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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맛나는 직장생활 댓글[0]
묵상 (2007-05-18 오후 2:02:26) http://blog.somang.net/jookwanlee/2828

살맛나는 직장생활



우리는 직장생활을 통하여 의식주의 기본을 해결하는 방책을 찾으나, 더 본질적으로는 직장에서의 우리의 일들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Calling)이라는 견해에 동감합니다.


우리들의 생활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이 투자되는 직장에서의 생활은, 각자의 삶으로 보나 회사의 궁극적인 발전으로 보나,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참된 행복추구를 지향하고 가야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자체가 만남의 연속이듯이 직장생활의 가장 주요한 과제는 사람들 과 만남이 되고 만나는 이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 입니다.


살맛나는 직장생활은 이렇듯이 우리 삶에 가장 목표인 행복추구를 향한 노력에 그 지향점을 두고 가장 주요한 과제인 만남들을 잘 이루어 나아가면 이루어지리라 봅니다.



1. 참된 행복의 길로


행복은 "삶에서 느껴지는 주관적인 평온함"이라고 정의 되며, 이 평온함은 "속박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에서오는 편안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행복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노력하여 감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며, 행복한 삶이 되려면 진리를 찾아 그 안에서 거(居)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서양철학의 출발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성경귀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할 것인데, 이는 헌신적인 사랑이 그 근간이 되며, 동양철학은 "덕(德)이 너를 아름답게 하리라"는 장자의 말에서 그 단초(端初)를 발견 할 수가 있겠습니다.


중국 송(宋)대 왕안석(王安石)의 시 “등비래봉(登飛來峯)” 중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구절이 있어 마치 눈에는 안 보이는 진리의 세계,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지향하며 쓴 듯합니다.


불외부운차망안 지연신재최고층(不畏浮雲遮望眼 只緣身在最高層)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두렵지 않은 것은 지금 내가 가장 높은 곳에 서있기 때문이라네


이 구절을 저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죄 많고 부족한 눈으로는 참 진리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두렵지 않은 것은 이를 위하여 끝까지 정진(精進)하여  갈 때에 끝내 깨달음에 이르러 온전한 진리를 찾고 그 안에서 죽음의 두려움도 넘어서는 참 행복을 얻을 것임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봅니다.


참된 행복은 우리가 추구하고 정진하여 갈 때에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2. 좋은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자체가 만남의 연속이듯이 직장생활의 가장 주요한 요소는  사람들 간의 만남이 되고 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루어 가는가 하는 것일 것입니다.


직장 안에서의 만남은 무엇보다도 서로가 친구 같은 만남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 실존적 교제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실존적 교제'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 뜻은 '순수한 혼과 혼이 아무런 이권이나 거래관계 없이 깨끗하고 투명하게 만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온갖 만남이 있는데 그런 만남 속에서 우리는 성숙하고 사람다워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릇된 만남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잘못된 만남의 핵심은 서로 욕심을 품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만남입니다.(友情도 이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만남에서는 서로가 상처 받게 되고 불안하게 되며 지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런 요구나 이권도 없이 마냥 순수한 혼과 혼의 만남은 서로를 치유하여주고 행복하게 이끌어 줍니다.



2). 우정(Friendship)에 대하여



(1) 유교의 우정론


맹자는 말하기를 '교우는 나이가 연장인 것과 신분이 귀하다는 것과  유력한 형제가 있다는 것을 끼고 사귀지 않는 것이다. 벗을 사귄다는 것은 그의 덕(德)을 사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옆에 끼고 사귀면 안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맹자 만장 하 3장중에서)


공자는 말하기를 '멀리 있는 벗이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하여 교우의 즐거움을 말하였고(논어 학이 1장), 또 이르기를 '이로운 교우가 셋이며 해로운 교우가 셋이니 솔직한 사람 진실한 사람 박식한 사람과 교제하는 것은 이로운 교우이며, 관행(慣行)에 젖은 사람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 관언(慣言)에 젖은 사람과 교우하는 것은 해로운 교우이다.'라고도 하였습니다.'(논어 게씨 4장)


(2) 성경적인 우정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벗을 '지기'라고 불러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 나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죽마고우(竹馬故友) 라고도 하는데, 이런 친구를 갖는 것은 인생의 행복요소중 하나일 것입니다.(앞에 소개한 C S Lewis나 공자의 말과 같이)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과 같이 살아오시다가 마지막에 '다락방감화'라고도 하는 마지막 유훈 같은 교훈을 남기셨습니다(요한복음 13-16장). 그중에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의 종과 같은 존재가 아니며 내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복음 15:13-17) 여기에 우정이 형성 되는 단계는 다음과 같지요.


첫째로 우정은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몇 명만이 나의 친구가 되는 것이며, 하여 세르반테스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를 원한다면 그 친구를 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15:16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그리하여 친구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인생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참된 우정으로 갈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고' 친구로 선택하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그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하여 친구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며 그 제자들의 삶이 열매로 풍성하도록 하고자 친구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의 삶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한 선택, 이것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우정을 형성하려고 할 때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내가 저 사람들의 인생 속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하여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되겠다는 것이지요. 마치 하버드대교수 이었던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이 토론토 근처 '데이브 레이크'라는 작은 장애인 공동체에 그 장애인들과 친구로 더불어 살고자 들어간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로 우정은 나눔으로만 자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 깊은 내면을 열어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비밀을 나눌 수 있는 나눔이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풍토는 외식 지향적인 것이 많아 여기에 약해 보입니다.


