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財物)과 노동(勞動)
대천덕 신부는 그의 著書 ‘토지와 경제정의’의 序文에서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할 수 없다. 물질적인 문제는 기도와 영적인 전쟁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영적은 문제는 현실의 삶, 즉 실제적인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다”고 서술하고 있어, 돈(財物)과 성경과의 깊은 관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1. 돈(財物)의 중요성
성경에서는 돈과 그 관리에 관한 구절이 무려 2,350번에 이른다고 하며 예수님도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돈에 관하여 많이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번잡한 자본주의 시대에야 돈을 重하게 여기는 것이 이해되기가 쉬우나 예수님이 사시던 때는 단순한 농경, 유목시대이었는데도 왜 그렇게 많이 돈에 대하여 말씀하셨는지는 다음 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가 있겠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돈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는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11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worldly wealth)에 충성(trustworthy)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true riches)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고 물으시고,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참된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만일 성경의 재정원칙에 따라서 돈을 올바르게 관리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참된 것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삶에서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충실하지 못하게 관리할 때는 참된 것을 받을 수도 없어 영적생활의 질이 나빠지고,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5장11절에서 충성되게 돈을 관리한 종을 칭찬하는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기록 되었습니다.
둘째로 돈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 가장 큰 경쟁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物神崇拜가 팽배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당신이 하나님을 부인하면 10억 아니 100억을 준다면 과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마귀의 물질에 대한 시험을 이김으로 우리에게 먼저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우리가 삶의 주인으로 하나님과 돈 중에서 오직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은 이를 미워하여 저를 사랑하거나 혹은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6장24절)”
12세기 십자군 전쟁 때의 일입니다. 당시 십자군은 돈으로 용병을 사서 그들을 대신하여 전쟁터에서 싸우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종교전쟁이었으므로 용병들은 전쟁에 임하기 전 세례를 받아야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이들은 그들의 검을 물이 닿지 않도록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검을 주장하지 않으심을 상징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무기만큼은 그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돈을 용병의 검과 유사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지갑만은 세례 수에 담그지 않은 채, “하나님 당신이 내 영혼의 주인이시기는 하지만 돈에 관해서만은 저의 생각대로 벌고 사용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지 깊이 생각하여볼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장33절)”고 하시었으며, 또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음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즉 “당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산다면 당신은 당신의 일과 사업 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물질에 관련된 일들은 스스로 풀릴 것입니다. You don't need to worry about your business if you respond to the call of God on your life. All the material things will take care of themselves.(사무엘상 9장20절의 숨은 의미)” ~ OS Hillman 목사
셋째, 사람은 누구나 경제적인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며, 그 중심에 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여 돈을 벌고, 소비하고, 저축하고, 투자하고, 기부하면서 일생을 지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돈은 자주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게 됩니다. 돈 문제로 가정이 파탄나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집니다. 이는 마치 호세아서4장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라고 한탄한 현실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에는 2가지 길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는 성경에서 답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답 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답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재정원리 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 55장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thoughts)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ways)은 너희의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재정원리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는 심오(深奧)한 실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제, 재정원리를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이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드러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인정하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니라[The spiritual man makes judge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ement].(고린도전서 2장14-15절)”
우리가 하나님의 경제, 재정원리에 따라 실천하여 갈 때에 우리는 자족함, 희망, 그리고 우리의 미래의 재정상태에 대한 자신감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더욱 완전하게 주님께 순종하게 되며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던지 하나님이 주시는 확실한 은혜입니다.
2. 하나님은 主人, 우리는 청지기(steward)
1) 하나님은 주인
하나님은 다음의 말씀들로 우리가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심을 알게 하시고 또 전지전능하심도 선포하시었습니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The wrath of oppressor)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이시야 51장13절) “
“거룩한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를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이사야40장25절)”
“너희는 눈을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이사야40장26절)”
2) 우리의 청지기(steward)역할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우리로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우리 발아래 두셨으니(시편8:6)”라고 기록된 바,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주인으로서 그의 모든 소유물에 대해서 우리에게 청지기가 되는 권한을 주시었습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stewards)에게 구할 것은 충성(trustworthy)이니라 (고린도전서4장2절)”고 기록 되었습니다.
마치 복잡한 물품을 구입했을 때 제품설명서를 꼼꼼히 읽어보아야 하듯이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이 그분의 소유물을 어떻게 관리하기를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청지기로서의 우리의 책임을 공부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며 보살펴 주심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지켜야할 여러 가지 재정원칙들을 주신 것 이라고 합니다.
