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攝理)
o 서언(序言)
歲月本長,而忙者自促(세월본장,이망자자촉)
세월은 원래 길건만
마음 바쁜 사람이 스스로 짧다 한다.
天地本寬,而鄙者自隘(천지본관,이비자자애)
천지는 원래 끝없이 넓지만
속 좁은 사람이 스스로 좁다 한다.
風花雪月本閒,而勞攘者自冗(풍화설월본한,이노양자자용)
바람과 꽃, 눈과 달은 원래 한가롭지만
일에 바쁜 사람이 스스로 번거롭다 한다. - 채근담(菜根譚)중 에서 -
인간들은 그들의 경험과 지식과 사고력 등을 바탕으로 참된 진리와 삶의 지혜를 찾아 가고자 부단히 노력하여왔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이러한 노력 등은 위의 채근담에서 저자 홍자성의 고백처럼 참된 진리와 지혜에 대한 답을 찾지는 못하고 그들의 좁고 작은 세계에 갖쳐서 계속 헤매고만 있을 뿐입니다.
또한 자연현상도 하나님의 법, 섭리를 일부는 이야기를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는 아무런 메시지도 우리에게 주지 못합니다.
우리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양심은 하나님을 말하지만 이것이 주는 메시지도 단편적이며 미완성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명백하고 오류가 없는 지혜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만 존재합니다.[Billy Graham]
하나님을 모르던 옛사람들은 공자의 생각을 주로 담은 ‘大學“의 핵심사상으로 ”格物致知[참 지식은 실제의 物(사물, 정황)에 임하여야 하며, 이를 도외시한 지식은 참된 지식이 되지 않는다]“를 내세워 世上事에 임하여 이들을 다스려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름대로 성경의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들을 묵상하여 왔는데, 이들을 이 단계에서 아는 대로 정리하여봄으로 이세상의 일들에 대처하는 지침으로 삼아 예수님의 성품을 향한 새로운 전인격적인 성숙을 도모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승리를 맛보고자 합니다.
o 고통, 고난
“치유하시기 전에 먼저 상처를 주심도 은혜입니다(Grace must wound before it can heal. Flannery O'Conner)”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2가지형태의 태도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때때로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우리의 믿음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고생 끝에는 좋은 일이 온다고 믿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절은 곧 지나간다고 기대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 고난에 익숙하여져라. 성장을 위하여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은 필요하다. 이들은 하나님을 깊이 알고 깊이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같이하는 동료이다. 긴 역경의 시절에 대비하라. 인생에 별로 어려움을 모른다면 그것은 정상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고난의 때를 기대할 것은 아니지만 즐겨라”(Christian Writer John Fischer)
이들 두 견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의 견해에서 보면 고난은 우리 靈의 地圖에 생긴 상처(glitch of spiritual map), 견딜만한 폭풍, 주의하고 결행하면 고칠 수 있는 역기능 정도입니다. 믿는 자들 에게는 매우 안락하고 위험이 전혀 없는 정상의 상태(normal state)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비성경적(unbiblical)이고 역경도 우리노력으로 면할 수 있다는 일종의 인본주의적인 문화(culture)와 脈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투자와 산업들이 이런 종류의 문화 사업에 투자되고 있으며, 훌륭한 삶이 이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잘못된 환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후자의 견해는 고난과 고통은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일과의 한 부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대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영생을 기다리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잘될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세상의 시련(trials)들은 예수 안에서 성장하는 삶에서 중요한 부분(integral part)이 되며 따라서 시련이 우리에게 닥칠 때에는 이들을 반갑게 마지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야고보서1장2-3절).“ 인내는 우리가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성장하므로 만들어 놓은 잣대만큼만 세상을 잴 수 있으며, 살아 있어 힘든 만큼 깨침을 얻을 수가 있으므로 또한 행복합니다.
