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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방 (2009-05-16 오후 10:19:27) http://blog.somang.net/1234/5015
                개혁신학회 2009년 봄 학술세미나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며 개혁신학회(회장 김인환 목사)는 "칼빈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2009년 봄 학술 세미나를 지난 3월 14일(토) 개최했다. 총신대학교에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는 모두 17명이 칼빈을 주제로 발제했다. 그중 8명의 발제문을 모았다.
   개혁신학회 http://www.srt.or.kr
 
                                <목 차>
 
  신약학 칼빈의 성경해석에 비추어본 한국 목회자들의 설교
  (유상섭 교수)
  신약학 칼빈의 제네바 시편찬송가 평가와 21세기 한국장로교회 찬송을 위한 제안

  (오광만 교수) 
  조직신학 칼빈의 칭의론과 한국교회

  (강웅산 교수)
  역사신학 칼빈의 목회관과 한국 교회의 과제 - 사회복지의 목회적 의미를 중심으로

  (안인섭 교수)
  조직신학 보혜사 성령의 구원 역사 : 칼빈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영 이해를 중심으로  

  (문병호 교수)
  조직신학 칼빈의 성경해석학 : 칼빈의 역사적 문법적 방법론에 대한 재조명

  (라영환 교수) 
  구약학 이사야 4:2에 나타난 칼빈의 성경해석 원리들 - 델리취와 비교의 관점에서

  (김진규 교수) 
  구약학 칼빈의 구약 성경 해석 방법

  (기동연 교수) 
 

       칼빈의 성경해석에 비추어본 한국 목회자들의 설교

                                                        유상섭 교수(총신대학교 신약학)

   1. 들어가는 말
 
   올해는 종교개혁의 꽃을 피우고 그 열매를 맺어 전 유럽과 전 세계 교회에 확산시킨 칼빈의 탄생 500주기를 기념하는 뜻 깊은 해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백성의 손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고 생명력 있게 듣게 해준 16세기의 종교개혁이야 말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쳤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본문에 충실한 강단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백성의 마음속 깊게 심어준 설교개혁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구교에 비하여 종교 개혁자들에게 설교가 엄청나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사실을 회고해 볼 때 칼빈의 성경해석 방법과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를 비교 분석함으로 어떤 점에서 칼빈의 성경해석방법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 미흡한 점이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교와 분석을 위해서 선정된 설교는 한국교회의 개혁주의 신학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본 교단의 목회자들의 설교 19편이다. 이들 설교는 합동 총회 교단지 기독신문에 2005년부터 2008년까지 게재된 [우리시대의 설교]에서 신약의 본문과 관련된 지상 설교들이다. 19편의 설교문은 모두 여섯 명의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설교했던 것을 교단지에 게재한 것들이다. 이들 대부분이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고, 이중에 두 분은 교수출신으로 한분은 신약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고, 다른 한 분은 설교학을 가르치신 분이다. 이 여섯 분의 설교자들은 합동교단의 중진으로 교단을 대표하는 분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이분들의 설교를 칼빈의 성경해석에 비추어 분석함으로 한국교회의 설교 현주소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본 글의 목적은 설교자 개인을 공격하거나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을 있고 있는 본 교단 목회자들의 설교 진단을 통하여 앞으로 나갈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므로 설교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논문의 전개는 먼저 칼빈의 성경해석 방법과 원리를 개괄적으로 제시하고 이어서 선정된 신약의 19편의 설교문을 칼빈의 주석과 비교하여 하나씩 설명하고자 한다. 이들 설교문들은 마태복음 4편, 누가복음 2편, 사도행전 5편, 로마서 4편, 에베소서 1편, 디모데후서 1편, 그리고 야고보서 2편이다. 이러한 비교 분석에 근거하여 앞으로 한국교회의 강단설교가 나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칼빈의 성경해석의 원리와 방법요약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일평생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죤 머레이(John Murray)는 칼빈을 가리켜 “칼빈은 종교개혁의 주해자요 모든 시대의 성경 주해가들 중에서 제 1급에 속한다.”고 잘 말했다. 칼빈의 성경해석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큰 논쟁에 없이 수용되는 입장이 있다. 그것은 칼빈이 사용한 성경해석의 핵심 원리는 간략함과 명료성(lucid brevity 또는 brevitas et facilitas) 또는 분명하고 간결함(perspicua brevitas 또는 clear brevity)이다.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기독교 강요와 주석들은 칼빈의 이런 원리가 구체적으로 적용된 것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성경의 내용들을 주제에 따라 교리적으로 정리하여 집대성한 그의 [기독교 강요]보다 성경 본문의 흐름에 따라 본문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주해해하여 놓은 그의 주석책들이 이 원리를 더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칼빈이 멜랑크톤(Melanchthon), 불링거(Bullinger)와 부처(Bucer)의 방법을 수용하지 않고 배격한 것은 그들이 쓴 주석에 사용된 방법들이 이 원리에 비추어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멜랑크톤은 그의 Loci Communes에서 사용한 방법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구절만 골라서 설명하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생략되는 부분이 많이 발생하게 되고, 반면 부처의 주석은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너무나 상세하게 설명하여 독자들을 지치게 만든다고 칼빈은 예리하게 지적했다. 따라서 이러한 폐단을 피하기 위하여 칼빈 자신은 주석을 쓸 때 일부만 선별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아주 상세하고 장황하게 풀어 놓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대신 주석을 쓸 때 항상 압축하고 짧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방법이 바로 간략함과 명료성 또는 분명한 간략성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주석자의 유일한 임무는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생각을 열어놓는 것이다"(to lay open the mind of the writer). 정경적인 해석방법을 창안하여 발전시킨 구약학자 차일즈(Childs)는 칼빈의 창세기 주석에 대한 평가에서 그의 주석은 “책의 문자적인 의미를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으로 특징 지워지는 작품”이라고 격찬하였다. 또한 로마서의 대표적인 주석가 중에 하나인 크랜피일드(Cranfield)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칼빈은 “기록된 단어들 가운데 표현된 대로 바울의 생각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신실하고 단순하고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저자는 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므로 해석자는 저자가 사용한 언어 속에서 성경 저자의 생각을 만나게 된다. 본문은 해석자가 저자를 만나는 유일한 장소이므로 해석자가 성경의 본문을 떠나서는 결코 저자의 생각을 파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칼빈이 일관되게 주장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다.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을 둘러쌓고 있는 문맥을 제대로 간파하는 것이다. 칼빈은 할례를 다루고 있는 창세기 17:9의 주해에서 "나는 여전히 문맥의 순서를 따를 것인데,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해석자의 임무에 더 적합하다."고 말했다. 칼빈에게 성경 해석자가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해 주목해야 할 문맥은 본문을 둘러쌓고 있는 직접적인 문맥과 성경 전체의 문맥을 모두 의미한다. 성경 해석자는 성경본문의 원래적인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되는 데, 그 일례로 칼빈은 이사야 14:12를 주석하면서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란 문구를 사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맥을 무시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칼빈은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 전체 문맥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여기에 말해진 것은 앞에 진행된 것에 의존하므로 이것들은 한 문맥 안에서 동시적으로 읽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칼빈은 문맥에 근거하여 파악되는 문자적인 의미에 충실했기 때문에 초대교회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그 당시에 무르익어 절정에 도달했던 소위 성경의 사중적인 의미는 물론 알레고리칼 해석을 모두 배격했다. 그에게 문자적인 의미는 표현방식의 성격을 감안하여 상징적인 설명을 비롯한 문법적이고 수사학적인 의미를 포함하며, 동시에 문법적, 역사 지리적, 사회적인 상황들을 고려하여 해석한다.

   이와 같이 본문의 문맥적이고 문자적인 의미에 충실을 기하여 저자의 생각을 파악하고 설명하려는 성경해석과 주해의 원리는 칼빈의 설교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설교자의 임무는 성경해석자의 임무와 같이 “성경을 주해하는 것, 즉 하나님의 음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경에 계시되고 기록된 것만을 선포해야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본문과는 상관없이 설교자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성경을 주해하고 해석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뜻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칼빈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청중들은 성경의 본문에 충실한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신 말씀을 듣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설교자의 가르침이 성경에 충실하면 바로 그 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가르침의 전달자가 누구든지 전혀 상관이 없다. 남아 있는 칼빈의 설교들은 성경의 해당 책들에 대한 연속적인 주해설교이다. 그는 성경의 본문 말씀에 충실을 기하기 위하여 원어성경을 직접 사용하여 아무런 노트 없이 설교를 하였다. 칼빈은 성경의 메시지를 후대의 청중들에게 적용할 때는 주어진 글의 시대적인 상황을 우선적으로 잘 이해하고 이것이 후대와 상황과 어떻게 유사하거나 다른지 파악한 후에 적절한 적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3. 목회자들의 설교분석과 평가

   선정된 신약설교 19편을 설교자 별로 구분하기 보다는 성경 별로 구분하여 칼빈의 주석에 나타난 성경해석의 원리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신약성경의 순서대로 열거하면 마태복음의 설교 4편, 누가복음의 설교 2편, 사도행전의 설교 5편, 로마서 설교 4편, 에베소서 설교 1편, 디모데후서 설교 1편, 그리고 야고보서 설교 2편이다.

   3.1. 마태복음 설교 4편의 분석과 평가

   검토할 네 편의 마태복음 설교는 3명의 목회자가 한 설교로 순서대로 “엎드려 경배하라”(마 2:1-12), “연약함에 담긴 진리”(마 8:14-17), “예수님이 감동하신 큰 믿음”(마 15:21-28), 그리고 “먼저 된 자가 되자”(마 20:1-16)이다.

   첫 설교 “엎드려 경배하라”(마 2:1-12)에서 설교자는 본문에 분석에 근거하여 본문의 세 핵심적인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성탄절에 깨달아야 할 메시지를 제시한다. 이들 세 종류의 등장인물은 헤롯,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동방박사들이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의 모습은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서 세상 욕심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성경에 능통하지만 “형식과 습관에 젖어서 화석처럼 굳어져 버린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외형적으로는 신앙의 습관과 틀이 잡혀있어 신앙인으로 빈틈이 없어 보이지만, 그 내면에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려준다. 오늘날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동방박사들은 부족한 성경지식과 신앙에도 불구하고 아기 예수가 초라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것에 실망하지 않고 그들의 겸손하고 순수한 영으로 왕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동방박사들은 오늘날 “겸손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귀하게 여기는 자”의 모습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설교는 본문의 세밀한 분석에 근거하여 절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지는 아니했지만 본 단락에서 핵심적인 세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본문의 내용을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설교는 두 가지 면에서 본문에 전혀 근거가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찾아온 동방박사는 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동방박사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께 드린 세 선물에 근거하여 이들이 세 사람으로 단정하는 것을 반대한다. 오늘 마태복음의 주석가들은 칼빈의 이러한 견해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또 다른 문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방문했을 때 그는 초라한 또는 더러운 마구간 누워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2장에 기록된 아기 예수 탄생기사에 비추어 본문의 탄생기사를 그릇되게 읽은 결과이다. 마태복음 본문은 어디에서도 아기 예수님이 있는 장소를 마구간으로 밝히지 않고 막연하게 아이가 있는 곳이라고 말할 뿐이다(2:9). 더욱이 예수께서 탄생하신지 상당 기간이 지났는데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마구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문을 상세하게 보지 못한 결과이다. 이상하게도 칼빈도 문맥이나 내용을 주목하지 않고 아무런 증거 없이 그리스도가 마구간에 누워있었다고 말하는 실수를 범했다.

