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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웃음 댓글[0]
묵상 (2007-04-23 오후 1:21:08) http://blog.somang.net/jookwanlee/2812



복된 웃음(Blessed Laughter)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song of joy)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great things)를 행하셨다 하였도다.(시편126:1-2)”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고토(故土)인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의 감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방의 기쁨이 너무도 큰 나머지 마치 꿈꾸는 것 같아서 현실의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얼굴에는 웃음이 입술에는 기쁜 찬송이 그치지를 않았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은 인생에게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기쁨과 감사와 찬양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속하심(Redemption)으로 구원함(Salvation)을 입은 우리는 그 기쁨과 감사로 인하여 웃음이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웃음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웃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는 한 전달수단이 되며,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기는 한 통로가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웃음의 생활을 잘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들이지요.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복된 마음으로 웃음을 찾아내어가며 이웃들에게 기쁨과 힘이 되어야겠습니다.






* 복된 웃음 *


세상에는

아름다운 보석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은

사랑하는 이들의 웃음인 것 같습니다.


"웃음" 이라는 것,

참으로 신비한 힘을 지녔지요.


삶이 힘들고 지칠 때면,

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그대의 웃음을 마음에 담아 봅니다.


그러면 어느새 마음은 평안해지지요.


불안해질 때마다

그대의 예수님 사랑 같은 웃음으로 인해

든든함을 얻습니다.


순간순간 그려지는 사랑하는 그대의 웃음은

삶의 샘물 같습니다.


나를 바라보며,

나의 못난 모습까지도

웃음으로 안아주는 그대 같은 이가 있어

나는 행복합니다. 


웃음으로 안아주는 그대에게 다가가 속삭여 보려 합니다.


"당신의 웃음을 살며시 안았더니

당신의 마음이 예수님의 사랑이 나의 가슴에서 뜁니다" 라고.


나 또한 그대처럼 이웃들에게

복된 웃음으로 힘이 되고 싶습니다.




2007. 4. 19.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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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zart, 하나님의 영감 댓글[0]
묵상 (2007-03-22 오후 5:00:14) http://blog.somang.net/jookwanlee/2794

 모차르트, 하나님을 향한 영감        

           

   

1. 왜 모차르트에 열광하는가?


  2006년은 모차르트 탄생 250년이 되는 해로 전 세계 클래식 음악 연주장에는 모차르트 연주가 끊이지 않았고, 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잘쯔부르크는 모차르트 관광 상품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해에 방영된 NHK-TV에 의하면 1960-70년대까지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음악은 베토벤 작품이었다고 하며, 그러나 80-90년대에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단연 으뜸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왜 모차르트의 음악에 전 세계가 열광하는 것일까요?  


  모차르트 이펙트라는 말을 유행시킨 돈 캠벨(Don Campbell)은 모차르트 음악이 미치는 영향력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워싱톤 주의 이민 관리소에서 아시아에서 온 이민자들의 영어 수업 때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학습 능력이 향상되었습니다. 캐나다의 에드먼톤 시에서 보행자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해 모차르트 현악 사중주를 들려주었더니 그 결과 마약 거래 같은 범죄 행위가 줄어들었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라우셔 박사는 모차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D장조'를 10분간들은 대학생의 공간지능이 평소보다 8-9점 더 높아진다고 보고했습니다.


  왜 많은 음악 중에서 모차르트 음악이 더 효과가 있는 것일까요? 모차르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35년의 짧은 인생 중 1/4이 여행이었습니다. 6세부터 시작된 잦은 여행은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지원해 주는 주교,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여기저기 직장을 얻으려 다녔지만 백수로 있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낭비벽이 심한 콘스탄체와 결혼했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천재적 능력에도 금전적인 곤란으로 힘들게 살았다. 말년에는 여기저기 구차하게 돈 빌리는 편지를 쓴 것이 지금도 여러 장 남아있다고합니다. 1791년 12월 5일 모차르트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식에는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그의 시체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삶의 무게가 그의 음악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자신들의 그때그때 상황이 음악에 반영됩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음악은 항상 밝음, 경쾌함, 기쁨, 순수함, 투명함으로 특징지어 지요.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는 언제나 행복한 삶에 취해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는 끊임없이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살았습니다. 같은 고전파 작곡가 중 유독 모차르트의 멜로디는 사람들의 귀에 착착 달라붙지요. 곧 흥얼흥얼 따라 부르게 됩니다. '흥얼흥얼' 그것이 온종일 모차르트가 한 일이라고 합니다. 고열로 의사를 찾았을 때도 그는 그의 멜로디만 생각하고 있었다고 비엔나의 한 의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입엔 늘 노래가 있었으며, 그 노래는 삶의 모든 고통을 잊게 해 주었지요. 그의 노래는 자신 뿐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며, 밝고 건강하게 만드는 놀라운 효과가 있었습니다. 노래가 음악이 사람의 긴장된 마음을 이완시켜주는 놀라운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음악치료(Music Therapy)연구가 한창이지요. 