이러한 후자의 자세는 비관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실제적이며 가장 어려운 일들 속에서도 어떻게 기쁨을 찾는가의 문제입니다. 정상의 상태(normal state)가 된다는 것은 삶의 전투의 겨우 半을 수행한데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르게 서는 길은 오로지 환경을 넘어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그의 죽음을 나누므로 그의 부활의 힘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누리고자함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빌립보서3장10-11절)
고난의 언덕은 성도로 하여금 자기를 부정하게 만든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잡도록 만든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함이라 (빌립보서1;29)“ [죤 번연의 ‘천로역정’중에서]
o 예수님의 관심사 [God's Economy (Providence)]
예수님의 관심사, 예수님에게 문제가 되는 것(matters to Jesus Christ)을 우리가 깨닫고 실천하여 가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필요에 매우 민감하여지십니다(Christian writer John Fischer).
인간은 모두 스스로 만을 생각하는 것이 본성이므로 이것이 가능하다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이웃 사랑이니 다른 이에게 우선권(preference)을 주는 것을 배우는 것은 크리스쳔의 참다운 증표라고 할 것인데 이는 인간 본성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 이유는 이를 바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며 또 그것을 행함은 성령을 통하여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 관하여 말하기를 “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who genuinely cares for your welfare)가 이(디모데)밖에 네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what matters to Jesus Christ)을 구하지 아니하되(빌립보서 2장20-21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사고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그에 대한 생각에 몰입하여 살아갈 때에 그를 경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의 친구처럼 그를 알게 되며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여기에는 성령님이 임재하시어서 당신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진리에 이끌리어가게 합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 모두가 예수님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고통과 상처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슬픔의 사람(a man of sorrow)이요 비탄과 통하는 사람(acquainted with grief)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 주변 사람들의 고통이 아니라면 이러한 비탄과 슬픔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올 데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주변사람들의 비탄과 슬픔을 지고 갔습니다. 한 여인이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예수님에게 손을 대었을 때 예수님이 군중들에 밀려 그 여인을 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뜨거운 힘(the compassionate Power)이 예수님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그는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주변 인물들의 필요에 매우 민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다가 가십시오. 예수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도록 그에게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들로 인하여 여러분들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발견되는 바대로 즉시 행동에 옮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을 움직인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o 지체(하나님의 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대기실에서 답이나 변화, 해결책, 기적 같은 일을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신다면 하나님이 알고계시는 것이 최상의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보다도 하나님은 결코 늦지 아니하시며 서두르지도 아니하시며 가장 정확한 때에 답을 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속에서 지연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최선의 방책은 단순하게 하나님이 최상의 것으로 행하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하박국 2장3절의 다음 말씀은 참으로 큰 격려가 됩니다. “이 묵시(vision)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인내하고 기다립시다. 단 하루도 더 늦어지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지체되는 것은 거부됨을 의미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방법은 항상 우리들의 방법보다 뛰어납니다. 하나님의 때는 완벽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깊은 물속에 체류하는 기간을 연장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이 역경의 깊은 물속에 17년간이나 체류하였습니다. 그의 형제들로부터 버림받음, 파라오(Pharaoh)의 노예가 됨, 그리고 긴 감옥생활은 그의 깊은 고난의 세월 이었는데, 이 시련의 세월을 통하여 요셉은 많은 꿈을 꾸게 되고, 훗날 들어낼 그의 많은 재능과 지혜를 부여받게 됩니다. 요셉의 이 시련의 깊은 고난의 세월이야말로 그가 이전에는 꿈꾸지 못했던 위대한 과업들의 수행을 위한 준비기간 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시대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확연하게 하나님의 행사(God's Works)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30세의 요셉이 더 큰 힘을 내도록 그를 위태로운 형편으로 몰고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그 어떤 난관을 만나도 이겨낼 수 있도록 그를 준비시키고 훈련하는 깊은 고난 속을 지나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요셉처럼 어린나이에 에굽 총리로서의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되면 그로 인하여 유발되는 그의 자존심(Pride) 등이 그가 하나님의 종임을 스스로 망각하게하고 나중에는 그를 삼켜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요셉에게 있어 하나님의 때는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O S Hillman 목사)
o 실패
恩裡(은리)에 由來生害(유래생해)하나니
故(고)로 快意時(쾌의시)에 須早回頭(수조회두)하고
敗後(패후)에 或反成功(혹반성공)하나니
故(고)로 佛心處(불심처)에 莫便放手(막변방수)하라
恩裡(은리) : 은총을 받는 중에.
