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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얼굴 댓글[0]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2013-11-23 오후 6:34:35) http://blog.somang.net/seolee/8021

이 글은 2013년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화요조찬 성경공부[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를 강해하신 내용을 게시자가 녹취,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예수님의 얼굴




오늘은 마지막으로 끝나는 날입니다. 그 동안 강의했던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제 1강> 거룩한 삶

    -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 렘브란트, [엠마오의 만찬]
    - 고흐, [첫 걸음]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과 접속되면 거룩한 삶의 시작이 되는 것 입니다. 거룩한 삶은 내가 많은 노력을 하는 것도 나중에는 소중하지만 시작에는 하나님과 함께 접목하는 것이 거룩 성이 살아나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묵상하는 삶입니다.


    <제 2강> 묵상하는 삶

    - 렘브란트, [마태와 천사]
    - 렘브란트, [예언자 안나]
    - 고흐, [성경과 소설이 있는 정물]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늘 묵상하는 대상인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을 함께 보면서 어떻게 말씀을 통해서 삶의 현장으로 나갈 것인가를 말씀드렸고.


    <제 3강> 기도하는 삶

    - 샤갈,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 렘브란트, [감옥 속에 갇힌 베드로]
    - 렘브란트, [시므온의 노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영혼의 기쁨을 누리는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 4강> 고뇌하는 삶

    - 미켈란젤로, [모세상]
    - 렘브란트,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는 예레미야]
    -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예수 믿으면 그냥 편안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보면서, 이 시대의 악을 보면서, 교회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아파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고뇌할 줄 아는 삶이 영성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와 렘브란트의 작품과 고흐의 교회당에 빛이 꺼져있는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며 우리가 함께 묵상했습니다.


    <제 5강> 회개하는 삶

    - 렘브란트, [세례요한의 설교]
    -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내 삶이 매너리즘에 빠지고 금방 습관성에 빠지고 지루해지고 싫증나는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새로워지려면 그것은 회개하면서 나갈 때 우리 삶에 새로움이 다가오게 됩니다. 렘브란트의 [세례요한의 설교]와 [돌아온 탕자]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제 6강> 순종하는 삶

    - 렘브란트, [아브라함의 제물]
    - 샤갈, [이삭의 제물]
    - 렘브란트,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하나님이 뜻이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면, 순종할 줄 아는 우리의 모습을 렘브란트의 [아브라함의 제물], 샤갈의 [이삭의 제물], 렘브란트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순종 했던 삶의 그 모습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제 7강> 기다리는 삶

    - 샤갈, [노아의 방주]
    - 렘브란트, [나사로의 소생]
    - 고흐, [나사로의 소생]

인생은 다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살면서 기다릴 줄 아는 삶. 믿음의 선배들의 삶은 기다린다는 것은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다는 것은 기도할 수 있고 내 인생이 아직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명이 있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샤갈의 [노아의 방주]에서 구원의 기다림, 렘브란트와 고흐의 [나사로의 소생]에서 부활의 기다림을 함께 보았습니다.


    <제 8강> 절제하는 삶

    - 렘브란트, [눈먼 삼손]
    - 샤갈, [다윗과 밧세바]
    - 렘브란트, [사도바울의 모습을 한 자화상]

모든 것이 있어도 순간 망해지는데 예수를 믿어도 어느 날 순간에 내가 무너질 때가 있는데 무엇이 문제이냐 하면 절제가 사라지면 렘브란트가 그린 삼손이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모르는 [눈먼 삼손]. 샤갈의 [다윗과 밧세바], 다윗이 얼마나 영웅입니까. 그런데 여인을 향한 잘못된 유혹 때문에 무너지게 됩니다.


    <제 9강> 사명의 삶

    - 샤갈,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
    - 렘브란트, [선한 사마리아인]
    - 고흐, [낮잠]

샤갈의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 렘브란트의 [선한 사마리아인] 그리고 고흐의[낮잠]을 보며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의 쉼을 여기서 배웠습니다.

그림이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10강> 사랑하는 삶

    - 렘브란트, [어리석은 부자]
    - 렘브란트,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 샤갈, [아가서 연작 3번]

어리석은 부자가 돈만 사랑했고 렘브란트의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이 고통 받는 여인을 용서해 주는 것과 아가서의 사랑의 연작 3번을 함께 보았습니다.


    <제11강> 십자가의 삶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함께 보면서 예수님의 마지막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 주시는 역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성의 삶이라는 것은 이 스펙트럼이 여러 가지로 퍼지는 것입니다. 나와 너와의 관계 이것이 더 확대되면 나와 이웃과, 나와 사회와, 나와 세상과의 관계라는 수평적 수직적, 하나는 내면적 관계를 이루게 되고 그리고 또 하나의 관계는 우리 삶의 창조적 모든 세계, 때로는 그것이 식물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고, 환경일 수도 있는 이 모든 관계. 이 관계로서 영성이라는 것은 혼자 가만히 있는 것이 영성이 아니다. 이 모든 삶의 관계를 다 조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너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창조적 이 피조물과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을 다 아우를 때 진정한 영성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금년 하반기 마지막 12강인 오늘, 말씀드리려는 것은 예수님의 얼굴에 대한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다 얼굴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나오실 때 자기 얼굴을 보지 않고 나오셨습니까?
자기 얼굴을 다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 얼굴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 잘생겼구나. 아, 코가 조금 더 높아야 되는데, 이 주름살이 좀 없어져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오셨습니까? 어떤 생각을 하면서 나오셨는지요
이 얼굴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얼굴을 가꾸기도 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데 이는 얼굴이 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얼굴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 얼굴 사진이 어디에 나왔는데 그것에 비방하는 글이 있다. 말이 안 되지요. 또는 칭찬하는 글이 있다. 하면 바로 반응을 하게 됩니다. 바로 내 얼굴 모습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지마라 한 이말 때문에 내가 뭐 내 얼굴에... 하고 그러는데, 그 외모를 보지마라고 한 것은 나의 출신성분이라든지, 나의 성 구분이라든지, 내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내가 세상에서 특허나 면허가 몇 개나 소유하고 있는지, 내가 돈이 많은지 적은지, 사회에서 지위가 높은지 낮은지 이런 것을 보지 말라는 것이 외모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모를 보지 말라는 것은 다만 얼굴을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얼굴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굴을 보아야 되는데 그것은 잘생겼다 못생겼다 그 뜻이 아니라 내 얼굴의 모습에서 어떤 모습의 느낌을 가졌나.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따뜻한 사랑과 은혜가 나타나는 내 얼굴인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얼굴의 전체 내용이 어디에 있을까요? 눈동자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종종 눈동자를 자주 보시라는 이유도 얼굴 표정이 잘 안 읽혀지면 눈동자를 보면 눈동자에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읽혀지기 시작합니다. 눈동자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내 자신이 거울을 볼 때 눈동자를 보라는 것입니다. 눈동자를 보면서 나의 내면의 세계가 어떻게 나타나는 가. 첫 번째는 내 눈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얼굴에 나타나고 얼굴에 나타난 것이 내 몸 전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게 되는데 화가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참 많이 그렸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아무래도 서양화가들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얼굴이 서양 사람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서양 사람이 아니거든요. 예수님은 팔레스틴 분이니까 종족적으로 보면 지금의 아랍계의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많은 사람들이 성화를 그렸기 때문에 어떤 때는 예수님의 얼굴이 완전한 백인으로 그려졌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김기창 화백은 예수님이 갓을 쓰고 있는 한국 사람의 얼굴로 그렸는데, 예수님의 얼굴에 대한 그런 한계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에도 예수님의 얼굴에 대한 성경에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코가 높았는지 낮았는지, 눈이 부리부리하게 생겼는지 아닌지, 이마가 넓은지 좁은지 어디에도 그런 것에 대해 기록 된 것이 없습니다. 4대 복음서에서 그렇게 자세하게 예수님에 대해 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얼굴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고 다만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슬픔, 탄식, 긍휼 이런 감상적인 모습의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의 어떤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예수님의 얼굴을 많이 그렸는데 렘브란트의 예수님의 얼굴을 먼저 보면 가운데 그림부터 짧게, 짧게 보겠는데.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렘브란트, 그리스도의 머리 연작





이 시간은 느낌으로 보는 시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 느낌과 여러분의 느낌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내 느낌이 저 예수님이 어떤 모습이다. 렘브란트의 [그리스도의 머리 연작]의 특징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느낌이 찬란하고 후광이 뒤에서 번쩍이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인간으로 약간 누추하고 슬픔이 담겨져 있는 그런 모습인데, 우선 성경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립보서 2장 6-7절)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습은 어떻습니까?.



Rembrandt, Head of Christ. circa 1648-56 Oil on oak 23.7 x 21 cm ? Bob Jones University Museum & Gallery, Greenville
ⓒ Greenville, SC, Bob Jones University Museum & Gallery



정면을 강하게 직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단호한 표정입니다. 그리고 뭔가 내면의 세계가 정리 되어서 앞을 향해 바라보고 있습니다. 강렬한 느낌 때문에 좀 사나운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그러나 전체 적으로는 단호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 위의 왼 쪽 그림은



Rembrandt, Head of Christ. circa 1648-54 Oil on oak ? 58.4 x 53.5 cm ? Signed top left: Rembrandt f. ? Detroit Institute of Arts, Detroit
ⓒ Bridgeman-Giraudon / Service presse



렘브란트, [엠마오의 순례자들]의 예수님


기도하고 기대하는 그런 모습으로 보입니다. 눈동자는 더 맑게 그린 것으로 보이고 눈은 하늘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데 체격은 아주 건장해 보입니다. 하늘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 얼굴인데 이 모습은 놀랍게도 렘브란트의 그림 [엠마오의 순례자들]의 예수님 얼굴과 비슷하게 그렸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치 기대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요청하는 그런 모습인데 렘브란트 그림의 특징 중 하나는 예수님의 후광이 없고 인간 예수. 우리와 똑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예수님이 고민하고 고민하는 모습인데,.



Rembrandt, Head of Christ. circa 1655 Oil on oak ? 24 x 19 cm ? Rijksdienst voor het Cultureel Erfgoed, Amsterdam
ⓒ Rijksdienst Cultureel Erfgoed



눈은 거의 감겨져 있고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 앞에 근심과 불안으로 탄식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인간을 향한 탄식 같기도 한 그런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다음 이 모습은 사람들을 향해서 약간 호통 치는 것 같이 보입니다.



Rembrandt, Head of Christ. circa 1648-56 Oil on oak, inserted into a larger oak panel ? 33.7 x 28.9 cm ? Signed bottom right: Rembran. / f. 1656 ? John G. Johnson Collection, Philadelphia Museum of Art, Philadelphia
ⓒ Philadelphia Museum of Art



“너 어찌 된 일이냐? 그 고난 속에 계속 머무르겠느냐? 너 슬픔 속에 계속 있겠느냐 그렇게 되면 안 되지 않겠느냐?” 하면서 단호하지만 긍휼의 마음을 품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다음에 이 모습은 조금 더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Rembrandt, Head of Christ. circa 1648-56 Oil on oak ? 25 x 20 cm ? Harvard Art Museums / Fogg Museum, Cambridge
ⓒ President and Fellows of Harvard College / Photo Katya Kallsen



말씀을 하고 있는 것같이 입이 조금 벌어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너 이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너희는 다시 일어서서 뭔가 다시 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 말씀 앞에 나와야 되지 않겠느냐?” 호소하고 강력하게 이끌어가는 모습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전체적으로는 한 사람을 모델로 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그렸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의 평범한 우리와 똑같은 고뇌하고 슬퍼하고 기도하는 그런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난 당하시는 예수님


두 번째 그림은 고뇌하는 십자가와 관련 된 모습을 그렸습니다.



수난 당하시는 예수님 - 다 빈치 / 엘 그레코 / 카라바조 / 샤갈



위 왼쪽 그림은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몇 가지 스케치를 합니다. 이 스케치를 하다가 연필로 그린 그림입니다. 붉은 색과 검은 색이 약간 합쳐져 그린 그림인데 예수님의 모습이 [최후의 만찬]의 예수님과 유사하게 그렸습니다.


위 오른쪽 그림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그림인데 이 사람은 그리스에서 태어났지만 스페인 사람입니다. 엘 그레코 그림의 특징은 모든 그림이 다 강조점이 길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얼굴도 길고 베드로의 얼굴도 길게 그려졌는데 그 대신 선이 강합니다. 그리고 색조도 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엘 그레코는 렘브란트(1606-1669) 보다 65년 앞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그림에는 예수님의 후광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아래 왼쪽은 카라바조(Caravaggio, 1573-1610)의 그림인데 이 사람은 이태리 화가입니다. 카라바조는 렘브란트 보다 30여년 앞의 사람으로 오래 실지 못하고 마흔 살도 안 되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배신] 이란 그림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가롯 유다의 모습입니다. 가롯 유다가 입맞춤을 할 때 아이- 하면서 탄식하는 모습을 그렸고.


아래 오른쪽은 샤갈의 큰 그림으로 [하얀 십자가의 처형]에서 십자가 부분만 압축한 것인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말씀을 읽겠습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태복음 27장 46절)



여기에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고난에 대한 모습을 보여드리는데...


