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소망교회 카페 블로그 메일 SMS 문자보내기
방명록 검색
God Mammon 댓글[0]
묵상 및 QT (2013-08-13 오후 6:12:00) http://blog.somang.net/bhkim79/7937
 
God Mammon

'마모나스' (재산, 재물)는 아람어 명사 '아만' (사람이 의뢰하는 것)에서 나왔을 것으로 킷텔 사전에서 F. Hauck은 추측하고있는데 '아만'에서 나왔다면 그 어원은 '아멘'과 같아진다.

마태6:24에는 우리도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우리말과 비슷한 발음의 헬라어가 나와 재미있다: 두(두오) 주인(퀴리오스)을 섬길(둘로스- 둘류오) 수(뒤나마이)없고 하나(헤나)는 사랑하고 다른 것(헤테로스)은 미워한다는 것.

Biblos interlinear bible Matthew 6:24의 이미지인데 각 단어끝에 u o i a가 빠져있다.
God Mammon
'마모나스' (재산, 재물)는 아람어 명사 '아만' (사람이 의뢰하는 것)에서 나왔을 것으로 킷텔 사전에서 F. Hauck은 추측하고있는데 '아만'에서 나왔다면 그 어원은 '아멘'과 같아진다. 
마태6:24에는 우리도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우리말과 비슷한 발음의 헬라어가 나와 재미있다:  두(두오) 주인(퀴리오스)을 섬길(둘로스- 둘류오) 수(뒤나마이)없고 하나(헤나)는 사랑하고 다른 것(헤테로스)은 미워한다는 것. 
Biblos interlinear bible Matthew 6:24의 이미지인데 각 단어끝에 u o i a가 빠져있다.
이 포스트를...
God Mammon 댓글[0]
묵상 및 QT (2013-08-13 오후 6:12:00) http://blog.somang.net/bhkim79/7936
 
God Mammon

'마모나스' (재산, 재물)는 아람어 명사 '아만' (사람이 의뢰하는 것)에서 나왔을 것으로 킷텔 사전에서 F. Hauck은 추측하고있는데 '아만'에서 나왔다면 그 어원은 '아멘'과 같아진다.

마태6:24에는 우리도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우리말과 비슷한 발음의 헬라어가 나와 재미있다: 두(두오) 주인(퀴리오스)을 섬길(둘로스- 둘류오) 수(뒤나마이)없고 하나(헤나)는 사랑하고 다른 것(헤테로스)은 미워한다는 것.

Biblos interlinear bible Matthew 6:24의 이미지인데 각 단어끝에 u o i a가 빠져있다.
God Mammon
'마모나스' (재산, 재물)는 아람어 명사 '아만' (사람이 의뢰하는 것)에서 나왔을 것으로 킷텔 사전에서 F. Hauck은 추측하고있는데 '아만'에서 나왔다면 그 어원은 '아멘'과 같아진다. 
마태6:24에는 우리도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우리말과 비슷한 발음의 헬라어가 나와 재미있다:  두(두오) 주인(퀴리오스)을 섬길(둘로스- 둘류오) 수(뒤나마이)없고 하나(헤나)는 사랑하고 다른 것(헤테로스)은 미워한다는 것. 
Biblos interlinear bible Matthew 6:24의 이미지인데 각 단어끝에 u o i a가 빠져있다.
이 포스트를...
방주(方舟)로 들어오는 걸음 (bo 步) 댓글[0]
히브리어와 한글 (2010-02-01 오전 12:39:31) http://blog.somang.net/bhkim79/5598
방주(方舟)로 들어오는 걸음 (bo 步)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창세기 6장 8-9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방주를 짓고 가족들을 데리고 방주(方舟)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과의 새 언약에 들어갑니다.
 
