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중요성
(고전 6: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어느 날 독실한 신자가 기독교에 대해 불만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너무 옭아맵니다. 술도 안 된다, 담배도 안 된다, 다른 이성과의 즐거움도 안 된다면서 좁은 길만 가라고 합니다.” “당신은 최고급 양복으로 신발을 닦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값비싼 오르간에 쓰레기를 올려놓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바보나 하는 일이지요.” “비싼 돈을 주고 산 도자기를 야채 담는 데나 쓴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형편없는 낭비지요. 그런데 제게 왜 그런 걸 묻지요?” “들어보세요. 당신은 장차 훌륭한 정치가나 학자가 될지도 모를 사람입니다. 그 존귀한 몸을 술항아리로 만들면 어떻게 합니까? 아마 하나님이 섭섭해하실 것입니다.”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무지가 있었습니다.
“육체는 무덤이다”는 속담이 성행할 정도로 영혼을 귀중히 여겼지만, 육체는 어떻게 행하든지 상관없다는 식의 생활태도가 만연해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고린도교회의 영적 질서를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몸의 소중한 의미를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물으시며 몸과 행동의 중요성을 다시 깨우쳐주셨습니다. 첫째,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입니다(15절).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 연결된 지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와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향락과 세속의 문화에 연결시켜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합니다.둘째, 우리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19절).
우리 몸은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몸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고 주님의 영이 거하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이 인도하는 삶에 복종해야 합니다. 세상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를 맺는 몸이 되어야 합니다.셋째,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몸을, 우리를 위하여 사용하지 말고 거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을 그리스도께서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자신의 영광을 따르라는 유혹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이고 영광의 도구가 되어야 할 우리의 몸을 잘 이해하며
오늘도 우리의 몸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저를 통해 거룩한 뜻을 이루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이제 저의 몸을 육신의 쾌락이나 헛된 만족에 빠지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날마다 성령의 전을 주님의 뜻대로 보전하며 온전히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아래를 클릭하시면 소망교회 베다니찬양대의 은혜로운 찬양(위대하신 여호와)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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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부활신앙
(고전 15: 32∼34)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들에게 부활은 신앙의 근간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 부활이 없다면 어떨지 생각해봅시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이제껏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세례받고 성만찬을 행한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그토록 애쓰고 노력한 일이며, 변화된 영혼을 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한 그 모든 일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울의 질문처럼, 부활이 없다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30절)”겠습니까?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가 되지 않겠습니까?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죽으면 그만이다. 우리에게는 이생뿐이다.’ 그리고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은 당연히 그것에 어울리는 생활에 그치게 됩니다.
바울은 그들의 삶의 모습에 대해 “죽은 자가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32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저 먹고 마시는 즐거운 삶으로 평생을 보내는 것이 낫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도중에 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부활신앙을 소유함으로 미래에의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그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즐거웠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해주신, 보이지 않는 영원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지탱될 수 있습니다.
그 내일을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34절).
이것이 부활의 신앙을 지닌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길고 긴 믿음의 여행길을 걸어가야 할 신앙인으로서, 삶 속에서 겪는 어려움과 고통이 아무리 크고 많을지라도, 장차 있을 영광의 삶을 바라보고 부활을 믿으며 나아가야만 합니다.
내세를 위해서
현재를 포기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차 도래할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더 열심히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부활신앙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며, 앞으로 다가올 우리의 미래를 위해, 더욱 열심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게 지혜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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