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이루는 사람
중국 周나라때 著書인 ‘육도삼략(六韜三略)’ 중 ‘六韜’ 제1편 제1장 문사(文師) 2.에 보면 낚시를 하는 강태공이 문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군자는 자신의 뜻이 이루어짐을 즐기고 소인은 눈앞에 일이 이루어짐을 즐기지요[君子樂得其志 小人樂得其事]. 제가 지금 낚시질을 하는 것은 그와 매우 비슷합니다. 낚시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군자가 됨을 이루고자 살다간 강태공이 이러할 진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주신 뜻과 목적을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우리 크리스쳔들 에게는 이보다 더 깊은 깨달음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를 가장 먼저 구하며 살고자 함일 것인데, 그것은 현실의 우리들의 삶에서는 무엇보다도 이미 주신 그리고 지금도 주시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에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Calling )에 따라서 살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1. 자족하는 삶,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
“내처지가 힘들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으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을 이겨낼 줄도 알고 부유함을 누릴 줄도 압니다.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넉넉할 때나 궁핍할 때나, 어떤 형편에 처하여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0-13)
이 말씀의 핵심은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입니다. 이는 우리들이 올라 가야할 신앙생활의 최상의 경지라고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하였습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바울은 인생을 살면서 경제문제를 터득한 자족의 원리를 삶의 모든 영역에 확대 적용했습니다. 돈이 많다 해서 우쭐하거나 돈이 적다해서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마음, 곧 평안하고 만족하는 비결이 있었습니다. 돈 가지고 꼭 울고 웃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특별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만이 이런 삶을 살도록 하실까요?
하나님은 바울처럼 우리도 자족하는 것을 배우기를 바라십니다. 바울은 너희들의 표본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빌립보서 3장 17절을 보면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너희들도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선교사들에게만 주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세상이 사람의 값을 얼마나 버느냐, 얼마나 좋은 집을 가졌느냐 등으로 판단하는 마당에 바울처럼 살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보면 불가능합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가 바울과 같은 인격의 수준을 요구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바울처럼 만족하는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바울과 같은 삶의 태도를 원하면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답기를 하나님은원하십니다. 즐기면 그저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 더 고상하고 높은 삶을 요구하십니다.
소유는 잠깐 있다 없어집니다. 넓고 편안한 집에 산다고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고급차, 은행에 돈 넣어둔 것, 값진 보석, 유명한 의상, 진정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내 뇌에 있는 혈관 하나만 뚫려도 다 놓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영혼의 만족과 평안이 근본적으로 요구됩니다. 복이 있는 자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따르는 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소유가 많고 적든지 간에 거기에 따라 좌우되는 마음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자족은 부(富)하냐 가난하냐에 좌우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파고의 부침에 흔들리지 않는 신비한 경지를 말합니다.
바울이 자족의 경지에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부족함이 없다는 인식을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었습니다. 능력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축복(Blessing)은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하시는데 있는 것이지 어떤 종류의 보상이 아닙니다(Peter J Gomes 목사 저 “Strength for the Journey"중에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10)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의 참 모습 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능력을 터득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끌리는 삶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브리서 11:26-27)
열정에 이끌리는 삶과 관성적인 삶은 정반대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이 사람을 끌고 간다는 점입니다. 모세는 자기 눈앞에서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죽
이는 실수를 했습니다. 미디안에서는 맡겨진 양떼들이 있기 때문에 매일 그 일을 한 것 뿐
입니다. 그렇게 일에 끌려가는 삶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인간적
으로는 성공의 맛을 본다고 해도 진정한 성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방선기 목사)
모세가 산 80년 동안의 삶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80세가 되는 해에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불러서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의 하나님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출 3:6,10).
물론 오랫동안 열정과 관성에 끌리는 삶을 살았던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지
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복했고 그 후 새로운 삶이 전개
되었습니다. 애굽의 파라오 앞에서도 만약 이전의 열정만으로 덤볐더라면 그 지루한 싸움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전처럼 관성에 끌리는 삶의 자세만으로는 애굽의 신들과 맞
서 싸우는 심각한 영적 전투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모세는 자신에게 사명
을 주신 하나님이 그 모든 과정에서 함께 하심을 분명히 체험했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해
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직장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만히 돌아보면 일이 점점 더 힘들게 느껴
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반복되는 똑같은 일로 인해 지치기도 합니다. 상황이 바뀐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세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부르
심을 받아야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나름대로 나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며 집착하고 붙잡고
있었던 자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찾고 여기에 자신을 맡
기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내려다보고 계시며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을 맡겨 주시지
요. 그리고 일하는 과정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때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통해 역사하셨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고통은 열정(passion)의 원천(source)이요 확성기(megaphone)라고 합니다.(C S Lewis)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10)”
3. 초원의 빛
바람직한 인간들의 삶의 자세를 이러한 맥락으로 간파한 영국의 낭만시인 윌리암 워스워스(William Wordsworth,1770-1850)는 (기독교인 뿐 아니라) 만인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아래의 아름다운 시를 남기었습니다.
Splendor in the Grass / William Wordsworth
from 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초원의 빛 / 윌리엄 워즈워스 (손현숙 譯)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영생불멸을 깨닫는 노래>에서
한때 그처럼 찬란했던 광채가
이제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한들 어떠랴
초원의 빛, 꽃의 영광 어린 시간을
그 어떤 것도 되불러 올 수 없다 한들 어떠랴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본원적인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
마음을 달래주는 생각에서
죽음 너머를 보는 신앙에서
그리고 지혜로운 정신을 가져다주는 세월에서.
이詩를 통하여 우리가 많은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007.3.20. 이 주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