창세기 6: 18 그러나 너희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세기 7:7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창세기 7:13 곧 그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아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방주에 들어갔고
 
여기 밑줄 친 우리나라 말로 ‘들어가다’로 새겨진 히브리어 동사는 모두 בוֹא bo입니다. 이 בוא 라는 동사는 ‘걷다’ ‘걸음’의 한자말 步를 생각하면 쉽게 기억됩니다. 이 동사는 구약성경에 약 5천 번 나오는 말(씀)하(시)다 אמר amar 동사 다음으로 가장 많이 (2530번이나) 나오는데, ‘(들어)오다’의 뜻에 가깝고 ‘가다’ 라는 동사는 הלך halak 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방주에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들어가다로 새겼는데 방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원래 뜻은 들어오는 것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안으로, 방주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막/성전으로 들어오는 것에 בוא bo 라는 동사를 쓴 것을 보면 이것이 보다 분명해집니다.
출애굽기 28:29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 28:35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갈 때에...
레위기 16:23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온 것이나 아론이 성막, 성소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들어오다 בוא bo 라는 동사가 매한가지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들어오는 것, 방주(方舟) 에 들어오는 것, 하나님의 성막(聖幕)에 들어오는 것, 말씀을 청종하고 언약 안으로, 믿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 이것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첫 걸음(bo 步)과 같습니다.
                                   2010년 1월의 마지막 날 비쉬켁에서
이 포스트를...
덮어주시고 대속하시는 하나님 댓글[0]
중앙아시아 (2010-01-26 오전 2:29:41) http://blog.somang.net/bhkim79/5586
덮어주시고 대속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6:8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세상 다른 사람은 아니지만 노아(Noach) 만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 노아 (Noach)는 nuach 쉬다 안식하다 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 그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מצא חן בעיני יהוה
여호와 눈 안에 은혜를 입었다/찾았다/만났다 라고 나옵니다.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은혜를 입다’라는 이전의 제 글을 참고바랍니다.)
 
9절에 은혜를 입은 노아를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한글과 히브리어의 좌우가 바뀐 거울 비추기 parallel 번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נח איש צדיך בדרתין     את האלהים התהלך נח
노아는 걸어갔다 하나님과함께 그 시대사람에서 완전하고 의로운사람이었다 노아는
 
13절에 하나님이 그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14절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잣나무(gopher)로 너를 위하여 방주(tebah)를 짓되 그 안에 간(間) (qen)들을 막고 역청(kopher)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kaphar)” 는 것이고 15절에 그 방주(tebah)의 크기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 kipher כפר kaphar (스트롱 코드 3722)는 덮(어주)다 속죄하다는 동사로 כפר kopher (스토롱 코드 번호 3724a) 몸값 (ransom) 속죄금 (the price of life) 대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kaphar 가 kopher (스트롱 코드 번호 3724b) 송진이나 역청과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히브리어로는 같은 철자에 발음이어서 연상작용을 하고 언어 유희 (말장난)로 쉽게 이 단어를 떠올리게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히브리서 11:7을 봅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그렇게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서 하나님이 그를 의롭게 한 것입니다. 이른바 칭의(稱義)입니다.
 
창세기 6장 22절에 노아는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고 써있습니다. “너는 너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tebah)에 들어가고” 라는 말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믿고 그대로 행한 것입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그리고 아이들도...
 
히브리서에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였고”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사라도 잉태함을 얻었다” (히브리서 11:11)라고.
 
창세기 6장 18절은 또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은 아니겠지만 의인으로 칭한 노아(Noach)와는 하나님이 언약을 세웁니다.
 והקמתי את בריתי אתך
너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러나
히브리어와 한글의 좌우가바뀐 거울비추기 번역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언약을 세우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언약도 설 수 없습니다. 믿고 청종하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시고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또 그 믿음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역청(kopher)을 칠합니다 (kaphar). 우리에게 예수님을 몸값 (kopher)로 주시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덮어주십니다.
 
                                                    2010년 넷째 주일 비쉬켁에서
이 포스트를...
나눔의 사랑, 오스트리아의 벽안의 간호원 '할매' 댓글[0]
밖에서 본 우리나라 (2010-01-12 오후 8:30:03) http://blog.somang.net/bhkim79/5563
2010년 새해들어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이곳 중앙아시아의 텐샨산맥의 밑자락 동네에 반가운 편지가 왔다. 70년대에나 볼 수 있을 구식 타자기로 주소기 타자된 항공우편 봉투에 마리안네 슈퇴거(Marianne Stoeger)와 마가레트 피사렉(Margreth Pissarek)의 한글과 영어로 쓴 글은 성탄과 새해 인사가 들어있었다:

 “반가운 소식와(과) 아름다운 달역(달력) 감사합니다. 우리도 보고 싶습니다. 다시 만나겟(겠)지요?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가족들에게 넘치는 사랑과 은총을 듬뿍 베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마리안내 합장“
 “Very Dear 선생님, I was deeply touched by your lovely Christmas greetings and wishes - thank you so much. (How can you remember me by all that many people you have?) I wish you a happy blessed year! Thankfully Margerat P.(issarek)"
 
글 밑에는 동정녀 마리아와 착한 요셉이 마굿간의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의 성당 창문의 프레스코 그림 사진을 오려붙였다. 그 새해인사말이 쓰인 뒷면은 아마도 한국의 많은 친지들과 답지하는 성원에 답하는 한글 편지 인쇄물이었다.
"... 오늘 이 지면을 통해 저를 찾아주시어 좋은 시간 아름다운 만남을 함께한 사랑하는 분들께 다시한번 고마움을 전화고 싶습니다. .... 구유의 아기예수를 유심히 살펴주세요. 그 눈 속에 당신의 눈이, 귀는 바로 당신의 귀입니다. 그 입은 당신의 입이 될 것이며 그 손을 당신의 손으로 여기세요. 그 미소가 당신의 미소가 되면서 당신의 인사가 곧 아기예수의 인사입니다. .... 나눔의 사랑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타자된 그 글 밑에 머리위에 두손을 올려 사랑을 표현하거나 웃고 있는 한센환우들과 함께한 슈퇴거와 피사렉의 사진이 인쇄되어있다.
 
 ‘그리스도왕의 시녀회’ 소속 마리안네와 마가레트는 43년간 간호사로써 소록도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2005년 11월 본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이 두 벽안(碧眼)의 자매를 만난 인연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이 두 자매에게 한국의 달력을 성탄카드와 함께 보냈고 2006년 봄과 여름에 인스부르크의 피사렉 자매 아파트에서 두 자매를 만났다.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유명한 인스부르크의 작은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벽에는 붓글씨로 쓴 ‘무욕(無慾)’ ‘무상(無常)’ ‘무심(無心)’이란 글이 붙어 있었다.
 
1959년과 1962년 이들 ‘벽안의 천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전라도에 머물다가 소록도에 들어온 때는 할매’가 된 이들이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에서 얼마간 봉사하던 20대의 꽃다운 나이였다. 6.25 전쟁의 아픔과 국민소득 백 불도 안되는 빈국 한국에, 그것도 하늘이 내린 병이라는 한센병(癩病)으로 사회에서 버림받은 한센병 환우를 돕기 위해 소록도를 찾아왔다.
 
당시 오스트리아도 독일에 합병되어 2차 대전의 폐배국으로서 재건에 힘쓰면서도 힘겹게 돕던 때였다. 한국의 6.25 전쟁의 참상을 외면할 수 없었던 카톨릭 교회단체가 의약품과 지원금 등을 보내던 때였다. 카톨릭 국가 오스트리아 재속회(secular institute) ‘그리스도왕의 시녀회’에서 파견된 이들 간호사들은 환우들을 돌보면서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다고 한다. 그들의 헌신적인 치료 활동 및 봉사는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인정을 받았지만 소록도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워하여 2006년 5월 두 ‘할매’가 생활하였던 공간을「마리안느 스퇴거 와 마가렛 피사렉의 집」으로 명명하였다. 
 
한국은 이제 보건이 발달하여 한센환우는 찾아보기 어렵고 한센인이었던 흔적 때문에 소록도에 머무는 그들을 더 이상 돌볼 힘도 필요도 없어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고 할매들은 말했다.
 
오스트리아에 이들을 위해 부어진 기여금으로 연금을 받는 이들은 그 연금을 쪼개 그리고 그들에게 부쳐지는 한국에서 온 돈을 아직도 눈에 아른거리는 한센가족들의 아이들에게 보낸다고 했다. 43년여 동안 소록도에 산 그들은 쪽빛 바다와 유채꽃을 그리워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인스부르크가 오히려 감옥 같아 갑갑하며 한국의 남쪽 바다를 그리워한다고 했다.
 
43년을 오스트리아에서 떨어져 살던 그들은 친척들에게 나눔(독일어 “Teilung”)을 가르치고 개인위주가 된 오스트리아 젊은이들에게 나눔의 고마움을 말하고 있다고 했다. 물질만능의 서구사회에 옛 유럽의 봉사와 헌신의 가르침을 몸소 묵묵히 보여주고 있었다.
 