예수님이 1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여 이제는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다 알게 하였으므로 너희를 친구로 삼겠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비밀을 나눌 수 있으려면 신뢰라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서로 믿을 수 있어 내면의 비밀이 비판되거나 오용되거나 하지 아니하고 이해된다는 신뢰가 형성 될 때에 비밀들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친구가 되고 치유가 일어나고 건강한 삶이 형성됩니다.


한 히틀러 전기 작가에 의하면 히틀러의 불행의 단초는 나누는 친구가 없었던 불행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유일한 친구였던 앨버트 스피어는 말하기를 "히틀러는 환상가이었고 자신의 카리스마에만 몰두 하였을 뿐이었다. 그는 우정에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심지어 함께 체리열매를 먹고 즐거워하는 것조차 그는 거부하였다. 우리 모두는 단지 그의 거대한 에고(Ego)의 투사체에 불과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셋째로 우정은 순종함으로서 강화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차에 순종함으로 그 우정을 강화 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믿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따라 갈 수가 있습니다. 함께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순종의 참 의미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1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의 명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분에게 제자들이 순종함으로써 그분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설득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순종이란 희랍어 단어는 본래 듣는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즉 순종은 당신을 존중한다는 메세지로 친구는 내 이야기에 귀를 경청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정은 희생으로 완성 된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우정의 교류를 마침내 아가페적 사랑의 단계까지 승화 시킬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하지요.


1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친구인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시어 우정을 완성하시고 우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었습니다.


(3) 소망스러운 우정


우리들의 우정은 이를 시험받는 시기에 이르게 됩니다. 고난을 만났을 때 내 곁을 떠나가는 벗이 있지요. 이는 친구라고 할 수 없으며 벌써 떠나 보냈어야할 친구들 인지 모릅니다. 영국속담에 "순경은 친구를 만들지만 역경은 우정을 시험 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는 이러한 친구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 맡기며 마음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가 가라 앉을 때 구명대를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에 "예보다도 "아니요“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어 진실로 충언해주는 그 한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3. 살맛나는 직장으로


앞에서 살펴봄으로, 우리들이 벗과의 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의 덕(德)을 사귀며 서로  신뢰할 수 있어야하고 서로 순종하는 관계로 까지 나아가야 참된 우정을 갖게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강오륜'에도 '붕우유신'이라고 하여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 서로 속이는 일이 없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직장생활에서의 모든 만남을 이렇게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순종’하는 관계로 까지 이루어 나감을 기본으로 한다면, 우리는 참 행복을 찾고 살맛나는 직장생활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2007. 5. 18.  이 주 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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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쳔의 음악 댓글[0]
묵상 (2007-05-14 오전 11:38:50) http://blog.somang.net/jookwanlee/2823


   크리스쳔의 음악



음악은 세계만민의 공통언어로 언어의 장벽과 지식 차이, 경험 차이 등의 장벽을 뛰어넘는 공통의 메시지 전달능력과 마음속 깊숙한 곳에 강한 호소력을 갖습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이루지 못하는 하나님말씀과 특별한 감화를 음악은 전달해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음악으로 찬양을 드릴 때에는, 신령으로 기도드릴 때처럼,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두려워하는 마음을 몰아내듯이 또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주듯이, 무엇인가 적극적이고 유익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여 주십니다.



1. 공자의 음악관


하나님과 내세에 대하여도 알지를 못한다고 하였던 성인 공자조차는 음악을 주요한 덕목인 예(禮)와 더불어 천지조화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이제 성인 공자의 음악에 대한 견해를 살펴봅니다.



"위대한 음악은 천지와 같은 조화를 이루고, 위대한 예는 천지와 같은 절조를 이룬다. “   대악여천지동화 대예여천지동절 (大樂與天地同和 大禮與天地同節)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이며 예란 천지의 질서이다.”

 악자천지지화야 예자천지지서야(樂者天地之和也 禮者天地之序也)  


공자는 음악을 예와 동일한 德으로 천지의 조화로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공자는 음악을 인간완성의 마지막단계인 문채(文彩: 아름다운 광채)로 보았습니다.


제자 자로가 공자에게 인간완성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는 대답하기를 ‘장무중과 같은 지혜와, 공작과 같은 무욕(無慾)과, 변장자와 같은 용기와, 염구와 같은 재주를 갖춘데 에다, 禮와 樂의 문채를 더 보태면 인간완성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예로써 사람들의 겉모양과 행동을 다스리고, 음악으로써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을 다스리려 했습니다.


이러한 공자의 음악관은 “악경(樂經)”에 나오는 다음의 기록으로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음악은 안으로부터 나오고 예는 밖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음악은 안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고요하며 예는 밖에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에 문채를 이룬다. 위대한 음악은 평이하고, 위대한 예는 반드시 간결하다. 음악이 주효(奏效)하면 원망이 없게 되고 예가 주효하면 다투지 않게 된다. 서로 절하고 양보하면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예와 악의 효과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공자도 음란한 음악이나 쾌락적인 가무에 대하여는 경계를 하였습니다. [최인호 저 유림 2권 36, 37쪽 중에서]




2. 크리스쳔의  음악


위와 같은 공자의 깊이 있은 견해도 있지마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보통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음악을 리크리에이션(recreation) 활동의 일환, 취미활동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앙망하는 우리 크리스쳔들은 음악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과 경배의 한 수단으로 생각하며, 나아가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감화시키고 다듬어가는 주요한 방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나아가 듣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와 감동을 전하는 주요한 복음전도의 수단이 됩니다. 설교가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 말씀의 전달효과도 보고 있습니다.



