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목회 연구원(원장 김상복목사)의 2008년 1학기 - "변화의 신학 2" 를 수강하면서 새로운 지식과 받은 은혜를 간추려서 간증 드립니다.
138. 절반만 받아드리고 살아간다
(벧전 2:19-20)
19. 애매 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For what credit is it if, when you are beaten for your faults, you take it patiently? But when you do good and suffer, if you take it patiently, this is commendable before God.)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것은
또 하나의 환상이 될 것입니다.
둘째, 환상이나 속임수로 슬픔을 피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상과 속임수를 사용하면 슬픔 그 자체보다도 더 결과가 악화될 수 있습니다.
한 여자가 앞을 보지 못하는데 자기는 시각장애자가 아니라고 늘 주장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환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남자는 역시 눈이 안 보이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성취한 완전한 행복을 성취한 사람이라면 연민의 대상은 아니다.”
이 사람은 현실감과 탄탄한 행복감을 갖고 살았습니다.
환상은 환상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당신을 실망시킬 것입니다.
누가복음 4:29-30, “이 사람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마을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이들은 마을에 세워진 언덕의 벼랑까지 예수님을 끌고 가서 밑으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갈 길을 가셨습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셨다”는 말을 주의해 보기 바랍니다.
후퇴하지 않고 피하지 않고 그들 사이를 통과해서 지나가셨습니다.
기독교인의 방법은 “통과”하는 것입니다. 환상 속으로 도망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직면하고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환상 속으로 도망가려는 경우의 예가 있습니다.
한 어머니의 인생이 독자인 아들뿐이었는데 제1차 대전 중 아들이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전보가 준 첫 충격이 어느 정도 지나가고 무딘 마비상태에 빠져 있다가 그 어머니는 아들이 죽었고 자기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이 사실이고 그에 따르는 결과를 수용하고 계속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드리기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도 없고 새로운 취미를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 수도, 자기 계획과 희망들을 재조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믿고 그 의미를 받아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절반만 받아드리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절반의 환상이 아니고 아직도 완전한 환상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어머니는 적응하지 못했고 효율성이 없고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것은 또 하나의 환상이 될 것입니다.
오 사랑의 예수님, 주님께서 갈 길을 보여주신 것 감사 드립니다. “통과”해 가야 하는 길. 도피하고 싶은 모든 충동들을 다 주님께 드립니다. 저에게 현실감각을 주옵소서. 진리만이 저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 있음을 믿고 저는 진실을 생각하고 말하고 진리를 신뢰하고 진리가 되어야겠다는 저의 삶을 지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아래 url을 ctrl+click 하시면 베다니찬양대의 은혜로운 찬양(아기 예수)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www.somang.net/SMPS_IB/show/IB_Common_Show_Movie.aspx?addr=/FILE/SMPS_IB/video/081221_1.asx&code=AA005&seq=2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