   두 번째 설교 “연약함에 담긴 진리”(마 8:14-17)에서 설교자는 현대인들이 “칭송과 인정을 받는 높은 자리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것과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 사람들을 섬기신 것을 강조한다. 이 설교는 예수께서 취한 이러한 섬김과 연약함의 길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렀음을 밝힌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우리들이 “이 섬김과 연약함의 길에 들어설 때 비로소 주님과 같이 소자들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 반면 칼빈은 8:14-18의 단락에서 이사야 53:4를 인용하는 17절에만 초점을 두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의 핵심은 예수께서 행한 각종 육신적인 질병의 치유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각종 영적인 은혜를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단락 구분에 있어서는 칼빈이 8:14-18로 구분한 것보다 설교자가 8:14-17로 구분한 것이 더 자연스럽다. 저자 자신이 밝히는 본단락의 목적은 예수께서 행하신 각종 귀신축출과 병고침이 십자가와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밝히는데 비하여 이 설교는 예수님의 섬김과 연약함의 길을 신자들이 참여할 것을 권고하는데 초점이 있다. 설교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인정하지만 본문의 의도에 충실 하는 것이 낫지 않는가 한다. 이런 취지의 설교를 굳이 하려고 한다면 섬김과 연약함의 주제와 더욱 분명하게 연결된 마태복음의 다른 본문들(18:5-10; 25:31-46)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세 번째 설교 “예수님이 감동하신 큰 믿음”(마 15:21-28)은 흉악한 귀신에 들려 고통당하는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의 끈질긴 간청과 예수님의 반응과 칭찬을 기록하는 기사이다. 이 설교는 예수께서 여인의 믿음을 의도적으로 시험하신 것을 밝히고 여인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믿음을 가졌음을 역설한다. 이 기사가 주는 두 가지 교훈은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예수께 나오기만 하면 큰 은혜를 받는다.”는 것과 “무슨 말씀이든지 겸손히 ‘아멘’ 하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본문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헬라어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 “엘레에손 메”(22절), “보에쎄이 모이”(25절), “프로세퀴네이”의 어원적인 또는 사적적인 의미를 설명한다. 이러한 시도는 본문의 뜻을 잘 파악하고자 하는 좋은 시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헬라어 단어나 문구에 대한 설명은 과장되거나 부정확하다는 것이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네 소원대로 되리라”를 “원하는 만큼 가져갈지어다”로, 부정과거 명령어로 사용된 “엘레에쏜 메”가 “단 한번만 불쌍히 여겨 달라”로, “보에데이 모이”를 “위험에 빠진 사람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라”는 뜻으로 각각 설명한 것은 무리한 해석으로 보인다. 

   이 설교는 본문에 대한 칼빈의 설명과 비교해 볼 때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칼빈도 예수께 찾아온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지 인정한다. 그는 또한 예수께서 여인에게 처음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힌다. 또한 칼빈의 단락구분과 이 설교의 단락구분이 일치한다. 이 점에서 본 설교는 칼빈의 성경해석과 대체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은 본 설교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에게 특별은총(구원의 은총)이 부어질 시대가 되지 않았다는 진술을 하지 않는데 비하여 칼빈은 이러한 인식을 본문 설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칼빈은 마태복음의 병행기사에만 등장하는 문구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보냄을 받았다”(24절)는 설명에서 이 주장을 상세하게 확대하여 제시했다.   

   설교 “먼저 된 자가 되자”(마 20:1-16)는 다섯 차례에 걸쳐서 포도원에서 일을 일꾼을 고용하여 모두에게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 제공한 관대한 주인의 비유이다. 이 설교는 이 시대의 고질적인 양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성경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 설교의 부제는 “나눔이 천국의 원리입니다. 먼저 와서 더 많은 수고와 헌신하는 성도돼야”이다. 설교자는 우리가 이 세상의 가르침에 굳어져 있기 때문이 이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하고, 본문은 “세상 논리 속에서 어떻게 천국을 세워 갈 것인가?”를 알려준다고 말한다. 본문 근거하여 제시된 세 가지 핵심요점은 “부르심의 목적에 충실하자”, “선한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부르신 주님의 뜻이다”, 그리고 “모두가 먼저 된 자가 되자”이다. 이 설교 자체는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반영하며, 선의 (절대적인) 기준에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밝힘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중 하나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그러나 먼저 온 사람들이 원망한 것은 “주인이 부른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는 설명은 주장의 근거가 없다. 또한 우리 “모두가 먼저 된 자가 되자”는 두 번째 대지는 본 비유의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 설교의 마지막 적용에서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자의 많은 수고를 통해 동일한 품삯을 받게 되어 먼저 된 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먼저 된 자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본 받아 자신도 잘 세워져 자기보다 더 나중 된 자를 위해 수고와 결과를 동일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권고는 본 비유에서 끌어낼 수 없는 인위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반면 이 비유에 대한 칼빈의 설명은 문맥적인 흐름을 반영한다. 칼빈은 이 비유를 19:30의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의 말씀의 확증과 구체적인 적용으로 해석한다.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선언하시는 것은 신자들이 참여할 “천상적인 영광의 동등성”이나 “경건한 자들의 미래 조건”에 관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실 때마다 일시적으로 무시했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불러 먼저 부름 받은 사람들과 동등하게 하시기 때문에 먼저 부름 받은 사람들은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모독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그의 백성이 진보를 이루도록 계속적으로 노력하도록 촉구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나 신자에게도 빚을 지지 아니하며 그의 요구는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며, 그가 주시는 상급은 노력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순전히 은혜로 주신다. 칼빈은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도, 택자와 버림받은 자를 비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부름 받은 자들은 더욱더 민첩하게 나아가고 겸손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에 빠지지 말며,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공통적인 상급을 나눌 것을 권고한다.”고 결말을 맺는다.      
    
   3.2. 누가복음 설교 2편의 분석과 평가

   누가복음의 두 편 설교는 “어부를 낚으신 예수님”(5:1-11)과 “평화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9:46-50)이다. 첫 번째 설교 제목에 드러나듯이 설교자는 본문의 핵심을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은 베드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어부로 낚으신 예수님에게 있다고 밝히는 것으로 출발한다. 이 설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의 계시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접근이나 교훈 위주로 성경을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잘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설교는 본문의 기사에서 세 가지 핵심을 제시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실패자 베드로에게 의도적으로 찾아오셨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셨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기적을 일으켜 주셨다. 이러한 세 핵심은 본 기사의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얻은 통찰에 근거한 것으로 타당하다. 첫 번째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베드로의 실패를 강조하여 “어장을 잃고 파산상태에 있었다.”는 언급과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강조는 본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두 번째 요점은 예수님의 말씀운동의 문맥에서 볼 때 아주 적절한 핵심이다. 세 번째 요점과 관련해서 설교자는 예수께서 기적을 통해 “창조주로서의 권능으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었다”것과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은 대로 순종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잘 피력한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이 본문의 적용으로 신자들이 “베드로와 같은 전도자의 소명과 사명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데 각각 소명을 주셨다.”고 밝힌다.
 
   이 본문에 대한 칼빈의 주석은 본질적으로 이 설교의 핵심내용과 일치한다. 이와 관련하여 지적할 세 가지 내용은 예수께서 배움이 부족한 베드로를 부르신 것은 “육신의 교만을 겸손하게 하고 영적인 은혜의 놀라운 예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 놀라운 양의 고기 어획의 기적은 예수께서 가지신 신적은 능력 또는 신성을 입증했다는 것, 그리고 칼빈도 설교자와 같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받은 특별한 소명과 일반 신자들이 받은 소명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설교문의 두 번째 요점인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셨다.”는 주장은 칼빈의 설명에는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 설교는 칼빈이 간과한 부분을 본문의 문맥과 강조점에 따라 잘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점에서 칼빈의 주석보다 더 전진했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칼빈과 이 설교는 모두 예수께서 행한 기적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확장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예수님의 신성 또는 그의 신적인 능력을 입증한 것으로만 해석한 것은 오늘날 많은 신약 학자들이 예수님의 각종 기적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다소 아쉽다.
 
   누가복음의 두 번째 설교는 “평화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9:46-50)이다. 본문의 내용은 큰 자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46-48)과 어떤 사람의 귀신축출과 관련된 사건(49-50)이다. 이 설교는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직장이든 가정이든 교회는 인간관계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본문에서 두 핵심적인 가르침을 도출한다. 두 교훈은 “작은 자를 귀하게 보는 눈이다.”와 “모든 사람을 동역자로 볼 수 있는 시각이다.” 전자의 교훈은 큰 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논쟁기사와 관련되어 있고, 후자의 교훈은 귀신축출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본문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두 시각을 각종 사회적인 갈등 속에 살아가는 신자들이 자신의 것으로 삼아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이 설교는 본문의 내용에 근거한 아주 쉽고 성경적으로 건전한 설교로 보인다. 물론 이 설교에서 적용이 본문의 설명보다는 우선하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본 기사를 12 제자들의 사명과 예수님 체험의 중요성을 핵심적으로 다루는 9장 전체의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문맥에서 떼어서 본문이 설교되었다는 것이다. 칼빈의 주석은 큰 자에 대한 논쟁 기사를 마태복음의 기사(18:1-5)를 중심으로 설명하며 누가의 병행기사는 별도로 다루지 않았다. 또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귀신을 축출한 기사를 마가복음의 병행기사(9:38-40)를 중심으로 설명하여 누가복음의 병행기사를 따로 취급하지 않았다. 칼빈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축출한 어떤 사람을 책망하여 금한 것은 성급하게 권한을 남용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귀신을 축출할 권한 부여받은 것을 인정하는 것도, 그가 행한  것이 바르다고 하는 것도 아니며, 그의 귀신축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된 것을 제자들이 인정해야 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마가복음의 관점에서만 기록하다 보니까 칼빈은 제자들이 그로부터 귀신을 축출할 권세를 부여받았지만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자들의 귀신 축출과 관련하여 그들의 실패는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는 누가의 언급(9:6)에 암시되어 있고, 아홉 명의 제자들의 명백하고 공개적인 대 실패는 예수께서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있을 때에 산 밑에 있는 마을에서 나머지 제자들이 귀신들려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에게서 귀신을 축출하는 데 실패한 사건에 완전히 공개적으로 폭로되었다(9:37-43a). 이것은 마가복음의 병행기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9:14-29). 이와 같이 귀신들 쫓아내는 데 실패한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금한 것은 문맥적으로 명백하다. 이런 점을 칼빈이 주목을 했다면 본 사건을 좀 더 정확하게 설명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3.3. 사도행전 설교 5편

   여기서 검토할 5편의 사도행전 설교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과 약속과 축복”(1:4-14), “성령과 거룩한 교회”(5:1-5), “세상이 무너뜨릴 수 없는 교회”(5:38-39), “성령 충만한 성도”(7:55-60), 그리고 “성경을 강론하자”(17:1-16)이다. 다섯 편 중 마지막 설교만 제외하고 한 목회자의 설교이다. 네 편의 사도행전 설교는 사도행전의 연속 설교로 생각된다.

   첫째 설교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과 약속과 축복”(1:4-14)의 설교제목이 시사 하듯이 설교의 세 핵심 대지의 주제는 예수님의 명령과 약속과 축복이다. 그 가운데 가장 부각된 것은 축복이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명령을 하셨지만 그중 그의 마지막 명령은 마음만 먹으면 행할 수 있는 쉬운 명령이다. 이 명령은 곧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다(1:4). 예수께서는 이 명령 속에 들어 있는 약속은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5절). 이 약속이야 말로 제자들이 받을 최상의 축복이다. 이 축복의 약속을 받기 위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유일하게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예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목적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 말씀의 적용으로 신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믿고 기다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이 기다림은 단지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의 기도”로 기다리는 것이다. 

   이 설교는 아주 쉬우며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에 따라 대지를 정하고 논점을 잘 제시한다. 이 설교는 제자들이 행한 것과 같이 행하면 우리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제자들의 성령 받음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결실과 열매이며 이 열매는 최초로 그들에게 주어진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또한 신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먼저 적용의 차원에서 권고의 말씀을 하기 전에 120여명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성령 받게 된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예수께서 완성한 구원역사의 선상에서 이와 같은 권고가 주어졌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칼빈의 주석은 바른 방향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설교는 “성령과 거룩한 교회”(5:1-5)이다. 본문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갑작스런 죽음을 다루는 기사 중 아나니아와 사도 베드로의 대면과 그의 즉각적인 죽음과 관련된 부분이다. 설교자는 들어가는 말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며 동시에 몸이고, 신자들은 팔다리와 같은 지체라는 사실을 밝힌다(고전 12:27). 몸이 아플 때에 치료를 받거나 심각할 때는 수술을 해야 하듯이 교회도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손을 들어 대수술을 하신다. 이러한 대수술의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본문이 기록하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의 이상적이고 거룩한 모습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자 병든 지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제거하셨다. 이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처분하여 얻은 돈을 욕심에 사로잡혀 일부 감추어 교인들 앞에서 명예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 돈의 일부를 숨긴 사실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친 것으로 행동했다. 사도 베드로가 진상에 대하여 물어볼 때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이 유일한 회개의 기회를 상실하게 그 현장에서 즉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한꺼번에 불러 가신 것은 “거룩한 교회를 주도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욕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알곡이 자라는 밭에 잡초를 뽑아내는 것처럼 이들을 솎아내신 것이다. 교회의 거룩함을 훼손한 그들은 잡초요 사단의 도구와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의식하고 성도들은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고  이를 어떠한 경우에도 훼손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사건에 대한 칼빈의 주해와 비교해 볼 때 이 설교는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칼빈의 설명이 상세하나 그 핵심적인 면에서 유사하다. 첫째로, 칼빈과 이 설교는 아나니와 삽비라의 사건을 하나님께서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 취하신 심판의 사건으로 본다. 둘째로, 이들 부부가 돈의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를 전부인 것처럼 받친 사건에서 사탄의 역사가 있었음을 시인한다. 셋째로, 본 설교가 한편으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병든 지체로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잡초와 같은 존재로 보며, 칼빈은 이들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 이들을 불신자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둘 다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한다.
 