인류역사에 위대한 음악작품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가 많이 담겨있어 가장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헨델의 ‘메시아’, 하이든의 ‘천지창조’, 모짜르트의 ‘레퀴엠’, 베토벤의 ‘장엄 미사곡’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우리들은 이들을 연주하고 감상함으로 큰 기쁨과 감동을 누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배우고 순화된 정서로 이웃사랑으로 나아감갑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늘 찬송하고 성가대 같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모임에 많이 참여 하여감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성도들 간에 친교하고 이웃에 전도하여 갑니다.



또 다윗이 고난 중에도 아래와 같이 외치며 힘을 얻고 주님 안에 축복과 승리를 향하여 나아갔듯이, 우리 크리스쳔 들도 찬양하고 노래함으로 인생길에 필연적으로 닥치는 고난과 역경들을 이기는 힘을  공급받아 승리의 길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이여, 내가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심령으로(with all my soul)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Awake harp and lyre!)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I will awake the dawn)”  ~ 시편 108장 1절


음악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크신 축복입니다.             


[2007. 5. 11.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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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한계와 하나님 댓글[0]
묵상 (2007-04-25 오후 1:20:18) http://blog.somang.net/jookwanlee/2814

哲學의 한계와 하나님



성경의 말씀을 접하여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기 전에 저는 나름대로는 진리를 알아보겠다는 가상(嘉尙)한 생각으로 여러 가지 생각과 독서 등을 하여오면서 그 결과로 安分樂道(스스로의 분수를 알아 處身하며 道를 터득하여 나아감을 즐거움으로 삼는다)라는 말을 매우 타당한 삶의 지표로 여기고 이를 座右銘처럼 여기고 지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동양의 철학, 사상들이 자연현상의 원리를 도(道)로 여기는 경우가 많고 또 그것이 가장 본질적이며 크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 데에 크게 기인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노자의 도덕경, 공자의 논어, 자사의 중용과 대학 등, 특히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실제 사물들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함) 개념에서 도출, 형성하여 얻은 생각 이었는데, 특히 다음의 글에서는 분수(分數)라는 말을 도입하였습니다.


[조선조 효종 11년 영중추부사 백강 이경여는 병자호란으로 인한 재난극복을 위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상차문(上箚文)에서 이르기를  ”天地간의 인물에는 저마다의 분한(分恨)이 있으니 분한 밖에 지나치게 바라서는 아니 된다. 마구 써서 없애는 것이 많고 보면 하늘에 죄를 얻는다고 하면서, 또 대개 사치를 다하고 탐욕을 다하는 것은 실로 福을 꾀하는 방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조선왕조실록에서)]


그렇지만 이로써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는 없던 중에, 성경을 계속 공부하여 가며 예수님을 점점 깊이 만나고 난 이후에는, 우리 크리스쳔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언제나 평안하고 기뻐하며 만족할 수 있는 秘訣, 영혼의 안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 철학적 접근의 한계


 긴 세월 동안의 사색으로 安分樂道를 추구하는 철학적 자세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나아감으로 종국에는 그 인간적 사유(思惟)에 기인함으로 인한 한계와 모호함에 이르고 말아 자가당착(自家撞着)으로 귀결되며 스스로 깊은 내면으로부터의 기쁨을 찾기는 어려운데 반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항상 평안하고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놀라운 초인간적 境地, 영혼의 안식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간들의 속성인 끝없는 탐심(貪心)을 극복하고 우리 크리스쳔들이 도달할 수 있는 그 어떤 형편에서도 自足하는 비결 즉 최상의 신앙생활의 경지라고 합니다.


영국의 크리스쳔 작가 C S Lewis는 철학이란 우리 삶에 생동감(Survival Power)을 불어 넣는 한 요소에 불과 하다고 하여 필수불가결의 요인으로는 보지 아니하며, 우리나라의 철학교수 김용옥씨도 철학에는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그 시대 그 지역의 통념(通念)을 반영할 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법철학자 황산덕교수도 법이 추구해야할 근본적 가치, 즉 진리에 관한 철학적 접근은 긴 세월 인류역사상 수없이 많았으나, 이들의 그 어떤 철학적 접근으로도 아직 진리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하였으므로 이는 후배 법학도들의 과제라고 하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철학을 전공하고 교수가 될 예정이었던 김진홍 목사도 철학의 세계를 버리고 긴 방황 끝에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  하나님


2-1“생수의 근원” 하나님 

“내 백성이 두 가지 악(two sins)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the spring of living water)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 이니라 (예레미야 2: 13)”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소리를 알아듣는 것은 사실 엄청난 잡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아’라는 음성은, 기준이 되는 어떤 소리와 비교할 때, 인식이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비슷한 예로, ‘3’을 떠올릴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2보다 크고 4보다 작다’는 비교를 통해 ‘3’의 의미를 인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를 추적하면 거기에는 ‘1’과 ‘0’이라는 절대적인 비교숫자가 있게 됩니다. 소리인식도 이와 같아서 우리가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 주변에 있는 엄청난 잡음과 비교함으로 특정한 소리를 구별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잡음이 하나도 없이 완전 방음된 장소에서는 큰소리로 ‘아!’라고 외쳐도,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현재 듣고 있는 소리를 비교해볼 기반적인 소리가 없기 때문인 것이지요.