수녀님이라고 부르면 자기들은 간호원일 뿐이라고 손사레를 친다. 
겸손한 마가레트 피사렉 그리고 발가락이 휘고 병을 알고 있는 마리안네 슈퇴거 ‘할매’에 건강과 평강이 늘 함께하기를 기도해본다.  샬롬

                                                  2010.1.12 중앙아시아 비쉬켁에서

이 포스트를...
질투하시는 하나님 댓글[0]
묵상 및 QT (2010-01-10 오후 9:01:56) http://blog.somang.net/bhkim79/5559
질투하시는 하나님
- 시샘(嫉妬)하도록 열정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 외아들(獨生子)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 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 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 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 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 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 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 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20:1~7]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의 길에서 시내山에 이르러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10계명을 주셨다. 그 중 1-4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출애굽기 20:1-7중에서 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은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고 특히 질투라는 단어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 고민 가운데 질투의 말과 뜻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간관계에서 질투(嫉妬)는 일반적으로 사랑을 잃거나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의 표출이다. 서양의 문학에서는 이런 감정을 파란 눈의 악마와 같은 질투라고 표현 (쉐익스피어)했다. 모든 문화에서 질투가 표출된다고 한다.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감정의 표출인데 부정적인 뜻이 많고 많은 인간관계에서 이 감정에 휩싸인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5-6 달 된 갓난아이도 질투를 안다고 한다. (Draghi-Lorenz, R.의 2000년 연구 및 Hart, S. 2002년. Jealousy in 6-month-old infants. Infancy, 3, 395–402쪽)
 
한자어 질투(嫉妬)는 여인네와 관련이 있어 보이고 비슷한 시기(猜忌, 현대중국어에서는 妒忌로 표기)라는 표현은 파란 눈의 악마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다. 우리말로 ‘시샘하다’, ‘샘내다’ 로 새겨볼 수 있는데, 여전히 부정적인 단어이다.
 
왜 그런 부정적인 질투(嫉妬)단어를 하나님과 연결하여 하나님 스스로 말씀하시고 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일까?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자.
 
히브리어 qanah 라는 단어는 영어로 be jelous (질투, 질투하다) 또는 envy (부러워하다)로도 번역되는데, 질투는 사랑과 연계된 감정인데 반하여 부러움은 꼭 사랑과 연계된 것이 아니라는 차이가 있다.
 
프랑스어 jalousie는 jaloux (jealous)라는 형용사에서 나온 명사인데 이는 라틴어 zelosus (zeal 즉 열정이 가득 찬), 그리스어 ζήλος (zēlos),에서 나온 것이다. 이 표현은 굳이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기 보다는 열정과 열심(emulation, ardour, zeal)과 같이 긍정적 뜻을 가지는데, 끓다, 발효하다(to boil, ferment) 동사와 빵을 부풀리는 데 쓰이는 이스트(yeast)와 같은 어근을 가진다고 한다.
 
한편, 독일어로는 일종의 병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질투의 독일어 Eifersucht (인도유럽어 ai = 불火과 고대독일어 eiver = Herbe, Bittere; Erbitterung 쓴 맛 또는 고대독일어 = Krankheit, Seuche 병 疾病 또는 疫病이 합쳐진 단어)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주의, 사랑, 존경, 굄 (Aufmerksamkeit, Liebe, Respekt 또는 Zuneigung)이 부족한 상태 즉 미흡한 인정을 받을 때에 생기는 병적인 감정 상태를 뜻한다고 한다.
 