최후만찬의 예수님


다빈치, 그리스도의 머리



다빈치, 그리스도의 머리. c.1495



다빈치, [최후의 만찬]의 예수님



다빈치, [최후의 만찬]의 예수님



다 빈치의 [그리스도의 머리]라는 이 그림은 [최후의 만찬]을 모사하면서 미리 그렸던 그림중의 하나인데 분필로 그린 그림입니다. 여기는 슬픔과 외로움으로 탄식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


엘 그레코, 기도하는 예수



엘 그레코, 기도하는 예수. c.1495



엘 그레코의 [기도하는 예수]입니다. 예수님 모습이 눈이 밝지요? 확신에 차있는 것 같고 그러면서 하나님께 요청하는 기도의 모습으로 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머리를 빗어 묶어 한쪽으로 내린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얼굴을 길게 바라보는 모습으로 권위를 나타내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배반당하시는 예수님


카라바조, 유다의 배반



카라바조, 유다의 배반. c.1495



카라바조의 [유다의 배반]을 그린 것입니다. 유다가 키스하는 모습인데 “아-! 이 사람아” 하면서 뭔가 싫어하시는 모습과 탄식하시는 모습인데 오히려 유다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는데 예수님은 눈이 감겨 있는 모습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샤갈, 하얀 십자가 처형



샤갈, 하얀 십자가 처형. c.1495



이것은 [하얀 십자가 처형]이라는 샤갈의 그림인데 큰 그림입니다. 155 x 140 cm 인데 십자가 주위에 여러 그림들이 있는데 유대인들이 고난당하는 것 쫓겨나고 집이 불타고 군인들이 침투해 들어와 그러면서 떨고 있는 그런 모습들이 그려진 그림인데 중앙부분만 포토샵으로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조르주 루오, 그리스도의 머리 연작



조르주 루오, 그리스도의 머리 연작. c.1495



이것은 루오의 그림입니다. 루오는 1871-1958 87세까지 살았으니까 근세에 가까운 것인데 훨씬 더 추상(비구상)적인 느낌으로 그렸습니다. 루오가 그린 종교적인 그림이 한 150여점 이상이 됩니다. 그 중에 예수님의 얼굴만이 30점이 넘습니다. 굉장히 많이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의 마음속에 내가 그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림만 보고도 “아, 예수를 믿고 싶다.” 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졌으면 좋겠다. 그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다양한 형태로 그렸는데 성경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장 28절)



이 예수님의 모습을 몇 가지로 보면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모습입니다.


루오, 그리스도의 수난



Rouault, Head of Christ. 1937, Cleveland Museum of Art.



큰 것으로 예수님의 슬픔과 외로움을 동시에 담아낸 것인데 이 예수님의 얼굴은 그냥 느낌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그림은



루오, 모욕당하는 그리스도




Rouault . Christ in Profile. 1930 Oil on panel, Cincinnati Art Museum



빨간색으로 슬퍼하고 눈물 흘리면서 탄식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아주 치열하다 할까요. 처연하다고 할까 예수님의 모습을 그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모습인데.


루오, 그리스도의 수난



Rouault. Christ Crucified. 1939 Oil on canvas 76.9x59.5cm, Purchase, John W. Tempest Bequest



예수님의 표정과 흐름이 보기에 탁 들어옵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받아주세요. 하는 그런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는 그림입니다.

다음에는 많이 알려져 있는 그림으로



루오, 성스러운 용모




Rouault . The Holy Countenance. 1933 Oil on canvas 91x65cm, Muse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성스러운 용모(The Holy Countenance)]란 이름으로 알려진 그림인데 이것은 수난의 그림입니다. 얼굴이 빨갛고 그렇지만 그 속에 빛이 나고 있습니다.
이 그림도 많이 알려져 있어 보았을 것입니다.


루오, 성스러운 얼굴




Rouault . The Holy face. 1946 Oil on canvas 50x36cm, Musei Vaticani, Roma



[성스러운 얼굴(The Holy Face)]입니다. [성스러운 용모]는 고난의 색채가 강하지요. 그런데 이 [성스러운 얼굴]은 영광의 색채가 더 강하게 부각 되면서 예수님의 얼굴이 훨씬 편안한 모습입니다.


그림을 보면서 이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 있고 하나님의 심정이 들어 있습니다.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이런 고뇌와 외로움과 탄식의 이런 순간 외에 예수님이 어떤 모습을 취했을까 보통 때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항상 이렇게 막 고뇌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어린아이들이 오고 안수 할 때 예수님의 표정은 어땠을까? 저는 예수님의 고뇌와 이런 시간 외에 예수님의 표정은 따뜻한 미소를 머금지 않았을까, 환하게 웃는 것 보다는 따뜻한 사랑의 미소로 사람들을 대하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모습을 표현한 그림들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이런 모습들이 참 많은데 얼마나 이러 것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얼굴이 우리의 모습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자신도 예수 믿으면서 우리 얼굴에 대해서 아브라함 링컨이 나이가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 책임을 지라 한 이유는 그때부터는 얼굴이 잘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굴이 잘 바뀌게 하려면 예수님의 얼굴을 묵상해야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거룩한 자리에 동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여러분들이 잠깐 어린아이가 되셔서 제가 하라는 말씀대로 하면 좋겠는데 아가서 6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영성의 삶을 끝내면서 우리의 삶에 우리 얼굴이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사람들이 보면 당신의 얼굴이 참으로 따뜻하고 빛나고 있구나! 네 얼굴을 보니 편안해 보인다. 한다면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아침 끝내면서 큰 목소리로 원래는 끝 소절이 “여자가 누구인가”로 되어 있습니다만 “사람이 누구인가”로 바꿔 썼습니다.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아가서 6장 10절)



오른손을 들고 큰 소리로 읽기가 “... 사람이 누구인가” 끝나면 오른손을 가슴에 대면서 “바로 나!” 합니다.
이제는 옆 사람에게 하겠습니다. 옆 사람에게 “바로 너” 하면 기분 나빠하실 수가 있으니까 이번에는 옆 사람의 눈동자를 보면서 “바로 당신!” 하시기 바랍니다. 자 큰 소리로 하겠습니다.


예, 잘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보이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멋진. 예수 믿으면 이렇게 멋진 사람. 매력적인 사람. 원래 하나님이 매력적인 분이이시고 예수님이 매력적인 분이고 예수 믿는 우리들이 다 매력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사람으로 우리가, 공동체가 함께 나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함께 읽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나의 모습 하나 하나가
예수님 성품을 닮아
성숙한 영성을 갖게 하옵소서






by  seo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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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삶 댓글[0]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2013-11-16 오전 6:06:01) http://blog.somang.net/seolee/8016

이 글은 2013년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화요조찬 성경공부[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를 강해하신 내용을 게시자가 녹취,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십자가의 삶




오늘은 십자가의 삶인데, 예수 믿는다는 것에서 십자가를 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참으로 역설적인 것입니다. 2000년 전의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형태는 십자가처형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로마제국이 로마인들에게는 행하지 않았던 것이고 반란자들이나 다른 백성들이나 또는 적군들 적대자들 이런 사람들에게만 흉악한 범죄자들에게만 행했던 그런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네카(Seneca, Lucius Annaeus)나 당대의 모든 철학자들도 이 십자가형은 너무 참혹하다. 왜냐하면 온몸이 십자가에 달려서 자기 몸무게 때문에 횡격막이 막혀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손에 보통은 손바닥에 하면 찢어지므로 손목에 못을 박아 걸려서 내려오지 않는데 묶기도 하고 그리고 발에다가도 하고 하면 빨리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빨리 돌아가신 것입니다. 아침 9시경에 못 박았는데 오후 3시에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는데 어떤 사람은 하루도 지나고 어떤 사람은 1주일도 지나는데 자기 죽음을 고통 속에서 지켜보는 형벌이이기 때문에 누구도 십자가형은 거절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라는 것이 참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역사 속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비참하게 죽은 그분을 우리의 주님이다. 이것이 엄청난 역설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우리들에게 뭐라고 가르쳐 주느냐하면 바로 그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주님 곧 하나님과 같은 분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속에 연약하고, 고통 받고, 죄 많고, 슬프고, 탄식하고, 병든 모든 자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다.
이 역설. 십자가에 나타난 이 역설을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역설이 깨달아지면 세상에 이렇게 귀한 복음의 역사가 있는가! 그런데 그 역설이 깨달아지지 않으면 세상에 기독교가 도대체 무엇인가? 마치 칼 마르크스가 당시의 종교성을 비판하면서 기독교는 아편과도 같은 종교다. 미래만을 강조해서 미래의 구원만을 위해서 현재의 도전과 개혁이 멈춰서는 그런 종교성이다.


그런 것이 십자가. 십자가 속에 계획도 있고, 변화도 있고, 갱신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십자가 속에 있어 십자가를 바르게 깨달으면 복음의 핵심을 다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못 깨달으면 계속해서 그 조각만의 신앙을 갖게 되고, 퍼즐 있잖습니까? 500개의 퍼즐로 된 그림을 조각만 알면 전체 그림을 모르게 되는데 전체그림을 알기 시작하면 하나의 조각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리 되면 훤하게 그림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그림의 핵심이 예수님의 생애의 핵심에 십자가가 달려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형벌을 받았던 당대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는가? 십자가의 상황을 그 명화의 작가들은 자기의 그림에서 어떻게 표현했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십자가의 삶]에서 첫 번째는 너무도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Leonardo da Vinci. The Last Supper. 1498 Mixed Technique 470 x 880 cm,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Milan <출처: WEB GALLERY of ART>



이 그림은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식당의 벽에 그린 벽화인데 가로가 880cm, 세로가 480cm의 굉장히 큰 그림입니다. 한 쪽 벽면 전체에 2년여 동안 걸려서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의 이전에는 예수님을 그리면 후광을 그렸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그리면서 그 후광을 뒤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대치했습니다. 뒤에 창문을 그려 자연스럽게 후광이 비치고 있는 것처럼 그렸습니다. 예수님이 정 중앙에 앉아계신데 제자들이 세 명씩 그룹으로 구분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오른쪽의 세 사람만이 알려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의 왼쪽에 그러니까 예수님의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시선이 예수님을 향해 바라보고 있습니다. 뭔가 심각하게 문제를 의식하고 있는데 이 그림이 도대체 어느 순간을 포착한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열두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당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주- ㄱ 설명 하면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너희들 중에, 너희 열두 명 중에 한명이 나를 팔을 거다.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하니까 다들 화들짝 놀랬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베드로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예수님을 따라갈 텐데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하는 그 말씀을 듣고 지금 제자들이 반응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여기 이 그림을 볼 때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구도와 배치를 보면서 흥미 있는 것은 세 명씩 그루 핑이 이들의 얼굴의 표정과 무엇보다 손의 모습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손을 어떻게 하고 있나, 예수님의 손은 왼손과 오른손이 다릅니다. 오른손은 손등이 보이고 왼손은 손바닥이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손등이 보이는 것은 지시적이고, 가르치는, 앞으로 향해 나가는 것이고, 손바닥이 보이는 것은 용납하고, 수용이고, 받아들이는 그런 뜻을 지니고 있는데 그루 핑을 해서 보겠는데...

이 그림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릴 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가 않으니까 다 빈치는 그리다 쉬었다가 묵상하다가 그렸다가 쉬다가 그렇게 2년여에 걸쳐서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도원장이 좀 빨리빨리 그리지 않고 있느냐고 했는데 다 빈치가 지금 한 사람이 잘 안 떠올라서 더 못 그리고 있다고 하니 그게 누구냐고 해서 가롯 유다라고. 가롯 유다인데, 그래서 누구의 얼굴을 보고 그릴까 하고 있었는데 수도원장님을 보니까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릴까 생각이 되는데, 자꾸만 저를 재촉하시니..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수도원장이 재촉을 하지 않았답니다. 거기에 자기의 얼굴이 가롯 유다로 들어가면 안 되니까. 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성경부터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요한복음 13장 21-22절)



예수님이 나를 판다고 하니까, 아! 이게 도대체 누구에요? 저에요? 그러면서 상황이 급박하게 불안하고, 놀라고, 의심이 되고, 당혹스럽고, 이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주 그냥 지금 걱정에 싸인 제자들이 예수님만을 향해서 지금 바라보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그룹을 보면 여기 바로 옆에 있는 것이 사도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내 설까지 나오는 부분인데, 여자처럼 그렸습니다. 당시 사도요한을 그릴 때 특징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장 젊은 사도 요한, 그리고 여인과 같이 부드러운 사도 요한 그것이 사도 요한을 그리는 핵심이었습니다. 만약 이것을 다 빈치 코드처럼 막달라 마리아라고 바꾼다면 여기 가장 결정적인 인물이 누가 빠졌느냐 하면 사도 요한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빈치 당대의 모든 그림을 통해 보면 거의 불가능한 사고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머리를 들이민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 다음 숨겨진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앞에 있는 것인데 높낮이가 가장 낮게 되어 있습니다. 그림 전체를 보면 서 있기 도하고 앉아 있기 도한데 혼자만 앉아 있는데 가롯 유다가 키가 가장 낮은 사람으로 그려졌습니다. 그 다음에 왼쪽에는 바돌로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안드레가 있고 예수님의 왼쪽에는 우리가 그림을 보는 쪽에서는 오른쪽에 도마와 알패오 아들 야고보와 빌립이 있고, 마태와 다대오와 가나안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의 손을 사도 요한의 어깨에 얹고 묻고 있습니다.“우리 중 누가 예수님을 판다고? 도대체 누구야?” 하고 사도 요한에게 질문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베드로 오른손을 보면 칼을 들고 있습니다. 칼을 들고 있는 것은 나중에 대제사장의 시종 말고의 귀를 내려치는 것을 암시적으로 그렸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픈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왼손은 빵을 집으려는 모습이고 오른손은 돈주머니를 쥐고 있습니다. 이 돈주머니는 두 가지를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하나는 돈만 알고 30에 예수님을 팔을 자와 또 하나는 본래 이 모든 재정을 가롯 유다가 맡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객관적인 것과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 두 가지를 동시에 표현하면서 가롯 유다의 얼굴이 가장 검게 가려진 상태로 표현하였는데 손 자체가 그런 것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안드레는 두 손을 들고“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왼손을 예수님 쪽으로 가고 있으면서 똑 같이 귀를 기울이고 있고 바돌로매는 두 손을 저돌적으로 식탁 위를 집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표정이 다 심각하면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하는 당혹스러움과 의심의 눈초리가 함께 표현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왼쪽에 도마는 오른손을 들고 검지를 펼친 모습은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당신의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는가를 알아보겠습니다. 하는 것을 표현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양팔을 벌리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하고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필립의 손가락이 재미있습니다. 얼굴은 약간 슬픈 표정입니다. 손가락을 자기 가슴에대고 “그게 나에요? 내가 그렇게 한다는 뜻이에요?” 하고 가슴 아픈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여기 맨 오른쪽 그룹의 마태는 두 손은 예수님 쪽을 향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저런 말씀을 하고 계셔” 하며 다대오와 시몬에게 이야기 하고 있고 다대오가 있고 시몬은 두 팔을 벌리고 “이게 어찌 된 일이야!” 하는 표정으로 다대오 와 마태를 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약간 슬픈 표정이기도 하고 외로운 표정이기도 하고 눈은 아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한편으로는 권면도하고 한편으로는 너희들 생각은 어떠하냐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처럼 되어 있습다.