인간은 그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무엇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 키가 크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를 키가 작은 어떤 사람과 비교하고 거기에 의존해 키가 크다는 정의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기준이 없이 상대적 기준만 있다면, 인간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해도 그 앎은 지극히 가변적인 불안정한 지식이 될 뿐입니다. 즉 ‘1’과 ‘0’을 모르는 사람이 ‘3’을 ‘2’와 ‘4’와 비교해서 알고 있어도, 그 지식은 마치 다리 없이 공중에 놓여진 책상과 같은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13절). 생수의 근원이 되는 주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물을 담아두려고, 새는 웅덩이를 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스스로를 생수의 근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주님은 우리 인식의 절대적인 원천’이란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이 근원을 상실하면 결국 물을 담지 못하는 웅덩이처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죄는 사실 첫 번째 죄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신을 가정하지 않고서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근원을 돌아보지 않고 어떻게 우리 자신을 논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울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듯이, 하나님을 통해서만 우리의 현실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물이 고이지 않는 웅덩이’를 버리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을 찾는 길입니다.



 2-2. 하나님의 뜻대로 삶


로마제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영원한 제국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만큼 흥왕했고 발전했고 강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로 도망온 후,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숨어 다녀야 했고 잡히면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서 로마제국은 기독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영원하다고 스스로 자랑하던 로마제국은 결국 야만인들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 옛날 바벨론도 매우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하나님을 변함없이 섬겼습니다. 바벨론은 다른 나라에 의해 망했고 유대인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명예롭게 사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당하고 수모를 당한다 해도 실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그 터전은 반드시 예수님을 믿는 삶으로 넘쳐나는 신앙인들의 터전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의 지표는 종국에는 항상 승리합니다. 역사는 기독교인의 삶이 지배합니다. 역사는 기독교인의 문화창조에 의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리차드 니버’는 그리스도를 ‘문화의 변혁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인도에서는 돈벌이를 위해 사지가 멀쩡한 거지들의 팔과 다리를 절단하는 갱 조직의 행태가 드러나 큰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문화는 물질을 우선시하여 이 세상을 점점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세상문화에 맞서서 어렵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고 가진 것을 나눔으로, 생명을 살리는 생명문화를 창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그럴싸한 삶의 방법을 제시할지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법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 2)”고 권면했습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 명예롭게 사는 사람, 잘 나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법으로 살지 않으면 언젠가는 멸망하고 맙니다.

2-3.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삶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 10-13 에서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인생을 살면서 경제문제에서 터득한 자족의 원리를 삶의 모든 영역에 확대 적용 하였습니다. 언제나 평안하고 만족하는 비결을 능력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터득하였던 것입니다.(옥한음 목사)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우리가 세상의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여감이 저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또 빌립보서 3:17 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고하여 우리도 바울처럼 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고 계심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높고 고상(高尙)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인생파고에 흔들리지 않는 신비한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바울이 자족의 경지에 이른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능력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어떠한 환경에도 부족함이 없다는 인식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10)


참으로 경탄할만한 하나님자녀의 진면목으로, 그 어떠한 다른 수양이나 정진 등으로는 이를 수 없는 진리 안에 참 기쁨의 세계가 아닌지요?




3. 우리 삶의 원동력(原動力)


풀은 눕지 않는다.

센 바람에도

쓰러질 듯 흔들리고 말면 그뿐


나무도 잘 눕지 않는다.

센 바람에도

가지는 흔들려도 쓰러지지는 않는다.


이들이 눕는다는 것은

생명의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기에

끝내 버티어 힘을 다해 일어서는

삶의 원동력을 갖고 있다.


이 자연의 원동력으로

풀은 얼어붙은 대지 속에서 싹을 틔우고

나무는 한겨울 찬바람에 잎을 모두 잃어도

앙상한 가지로 버티어 간다.


비록 우리는

매일 매일 어둠 한가운데에  우리 삶을 맡기지만

언제든 새벽이면 살아나는 태초의 동력,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계절은 속절없이 지나가는데

우리 시간의 조각들을 이 영생(永生)의 나라로 맞추어 가지 않는다면

세월이 우리 삶의 원동력마저 가져가기에

우리는 매일 서서 진리이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은 한없는 사랑이시니

그 안에 있는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할까!

예전에는 우리의 우매(愚昧)함으로 이를 잘 몰랐지만

이제는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2007.4. 24.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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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 댓글[0]
묵상 (2007-04-23 오후 1:23:50) http://blog.somang.net/jookwanlee/2813

하나님의 섭리(攝理)



o 서언(序言)


歲月本長,而忙者自促(세월본장,이망자자촉)


세월은 원래 길건만

마음 바쁜 사람이 스스로 짧다 한다.


天地本寬,而鄙者自隘(천지본관,이비자자애)


천지는 원래 끝없이 넓지만

속 좁은 사람이 스스로 좁다 한다.


風花雪月本閒,而勞攘者自冗(풍화설월본한,이노양자자용) 


바람과 꽃, 눈과 달은 원래 한가롭지만

일에 바쁜 사람이 스스로 번거롭다 한다.          - 채근담(菜根譚)중 에서 -


인간들은 그들의 경험과 지식과 사고력 등을 바탕으로 참된 진리와 삶의 지혜를 찾아 가고자 부단히 노력하여왔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이러한 노력 등은 위의 채근담에서 저자 홍자성의 고백처럼 참된 진리와 지혜에 대한 답을 찾지는 못하고 그들의 좁고 작은 세계에 갖쳐서 계속 헤매고만 있을 뿐입니다.


또한 자연현상도 하나님의 법, 섭리를 일부는 이야기를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는 아무런 메시지도 우리에게 주지 못합니다.


