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27 오전 9:10:52)http://blog.somang.net/1234/5051
"기독학자의 사회적 책임" 손봉호 교수 (고신대 석좌교수, 기학연 이사)
1. 창조적 소수
오늘의 한국 사회는 많은 문제들을 갖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사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충분히 바람직한 사회라 할 수도 없다. 경제, 교육, 과학기술, 예술, 스포츠 등의 몇몇 분야에서는 다른 나라들에 크게 뒤지지 않으나 정치, 투명성, 도덕, 정의, 인권 등 핵심적인 분야에서는 아직도 후진국이다. 그 때문에 한국은 아직도 세계에서 선진국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우리 자신들도 우리 나라를 선진국이라 부르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이런 상태에 있는 것에는 물론 풍토, 지정학적 조건, 세계의 문호와 사상적 조류 등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외부적 요소들도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궁극적 책임은 역시 한국인이 져야 한다. 과거와 현재의 한국인이 오늘의 한국 사회와 문화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어느 사회든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정도로 그 사회의 문화 형성에 공헌하지는 않는다. 문화 창조를 주도하는 것은 역시 창조적 소수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소수를 돕거나 따라갈 뿐이다. 역사의 장군은 소수이고 절대 다수는 그 장군들의 지휘를 받고 행동하는 역사의 졸병들이다. 원칙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동등해야 하나 불행하게도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능력을 타고 나지도 않았고 동일하게 그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향유하지 못하며 개발된 능력을 동일하게 실현할 수도 없다. 그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문화 창조와 개혁에 동일한 의지와 열의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 사회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창조적 소수만이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고 또한 져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문화 혹은 사회를 형성하는 반면 사람은 그 문화에 의해 상당할 정도로 결정된다. 한국인이 한국 사회와 문화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한국인은 한국 문화에 의해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14세기에 활동한 튀니지의 대학자 이븐 칼둔(Ibn Khaldun)과 16세기의 프랑스 문필가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는 인간과 문화가 주로 풍토에 의해 결정된다 했지만 오늘날 수용되지 않고 있다. 물론 생물학적 조건, 풍토 등 자연조건이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다 하기는 어려우나 역시 사람의 어떠함은 주로 그가 사는 사회의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는 유전자가 서로 다르거나 두 나라의 풍토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 풍속, 가치관 등 문화와 그 문화의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적 소수가 우리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형성하고 개혁하는가에 따라 자신들을 포함한 한국인 전체의 삶의 질, 나아가서는 한국인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문화에 대한 창조적 소수의 책임은 단순히 과거와 현재의 것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상황에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2. 한국 기독학자들의 책임
그런데 나는 그 창조적 소수 가운데 한국의 기독학자들도 속해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단순히 한국 기독교계나 학문세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전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학자들이 소수임은 길게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학자들은 모든 사회에서 소수에 속하고 그 가운데 기독 학자는 더더욱 소수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소수인 한국에서는 더더욱 확실하다. 그러나 학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특혜와 특권을 누리는 소수다. 기독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모든 특혜와 특권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므로 한국의 기독학자들은 한국 기독교계와 한국 사회에 대해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하는 소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학자들이 어떤 의미에서 사회 전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창조적 소수인가? 나는 여기서 그들이 창조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창조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다.
(1) 계시와 비판
창조란 이미 존재하는 것과 다른 것을 제시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능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판과 치유도 창조적 작업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주어진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다른 시각과 기준을 전제하는 것이다.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 우리가 공헌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있는 것 위에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어진 것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각이 없으면 비판할 수 없고 따라서 고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 있던 것으로 현재를 비판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는 효과를 내면 그것도 창조적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새로운 것이 더해져야 문화가 발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도 그것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면 진정한 의미에서 발전이라 할 수 없다. 문화의 발전이란 궁극적으로 사람에게 이익이 되어야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이 더해지면 무조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이익이 되어야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주어진 문화에서 어떤 요소가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사람에게 충분한 이익을 끼치지 못하면 그것을 고치거나 개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창조활동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 그런 점에서 근본적으로 창조적이다.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계시란 이 세상에 있는 것, 사람들이 능히 생각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뜻이 인간 세상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세상에서 이미 존재하는 것, 사람들이 능히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모두 훌륭하고 긍정적이면 계시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필요하고 주어진 것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옳지 않고 좋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시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자체가 이미 비판을 함축하고, 그 비판은 잘못된 것을 고치고 병든 것을 치유하기 위함이다.