 히브리어 ‘질투하다’ qanah 동사는 구약에 34번이나 나오고 그 명사형 질투 qinah 는 43번이나 나온다. 이 단어는 꼭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꽤 많이 쓰이고 있다:
창세기 26: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사람이 그(이삭)를 시기(시샘)하여...’;
창세기 30: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 (레아)을 투기(질투)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민수기 11:29 ‘모세가 그(한 소년)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시샘)하느냐...’;
민수기 25:10-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민수기 25:13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시편 37: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시샘)하지 말지어다’
시편 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질투)하였음이로다’
잠언 3:31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시샘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말라’
잠언 23: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말고 (시샘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잠언 24:1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시샘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
잠언 24:19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질투하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이사야 11:13 ‘에브라힘의 투기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는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투기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러나, 역시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 이라는 뜻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구절이 많고 그 표현의 반복된 형태로 나온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신명기 6: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신명기 32: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신명기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질투하게 하였으니)... 나도 ...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여호수와 24:19 ‘여호수와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열왕기상 14:22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질투하게 하였으니)
시편 78:58 ‘자기 신당으로 그 노를 격동하며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를 진노케하였으매(질투하게 하였으매) ...’
시편 79: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리이까 주의 진노(질투)가 불붙듯하시리이까
에스겔 8:3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던 곳이라’
에스겔 39:25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투기)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지라’
나훔 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스바냐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지키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스바냐 3: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스가랴 1: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스가랴 8: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악에 하나님이 분을 격발하고 질투하신다 히브리어 ‘질투하다’ qanah 동사의 그 명사형 qinah 는 주로 인간관계의 시기, 질투, 시샘 외에 하나님의 열정으로도 새겨져 나온다. 열왕기하 19:31, 이사야 26:11, 요엘 2:18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열왕기하 19: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잠언 6:34 ‘그 남편이 투기함으로 분노하여 원수를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잠언 27:4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전도서 4: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시샘)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서 9:6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시샘)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아가 8:6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간치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사야 26:11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나이다마는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
에스겔 35:11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노하며 질투한대로 내가 네게 행하여 너를 국문할 때에 그들도 나를 알게 하리라’
에스겔 36:6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땅을 대하여 예언하되 그 산들과 멧부리들과 시내들과 골짜기들을 대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투기와 내 분노로 말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이방의 수욕을 당하였음이니라’
요엘 2: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질투하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하나님의 형상을 딴 사람들이,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으로 전능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바꾸어 그런 것들과 견주거나 같이 놓는다면,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에 하나님인들 가만히 잠잠코 있겠는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진노를 격발하며 이 어리석고 우둔한 짓을 그만두게 하지 않겠는가?
 
마치 사랑하는 자녀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고 입혀주고 공부시킨 부모를 외면하고, 예를 들어 사이버 세계의 가상을 부모로 여기고 넋을 빼놓고 있다면, 마약을 한 중독자처럼 환상에 잡힌 허상을 쫒고, 부모와 담을 쌓고 폐인이 되는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면 그 부모인들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하겠는가? 하물며 사람이 자녀에게 그럴진데, 자신의 형상을 인간이, 인간보다 못한 피조물이나 물건을 인간보다 높이 모시고 심지어는 하나님보다 높이 모신다면, 그런 넋 빠진 짓을 하나님이 가만히 보시고만 있겠는가? 지아비가 사랑하는 아내를 속이거나 사랑하는 아내가 지아비를 져버리는 데 사랑하는 가족이 아내와 지아비가 가만히 잠잠코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 것이 얼마나 가정과 그 당사자와 주변 사람에게 아픔과 슬픔을 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혹시 돈과 명예와 권위 아니면 그 무엇인가에 휘둘려 그 우상에 빠져 있다면 이는 분명 하나님의 질투를 격발케할 것이다. 또 성령을 슬프게 할 것이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너무도 크고 신실하셔서 질투하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기에, 그리고 너무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시기에 가만히 잠잠코 있을 수는 없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고 성령을 슬프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일이 있는지 회개하면서, 우리는 찬송가 357장의 노래처럼 회개하고 하나님만을 향하고 섬겨야 할 것이다.
 
1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하나님 이름 높여 기리세 온 천하 백성 모두 나와서 다 같이 하나님만 섬기세
 
2 세상의 헛된 우상 버리고 인간의 모든 부귀 영화와 거짓과 불의 모두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세
 
3 ....                                          아멘
 
우리를 항상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의 사랑에 맞게 우리도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을 몸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2010년 둘째 주일날
이 포스트를...
복, 축복, 형통 댓글[0]
히브리어와 한글 (2010-01-07 오후 1:52:10) http://blog.somang.net/bhkim79/5549
복 받고 형통하는 삶의 새해
 
경인년 2010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 모두들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를 한다. 새해 더욱 건승하고 다복하라고 인사를 한다. 새해 만사형통하시고 댁내 만복이 깃들라고 인사를 건네고 또 받는다. 우리는 설빔 옷에, 원앙베게에, 숟가락 젓가락에 이르기까지 목숨(壽)과 복(福)을 새겨놓는다.
 