우리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양심은 하나님을 말하지만 이것이 주는 메시지도 단편적이며 미완성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명백하고 오류가 없는 지혜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만 존재합니다.[Billy Graham]


하나님을 모르던 옛사람들은 공자의 생각을 주로 담은 ‘大學“의 핵심사상으로 ”格物致知[참 지식은 실제의 物(사물, 정황)에 임하여야 하며, 이를 도외시한 지식은 참된 지식이 되지 않는다]“를 내세워 世上事에 임하여 이들을 다스려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름대로 성경의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들을 묵상하여 왔는데,  이들을 이 단계에서 아는 대로 정리하여봄으로 이세상의 일들에 대처하는 지침으로 삼아 예수님의 성품을 향한 새로운 전인격적인 성숙을 도모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승리를 맛보고자 합니다.



o 고통, 고난


 “치유하시기 전에 먼저 상처를 주심도 은혜입니다(Grace must wound before it can heal. Flannery O'Conner)”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2가지형태의 태도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때때로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우리의 믿음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고생 끝에는 좋은 일이 온다고 믿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절은 곧 지나간다고 기대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 고난에 익숙하여져라. 성장을 위하여 고난과 고통과 어려움은 필요하다. 이들은 하나님을 깊이 알고 깊이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같이하는 동료이다. 긴 역경의 시절에 대비하라. 인생에 별로 어려움을 모른다면 그것은 정상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고난의 때를 기대할 것은 아니지만 즐겨라”(Christian Writer John Fischer)


이들 두 견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의 견해에서 보면 고난은 우리 靈의 地圖에 생긴 상처(glitch of  spiritual map), 견딜만한 폭풍, 주의하고 결행하면 고칠 수 있는 역기능 정도입니다. 믿는 자들 에게는 매우 안락하고 위험이 전혀 없는 정상의 상태(normal state)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비성경적(unbiblical)이고 역경도 우리노력으로 면할 수 있다는 일종의 인본주의적인 문화(culture)와 脈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투자와 산업들이 이런 종류의 문화 사업에 투자되고 있으며,  훌륭한 삶이 이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잘못된 환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후자의 견해는 고난과 고통은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일과의 한 부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대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영생을 기다리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잘될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세상의 시련(trials)들은 예수 안에서 성장하는 삶에서 중요한 부분(integral part)이 되며 따라서 시련이 우리에게 닥칠 때에는 이들을 반갑게 마지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야고보서1장2-3절).“ 인내는 우리가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성장하므로 만들어 놓은 잣대만큼만 세상을 잴 수 있으며, 살아 있어 힘든 만큼 깨침을 얻을 수가 있으므로 또한 행복합니다.


이러한 후자의 자세는 비관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실제적이며 가장 어려운 일들 속에서도 어떻게 기쁨을 찾는가의 문제입니다. 정상의 상태(normal state)가 된다는 것은 삶의 전투의 겨우 半을 수행한데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르게 서는 길은 오로지 환경을 넘어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그의 죽음을 나누므로 그의 부활의 힘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누리고자함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빌립보서3장10-11절)


고난의 언덕은 성도로 하여금 자기를 부정하게 만든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잡도록 만든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함이라 (빌립보서1;29)“ [죤 번연의 ‘천로역정’중에서]



o 예수님의 관심사 [God's Economy (Providence)]


예수님의 관심사, 예수님에게 문제가 되는 것(matters to Jesus Christ)을 우리가 깨닫고 실천하여 가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필요에 매우 민감하여지십니다(Christian writer John Fischer).


 인간은 모두 스스로 만을 생각하는 것이 본성이므로 이것이 가능하다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이웃 사랑이니 다른 이에게  우선권(preference)을 주는 것을 배우는 것은 크리스쳔의 참다운 증표라고 할 것인데 이는 인간 본성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 이유는 이를 바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며 또 그것을 행함은 성령을 통하여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 관하여 말하기를 “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who genuinely cares for your welfare)가 이(디모데)밖에 네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what matters to Jesus Christ)을 구하지 아니하되(빌립보서 2장20-21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사고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그에 대한 생각에  몰입하여 살아갈 때에 그를 경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의 친구처럼 그를 알게 되며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여기에는 성령님이 임재하시어서 당신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진리에 이끌리어가게 합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 모두가 예수님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고통과 상처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슬픔의 사람(a man of sorrow)이요 비탄과 통하는 사람(acquainted with grief)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 주변 사람들의 고통이 아니라면 이러한 비탄과 슬픔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올 데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주변사람들의 비탄과 슬픔을 지고 갔습니다. 한 여인이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예수님에게 손을 대었을 때 예수님이 군중들에 밀려 그 여인을 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뜨거운 힘(the compassionate Power)이 예수님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그는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주변 인물들의 필요에 매우 민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다가 가십시오. 예수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도록 그에게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들로 인하여 여러분들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발견되는 바대로 즉시 행동에 옮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을 움직인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o 지체(하나님의 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 마련하신 대기실에서 답이나 변화, 해결책, 기적 같은 일을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신다면 하나님이 알고계시는 것이 최상의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보다도 하나님은 결코 늦지 아니하시며 서두르지도 아니하시며 가장 정확한 때에 답을 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속에서 지연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최선의 방책은 단순하게 하나님이 최상의 것으로 행하실 줄로 믿는 것입니다.


