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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댓글[0]
묵상 (2006-09-18 오후 6:42:00) http://blog.somang.net/jookwanlee/2646

마음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삶의 근본이 되며 매우 중요하여 이를 바르게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늘 들어오는 말일 것입니다.



1 성심(聖心)


1-1. 16세기 시인이며 문학자인 회재 이언적(李彦迪)은 아래의 ‘관심(觀心)’이란 詩로 우리마음의 중요성을 노래하였습니다.


공산중야정관금(空山中夜整冠襟)   빈산 한밤중에 홀로 옷깃 바로하고 앉았으니

일점청등일편심(一點靑燈一片心)   한점 푸른 등불은 한 조각 마음과 같구나

본체사종월처험(本體巳從月處驗)   본체야 세상에서 이미 경험 하였으니

진원경향정중심(眞源更向靜中尋)   진리의 근원을 고요한 가운데서 찾으리라

 


한밤중에 空山의 고요한 山堂에서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타오르는 청등(靑燈, 마음을 상징함)을 보며, 이미 세상에서 경험한 마음의 본체 외에 천성(天性)의 진원(眞源)을 省察하며 혼연순수(渾然純粹, 전혀 잡것이 섞이지 않은 상태)한 것을 찾아보겠다는 것입니다.


허령불매(虛靈不昧, 마음이 신령하여 어둡지 않음)한 본체로서의 마음과 캄캄한 밤을 환희 밝혀주는 한밤중의 靑燈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는데, 聖人과 우자(愚者)의 分岐點이라는 것이 다만 한가닥 마음의 기미(機微) 라는 것을 깨닫는 明理成道에 이른 境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국민대 국사학자 지두환 교수 논문 “이언적의 詩에 나타난 道學的 思惟의 표출 중에서”)


1-2. 효종 11년 전 영의정 백강 이경여(李敬與)가 임금에게 올린 재난 극복을 위한 상차문(上箚文)에는 聖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있어 마음의 중요성이 잘 드러납니다.


“대개 本心이 지켜지지 않으면 덥지 않아도 답답하고 춥지 않아도 떨리며 미워할 것이 없어도 노엽고 좋아할 것이 없어도 기쁜 법이니, 이 때문에 군자(君子)에게는 그 마음을 바로 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君子莫大於正其心). 이 마음이 바로 잡히고 나면 덥더라도 답답하지 않고 춥더라도 떨리지 않으며 기뻐할 만해야 기뻐하고 노여울 만해야 노여우니, 주자(朱子)가 말하는 대근본(大根本)은 이것을 뜻합니다. 이를 함양하는 방도는 반드시 발동되기 전에 지키고 발동된 뒤에 살피며 잊지 말아서 보존해 마지 않아야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나아가 孟子는 마음을 바르게 함과 관련하여  ‘外界의 사물이나 情勢의 변화에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지’인 “不動心”을 말하면서 이를 지도자의 중요한 德目으로 보았습니다.(맹자는 이를 기르는 방편으로 浩然之氣를 거론하였는데 이것은 道와 義가 있어야만 존재하며 우리의 마음에 꺼리는 것이 있으면 이 호연지기는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2. 신독(愼獨)


정조임금은 “마음을 살피고 보존하는 공부는 오직 ‘愼獨‘이라는 두 글자에 달려 있다면서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곳에서 절실히 반성하고 부지런히 힘써서 선단(善端, 착한단서)이 일어나는 것을 없애버리거나 악념(惡念)이 발동하는 것을 자라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여야한다. “고 하였습니다.(2005.5.20 조선일보 이덕일 舍廊에서)


愼獨 (또는 謹獨)은 혼자 있을 때 몸가짐을 삼간다는 뜻으로, 이는 대학(大學) 전육장(傳六粧)에 이르기를 “소위 그 뜻이 성실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속임이 없는 것이니 ··· 고로 군자는 혼자 있을 때도 삼가는 것이다.” 라는 말과 “소인은 한가할 때 그 善하지 못함이 이르지 못하는 데가 없으니 ·· 고로 君子는 혼자 있을 때도 삼가는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 나온 교훈 입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천덕(天德)·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홀로 있을 때에 삼가는데 있을 뿐이다”고 하였습니다.(程子以爲: ‘天德 王道, 其要只在槿獨’)“ 홀로 있을 때에 삼가지 않아서 유암(幽暗)하고 은미(隱微)한 데에  문득 간단(間斷)되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날로 고명(高明)한데에 오르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聖人의 극치(極致)라는 것도 결국은 이길 외에 따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上記 백강 이경여의 상차문중에서)