복을 받는다는 뜻으로 히브리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동사 ברך(바라흐)는 ‘무릎을 꿇고 복을 빈다’ 뜻에서 ‘복을 받는다’, ‘축복한다’라고 우리말로 새겨진다. ברך(barak)는 무릎이라는 뜻이다. 미국 대통령 바락 오바마의 바락도, 이집트의 무바락 대통령의 바락도 바로 이 무릎을 꿇는 경배와 축복과 연계되어 있는 이름이다. 아랍어 아람어 히브리어는 서로 연관성 있는 단어들이 많다.
 
이 ברך(barak)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 ברכך(berakah)가 ‘축복’ ‘복’이다.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히브리인들도 복을 갈망했다. 그래서 구약에 ‘복을 빈다’, ‘축복한다’는 ברך는 328번이나 나오고 여기서 나온 명사 축복 ברכך도 71번이나 나온다. 총 약 4백번이나 된다.
 
히브리인들에게 축복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한 첫 사건은 창세기 12:2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세기12:1) 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은 昌大케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의 될지라” (창세기12:2)고 약속하신다.
 
히브리어 원문과 parallel 한글 번역은 다음과 같은데, 축복하다 (바라흐)와 축복(베라카)가 나온다:
ואעשׂך לגוי גדול ואברכך וגדלה שׁמך והיה ברכה
축복이 있으리라     네이름을 크게하고    너를 축복하고 큰 민족을 네게 이루리라.
 
히브리인들의 축복 기도(민수기 6:24-26)에도 ברך(바라흐)가 나온다. 축복과 은혜의 축도인데 히브리어 원문과 한글 parallel 번역은 다음과 같다: 
יברכך יהוה ושׁמרך
너를 지켜주시고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고
 יאר יהוה פניו אליך ויחנך
네게 은혜 베푸시고 네게 얼굴을 여호와께서 비추시기를 원하고
ישׂא יהוה פניו אליך וישׂם לך שׁלום
평화를 네게 주고 네게 얼굴을 여호와께서 돌리시기를 원하노라.
 
이 축도는 히브리인들의 조상으로부터 자손들에게 이르도록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축복의 기도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민수기 6:22), 아론과 그 아들에게 - 즉 사제, 목사님에게 -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민수기 6:23)라고 하여 가르쳐 주신 축도이다. 유럽교회에서는 이 축도로 예배를 마친다. 아마도 오랜 기독교의 전통을 유지해온 그들에게는 이 축복의 기도가 마땅하게 여겨졌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처럼 히브리인의 축복은 하나님이 돌아보고 지켜주는 복이고 사랑과 자비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 복이다.
טוב(tob, 좋다)에서 나온 טוב(tub, 좋은 것, 형통하는 것)이다. 그 좋은 것, 즉 복은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욥기 20:16절에 ‘그들의 복록이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바로 이를 잘 말해준다.
 הן לא ביךם טובם
그들의 복은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보라!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다.
 
또한 구약의 복은 올바른 길로 가는 것과 연관이 있다. אשׁר(ashar, ‘곧바로 가다’)는 동사는 ‘복되다고 하다’, ‘축복하다’는 뜻도 가진다. 여기서 나온 אשׁר(esher)는 행복, 축복의 뜻으로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로 45번 나온다.
 
구약의 אשׁר(esher  축복)는 ‘복된 자, 복받은 자’로 그 전통이 신약으로 이어진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말씀하신 8복, 즉 “심령(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온유한 (겸손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 긍휼히 여기는 자 (자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마음이 청결한(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의를 위하여(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 복된(Μακάριοι)은 바로 히브리어의 אשׁר(esher, 행복, 축복)와 연관된 개념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돌아보고 얼굴을 비추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그 복,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마음에 들어와 채워질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이라야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곧은 길로 가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라야 받을 수 있는 복이다.
 
그런 복이 경인년 2010년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에게 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해본다.
                          