하박국 2장3절의 다음 말씀은 참으로 큰 격려가 됩니다. “이 묵시(vision)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인내하고 기다립시다. 단 하루도 더 늦어지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지체되는 것은 거부됨을 의미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방법은 항상 우리들의 방법보다 뛰어납니다. 하나님의 때는 완벽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깊은 물속에 체류하는 기간을 연장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이 역경의 깊은 물속에 17년간이나 체류하였습니다. 그의 형제들로부터 버림받음, 파라오(Pharaoh)의 노예가 됨, 그리고 긴 감옥생활은 그의 깊은 고난의 세월 이었는데, 이 시련의 세월을 통하여 요셉은 많은 꿈을 꾸게 되고, 훗날 들어낼 그의 많은 재능과 지혜를 부여받게 됩니다. 요셉의 이 시련의 깊은 고난의 세월이야말로 그가 이전에는 꿈꾸지 못했던 위대한 과업들의 수행을 위한 준비기간 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시대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확연하게 하나님의 행사(God's Works)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30세의 요셉이 더 큰 힘을 내도록 그를 위태로운 형편으로 몰고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그 어떤 난관을 만나도 이겨낼 수 있도록 그를 준비시키고 훈련하는 깊은 고난 속을 지나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요셉처럼 어린나이에 에굽 총리로서의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되면 그로 인하여 유발되는 그의 자존심(Pride) 등이 그가 하나님의 종임을 스스로 망각하게하고 나중에는 그를 삼켜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요셉에게 있어 하나님의 때는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O S Hillman 목사)



o 실패

恩裡(은리)에 由來生害(유래생해)하나니

故(고)로 快意時(쾌의시)에 須早回頭(수조회두)하고

敗後(패후)에 或反成功(혹반성공)하나니

故(고)로 佛心處(불심처)에 莫便放手(막변방수)하라


 恩裡(은리) :  은총을 받는 중에.

 由래(유래) : 원래, 본래, 본시.

 生害(생해) : 재앙이 싹틈. 재앙이 발생함.

 快意時(쾌의시) : 만족스러울 때. 일이 뜻대로 잘 되어 의기양양할 때

 回頭(회두):머리를 돌려 주변을 살핌

 佛心(불심) :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유쾌하지 못한 것

 便(변): 곧.

 放手(방수) : 손을 놓음, 포기함.

             

원래 은총 속에서 재앙은 싹트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에 흡족할 때 모름지기 빨리 머리를 돌려 살펴야 한다.

실패 후에 도리어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곧 그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 菜根譚 중에서 -



우리들은 보통 실패를 부정적인 경험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실패로부터 배우며 그것을 유익이 되도록 활용합니다. 실패를 디딤돌 삼아 일어나 오히려 성장하여 갑니다.(Rick Warren 목사)


어느 누가 실패를 한다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 계속 살아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고도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2절에는 “우리 모두는 다양한 형태로 좌절을 경험한다.”고 했는데 여기에 누구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어는 누구도 성공하기를 바라며, 실패를 피하고자 남을 기만하기도하고 훔치기도 하는 등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기도 합니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조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속칭 실패는 숙명적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속칭 말하는 실패는 세상의 끝이 아니며 그로 인하여 죽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실패는 꿈을 성취하는데 실패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꿈을 갖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진정한 실패는 우리의 목표를 세웠는데 그것을 잃은 것이 아니며, 목표를 갖지 못하는 것이고, 진정한 실패는 삶의 현장에서 넘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다시 일어서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실패하지 않은 것입니다.


실패는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가 원하시는 모습의 사람으로 가다듬는 가장 주요한 수단에는 우리에게 실패를 맛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실패를 통하여 우리의 인격(character)을 수양시키는 것이지요.(Rick Warren 목사)


우리의 성공은 이를 우리의 재능으로 인한 것으로 돌리는 경향이 농후하여 이로 인하여 배우는 경우는 드물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실패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며, 성공을 향한 디딤돌로 삼습니다. 실패를 통하여 진정한 성공의 원리,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터득하여 갑니다. 시편119장71절의 말씀을 “나의 지난 실패와 고난은 최고의 복(福)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생 교과서인 성경말씀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에 있을 때에 성경을 펴고 진리와 지침과 위안과 격려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성경말씀이 참된 삶의 지침서임을 깨닫게 됩니다.”라고 의역된 버전(version)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decrees)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저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수많은 실패의 고비 고비 마다 예수님의 성품인 겸손과 온유를 더 배우게 되고 진리이신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돌보심의 섭리를 느끼게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도 하고 성경에는 아침안개 같다고도 묘사되었는데 우리는 이세상의 순례자로 영원의 세계인 천국의 소망을 확실히 가지고 가야하며 아울러 지옥의 참상도 더 배우고 널리 전하야 할 것입니다. John Bunyan이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을 펴낸 것처럼 말입니다. 2차 대전의 영웅 영국수상 Winston Churchill은 지옥에 대한 선포가 부족한 것이 당시 영국사회의 모든 사회악과 부패의 뿌리로 보았습니다.


실패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Grace)가 발견됩니다.


여러분이 실패할 때에 하나님은 놀라지 아니하시며, 오히려 이를 미리알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실패하여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계속 사랑하시며 그 사랑을 그치지 아니하시니 이것이 은혜입니다.


시편 103장14절에 기록되기를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졌고 우리가 티끌(dust)임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취약함(frailties)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대하지 아니하시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패하여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그치지 아니하십니다.”