由래(유래) : 원래, 본래, 본시.
生害(생해) : 재앙이 싹틈. 재앙이 발생함.
快意時(쾌의시) : 만족스러울 때. 일이 뜻대로 잘 되어 의기양양할 때
回頭(회두):머리를 돌려 주변을 살핌
佛心(불심) :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유쾌하지 못한 것
便(변): 곧.
放手(방수) : 손을 놓음, 포기함.
원래 은총 속에서 재앙은 싹트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에 흡족할 때 모름지기 빨리 머리를 돌려 살펴야 한다.
실패 후에 도리어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 그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 菜根譚 중에서 -
우리들은 보통 실패를 부정적인 경험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실패로부터 배우며 그것을 유익이 되도록 활용합니다. 실패를 디딤돌 삼아 일어나 오히려 성장하여 갑니다.(Rick Warren 목사)
어느 누가 실패를 한다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 계속 살아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고도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2절에는 “우리 모두는 다양한 형태로 좌절을 경험한다.”고 했는데 여기에 누구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어는 누구도 성공하기를 바라며, 실패를 피하고자 남을 기만하기도하고 훔치기도 하는 등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기도 합니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조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속칭 실패는 숙명적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속칭 말하는 실패는 세상의 끝이 아니며 그로 인하여 죽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실패는 꿈을 성취하는데 실패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꿈을 갖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진정한 실패는 우리의 목표를 세웠는데 그것을 잃은 것이 아니며, 목표를 갖지 못하는 것이고, 진정한 실패는 삶의 현장에서 넘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다시 일어서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실패하지 않은 것입니다.
실패는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가 원하시는 모습의 사람으로 가다듬는 가장 주요한 수단에는 우리에게 실패를 맛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실패를 통하여 우리의 인격(character)을 수양시키는 것이지요.(Rick Warren 목사)
우리의 성공은 이를 우리의 재능으로 인한 것으로 돌리는 경향이 농후하여 이로 인하여 배우는 경우는 드물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실패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며, 성공을 향한 디딤돌로 삼습니다. 실패를 통하여 진정한 성공의 원리,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터득하여 갑니다. 시편119장71절의 말씀을 “나의 지난 실패와 고난은 최고의 복(福)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생 교과서인 성경말씀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에 있을 때에 성경을 펴고 진리와 지침과 위안과 격려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성경말씀이 참된 삶의 지침서임을 깨닫게 됩니다.”라고 의역된 버전(version)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decrees)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저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수많은 실패의 고비 고비 마다 예수님의 성품인 겸손과 온유를 더 배우게 되고 진리이신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돌보심의 섭리를 느끼게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도 하고 성경에는 아침안개 같다고도 묘사되었는데 우리는 이세상의 순례자로 영원의 세계인 천국의 소망을 확실히 가지고 가야하며 아울러 지옥의 참상도 더 배우고 널리 전하야 할 것입니다. John Bunyan이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을 펴낸 것처럼 말입니다. 2차 대전의 영웅 영국수상 Winston Churchill은 지옥에 대한 선포가 부족한 것이 당시 영국사회의 모든 사회악과 부패의 뿌리로 보았습니다.
실패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Grace)가 발견됩니다.
여러분이 실패할 때에 하나님은 놀라지 아니하시며, 오히려 이를 미리알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실패하여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계속 사랑하시며 그 사랑을 그치지 아니하시니 이것이 은혜입니다.