               2010년 1월 7일 러시아력 성탄절 눈덮힌 비쉬켁에서
이 포스트를...
은혜(חן)를 입다 댓글[0]
묵상 및 QT (2009-12-28 오전 10:05:22) http://blog.somang.net/bhkim79/5533
은혜(חן)를 입다
 
찬송가 495 “내 영혼이 은총 입어”는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1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化하도다(바뀌도다)
2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同行하니(함께 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괄호안의 우리말로 바꾸어 불러도 좋겠다.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1. Since Christ my soul from sin set free, This world has been a heav`n to me; And`mid earth`s sor-rows and its woe,`Tis heav`n my Je-sus here to know.
2.Once heav-en seemed a far-off place,Till Je-sus showed His smil-ing face; Now it`s be-gun with-in my soul,`Twill last while end-less a-ges roll.
3.What mat-ters where on earth we dwell? On moun-tain- top,or in the dell, In cot-tage, or in man-sion fair--Where Je-sus is,`tis heav-en there.
(Refrain) O hal-le-lu-jah,yes,`tis heav`n!`Tis heav`n to know my sins for-giv`n; On land or sea, what mat-ter where? Where Je-sus is,`tis heav-en there.(A-men)
은총은 은혜로 새겨볼 수 있겠다.
 
성경에서 은혜(חן)는 창세기 6:8에 노아가 ‘은혜를 입다’는 표현으로 처음 나오면서 חן(헨)은 68번이나 나온다. 이 חן(헨, 독일어의 바흐의 ch 발음이나 러시아 어의 x 발음)은 ‘은혜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 라는 뜻의 חנן(하난) 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다. חנן(하난) 동사는 구약에 77번이나 나온다.
 
왜 은총/은혜를 입는다고 했을까?
창세기 6:8의 ‘은총(헨, חן)을 입다’의 히브리어 표현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노아(ונח)’는
מצא חן בעיני יהוה
여호와 눈 안에 은혜를 입었다/찾았다/만났다
은혜를 ‘입다’로 새겨진 동사 מצא (마짜)는 ‘다다르다, 만나다, 찾아지다’ 등으로 새겨지는데 구약에 452번이나 나온다. 과녁에 ‘맞다’는 우리의 동사를 연상하면 쉽게 외어진다.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어쩌다 만나다. 찾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애써 성취한 것이 아니라 거져 주신 은혜인 것이다. 그렇게 주어진 것을 우리가 이르러 만나고, 찾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성경은 ‘은혜를 입었다’라고 새긴 것이다. 이미 지어진 것, 주어진 것을 입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못지않게 한글의 감칠맛이 잘 드러난다.
 
하나님 눈에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그러기에 그는 말씀대로 산위에서 배(方舟)를 만들어 큰물이 질 때를 대비했던 것이다. 남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들이 장가들고, 시집 들고, 마시고 놀고 있을 때 그는 방주를 지었다. 여호와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달라진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아무리 어려움이 많은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에 이르르는 사람들이다.
 
                                                       성탄절 후 첫 주일 새벽에
이 포스트를...
말씀이 육신이 된 그 큰 사랑 댓글[0]
묵상 및 QT (2009-12-25 오전 10:44:28) http://blog.somang.net/bhkim79/5530
말씀이 육신이 된 그 큰 사랑 (긍휼, חסד)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και ο λογος σαρξ εγνετο) 우리 가운데 거(居)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라는 구절은 바로 앞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고 (οι ουκ εζαιμτων ουδο εκ θεληματοσ σαρκοσ)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하나님의 자녀” (εζουσιαν τεκνα θεου) (요한 1:12)” 라는 구절과 뗄 수 없게 이어져 있으면서, 대단한 반전(反轉)을 보인다. 이 두 구절 사이에는 우리 성경 번역에는 잘 새겨져 있지 않는 연결사 και 가 연계시켜 주고 있다. 육신의 의지로부터(εκ θεληματοσ σαρκοσ)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바로 그 육신이 되었다(σαρξ εγνετο)는 것이니 대단한 반전이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데’ (요한 1:1) 그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반전처럼 대단한 반전이다.
 
이러한 반전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것도 거져주시는 긍휼(חסד)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109:26
עזרני יהוה אלהי הושיעני כחסדך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하소서 나의 주 여호와여 도우소서” 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חסד)에 호소해야 한다. 크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실 긍휼(חסד)을 감사해야한다. 하나님께서 חסד를 보내시며, חסד가 왔고, 우리와 만나고 우리를 따르므로 (시편 57:3, 59:10, 85:10, 23:6) 우리는 חסד를 기억하고, 생각하며, 기다려야만 한다 (시편 106:7, 48:9, 33:18)고 성서학자 W. Zimmerli는 긍휼(חסד)을 논하고 있다.
 