수도원 수사들이 식사하면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보기위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림 속에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가는데 전부다 이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어찌할까? 대체 누구에게나 놀랍고 힘들어 하는 과정, 십자가 수난의 길이라고 하는 그 과정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두 번째 그림이면서 동시에 세 번째 그림을 설명 하겠는데, 렘브란트 시대에 렘브란트의 선배가 있었습니다. 선배 중에 렘브란트 보다 훨씬 유명한 화가가 루벤스 입니다, 렘브란트는 자기의 그림을 거의 팔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루벤스 그림보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비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었던 화가는 피터 폴 루벤스였습니다. 루벤스의 특징은 카톨릭적인 느낌이 잘 나타나면서 색채감이 명백합니다. 그래서 그림을 보면 눈에 확 들어오는 그런 특징이 있는데 똑같은 그림 둘을 소개하려 합니다.
하나는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다른 하나는 렘브란트의 같은 제목의 그림입니다.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루벤스의 그림은 엄청나게 큽니다. 420 x 310 cm 인데 이 그림은 많은 비평가들의 생각에는 렘브란트가 루벤스의 기본 구도를 본떴다고 하는데 거의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보면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요한복음 19장 38절)



예수님이 죽고 유월절 저녁 해지기 전에 주님의 시신을 끌어내려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을 표현 한 것인데 한 가지 참 놀라운 것은 루벤스의 그림과 렘브란트의 그림이 무엇이 다르냐 하면 루벤스 그림의 예수님은 아주 근육질 적이고 단단하고 위엄이 있고 권위가 있는 그런 예수님을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도 권위가 있습니다. 그림자체가 예수님이 우락부락하고 아주 힘 있는 장사처럼 보이고 있는 그림입니다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Rubens. Descent from the Cross(center panel). 1612-14 Oil on panel, 421 x 311 cm, O.-L. Vrouwekathedraal, Antwerp <출처: WEB GALLERY of ART>



여기 특징이 이렇습니다. 밝은 것은 예수님의 몸과 예수님을 감싼 하얀 천입니다. 하얀 천으로 예수님을 감싸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몸이 빛이 나고 있는데 이는 렘브란트의 화법과 비슷합니다. 여기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사도 요한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피의 색깔을 잘 이어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사도 요한인데 예수님의 온몸을 받아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의 파란색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을 막 잡으려하며 슬픈 모습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붙잡으며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여인은 아마도 예수님의 발에 향료를 부어 발을 씻긴 여인을 상상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베다니 마을에 마리아와 마르다를 상상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니면 마가복음 마지막에 여인들 몇이 있는 것을 여기에 그려 넣은 것으로 보이는데 아주 강하고 화려합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과정도 화려하고 위엄이 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을 접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떤 경우는 카톨릭의 화채 설. 예수님의 몸이 되는 화채 설을 상상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그런 신학적인 접근도 하는데 어떻든 그 특징이 예수님의 몸을 다 만지는 그 모습인데 조금 더 자세하게 보겠습니다.


요한이 빨간 옷을 입은 것은 상징성입니다. 십자가의 피와 똑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요한이 예수님의 뒤를 가장 잘 따른 마지막까지도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모범적인 제자 상으로 그리고 있는데 요한이 마지막에 예수님을 끌어 내리면서 그를 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도 권위가 있고 힘이 있고 예수님의 빛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슬프지만 위로를 받는 그런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렘브란트의 그립입니다.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Rembrandt. The Descent from the Cross. c. 1633 Oil on canvas 89.6 x 65.2 cm, Alte Pinakothek, Munich <출처: WEB GALLERY of ART>



렘브란트의 똑같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인데 이것은 그리 큰 그림은 아닙니다. 89.2 X 33.2 cm로 1632~33년에 그린 것인데 이것은 렘브란트가 루벤스의 그림을 생각하면서 구도를 조금씩 바꿔 놓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보시면 알겠지만, 예수님과 예수님을 감싼 흰색 천이 똑같이 빛이 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빛이 예수님으로부터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림의 구도는 비슷한 구도인데 예수님의 상이 루벤스의 그림과 다른데 이 그림의 예수님의 상은 허약한 예수님입니다. 아주 약하고 약한 그래서 모든 부분들이 인간적으로 말하면 볼품없고 아주 취약한 모습으로 예수님이 아주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두 노인들이 있고 오른 쪽에 배가 나온 사람은 누구일까 제사장 중 하나일까 아니면 이것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가 마지막에 예수님의 장사지낼 자기의 동굴로 옮기게 되는데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예수님은 벌거벗겨져 있고 요한이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온몸으로 밑에서 받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어머니가 누워있고 두 여인이 간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또 하나는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청년 비슷한데 예수님의 손을 꽉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일까?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는 루벤스의 그림에는 예수님을 만지려 하며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인데 이 그림에는 잘 안 보이는데, 좀 밝게 확대한 것이 아래의 그림의 (1)입니다. 여기에는 아들이 죽은 모습을 보고는 기절했습니다 아주 혼절해 있습니다. 그래서 여인 둘 이서 돌보고 있습니다. (2)는 예수님 손을 잡고 있는 파란 옷의 사람은 바로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1 혼절한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와 그를 돌보는 두 여인

2 그림 속에 들어가있는 렘브란트의 모습



이 렘브란트는 돌아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질 때 지금 자기가 동참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때 당시는 1600여 년 전으로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려 질 때 자기가 돕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거기에 동참 하는 거.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 속으로 동참하려면 렘브란트의 기법이 필요합니다. 성경 이야기 속에 나를 집어 넣어야 돼요 거기에 바로 내가 있었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예수님이 부활 할 때 그리고 바울이 선교 여행을 할 때에 동참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렘브란트가 움츠리고 막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님의 팔을 휘어잡고 있는 모습을 그려 넣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금 우리가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만 최악의 십자가였습니다. 바로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아지셔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늘 기억하여야 할 테마는 십자가입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 늘 우리의 삶에, 우리의 언어에, 판단에, 우리의 능력에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새롭게 깨닫게 되는 부부입니다.

같이 보시면서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주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의 생각과 판단,
나의 삶의 중심이 되게 하옵소서






by  seo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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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2013-11-16 오전 5:39:06) http://blog.somang.net/seolee/8015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사랑하는 삶

이 글은 2013년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화요조찬 성경공부[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를 강해하신 내용을 게시자가 녹취,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사랑하는 삶




오늘은 열 번째로 영성의 삶 중에 사랑하는 삶을 살펴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한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아니면 아내의 얼굴입니까?
      아니면 자식들입니까?
      아니면 내가 지금 이루고 있는 기업이 떠오르십니까?
      아니면 돈이 떠오르십니까?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결정이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것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서 나의 영성이 규정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하고 비슷하게 떠오르는 것이,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맘몬(Mammon)과 하나님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인간이 돈, 재물에 굉장히 큰 관심을 가지잖습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삶의 첫 번째를 돈. 렘브란트의 [어리석은 부자]를 보겠습니다.



렘브란트, 어리석은 부자



Rembrandt. Parable of the Rich Man. 1627, Oil on oak, 32 x 42 cm, Staatliche Museen, Berlin
<출처: WEB GALLERY of ART >



이 그림은 32 x 42 cm로 그리 크지 않은 목판에 그린 유화로 1627년에 그리었습니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인간 삶의 모습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 자신의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상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놀라운 것이 이 그림이 렘브란트가 스물한 살 때 그린 그림인데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이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누가복음 12장 20절)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하시면서 창고가 모자라는데 창고를 짓자 짓자하면서 그냥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있는 그 부자가 네 인생을 오늘 데려간다고 하면 네가 그렇게 노력해서 쌓아둔 재물들이 누구의 것이 되느냐?
여러분, 장례식에 종종 가보잖습니까. 거기서 돈뭉치나 돈다발을 관 속에 넣어가는 사람 없잖아요.
왜? 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지요. 돈은 다 꺼내고, 만약 패물을 몸에 지니고 있다면 다 꺼내잖아요. 모든 것 다 꺼내잖아요. 죽으면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 부자가 마지막 위기 앞에 있는데도, 이 그림의 장면이 지금 낮일까요 밤일까요? 깊은 밤으로 보입니다. 무엇인가 가득히 쌓여있습니다. 부자의 바로 옆에 돈 보따리가 있고 문서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해서 문서, 책들이 이렇게 많은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곡식을 팔고 사고한 그런 문서들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아마 집문서 일 수도 있고 아니면 땅, 밭문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손에 금화동전을 들고 유심히 보고 있는데, 가운데를 확대해서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아주 고급 옷을 입고 있습니다. 좋은 모피 옷 같습니다. 안경 쓴 눈으로 금화 동전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보고 또 보고있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처음에 오만원권이 나왔을 때 빛에 비춰보고 그랬잖습니까. 이 모습이 우리의 감정과 비슷합니다. 촛대의 촛불은 노인의 얼굴과 돈에 집중 되어 있습니다. 이 노인은 지금 몰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랬을듯합니다.


“아! 금화야 너 참 좋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리 봐도 저리 보아도 참 좋구나.” 이처럼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있습니다.
여기 바닥에도 금화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옆에 저울이 있습니다. 이 저울은 금화동전의 무게가 얼마인가 하고 재어 보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평가, 분석하는 사람들은 렘브란트가 이 그림에서 저울을 왜 그렸을까? 이것은 금화의 무게를 재는 노인의 저울이지만 그러나 다른 눈으로 보면 인생의 저울이 아닐까 인생아 이제 곧 끝날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이 있는데 네가 지금 돈만 들여다보면서 이 돈을 자기만 위해 쌓아오면서, 그런데 이 돈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 되느냐 나만을 위해서 사용 되느냐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돈에 집착하느냐 돈의 소중함을 알지만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느냐 이것이 늘 우리 인생의 과제입니다


예수님이 돈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느냐 하면 ‘인생을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돈이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돈이 인간에게 파괴력을 갖고 있다. 굉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 부자가 네 인생을 오늘 데려가면 도대체 이 쌓아둔 돈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네가 이 돈에 대해서 자기에 대해서 부여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해 부여하라. 라고 예수님의 마지막 비유 속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뭘까요? 돈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돈의 가치를 갖고 하나님을 위해서 바르게 써라. 네 먹을 것은 하루에 세끼 밖에 없지 않으냐. 네가 잠자는 침대는 하나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 네가 살집 하나가 있으면 되는 것이고 그리고 네 인생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풍요로운 것들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쓸 것인가를 확인하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림을 다시 보면 오직 돈에만 몰입하고 있는 노인을 잘 표현해 준 렘브란트의 그림이었습니다.

다음의 그림도 렘브란트의 그립입니다.



렘브란트,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Rembrandt. Christ and the Woman Taken in Adultery. 1644 Oil on wood, 84 x 65 cm, National Gallery, London <출처: WEB GALLERY of ART >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30대에 그린 83 x 65 cm의 유채화입니다. 거대한 궁에서 일어난 모습인데 예수님을 조금 다르게 자기의 시각대로 확대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계신 곳은 아래층이고 2층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어 재판을 하는 모습이고 아래층은 아래대로 재판이 진행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1664년에 그린 것인데 그림과 관련 있는 성경구절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한복음 8장 7절)



앞에 정면으로 보이는 사람 중 예수님이 계시고 여인이 있고 율법사인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 휘황찬란한 옷차림의 제사장, 왼쪽에 두 사람은 제사장일 수도 있고 한 여인이 있고 지팡이 집고 있는 사람은 이 여인을 고발한 사람 같기도 한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그림의 가장 밝은 부분은 고발당한여인입니다. 놀랍게도 렘브란트는 자기 식으로 변화시킨 것 같습니다. 사실 가장 죄 있는 사람이 이 여인인데 가장 죄가 없는 사람처럼 흰색으로 환하게 부각시켜 주고 있습니다. 좀더 확대해서 보겠습니다




특히 밝기가 여인과 고발한 사람과 예수님인데 율법사가 예수님을 향해서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인데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은, 손을 보면 예수님이 손을 가슴에 얹으시고 옆의 고발한 사람도 손을 가슴에 얹고 있는데 양심에 대한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고발한 사람은 양심상 이 여자는 죽여야 된다고, 예수님은 양심상 이 여자는 용서를 받아야 된다고. 결론으로는 똑같은 양심이지만 다릅니다. 예수님에게 이 사람은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사인 바리새인의 손도 밝습니다. 여기 또 하나의 손은 손에 손수건을 쥐고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입니다.


위쪽을 보면 똑같이 재판을 하고 있는 모습인데 제사장이 앉아 있고 무릎을 꿇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는 배심원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렘브란트는 두 가지의 재판을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위는 율법에 의해 죄를 지은 자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된다 하고 엄하게 하고 있는 율법의 재판과 밑에는 가장 율법에 의해 정죄 받고 돌을 맞아야 할 여인을 오히려 용서해 주시는 이 두 가지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율법은 그렇게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하나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죄 없는 자는 이 여인을 돌로 치라 하니까 다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만 남았다고 성경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돌로 치려 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마라. 그러면서 이 여인을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모습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이 이 여인의 눈물을 보면서 용서하시고 있는데 여인이 가장 죄 없는 사람처럼 부각되게 한 것은 당시 렘브란트가 심리적으로 자기 자신의 방탕한 것에 대해 거꾸로 역 적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다음에는 세 번째 그림입니다. 아가서의 사랑의 연작입니다.



샤갈, 아가서 연작 3번



Chagall. Song of Songs III. 1960 Oil on canvas 149 x 210 cm, Musee national Marc Chagall, Nice ⓒ Musee national Marc Chagall ⓒ cliche RMN Gerard Blot



다섯 개의 그림이 있습니다. 프랑스 니스에 가면 성서 테마를 중심으로 한 샤갈의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 곳에 가보면 지금까지 소개 한 거대한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이 아가서의 연작 5개의 그림이 한방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연작을 잠깐 먼저 보면, 연작은 오른쪽으로 I~V번입니다.