  당신의 입에는 어떤 노래가 있는가요? 날씨가 좋을 때, 뭔가 잘 나가고 있을 때, 바라던 일이 성취되었을 때 노래하기는 어렵지 않지요. 그러나 진정한 노래는 어두울 때 부르는 것이며, 고통가운데서 부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어둠이 밝음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지요.


  젊은 다윗은 조국으로부터 쫓겨 다니며 망명생활을 한 적이 있었지요. 그 고통의 시간에 놀라운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심령으로 찬양하리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편108:1). 다윗은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었지만 노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노래는 자신을 점점 밝고, 강하게 만들었다. 또한 어둠에 처했던 이스라엘을 당대 최고 강대국으로 세워나갈 수 있었습니다. (최 혁 목사)


 잠시 여러분의 분주한 일손을 놓으시고,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에서 떠나 보십시오. 푸른 하늘을 보며 10분만 조용히 종은 곡을 허밍(humming)으로 노래해 보십시오. 예컨대 아래에 서 언급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의 주제나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에서의 “노예들의 합창”같은 곡 들을 말입니다. 단순할수록 좋으며, 그 노래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 멜로디에 당신의 감정을 실어 여러분의 복잡한 감정과 고통을 날려 보내기기 바랍니다. 그 음악으로 여러분의 품성을 다듬어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말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부를 수 있는 당신의 노래가 있는지요?   여러분들도 성가대원이 되어 봉사하시고 하나님도 만나며 인격이 성숙하시어 다윗처럼 성공하는 삶으로 향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은 인격을 가다듬어 성숙시키는 능력이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2.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에 부쳐!

               


영혼을 일깨우는 시리도록 저미어 오는 소리의 울림이여!


가슴 한가운데 진한 여운을 남기고 애잔하게 사라지는 멜로디의 긴 터치(Touch)는 신이 쓰신 미학(美學)이 아닌가!


잔잔한 파동으로 다가오는 기쁨은 나를 스치며 깊은 비애(悲哀)의 여운을 남기고 간다.

마치 우리 삶의 즐거움이 그 깊은 곳에 숙명적인 슬픔을 안고서야 다가오듯이!





모차르트는 우리 인생들이 죄(罪)로 인하여 사망이란 슬픔의 종착역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암시(暗示)하고 있으니,


세상은 안목(眼目)의 정욕(情慾)으로 우릴 유혹하나 하나님을 떠나서는 모든 것이 슬픔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도다.


아인슈타인은 죽음이란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들을 수 없는 것이라 했는데, 여기 모차르트는 우리의 본향(本鄕)이요 소망인 하나님 나라를 일깨우고 있음이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차르트란 아름다움의 화신(化身)을 선물하셨음이니,


그의 천상(天上)에서 흐르는 선율 속에는 하나님 주신 은혜의 감동이 가슴을 뛰게하누나.


속세의 아름다움에도 이런 가슴 벅찬 감동의 경지(境地)를 주시니, 우리의 소망, 천국의 멜로디는 어떠할지 가늠할 수 없도다.


주님 보이시는 천국이 저희의 이상향(理想鄕)이오니 한없는 자비와 돌보심으로 인도하소서!




3. 모차르트의 레퀴엠


모차르트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며, 수많은 레퀴엠(鎭魂曲)중에도 가장 널리 알려진 모차르트의 레퀴엠에 대한 감상을 아래와 같이 적으며, 이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가는 동안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을 넘어 참 진리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확실히 바라보고자 합니다.



레퀴엠은 그의 작품 중에서 흔치 않은 장중함이 주요한 분위기로 유지되는 드문 곡이라 할 수 있겠다.


곡 자체가 내포하는 의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에 대한 죽음의 예고로 민감해져 있던 모짜르트 본인이 너무나 심각하게 죽음에 골몰해있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곡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짜르트 고유의 색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상투스’에서부터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순수한 아름다움에의 추구는 `베네딕투스`로 연결되어진다.