   이 설교는 칼빈의 주석보다 한 가지 면에서 더욱 성경적인 측면이 있다. 이것은 칼빈은 사단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 찼다고 그릇되게 설명한 반면, 이 설교는 우리 말 성경 개역판과 개역개정판에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란 문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입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설교자는 사단이 “아나니아의 부부 속에 거짓된 마음을 (넣어) 주었다”고 잘 지적했다. 칼빈은 사단이 이들의 마음에 가득 찬 것과 관련하여 설명하기를 “사단이 마음을 사로잡은 곳에는 마치 하나님을 추방한 것과 같이 그가 전인격에 다스린다.”고 설명했다. 이것이야 말로 배도자의 표시라고 칼빈은 주장했다. 필자는 사도행전 주석에서 이와 같은 해석과 주장이 얼마나 성경적으로 타당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역설하였음으로 여기서 별도의 논박하지 않고자 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이 설교는 칼빈의 주석과 맥을 같이하면서 동시에 그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검토할 세 번째 설교는 “세상이 무너뜨릴 수 없는 교회”(5:38-39)이다. 설교를 위해 선택된 두 구절은 산헤드린의 결정을 다루는 단락(5:34-39)의 결론부분이다. 칼빈도 본 단락을 동일하게 구분했다. 설교는 초대교회로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핍박의 역사에 대한 개괄로 시작된다. 오늘 한국교회가 반기독교적인 세력들에 의하여 전 방위적으로 공격과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이 설교는 본문의 사건에서 찾는다. 설교의 두 소 대지는 예루살렘 교회는 도전받는 거룩한 교회였으며 동시에 도전을 극복한 거룩한 교회였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았을 때 이 속에서 영적인 대결을 인식하고 한편으로는 간절한 기도로, 다른 한편으로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복음을 담대히 증언하여 지혜롭게 잘 대처했다. 교회의 기도와 관련해서는 사도들이 투옥되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로 모여 철야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밤중에 옥문을 열고(5:19) 사도들을 “기도하고 있는 교회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와 같이 한편으로는 교회가 거룩한 본질을 회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을 담대하고 왕성하게 선포하고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할 때 위기를 잘 극복할 것이라고 권면한다.

   이 설교는 대체적으로 무난한 설교이다. 그러나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이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 비추어 볼 때 한 가지 본문이 언급도 암시하지 않는 것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문제점이 있다. 이것은 사도들이 잡혀 갔을 때 예루살렘 교회가 철야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5장 어디에도 사도들의 투옥문제로 교회가 철야 기도했다는 언급도, 천사들을 통한 사도들의 극적인 구출이 기도의 응답과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사실 사도행전은 신약에서 기도를 가장 많이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5장과 일부 장에서 기도를 언급하지 않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분명 이것은 본문이 분명하게든 암시적으로든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칼빈의 성경해석의 원칙에서 벗어난다. 칼빈은 이 기사에 대한 설명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를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사도들의 기적적인 출옥과 관련하여 교회의 기도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간섭하신 특별한 역사로 이해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 기사의 핵심적인 교훈은 교회와 복음의 증인들은 어떠한 반대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가말리엘과 같은 인물을 사용하심)과 보호하심(천사를 보내 사도들을 구출함)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담대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분석할 설교는 “성령 충만한 성도”(7:55-60)이다. 성경본문의 내용은 산헤드린 법정에서 스데반이 행한 변호연설의 마지막 증언과 이로 인한 그의 순교와 용서기도이다. 이 설교는 스데반이 증언한 내용보다는 그가 성령 충만한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이 설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종류의 복 가운데 성령 충만이 가장 큰 복이며 성령 충만의 대표적인 인물로 스데반을 소개한다. 먼저 그는 스데반이 어떻게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주목한다. 스데반은 집사로 선택되기 전에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심지어 순교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한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성령 충만에 대하여 언급하는 구절들을 종합하여 추론한 결과이다(행 6:3, 10; 7:55). 스데반이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하게 된 비결은 그가 말씀 충만했다는 것과 순교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본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말씀 충만했다는 것은 7장에 상세하게 기록된 그의 변호연설을 통해 추론한 주장이다. 이것은 통찰력 있는 요점이다. 그가 끝까지 예수님을 본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7:59)와 죄용서를 위한 기도(7:60)에 분명하게 등장한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것과 관련하여 본문에 명시되거나 암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는 “스데반 집사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가운데서 그는 예수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설교자의 상상을 객관화한 진술이다. 말씀의 적용과 권고로 이 설교는 성도들이 그와 같이 성령 충만하고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성도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검토할 설교는 “성령을 강론하자”(행 17:1-16)이다. 설교의 핵심주제어는 "교회개혁은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성경 깊게 깨닫고 신앙생활 적용 돕는 강해설교가  발전 돼야”된다는 것이다. 본문의 줄거리를 개괄적으로 말하면서 “복음의 승리에는 반드시 핍박과 박해가 뒤따른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세계 선교를 위해 배후에서 섭리하며 간섭하신다.” 사실을 지적한다. 이 설명과 함께 사도들의 성령운동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 강론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본문이다. 설교의 세 소 대지는 바울은 “성경의 뜻을 열어 주장”함, “구속사적인 강해설교”, 그리고 “말씀이 말씀되게 해야”이다.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증거했다(17:2-3)는 것은 강해설교의 원리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오늘의 설교자들 중 다수가 “자기 사상 증거를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나 성경 그 자체를 강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좀 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교회가 되려면 흥미 위주의 예화나 간증보다도 성경본문을 깊이 깨닫게 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하는 강해설교가 많이 발전되어야 합니다.”라고 역설한다. 이어서 바울이 행한 강해설교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어졌다. 이 사실에서 바울의 설교는 “신구약의 모든 사건들에 대하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둔 구속사적인 강해설교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피력한다. “말씀이 말씀되게 해야”는 소 대지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이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에 속속 증거되어 전체 유럽이 말씀으로 변화되고 결국은 또 다시 종교개혁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중요한 주장은 데살로니가 교회(살전 2:13)와 베뢰아 교회(행 17:11-12)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설교은 칼빈의 주석과 비교해 볼 때 일맥상통한다. 칼빈은 먼저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므로 어떠한 가르침과 배움의 규칙도 성경이외의 다른 곳에서 취해서는 안 된다.”는 좌우명을 피력한다. 이 관점에서 그는 당시 천주교의 잘못된 성경관(예를 들면, 성경의 불확실성, 불분명성과 이로 인한 사람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공격한다. 칼빈은 성경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모든 논쟁에서 있어서 성경의 증언은 경청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3.4. 로마서 설교 4편

   분석할 네 편의 로마서 설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8:31-39), “천국행 KTX를 타십시오”(10:9-10), “하나님께 영광을”(11:34-36), “의인의 삶”(12:9-21; 14:17)이다. 이것들은 교수 목사 두 분과 목사님 두 분의 설교이다. 첫째 설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8:31-39)의 대지 셋은 신자는 “반드시 승리한다, 신자를 정죄할 자가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이다. 이 설교는 본문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개되었다. 결코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세상의 각종 한정된 사랑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영원한지 실감나게 한다.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이 본문(31-39절)을 네 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한다(31-34, 35-37, 38-39). 내용상에 있어서 칼빈의 설명이 상세하다는 차이점 외에 이 설교는 칼빈의 핵심적인 주장과 큰 차이가 없다. 위의 설교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란 진술(31절)이 “우리가 더 이상 말 할 수 없는 만큼 감격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칼빈도 “이 말씀은 모든 시험에서 우리를 지탱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지지이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설교 “천국행 KTX를 타십시오”(10:9-10)는 새 생명 축제 때 교회에 초청을 받은 불신자를 대상으로 할 일종의 구원 초청의 설교이다. 이들이 불신자인 것을 감안 탓인지 이 설교는 본문 설교보다는 주제설교에 가깝다. 이것도 구원에의 초청에 중점을 둔 적용 중심의 설교이다. 천국행 특급열차 KTX (Kingdom Train Express)란 문구는 아주 참신한 표현으로 한국에 KTX를 건설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해결해야 했던 것같이 하나님께서 천국행 KTX를 건설할 때 죄의 난제를 실감나게 설명한다. 보통사람들이 하루에 죄를 3번 범한다고 할 때 80년을 살면 8만여 번의 죄악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죄를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르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망 구렁텅이 위로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천국행 KTX를 개통시켰다.” 이제 이 KTX를 타는 방법은 마음 중심으로 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입술로 이 사실을 고백하는 믿음이다.

   이 은유적인 설교를 칼빈의 설명과 비교해 볼 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입술의 고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 자체보다는 그 구체적인 표현인 입술의 고백이라는 점을 잘 지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10:12-13의 단락은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이 얼마나 필요한지 설명한다고 말한다. 
  
   세 번째 설교 “하나님께 영광을”(11:34-36)에서 설교자는 개혁주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주권사상을 잘 보여주는 36절에만 초점을 맞춘다. 설교자는 이 본문이 로마서의 교리 부분을 마감하는 결론부임을 잘 지적한 후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란 36절의 진술은 인간의 모는 사상 체계의 골격이라고 말한다. 곧 이어서 이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공산주의의 유물론적인 세계관, 현대교회의 물질만능주의 사상과 이 시대에 만연한 인본주의 사상을 비판한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 때문에 감격과 감탄에 사로잡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이다(36절 마지막 부분). 설교의 적용적인 결론으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인본주의적인지 신본주의적인  지를 따지고 묻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설교는 이 시대에 만연한 유물론적인 사상과 인본주의 사상을 의식하고 이를 대처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본문이 표방하는 철저한 하나님 중심 사상을 아주 잘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모든 만물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에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본 설교가 강조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이와 같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인본주의 사상과 유물론적인 사상과 같은 것을 배격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이 로마서 12-16장의 가르침에 따라서 신자의 실천적인 삶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와야 한다는 점을 언급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네 번째 설교 “의인의 삶”(12:9-21; 14:17)은 본문 전체에 대한 설교가 아니고, 이중에서 일부 구절을 선택하여 한 주제 설교이다. 단락의 선택은 문맥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으나, 선택된 소대지에 대한 설명은 대체적으로 문맥의 의미와 역할을 반영하지 않는다. 이 설교의 세 대지는 “의인의 삶은 사랑을 실하는 삶이다”(12:9, 19-21), “의인의 삶은 기도로 사는 삶이다”(12:12), “의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14:17)이다. 세 대지를 설명하는 내용들은 성경 여기저기에서 인용된 성경구절들이다. 그 결과 문맥 속에서 볼 때만 비로소 제대로 파악되는 의미가 반영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예를 들면, 롬 12:12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란 문맥에서 기도에 힘쓸 것을 권고하는데 반하여 본 설교는 이를 주목하지 않고 단지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엡 6:18의 말씀을 인용하고 이어서 기도와 관련된 구절들을 언급한다. 또한 셋째 대지 “의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에서 설교자는 롬 14:17의 본문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말하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고 여기서 단어 “성령”에 주목하여 성령 충만의 관점에서 요점을 개진한다.    

   이 본문과 관련된 칼빈의 주석은 우선 12:9-21의 단락을 더 세분하여 넷으로 나눈다(9-13, 14-16, 17-19, 20-21). 칼빈은 특히 12:11의 “열심을 품고”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에 주목을 한다. 만일 이러한 사실을 설교자가 주목을 했더라면 성령 충만과 관련된 셋째 대지를 본문의 문맥에 충실하게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3.5. 에베소서 설교 1편

   설교 “감사에 에이 프러스(A+)"(5:18-21)는 선택된 18-21절에 대한 전체 설교가 아니고, 20절의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에 초점을 둔 일종의 주제설교이다. 설교는 선천적으로 면역성이 없는 아이로 태어난 12살의 소년 데이비드가 한 말 “저는 맨발로 풀밭을 걷고 싶어요.”로 시작하여 세 대지 “바울의 감사”, “감사의 비결”과 “성령의 감동”을 담고 있다. 바울의 감사와 관련해서는 투옥 중에서도, 질병 중에도, 그리고 각종 역경 중에서 바울이 감사한 것을 언급한다. 감사의 비결로는 겸손한 은혜의식, 가시(역경)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교인들은 감사대학에 다니는 평생학생으로 감사 학점을 에이 플러스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권고한다.