Song of Songs I. 1960

Song of Songs II. 1957


Song of Songs III untitled. 1960


Song of Songs IV. 1958

Song of Songs V. 1965-66


이 연작의 첫 번째는 낙원에서 하루를 즐기는 남자와 여자의 즐거움에 대해 표현했고 두 번째는 여인이 그려졌는데 사랑하는 여인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벌거벗은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세 번째가 오늘의 그림인데 행복한 여인의 결혼식을 표현한 것이고 네 번째는 하늘에서 백마를 타고 날아가는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의 자유를 표현하고 있고 마지막은 평생에 어떻게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다섯 개의 작품이 연작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것을 테마로 만든 것이냐 하면 아가서를 갖고 샤갈이 만든 것입니다. 아가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때 마지막으로 읽었던 성경이었는데 그런 아가서를 읽으면서 솔로몬 왕과 술람미여인의 사랑의 이야기를 본문으로 담고 있는데 이것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그렇게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 왕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술람미여인이라고 그렇게 이해하면서 내용자체를 읽어보고 굉장히 육체적이고 에로틱하다. 아가서 같은 것이 성경에 있었다. 전도서를 읽어 보면 이런 허무한 책이 성경에 있었다. 아주 대조적인 두 가지 책이 있다하면 하나는 아가서요 다른 하나는 전도서인데 이 아가서는 사랑의 한 여인을 보면서 또 한 남자를 보면서 사랑이 넘치는 그 고백이 가득 가득 쓰여 있습니다.


제가 몇 구절만 일러드리면 아가서 1장 10절에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15절을 보면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또 4장 3절을 보면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이렇게 하나하나 눈, 코, 입을 설명하고 있고 아가서 4장 5절은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어린 사슴이 백합화 가운데서 먹는 것처럼 여인의 두 젖가슴을 쌍태처럼 비유하면서 예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4장 11절을 보면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아가서를 읽어보면 세상에 남녀 간의 사랑을 이렇게 멋지게 아름답게 때로는 에로틱하게 표현한 것이 어디 있을까 하는 찬탄을 하게 됩니다. 제가 남자니까 여인에 대한 모습만 이야기했습니다만 여인이 남자에 대해 표현한 것도 아주 시적이고 환상적인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세 번째가 연작 중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인데 행복한 결혼식입니다. 다시 좀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왼쪽에 여인이 결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랑이 끝이 없다 하듯이 하얀 드레스가 길게 밑에 까지 내려져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쳐다보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빨간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옆에 천사(1)가 촛대를 들고 기뻐합니다. 그 옆에는 천사(2)가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수탉이 있는데 그 위에서 이 사람(3)이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데 결혼식에서 축제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4)는 예루살렘 성이 있고 이와 대비해서 거꾸로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샤갈이 살고 있었던 마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곳에는 녹색으로 그린 조랑말(5)이 있는데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마치 결혼식에 앞장서서 조랑말이 들러리 역할을 하면서 그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맨 밑에는 두 남녀(6)가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아가서의 남녀에 비유하면 샤갈이 자기 아내와의 관계를 암시적으로 밑에다 살짝 집어넣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도 이렇게 멋진 사랑이었다. 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예루살렘 성과 자기가 살던 삶을 대조적으로 비유하고 있고 이것을 통해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느끼게 합니다.


여러분 나이가 들면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은 자녀들의 사랑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너무 많은 미련은 두지 마십시오. 자녀는 젊었을 때 아름답게 키워주는 사랑이고 그 다음에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 떠나가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나이 들면 들수록 부부는 뭘까요? 평생 다가오는 사랑입니다. 나이 들면서 아내의 사랑을 못 받고 남편의 사랑을 못 받게 되면 그 가정은 점점 쓸쓸해집니다. 자녀에게 기대하려하는데 자녀는 부모를 그렇게 사랑할 수가 없어요. 자녀는 자기들의 자식을 사랑해야 되기 때문에 자녀들은 우리 삶에서 힘 키워주고 내놓으시고 그 다음에는 부부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신앙이 더 성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어린아이처럼 마치 처음 결혼한 남편과 아내를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도 나 하나님 사랑합니다.


그래서 돈을 더 사랑하느냐, 아니면 정말 이웃의 연약함을 사랑하고 용서해주느냐, 또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우리의 가정을 어떻게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삶이 평생 마지막까지 우리의 인생을 버티게 하고 우리 인생을 세우는 힘인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내가 육체로는 사랑하는 것은 조금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그 사랑은 평생 간직해야 우리 인생이 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지루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생에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같이 보시면서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 먼저 주님을 전심으로사랑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선물로 주신 우리의 삶을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맘몬(Mammon)

탐욕을 상징하는 악마. 마몬이라고도 한다. 검은 몸에 새의 머리가 두 개, 손발톱이 긴 손발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밀턴의 『실낙원』에 따르면,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 중 가장 치사한 근성의 소유자로, 천계의 천사였다고는 하지만 항상 고개를 숙이고 황금이 깔린 보도만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숨겨진 황금이나 보물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졌으며, 인간이 지구의 내부에서 광석이나 보물 등을 파내게 된 것도 맘몬의 근성이 옮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by  seo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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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의 삶 댓글[0]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2013-11-01 오후 1:48:17) http://blog.somang.net/seolee/7998

이 글은 2013년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화요조찬 성경공부[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를 강해하신 내용을 게시자가 녹취,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사명의 삶




오늘은 아홉 번째로 사명의 삶에 대해서 생각 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명이 내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은 보케이션(vocation)과 연결을 시켰습니다. 우리가 하는 직업자체가 우리의 사명이어서 어떤 직업의 귀천을 이야기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소명과 사명을 주셔서 이 모든 일들을 직장에서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만이 소명과 사명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주부가 가정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우리가 수고하고 땀 흘리면서 내가 갖고 있는 전문성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이세상이 윤택하게, 생명이 넘치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심어주는 그 역사를 감당하는 것이 바로 소명이요 사명일 것입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나오는 소명의 사건을 오늘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광야에서 그의 생을 마치려고 할 수 밖에 없었든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서 비전을 주셨는데 이제는 양만 치는 것이 아니라 네 민족 네 백성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끌라고 하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출애굽기 3장에 있는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입니다.
이 떨기나무란 그냥 비가 오면 한참 피었다가 다시 비가 안 오면 말라비틀어지는 그래서 불쏘시게 로 쓰는 별 볼일 없는 광야에 가면 가장 많은 것이 이 떨기나무입니다.



샤갈,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



이 그림은 아주 큰 그림입니다. 195 x 312 cm인 유채화 그림인데 먼저 성경구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장 4-5절)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하시면서 모세야, 모세야 부르시고 네가 선 곳이 바로 거룩한 땅이니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거룩함의 경험을 하면서 소명이 시작 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Chagall. Moses and the burning bush. 1960-1966, Oil on canvas 195 x 312 cm, Musee national Marc Chagall, Nice ⓒ Musee national Marc Chagall ⓒ cliche RMN Gerard Blot



이 그림의 위는 천상을 표현하면서 녹색으로 그렸고 밑의 세계는 푸른색으로 구별 되는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둘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른 쪽은 하얀 옷을 입고 지금 무릎을 꿇고 있고 맨발로 신을 벗고 있습니다. 그런데 왼쪽에 있는 모세는 똑 같이 있는데 여기는 노란색의 얼굴이고 마치 옷처럼 몸처럼 되어 있는데 이는 출애굽의 홍해를 건너가는 장면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두 모습이 아주 흥미로운데 가운데 떨기나무가 있습니다. 두 모세의 모습을 보면 하늘로부터 빛을 받는 것이 뿔인 것처럼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내려오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여태까지 치는 양들이 있습니다. 양들이 뒤 배경으로 되어 있고 그리고 모세가 떨기나무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보면서 오른손은 가슴에 얹어있고 왼손은 허벅지에 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야, 모세야 부르면서 뭘 요구하셨느냐하면 네가 서 있는 땅이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아주 실감이 나는데 내가 내 백성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를 내가 듣고 그들이 억압받는 것을 내가 보았고 내가 그들이 갖고 내게 부르짖는 것을 가슴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내가 그들에게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네가 이일을 좀 해줘야겠다 하는 모세에게 단순한 목동으로서 인생을 그치지 말고 이제는 네 이웃을 위해서 네 민족을 위해서 네가 갖고 있는 달란트와 네 생각과 모든 것들을 나를 대신해서 좀 일 해라. 그것을 모세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사명이라는 것이 그런 거 아닐까요. 하나님의 음성이 나 대신 네가 일해라. 내가 지금 이런 아픔이 있는데 네가 그 아픔을 갖고 그 자리에 들어가라. 내 백성이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네가 갖고 있는 달란트를 갖고 그곳에서 고쳐봐라.
여러분! 그게 소명이고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모세를 향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가운데 떨기나무의 불꽃이 막 올라가는데 주위에 둥그렇게 불꽃의 아우 라를 만들고 있습니다. 색감은 무지개의 빨강, 주홍, 노랑, 초록, 파랑, 남색 그리고 보라색의 색깔을 부분 부분적으로 하여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가운데에 천사가 있습니다. 천사가 날개를 펴고 양팔을 벌리고 있습니다. 샤갈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 쉽게 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그릴 때는 이렇게 천사로 바꿔 그리고 있습니다. 이 천사가 모세를 향해 모세야, 모세야 부르니 모세는 오른 손을 가슴에 댄 것을 보면 “말씀하시옵소서. 내가 듣겠습니다.” 라고 하는 겸손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왼쪽의 또 하나의 모세는 빛이 비춰진 뿔 같은 모습이 모세가 계시의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 앞에 십계명 돌 판이 두 개가 있습니다.

샤갈의 상상력이 뛰어난 게 모세의 몸뚱이를 그리면서 그 몸에 모든 백성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자기가 이끌어 갈 백성이 마치 홍해를 건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몸위의 머리는 모세의 얼굴인데 이는 맨 앞장을 섰다는 뜻도 되고 그가 모든 백성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하는 하나의 지도자로서의 모습이 그 안에 담겨져 있는데 모세의 허리 부분인 가운데 하얀 것이 뭘 차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이건 구약에 나오는 구름기둥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구름 기둥을 통해서 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구름기둥 밑에도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뒤 따라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차단이 되어있고 아래쪽은 벌겋게 그려져 있는 것은 아주 아수라장입니다. 위는 질서정연하게 가는 모습이고 아래는 홍해를 건너면서 바로의 군사들이 물속에 빠져 들어가며 아수라장을 일으키는 장면을 그리고 있고 위에는 모세의 말씀 따라서 모세와 함께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부름 받은 사명의 자리를 보면, 이 모습들은 출애굽기 3장을 읽어야 이해가 잘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 모세가 결국에는 사명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른쪽에 있는 모세를 소명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왼쪽의 모세를 사명의 사람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명은 소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소명은 하나님과의 만나는 것이 소명이고 사명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그 삶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바로 사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이 시간 나와서 말씀을 배우는 것이 소명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집으로, 직장으로, 사회로 세상을 향해서 나가는 것이 사명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어우러질 때 진정한 역사가 바르게 일어난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음 그림을 보겠습니다.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렘브란트, 선한 사마리아인



이 그림은 에칭으로 석판화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명의 삶을 표현하고자 이 그림을 올렸습니다. 이 그림은 보시는 대로 흑백인데 주막 주인이 서 있습니다. 주막 입구에 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주인일 수도 있고 창문에서 바라보고 있는 모자를 쓴 사람이 주인일 수도 있습니다. 입구에서 서있는 사람과 마주서서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당한 사람이 부추김을 받고 있고 말을 붙잡고 있는 하인이 있고 그리고 그 뒤에는 한 여인이 우물에서 물 깃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한 가지 아주 재미있는 것은 이 밑에 보면 개가 있습니다. 개가 뭘 하고 있는 모습입니까? 지금 똥을 누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데 똥 누는 개를 그리고 뒤에는 물 깃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었는데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사람들이 그 의미를 이렇게 저렇게 유출하는데, 먼저 성경 구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누가복음 10장 33-34절)



Rembrandt. The Good Samaritan. 1633. Etching, 25x20 cm, 1st state. Rijksmuseum, Amsterdam, the Netherlands< 출처: WEB GALLERY of ART >



누가복음 10장에 있는 유명한 말씀인데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님에게 잘 보이려고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이웃의 개념을 옆에 있는 존재의 개념으로 예수님이 생각하시지 않고 예수님은 아주 탁월한 것이 있습니다. ‘이웃이란 되는 것이지 이웃이란 있는 것이 아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 있다고 이웃이 아니고 그러니까 강도 만난 자는 유대인이었을까요? 이방인이었을까요? 유대인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유대인이 이웃인데도 제사장이 보고 지나가 버렸고, 레위인도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다고 이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웃이란 남이 힘들고 어려울 때 옆에서 돕고 함께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이웃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된다.” 가 단순한 존재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을 하면서 이웃이 된다. 라는 개념으로 바꿔 놓고 있습니다. 여기 있다고 이웃이 아니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사랑하고 같이 행동 할 때에 이웃이 된다는 놀라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그림 보다 좀 더 앞서 그린 유채화로 된 것을 함께 보면, 이 유화도 그림의 구성이 거의 똑 같습니다 다만 구도가 좌우가 바뀌어 그려졌습니다. 집도, 각각의 사람도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똥 누는 개가 먼저 그린 유화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렘브란트가 그림을 희화화(戱?化)한 것 같습니다. 이 당시에 사마리아인이 어떤 존재로 이해되었을 까요? 사마리아인은 본래 개로 취급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을 유대인들이 인간 취급을 안 했습니다. 그들은 개를 싫어했잖아요. 수로보니게 한 여인도 주인의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런 표현을 하기 도 했는데 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싫어하는 부 정결(不 淨潔)한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 정결한 동물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중에도 더 부 정결한 거 그게 똥이 아니겠어요. 이거을 통해 바로 사마리아인이 진짜 개똥같은 사람인데 도대체 누가 진정한 이웃이냐 누가 사랑을 베푸느냐 이렇게 개똥같이 버려져 있는 사마리아인이 진정으로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닌 가 오히려 이 유대인들아 그저 잘났다고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선민이다. 우리는 제사장이다. 우리는 레위 인이다. 그렇게 자랑하고 있는 너희가 너희 유대인이 고통 받고 있을 때 돕지 않지 않았느냐? 그게 어찌 사랑이냐? 그런데 여기 개똥같이 여기는 바로 그 사마리아인이 이것을 했다.
이런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 하나는 더 쉽게 해석한다면 물 깃는 여인이 있고 개가 있는 것들은 그냥 일상적인 우리 삶의 자리다. 그리 먼데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매일 매일 경험하는 자리 속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라는 그것을 우리에게 암시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아닌 가?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사랑으로 감사하는 것. 그것이 소명의 삶에 이웃을 향한 삶이다. 란 표현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고 있습니다.



