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목회 연구원(원장 김상복목사)의 2008년 1학기 - "변화의 신학 2" 를 수강하면서 새로운 지식과 받은 은혜를 간추려서 간증 드립니다.
114. 회피해서 해결이 안 된다
(마 8:26; 고후 7:5)
마 8:26. 예수님께서 “왜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아주 잠잠해졌습니다. (But He said to them, “Why are you fearful, O you of little faith?” Then He arose and rebuked the winds and the sea, and there was a great calm)
고후 7: 5. 우리는 마케도니아에 도착했을 때도 조금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밖에서는 싸움이 있었고, 안에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For indeed, when we came to Macedonia, our bodies had no rest, but we were troubled on every side. Outside were conflicts, inside were fears.)
기피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두려움 외에는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두려움이 얼마나 파괴적인 힘인지 이제 결론을 맺어 봅니다.
한 유명한 심리학자가 두려움은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큰 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때로는 완벽하지 못하다는 두려움 때문에 질병으로 후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피론 할리데이가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중요한 시험 전날 한 여학생이 팔에 신경염이 생겨 시험을 치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습니다. 분석해 본 결과 그 학생이 시험을 쳤을 경우 일등을 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신경염이 완전한 점수를 받지 못해서 당할 수치심에 대한 무의식적 보호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프리츠 쿵켈은 말 합니다.
"불안은 창조의 반대인데 창조를 원심력이라 한다면 불안은 구심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불안한 상태에서는 생명의 열정은 증가하지만 그 범위는 좁아진다.
이 창조력의 상실이 우리가 말하는 불안이다."
데이빋 시베리는 말합니다.
‘걱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초조하고 피곤하고 낙심하고 냉소적이고 비판적이고 외롭다. 과거의 경험 속에 눌려 불필요하게 자기 인생을 제한하고 있고, 행복을 파괴하는 끓어오르는 기억으로 인해 정신적, 정서적 상처를 입은 희생자이다."
아마 바닥에 있는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죽음의 두려움을 갖고 살아갑니다.
내일의 삶의 영역이 죽음으로 인해 점차 좁아지고, 망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냥 생각하지 않으려 머리에서 없애 버립니다.
신문 발행인 윌리암 랜돌프 허스타는 자기 앞에서는 누구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한자를 사용하는 동양 사람들은 4라는 숫자가 죽음이라는 한자와 같은 음이기 때문에 4라는 숫자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죽음을 직면하기 거부하는 것은 ‘현대적 도피’이고 현대인들의 특징이다."
그러나 기피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 내면에 숨은 콤플렉스로 돌아옵니다. 인생의 중심에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잠재해 있는 두려움으로 돌아옵니다. 피하려는 두려움은 속으로 침투해서 돌아옵니다.
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저의 가슴은 주님께서 예비하신 그 길을 찾으려는 기대감으로 달아오릅니다. 저는 주님께서는 저가 가야 할 길을 예비하시고 준비시키시고 계시는 것을 압니다. 그 길에 제 발을 올려 놓겠습니다. 두려움을 내려 놓고 순종하며 기쁨으로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아래 url을 ctrl+click 하시면 소망교회 베다니찬양대의 은혜로운 찬양(내 주는 강한 성이요)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www.somang.net/SMPS_IB/show/IB_Common_Show_Movie.aspx?addr=/FILE/SMPS_IB/video/081026_1.asx&code=AA005&seq=2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