실패를 딛고 재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를 이루는 것을 돕고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실패를 하였는지는 관심이 없으시고 그것이 우리 삶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의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고 성장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우리 삶을 통한 목표가 있으시며 이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를 마련하고 계십니다.




o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인 기쁨 (Confrontation with God)


“그들로 의의 나무(oaks of righteousness)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the  display of His splendor)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이사야 61장3b절


저는 이번에 저에게 닥친 참담한 일들로 인하여 절망에 쌓여 깊은 숲속에서 홀로 하나님에 맞서며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이것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온 저에게 베푸시는 길입니까? 저는 긴 세월을 참고 참아왔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참담하다니요. 저는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만 큰소리로 울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숲속 나무들 가운데 깊이 앉아 화도 나고 좌절감도 느꼈고 결국은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지 사뭇 의심스러웠습니다. 그가 살아 계시다면 나의 믿음과 순종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계신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나의 감정을 다스리려고 여러 시간을 앉아 나의 마음과의 투쟁을 하였습니다.


긴 시간 끝에도  결국 답이 없고 나는 하나님이 답하지 아니하신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그 자리를 뜨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새삼 제가 의식한 것은 나는 한 참나무의 그루터기 부분이 부러져나간 자리에 않아 있었다는 것이고  또 그 부러진 나무는 다른 거대한 참나무의 아래 부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 나의 마음에는 조용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 오는 네가 않아 있는 그 부러진 참나무와 같이 너는 깨어진 인간이다. 그러나 너의 이 깨어짐(brokenness)은 네가 보는 이 거대한 참나무와 같이 성장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다.”


나의 내적인 투쟁 속에서 여러 해가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때로부터 그의 말씀에 충실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고통과 실망을 그의 은혜를 통하여서만이 주실 수 있는 내적인 기쁨(inner Joy)으로 대체하시기 시작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셨다고 느끼면서 삶의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하여온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바르고 정직한 관계를 우리가 유지하여 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아무리 어려운 대화도 거리낌 없이 하고자 하시는 자애로운 아버지 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서 이든지 무조건 여건이나 사물 등을 변화시키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신뢰하고 그 안에 거하여 나아갈 때에는 그의 목적은 이루어지고 우리에게는 참 평안이 찾아옵니다. 오늘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의 행사를 믿고 나아갑시다.




o 성숙한 은혜의 모습(Graduate level Grace, Blessing those who curse you)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distress)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 사무엘 하 16장 11-12절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하여 왕도를 버리고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을 때 적의 숫자가 날로 늘어나는 어려운 상황인데 시므이(Shimei)라는 자는 다윗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돌을 던지며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왕을 저주하고 조롱하는 것은 당시 법으로 금한 것으로 다윗은 그의 장수들의 건의를 받아 시므이의 목을 벨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들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자들에 대한 사울과 다윗의 다른 점을 보게 됩니다. 사울은 하나님과 수평의 관계로 행동하는 모습이나 다윗은 하나님을 수직적인 관계로 받드는 관계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그의 마음을 쫓는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살인자 이었으며, 간음한 자 이었고 그의 생애 여러 분야에서 실패한 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다른 지도자들과 다른 점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며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뉘우치고 회개하는 심령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누군가와의 부끄러운 소원하게 된 관계(the estranged relationship)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 욕스러운 일(insult)로 인하여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함 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때에 이에 대한 보복을 여러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까요? 제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 하에 이러한 경험들로부터 배우게 된 것은 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여 결말을 내고자하는 유혹의 덧으로부터 벋어나는 자유 함을 찾게 된 데에 있습니다. 더 이상 이것은 저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부끄러울 것이 없다면 이러한 욕(insult)은 우리의 인격을 성숙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따르는 성인들(Saints)의 인격을 최고조로 기르는데 사용하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A W Tozer는 “하나님이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지 않고(hurt him deeply) 계시는 한 과연 하나님이 그를 크게 복 주실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하였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 인격이 가장 깊이 성숙할 수 있도록 때때로 이러한 갈등의 폭풍우를 불어 대십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힘만으로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성숙된 수준의 은혜(graduate-level grace)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학습과정에 참여하여 시험을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시험에 통과 하신다면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여 올라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험들을 통하여 여러분을 하나님나라에서 더 크게 사용하실 준비를 하시고 계신 것이지요. 여러분은 우선 이 시험부터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o 겸손 - 넘어짐을 막음


겸손의 길은 골짜기이며 비탈길로 내려가는 길인데, 이것은 가난이 될 수도 있고, 질병이 될 수도 있으며, 이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들을 겸손의 골짜기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면 반드시 넘어진다는 것을 겸손의 골짜기를 통해서 먼저 배우게 하시고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고할 때 넘어지는 것을 막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세상으로 나가기 직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점검하시고 준비시키는 길목이 겸손의 골짜기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겸손의 골짜기로 내려가게 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심령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게 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죽어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인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이때 ‘시므이’라는 자가 나와서 다윗을 향해 저주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아비새’가 가서 ‘시므이’를 죽이려 했을 때 다윗은 만류하면서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고백은 겸손의 골짜기로 내려가면서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완전히 굴복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겸손의 골짜기를 내려가는 것은 죄와 싸우며 자신에게 있는 믿음의 원리를 삶 가운데로 나타나게 하는 일입니다.  (John Bunyan의 ‘천로역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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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인간자유의지, 악(evil)