고흐, 낮잠



세 번째 그림은 고흐의 낮잠입니다. 91 x 73cm의 유채화로 1890년에 그린 것입니다.
고흐의 색채감은 아주 대단합니다.



Gogh. Noon:Rest from Work (after Millet). January 1890, Saint-Remy, oil on canvas 91x73, Musee d'Orsay, Paris< 출처: WEB GALLERY of ART >



이 잠자는 것. 이것은 수고한자만이 갖는 특권입니다. 노력하고 땀 흘리고 애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쉬는 것입니다. 그건 잠 잘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 잘 자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수고했는데 잠 잘 자게 해주세요. 푹 자게 해 주세요. 걱정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잠자게 해 주세요. 라고.


지금 추수를 다하고 있는데, 오전 중에 열심히 일하고 골아 떨어져 낮잠 자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주 평화로운 모습이죠? 그런데 이 그림보다 더 평화로운 모습의 그림이 있습니다. 본래 고흐의 이 그림은 모사한 것입니다. 지난 첫 번째 강의 “첫 걸음”에서 보았듯이 고흐는 밀레를 좋아해서 밀레의 그림 여러 점을 모사했습니다. 고흐는 이 그림 그리기 25년 전에 밀레가 그린 그림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따서 모작을 만든 것입니다.



밀레의 그림

고흐의 그림



밀레의 그림을 보면 고흐가 구도는 바꿔 그리었지만 모습은 똑 같습니다. 추수한 곡식 더미와 농기구와 수레도 같은 모습이고, 여인이 남편 옆에서 다소곳이 잠을 자고 있고, 남편은 신발을 벗고 모자를 눌러 쓰고 잠자는 모습이 똑 같습니다. 밀레의 이 그림은 파스텔화입니다. 이 그림과 고흐그림을 비교해보면 고흐의 그림은 그의 기법에 강렬한 느낌을 주지만 저의 경우는 고흐의 강렬함 보다 밀레의 따뜻함이 더 다가오더라고요. 두 그림 다 평화로움을 느끼게 해 주닙니다. 멋진 그림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한복음 5장 17절)



여러분, 일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소명과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있다 한다면 그것은 일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고 애쓰고 우리 자식들에게도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일 할 줄 아는 사람, 수고할 줄 아는 사람 그래야 하나님께서 축복 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데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이 쉼의 낮잠 자는, 잠자는 복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면 너무나 평화롭습니다. 애써 수고하고 일 해서 추수한 곡식 단을 뒤에 두고 누워 낮잠 자는 모습. 우리 삶에도 수고하고 땀 흘리고 애쓴 그런 삶의 축복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일하게도 하시고 쉬게도 하시고 내게 주신 그 자리에서 맘껏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헌신하고 하나님 역사를 감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오늘을 위해서 우리가 평생 이렇게 사는 삶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주님 일할 때에 즐거운 사명감으로
감당하게 하시고 쉴 때에 깊은 단잠을
주옵소서




 

by  seo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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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하는 삶 댓글[0]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2013-10-24 오후 8:21:44) http://blog.somang.net/seolee/7988

이 글은 2013년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화요조찬 성경공부[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를 강해하신 내용을 게시자가 녹취,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절제하는 삶




절제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삶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아시는 대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있는데 그 열매 중에 사랑으로부터 시작해서 맨 마지막 열매가 절제, Self Control입니다.

아무리 질 나가다가도 이 셀프컨트롤이 상실 되면 마지막 결과가 무너지게 됩니다.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되지 않는 것, 그것은 절제가 마지막에 모자라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특별히 남자들에게 있어서 이 절제는 세 가지 측면에서 다가오는데 하나는 성적인 문제입니다. 오늘의 그림자체가 남자 곁에 다 여자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여자는 두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는 유혹자로 다가오고 하나는 구원자로 다가옵니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또 깊은 유혹과 타락 속에 빠지게 되는 어떤 면에서 우리 인생 전체를 되돌아보면 그런 측면이 성경 속에 나타나 있고 나 자신의 모습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하지 못하면 우리 삶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림 세 가지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는 렘브란트의 그림입니다.


렘브란트, 눈먼 삼손



삼손과 들릴라는 너무도 유명해서 모든 화가들이 다 한번 씩 그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렘브란트의 그림이 아주 탁월할 뿐만 아니라 아주 실감나는 다이내믹한 역동적인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사기 13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블레셋의 위협 앞에서 삼손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태어날 때 천사가 그의 어머니에게 다가와서 “너는 이 아이를 배고 낳을 때 술과 독주를 금하고 이 아이를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치라” 그렇게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나실인이 되었는데 사실 삼손에게 모자랐던 것이 무어냐 하면 자기 통제력입니다.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맨손으로 사자를 때려눕히기도 하고 나귀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이기도 하고 하여튼 그의 모습을 보면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정욕에 대해 통제하기가 힘들었습니다.



Rembrandt. The Blinding of Samson. 1636, oil dn canvas, 236 x 302cm, Stadelsches Kunstinstitut, Frankfurt < 출처: WEB GALLERY of ART >



그가 젊은 청년 때부터 블레셋 여자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여자와 꼭 결혼하겠다고 부모님에게 요청해서 그렇게 강제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사건을 일으키고 블레셋 여자와 헤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유명한, 자기가 잡은 사자를 보니까 그 사자 속에 벌이 들어와서 벌집을 만들어 꿀을 생산하여 그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깨끼를 내게 됩니다. “먹는 자 안에 먹을 것이 있고 먹는 자 안에 단 것이 있다.” 하는 수수깨끼를 내면서 그것이 무엇이냐? 블레셋 사람들에게 답을 맞히면 선물도 주고 돈과 재물을 주겠다고 하는 유혹 때문에 결혼한 블레셋 여자가 막 보채며 남편을 못살게 굽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구나. 그러면서 삼손을 괴롭힙니다. 그러다가 아내도 잃고 장인도 다 잃어버리게 되어서 다시 블레셋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가 바로 들릴라입니다.


들릴라도 똑같이 자기 동족들에게 네가 삼손이 갖고 있는 힘의 비밀을 알아내면 우리가 네게 큰 제물을 주겠다고 하는 그 꾐에 넘어가 계속해서 삼손에게 애걸을 하면서 그 비밀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무려 네 번씩이나 대답을 하게 됩니다. 세 번은 거짓으로 대답하고 그러나 마지막 네 번째는 비밀을 이야기 하게 되는데 내 머리는 날 때부터 삭도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 머리를 잘라버리면 내게 있는 힘이 사라지게 된다는 이 비밀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블레셋 군사가 쳐들어와 삼손을 붙잡는 그런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곳은 굴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천막 같은 막사 안입니다.


블레셋 군사가 다섯이 있는데 한 사람이 삼손을 뒤에서 껴안고 목과 가슴을 꽉 붙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왼 쪽에 있는 병사는 창을 들이대고 있고 또 다른 군사는 삼손의 오른손을 쇠사슬로 묶고 있고 다른 하나는 삼손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 한 군사는 단검으로 삼손의 눈을 찔러 피가 흐르고 있는데...

성경구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사사기 16장 19절)





좀 확대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렘브란트는 굉장한 상상력으로 그리었는데 이 장면에서 들릴라의 모습을 보면 이것을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만 왼 손에는 삼손의 머리카락이 쥐어있습니다. 그리고 오른 손에는 가위가 있습니다. 이 부분을 다른 사람의 그림에는 들릴라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으로 그려졌는데 렘브란트는 들릴라가 직접 자르는 모습으로 되어 있고 막 도망가려는 자세이고, 빛이 들릴라와 삼손에게 대각선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의 들릴라의 모습은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아주 교묘하고 음흉한 미소를 품고 있는 모습이다. 자기를 사랑했던 남자이지만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어 남자를 버리고 도망가려는 여인의 모습이다. 라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 삼손은 여인에 대한 정욕에 모든 것을 걸고 그의 생애가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절제할 때 잘못하는 특징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급함입니다. 마음의 통제가 잘 안될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절제해야 할 때 하지 못하는 두 번째의 특징은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급함과 그것에만 집착하는 것. 집착은 좋은 의미에서 소중한 것인데 집착을 하게 되면 자기의 건전한 판단과 총명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붙잡혀서 두 눈이 멀게 됩니다. 성경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그러다가 블레셋 사람들이 큰 잔치를 벌이게 되는데 세월이 조금 지난 것 같습니다. 다시 삼손의 머리가 길어졌습니다. 삼손이 아이들에게 조롱받으며 광장에 나갈 때 큰 기둥 옆에 새워 달라고 말합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벌일 때 이 기둥을 넘어뜨리면서 그 성전 전체를 무너뜨리게 하는 역사가 성경에 기록 되어 있는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삼손이 살아 있을 때 블레셋 사람을 죽인 것 보다 삼손이 죽을 때에 더 많은 블레셋 사람이 죽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삼손의 힘과 무절제를 같이 이용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역사를 보여 주는 것이 아주 아이러니합니다. 우리의 못된 것 까지도 하나님이 쓰시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삼손이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으로 부터 다르게 쓰임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몰락의 길을 가면서 삼손은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아주 불쌍한 삼손이라는 거대한 용장 힘의 장사가 결국은 한 여인의 꾐에 넘어가서 자기 인생전체를 파멸시키는 그 모습을 렘브란트는 아주 실감나게 그리었습니다. 이 들릴라가 도망가려는 모습과 그리고 삼손이 고통 중에 지금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절제.
절제에 대한 세 가지 욕망이 첫째는 여인의 유혹이고, 둘째는 재물의 유혹이고 셋째는 명예와 권력의 유혹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유혹은 가장 고민이 되는 것이 가장 충동적입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정신을 못 차리면 순간적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 여인에 대한 유혹인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남자들이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부딪치는 아마 가장 강렬한 유혹이고 단계적인 유혹이고 충동적인 유혹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삼손이 이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가 하는 이 모습을 우리가 실감나게 같은 남자로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또 하나의 여자가 남자 곁에 있는데 이것은 조금 다릅니다. 샤갈의 그림입니다..



샤갈, [다윗과 밧세바]



샤갈이 그린 [다윗과 밧세바]는 판화 인데 큰 그림은 아닙니다. 36 x 27 cm이니까 아주 작은 편입니다.
이 그림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두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왼 쪽은 다윗의 얼굴이고 오른 쪽은 밧세바입니다.



Chagall. TDavid and Bathsheba. 1956, oil on canvas, 35.8 x 26.5 cm, Musee national Message Biblique Marc Chagall, Nice ⓒ Musee national Marc Chagall ⓒ cliche RMN Gerard Blot



이것은 너무나 잘 아는 대로 사무엘하 11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어느 날 다윗이 여유가 생겼습니다. 침상에서 늦게까지 잠들어 있었습니다. 저녁 즈음에서야 침상에서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건물 옥상에서 거닐다가 먼발치에서 목욕하는 한 여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다윗을 보면 얼마나 조급하고 얼마나 집착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절제에 대한 반대 되는 것을 탐구로 들어갈 때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점이 무어냐 하면 아주 조급한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여인이 벌거벗은 것을 보면서 갑자기 정욕이 솟구쳐 자기 부하를 시켜 저 여자는 어떤 여자인지 신원을 알아 오라 그랬을 때 그 부하가 보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그런데 서술문으로 기록하지 않고 의문문으로 기록 했다는 것이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왕이 하는 짓을 보니까 이건 왕이 아니고 옛날 총명한 다윗의 짓이 아니고 즐겁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다윗의 행위가 아니어요. 그래서 그 부하가 볼 때에도 뭐라고 표현했냐면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그 사람 남의 여자에요. 남편 있는 여자입니다. ...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고 물음표를 던졌습니다. 이것은 다윗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감히 부하로서 다윗에게 항명 할 수 없고 다윗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당신이 잘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 지금 멈춰 서세요.