시편 103장14절에 기록되기를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졌고 우리가 티끌(dust)임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취약함(frailties)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대하지 아니하시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패하여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그치지 아니하십니다.”
실패를 딛고 재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를 이루는 것을 돕고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실패를 하였는지는 관심이 없으시고 그것이 우리 삶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의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고 성장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우리 삶을 통한 목표가 있으시며 이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를 마련하고 계십니다.
o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인 기쁨 (Confrontation with God)
“그들로 의의 나무(oaks of righteousness)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the display of His splendor)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이사야 61장3b절
저는 이번에 저에게 닥친 참담한 일들로 인하여 절망에 쌓여 깊은 숲속에서 홀로 하나님에 맞서며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이것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온 저에게 베푸시는 길입니까? 저는 긴 세월을 참고 참아왔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참담하다니요. 저는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만 큰소리로 울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숲속 나무들 가운데 깊이 앉아 화도 나고 좌절감도 느꼈고 결국은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지 사뭇 의심스러웠습니다. 그가 살아 계시다면 나의 믿음과 순종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계신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나의 감정을 다스리려고 여러 시간을 앉아 나의 마음과의 투쟁을 하였습니다.
긴 시간 끝에도 결국 답이 없고 나는 하나님이 답하지 아니하신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그 자리를 뜨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새삼 제가 의식한 것은 나는 한 참나무의 그루터기 부분이 부러져나간 자리에 않아 있었다는 것이고 또 그 부러진 나무는 다른 거대한 참나무의 아래 부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 나의 마음에는 조용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 오는 네가 않아 있는 그 부러진 참나무와 같이 너는 깨어진 인간이다. 그러나 너의 이 깨어짐(brokenness)은 네가 보는 이 거대한 참나무와 같이 성장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다.”
나의 내적인 투쟁 속에서 여러 해가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때로부터 그의 말씀에 충실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고통과 실망을 그의 은혜를 통하여서만이 주실 수 있는 내적인 기쁨(inner Joy)으로 대체하시기 시작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셨다고 느끼면서 삶의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하여온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바르고 정직한 관계를 우리가 유지하여 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아무리 어려운 대화도 거리낌 없이 하고자 하시는 자애로운 아버지 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서 이든지 무조건 여건이나 사물 등을 변화시키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신뢰하고 그 안에 거하여 나아갈 때에는 그의 목적은 이루어지고 우리에게는 참 평안이 찾아옵니다. 오늘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의 행사를 믿고 나아갑시다.
o 성숙한 은혜의 모습(Graduate level Grace, Blessing those who curse you)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distress)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 사무엘 하 16장 11-12절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하여 왕도를 버리고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을 때 적의 숫자가 날로 늘어나는 어려운 상황인데 시므이(Shimei)라는 자는 다윗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돌을 던지며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왕을 저주하고 조롱하는 것은 당시 법으로 금한 것으로 다윗은 그의 장수들의 건의를 받아 시므이의 목을 벨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들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자들에 대한 사울과 다윗의 다른 점을 보게 됩니다. 사울은 하나님과 수평의 관계로 행동하는 모습이나 다윗은 하나님을 수직적인 관계로 받드는 관계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그의 마음을 쫓는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살인자 이었으며, 간음한 자 이었고 그의 생애 여러 분야에서 실패한 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다른 지도자들과 다른 점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며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뉘우치고 회개하는 심령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누군가와의 부끄러운 소원하게 된 관계(the estranged relationship)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 욕스러운 일(insult)로 인하여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함 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때에 이에 대한 보복을 여러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까요? 제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 하에 이러한 경험들로부터 배우게 된 것은 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여 결말을 내고자하는 유혹의 덧으로부터 벋어나는 자유 함을 찾게 된 데에 있습니다. 