   이 설교는 내용적으로 볼 때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을 잘 반영하는 아주 실천적이며 청중이 이해하기 쉬운 좋은 설교이다. 그러나 선택된 본문의 문맥적인 흐름 속에서 ‘감사’를 다루지 않고 있다. 칼빈은 이 설교의 초점인 20절의 주해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수없이 많은 은택들은 기쁨과 감사의 신선한 원인들을 낳는다.”고 말함으로 설교자가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혜들이 신자들로 감사하게 한다는 요점을 지지한다. 범사에 감사할 것을 촉구하는 본문이 속한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혜들은 구체적으로 밝혔다면 본문의 설교는 문맥과 본 서신의 흐름을 충실하게 반영했을 것이다.

   3.6. 디모데후서 설교 1편

   해당 설교는 연말에 행해진 “선한 싸움과 의의 면류관”(4:7-8)이다. 이 설교는 본문의 각 절을 중심으로 문맥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해설교에 속한다. 설교의 다섯 가지 핵심은 바울이 (1)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음(8절의 “재판장”에서 추론함), (2) 전쟁하듯 사역을 감당함(7절), (3) 오늘을 그날, 곧 재림의 날처럼 삶(8절의 “그날”), (4) 하나님의 영광만 목적하고 힘씀(문맥에서 등장하는 “주”에서 추론함) 그리고 (5) 겸손으로 주의 일을 감당함(8절의 “내게만 아니라 모든 자에게니라”에서 추론함)이다. 이들 핵심들은 분명하게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잘 반영한다는 점에서 설교가 개혁주의 신학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핵심에 대한 설명에서 이 설교는 바울로 하여금 전쟁과 같은 사역에서 승리하게 하신 분이 성령님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본문이 설명하거나 혹은 강조하거나 심지어 암시하는 내용도 아니다. 또한 다섯째 핵심인 겸손으로 주의 사역을 감당했다는 것은 8절의 의의 면류관이 자신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바라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마련되어있다는 말씀에서 추론되었다. 하지만 8절이 강조하는 것은 의의 면류관의 보편성이지 바울의 겸손한 사역으로 보기 어렵다. 반면 바울이 모든 겸손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은 그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한 마지막 설교에 잘 나타난다(행 20:18-21). 8절에 대한 칼빈의 설명에서도 바울이 그의 사역을 겸손으로 감당했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요점은 다소 무리가 있다.  

   3.7. 야고보서 설교 2편

   두 편 설교는 “시험 중의 온전한 기쁨”(1:2-4)과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4:13-17)이다. 첫째 설교는 시험에 대한 일반적인 세 태도를 언급하면서 신자들이 본문이 제시하는 태도(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김)를 가질 것을 권고한다. 이어서 설교는 환란과 시험가운데 어떻게 온전히 기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이것들은 (1)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준다는 것, (2)성숙한 신앙인격을 만들어 준다는 것, (3)환란 중에 하나님의 보호가 있다는 것, 그리고 (4)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신 다는 것이다. 이중 (3)은 벧전 1:5-6에 근거한 내용이다. 이 설교는 본문을 설교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다른 성경구절을 삽입하여 설명하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주제설교와 주해설교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설교로 보인다. 하지만 2절의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에 대한 설명에서 “기뻐한다는 헬라어 의미는 자랑할 것이 가득차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 최고조의 상태,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는 주장은 부정확한 설명일 뿐만 아니라, 전혀 근거가 없다. 인용된 행 5:41의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도 이 설명을 지지하는데 부족하다.  

   이 설교가 독자들이 처해있는 시련에 대하여 구체적인 진술을 일체하지 않는데 반하여 칼빈은 1절에 대한 설명에서 독자들이 유대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신자로 고통을 받는 사실을 언급한다. 칼빈은 모든 역경을 포함하여 각종 시련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또한 시련들이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역할을 하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속에는 육신의 악덕들이 계속적으로 발아하기 때문에 시련들이 필연적으로 반복돼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검토할 마지막 설교는 “너희 인생이 무엇이뇨”(약 4:13-17)이다. 설교의 부제목은 “안개 같은 인생, 기도가 등불입니다”이다. 설교제목은 14절에서 비롯되었고, 단락의 설정은 아주 적절하다. 설교는 먼저 인생을 안개와 같이 비유한 뜻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이어서 이러한 안개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논한다. 인생이 안개와 같다는 의미 설명에서 이 설교는 (1)인생은 반드시 떠난다, (2)떠날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3)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세 내용을 제시한다. 하지만 문맥에서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1)번뿐이다. 본문은 분명하게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안개가 영구히 남아있지 못하고 잠시잠간 일시적으로 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부자가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말씀과도 일치한다(1:10).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현생에만 근거한 목적들은 전적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씀은 인생이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못 간다는 교훈을 하지 않는다. 이 교훈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근거한다(딤전 6:7; 전 5:15; 욥 1:21). 또한 요점 (3)번도 안개의 이미지와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다.

   이어서 안개 같은 인생이 살아야 삶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야고보서 전체에서 소개한다. 제시된 내용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경건한 생활(1:26-27; 4:4, 8), 형제사랑(1:10; 2:8-16), 그리고 기도생활(1:5; 4:2, 8; 5:13-18)이다. 신자가 행할 선을 본 구절이 속한 야고보서 전체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고 바람직한 설명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본문의 직접적인 문맥에서 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지 않는 것이다. 문맥에서 신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선은 자기 자신의 정욕적인 뜻 실현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4:15). 4장의 문맥에서 신자가 행해야 하는 주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4:7), 손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8절), 회개의 삶을 사는 것(9절),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10절), 피차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11절)등이다. 이렇게 직접적인 문맥 속에 명시된 주님의 구체적인 뜻(곧, 신자가 행할 선)이 있는데 이런 교훈들에 주목을 하지 않는 것은 아쉽다.

   4. 목회자들의 설교분석에 근거한 발전방향 제안 

   지금까지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고 있는 합동교단에 소속한 목회자들의 신약 설교 19편을 칼빈의 주석(성경해석)과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우선 긍정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이어서 보다 더 건전한 설교의 발전을 위해 고려돼야 할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아주 고무적인 것은 선정된 목회자들의 설교가 칼빈이 제시하고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후에 개혁주의 신학에서 발전된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대 원칙에서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이 성령의 영감의 결과로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라는 확신과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된다는 원리는 모든 설교에 기본적으로 전제되거나 경우에 따라 분명하게 표명되기도 했다. 이 점은 설교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귀중하고 복된 유산이라고 생각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통해 현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절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설교들이 전제하고 있는 확신이다. 칼빈이 16세기에 구교와의 충돌과 투쟁의 과정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그 시대에 충실하게 적용했으니 현대의 목회자들은 현 시대의 문제점들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시대의 조류와 흐름에 함몰된 자로 살지 않게 하려고 하는 자세가 설교 행간에 보인다.   

   셋째, 설교자들이 본문의 메시지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성경원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원어의 뜻을 이해함으로 본문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자하는 노력이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넷째로, 대표적인 것은 아니지만 본문에 해석에 있어서 칼빈의 통찰을 넘어서는 약간 경우도 있었다. 누가복음 5장의 기적적인 고기 어획의 사건과 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경우 제한된 부분에서 드러났다.

   다섯째로, 성경해석의 대원칙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없으나 각론적인 측면에서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 분석한 19편의 설교 중 선택된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과 문맥적인 흐름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설교는 소수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주(강)해설교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오랫동안 한국교회 설교를 특징져왔던 주제 설교의 범주에 머물고 있었다. 목회자들이 성경의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라, 선택된 본문의 진리(메시지)를 충실하게 설명하고 적용하는 본문의 뜻 중심의 설교,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의 주(강)해설교로 발전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대부분의 설교가 적용에는 아주 강하나 인위적인 것은 본문의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 취약한 것은 설교의 적응이 본문의 깊은 이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고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나오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섯째로, 저자의 의도와 본문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 저자의 어법과 표현방식과 문맥에 주목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설교자들에게 미흡한 것 같다. 성경이 입은 옷인 표현의 핵심수단인 언어와 어법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문맥이 단어, 구절, 문단, 단원의 내용이해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인식하고 이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곱째로, 대부분의 설교가 선택된 본문의 진리를 각종 배경에 비추어 이해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데는 아직도 미흡하다. 칼빈의 지속적인 관심은 주석가와 설교자가 그 본연의 임무에 따라 본문이 말하는 것, 다시 말해서 저자의 생각(마음)을 풀어 설명하는 데 있었다. 이와 같은 임무에 전념하는 설교자와 그러한 설교가 한국교회에서 발전될 필요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여덟째로, 일부 설교자들이 헬라어 단어나 동사를 취급함에 있어서 어떠한 증거로도 입증될 수 없는 과잉 해석 또는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점이 보인다. 이 점에서 개선이 필요하다. 본문을 성경의 원어로 보는 실력을 구비한 가운데 원문의  전체 속에서 단어, 문구, 구절과 문장과 문단을 보지 않고 사전적으로 정의에 따라 단어 자체만 보고 이를 단어의 확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여전히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단어나 문구나 구절이 얼마나 그것이 사용된 문맥에 의하여 결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깊이 인식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주어진 문맥 속에서 성실하게 성경본문을 이해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5. 나가는 말

   칼빈이 시대에 앞서 표방하였고 그를 이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발전시킨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유산은 한국 교회 설교자들의 귀중한 유산이다. 한 치의 오차도 흔들림도 없이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 있는 말씀이며, 성경은 성경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한다는 원리는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서 버려서는 안 되는 복되고 소중한 전통과 자산이다. 이 전통에 따라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설교는 세부적인 면에서 더욱더 이 원리에 충실하게 발전돼야 할 것이다. 칼빈이 한 평생을 성경의 주석과 설교를 통해 성경 저자의 마음(뜻) 파악하고 설명하여 그 시대의 하나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가르쳤던 것과 같이 21세기를 사는 목회자들은 동일한 성격의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만일 칼빈이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나타나서 한마디 핵심적인 권고를 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가 할 충고는 성경의 저자가 다양한 어법을 사용하여 문맥 속에서 말하는 것을 말하고 이것만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충실하게 가르치라고 충고할 것이다. 
 
 
 
              칼빈의 제네바 시편찬송가 평가와
              21세기 한국장로교회 찬송을 위한 제안

                                            오광만 교수(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들어가는 말

   16세기 종교개혁의 핵심 구호 중 하나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개혁자들은 이 구호를 종교개혁 모든 영역에 적용했다.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 나온 예배용 찬송가인 제네바 시편찬송가는 “오직 성경”의 구호를 예배와 찬송에 적용하려 한 대표적인 산물이다. 오늘날 시편 찬송만을 부르고,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교단과 교회는 그들이 시편찬송을 불러야 하는 정당성을 바로 이 사실에서 찾는다. 16세기 종교개혁자(그 중에서 칼빈)의 찬송은 21세기의 개혁파 교회들에게 찬송의 의미에 대해 중요한 성경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필자는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의 찬송의 한 예로 칼빈의 제네바 시편찬송가를 예로 들어 칼빈이 시편찬송을 만들게 된 배경과 시편찬송에 들어 있는 핵심 개념과 찬송의 정신을 분석하고 평가함으로써 21세기 한국교회의 바른 찬송의 지침을 얻으려 한다.

   1. 개혁파 신학과 칼빈의 제네바 시편찬송가

   칼빈은 여러 면에서 후대 교회에 지표가 되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쓴 기독교 강요와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경의 의미를 설명한 주석 등은 교회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또 교회가 선포하고 행해야 할 개혁파 신학의 정신과 원칙이 무엇인지를 제시한 작품들이다. 칼빈의 신학 총체만큼 중요한 업적은 그가 제네바에서 만든 제네바 시편찬송가이다. 이 찬송가가 나오게 된 배경과 거기에 반영된 칼빈의 찬송의 정신을 차례로 살펴보자.