그때 다윗은 하나님이 머릿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 여인의 모습만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 말마따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을 묵상했습니다. 거기에 집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데려오게 했고 그리고 동침을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성경은 한번으로 나오지만 한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여인이 임신을 하게 됐습니다. 이 남편은 다윗의 30인의 용장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사랑하고 귀히 여겼던 용장 중의 하나인 맨 마지막에 우리아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우리아에게 임신사실을 감추려고 우리아를 끌어 드리려 하지만 우리아가 자기 집으로 가지 않아서 전쟁터로 보냅니다. 요압장군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 우리아를 최전방에 배치하라 그리고 전쟁이 치열할 때 너희는 되돌아오고 우리아가 죽게 하라는 편지를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장군에게 보냅니다. 다윗이 정말 잔인해 졌습니다. 총명이 다 없어졌고 못돼졌습니다. 이 여인에게 조급한 마음으로 집착하니까 모든 판단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남자로서 특별히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종종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아내와 즐거워하고 아내와 만족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아내와 즐겁고 내 아내와 만족하지 않으면 우리 모습이 자꾸만 다른 여인을 향해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나의 명예와 나의 삶에 치명적인 문제가 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여기 그림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여인의 머리 위에 빨간 천사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악마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천사처럼 보이지만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빨간색과 파란색이 막 투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선과 악이 투쟁하고 있고 내가 왕으로서 이렇게 해야 되는데 내 마음속에 있는 정욕이 나를 이끌어 가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그 모습을 여기에 아주 적나라하게 한 내면의 두 모습을 다윗의 얼굴과 밧세바의 얼굴을 하나로 병합해 놨습니다. 인간 안에 이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손으로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고 욕망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까지 우리 속에 선과 악의 투쟁은 계속 될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하잔 습니까? 인생의 싸움 중에 제일 치열한 싸움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내가 갖고 있는 내 마음과의 싸움이라고. 언젠가 인디안 할아버지를 이야기 한 거처럼 손자한테 얘야! 인간 안에는 착한 것대로 못되고 악한 것대로 끊임없이 싸움을 한단다. 그랬더니 이 손자아이가 할아버지 그럼 둘이 싸우면 누가 이겨요? 그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얘야, 누가 이기겠냐? 네가 먹이를 자꾸자꾸 주는 그 늑대가 이긴단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왜 말씀을 배웁니까? 왜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까? 내 속에 있는 선한 것에 자꾸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내가 성숙하고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속에서 얽어매려는 것들을 차단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게 있습니다. 50대 50입니다. 그런데 이쪽에다 선한 것을 자꾸만 먹여주면 이것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러면 51대 49.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을 하게 될 때 우리가 영적인 작은 승리를 하게 됩니다.
영적인 승리, 영적인 회복 이것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다음에 우리의 삶이 자연스럽게 내 삶의 선한 의지가 나를 끌어갈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예뻐하셨던 다윗에게도 이 순간은 하나님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조급함과 집착하므로 그날 밤에 데려 온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몰랐다가 나단이 지적했을 때 그가 변하게 될 텐데....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사무엘하 11장 2절)



그때부터 조급해졌고, 그때부터 집착했고, 그때부터 모든 지혜와 총명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든, 다윗의 이것 때문에 그 다음부터 다윗은 완전히 초상집으로 바뀌게 됩니다. 서로 싸우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하고, 오빠는 동생을 간음하고, 동생은 형을 죽이게 됩니다.


한 번의 문제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무너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 남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절제입니다. Self Control입니다. 이 부분이 마지막까지 가야 우리 신앙의 결실을 맺는 삶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볼 그림은 렘브란트의 그림입니다.



렘브란트, [사도 바울의 모습을 한 자화상]




Rembrandt. Self-Portrait as Apostle Paul. 1661, oil on canvas, 91x77 cm, Rijksmuseum, Amsterdam < 출처: WEB GALLERY of ART >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참으로 많이 그렸습니다. 두 가지의 자화상을 보여드리면 왼쪽은 젊을 때의 자화상입니다. 1635년에 그린 것입니다. 오른 쪽은 1661년에 그렸으니까 26년이 지난후의 자화상입니다. 젊을 때의 자화상은 자기가 탕자가 됩니다. 술병을 높이 들고 여인을 껴안고 자기의 정욕을 즐기는 한 면을 그리었고, 오른 쪽은 사도바울이 된 모습을 그리었습니다. 자기의 내면에 두 가지가 다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렘브란트의 사도 바울 모습을 한 자화상은 91x77cm 크기의 유채화로 렘브란트가 죽기 8년 전(1661년)에 늙어서 그린 그림입니다. 터번을 쓰고 있는 모습니다. 오른 쪽에는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있는 모습이지만 앞을 향해 보고 있는데 이마에는 주름살이 가득하고, 입은 한 일자로 꽉 다물고 있고, 눈동자는 늙은 모습에도 마음속의 결단과 결심과 그런 생기가 넘치는 모습입니다. 가운데 잘 보이지는 않는데 가슴에 칼이 있습니다.


그림을 밝게 해서 보겠습니다. 당대의 그림을 보면 성화를 그릴 때 바울이나 베드로나 한 쪽에는 성경이 있고 또 십자가가 있고 또 한 쪽에는 칼이 있습니다. 칼을 그린 그림이 많습니다. 칼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순교, 죽음을 뜻하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이 말씀이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들어가서 마음을 찔러 쪼개기 까지 한다는 그런 뜻도 담겨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젊었을 때 가졌던 욕망과 욕심과 탐욕이 가득한 자화상과 바울의 모습의 자화상을 보면서 아주 거룩한 데서부터 아주 천하고 육적인 그의 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산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이 어떤 결단을 하는가에 달려있는데 고린도전서 4장16절. 자화상이란 바로 이런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전서 4장 16절)



렘브란트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에 바울처럼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성의 삶에 절제는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내가 어떤 것은 조급하지 않은가, 내가 너무 집착하지 않은가, 몰입하는 게 아니라 집착하는 게 문재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일에는 몰입해야지요.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에 몰입하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에 몰입하고 그러나 집착하게 되면 모든 것이 차단됩니다. 생각이 차단되고, 지혜가 차단되고, 올바른 판단력이 차단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선한 것들을 이렇게 펼처 나갈 수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마지막 기도를 함께 드리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알게 하셔서,
내 몸도 절제하게 하옵소서




 

by  seo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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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삶 댓글[0]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2013-10-22 오후 5:04:38) http://blog.somang.net/seolee/7984

이 글은 2013년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화요조찬 성경공부[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를 강해하신 내용을 게시자가 녹취,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기다리는 삶



오늘은 [기다리는 삶]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까?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내가 오늘 하루를 살면서 설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지루한 것은 기다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실증나기 시작하는 것은 기다림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면 인생이 실증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이가 적든 많든 기다림이란 우리의 삶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힘 있게 만드는 그런 하나의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와 신약의 역사가 전부 다 기다림의 역사입니다.
왜 기다릴까요? 여러 가지인데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아브라함 같은 사람은 자기의 삶에서 자녀가 태어나는 것을 가다렸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역사를 그가 묵묵히 감당하는데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애굽 땅에 있을 때의 기다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의 기다림은 엑소더스이었습니다. 새로운 가나안 세계를 향한 지금 종에서 자유자가 되도록, 지금 억눌림에서부터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미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본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 속에서 그것이 주-ㄱ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난 속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게 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고난의 세월을 인고의 과정에서 무너지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기다림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다림이 없었다면 다른 민족처럼 흩어진 아무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한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이란 늘 중요한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나라를 기다리고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다리고 오늘을 사는 자는 우리 기다림의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든 그 분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이제 다시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이다. 그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우리들이 갖고 있는 기다림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미래에 하나님이 주실 약속을 오늘 내 삶 속에서 기다림 속에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는 것은 기다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 속에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비전을 가지라 하는 말은 너는 기다림의 인생을 살줄 알라 라고 하는 다른 뜻이 있기도 합니다.


샤갈, 노아의 방주



Chagall. Noah’s Ark. 1961-1966, Oil on canvas, 236 x 234 cm, Musée national Marc Chagall, Nice
© Musée national Marc Chagall © cliché RMN Gérard Blot



기다림 속에 있는 삶을 표현하면서 구약에서 가장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미래를 가슴에 품었던 노아의 방주의 모습을 그린 샤갈의 그림을 먼저 보려합니다
우선 하나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창세기 7장 1절)



하나님께서 노아의 의로움을 보시고 시대가 너무 타락하고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갈등하고 성적인 부패가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공의와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세계를 내가 심판하겠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내가 만들겠는데 너를 통해서 만들겠다. 그래서 노아에게 이 방주를 짓도록 하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236 x 234 cm의 큰 그림입니다. 1966년에 그리었습니다.


 

가운데에 노아가 있습니다. 왼쪽에 여러 짐승들이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얀색으로 그린 짐승과 노란색의 짐승인데 뿔이 난 것을 보니까 이것은 염소처럼 보이고 하얀색의 뿔이 작은 것은 양처럼 보입니다. 그다음 염소 밑의 동물은 정확치는 않지만 말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왼쪽 하단 쪽에는 물고기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특이한 새가 그리어졌는데 꼬리가 길게 늘어뜨린 공작새가 있습니다. 날개는 펴지 않고 있는 모습인데 빨간색, 파란색과 초록색등으로 공작새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많이 그려진 그림 중의 하나가 비둘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보면 공작새를 제외하고는 제물로 바치는 그런 동물들이 그려졌습니다. 반대로 오른 쪽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대비가 되고 있습니다. 다만 왼쪽 밑에 누워 있는 자처럼 남자의 모습이 특이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오른쪽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노아를 보면 노아를 포함해 전체적으로 파란색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물의 의도 들어가 있고 어떻게 보면 천국의 의미도 들어가 있고, 희망의 의미도 들어가 있는 것 같은데 여기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노아의 방주]를 그린 그림들이 하나같이 다 방주의 바깥에서 방주를 바라본 그림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방주가 물 위에 떠있고 그 안에 짐승들이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샤갈의 그림이 특이한 것은 바깥에서 방주를 바라 본 것이 아니라 안에서 전체를 밖에까지 보고 그린 것입니다.
이것이 이 그림의 특성입니다.

가운데를 보면 노아의 머리 위로 창문과 창틀이 보입니다. 노아의 오른손에는 비둘기가 들려있습니다. 비둘기를 지금 막 바깥으로 날려 보내려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40일 동안 주야로 비가 내리고 그 다음에 120일 동안 온 천지가 물에 가득하게 되고 나머지 40일 동안 노아가 기다리다가 제일 먼저 까마귀를 보내고 두 번째로 비둘기를 보내고, 첫 번째는 비둘기를 보냈는데 다시 돌아옵니다. 두 번째로 칠일 있다 비둘기를 다시 보내니까 비둘기가 올리브잎사귀를 물고 돌아옵니다. 그러고 나서는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과정을 겪게 되었는데 이 비둘기를 내 보내려는 듯이 오른손에 들려있고 왼손을 보면 하얀 황소를 쓰다듬는 것 같기도 하고 안수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제사 드리는 동물 중에 제일 큰 것이 황소이고 제일 작은 것이 비둘기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타날 제사 제물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사람들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당시 사람들이 먹고 자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이런 일상적인 삶의 모든 것들을 표현한 것으로 엄마가 있고, 아빠도 있고, 여기 결혼하는 모습도 있고, 자식과 같이 있는 이런 것들을 그리어 놨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니스의 샤갈 박물관에서 나온 책을 보면 평론가들이 쓴 글에 그것을 암시한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어냐 하면, 사람들 속에 아이가 팔을 벌리고 있는 것이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징성에 대해서, 여기에는 노아 당시의 일상적인 삶과 더불어 거꾸로 노아를 통해서 이제, 여기 보면 노아 부부와 세 자녀의 쌍쌍이 합쳐 8명이 들어갔다 했는데 여기에는 8명이 아니라 수많은 사라들을 함께 그려 넣은 것입니다. 이 [노아의 방주] 그림의 특색은 색체감이 있는 것 한 가지와 두 번째는 이 시간에 대한 것을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면 하늘과 땅이 교차하는 것을 한 공간에 다 집어넣었습니다. 한 공간에 하늘과 땅의 초월성과 현실성을 같이 묶어버렸습니다. 그림을 보면 왼 쪽의 위부분에 사다리가 있습니다. 사다리 위에 천사가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현실과 천상세계를 한 그림에 이렇게 묶어내고 있습니다. 여기 또 하나 샤갈이 그리는 그림의 특색 중 하나가 현재와 미래와 과거의 시간성을 꿰뚫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림 속에 하나만 그리지 않고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그립니다. 그래서 샤갈의 그림은 느낌으로 딱 보는 게 제일 좋고, 하나하나 분석하면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것 저것을 그 그림하나에 자기 생각하는 것을 다 집어넣기 때문에 시간의 현재와 미래를 통과하는 것 그 다음에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 그러면서 색채감을 통해서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는데 여기 가운데를 보면 흰색으로 빛을 비춰주고 있는데 이것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 의하면 파도에 부딪쳐 일어나는 물보라라고 하기 도 하고 또 하나는 이것은 희망을 표현해주는 것으로 노아의 기다림에 대한 표현이다. 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기다림의 사람, 노아는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이 방주를 짓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120년이나 걸렸다 표현하기도 하는데 성경을 보면 그것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120년의 삶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허락했다라고 하는 뜻으로 120년 기간 동안 방주를 지었다 그렇게 해석하는 삶도 있습니다. 어떻든 노아에게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에 품고 기다릴 뿐만 아니라 이 방주라는 것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천한 인물이다. 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우리의 기다림,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역동성 있게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축복을 만든 핵심적인 우리의 영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렘브란트, [나사로의 소생]



두 번째의 그림을 보겠습니다. 렘브란트의[나사로의 소생]이라는 그림인데 그가 젊었을 때 그린 것입니다. 그리 큰 그림은 아닙니다.



Rembrandt. The Raising of Lazarus. c. 1630, Oil on panel, 96.2 x 81.5 cm,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Los Angeles < 출처: WEB GALLERY of ART >



이때에도 렘브란트는 빛에 대한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을 함께 앍겠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
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요한복음 11장 21~22절)



 

여기에는 부활에 대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기다림, 죽음 앞에서 떠는 인간이 우리가 갖는 마지막이 무엇일까요? 생명에 대한 기다림 영원한 생명의 기다림 그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미리 보여주시는 사건이 이 사건인데 여기 보면 빛이 나는 곳이 예수님의 얼굴과 손,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누이로 보이는 마리아. 옆얼굴이 보이는 뒷모습의 마르다, 그리고 그 옆이 서기관일 수도 있고 친척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소생하는 장면인데 이것은 조금 자세히 보겠습니다. 지금 죽은 자가 부활한, 힘이 다 빠진 겨우겨우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의 표정이고 다 지친 얼굴의 모습이고 수의를 입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3Km 되는 곳에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베다니에서 살았던 세 남매가 있었는데 하나는 나사로였고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갈 때 마다 이곳을 들렀습니다. 그래서 이 세 남매들과는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들를 때마다 이들이 맛있는 음식을 예수님에게 대접했고 예수님은 기쁨으로 받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했든 그런 아름다운 예수님에게는 따뜻한 느낌이 있었던 가정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예수님은 듣고도 금방 가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에 갔더니 죽었다고 통곡하고 있는 장면을 예수님이 보시고 우시는 장면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무덤 앞으로 갔는데 이 자체가 동굴입니다. 그래서 어둡습니다. 여기에 빛나는 여인이 경탄하는 모습으로 “오라버니! 당신이 사셨군요!” 그 뒤의 사람은 약간 의심도 있어 보이고 저게 뭘까? 하는 그런 모스입니다. 라고 말하는 모습이지만 이 여인의 모습은 훨씬 밝습니다. 아주 또렷하게 기쁨으로, 놀람으로 경탄하는 모습으로 손도 만져보고 싶은 그런 모습이고 예수님의 모습은 손이 빛나고 있습니다. “나사로야!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그림과는 다른 구도로 그림을 만들어낸 인물이 있는데 이것은 고흐의 [나사로의 소생]입니다.