유럽에서 30년 전쟁으로 피폐한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חסד)을 전쟁의 참혹한 들판에서 깨달은 독일의 찬송 작사가 게르하르트(Paul Gerhardt)는 다음과 같은 노래의 가사를 지었다:
“우리에게 무엇으로도 잴 수 없을 만큼 사랑하신 것을 주신 바로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시려고,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주셨다. 권력의 보좌와 영광으로 부터” (Sollt uns Gott nun können hassen, der uns gibt, was er liebt über alle Massen? Gott gibt, unserm Leid zuwehren, seinen Sohn aus dem Thron seiner Macht und Ehren.)
 
전쟁의 파괴 속에서 이런 찬양이 나올만큼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도 크다. 주님은 우리의 슬픔에 위로를, 보지 못하는 자에게 다시 봄을,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도록 오셨다. 기쁜 날이다. 성탄이다.
                                                            2009년 성탄절 새벽에
이 포스트를...
말씀하소서 종이 듣나이다 댓글[0]
묵상 및 QT (2009-12-24 오전 11:50:55) http://blog.somang.net/bhkim79/5528
말씀하소서 종이 듣나이다. (사무엘 상3:9, 3:10)
 
엘리 (עלה 올라가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선지자의 이름) 밑에 하나님을 섬기던 사무엘 ( שמואל 즉 쉠(이름)+엘(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가진 이름)이 자다가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냐고 하는데 엘리는 부른 적이 없다고 했다. 여러 차례 이러한 일이 되풀이 되면서, 엘리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는 것을 깨닫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소서. 종이 듣나이다. (삼상 3:9)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쳐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셨고 그제야 사무엘은 엘리에게 쫒아가 묻지 않고 “말씀하소서. 종이 듣나이다. (삼상 3:10)라고 대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뜻이지만 듣는다(שמע)는 동사와 너무나 비슷하여 하나님(말씀)을 듣는 자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마도 이 구절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그 말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주어 담기 전에 듣고 있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모른다면 우리는 그 말을 흘리게 된다. 나에게 들려온 말씀은 귓전에서 흘러버리거나 사무엘이 엘리의 말인줄 알고 잘못 찾아가 묻듯 잘못 대응을 하게 된다. 아니 그 다음 말을 듣지 못하게 된다.
 
이때 바로 필요한 것이 올바르게 일러주고 가르쳐주는 선생님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게 된다. 목사님, 선생님, 언젠가 새겨 읽은 성경 구절, 경험이 많은 선배, 동료가 우리 삶의 길동무이자 선생이 될 수도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여로 저로 어느 때 하나님, 주님의 목소리, 천상의 소리나 그런 메시지를 듣게 되지만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말이 우리 마음에 와 닿고 우리의 하는 짓과 판단을 바꾸고 삶을 재는 잣대를 바꾸고, 결국 사람이 바뀌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은 그런 선생님을 만나 우리가 제대로 듣고 대응하느냐 아니면 귓전에 맴돌고 사라질 것이냐가 결정된다.
 
 “말씀하소서. 종이 듣나이다.” (삼상 3:9)라고 말씀을 듣고 제대로 대응하고, 준 말씀을 마음에 와 닿고 또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우리가 꿈을 꾸다가 깨어나면 스러지는 기억처럼 그렇게 스러져버린다. 메아리처럼... 말씀을 듣고 제대로 대응하고 마음에 와 닿게 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워두어야 한다. 그러면 그 말씀은 우리를 낮추어 겸손하게 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여 삶이 달라진다. 대강절 마지막 날 우리에게 들려오실 말씀 뿐 아니라 몸으로 오신 그 오심을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가난한 심령으로 그 기쁜 오심의 말씀, 즉 복음을 듣고 제대로 대응하라고 말씀하신다.
                                               
                                            2009.12.24 대강절 마지낙 말 새벽에
이 포스트를...

처음페이지  이전페이지  1  2  다음페이지  마지막페이지

최근방문자
즐겨찾기
즐겨찾기가 없습니다.
최근댓글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