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삶은 인도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다.
율법은 사랑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이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 속에는 수직적 사랑과 수평적 사랑이 모두 들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수직적 의무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수평적 의무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위를 쳐다볼 것과 옆을 쳐다볼 것을 모두 요구한다.
율법은 사랑하는 법을 자세히 알려준다. 사랑은 끓어오르는 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이다.
이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웃에게 반응하는 관계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2,13).
감정은 사랑의 결과 사랑은 태도에서 출발한다. 즉,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이런 태도는 다시 행동으로 발전하게 되고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행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태도와 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감정이다.
그러므로 감정은 사랑을 만들어내는 동인(動因)이 아니라 사랑의 결과이다.
올바른 순서는 태도, 행동, 그리고 감정이다. 이 순서를 거꾸로 만들려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근거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주의 절대적 창조주로서 나를 사랑하는 분이시다. 나는 그분에 대해 선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특별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이웃을 마치 하나님처럼 대하고 사랑해야 한다.
올바른 지식은 올바른 태도를 낳고, 올바른 태도는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진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이럴 때 그들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는 것이
너무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을 좋아하든 안 하든 간에 그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만일 차를 몰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의 차를 가로막으면 우리는 “너도 한번 당해봐라”는 심정으로 그의
차를 가로막을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비록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그의 입장을 이해해준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가 그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그를 대접함으로써 사랑을 베풀 수 있다(마 7:12).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부정적 감정들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그것들을 억압하거나 표현하거나 고백할 수 있다.
억압은 조만간 감정을 폭발시킬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억압된 감정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되게 마련이다.
분노나 증오 같은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은 그것들을 억눌렀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심리학자들은 표현 방법을 우리에게 권한다.
그러나 그 표현 방법이 원수에게 보복하는 것이라면, 결국 우리의 문제만 더 커질 뿐이다.
부정적 감정들을 고백하는 것은 성경적 방법이다.
우선 하나님께 고백하고, 필요하다면 상대방에게 고백하라(약 5:16).
요한일서 1장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가르친다.
부정적 감정들을 처리하는 기독교적 방법은 억압이나 표현이 아니라 고백이다.
사랑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2)
수직적 사랑과 수평적 사랑이 충돌할 때 사랑은 수직적이며 동시에 수평적이다.
수직적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수평적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사랑을 모두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때때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랑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17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나의 가족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내게 “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너는 그리스도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굉장한 갈등을 느꼈다.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였으며, 그 분들께 순종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분들께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께 불순종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하나님을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나의 부모님께 불순종해야 했다.
수직적 의무와 수평적 의무 사이에 불가피한 갈등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수직적 의무를 먼저 선택해야 한다.
예수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26)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 말씀은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가족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비교될 때 마치 미움처럼 보일 정도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라는 뜻이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내 부모님께 불순종한다고 해서 내가 부모님을 더 이상 공경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부모님께 필요한 도움을 드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들을 계속 사랑했다.
그 후 오래 가지 않아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헌신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내게 식사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몇 년 후 아버지가 병원에 계실 때 나는 그 분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었다.
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펼쳐서, 그 구절에 아버지의 이름을 넣어 읽어드렸다. 그 분은 반응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면서 동시에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할 수 있다.
때때로 사랑은 우리에게 매우 힘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했다(창 22장).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지극히 힘든 일이었지만, 히브리서 11장에서 증거하듯이 그는 이것을 믿음으로
행하려고 했다.
하나님이 중간에 개입하셔서 결국 이삭을 제물로 바치지는 않았지만, 그가 하나님께서 다른 제물을
준비하실 것이라고 미리 알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상에게 절하라는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거역했다(단 3장).
성경은 세상의 국가에 순종하라고 가르치면서도(딛 3:1 ; 롬 13:1 ; 벧전 2:13),
또한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국가를 향한 충성이 충돌할 때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가르친다(행 5:29).
이런 성경의 교훈을 잘 실천한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다. 그가 섬기던 다리오 왕은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겠다는(단 6:7)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애굽 왕은 두 명의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히브리 여인들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출 1:15,16). 그러나 이 두 산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순종했다. 이렇게 해서 많은 히브리 남자 아이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으며, 특히 모세를 살릴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수직적 의무와 수평적 의무가 충돌할 때 우리는 수직적 의무를 택해야 한다.
사랑의 성장
사랑을 실천할수록 사랑에 대한 나의 이해는 깊어진다.
구약의 아가서에는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가 나온다.
아가서에서 ‘노래하는 자’는 세 번에 걸쳐 연인들 사이의 관계를 잘 요약하여 표현해준다.
먼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 2:16)라고 말한다.
다음으로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아 6:3)고 표현된다.
끝으로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 7:10)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랑의 아름다운 성장을 보여준다.
첫째 단계에서 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다.
이 단계에서는 ‘내가 한 것’이 강조된다.
두 번째 단계에서 나는 그분이 나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가 강조되는데, 이것은 한층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나는 “내가 그분을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세 번째 단계 곧 가장 높은 수준의 사랑의 단계에서
나는, 그리스도가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사모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단계에서 나는 그분이 나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안식을 누린다.그렇죠?
- 노만 가이슬러, 기독교 교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