(2) 현대 사회와 기독학자
원칙적으로는 계시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서 비판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창조적이라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위 사회와 비슷하게 된 자기 자신만을 비판하고 고치는 것에 대부분의 노력을 기울인다. 즉 창조적 활동을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 간접적으로 비판 세상을 비판하고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사회를 비판하고 고치는 것은 역시 소수의 기독교 엘리트일 수밖에 없다.
올바르고 효과적인 비판하려면 비판하는 대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책임 있게 비판하려면 비판하는 자신의 위치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비판을 책임 있게 할 만큼 현대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현대사회가 매우 복잡하게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 농경사회나 산업사회는 상대적으로 단순해서 기본적인 상식만으로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그 구조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지만 그 사회의 단위도 훨씬 더 확대되어 보통의 지적 능력으로는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 정보사회에서는 온갖 정보가 다 제공되고 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도 커졌지만, 필요하고 정확한 정보를 선택하는 것은 과거보다 훨씬 어렵게 됐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체에 대한 시각을 상실할 뿐 아니라 아예 그런 것을 추구하지도 않고 다만 자기의 이해관계와 신변 주위의 상황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에 적응하는 대중(mass)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사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기독학자들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 전문 지식이 있어야 우리 사회의 각 분야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비판하고 고칠 수 있는 것이다. 학자들 스스로 이런 비판과 치유활동을 해야 할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사회비판 및 치유활동을 유도하고 보조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 기독교학문연합회가 주동해서 기독학자들이 ‘성경의 눈으로 본 세상’ 칼럼을 쓰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매일 매일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성경적 관점에서 그 사건들을 분석해 줌으로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구체적인 일상생활을 하는 교인들에게 설교자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성경적 관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일관성 있게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성경적으로 사회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목회자들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기는 어렵다. 그래서 가끔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얼토당토 않는 내용이 설교에 들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설교 전체의 권위를 떨어트릴 뿐만 아니라 교인들을 오도해 전혀 엉뚱하게 대처하게 할 수도 있다. 한국의 기독학자들은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기독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전문지식과 성경의 가르침을 연결시켜 보도록 고취하는 효과도 있다. 그 동안 대부분의 기독학자들이 그들의 전문지식 따로 신앙 따로의 이원론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것은 절대주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혀 적합하지 않다.
3. 그리스도인들의 모범
한국의 학자들은 사회로부터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전통적으로 글을 숭상하고 학자를 존중하는 전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고, 정보사회이기 때문에 지식을 생업으로 하는 학자들은 매우 중요시 되고 있다.
그런데 유교적 전통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식자(識者)는 선자(善者)’의 생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예수, 석가와는 달리 공자는 학자였기 때문이다. 사실은 현대의 학자들은 지식 전문가일 뿐 반드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그들의 삶도 모범적이기를 기대하고 있다. 어쨌든 한국의 학자들은 사회로부터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평가가 옳든 그르든 학자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이 도덕적 잘못을 저질렀을 때 시민들이 보이는 반응과 학자가 비리를 저질렀을 때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배운 사람이 그럴 수 있나!” 하면서 마치 공자가 사기를 치는 것 같이 의아해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학자들은 좀 더 도덕적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한국의 학계는 지금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해 있다. 황우석 사건이 벌어진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연구비 비리, 표절, 연고주의, 명예욕 등 사회일반의 도덕성보다 결코 높지 않다.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반시민을 실망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사회의 존경은 사라질 것이고 정상적인 학문의 발전도 방해를 받을 것이다.
한국의 기독학자들은 학계의 이런 풍토를 고칠 책임이 있다. 철저히 투명하고 공정해서 학계의 소금이 되어야 하고, 학자들에 대해서 아직도 좀 남아 있는 사회의 존경을 잘 이용해서 한국 교계, 한국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상한 가치를 올바르고 확실하게 아는 기독교인은 돈, 명예, 권력 같은 하급가치 때문에 비겁해질 수 없다. 특히 전문 지식을 갖추고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독학자들은 고등 가치와 하급가치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학자들은 그들의 전문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영향력이 증대되려면 그들의 말과 주장을 사람들이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발견을 하고 중요한 의견을 제시하더라고 사람들이 믿지 못하면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한다. 한국 학계는 도덕적 실패로 충분하게 존경받지 못하고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따. 기독학자들의 도덕적 모범은 한국 학계에도 긍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고, 나아가서 사회 전체에 이익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회에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고, 복음전파에도 간접적으로 공헌할 수 있다.
오늘 두 기독학자들의 공동체가 하나가 된다는 사실 자체도 한국 교계와 사회에 좋은 모범을 제공한다. 한국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개인의 이해관계나 집단적 이기주의를 극복했기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좋은 시작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