   1.1 제네바 시편찬송가가 나오게 된 배경

   칼빈이 교회에서 시편찬송을 부르도록 장려하고, 실제로 칼빈이 종교개혁을 수행하는 동안 시편 찬송을 만들게 된 과정과 시편찬송의 정신은 그가 프랑스와 스위스 제네바 그리고 스트라스부르에서 행한 종교개혁 상황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그는 1538년과 1541년 사이에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면서 프랑스 난민 교회를 대상으로 목회를 했다. 그가 이 곳에서 목회를 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칼빈이 프랑스 파리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 지역에 있던 스트라스부르로 가려고 할 무렵, 프랑스와 독일은 전쟁 중이었다. 두 나라를 잇는 도로가 차단이 되어 그는 행선지를 스위스 제네바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칼빈이 직접 스트라스부르로 가지 못하고 우회하여 제네바에 잠시 머문 것이 오히려 칼빈의 그 후 사역을 위해서는 더 좋은 결과를 낳았다. 그는 거기서 화렐(Farrel)을 만나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어줄 것을 제의 받았기 때문이다.

   칼빈이 제네바에 머물고 있는 동안 교회 예배와 찬송과 관련하여 한 중요한 시도는 1537년 1월 16일에 제네바 시의회에 제안한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칼빈은 시의회에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개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나는 매주일 예배 때마다 성만찬을 베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만찬을 둘러싼 치리에 관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에 관한 내용이다. 칼빈은 이 두 내용을 제안하면서 바른 찬송을 부르는 것과 관련하여 몇 가지 그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을 직접 옮겨본다.

   "공적인 기도의 형태로 시편을 찬송하는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에 대단히 유익합니다. 시편찬송은 하나님께 간구하거나 그분을 찬송합니다. 시편을 기도하고 찬송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감동되고 자극을 받아 이와 비슷한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동일한 열정으로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할 수(또는 복을 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찬송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엿볼 수 있다. 칼빈의 종교개혁의 목표 중의 하나는 교회가 찬송다운 찬송을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대단히 유익한 일이라면서, 찬송을 교회의 교회됨을 이룩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밝힌다. 이러한 목적에 부합한 찬송이 바로 시편찬송이다. 칼빈이 이 논문에서 시편찬송을 부르기를 제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칼빈의 글을 직접 인용해보자.

   "한편, 교회에서 불려지기를 열망하는 시편찬송이 있는데, 우리는 고대 교회에서, 그리고 입술과 마음으로 회중가운데서 부르는 것이 좋다고 말한 사도 자신의 증거에서 그 예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적용해 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것으로부터 생기는 유익과 교화를 예상할 수 없습니다. 확실히 만물들이 그러하듯이, 신자들의 기도들은 매우 냉랭하여 우리는 무척 부끄럽고 심지어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시편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상승시키는 데 자극을 주며, 우리를 감동하여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일깨우며 찬송하는 열정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갑니다. 게다가 로마 가톨릭과 그에 속한 자들이 교회로부터 빼앗아간 유익과 위로함이 무엇인지를 고려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진정한 영적 찬송이 되어야 하는 시편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자기들 사이에서 중얼거리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글에 따르면, 예배 때 부를 찬송과 그 신학적 근거는 목회적 필요성에서 나왔다. 교회가 시편찬송을 부를 객관적인 이유는 사도(바울)의 증언과 고대 교부들의 제안에 기원을 둔다. 당시 예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중심한 예배였고,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칸토라고 불리는 특정한 사람(성직자)만 찬송을 불렀다. 이에 비하여, 칼빈은 어떻게 하면 성경과 초대 교회의 사도적 전승에 따를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당대의 미사를 개혁하여 바른 예배 갱신을 추구하였고, 그 일환으로 교회에서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을 계획하였다.

   더욱이 성도들과 관련해서는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상승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데 시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시편찬송을 만들 중요한 이유였다. 시편은 성도들의 진정한 영적인 찬송이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도들에게서 시편을 부를 찬송을 빼앗아 갔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의 시의회에 제출한 교회 조직과 그 예배에 관한 논문에서 찬송과 관련하여, “전부터 몇몇의 겸손한 교회들로 하여금 노래하도록 한 유산들은 모든 사람들이 부르는데 익숙할 때까지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노래하며, 사람들은 모든 주의를 기울여 들으며 진심으로 입으로 불리는 것을 따라해야 한다”라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칼빈은 시편을 불러야 하는 목적을 기도의 냉랭함에서 찾아 이 문제가 찬송 자체의 문제보다는 기도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성찬과 치리를 비롯하여) 찬송과 관련된 칼빈의 제안은 훌륭했다. 그러나 이 논문은 시의회에서 대폭 수정된 채 통과되긴 했지만, 사실 칼빈이 제안한 찬송의 정신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칼빈은 화렐과 함께 제네바 시의회에 항거하였고, 이것이 관철되지 않자 1538년 부활절 때 성만찬 집례를 거부하고 그해 4월 23일 제네바를 떠났다.

   그 후 칼빈이 베른(Bern), 취리히(Zurich), 바젤(Basel)을 거쳐 마침내 찾은 곳은 스트라스부르이다. 칼빈이 그 곳으로 가게 된 것은 역동적인 신학자이면서 다른 종교개혁자인 부처(Bucer)의 권고 때문이다. 칼빈은 1538년 9월에 스크라스부르로 갔고, 그 곳에서 영구히 살려고 시민권까지 받았다. 그 곳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중심이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는 다양한 복음주의 견해와 로마 가톨릭에 대해 어느 정도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곳에는 프랑스에서 신앙의 박해를 피해 피난해온 사람들이 500명 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스트라스부르는 독일령으로 독일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독일 예배의 분위기에 빠졌으며, 칼빈과 함께 프랑스 예배 의식을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칼빈은 이런 상황에서 교회와 예배의 신학적인 틀을 바르게 제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수행하려 하였다.

   당시 독일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는 교회마다 루터의 영향아래 루터가 만든 예배 형식을 사용하였는데, 이와는 달리 스트라스부르만큼은 상당히 독립적이었다. 그 곳에서는 디볼트 슈바르츠(Diebold Schwarz)가 1524년 2월 16일에 만든 독일어 미사가 사용되고 있었다. 칼빈은 이 미사를 개신교의 예배로 전환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칼빈은 미사에 중점을 둔 예배에서 설교에 중점을 둔 예배로 바꿨다. 당대 미사는 오늘날 거행되는 미사와 달리 기본적으로 청각적인 경험이 아니라 시각적인 경험이었다. 평범한 미사 참석자들은 사제가 미사를 집행하는 동안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었을 뿐더러, 설령 그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든 미사가 라틴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칼빈이 설교 중심의 예배로 전환한 것은 “듣는 것”의 중요성을 회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의 예배 개혁에 영향을 준 사람은 부쩌(Martin Bucer)였다. 부쩌는 시편과 찬송을 독일어 운율에 맞춰 부르게 하였으며, 라틴어로 된 예배 순서의 명칭들을 서서히 독일어로 바꾸었다. 그리고 “미사”를 “주의 만찬(성찬)”으로, “사제”를 “목사”로, “제단”을 “성찬상”으로 명칭 변경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 난민들을 대상으로 매일 설교와 강의를 했고, 주일마다 두 번씩 설교했다. 이처럼 칼빈은 목회를 하면서 교회와 예배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그리고 대중들에게도 함께 찬송을 부르게 하였다. 프랑스 난민들은 기뻤다. 본국 프랑스에서는 예배 시간에 찬송을 부를 수 없었지만, 스트라스부르에서는 교우들 누구나 제한 받지 않고 찬송을 부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외국어 노랫말과 합창곡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이러한 문제를 알고는 있었지만 처음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이 없어서 루터와는 다르게 자신이 직접 시편에 곡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칼빈은 우선 대부분의 찬송을 그들이 읽고 쉽게 부를 수 있도록 그들의 언어로 번역해야 했다. 그는 교우들을 위해 작곡가인 끌레망 마로(Clement Marot)에게 시편을 불어로 번역하도록 부탁하였다. 맨 처음에 마로는 시편 여덟 개를 번역했고, 칼빈 자신도 시편 다섯 개를 번역했다. 마로는 여기에 곡을 붙였는데, 마로가 작곡한 곡의 멜로디는 스트라스푸르 도시가 있던 알사스(Alsace) 지방의 민요였다. 이 곡은 교우들 누구나 쉽게 배우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운율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하여 1539년에 불어판 시편찬송가인 “Aulcuns Pseaulmes et Cantiques mys en Chant”(노래로 된 시편들과 성시들)이 출판되었다. 1539년 시편찬송가에는 시편 1, 2, 3, 15, 19, 25, 32, 36, 46, 51, 90, 103, 113, 114, 115, 129, 137, 138, 142편과 시므온의 노래, 십계명, 사도신경 등 22곡이 수록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음악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큰 사건이었다. 이 찬송가는 남녀노소 누구나 찬송할 수 있는 대중 찬송가였다. 더욱이, 회중들은 모국어로 노래했고 그 곡조가 그들에게 익숙한 알사스 지방의 곡조였기에 주님을 찬송하는 감동이 컸다. 그 후 칼빈은 1541년에 제네바로 돌아와서 시편찬송에 더 열정을 들여 개신교 이념에 따라 찬송가를 만들어 제네바 시에서 종교개혁에 성공하는 또 하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제네바에서 작업한 찬송이 처음 나오게 된 때는 제네바 시편찬송가를 착수한지 불과 1년만인 1542년이다.

   그런데 칼빈과 마로가 주축이 되어 제네바 시편찬송가를 만드는 중에 마로가 갑자기 죽었다(1544년). 마로는 죽기 전에 베자(Theodore Beza)를 후계자로 임명했다. 베자는 칼빈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제네바 시편찬송가를 마무리 하여 제네바 시편찬송가의 최종판이면서 장로교의 최초 찬송가이기도 한 Pseaumes odante trois David(1551, 1554)를 만들었으며, 그 최종판은 1562년에 완성되었다. 이 시편찬송가는 시편과 십계명, 시므온의 노래 등 110개의 운율과 125개의 곡이 사용되어 총 152개의 본문으로 구성되었다.

   제네바 시편찬송가의 출판현황은 다음과 같다. Witvliet는 Pierre Pidoux의 글을 인용하여 1562년 초판이 제네바에서만 적어도 27,000부가 출판되었으며, 프랑스와 스위스의 출판사 50군데에서 30,000권에서 50,000권 사이가 인쇄된 것을 비롯하여 불과 몇 년 사이에 9개 언어로 번역되어 거의 100,000부가 인쇄되었다고 밝힌다.

   그러므로 제네바 시편찬송가는 넓게는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분위기에서, 그리고 그 동안 로마 가톨릭에서 수행해온 미사와 다양한 복음주의를 교정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좁게는 칼빈이 고국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와 독일 일부의 프랑스 난민이라는 독특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1.2 칼빈과 시편찬송가

   제네바 시편찬송가에는 음악에 대한 칼빈의 이해가 반영되었다. 일반적으로, 루터가 음악을 즐겼고 루터 자신이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것과 비교하여, 칼빈은 음악을 비롯한 예술에 문외한이고 예술을 혐오했다고들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에 대한 칼빈의 태도를 종교개혁 일반과 칼빈의 종교개혁을 특징짓는 본질 중의 하나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Douen은 칼빈에 대해 “제네바의 교황과 모든 쾌락과 오락의 적이며 예술과 음악의 적”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유발이 수금과 퉁소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된 것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것(악기들)은 우리의 필요(our necessity)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쾌락(our pleasure)을 위한 것들이다. 쾌락은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이것이 음악의 특성이다. 음악은 종교적인 의식에 활용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유용할 수 있다. 악한 유혹과 어리석은 즐거움에 구속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 그러하다.

   칼빈이 유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칼빈은 음악에 무관심하고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던 것처럼 보인다. 정말 칼빈은 음악을 혐오했는가? 칼빈이 음악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지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칼빈이 예술을 적대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로마 가톨릭의 체계를 적대시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다. 사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그분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면서, 문화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평가했다. 문화에 대한 칼빈의 고결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음에 찬송에 관심을 갖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시대적 정황으로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끼친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교황 체제아래에서 드리던 예배는 “외적인 의식과 심지어 미신적인 행습”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종교 개혁 이전에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노래하는 것과 관련하여 교회의 공적인 의회에서 결정한 내용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결정들은 찬송에 대한 칼빈의 생각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음악에 대한 칼빈의 입장과 신학은 그의 제네바 시편찬송가에 나타나 있다. 찬송에 대한 칼빈의 이해와 그의 찬송 정신을 살펴보자.