이러한 愼獨의 높은 의미는 로마서 13장13절의 “낮 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고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와 또 마태복음6장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라는 말씀과 그 맥을 같이 하는바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천지의 근본이니 이와 같은 위치에서 다룰 수는 없으나 인간의 지혜도 부분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이른 면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3. 마음을 바르게 지키는 방편(方便)들


우리의 정직하고 신실한 마음가짐은  인격의 근본이며 지도력(leadership) 의 기초가 됩니다. 만약 당신이 사람들의 신뢰를 잃는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마찬 가지 일 것이며, 인격체로서 우리의 가장 치명적인 죄악중 하나는 사람들의 신뢰를 배반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디도서2장6-8절에서 리더는 정직하고 신실하여 책망 받을 데가 없어야 한다(must be blameless)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에베소서5장3절에서는 경고하기를 “음행(sexual immorality)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탄(Satan)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우리가 하나님 은혜와 말씀 안에서 정직하고 신실한 마음을 갖는 것을  방해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1장12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sincerity)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 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하여 하나님 자녀로서 바른 인격체로 승리하여 감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제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지키 나가기 위한 실제적인 방편들을 생각 하여 보겠습니다.(Rick Warren 목사)


3-1. 누구도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허황된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는 쉽게 유혹에 빠질 수가 있음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나도 한 인간일 뿐입니다”라는 고백이 먼저 필요하며 우리는 항상 경계심을 가져야합니다. 고린도전서10장12절에는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So be careful if you are thinking,'Oh I'd never behave like that.' Let this be a warning to you, for you too may fall into sin. LB)"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 누구라도 유혹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잠언16장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Pride goes before destruction and a haughty spirit before a fall. NIV“라고 하였습니다.


아침부터 ‘나에게는 문제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때부터 유혹에 노출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자기 집에는 도둑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문을 열어놓고 외출하고 귀금속이나 고액권을 아무 곳에나 방치하고 다니는 사람들과 같이 어리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아17장9절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deceitful) 심히 부패한 것(beyond cure)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2. 영적인 상태(spiritual temperature)를 늘 살펴야 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guard your heart).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이니라(잠언4장23절).  우리는 매일 매일의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행태를 잘 살펴보아야하며 주님과 동행하여 감은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유혹을 만나게 되는 경우를 대비하여서도 하나님의 全知(omniscience)하심과 무소부재(omnipresence, 無所不在)하심을 지속적으로 되새겨 가야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인생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나와 항상 함께하십니다. 반면에 악마(devil)는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를 유혹(temptation)하려는 의도에서 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신독의 자세와 같은 범주의 행태에 속한다고 보겠습니다.(다만 하나님의 전지하시고 무소부재하심이 전제인 것이 다르지요)


스스로의 영적인 상태를 늘 살필 뿐만 아니라 나의 몸을 늘 훈련 시켜 가야합니다. 고린도전서9장27절에는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discipline my body like an athlete, training it to do what it should)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라.”고하였습니다.


3-3. 결혼하신 분은 결혼생활에 충실할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생활은 도덕적 신실성(moral integrity)의 가장 확실한 보장수단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결혼생활이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여 가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아주 중요합니다. 서양속담에 ‘담장 저쪽편의 잔디가 더 푸른 것도 아니며 담장 이쪽편의 잔디가 더 푸른 것도 아닙니다. 다만 당신이 자주 물을 주고 가꾸는 곳의 잔디가 가장 푸르른 법이지요.’ 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우리의 결혼생활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아가서1장6절에 이르기를 “그들이 나를 포도원지기로 삼았지마는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ministry)을 하면서 다른 이들의 결혼생활을 개선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들이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결혼생활의 개선은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부부가 예컨대 같이 성경공부하고 같이 세미나에 참석하고 같은 주제로 생각을 나누고 문화생활도 같이 하는 등 같은 괘도에서 생활하여 감으로  서로 격리된 삶을 살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며 무엇보다 상호신뢰가 형성 되어야 할 것입니다.