이제, 죽음에의 엄중함은 조금씩 희미해져간다.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 섞인 무게는 점차 옅어지고, 서서히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한 희열로 바뀌어가는 것만 같다.


죽음의 비극적 측면과 대비되는 삶에의 희미한 미련, 죽음으로 향하는 길의 엄중함, 삶의 존재로서의 모든 것을 벗어던져서 획득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희열!


그러나 끝내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신비로운 두려움으로 이어지는 곡의 전체적인 흐름은 `아뉴스 데이`를 거쳐 `콤므니오`에 이르면 다시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레퀴엠은 마무리되고 있다.


어느 순간엔 체념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고요함이 다시 조금씩 부풀어 오르면서 대단원을 향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마냥 전진하여 가는 음악적 긴장감이 도달한 곳은 긍정적이지도 그렇다고 결코 부정적이지도 않다.


초반에서 이미 드러냈던 장중함의 회복이다. 잠시 죽음에의 길이 늦추어졌지만, 이제 다시 가속도가 붙는다. 죽음을 초월한 환희를 향한 것이기보다는, 그것은 드높은 존재에 대한 두려움 섞인 경이가 아닐까?



저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풍기는 이러한 여운에 대하면서 아래의 글귀를 떠올립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데서 기인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이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사람들은 "무익한 반항"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맞서 싸운다면 사람들은 언제나 패배와 재난과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화목하여 그분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Dr. Martin Lloyd Jones)



나아가 모차르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암시한 죽음 뒤의 새로운 세상은 그의 자녀들에게는 환희와 경이를 함께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확신합니다. 죤 번년(John Bunyan)의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에서 잘 묘사하고 있듯이.



200. 3.22.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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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이루는 사람 댓글[0]
묵상 (2007-03-20 오후 7:15:18) http://blog.somang.net/jookwanlee/2792

뜻을 이루는 사람


중국 周나라때 著書인 ‘육도삼략(六韜三略)’ 중 ‘六韜’ 제1편 제1장 문사(文師) 2.에 보면 낚시를 하는 강태공이 문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군자는 자신의 뜻이 이루어짐을 즐기고 소인은 눈앞에 일이 이루어짐을 즐기지요[君子樂得其志 小人樂得其事]. 제가 지금 낚시질을 하는 것은 그와 매우 비슷합니다. 낚시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군자가 됨을 이루고자 살다간 강태공이 이러할 진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주신 뜻과 목적을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우리 크리스쳔들 에게는 이보다 더 깊은 깨달음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를 가장 먼저 구하며 살고자 함일 것인데, 그것은 현실의 우리들의 삶에서는 무엇보다도 이미 주신 그리고 지금도 주시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에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Calling )에 따라서 살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1. 자족하는 삶,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


“내처지가 힘들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으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을 이겨낼 줄도 알고 부유함을 누릴 줄도 압니다.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넉넉할 때나 궁핍할 때나, 어떤 형편에 처하여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0-13)


이 말씀의 핵심은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입니다. 이는 우리들이 올라 가야할 신앙생활의 최상의 경지라고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바울은 인생을 살면서 경제문제를 터득한 자족의 원리를 삶의 모든 영역에 확대 적용했습니다. 돈이 많다 해서 우쭐하거나 돈이 적다해서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마음, 곧 평안하고 만족하는 비결이 있었습니다. 돈 가지고 꼭 울고 웃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특별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만이 이런 삶을 살도록 하실까요?


하나님은 바울처럼 우리도 자족하는 것을 배우기를 바라십니다. 바울은 너희들의 표본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빌립보서 3장 17절을 보면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너희들도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선교사들에게만 주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세상이 사람의 값을 얼마나 버느냐, 얼마나 좋은 집을 가졌느냐 등으로 판단하는 마당에 바울처럼 살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보면 불가능합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가 바울과 같은 인격의 수준을 요구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바울처럼 만족하는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바울과 같은 삶의 태도를 원하면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답기를 하나님은원하십니다. 즐기면 그저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 더 고상하고 높은 삶을 요구하십니다.


소유는 잠깐 있다 없어집니다. 넓고 편안한 집에 산다고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고급차, 은행에 돈 넣어둔 것, 값진 보석, 유명한 의상, 진정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내 뇌에 있는 혈관 하나만 뚫려도 다 놓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영혼의 만족과 평안이 근본적으로 요구됩니다. 복이 있는 자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따르는 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소유가 많고 적든지 간에 거기에 따라 좌우되는 마음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자족은 부(富)하냐 가난하냐에 좌우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파고의 부침에 흔들리지 않는 신비한 경지를 말합니다.