(1) 주어진 것에 충성함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의 크기에 상관없이 맡은 일에 충성하기를 요구하시는데, 이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14-15절)”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은 종들이 각각 자기 맡은 소유물을 충실히 관리하였는지 물으며,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충실한 종을 칭찬하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니라(come and share your master's happiness).”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두 달란트를 맡긴 종과 다섯 달란트를 맡긴 종이 똑같은 상급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은 맡겨진 양이 많고 적음을 떠나 맡은 책임에 충실할 때 상을 주십니다. 우리가 큰 돈이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 쓸 가를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지금 내가 갖고 있는 1만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 모든 일에 충실함과 그 혜택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재물의 10% 만이 아니라 100%를 충실하게 관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십일조의 10%외에 나머지 90%도 세상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할 것이 아니며 성경말씀대로 사용할 것이며,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누가복은 16장12절)”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남의 재물, 公共의 財貨 등에도 信實해야할 것 인데, 우리가 충실히 청지기로서 所任을 다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惠澤을 누리게 됩니다.
첫째, 우리가 더욱 밀접하고 친밀한 주님과의 관계를 갖게 됩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충실하게 주인의 돈을 관리한 종은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 욕심에 따라 돈을 관리할 때는 주님과 멀어지지만 여기에 성경의 원칙들을 적용하게 되면 주님을 더 많이 思慕하게 되고 더 가깝게 됨을 경험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품성(稟性)이 성장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품성을 淨化시키기 위하여 돈을 사용합니다. 재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진정한 품성의 정확한 지표로 보고 있습니다.
David McConaughy는 그의 著書 “돈 그 산성시험(Money, the Acid Test, 1918)”에서 말하기를 “일시적인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돈은 특수하면서도 영구적인 결과를 내포하고 있다. 비록 무의식적일지라도 돈은 그것을 벌고 쓰고 저축하고 기부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변모시킨다. 돈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에 따라서 돈은 그 소유자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즉, 사람이 돈의 주인이 되거나 혹은 돈이 사람의 주인이 된다.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형상을 닮은 도구로 만들기 위하여 물질로써 우리의 삶을 시험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재정적으로 安定되며 자유로운 상태에서 주님의 召命을 다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財物을 관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부채로부터 멀어지고 지혜롭게 소비하게 되며 저축하게 되며 하나님께 더 獻身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우리의 충실함으로 우리는 만족(contentment)에 이르게 됩니다. 만족은 조용한 행복(quite happiness)을 말하며, 행복은 속박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에서 오는 편안함입니다. 이 행복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지는 것으로 우리가 충실히 청지기 소임을 다할 때에 이루어지고 나아가 만족함에 이르게 됩니다.
3. 노동(勞動)
지금까지 돈(財物)의 중요성과 하나님이 그 주인이심과 우리는 그 청지기 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돈과 財貨는 우리들의 실생활에는 꼭 필요한 것으로 하나님이 이의 공급자(provider)이시나 다만 우리들의 일함(work)과 노동(labour)을 통하여서 얻어지게 됩니다. (Our work is a process of participation in what God has already provided. The Lord is our provider; the job is only an instrument of His provision. ~ O S Hillman 목사) 富를 창출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자도 하나님이십니다.
1) 노동의 意味
전 동아건설그룹 회장 최원석씨는 회사가 부도로 넘어간 후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출근할 곳이 있다면 부러운 일입니다. 저는 출근할 곳이 없으니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습니다.(2001.7.2자 조선일보에서)” 라고 하였습니다. 노동도 행복이 됨을 느끼게 합니다.
동물에게는 생존을 위한 노동은 있지마는 의미를 갖게 하는 노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노동은 의미를 갖고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서의 노동의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이동원 목사)
첫째로 노동은 刑罰이 아닙니다. 인간이 犯罪하여 타락하기 이전에도 노동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즉 창세기 2장 1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Then the Lord took the man and put him into the Garden of Eden to cultivate it and keep it. NASB)"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담을 지어 만드시고 그로 하여금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신 것으로, 정확하게는 아담이 Cultivating 즉 경작하게 하시었다 노동하게 하시었다는 의미입니다(이동원 목사). 그러므로 인간의 墮落 이전에도 노동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인간타락이 노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즐거워해야 할 노동이 괴로운 노동으로 변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인류역사, 문화 발전에 대한 주요한 寄與중 하나는 노동의 神聖함을 강조해온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곳 마다 문화와 사회가 발전하여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었고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시었습니다.