3-4. 정서적, 성적인 에너지의 분출구를 개발하여 가십시오.


사단은 우리들의 억압된 감정(pent up emotions)위에서 활동하기를 좋아합니다. 억제된 감정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부도덕함이 만연하여 날뛰게 되는데, 그들의 내면에서 이 들이 불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2장21절에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체의 원리(The principle of replacement)라고나 할까요. 우리의 삶이 균형을 잃지 않으려면 이런 악을 교체하는 惡의 분출구가 꼭 필요합니다.


자기에 맞는 건전한 레크레이션(recreation)활동의 개발은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듣고 나면 의기소침하고 너절한 생각은 사라지고 약동하는 생명력을 새로이 갖게 될 것입니다.


3-5. 스스로의 마음을 지켜 가십시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매우 주목하고 있다고 할 것인데, 죄악과의 싸움은 항상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마음에서의 싸움 [즉 당신의 생각]에서 실패한다면 당신은 이미 그 전쟁에서 진 것이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1장14-15절에서 이르기를 “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be tempted)은 자기 욕심(evil desire)에 끌려 미혹함(be enticed)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4장5절에는 “너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리라(keep your head in all situations)”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1장13절에는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prepare your minds for action, be self controlled.)"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10장5절에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13장14절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Clothe yourselves with the Lord Jesus Christ, and do not think about how to gratify the desires of the sinful nature. NIV" 고 하였는데 이는 우리가 나쁜 생각을 갖게 되면 종국에는 행동에 이르고 마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공상(fatasizing)으로 그치고 마는 일은 없다는 것이지요.


또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 여자와 간음(commit adultery)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28). 사람이 단지 생각만 한 것이나 그 생각을 행동에 옮긴 것이나 인간의 뇌에 미치는 영향에는 차이가 없고 동일한 정신적 파장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과학계에서 입증 된 것입니다. 정신신경학(neurologic)상으로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구원의 투구(the helmet of salvation)를 쓰라”고 하였습니다(에베소서 6:17). 욥도 그 마음을 지키고자하여 말하기를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I made a covenant with my eyes not to look lustfully on a girl NIV"라고 하였고(욥기 31:1) 다윗도 같은 맥락으로 ”나는 비루한 것(vile things)을 내 눈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시편 101:3)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16장19절에는“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innocent)를 원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미국 재무성은 위조지폐 감정사들을 교육할 때에 위조지폐를 그들에게 주지 아니하고 진짜 달러만을 주고 계속 검사하게 합니다. 그들은 가짜지폐는 모르므로 모조의 지폐가 출현하면 즉각적으로 그것이 모조품임을 찾아냅니다. 우리가 선한데 지혜로우면 악한 데에는 결백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6. 당신의 廢倫(moral failure)으로 인한 손해를 늘 염두에 두십시오.


히브리서11장25절에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하였는데 이를 의역하면 ‘죄악 중에는 잠시 동안의 즐거움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또 야고보서1장15절에는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패륜의 죄 된 행위는 우리에게 잠시 동안의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죄 된 행위로 인한 결과들을 미리 상세히 적어놓고 자주 읽는 것은 패륜을 피하여 가는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예컨대 만일 내가 성적인 유혹(sexual temptation)에 넘어간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요.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을 슬프게 하며, 그의 신성한 이름을 진창에 박습니다. 언제인가 예수님 앞의 심판에서 책망을 받게 됩니다. 나의 사역(ministry)을 망치게 됩니다. 부인의 존경과 신뢰를 잃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가족에게 치욕감(shame)을 가져다줍니다. 스스로의 자존심을 상실합니다. 고통의 추억거리를 만들어 부인과의 친밀함에 회복이 어렵게 됩니다. 같은 공동체 내의 다른 크리스쳔 들에게 믿을만한 사례를 훼손하고 그들을 어렵게 합니다.’ 등이 있을 것입니다.