 



고흐, [나사로의의 소생]




Gogh. The Raising of Lazarus (after Rembrandt). May 1889, Saint-Rémy, oil on canvas 49x63cm,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 출처: WEB GALLERY of ART >



이것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50 x 65cm의 크기입니다. 이 그림은 고흐의 거의 마지막에 그린 그림인데 고흐가 쌩 레미 정신병원에서 입원해 있을 때 동생 테오가 형을 사랑하여 형이 저곳에서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으로 렘브란트의 유채화가 아닌 에칭으로 되어있는 판화 형태의 다른 작품인 [나사로의 소생]이라는 그림을 형 고흐에게 형도 나사로처럼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하며 전해 줍니다. 그래서 고흐가 다시 그린 것인데 분위기가 아주 다릅니다. 렘브란트의 것은 어둡고 침침하지만 이것은 아주 밝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특징은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고흐가 신앙을 버리고 자연주의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 대신 이글거리는 태양이 있습니다. 예수님 대신에 태양을 그리고 동굴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바깥에 여려져 있는 것으로 그리었습니다. 여기 고흐의 그림에서 나사로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자세히 보면 나사로의 얼굴이 누구의 얼굴과 같으냐하면 미술 평론가들에 의하면 고흐 자화상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수염이 자기의 모습을 그리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다림의 열망, 회복의 열망이 고흐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 나도 나사로처럼 나을 수만 있다면 그런 간절한 기대가 이 모습 속에 담겨져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 Gogh. Self-Portrait. September 1889, Saint-Rémy, oil on canvas 65x50, Musée d'Orsay, Paris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소망이란 기다림이 있어야 소망이 소망이 될 것입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앞쪽으로 다가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기다림의 백성이 있고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해주신 다음에 우리 성도들은 기다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느냐?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는가?
여러분, 오늘 내가 하루를 살면서 무엇을 기다립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종착에 도착할 때 내 기다림이 무엇일까?
를 확인하지 않으면 하루가 그냥 무의미하게 상실 되고 마는, 하나님 나를 통해서 오늘도 예수님의 빛이 발하게 하소서!
나를 통해서 누군가가 살아나게 하소서!
하나님 나를 통해서 누군가가 위로받게 하소서!
하나님 나를 통해서 누군가가 예수의 이름을 알게 하옵소서!
누군가가 나를 통해서 우리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 인생이란 살 만한 것이고 좋은 것이고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이 사실을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내 이웃에게 나타나게 하옵소서!
이 기다림이 있어야 하나님이 새 생명의 역사를 펼쳐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성의 삶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다릴 줄 아는 내 마음속에 기다림의 소원을 갖고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실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다림의 삶을 보면서 함께 드리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 주님의 약속을
오늘 내 것으로 삼고 누리게 하옵소서




 

by  seo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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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하는 삶 댓글[0]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2013-10-10 오후 5:26:28) http://blog.somang.net/seolee/7978

이 글은 2013년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화요조찬 성경공부[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를 강해하신 내용을 게시자가 녹취,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순종하는 삶



오늘은 여섯 번째 강의로 순종하는 삶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선 두 가지의 그림을 보려하는데 하나는 렘브란트의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샤갈의 그림인데 둘 다 아브라함과 이삭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것입니다. 그런데 각 그림의 제목이 조금 다릅니다. 렘브란트의 것은 [The Sacrifice of Abraham (아브라함의 제물)]이고 샤갈의 그림은[The Sacrifice of Isaac (이삭의 제물)]이라 되어 있습니다. 두 그림이 보는 각도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보면 느낌이 달라집니다. 샤갈은 이삭에게 초점이 주어져 있고, 렘브란트는 아브라함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렘브란트, 아브라함의 제물



Rembrandt. The Sacrifice of Abraham. 1635. Oil on canvas.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 출처: WEB GALLERY of ART >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이 왜 신앙의 스승으로 높임을 받게 됐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은 믿음으로 순종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을 최고 믿음의 선배로서 존중하고 그의 뒤를 함께 따라가는 것도 우리가 마음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이후에 창세기 12장을 보면 좋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 등장하는데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부르게 됩니다. 네 아비의 집을 떠나라 네 본토를 떠나라 그랬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말씀을 따라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어떤 모티브(motive)가 있느냐하면 엑소더스(exodus) 모티브가 항상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에 엑소더스 모티브가 빠지면 신앙이 추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이 안주 모티브로 가게 되면 이게 바리새주의 로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은 엑소더스 모티브가 있어야 끊임없이 나가게 되어있는 이 엑소더스. 출애굽의 엑소더스가 가장 결정적인 엑소더스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엑소더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네가 있는 현장에서 끊임없이 탈출할 준비를 해라. 바로 옛것에서, 죄의, 불의의, 과거의 것에서 그리고 너를 억눌렀든 것, 너를 구속하고 족쇄를 씌운 모든 것들로부터 계속해서 탈출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도 감사한 것은 엑소더스 모티브가 있다는 자체가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을 행하게 하는 축복입니다. 이 엑소더스 모티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그렇게 많아 질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아브라함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열려있는 신앙이 확실한 것이 그 엑소더스 모티브를 가지면 신앙이 항상 열려져 있습니다. 저는 보수를 존중하나 보수주의는 염려가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보수는 전통을 붙잡겠다는 뜻이지만 보수주의는 전통 속에 완전히 폐 쇠하겠다는 그런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엑소더스 모티브가 상실 됩니다.


여러분, 바리새주의의 위험성이 뭘까요? 엑소더스 모티브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여기가 좋사오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서, 예수님, 엘리야, 모세가 등장하잖아요. 그때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에서 지냅시다. 하니 예수님은 얘야 우리는 현실로 내려가야 된다. 그 엑소더스 모티브가 있어요. 이 엑소더스 모티브가 있어야 신앙이 우리 삶에서 변화와 단련을 가져다주는 것인데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런 강력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엑소더스 모티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 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그가 그 상태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5년의 세월이 흘러가잖아요. 그런데 그는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백세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이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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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그 아들 이삭이 몇 살이 되었을까요? 구약의 유대 전통에 의하면 이삭은 스물에서 스물다섯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성년입니다. 그 청년이 이렇게 자빠져 있는 거예요. 아버지는 백 살이 넘은 노인이고 그런데 여기에서 그의 모습이 아브라함의 순종과 더불어 이삭의 순종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거를 렘브란트는 밝기를 조절한다고 하잖습니까? 이 밝기를 보면 천사가 밝고 아버지의 얼굴이, 손이 밝고 그런데 아들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밝습니다. 환하게,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 아들의 몸입니다. 아들의 왼팔을 보면 뒤로 두 손이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이곳까지 지고 온 장작더미 위에 뉘어있습니다.


이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종했다는 뜻도 되거든요. 그런데 어떻든 여기에서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순종에 초점을 더 주고 있는데 렘브란트가 갖고 있는 특성 중 하나가 천사가 오른손으로 아브라함의 오른 손목을 꽉 붙잡고 있습니다. 앗! 하는 순간에 칼날이 아들의 목을 향해 가려다가 칼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모습의 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발이 벗겨진 채로 무릎을 꿇은 모습이고 왼손은 아들의 얼굴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보이지 않게 감싸 쥐고 목이 뒤로 젖혀지게 누르고 칼을 대려는 순간에 천사가 다가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면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장 12절)



그림을 좀 더 확대해 보겠습니다. 장작이 밑에 있고 옆에 칼집이 보입니다. 이삭의 팔이 뒤로 묶여 있는데 환하게 밝은 장면입니다. 천사가 오른 손을 꽉 붙잡고 왼손은 마치 야단치는 것처럼 들고 있고 아브라함은 놀란 표정과 당혹스런 표정으로 천사를 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젊을 때 그린 것으로 사실 적으로 표현하면서 밝기와 어둠의 모습이 그의 후반에 그린 것 보다는 확연하게 대비되지는 않지만 잘 보여주며 급박한 순간을 아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무엇이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 놓으라 하셨는가?
키엘케골의 책에 의하면 하나님이 역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이 앞에서 주면서 빼앗고 빼앗으면서 주는 역설의 특징을 강조 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역설의 하나님을 뜻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네가 가장 좋아는 것 보다 나를 더 좋아하느냐? 가 성경의 질문이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 지금 한번 생가해 보시지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이것 없으면 안 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그것보다 나를 더 좋아하느냐?” 그러면 그것은 신앙이고 “그것이 있어야 나를 좋아하느냐?” 그러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가 제일 좋은 것입니까? 아들입니까? 딸입니까? 아니면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권력입니까? 그 모든 것을 다 그 안에 넣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의 마지막 삶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왜 하느냐. 우리가 샤갈의 그림을 보면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샤갈, 이삭의 제물



샤갈의 그림은 큰 그림입니다. 가로가 230cm, 세로가 235cm 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The Sacrifice of Isaac 이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제물이 아니라 이삭의 제물이라 한 것도 흥미를 끕니다.



Chagall. Le sacrifice d’Isaac. 1960-1966, Huile sur toile, 230x235cm, Musee national Marc Chagall, Nice. ⓒ Musee national Marc Chagall ⓒ cliche RMN Gerard Blot



샤갈은 그림을 표현할 때 크게 양분하고 있는데 천상의 세계를 푸른색으로 그렸고 지상의 세계를 노란색과 빨간색으로 점철하면서 그리었습니다. 놀랍게도 샤갈은 아브라함의 위기의 모습을 확대합니다. 그 속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그린 것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천사부터 보면 천사가 둘이 나옵니다, 하나는 가까이 다가오며 아브라함아! 하며 아브라함을 제지하려는 모습이고 뒤에 또 한 천사가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 가지로 해석 할 수가 있는데 천사가 막 빨리 다가오는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표현할 수 있고, 천사들 안에서도 질서가 있다고 하는데 앞에 있는 천사에게 뒤의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다가가라고 명령하는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아브라함의 모습은 붉은 핏빛으로 그려있습니다. 이 핏빛으로 그린 것은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당혹스러움,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고통,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슬픔 이 모든 것이 이 피의 빛깔 속에 담겨져 있고 머리 위의 핏빛 바탕에 하얀 점들이 방울방울이 마치 그의 분노, 슬픔, 고통 같은 것들이 빨갛게 위로 달아 올라가는 듯 하는 그런 느낌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이삭의 모습은 아주 노란색깔로 그리었습니다. 여기에는 전적인 순종과 희생을 표현하는 색깔로 그려져 있는데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딱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샤갈이 이 그림을 그리면서 남자(인간)의 창조도 그리었습니다.


Chagall, La creation de l’homme. 1956-58, Huile sur toile, 299x200 cm, Musee national Marc Chagall. Nice.

그런데 남자의 창조에서는 천사가 아담을 품고 날라 가는 장면입니다. 거기에서 아담의 모습과 여기에서 이삭의 모습이 아주 똑 같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천사에게 아담이 온전히 나를 맡긴 모습입니다. 나를 뜻대로 쓰시옵소서. 나를 뜻대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아담이 축 늘어져 하나님 천사에게 다 맡긴 모습을 여기서 보면 완전히 벌거벗겨져 장작더미 위에 뉘어 있는 이삭이 순종하는 모습이 보여 지고 있습니다. 이삭의 나이가 스무 살이 넘었다면 아버지에게 저항할 법도 한데 저항하지 않는 모습에서 샤갈은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 주려고 한 것 같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순종, 또 하나는 이삭의 순종. 그래서 아브라함의 순종과 아들의 순종이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또 다른 각도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 점에서 이것의 제목을 [아브라함의 제물]이라 쓰지 않고 [이삭의 제물], [이삭의 희생]이라 한 것입니다.


오른 쪽 위를 보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완전한 예수님으로 표현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샤갈이 유대인이므로 이는 예수님으로 보아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유대인이 있습니다. 유대인 학자인 것 같기도 하고 유대인과 같이 고난을 받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고 그 뒤에는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인데 아마 슬퍼하는 것,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보고 슬퍼하는 여인들을 보면서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해서 너희 장래를 위해서 울어라 하는 그런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절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십자 뒤의 여인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부활과 죽음 앞에서 오히려 부활의 미래를 바라보는 그런 십자가를 넘어선 부활, 그리고 이삭을 바치되 다시 살아나는 부활, 이것을 향해서 여인이 노래 부르고 환호하는 모습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갖고 있었던 십자가의 흐름들을 자기의 유대적 색채 속에서 이것을 다양하게 한꺼번에 이 그림 속에서 집어넣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나무 밑에 어린 양이 있고 여인이 슬퍼하며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인데 이것을 확대해서 보겠습니다.
잘 아는 대로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할 때 천사가 와서 아브라함아 네 하는 일을 멈추어라 하면서 참으로 네가 나를 네 아들보다 더 사랑하는구나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삭대신 하나님에게 주실 제물을 발견하게 합니다. 이렇게 돌아서 보니까 바로 숲 속에 양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양을 발견하고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그 자리를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셨다. 라는 뜻을 가진 “여호와이레”입니다. 내 아들을 살려주시고 하나님께 드릴 제물인 양을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주셨구나. 그래서 여기서 여호와이레. 양이 있고 그 뒤에 여인이 있습니다. 이는 완전히 샤갈의 상상력에서 그린 것 같습니다.


