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목회 연구원(원장 김상복목사)의 2007년 2학기 - 변화의 신학을 수강하면서 새로운 지식과 받은 은혜를 간추려서 간증 드립니다.
8. 나는 굴복 당했다 - 나 자신에게 - 한 샘의 두 가지 물?
약 3:9-12
9 :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1 :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이런 저런 구실을 만들어서 현재 우리의 모습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어떻게 애쓰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계속 하기 전에 핑계거리를 하나만 더 살펴보기로 합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역사에 대하여 이른바 경제적 해석을 시도합니다. 즉 역사는 주어진 상황 하에서 경제력이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관점은 어느 정도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공산주의자는 경제가 역사를 결정한다고 말을 하고는, 바로 돌아서서 경제를 바꾸려고 결심을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경제가 사람들을 바꾸어 놓는다고 해놓고는 사람들이 경제를 바꾸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선택의 결정권은 언제나 인간의 몫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몸부림치고 변호하고 회피하려고 노력해도, 결과적으로는 우리 스스로가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인간들이란 것을 우리는 느낍니다. 아합 왕의 정원에서 엘리야가 그랬듯이 무엇인가가 우리의 내부에서 치솟아 오릅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한번 더 절반의 핑계를 대면해야만 합니다. 내가 “절반”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바로 책임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을 자기가 묶어 놓고는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운명,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할 운명에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 안에서 두 인물을 창조했다. 이 두 인물 중에서 악한 쪽이 선한 쪽보다 너무나 강해서 그 결과로 나는 악한 쪽의 사람이 되는 운명에 처해있다. 나는 전생의 업보의 희생물이 아니라 이생의 업보의 희생물인 것이다. 나는 결국 굴복 당했다- 나 자신에게”라고 합니다.
Browning은 또 이 분리된 상태를 이런 말로 표현했습니다.
슬프게도 혼합된 성품들:자신에게 푹 빠져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희생적인 성품,
사랑이 어찌 그렇게 치솟아 오르기도 하면서,
또 교활, 탐욕, 허영 그리고 원한이 다시 침몰 시키는구나!
우리는 스스로 분리된 자아를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아가 우리의 운명입니다. 우주 공간을 날아다니면서 “어느 길로 내가 날아가도 거기에 지옥이 있네, 나 자신이 지옥이로구나” 라고 절규하는 사탄을 밀톤이 묘사했을 때, 그는 우리 중 많은 사람을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저는 지옥으로 이끌고 가는 자아와 더 이상 같이 살지 않고, 천국으로 이끌어 주는 자아와 함께 살기로 결심하고 원합니다. 저가 져야 할 책임감이 너무나 무거워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아래 url을 ctrl+click 하시면 소망교회 베다니찬양대의 은혜로운 찬양(주 찬양)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www.somang.net/SMPS_IB/show/IB_Common_Show_Movie.aspx?addr=/FILE/SMPS_IB/video/080518_1.as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