3-7. 필요한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마태복음26장41절에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니라. Stay alert, be in prayer so you don't wander into temptation without even knowing you are in danger.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The Message"라고 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 죄를 짓지 아니하도록 깨어 기도하라 Watch and pray so you will not fall into sin."라고 기도하지 아니하시고 “네가 시험에 들지 아니하도록 깨어 기도하라 Watch and pray that you don't even fall into temptation."라고하신 것이 흥미롭지요. 예수님은 ”너 스스로가 유혹 받을 만한 상황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죄에 항복하고 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벌에 쏘이지 아니하도록 경계하여 멀리 있으라는 注文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5장8절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으니 우리는 항상 마귀에 당하지 아니하도록 주의 하여가야 합니다.


우리의 사역에서 가장 강력한 성적 유혹(sexual temptation)은  우리의 가장 순수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로부터 온다는 점도 주의할 것입니다.  바로 당신이 사랑하고 당신에게 많은 의미를 주는 그러한 사람으로부터 성적인 유혹은 찾아드는 것이며 믿을 수도 없는 매춘부 같은 이들로부터는 오지 아니합니다.


야고보서1장12절에서 함축적으로 이르기를 “시험(temptation)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the crown of life)을 얻을 것임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4. 마치면서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우리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감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완성자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로마서9장10-29절에 나타난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혜와의 관계를 다루면서 인간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능가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은혜가 우리의 善行을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선행에 앞서 존재하므로 인간은 아무 것도 자랑 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김명혁 목사). 저도 이에 공감하며 결국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여 주님과 동행하여 가면서 이루어져 가는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성 어거스틴은 이세상의 현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그가 가장 열렬하게 염원하던 것도 그저 희망에 불과한 것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또 현세를 지나 천국에서 모든 갈등이 최종적으로 해소 될 때까지는 완전한 실현이 연기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을 갈망하고 그 상실을 절감하고 그것을 사모하는 것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가슴을 깊게 하는 것은 열망뿐이다(It is yearning that makes the heart deep)"이라고 하면서 고전적인 完全의 理想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우리자신들 속에는 완성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죄악의 세력이 자리 잡고 있음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우리가 현세에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가는 것도 우리의 罪性으로 인하여 한계는 있는 것이며, 우리가 천국에 이르러야만 우리의 완전한 이상의 실현, 예수님의 마음 갖기는 이루어 질 것입니다.


잠시 지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항상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와 동행하여 가며 우리의 마음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스리어 나가서, 주님 주시는 참된 福樂을 누리고 끝내는 천국에 이르러 완전함의 승리, 생명의 면류관을 얻어야만 할 것입니다.


2006.9.16. 이주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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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노동 댓글[0]
묵상 (2006-08-14 오후 8:18:24) http://blog.somang.net/jookwanlee/2541

돈(財物)과 노동(勞動)


대천덕 신부는 그의 著書 ‘토지와 경제정의’의 序文에서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할 수 없다. 물질적인 문제는 기도와 영적인 전쟁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영적은 문제는 현실의 삶, 즉 실제적인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다”고 서술하고 있어, 돈(財物)과 성경과의 깊은 관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1. 돈(財物)의 중요성


성경에서는 돈과 그 관리에 관한 구절이 무려 2,350번에 이른다고 하며 예수님도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돈에 관하여 많이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번잡한 자본주의 시대에야 돈을 重하게 여기는 것이 이해되기가 쉬우나 예수님이 사시던 때는 단순한 농경, 유목시대이었는데도 왜 그렇게 많이 돈에 대하여 말씀하셨는지는 다음  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가 있겠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돈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는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11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worldly wealth)에 충성(trustworthy)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true riches)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고 물으시고,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참된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만일 성경의 재정원칙에 따라서 돈을 올바르게 관리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참된 것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삶에서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충실하지 못하게 관리할 때는 참된 것을 받을 수도 없어 영적생활의 질이 나빠지고,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5장11절에서 충성되게 돈을 관리한 종을 칭찬하는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기록 되었습니다.