성경은 이때의 이 순간에는 사라의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슬퍼하면서 기도하는 것이고 아파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을 응원하는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순종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삭. 아들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하나님이 아들도 주고 다른 것도 더 주신다는 것 예수님의 말씀 속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을 더해줄 것이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그리고 네 삶에 필요한 것들을 넘치게 줄 것이다. 먼저 구할 것과 나중 구할 것을 알아라. 여기에 그 메시지가 구약의 메시지와 예수님의 메시지가 일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이제 순종하는 것 하나를 더 보겠습니다.
렘브란트가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라는 그림을 1657년에 에칭(etching; 산(酸)의 부식작용을 이용하는 판화의 한 방법)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Rembrandt. Christ in the Gethemane. 1657, etching



이 그림도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겠다 하시는데 세 제자가 쿨쿨 잠자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천사가 옆에서 돕더라 하는 그런 것입니다. 성경구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 22장 44절)



여기 세 제자가 늘어지게 잠자는 모습(1)이 있고 뒤에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따라오는 모습(2)인데, 조그만 그림인데 이 모든 것을 다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무너질 것 같은데 천사가 와서 돕고 있다는 이 모습(3)을 우리에게 그리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가지입니다. 바로 “네가 제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의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내 아들이 내 목숨보다 중요하다. 어떤 분은 내가 이때까지 돈과 명예를 위해 달려왔는데 이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순종을 마지막 시험할 때 질문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네 돈보다 내가 소중하냐?” “네 아들, 네 딸보다 내가 더 소중하고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실, 그 점에 대한 대답이 불확실하면 우리는 순종이 잘 안됩니다.

여러분, 왜 순간순간마다 순종하지 못하고 무너지게 될까요? 하나님이 우선이 안 되니까 결정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선이 되어 결정하는 아브라함을 보고, 모세를 보고, 믿음의 인물들을 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순종할 때 더 큰 복을 주시고 순종하지 못할 때 그 있는 것 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무너지게 되는 이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더 큰 것을 받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은 그자체가 이기적인 것이 됩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 무엇을 주실래요? 그런 망언으로 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야단치십니다. 야, 이놈아! 순종부터 해라. 줄 것 받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 먼저 순종해라 그 다음에 주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것이다. 먼저 순종해라. 그런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이 느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 정말 순종하는, 영성의 삶이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무엇인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주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옵소서




 

by  seo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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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는 삶 댓글[0]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2013-10-03 오전 9:20:14) http://blog.somang.net/seolee/7972

이 글은 2013년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화요조찬 성경공부[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를 강해하신 내용을 게시자가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회개하는 삶



다섯 번째는 회개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회개란 무엇일까요?
회개란 내가 다시 밑바닥에 내려오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기득권을 다 내려놓겠습니다. 내가 세상에서의 자랑스러운 명예 주님 앞에서는 다 땅바닥에 내려놓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통회하는 영을 가진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는 이유가, 맞다 너는 네 마음의 처음 사랑을 갖고 있구나.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과 떨림과 기쁨을 너는 갖고 있구나. 그것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통회하는 영을 갖게 되는 것 그것은 복된 것입니다. 이것이 애통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는 영을 가진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렘브란트의 그림 두 개를 설명하려합니다.
첫 번째 [세례 요한의 설교]는 1634년에 그린 것인데 28세인 젊을 때에 그린 그림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늘 밝고 어두움에 대한 것을 기억하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렘브란트, 세례 요한의 설교


이 그림의 가운데에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의 모습은 아주 간절한 것 같습니다. 한 손은 앞으로 내밀고 있고, 다른 한 손은 가슴에 대고 있습니다. 아마 오른 손은 세상과 백성들을 향해 나가는 손길을, 하나님의 손길을 표현한다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가는 것을 표현한다 할 수도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은 것은 내 심장과 내 오장육부, 간절한 바로 내 삶의 모든 것이 동반 된 그런 선포라고 하는 그런 미음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몸을 보면 앞으로 약간 구부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아주 간절한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렇게 가슴에 손을 대고 호소하는 모습으로 그려있습니다.



Rembrandt. St John the Baptist Preaching. c. 1634 Oil on canvas laid down on panel, 62 x 80 cm, Staatliche Museen, Berlin. < 출처: WEB GALLERY of ART >



요한의 오른쪽에는 숨겨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벨리스크상이 있는데 시저상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앞의 환한 부분이 요한의 말을 듣고 있는 모습인데 그러면 요한은 무엇을 선포했는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누가복음 3장 8절-9절)



누가복음 말씀이었습니다.
회개의 선포를 하게 됐는데 예수님의 말씀 첫 선포와 세례요한의 첫 선포가 똑 같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세례요한도 이렇게 시작했고 예수님도 똑 같이 이렇게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회개가 세례요한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강조되어 있고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더 강조가 되었습니다. 그런 차이로 두 분의 모습이 갈라지게 되었는데, 여기서 유의해서 볼 것은 주위에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한 아낙네는 아이에게 모자를 씌우고 있습니다(1). 이 모습은 당시의 일상적인 삶의 내용을 복음의 역사 속에서 전부 다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일상적인 삶을 그대로 표현했는데 심지어는 엄마가 아기를 응아시키는 장면(2) 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들이 약간 어둡게 표현되어 숨겨진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삶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특징적인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좀 확대해서 보겠습니다..




여기 열렬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세례요한 밑에를 전체적으로 보면 가까이 있는 사람이 그래도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일수록 딴 청을 하는 모습이 많습니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니다. 그런데 (3) 의 사람은 약간 졸고 있는 것 같습니다. 턱을 괴고 눈이 감긴 듯한 모습입니다. 옆의 (4) 의 사람은 살짝 외면하고 있으면서 “아이 이게 뭐야” 하고 약간의 의심도 하며 “저걸 뭘 들어!” 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그리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5)는 뭔가를 둘이서 서로 갖겠다고 다투고 있는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눈을 부릅뜨고 야단을 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또 (6) 을 보면 어머니가 입에다 손가락을 대고 아이에게 “쉿 조용히 해! 지금 말씀하고 계시잖아!” 하는 듯한 그런 일상적인 모습도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바라보는 사람, 의심하는 사람, 그냥 잠자고 있는 사람, 엄마가 아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는 이런 모습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집중하는 사람은 불과 1/10 아니면 1/5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몇 사람 만 간절한 세례 요한을 보고 있고 나머지는 딴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표적으로 딴청 하는 사람은 (7)의 세 사람인데 굉장한 의복을 입고 있습니다. 세 사람을 확대해서 보겠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모습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예 세례 요한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이 말씀을 증거 할 때 그들이 어떤 태도로 접근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여기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바라보는 모습, 그러나 외면하고 그것을 거절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례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지만,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보통 세 가지의 태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경청하는 태도, 그다음 두 번째는 듣기는 듣는데 잘 모르는 태도 그래서 몰라서 보기는 보는데 잘 못 깨닫고, 듣기는 듣는데 들리지 않고 마음으로는 뭔가 알고는 싶은데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 그런 태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만 바뀌면 되게 되어있습니다. 결단만 하면 보게 되어 있고 듣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큰 문제는 내가 갖고 있는 선입관으로, 여러분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습니다. 사람을 0점으로 놓고 대하면 금방 실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사람의 좋은 점 보다 나쁜 점이 먼저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우리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대할 때 100점을 주고 사람을 대하는 게 좋습니다. 조금 실망해도 80점은 됩니다. 더 실망해도 60점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아예 마이너스 100점을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기 싫은 것입니다. 듣기도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쑥덕쑥덕하면서 저 세례 요한을 어찌 처치하지 하면서 이 거룩한 옷을 입고 세례 요한을 거절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세례 요한의 모습은 얼마나 간절해 보입니까?
여기 일상적인 모습에서 세례 요한이 하나님말씀을 증거 할 때 이렇게 다양한 반응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데 그 중에서도 거절하고 거부하고 아주 미워하는 이런 종교적 기득권자들의 모습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것이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 특별히 남자 성도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어머니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분도 있지만 그것으로는 평생 예수 믿기가 어렵습니다. 내 인생에 결단이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 바닥 치는 실존의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설교에서 하덕규의 “내속에 내가 너무 많아” 라는 가시나무새를 인용했을 때 많은 분들이 “정말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내가 방황을 많이 했지. 나도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 이런 실존의 경험을 통해서 여기 까지 온 것일 것입니다.


회개란 늘 바닥 치는 자리를 생각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다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늘 순전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 바리새인처럼 될까요? 그들도 처음에는 회개했지요. 그런데 종교가 기득권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의 집사가, 장로가, 목사가 기득권이 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마음이 닫혀 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모습들인데 다음은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이 그림은 1699년에 그리었는데 렘브란트가 죽은 해입니다. 63세가 되었을 때이니까 자기 인생의 마지막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아주 유명한 것으로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아주 큰 대작으로 205 x 262Cm의 유채화입니다.



Rembrandt.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c. 1669, Oil on canvas, 262 x 206 cm, The Hermitage, St. Petersburg.<출처: WEB GALLERY of ART>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내 실존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 그림에서도 명암의 밝기가 빛나는 곳이 세 군대인데 하나는 아버지의 얼굴과 망토입니다. 이 붉은색 옷은 당시의 부자와 귀족을 암시하는 색깔입니다. 또 하나는 돌아온 아들의 머리에서부터 발바닥까지 빛이 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오른쪽에 있는 사람으로 큰아들인 것 같습니다. 큰아들이 입은 옷도 아버지와 비슷합니다. 큰아들의 모습은 긴 지팡이를 딱 쥐고 있고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감싸 안아서 허리가 굽혀져 있는데 큰 아들은 뻣뻣이 서 있으며 “저 녀석이 왜 왔지? 뭐하는 짓이야” 하는듯한 표정이 무표정해 보이기도 하고 또는 시기하는 듯한 모습으로도 그리어있습니다. 이 그림을 더 자세히 보면 뒤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렘브란트 자신의 자화상처럼 그린 것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성경을 함께 일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압을 맞추니
(누가복음 15장 20절)



Rembrandt. Rembrandt and Saskia in the Scene of the Prodigal Son in the Tavern. c. 1635, Oil on canvas, 161 x 131 cm, Gemaldegalerie, Dresden.<출처: WEB GALLERY of ART>



이 탕자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이것은 술집의 탕자가 된 자화상입니다. 놀랍게도 렘브란트는 엄청나게 많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어떤 때는 다윗처럼 그리기도 했는데 이 그림에서는 자기가 탕자가 된 자화상입니다. 이 그림은 젊을 때인 1635년에 서른이 되기 전의 자기 모습을 이렇게 그린 것인데 결혼을 하고 나서인데 여자는 자기 아내인 사스키야 입니다. 자기는 귀족이므로 칼을 차고 붉은 망토를 입고 여인을 자기 무릎에 앉혀놓고 왼손은 여자의 허리에 오른손은 술잔을 높이 들고 브라보! 나와함께 술을 마시자! 하는 한때에 탕자가 되는 그런 모습을 자기와 아내의 모습으로 인간 속에 있는 자기 내면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렘브란트가 그런 탕자의 모습으로 지내고 생활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온 탕자의 그림을 보게 되면, 아들부터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머리가 거의 삭발한 것 같은 모습으로 머리카락이 쥐어뜯긴 것처럼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렘브란트가 스켓치 한 것에 의하면 머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머리가 다 빠져있어 마치 나는 죄수입니다. 삭발한 것 같은 그런 모습으로 자기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하는 모습입니다.
한 가지 독특한 것은 얼굴을 보면 눈을 감고 있는데, 아주 편안하게 "아버지 내가 왔어요. 미안해요. 내가 죄인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품안이군요." 하는 따뜻하고 평온함이 얼굴 속에 보이고 있습니다. 옷은 다 헤지고 떨어졌는데, 하나님의 빛이 등짝에 비쳐지고 있습니다. 발을 보면 왼발은 신발이 다해지고 오른 쪽은 뒤 굽이 닳아서 떨어져 나가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여기서 아들은 전적으로 모든 것을 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맡기는 그런 심정으로 들어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제 아버지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아들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품속이 좋습니다." 하고 마음속으로 탄식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돌아온 이 아들의 모습과 비교해서 형의 모습은 아주 다릅니다.


긴 지팡이를 잡고 꼿꼿하게 서있으면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야간 무표정인 듯도 하고 시기하는 눈빛도 있고 뭔가 괘씸하게 생각하는 듯한 눈빛도 있으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을 보면 많은 평가하는 사람들은 손이 다르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손가락이 벌려져 있지 않은데 왼손은 손가락이 벌어져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오른손은 어머니의 손이고 왼손은 아버지의 손 같습니다. 힘줄이 나타나 있습니다. 오른손에는 어머니의 손처럼 따뜻하고 자비와 사랑으로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고 왼손은 등을 꽉 누르고 있는 듯 합니다. 엄지손가락에 눌려져 자국이 보입니다. 아버지의 손처럼 “야 이놈아! 왜 이제야 왔느냐?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린 줄 아느냐. 이 못된 놈아!” 하고 한편으로는 꾸중하는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왔다. 오른손으로는 받아들이고 왼손으로는 그렇게 야단치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리어있다는 것도 아주 탁월한 손을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발을 보면 신발이 다 헤지고 발바닥이 상처가 나있는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얼굴도 지쳐있는 모습입니다. “야! 이놈아!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느냐? 그러나 이제 돌아왔으니 고맙다. 더 좀 빨리 오지 않고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하는 듯하며 아들을 끌어안은 모습에서 역역하게 아버지의 기다림에 지친 얼굴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세 가지의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탕자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에게 빨리 돌아와야 하는 거죠. 내가 큰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긍휼도 없고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왔는데 아버지를 향해 무어라 했느냐하면 내 동생이라 하지 않고 누가복음에 보면 “아버지의 아들이 이제 집에 왔습니다.” 라 했습니다. 이런 형처럼 무관심한 우리의 모습이 있고 아버지처럼 연약한 아들을 끌어안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참으로 아버지 노릇하기가 어렵잖습니까? 간섭하면 도망가려 하고 기다리면 너무도 오래 기다려야 되고 간섭할 수도, 그냥 놔 둘 수도 없는 것이 모든 아버지들의 딜레마인데 이 아버지도 똑 같습니다. 가라, 네 맘대로 가라. 그리고는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내 모습 이대로 아뢰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늘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함께 드리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사랑의 주님
회개하는 영을 내게 주셔서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글 김지철 목사

 

by  seo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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