의인(righteous man)의 고난(the suffering)은 곧바로 하나님의 섭리라는 주제와 만나게 됩니다. John Calvin은 하나님 섭리의 원리(the doctrine)에 대하여 오랫동안 깊은 연구를 하였으며 남다른 기여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에 대하여 연구 발표하는 것은 중세시대 신학의 전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비록 인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면에서는 환영을 받기도하지만, 인간들의 자유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한다는 면에서 우리를 주저하게 만드는 장애물(Stumbling Block)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철학적인 신학자들(philosophical theologians)의  주요 관심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서로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John Calvin은 이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20:32에 대한 그의 주석(comments)에서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모든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도움을 받는다고 하지만,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가 유념하여야 할 것은 이것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하 감옥에 감금되고 추방되어 적으로부터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간에 화해를 도모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유일한 적절한 질문은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이때 이들이 알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고, 어떠한 고난과 죽음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들에게 다가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는 자유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위로(慰勞) 받는 것이 아니며, 칼빈이 잊지 말도록 강조한 그들 아버지의 주권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인하여 위로 받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칼빈은 인간의 사악함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 문제를 다루면서,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경우에서 보여준 것 같은 인간들의 죄와 사탄의 교묘한 책동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는 어떠한 악(evil)도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서는 허용되지 않음을 강조하였으며, 하나님은 이 악도 그의 영광을 위하여 또 사람들에 유익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또 비록 우리 인간들은 죄인일지라도, 우리들의 사악함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것과  또 우리 스스로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하여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성경말씀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주권이 꽃피우도록 하는 그의 통찰력을 발휘 하였으며, 또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고난 받는 사람들 중에서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아니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쓰여 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들 저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존재의 무수한 변화와 변천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는 희망을 갖고 계시고, 이를 위하여 사람들의 모든 일들을 관장, 관리하심을 선언하였습니다.




o 교회의 하나 됨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아래 우리가 하나가 됨이니, 우리 한국교회는 화해, 협력, 조화 등을 통하여 하나가 되어가도록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양극화의 문제입니다.  나만이 옳고 내파만이 절대로 옳다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주장에서 양극화는 비롯되는데, 교계의 지도자들이 오래전부터 연합과 일치를 주장하여오지만 보·혁의 갈등은 해소되기 보다는 심화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김명혁 목사)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지녔던 순수한 신앙과 포용적인 사랑의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면 교회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동정과 사랑을 지니게 됩니다. 특히 성 프랜시스(St. Francis)의 섬김의 신앙과 사랑의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고 배우며, 손양원 목사 등 신앙의 선배들의 순수한 신앙과 희생적인 사랑의 삶을 새롭게 되돌아보는 가운데,  교회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와 동정과 사랑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지역주의는 물론 인종주의도 민족주의도 국가주의도 넘어서서 모두를 품고 모두를 사랑하며 모두를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진리와 성결을 위하여 분리의 타당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장로교회가 100여개 이상으로 나뉘어져 대립하고 경쟁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이 칭찬하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파의 죄가 배교의 죄와 같다는 견해를 들으면서 더욱 당혹하여집니다.


대부분의 경우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보다는 정치 사회적 이슈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자기 개인의 입장, 지위, 명예 등에 집착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에 기인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기도 중에 하나가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이며, 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고 힘써 하나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o 주권자 하나님


* 하나님 세상


성자 어거스틴(St. Augustine)은 그의 고백록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당하는 수고와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인간이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이미 논리적으로 불가능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수고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성서와 기독교 P143, 연세대 출판부)” 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 삶의 근원이시며 해결자가  되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20세기의 탁월한 설교자인 영국의 마틴 로이드 죤스(Dr. Martin Lloyd Jones)는 말하기를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데서 기인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이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사람들이 ‘무익한 반항’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맞서 싸운다면 사람은 언제나 패배와 재난과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화목하여 그분의 복(福)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생기는 것입니다”라고 하여(그의 저서 ‘십자가’와 ‘진정한 기독교’ 중에서), 동일한 취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됨(complete Unity)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도록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내가(예수님이)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함이로소이다.”(요한복음 17:23)


옛날 격언에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United we stand, divided we fall)"는 말이 있는데 이는 단지 전쟁터에서나 사회현장에서의 구호만이 아닙니다. 이는 많은 영혼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영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O S Hillman 목사).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복(福)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 안에 든든히 세우시고 기업(Inheritance)을 허락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선(善,goodness)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



*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


내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되(예레미야 25: 17)

   

로마제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영원한 제국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만큼 흥왕했고 발전했고 강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로 도망온 후,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숨어 다녀야 했고 잡히면 처형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서 로마제국은 기독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영원하다고 스스로 자랑하던 로마제국은 결국 야만인들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벨론도 그렇게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하나님을 변함없이 섬겼습니다. 바벨론은 다른 나라에 의해 망했고 유대인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명예롭게 사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당하고 수모를 당한다 해도 실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그 터전은 반드시 예수님을 믿는 삶으로 넘쳐나는 신앙인들의 터전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의 지표는 종국에는 항상 승리합니다. 역사는 기독교인의 삶이 지배합니다. 역사는 기독교인의 문화창조에 의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리차드 니버는 그리스도를 ‘문화의 변혁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야말로 앞으로 다가오는 세상의 삶일 것입니다.


2005년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우리나라 3대 종교 중 개신교만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할 우리들이 제대로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인도에서는 돈벌이를 위해 사지가 멀쩡한 거지들의 팔과 다리를 절단하는 갱 조직의 행태가 드러나 큰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문화는 물질을 우선시하여 이 세상을 점점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세상문화에 맞서서 어렵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고 가진 것을 나눔으로, 생명을 살리는 생명문화를 창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그럴싸한 삶의 방법을 제시할지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 2)”고 권면했습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 명예롭게 사는 사람, 잘 나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법으로 살지 않으면 언젠가는 멸망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o 맺으면서


무궁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섭리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깨달아가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깊이 사랑하여 가고자합니다. 이 길만이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과 생명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풀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6:24-26)”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2007.4.13.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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