둘째로 돈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 가장 큰 경쟁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物神崇拜가 팽배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당신이 하나님을 부인하면 10억 아니 100억을 준다면 과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마귀의 물질에 대한 시험을 이김으로 우리에게 먼저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우리가 삶의 주인으로 하나님과 돈 중에서 오직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은 이를 미워하여 저를 사랑하거나 혹은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6장24절)”


12세기 십자군 전쟁 때의 일입니다. 당시 십자군은 돈으로 용병을 사서 그들을 대신하여 전쟁터에서 싸우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종교전쟁이었으므로 용병들은 전쟁에 임하기 전 세례를 받아야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이들은 그들의 검을 물이 닿지 않도록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검을 주장하지 않으심을 상징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무기만큼은 그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돈을 용병의 검과 유사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돈지갑만은 세례 수에 담그지 않은 채, “하나님 당신이 내 영혼의 주인이시기는 하지만 돈에 관해서만은 저의 생각대로 벌고 사용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지 깊이 생각하여볼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장33절)”고 하시었으며, 또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음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즉 “당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산다면 당신은 당신의 일과 사업 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물질에 관련된 일들은 스스로 풀릴 것입니다. You don't need to worry about your business if you respond to the call of God on your life. All the material things will take care of themselves.(사무엘상 9장20절의 숨은 의미)” ~ OS Hillman 목사


셋째, 사람은 누구나 경제적인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며, 그 중심에 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여 돈을 벌고, 소비하고, 저축하고, 투자하고, 기부하면서 일생을 지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돈은 자주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게 됩니다. 돈 문제로 가정이 파탄나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집니다. 이는 마치 호세아서4장6절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라고 한탄한 현실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에는 2가지 길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는 성경에서 답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답 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답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재정원리 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 55장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thoughts)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ways)은 너희의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재정원리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는 심오(深奧)한 실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제, 재정원리를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이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드러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인정하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니라[The spiritual man makes judge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ement].(고린도전서 2장14-15절)”


우리가 하나님의 경제, 재정원리에 따라 실천하여 갈 때에 우리는 자족함, 희망, 그리고 우리의 미래의 재정상태에 대한 자신감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더욱 완전하게 주님께 순종하게 되며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던지 하나님이 주시는 확실한 은혜입니다.



2. 하나님은 主人, 우리는 청지기(steward)


1) 하나님은 주인


하나님은 다음의 말씀들로 우리가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심을 알게 하시고 또 전지전능하심도 선포하시었습니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The wrath of oppressor)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이시야 51장13절) “


“거룩한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를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이사야40장25절)”


“너희는 눈을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이사야40장26절)”


2) 우리의 청지기(steward)역할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우리로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우리 발아래 두셨으니(시편8:6)”라고 기록된 바,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주인으로서 그의 모든 소유물에 대해서 우리에게 청지기가 되는 권한을 주시었습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stewards)에게 구할 것은 충성(trustworthy)이니라 (고린도전서4장2절)”고 기록 되었습니다.


마치 복잡한 물품을 구입했을 때 제품설명서를 꼼꼼히 읽어보아야 하듯이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이 그분의 소유물을 어떻게 관리하기를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청지기로서의 우리의 책임을 공부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며 보살펴 주심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지켜야할 여러 가지 재정원칙들을 주신 것 이라고 합니다.


(1) 주어진 것에 충성함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의 크기에 상관없이 맡은 일에 충성하기를 요구하시는데, 이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14-15절)”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은 종들이 각각 자기 맡은 소유물을 충실히 관리하였는지 물으며,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충실한 종을 칭찬하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니라(come and share your master's happiness).”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두 달란트를 맡긴 종과 다섯 달란트를 맡긴 종이 똑같은 상급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은 맡겨진 양이 많고 적음을 떠나 맡은 책임에 충실할 때 상을 주십니다. 우리가 큰 돈이 생기면 그것을 어떻게 쓸 가를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지금 내가 갖고 있는 1만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2) 모든 일에 충실함과 그 혜택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재물의 10% 만이 아니라 100%를 충실하게 관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십일조의 10%외에 나머지 90%도 세상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할 것이 아니며 성경말씀대로 사용할 것이며,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누가복은 16장12절)”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남의 재물, 公共의 財貨 등에도 信實해야할 것 인데, 우리가 충실히 청지기로서 所任을 다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惠澤을 누리게 됩니다.


