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차성도 교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9-13)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남에게 보이려고 외식하는 기도를 드리지 말고 은밀한 중에 기도할 것과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중언부언하지 말 것을 가르쳐주셨다. 이와 같이 기도의 바른 태도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을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주셨다.‘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관습 속에서 ‘주기도문’을 마치 예배를 마무리하는 하나의 의식으로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종종 ‘주기도문’의 의미를 따라 기도 드리기보다는 마치 어떤 주문이라도 외우듯이 일사천리로 해치우곤 한다.
또한 예배는 축도로 마쳐야 한다는 관념으로 인해 목사님께서 축도하실 수 없는 경우에 예배를 마무리하기 위한 대용품 정도로 ‘주기도문’을 사용하기도 한다. 주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지, 예배나 모임을 마무리하기 위해 “너희는 이렇게 암송하라”고 하시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입으로만 ‘주기도문’을 외우고 만다.
진정으로 ‘주기도문’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묵상한다면 이렇듯 일사천리로 해치울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마치 주문처럼 ‘주기도문’을 단체로 외우기보다는
‘주님의 기도’는
개인적으로 한 구절 한 구절을 묵상하며
신중하게 매일같이 드려야 할
‘주님의 기도’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심각하게 ‘주님의 기도’를 드려야 할 지를 알려주는 우루과이 작은 성당 벽에 새겨져 있다는 주님의 기도를 소개한다. 더 이상 ‘주기도문’이 교회 모임의 종결용만 여기지 말고 아래의 기도문을 통해 다시금 ‘주기도문’의 내용과 의미를 되새겨서 모든 교회들이 바른 ‘주기도문’을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우리”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아버지” 하지 말아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 다니면서.“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도 않으면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과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기도”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아래를 클릭하시면 소망교회 베다니찬양대의 은혜로운 찬양(임마누엘 오소서)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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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한 고통
(존 피셔)
어릴 적 육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분명히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아픔과 고통을 느낄 때마다, 그리고 그 아픔을 부모님께 호소할 때마다, 부모님들께서 내린 처방은 간단했다.
“이것이 바로 성장의 아픔이란다.”
물론 지금도 이에 대해 과학적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아이들이 아플 때마다 부쩍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영적인 문제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성장을 위해서는 고통이 따른다.
성장하기 위해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은 죽기가 어렵다. 사실 우리 모두는 고통 없이 평화롭게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실제로 죽음은 항상 고통을 수반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과거의 것에 늘 익숙해져 있으며, 과거의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 안전지대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매일 겪어야만 하는 이런 죽음은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 주지만, 우리는 결코 이를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만은 없다. 왜냐하면 아픔 뒤에, 고통 뒤에 반드시 이보다 큰 기쁨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픔과 고통을 경험케 하지만, 다른 면에서 이러한 아픔과 고통 보다 더 큰 것들로 우리의 삶을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두려움과 연약함과 반드시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 준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에는 어떠한 우리의 노력도 필요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우리의 협력을 원하신다.
진정한 영적인 성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겨졌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가르쳤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2~13)
이것이 바로 영적 성장의 원리이다. 믿음 안에서 소망함을 가질 때만이 우리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두려움과 연약함을 직면할 수 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주실 것이다.
분명 이러한 과정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만약 나타나지 않으신다면”이라는 의문이 존재한다. 이 순간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믿음.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성장을 위한 아픔을 견뎌내게 할 것이다.
아래를 클릭하시면 소망교회 베다니찬양대의 은혜로운 찬양(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여)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www.somang.net/infobada/player/player01.asp?idx=36102:36904&idxc=C0000000015&langTyp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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