더 이상 이것은 저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이러한 욕(insult)은 우리의 인격을 성숙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따르는 성인들(Saints)의 인격을 최고조로 기르는데 사용하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A W Tozer는 “하나님이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지 않고(hurt him deeply) 계시는 한 과연 하나님이 그를 크게 복 주실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하였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 인격이 가장 깊이 성숙할 수 있도록 때때로 이러한 갈등의 폭풍우를 불어 대십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힘만으로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성숙된 수준의 은혜(graduate-level grace)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학습과정에 참여하여 시험을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시험에 통과 하신다면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여 올라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험들을 통하여 여러분을 하나님나라에서 더 크게 사용하실 준비를 하시고 계신 것이지요. 여러분은 우선 이 시험부터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o 겸손 - 넘어짐을 막음
겸손의 길은 골짜기이며 비탈길로 내려가는 길인데, 이것은 가난이 될 수도 있고, 질병이 될 수도 있으며, 이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들을 겸손의 골짜기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면 반드시 넘어진다는 것을 겸손의 골짜기를 통해서 먼저 배우게 하시고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고할 때 넘어지는 것을 막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세상으로 나가기 직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점검하시고 준비시키는 길목이 겸손의 골짜기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겸손의 골짜기로 내려가게 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심령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게 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죽어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인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이때 ‘시므이’라는 자가 나와서 다윗을 향해 저주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아비새’가 가서 ‘시므이’를 죽이려 했을 때 다윗은 만류하면서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고백은 겸손의 골짜기로 내려가면서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완전히 굴복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겸손의 골짜기를 내려가는 것은 죄와 싸우며 자신에게 있는 믿음의 원리를 삶 가운데로 나타나게 하는 일입니다. (John Bunyan의 ‘천로역정’ 중에서)
)
o 인간자유의지, 악(evil)
의인(righteous man)의 고난(the suffering)은 곧바로 하나님의 섭리라는 주제와 만나게 됩니다. John Calvin은 하나님 섭리의 원리(the doctrine)에 대하여 오랫동안 깊은 연구를 하였으며 남다른 기여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에 대하여 연구 발표하는 것은 중세시대 신학의 전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비록 인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면에서는 환영을 받기도하지만, 인간들의 자유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한다는 면에서 우리를 주저하게 만드는 장애물(Stumbling Block)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철학적인 신학자들(philosophical theologians)의 주요 관심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서로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John Calvin은 이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20:32에 대한 그의 주석(comments)에서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모든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도움을 받는다고 하지만,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가 유념하여야 할 것은 이것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하 감옥에 감금되고 추방되어 적으로부터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간에 화해를 도모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유일한 적절한 질문은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이때 이들이 알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고, 어떠한 고난과 죽음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들에게 다가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는 자유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위로(慰勞) 받는 것이 아니며, 칼빈이 잊지 말도록 강조한 그들 아버지의 주권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인하여 위로 받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칼빈은 인간의 사악함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 문제를 다루면서,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경우에서 보여준 것 같은 인간들의 죄와 사탄의 교묘한 책동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는 어떠한 악(evil)도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서는 허용되지 않음을 강조하였으며, 하나님은 이 악도 그의 영광을 위하여 또 사람들에 유익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또 비록 우리 인간들은 죄인일지라도, 우리들의 사악함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것과 또 우리 스스로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하여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성경말씀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주권이 꽃피우도록 하는 그의 통찰력을 발휘 하였으며, 또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고난 받는 사람들 중에서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아니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쓰여 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들 저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존재의 무수한 변화와 변천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는 희망을 갖고 계시고, 이를 위하여 사람들의 모든 일들을 관장, 관리하심을 선언하였습니다.