첫째, 우리가 더욱 밀접하고 친밀한 주님과의 관계를 갖게 됩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충실하게 주인의 돈을 관리한 종은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 욕심에 따라 돈을 관리할 때는 주님과 멀어지지만 여기에 성경의 원칙들을 적용하게 되면 주님을 더 많이 思慕하게 되고 더  가깝게 됨을 경험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품성(稟性)이 성장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품성을 淨化시키기 위하여 돈을 사용합니다. 재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진정한 품성의 정확한 지표로 보고 있습니다.


David McConaughy는 그의 著書 “돈 그 산성시험(Money, the Acid Test, 1918)”에서 말하기를 “일시적인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돈은 특수하면서도 영구적인 결과를 내포하고 있다. 비록 무의식적일지라도 돈은 그것을 벌고 쓰고 저축하고 기부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변모시킨다. 돈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에 따라서 돈은 그 소유자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즉, 사람이 돈의 주인이 되거나 혹은 돈이 사람의 주인이 된다.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형상을 닮은 도구로 만들기 위하여 물질로써 우리의 삶을 시험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재정적으로 安定되며 자유로운 상태에서 주님의 召命을 다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財物을 관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부채로부터 멀어지고 지혜롭게 소비하게 되며 저축하게 되며 하나님께 더 獻身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우리의 충실함으로 우리는 만족(contentment)에 이르게 됩니다. 만족은 조용한 행복(quite happiness)을 말하며, 행복은 속박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에서 오는 편안함입니다. 이 행복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지는 것으로 우리가 충실히 청지기 소임을 다할 때에 이루어지고 나아가 만족함에 이르게 됩니다.



3. 노동(勞動)


지금까지 돈(財物)의 중요성과 하나님이 그 주인이심과 우리는 그 청지기 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돈과 財貨는 우리들의 실생활에는 꼭 필요한 것으로  하나님이 이의 공급자(provider)이시나 다만 우리들의 일함(work)과 노동(labour)을 통하여서 얻어지게 됩니다. (Our work is a process of participation in what God has already provided. The Lord is our provider; the job is only an instrument of His provision. ~ O S Hillman 목사)  富를 창출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자도 하나님이십니다.


1) 노동의 意味


전 동아건설그룹 회장 최원석씨는 회사가 부도로 넘어간 후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출근할 곳이 있다면 부러운 일입니다. 저는 출근할 곳이 없으니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습니다.(2001.7.2자 조선일보에서)” 라고 하였습니다.  노동도 행복이 됨을 느끼게 합니다.


동물에게는 생존을 위한 노동은 있지마는 의미를 갖게 하는 노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노동은 의미를 갖고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서의 노동의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이동원 목사)


첫째로 노동은 刑罰이 아닙니다. 인간이 犯罪하여 타락하기 이전에도 노동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즉 창세기 2장 1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Then the Lord took the man and put him into the Garden of Eden to cultivate it and keep it. NASB)"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담을 지어 만드시고 그로 하여금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신 것으로, 정확하게는 아담이 Cultivating 즉 경작하게 하시었다 노동하게 하시었다는 의미입니다(이동원 목사). 그러므로 인간의 墮落 이전에도 노동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인간타락이 노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즐거워해야 할 노동이 괴로운 노동으로 변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인류역사, 문화 발전에 대한 주요한 寄與중 하나는 노동의 神聖함을 강조해온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곳 마다 문화와 사회가 발전하여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었고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시었습니다.


둘째로 노동은 하나님의 召命입니다. 성경은 노동하는 自體를 귀하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노동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고는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榮光을 위하여 사는 것이므로 우리의 노동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에 그 진정한 의미가 발견됩니다. 고린도전서10장31절에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노동을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성실하게 일하는 것은 기본이라 할 것이고 나아가 일을 잘 해야 되고 또 좋아하는 일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을 잘하지 못하면 세상에서는 비난을 받으니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어렵고 또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좋은 成果를 지속적으로 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우리의 직업일 개연성(蓋然性)이 아주 높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에 干涉하시고 또 우리들을 攝理하시므로 우리들의 직업도 인도 하십니다.