   1.2.1 시편찬송의 정신

   찬송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알 수 있는 것은 제네바 시편찬송가의 서문일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먼저 주일성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주님께서 예배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가르치신 것을 예배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적인 회집이 이루어진 교회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말씀 설교와 기도, 그리고 성례전의 집행이 이루어져야 했다. 말하자면 개혁교회의 예배와 순서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명령하신 것과 부합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당시 거행되던 예전들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기도도 항상 라틴어로 거행되어 듣는 사람들은 그것을 “중얼거림과 막연한 말 또는 의미 없는 소음”으로 인식했으며, 세례 의식은 신적인 권위가 결여되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어리석은 고안들로 둔갑했고, 성만찬은 더더욱 더럽혀져 불경스럽게 되었다. 칼빈은 이것을 마치 “마술사가 그의 주문을 외우는 것과 똑같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예배의 세 요소(설교, 기도, 성례전)를 각각 언급하면서 기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도는 두 종류로 나뉜다. 기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도 할 수 있다”고. 그는 찬송을 기도와 연관시켰으며, 이런 점에서 찬송은 다른 음악과 구별된다. 찬송과 관련하여 칼빈이 언급한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불타오르게 하여 열정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다. 그래서 노래는 가볍거나 하찮게 불러서는 안 되고, 중후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불러야 한다. 그래서 식탁이나 가정에서 사람들이 흥을 돋게 하는 일반음악과 교회에서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큰 차이가 있다.

   칼빈이 말하고 있는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는 물론 시편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굳이 시편을 불러야 하는가?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서 시편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바르게 기도하는 참된 방법을 지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께 “찬송의 제사를 드리는 바른 방법”과 “바른 태도를 완벽하게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해에 따라 칼빈은 시편 중에서 지혜의 시 또는 고백의 시를 선정하여 그 시에 운을 붙여 찬송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제네바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고백의 기도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특이하게도 시편찬송가 중 상당히 많은 부분이 애가(Lament)와 시편 저자가 원수에 의해 어려움을 겪는 내용으로 이루어졌고, 찬송시(Psalms of Praise)는 적은 비율만이 반영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1539년 시편찬송가에서는 22개 곡 중에서 오직 세 개가 찬송시이고, 1543년판에서는 오직 네 개만 찬송시였다. Witvliet은 이처럼 제네바 시편찬송가에 통회와 애가의 내용이 많은 이유를 칼빈이 자신을 다윗의 고난과 일치시키면서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시편에서 발견하려는 데 있었다고 해석한다.

   칼빈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배에서 찬송의 비중을 강조했다. 이 점에서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찬송 인도자들(cantores)에게 요구되는 “찬송 규칙(Regulae canonicorum)”의 영향을 받았다. 이 규칙에는 찬송 인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갖추라고 규정되었다. “겸손과 절제와 고상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 음악적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노래하지 말아야 하며, …… 시편은 너무 빠르게 부르지 말고, 음정을 너무 높게 잡지 말아야 한다. 시편은 가사를 분명하게 발음하고, 노래하는 사람의 영혼을 반영하게 단조롭게 부르며, 회중들의 귀에 매혹되게 불러야 한다.” 그래서 칼빈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노래를 아름답게 부르는 것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믿고, 이와 같은 찬송의 정신을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은 표명하였다.

   기도나 찬송이 목구멍에서만 나오고 마음의 감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유익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몸의 여러 부분에서 드러나는데, 말로 발설하여 노래함으로써 혀를 그런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매우 적절할 것이다. 혀는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말하고 선포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혀는 하나님을 찬송하기에 있다! 이 말는 교회에서 찬송하는 것과 음악회 무대에서 부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의 마음이 거룩한 노래(찬송)를 부르는 데 얼마나 집중해야 하는 지를 알려준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시편 찬송을 만들 때에만 해당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1547년에 교회 개혁의 한 방안으로 사도가 친히 우리에게 추천한(고전 14:15, 26) 경건한 시편을 회복할 것을 권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시편은 결코 교회에서 파기되어서는 안 된다. 그 동안 교회에서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이 중단되어 왔지만, 이제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 특히 주의 날과 그밖에 고대부터 지켜왔던 존엄한 축제일에 그러하다”라고. 칼빈은 이것이 교회를 개혁하고 교회가 분열된 것을 치유하는 진정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성경적인 찬송은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즉 성경적인 에큐메니칼을 이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편찬송의 정신이 실제로 음악적 요소와 관련해서 어떻게 제네바 시편찬송가에 반영되었는가?

   1.2.2 시편찬송의 구성과 음악적 특성

   제네바 시편찬송은 시편 150편 중에서 125편에 곡을 붙여 만들어졌다. 제네바 시편찬송가에 적용된 음악적 원칙, 음악적 요소 등을 차례로 살펴보자.

   1.2.2.1 시편찬송가의 음악적 원칙

   먼저 우리는 여기서 당대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루터의 종교개혁의 이념과 비교해 볼 때 칼빈의 음악적 원칙은 엄격한 점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전통을 지키면서 그의 개혁이념에 따라 적절한 수정을 가하여, 음악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배제하지 않은 루터식 합창을 발전시킨 반면에, 칼빈은 로마 가톨릭 정신을 배제하고 원시 초대교회 전례를 좇으려 했으며, 교리도 거기에 기초를 두고자 하였다. 이것은 칼빈이 음악 자체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지녔기 때문은 아니다. 칼빈이 루터처럼 음악을 좋아한 사람도 아니고 음악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도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음악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교회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예배에서 부르기에 적합한 찬송의 내용(가사)과 곡조에 관심을 가졌다. 그가 제시한 시편찬송의 음악적 원칙은 그것이 예배용 찬송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생각할 수가 없다. 즉 시편을 부르는 것은 단지 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공동체의 예배 분위기, 공동체 전체가 공감하는 찬송을 만들어야 했다. 우선 가사와 운율은 시편의 존엄성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예배용 찬송답게 부르기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특히 칼빈은 거룩한 모임에서 품위와 위엄을 중시했다. 그는 “품위”를 이렇게 정의했다. “신성한 신비를 높이 기리기에 매우 적절하여 경건을 위한 행위로 적합하거나 예배 행위에 합당한 장식”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품위는 (찬송을 비롯하여) 거룩한 것들을 행할 때 경건을 증진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칼빈은 이 원칙에 합당한 찬송가의 가사를 시편찬송가와 십계명,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 등과 같은 몇 개의 찬송에 국한시켰다. 교회에서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에 대해 칼빈은 제네바 시편찬송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며 기도하는 노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비단 정직한 노래만 아니라 거룩한 노래여야 하며,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분의 사역을 묵상하는 노래이기도 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에게 합당한 찬송을 드릴 수 없다고 말한 성 어거스틴의 말은 참이다. 그러므로 성령 자신이 말씀하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다윗의 시편보다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더 좋은 찬송가는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시편을 노래할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편은 가장 좋은 찬송가이다.

   여기서 칼빈은 시편찬송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천명한다.

   또한 칼빈은 음악 형식에도 제한된 형식을 고집했다. 그는 운율을 선택함에 있어 특정 시편의 분위기(mood), 특성, 구조 등을 염두에 두었다. 곡조는 하나님 앞에서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찬송하기에 알맞은 “중후함과 엄숙함”을 모두 갖춘 단순한 것이어야 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시편찬송의 대부분의 곡들은 1분에 60-70 빠르기로 급격한 음의 변화가 없고, 곡조의 범위는 한 옥타브를 넘지 않았으며, 2분 음표와 4분 음표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시편찬송은 불규칙적이지만 리듬감을 살린 곡들로 이루어졌다.

   칼빈은 시편찬송을 교회에서 부를 때는 제창(unison)으로 부르게 하고 심지어 오르간을 비롯하여 일체의 악기 사용을 금지하였다. 현대에 시편 찬송이 오르간 반주를 동반하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일반화된 현상이지만, 칼빈 당시 무반주가 권장된 것은 가사의 바른 전달과 찬송하는 사람이 가사에 집중하도록 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처럼 무반주로, 그것도 단성율로 단순한 음악성만을 동반한 칼빈의 시편찬송가는 금세 “칼빈주의 양식(stillus calvinisticus)”의 특성으로 인식되었다.

   칼빈은 목소리와 아울러 마음으로 노래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만일 노래하는 것이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거기에 합당한 위엄을 갖추어 진행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래도 마음으로 하고 “영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귀가 그 노래 가사의 영적인 의미보다 그 곡조에 솔깃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저 귀에만 감미롭고 유쾌하도록 노래를 지어 부른다면 교회의 위엄에도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하나님께도 극도로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때문에 칼빈은 시편찬송에 최소한의 음악적 특성만 부여하고 전체를 단순 소박한 음악이 되게 하였다. 적어도 스트라스부르와 제네바에서 불려진 칼빈의 시편찬송의 구성과 음악적 특성에는 찬송에 대한 칼빈의 이러한 원칙이 잘 반영되었다.

   1.2.2.2 시편찬송가의 가사(Texts)

   칼빈은 “음악은 시와 분리될 수 없고, 시는 음악과 분리될 수 없다”는 옛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음악이 가사와 곡조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 둘이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볼 경우 가사의 내용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칼빈은 이것을 이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음악보다는 본문(text)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칼빈은 1543년판 제네바 시편찬송가 서문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음악에 관하여 말하자면, 나는 두 부분을 이해한다. 그 중 하나는 글자 또는 주제와 재료이며, 다른 하나는 노래 또는 멜로디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나쁜 말은 좋은 태도를 망치지만, 멜로디가 그 나쁜 말을 동반할 때에는 그 나쁜 말은 훨씬 더 강하게 마음을 찌르며 마음속으로 침투한다. 포도주가 깔때기를 통해 통 안으로 부어지듯이, 독액과 부패는 멜로디에 의해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든다.

   즉 칼빈은 멜로디가 대단한 위력을 가졌다고 믿었다. 멜로디는 한편 본문의 내용을 향상시키지만, 다른 한편 잘못 사용되면 오히려 사람에게 독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멜로디보다는 가사를 강조했으며, 가사의 내용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 알맞은 영감 된 내용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에게 합당한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칼빈은 성령께서 다윗을 통해 만드시고 말씀하신 다윗의 시편이 하나님께 예배하기에 가장 좋은 노래라고 믿었다. “우리는, 시편을 노래할 때 하나님께서 시편의 말씀을 우리 입에 넣으셔서 마치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높이려고 노래하신다는 확신을 얻는다.” 찬송은 모든 기도와 마찬가지로 찬송하는 사람의 내적 성향과 관계가 있고, 회중들의 언어로 드려야 할뿐더러 “전체 교회의 덕”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칼빈이 찬송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 것은 예배에서 부르는 찬송을 기도의 장르로 이해한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예배용 찬송의 가사를 시편에 한정한 것은 찬송을 영감 받은 (찬송가용 유일한) 본문으로 생각한 데 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랫말을 짓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인간의 타락에 대한 칼빈의 이해와 맛 물려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 이외에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할 만한 더 좋은 언어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인간의 언어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칼빈은 1562년 판 제네바 시편찬송가 서문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언어를 창조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이라고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런 이유로 제네바 시편찬송가에 실린 가사는 몇 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편에서 왔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가 시편을 성경의 시편 내용을 글자 그대로 불렀던 것과 다르게, 칼빈은 시편을 노래에 알맞게 운을 붙이는 등 운율을 가진 시적 형태로 재구성하였다. 시편은 노래를 할 수 있는 음악 형식으로 고칠 필요가 있고, 그러려면 운율을 지닌 시편이 가장 노래하기에 알맞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런 작업이 정당하다고 칼빈이 언급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만, 그가 성경 본문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도록 부르라고 우리 입에 두신 노랫말로 믿은 것만은 틀림없다.