o 교회의 하나 됨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아래 우리가 하나가 됨이니, 우리 한국교회는 화해, 협력, 조화 등을 통하여 하나가 되어가도록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양극화의 문제입니다. 나만이 옳고 내파만이 절대로 옳다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주장에서 양극화는 비롯되는데, 교계의 지도자들이 오래전부터 연합과 일치를 주장하여오지만 보·혁의 갈등은 해소되기 보다는 심화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김명혁 목사)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지녔던 순수한 신앙과 포용적인 사랑의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면 교회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동정과 사랑을 지니게 됩니다. 특히 성 프랜시스(St. Francis)의 섬김의 신앙과 사랑의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고 배우며, 손양원 목사 등 신앙의 선배들의 순수한 신앙과 희생적인 사랑의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는 가운데, 교회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와 동정과 사랑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지역주의는 물론 인종주의도 민족주의도 국가주의도 넘어서서 모두를 품고 모두를 사랑하며 모두를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진리와 성결을 위하여 분리의 타당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장로교회가 100여개 이상으로 나뉘어져 대립하고 경쟁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이 칭찬하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파의 죄가 배교의 죄와 같다는 견해를 들으면서 더욱 당혹하여집니다.
대부분의 경우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보다는 정치 사회적 이슈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자기 개인의 입장, 지위, 명예 등에 집착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에 기인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기도 중에 하나가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이며, 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고 힘써 하나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o 주권자 하나님
* 하나님 세상
성자 어거스틴(St. Augustine)은 그의 고백록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당하는 수고와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인간이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이미 논리적으로 불가능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수고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성서와 기독교 P143, 연세대 출판부)” 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 삶의 근원이시며 해결자가 되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20세기의 탁월한 설교자인 영국의 마틴 로이드 죤스(Dr. Martin Lloyd Jones)는 말하기를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데서 기인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이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사람들이 ‘무익한 반항’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맞서 싸운다면 사람은 언제나 패배와 재난과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화목하여 그분의 복(福)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생기는 것입니다”라고 하여(그의 저서 ‘십자가’와 ‘진정한 기독교’ 중에서), 동일한 취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됨(complete Unity)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도록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내가(예수님이)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함이로소이다.”(요한복음 17:23)
옛날 격언에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United we stand, divided we fall)"는 말이 있는데 이는 단지 전쟁터에서나 사회현장에서의 구호만이 아닙니다. 이는 많은 영혼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영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O S Hillman 목사).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복(福)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 안에 든든히 세우시고 기업(Inheritance)을 허락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선(善,goodness)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
*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
내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되(예레미야 25: 17)
로마제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영원한 제국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만큼 흥왕했고 발전했고 강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로 도망온 후,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숨어 다녀야 했고 잡히면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서 로마제국은 기독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영원하다고 스스로 자랑하던 로마제국은 결국 야만인들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벨론도 그렇게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하나님을 변함없이 섬겼습니다. 바벨론은 다른 나라에 의해 망했고 유대인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명예롭게 사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당하고 수모를 당한다 해도 실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그 터전은 반드시 예수님을 믿는 삶으로 넘쳐나는 신앙인들의 터전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의 지표는 종국에는 항상 승리합니다. 역사는 기독교인의 삶이 지배합니다. 역사는 기독교인의 문화창조에 의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리차드 니버는 그리스도를 ‘문화의 변혁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야말로 앞으로 다가오는 세상의 삶일 것입니다.
2005년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우리나라 3대 종교 중 개신교만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할 우리들이 제대로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인도에서는 돈벌이를 위해 사지가 멀쩡한 거지들의 팔과 다리를 절단하는 갱 조직의 행태가 드러나 큰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문화는 물질을 우선시하여 이 세상을 점점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세상문화에 맞서서 어렵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고 가진 것을 나눔으로, 생명을 살리는 생명문화를 창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그럴싸한 삶의 방법을 제시할지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 2)”고 권면했습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 명예롭게 사는 사람, 잘 나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법으로 살지 않으면 언젠가는 멸망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o 맺으면서
무궁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섭리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깨달아가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깊이 사랑하여 가고자합니다. 이 길만이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과 생명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풀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6:24-26)”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2007.4.13. 이 주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