바울이 자족의 경지에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부족함이 없다는 인식을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능력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축복(Blessing)은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하시는데 있는 것이지 어떤 종류의 보상이 아닙니다(Peter J Gomes 목사 저 “Strength for the Journey"중에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10)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의 참 모습 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능력을 터득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끌리는 삶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브리서 11:26-27)

열정에 이끌리는 삶과 관성적인 삶은 정반대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이 사람을 끌고 간다는 점입니다. 모세는 자기 눈앞에서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죽

이는 실수를 했습니다. 미디안에서는 맡겨진 양떼들이 있기 때문에 매일 그 일을 한 것 뿐

입니다. 그렇게 일에 끌려가는 삶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인간적

으로는 성공의 맛을 본다고 해도 진정한 성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방선기 목사)


모세가 산 80년 동안의 삶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80세가 되는 해에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불러서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의 하나님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출 3:6,10).


물론 오랫동안 열정과 관성에 끌리는 삶을 살았던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지

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복했고 그 후 새로운 삶이 전개

되었습니다. 애굽의 파라오 앞에서도 만약 이전의 열정만으로 덤볐더라면 그 지루한 싸움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전처럼 관성에 끌리는 삶의 자세만으로는 애굽의 신들과 맞

서 싸우는 심각한 영적 전투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사명

을 주신 하나님이 그 모든 과정에서 함께 하심을 분명히 체험했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해

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직장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만히 돌아보면 일이 점점 더 힘들게 느껴

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반복되는 똑같은 일로 인해 지치기도 합니다. 상황이 바뀐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세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부르

심을 받아야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나름대로 나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며 집착하고 붙잡고

있었던 자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찾고 여기에 자신을 맡

기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내려다보고 계시며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을 맡겨 주시지

요. 그리고 일하는 과정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때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통해 역사하셨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고통은 열정(passion)의 원천(source)이요 확성기(megaphone)라고 합니다.(C S Lewis)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10)”




3. 초원의 빛


바람직한 인간들의 삶의 자세를 이러한 맥락으로 간파한 영국의 낭만시인 윌리암 워스워스(William Wordsworth,1770-1850)는 (기독교인 뿐 아니라) 만인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아래의 아름다운 시를 남기었습니다.



Splendor in the Grass / William Wordsworth

    from 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초원의 빛 / 윌리엄 워즈워스 (손현숙 譯)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영생불멸을 깨닫는 노래>에서

           

        한때 그처럼 찬란했던 광채가

        이제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한들 어떠랴

        초원의 빛, 꽃의 영광 어린 시간을

        그 어떤 것도 되불러 올 수 없다 한들 어떠랴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본원적인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

        마음을 달래주는 생각에서

        죽음  너머를 보는 신앙에서

        그리고 지혜로운 정신을 가져다주는 세월에서.


이詩를 통하여 우리가 많은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007.3.20.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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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할 길은 먼데 댓글[0]
묵상 (2006-10-19 오후 3:54:23) http://blog.somang.net/jookwanlee/2671

가야할 길은 먼데

                       -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與) 선생을 기리며



백마강 강변, 잔잔한 물결이 유유히 흐르는데

대재각(大哉閣) 높이 앉아, 도모하신 북벌계획(北伐計劃) 장엄하도다

사공아 노 저어라 큰 꿈을 향해, 백강상공(相公) 애끓는 나라사랑 이어 받으리



백마강 강변, 멀리 낙화암의 서글픈 자태 아득한데

병자호란 오욕(汚辱)의 날들 회한(悔恨)이 사무친다.

사공아 노 저어라 큰 꿈을 향해, 대재각(大哉閣) 암벽아래서 새 희망을 보네



백마강 강변, 물새도 울며 나는데

일모도원(日暮途遠)에 지통재심(至痛在心)이라! 눈물이 솟구친다.

사공아 노 저어라 큰 꿈을 향해, 효종임금 높은 뜻 잊힐 리  없네



2006.10.7. 이주관 씀



o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途遠) : 병자호란 후 淸國의 압력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난 이경여 선생이 부여 백마강변 대재각에서 효종임금에게 다시 북벌계획 추진에 관한 상소를 올리니. 효종임금이 백강상공에게 답한 글로 북벌계획을 상징하는 글로 쓰여 왔으며, 그 뜻은 “지극한 아픔이 가슴에 남았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아직도 멀구나!”이며, 북벌계획의 어려움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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