   칼빈은 가사의 바른 전달을 위해서 합창보다는 제창(unison)을 선호했다. 제창은 음악성 때문에 고려된 것이 아니라 회중들에게 가사에 집중하고 가사의 명확한 전달을 도모하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 시편찬송을 어린이들에게 먼저 부르게 했다. 말하자면 어린이들이 찬송의 지도자들이 되었던 셈이다. 이렇게 한 데에는, “아이들에게 특색 있는 음성으로 큰 소리로 노래하게 하여 어른들이 그 곡에 집중하고 마음으로 따라하게 하여 점차 공동체적으로 노래하는 데 익숙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 후에는 이런 원칙이 바뀌어 테너 파트가 멜로디로 부르고 나머지 회중들에게 그 내용을 따라하게 했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칼빈은 가사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이 가사 내용에 집중하도록 반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칼빈에게 악기 반주는 구약시대에 속하는 물건들이었다. 칼빈은 성경 저자들이 악기를 언급한 것이 찬송에 악기들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악기를 동반한 음악이 “이러한 고대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단지 초보적인 도움을 주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칼빈이 판단하기에, 이런 악기들은 그리스도 이후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도구이며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써 폐기된 법적 예식”에 속한다. 이에 대해 Witvliet은 사실 이것의 성경적인 이유보다는 부분적으로, 당시 악기를 주도할 만한 지도자가 없었고, 시편이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라는 원칙을 지키려는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1.2.2.3 시편찬송가의 곡조(Tunes)

   앞에서 언급했듯이, 칼빈은 시편의 곡조는 “절제되고, 노랫말에 적합하게 중후하고 위엄스러운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원칙으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인문주의자인 마로에게 시편찬송의 곡조를 만드는 작업을 부탁했다. 그래서 초기의 시편찬송가의 곡조는 대부분 마로의 작업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후 칼빈은 제네바로 돌아와서 작곡가요 음악 편집인으로서 재능이 있는 교사였던 루이 부르조아(Louis Bourgeois)에게 곡조 만드는 작업을 부탁했지만 시편은 당대에 알려지고 유행했던 곡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시편찬송의 곡조는 찬송 가사의 내용에 따라 곡조를 달리 하였다. 예를 들어 시편 51편의 곡조는 음울한 프리지아 지방의 분위기를 내었고, 반면에 시편 19편은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곡조가 다양한 리듬 형태로 되어 있으며, 교회선법 위주이지만 때로는 루터가 시도했던 것처럼 근대 조성의 선구적인 조성을 시도한 곡도 있다. 시편찬송의 운율은 당시 세속 유행가와 흡사하여 가사는 몇 개의 스탄자(stanza)로 부르는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12-14세기 프랑스 방랑시인들의 운율을 따른 것이었다. 시편찬송가에 선집된 대부분의 시편은 슬픔의 시(애가)이다. 그래서 조성 역시 애가답게 단조(특히 마단조)로 된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곡조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시편찬송은 낭만적인 노래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제네바 시편찬송가의 곡조가 프랑스 세속 샹송의 멜로디에 근거했다는 의견이 종종 제기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리차드 테리가 밝혔듯이, 몇몇 곡조는 당대의 대중적인 민요(folk-song)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옳다. 사실 대부분의 시편찬송들은 완전한 창작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기존의 곡들을 편곡하거나 수정하고 변화시켜서 만들었기에 이 과정에서 독일 코랄과는 다른 프랑스 특유의 곡조가 많이 들어왔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제네바 시편찬송가에는 프랑스 알사스 지방의 전래 민요나 당대의 대중적인 곡조가 많이 채용되었는데, 이 곡조들은 당대의 대중적인 곡조이지만 무척 단조롭고 음의 이동이 급격하지 않는 등 칼빈이 제시한 시편찬송의 음악적 원칙과 비슷하다.

   또한 제네바 시편찬송가에 영향을 준 곡조는 부르조아가 고대교회의 것을 모본으로 하여 만든 것들도 있다. 실제로 제네바 시편찬송가에는 고대 중세 성가와 관련이 있는 부분이 적어도 10여곡이 있었는데, 그 곡의 대부분은 그레고리안 찬트에 근원을 두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제네바 시편찬송가 129편에 사용된 Festa Julii인데, 이 찬송은 성 베네딕트 축제에 부르던 아침찬송에서 왔다.

   칼빈은 단성 곡조를 고집했다. 그래서 칼빈의 시편찬송은 기본적으로 단성 곡조로 구성되었다. 칼빈은 경험에서 나온 문제에 호소하면서 다성 곡조인 합창 음악의 심리학적인 힘을 묘사한다. 그는 “사실 우리는 경험상 노래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불을 지피는 큰 힘과 열정이 있다”는 말로써 음악의 힘을 인정한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음악의 위험 요소라고 칼빈은 경고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식탁이나 가정에서 여흥으로 즐기는 음악도 있다. 하지만, 음악적인 힘이 찬송하는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하려고 교회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부르는 시편은 여흥으로 부르는 음악과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이 여기서 어떤 구별을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일반적인 합창음악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는 합창음악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런 원칙들은 일찍이 깨졌다. 1565년쯤 두 가지 내용에 변경이 가해졌다. 멜로디는 소프라노 파트가 담당했고, 가정에서 그리고 예배 때 부르는 찬송이 아닌 경우를 대비하여 합창 반주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하여 제네바 시편찬송가에도 합창이 사용되고 4성부가 부르는 악보가 나옴으로써, 화음 찬송이 한정된 경우에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초창기 시편찬송이 단성율로만 구성되지는 않았다는 것과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문제가 칼빈주의 원칙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2.3 찬송의 확장

   시편찬송은 매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찬송은 교회에서만 아니라 가정에서, 밭에서, 일터에서, 거리에서, 그밖에 공공장소에서, 심지어 지역 식당에서도 불려졌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만 아니라 음악가에게도 알려졌다. 칼빈은 1543년판 제네바 시편찬송가 서문에 두 페이지 분량의 내용을 첨가하면서 이런 내용을 권하였다.

   찬송하는 것은 심지어 가정과 들판에서도 우리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한 기관(입)을 자극한다. 그리고 찬송은 우리의 마음을 그분에게로 끌어올리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덕과 선하심과 지혜와 공의로우심을 묵상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칼빈이 찬송을 부르는 공간을 확대한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어리석고 타락한 기쁨의 수단을 찾지 말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데 있다. 칼빈에 따르면, 음악은 사람을 재창조하고 기쁨을 주는 것 중에서 첫 번째 위치를 차지하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다. 찬송이 이처럼 막중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므로 찬송은 정직하고 거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존경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묵상하게 한다.

   이런 정신이 교회에게 공감을 얻어 시편찬송가는 처음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시작하여 제네바 전역으로, 아니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불려졌다. 그래서 종교개혁 당시 칼빈주의자들은 시편을 부르는 사람으로 특징지어졌고, 칼빈이 주도한 프랑스 종교개혁은 “시편찬송을 부르는” 그리스도인 군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시편찬송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화란, 독일, 헝가리, 영국 등으로 퍼져나가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회에서 불려졌다. 특히 17세기 영국의 반 국왕파에 속한 크롬웰의 의회당원(Roundheads)과 스코틀랜드의 언약주의자들 등은 전투에 나가면서 시편을 노래했다. 이처럼 어느 공동체가 시편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그들이 개혁파 정신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2. 칼빈의 시편찬송가와 그 정신에 대한 평가

   이제 칼빈의 시편찬송의 원칙과 그의 업적을 평가해보자. 첫째, 칼빈의 시편찬송가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음악적인 용어로 독특하게 표현한 개혁파 찬송가이다. 칼빈의 시편찬송가는 로마 가톨릭의 미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특정한 사람(칸토)만이 부르던 예배용 찬송을 대중들이 부를 수 있으며, 그것도 자국어로 부르게 했다는 점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이것은 단지 편의성 측면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편을 부른다는 것은 자신이 로마 가톨릭 교도와 구별된 칼빈주의 신자라는 것을 고백하고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는 자기 정체성 천명과 관련이 있다.

   둘째, 청교도들이나 재세례파들이 모든 예전 형식을 “타파”하려 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칼빈은 예배의 형식과 정신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더욱이 예배용 음악과 관련하여 칼빈은 기본적으로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간 위치에 서 있던 사람으로 평가된다. 루터는 시편뿐만 아니라 세속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고, 교회 음악에 악기를 사용했다. 반면에, 쯔빙글리는 음악가적 소질이 있었으면서도 교회 예배에서는 어떤 음악도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다. 쯔빙글리는 음악이 교회에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떼어지게 할까 염려하여 교회에서 모든 음악을 거절하였으며, 심지어 그의 추종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오르간을 부수는 데까지 나아갔다. 칼빈은 이 두 입장의 중간에 서 있었다. 칼빈이 중도를 지키면서 예배의 개혁을 이끌어 성공한 것은 후대 교회를 위해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세상에서 살면서 세속문화에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있는 신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칼빈에게서 세상과 동화되어서도, 세상과 단절해서도 안 되고, 세상을 개혁하느라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러나 동시에 칼빈이 인간이 만들어낸 노래는 경박하고 이단적인 요소가 끼어들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노래는 하나님으로부터 감동받지 않은 사람은 쓸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있다. 설령 칼빈의 입장이 예배용 찬송가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칼빈은 음악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예배에 알맞은 거룩한 노래를 찾느라 음악에 엄격한 태도를 취하면서 성경의 시편만이 예배에 가장 적합한 가사를 담고 있다고 믿어 시편만을 가장 적합한 찬송가로 선택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칼빈은 교회 음악을 위해 만든 그의 원칙들을 그대로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찬송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하고 교회 음악은 단순한 여흥(엔터테인먼트)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신학에 맞는 찬송을 만들었다.

   더욱이 그는 이해력, 의지, 감정, 영혼, 몸 등 사람들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오염되었다는 그의 신학에 의거하여 시편을 운율이 있는 가사로 번역하여 노래하되, 악기 없이 아카펠라(무반주)로 부르는 것을 제안했다. 그는 죄의 오염으로 인간이 성경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칼빈은 칼빈주의 음악의 특징적인 전통을 만든 셈이다. 이후에 극단적인 개혁파 교회에서는 실제로 시편찬송만을 예배에 부르기에 합당하고 공식적인 찬송으로 삼아야 한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편만을 예배용 찬송으로 불러야 한다는 정당한 이유라고 하기에는 성경적인 근거가 빈약하며 재론의 소지가 많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시편만을 찬송으로 부르라고 언급한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성경에 시편을 찬송으로 부르거나 그렇게 하라고 권한 본문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대상 16:9; 시 95:2; 엡 5:19; 골 3:16), 이런 경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시” 또는 “시편”이란 예배 시간에 사용된 노래를 가리키는 총칭일 뿐이지 정경의 한 분분으로서 “시편”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니다. 더욱이 성경에는 시편을 교회의 예배용 찬송의 유일한 규범으로 주었다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 구약성경에는 시편이 나오기 전에 하나님을 찬송하던 몇 가지 예가 있으며(출 15장; 민 21:17-18; 신 32장; 삿 5장 등등), 신약시대의 교회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담은 내용을 찬송하기도 하였다(빌 2:5-11; 골 1:15-20; 딤전 3:16 등등).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찬송하기를 요구하신 “새 노래”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행위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기념하여 부르던 찬송이다(시 33:3; 40:3; 144:9; 149:1; 사 42:10; 계 5:9; 14:3). 모세가 홍해에서 부른 찬송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일종의 새 노래였으며(출 15장), 광야에서 물을 마신 후에 부른 노래 역시 그러하다(민 21:17-18).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갱신했을 때에도 새 노래를 불렀다(신 32장).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최절정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새)노래를 불러야 할 것이다. 초기의 교회 찬송들은 시편에서 유래했지만, 교회는 곧바로 기독교적인 새로운 노래를 창작하였다. 그 노래에 반영된 리듬, 대구법, 명확하게 나뉜 절, 시적인 표현 등은 그것이 그 시대에 불린 찬송이었다는 분명한 증거들이다. 신약성경에는 마리아의 찬송(Magnificat. 눅 1:46-55), 사가랴의 찬송(Benedictus. 눅 1:68-79), 천사들의 찬송(Gloria. 눅 2:14), 시므온의 찬송(Nunc Dimittis. 눅 2:29-32) 등 예수님의 탄생을 노래한 찬송시들이 있다. 교회의 예전적인 전통에 따르면 이 찬송들은 교회에서 매일 하나님을 찬송할 때 사용되었다. 이밖에 신약성경에 찬송시의 형태로 되어 있는 본문들이 있는데, 요한복음 1:1-18, 로마서 1:3-4, 고린도전서 8:6, 고린도후서 5:17-21, 빌립보서 2:5-11, 골로새서 1:15-20, 디모데전서 3:5-6; 3:16; 6:11-12; 6:15-16, 디모데후서 2;11-13, 디도서 3:4-7, 히브리서 1:3-4, 베드로전서 3:18-22 등이 대표적이며,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하늘의 찬송(4:8, 11; 5:9-14; 7:12; 11:17-18; 15:3-4) 등도 찬송의 형태로 되어 있는 본문들이다.