창세기2장15절을 잘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직접 지으시고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개발하고 관리하는 일을 직접 아담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일을 맡기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이 소명(calling)이요 우리의 직업(vocation)입니다. Vocation이란 단어의 뜻도 본래 소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예전에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직업을 천직(天職)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보면 우리나라에도 하나님이 주신 어떤 일반계시 같은 감동이 있었다고 보기도 합니다(이동원 목사).


우리들이 직업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고 일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매우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설계된 것입니다. 창세기1장28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blessed them)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subdue the earth),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rule over)하시니라.”


하나님은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고 땅을 정복하라(開墾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땅을 잘 경작하고 개발하고 관리하라고 하시니 이는 노동행위이며 그러므로 노동은 주신 자녀와 같이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노동을 통하여 우리는 생계를 꾸리고 질적인 삶을 누리기도 하므로 축복이 되지만 기독교의 노동관은 여기서 더 나아가 노동의 결과로 나 뿐만이 아니라 이웃 까지도 복되게 합니다. 에베소서4장28절에는 “빈궁한자를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고 善한 일을 하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구제하기위하여도 일하여야하고 또 宣敎(mission evangelism)하기 위하여도 일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우리의 일하는 태도


골로새서3장23/24절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遺業의 賞(inheritance as a reward)을 주께 받을 줄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It is the Lord Christ you are serving).”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일의 목적이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나타내 보이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 속에는 주요한 사역(ministry)의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Our Work is Our Worship to God(우리의 일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경배입니다). Work 라는 단어와 Worship 이라는 단어는 모두 히브리어 avodah에서 나온 단어입니다(OS Hillman 목사). 주님이 우리의 삶을 완전한 제어(complete control)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예수님의 삶의 연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중에 주님이 살아계시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일하여야 할까요?


우선 우리는 부지런히 그러나 일중독(workaholics)에는 걸리지 않도록 적절한 휴식을 취하며 일하여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하는 동안 즐겁게 일하여야 합니다. 전도서3장22절에 보면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라(Nothing is better than that man should be happy in his activities, for that is his lot. NASB)”고 하였습니다. 축복 중에 축복은 일할 때에 즐겁게 일하는 것 이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救援 받을 때’에서의 구원은 우리의 回復을 말한다고 할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노동에 미친 영향은 즐거워야할 노동이 괴로운 노동이 된 것인데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기대를 회복 하여야 하는데 회복해야할 영역 중에 하나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으나 외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목공실에서 일하시면서 결코 그 아버지에게 불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웃으며 즐겁게 일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이동원 목사)


또 한편으로 우리들의 일의 가치(value)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있지 아니하며 예수님 안에서 발견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일의 成果 지향적인 삶(performance based life)'이 되어서는 아니 되며 이는 결국 우리들을 잡는 덧(trap)이 되고 맙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가치를 찾는 삶을 산다면 우리가 우리의 직업을 잃는 불행을 당한다고 하여도 이것이 우리를 황폐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비록 이는 많은 어려움을 가져오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일과 사건들을 調定하기고 編成하시는 분(orchestrator)이십니다. 역경의 시절도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곳이 있습니다.



4. 맺으면서


우리의 노동을 통하여 우리는 필요한 財物(돈)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3장11절에서 자기의 일에는 무관심하고 남의 일에만 분주한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이 있었음을 봅니다. 그런 자들에게 12절에서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settle down and earn the bread they eat, NIV).”고 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팽배했던 ‘재림이 임박했다’는 뜬소문으로 인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온한 마음으로 성실한 노동의 삶을 살라고 촉구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의 이단들처럼 오늘도 온갖 異端들은 현실과 괴리된 신비주의적인 말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건강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방해합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성실한 노동을 비웃으며 한탕주의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누가복음17장23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꿈꾸며 기도하되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현실의 이 땅에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수행하라고 맡겨주신 일들을 소명감을 갖고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맡겨주신 ‘양치기’일을 할 때 ‘마음의 성실함과 손의 공교함으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시편78장72절). 우리도 오늘 그렇게 일함으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그러한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은혜 베푸실 것을 믿습니다.


2006. 8. 5. 이주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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