둘째로 노동은 하나님의 召命입니다. 성경은 노동하는 自體를 귀하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노동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고는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榮光을 위하여 사는 것이므로 우리의 노동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에 그 진정한 의미가 발견됩니다. 고린도전서10장31절에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노동을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성실하게 일하는 것은 기본이라 할 것이고 나아가 일을 잘 해야 되고 또 좋아하는 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을 잘하지 못하면 세상에서는 비난을 받으니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어렵고 또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좋은 成果를 지속적으로 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우리의 직업일 개연성(蓋然性)이 아주 높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에 干涉하시고 또 우리들을 攝理하시므로 우리들의 직업도 인도 하십니다.
창세기2장15절을 잘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직접 지으시고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개발하고 관리하는 일을 직접 아담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일을 맡기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이 소명(calling)이요 우리의 직업(vocation)입니다. Vocation이란 단어의 뜻도 본래 소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예전에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직업을 천직(天職)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보면 우리나라에도 하나님이 주신 어떤 일반계시 같은 감동이 있었다고 보기도 합니다(이동원 목사).
우리들이 직업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고 일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매우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설계된 것입니다. 창세기1장28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blessed them)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subdue the earth),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rule over)하시니라.”
하나님은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고 땅을 정복하라(開墾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땅을 잘 경작하고 개발하고 관리하라고 하시니 이는 노동행위이며 그러므로 노동은 주신 자녀와 같이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노동을 통하여 우리는 생계를 꾸리고 질적인 삶을 누리기도 하므로 축복이 되지만 기독교의 노동관은 여기서 더 나아가 노동의 결과로 나 뿐만이 아니라 이웃 까지도 복되게 합니다. 에베소서4장28절에는 “빈궁한자를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고 善한 일을 하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구제하기위하여도 일하여야하고 또 宣敎(mission evangelism)하기 위하여도 일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우리의 일하는 태도
골로새서3장23/24절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遺業의 賞(inheritance as a reward)을 주께 받을 줄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It is the Lord Christ you are serving).”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일의 목적이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나타내 보이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 속에는 주요한 사역(ministry)의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Our Work is Our Worship to God(우리의 일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경배입니다). Work 라는 단어와 Worship 이라는 단어는 모두 히브리어 avodah에서 나온 단어입니다(OS Hillman 목사). 주님이 우리의 삶을 완전한 제어(complete control)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예수님의 삶의 연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중에 주님이 살아계시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일하여야 할까요?
우선 우리는 부지런히 그러나 일중독(workaholics)에는 걸리지 않도록 적절한 휴식을 취하며 일하여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하는 동안 즐겁게 일하여야 합니다. 전도서3장22절에 보면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라(Nothing is better than that man should be happy in his activities, for that is his lot. NASB)”고 하였습니다. 축복 중에 축복은 일할 때에 즐겁게 일하는 것 이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救援 받을 때’에서의 구원은 우리의 回復을 말한다고 할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노동에 미친 영향은 즐거워야할 노동이 괴로운 노동이 된 것인데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기대를 회복 하여야 하는데 회복해야할 영역 중에 하나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으나 외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목공실에서 일하시면서 결코 그 아버지에게 불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웃으며 즐겁게 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이동원 목사)
또 한편으로 우리들의 일의 가치(value)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있지 아니하며 예수님 안에서 발견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일의 成果 지향적인 삶(performance based life)'이 되어서는 아니 되며 이는 결국 우리들을 잡는 덧(trap)이 되고 맙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가치를 찾는 삶을 산다면 우리가 우리의 직업을 잃는 불행을 당한다고 하여도 이것이 우리를 황폐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비록 이는 많은 어려움을 가져오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일과 사건들을 調定하기고 編成하시는 분(orchestrator)이십니다. 역경의 시절도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곳이 있습니다.
4. 맺으면서
우리의 노동을 통하여 우리는 필요한 財物(돈)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3장11절에서 자기의 일에는 무관심하고 남의 일에만 분주한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이 있었음을 봅니다. 그런 자들에게 12절에서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settle down and earn the bread they eat, NIV).”고 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팽배했던 ‘재림이 임박했다’는 뜬소문으로 인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온한 마음으로 성실한 노동의 삶을 살라고 촉구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의 이단들처럼 오늘도 온갖 異端들은 현실과 괴리된 신비주의적인 말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건강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방해합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성실한 노동을 비웃으며 한탕주의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누가복음17장23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꿈꾸며 기도하되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현실의 이 땅에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수행하라고 맡겨주신 일들을 소명감을 갖고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맡겨주신 ‘양치기’일을 할 때 ‘마음의 성실함과 손의 공교함으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시편78장72절). 우리도 오늘 그렇게 일함으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그러한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은혜 베푸실 것을 믿습니다.
2006. 8. 5. 이주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