   바울 사도에 따르면 구약의 모든 것은 “장차 올 것의 그림자”였다(골 2:17). 이제는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미암아 계시된 시대가 도래하였다(히 1:1, 2). 그렇다면 더더욱 신약시대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내용을 담은 찬송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 칼빈의 시편찬송은 루터가 창작된 가사를 사용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자작된 가사의 찬송을 배제하려 하였다. 칼빈이 우리가 예배에서 너무 경박한 찬송을 부르지 말고 “중후하고 위엄이 있는” 찬송을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본적으로 예배용 찬송과 일상적으로 부르는 찬송을 구별한 것은 우리에게 예배의 중요성을 충분히 시사해주고 그의 통찰에서 많은 교훈을 얻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예배용 찬송의 가사를 영감 된 내용인 시편에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한편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동시에 칼빈은 이 원칙을 철저하게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례로 보여주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칼빈은, 가사는 시편에 한정했으면서도, 곡은 세속성을 배제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세속성을 강하게 반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세속성을 철저히 배제하지는 못했다. 더욱이 초기 제네바 시편찬송가의 곡조를 작곡했던 마로는 사실 개신교도가 아니라 복음주의자요 동시에 인문주의자였다. 그의 인문주의 정신이 시편찬송가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시편찬송가의 곡조가 샹송의 분위기가 나는 예술성 있는 곡조라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음악에 전문성이 없었던 칼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이 시편에 세속적인 곡을 사용하거나 여러 기존의 곡들을 인용하였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사실은 동시에 교회가 당대에 유행하는 곡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넷째, 칼빈은 시편찬송을 교회의 예배용 찬송으로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사실 찬송에 대한 그의 이해는 기도에서 출발한다. 칼빈은 기도의 두 종류 가운데 “노래로 하는 기도”를 찬송 영역에 적용하였다. 이런 견해는 마치 찬송이 예배의 독립된 요소로 작용하기보다는 기도에 종속된 듯한 인상을 준다. 제네바 시편찬송가에 시편의 장르 중에서 순수 찬양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실리지 않았고 주로 고백과 애가 위주의 노랫말이 차지한 것은 찬송에 대한 칼빈의 생각이 편중되었음을 반영한다. 시편은 기도를 노래로 표현한 것이기보다는 기도와 구별된 독립된 장르로서 찬양시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시편이 독립된 찬송의 요소가 있다면, 찬송으로서 지녀야 할 음악적인 요소를 생각해야 한다. 시편의 곡조 중에서 화려하고 즐거운 분위기의 곡조가 들어가야 하고 찬송을 부르는 사람 역시 즐겁게 불러야 한다. 그 곡조가 세속적인 음악으로서 예배의 분위기를 흐리게 해서는 안 되겠지만, 공동체의 규모에 맞는 악기 사용과 음악적 효과를 위한 화음은 찬송이 지닌 음악적 요소와 내용을 더욱 아름답고 풍성하게 하고 찬송의 목소리를 더욱 고양시키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이 사람의 본성이 타락했고 악기 역시 그러하기에 가급적이면 소박한 단성율로 부르고, 음의 높고 낮음도 심하지 않게 악기도 동반하지 않기를 바랐으며, 심지어 악기가 유치한 단계인 구약시대에서나 사용되던 것이라고 밝혀 극단적인 개혁파 교회에서는 이러한 칼빈의 말을 그대로 맹종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 타락의 요소로 따진다면 인간의 마음은 모두 부패했고, 마음에서 나온 모든 것이 더럽기 때문이다(막 7:20-23).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거룩하여졌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히 13:12). 음악적 요소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다. 칼빈이 원칙적으로 악기 사용을 반대한 것은 당시의 상황 때문에 취한 극단적인 행동이지, 그 후의 교회가 칼빈의 예를 전범으로 삼을 성경적인 원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21세기 한국장로교회 찬송을 위한 제안

   위의 연구의 결과 필자는 개혁파 전통에 노선에 서 있거나 개혁파 전통을 거론하는 교회에게 몇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개혁파 신학을 부르짖거나 개혁파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나는 교회에서나 어디서나 시편찬송을 다시 부르기를 제안한다. 앞에서 평가한 것처럼 칼빈이 제안한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에 반성할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며, 시편찬송만이 예배용 찬송으로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시편찬송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많은 찬송 중에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다. 오늘날 예배에서 시편찬송이 도외시되고 점차 현대 신학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는 작사 작곡자들이 만든 CCM이 불리고 있는 상황에서 개혁파 전통에 속한 교회라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예배와 일상생활에서 시편찬송을 자주 불러야 한다. 시편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칼빈주의자들에게는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정체성은 동일한 집단의 단합을 의미한다. 처음부터 칼빈주의자들은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들”로 알려졌다. 종교개혁 당시 다른 혁명 단체들이 자기들의 노래를 부른 것처럼, 동일한 이유로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의 노래로 시편을 불렀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시편을 노래할 때 구체적인 대상을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그러나 시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들이 부르고, 성경의 역사 내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불려진 찬송이다. 그러므로 시편을 부른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으며, 이전에 하나님의 언약백성에 속했던 사람들과 동일한 공동체에 속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편을 찬송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함께 나아가고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하나라는 의식을 가질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는 많은 교회가 복음송과 CCM을 부름으로써 저들만의 찬송문화를 공유하며 서로 간에 동질의식을 갖는다. 그렇다면 개혁파 전통에 속한 교회들도 교의적인 내용만 부르짖고 그런 내용만 거론할 것이 아니라, 개혁자들의 예배 정신이 바르게 드러나 있는 시편찬송을 수집하거나 새롭게 만들고 실제로 예배에서 자주 불러 자신들의 정체를 천명해야 한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총체적인 표현이다. 시편만을 부르는 것만이 개혁파 교회에 속했다는 주장은 너무도 극단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그리고 우리 역시 한국 교회가 공동으로 부르는 21세기 찬송가를 예배시간에 주로 부르기는 하지만, 시편찬송은 개혁파 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 신자들로서는 예배 찬송 중에 한두 번은 반드시 불러야 하는 찬송이라는 사실만은 틀림이 없다.

   둘째, 시편 이외에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찬송시도 운율을 붙여 찬송하는 데 관심을 갖기를 제안한다. 칼빈은 예배용 찬송의 가사는 영감 된 내용을 하는 가사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편에 한정했다. 그러나 동일한 단어(말) 중에서, 시편을 노랫말로 사용하지 않는 찬송의 가사가 어떤 의미에서 찬송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또 시편의 내용을 어느 정도 범위에서 찬송가 가사에 반영해야 하는지는 모호하다. 현실적으로 시편의 내용을 운율에 맞춰 개정하는 과정에서 시편 본래의 가사는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다. 현재 영어권에서 부르는 찬송이나, 한국에서 발표된 시편찬송을 분석해 보면 운율에 맞추느라 어쩔 수 없이 원래 시편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즉 시편을 운율화하는 과정과 다른 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미 원래 언어는 파괴되고 만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오히려 성경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 땅에서 겪는 희노애락의 정제된 감정을 노랫말로 하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노래하는 가사가 개발되고 거기에 맞게 곡조를 붙인 찬송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특히 초대교회가 시편찬송과 아울러 그리스도 찬송시라고 알려진 신약성경에 언급된 찬송을 부른 것은 신약 교회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교회는 구약의 교회와 맥을 같이 할 뿐만 아니라, 신약의 교회와도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다양한 찬송이 교회에서 불려야 한다.

   셋째, 현대 개혁파 교회가 칼빈이 당시에 시행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찬송가에서 음악성을 배제하고 무미건조하게 찬송하기보다는 찬송의 음악성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예배 중 악기를 사용하는 것과 찬송의 음악성에 대해 보인 칼빈의 극단적인 태도는 로마 가톨릭의 미신과 우상숭배적 요소를 겨냥해서 그것을 지양하려고 행해진 극단적인 입장이었다. 필자는 이것이 그 당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적용되던 상황적인 것이지, 찬송의 규범으로 받을 만한 내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찬송을 부를 때 예배 음악에 맞는 곡 선정과 예배 분위기에 맞는 악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여 적합한 악기를 사용하는 문제와 예배에 어울리지 않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멜로디가 첨가되면 가사는 마음에 좀 더 강하게 뚫고 들어온다고 주장한 것처럼, 칼빈 자신도 음악의 힘을 누구 못지않게 강하게 인식하였다. 칼빈은 죄로 인해 음악이 부패했다는 음악의 부정적인 면 때문에 예배용 찬송에서는 단조로운 곡조에 무반주 찬송을 하게 하였지만, 역으로 음악이 선용된다면 가사의 내용이 얼마든지 더 잘 전달되고, 찬송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욱 고양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예배를 드리는 상황에 아무런 음악을 무작정 들여올 수도 없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말씀의 효과를 마음에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음악이 천박하거나 소음으로 가득 차면 음악은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한 효과를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고 찬송의 음악적 특성은 물론이거니와 예배의 정신마저 흐리게 하여 자칫 찬송과 예배 자체를 천박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음악에는 이와 같은 전혀 상반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음악을 사용하는 데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는 예배용 음악의 질적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아니, 개혁파 교회에 속한 신자들 개개인이 음악 이해력 향상을 위해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신자 개개인의 음악적 수준은 예배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예배 찬송을 인도하는 사람들의 질적 향상과 예배와 찬송의 정신으로 잘 무장하도록 권해야 한다. 예배와 찬송의 정신을 모르는 사람을 단지 악기를 잘 다루고 음악을 좋아하고 리더십이 출중하다는 이유만으로 예배 전이나 예배 중간에 찬송을 인도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찬송을 인도하는 사람은 혼자 마이크를 사용하여 전체 회중의 소리를 압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나가는 말

   칼빈의 제네바 시편찬송가는 “오직 성경”의 원리에서 출발했다. 이전의 미사 중심의 예배와 특정한 사람들 중심의 찬송에서 성경적인 표준을 찾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에 합당한 가장 접합하면서도 대중들이 부르는 예배 찬송에 어울리는 찬송집으로 만들려는 종교개혁 정신의 산물이다. 칼빈은 예배 찬송의 형식을 유지하려고 음악적인 요소를 많이 희생하면서까지 예배의 찬송을 시편에 한정했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찬송의 원리를 제시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그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지 못했다. 그가 로마 가톨릭의 예배 의식과 당대의 상황을 의식했다는 것에 그 부분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그가 음악성과 관련하여 설명한 이해가 너무도 극단적이라는 사실에서도 부분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더군다나 칼빈은 신약교회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 신약교회의 찬송 역시 구약의 시편에 한정한 것은 초대교회가 일찍이 그리스도 찬송시를 부르면서 새로운 노래를 만들었다는 교회의 실제적인 상황(콘텍스트)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교회는 당대의 삶의 정황과 완전히 단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당대의 상황을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고 또 예배하는 도구로 삼으시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콘텍스트 문제를 비 성경적이라고 도외시하며 시편만을 고집한 칼빈의 업적은 또 다른 면에서 비평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칼빈이 우리에게 단지 성경에 정박되어 있는 시편을 여전히 교회에게 예배 찬송으로 사용하기를 권하고 그것을 장려했다는 점에서 칼빈의 제네바 시편찬송가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칼빈에 대해 극단적이라고 평가한 것과는 다르게,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는 개혁파 신앙고백을 받아드리고 개혁파 신학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칼빈의 경우와 정 반대의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현대 교회에서 시편이 찬송으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이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교회, 심지어 장로교회에서도 시편을 찬송하는 일이 무척 드물다. 교회가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덕을 칭송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한국교회가, 아니 장로교와 개혁파 신앙을 천명하는 교회라면 시편찬송을 자주 불러 바른 예배를 회복하고 개혁자들의 바른 신학을 천명해야 할 것이다.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이 칼빈이 언급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마치 시편찬송을 성경적인 찬송의 규범인 양 독단적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지만, 종교개혁의 정신을 가진 장로교회는 우리 신앙의 큰 스승이신 칼빈의 찬송의 정신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시편찬송을 부르자. 예배에 한 두 곡이라도 시편을 부름으로써 개혁자들의 후손임을 확인하고, 예배에서든지 일터에서든지, 공동체적으로든지 개인적으로든지 시편의 내용으로 자주 찬송하여 하나님을 높이며 우리의 영혼을 고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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