믿고 의지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버릴 지라도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 다고 호언장담했으나 닭울기 전에 3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마26:33-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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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214장 3절 가사를 봅시다.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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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몸의 건강이나 생명보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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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덞째, 자국의 군사력이나 무기, 외국 군대의 힘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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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 무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워 승리했습니다. 그런 다윗이 하나님보다 군대를 의지했다가 크게 매를 맞은 일이 있습니다. 사사기 7장에 보면 하나님이 기드온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실 때 지원병이 32,000명이나 모여들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추리고 추려서 300명을 데리고 미디안을 쳐부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군대의 힘을 더 의지할까봐 그리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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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1장 6-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병기를 불사르고 명하신 까닭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후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마병을 의지할 것을 염려하여서입니다.
사무엘상 14장 6절에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셨고, 시편 44편 6˜7절에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전쟁의 승리와 패배, 국가의 흥망성쇠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만 의지해야 합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의지하고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핵무기를 무용지물로 만드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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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 다른 신 곧 우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1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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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800만 종류의 우상이 있다고 합니다. 우상을 의지하고 섬기는 자는 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자들을 미워하시고 진멸하십니다.
‘조각된 신상을 섬기는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할 것이며, 헛된 우상을 자랑하는 자들도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모든 신들아, 주님 앞에 엎드려라.’(시97:7)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고전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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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누군가를 섬기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면, 다른 무엇인가를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섬기는 그 ‘다른 무엇’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상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섹스라는 우상, 술이라는 우상, 스타라는 우상, 게임이라는 우상, 돈이라는 우상, 마약이라는 우상, 개인숭배의 우상, 성공이라는 우상, 과학 기술이라는 우상 등에 빠른 속도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붙잡고 섬기다가 다른 것을 잡으면 멸망합니다.
세상에서 영원한 것이란 없습니다. 권력도 세월 속에 무상해지고, 인간의 지혜도 이성도 늙으면 흐려지며, 육체도 세월 속에 병들며 늙어가고 재물도 점점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에 자신을 의지하는 자는 결국 권력과 재물과 지혜가 사라져 갈 때 그의 삶도 허망하게 사라져갈 뿐입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힘과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더불어 여러분의 삶도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서 싱싱하게 자라나는 감람나무 같으니 내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영원히 의지하리라.’(시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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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멘델스존이 유럽 최고의 오르간이 있다는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멘델스존은 오르간을 한 번 연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성당 연주자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 오르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아십니까? 이 귀한 걸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습니다."
멘델스존은 끈질기게 간청한 끝에 마침내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달리는 순간, 이제껏 성당 연주자가 들어보지 못한 아름답고 웅장한 멜로디가 성당을 가득 채웠습니다. 나중에 멘델스존의 정체를 알게 된 성당 연주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이 그 위대한 음악가 멘델스존이란 말입니까? 위대한 음악가에게 오르간을 맡길 수 없다고 했다니, 제가 정말 어리석었군요."
나보다 능력 있는 분에게 인생을 맡길 수 있다면 아무것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뿐 아니라 더 큰 소망을 품고 더 큰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재능, 실력이 아니라 '누구를 붙들고 무엇을 의지하느냐'입니다. 우리 스스로 파도를 만들어 낼 수 없지만 크고 강력한 파도를 만나면 멋진 서핑을 할 수 있고, 우리 스스로 바람을 만들 수 없지만 센 바람을 만나면 하늘 높이 연을 날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하나님이 우리 삶을 그분 뜻대로 연주하시도록 자리를 내 드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죄악된 나는 죽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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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심을 고백합니다. 나의 암담한 현실과 방향 감각을 잃은 이 어두운 여정에서 곁에서 도우시는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게 하시며 하나님만이 내 삶의 이정표가 되셔서 나를 인도하소서. 우리의 힘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인간의 수단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소서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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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allcome, http://cafe.naver.com/newgal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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