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소망교회 카페 블로그 메일 SMS 문자보내기
검색
고뇌하는 삶 댓글[0]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2013-09-26 오후 1:34:38) http://blog.somang.net/seolee/7968

이 글은 2013년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화요조찬 성경공부[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를 강해하신 내용을 게시자가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고뇌하는 삶



예수를 믿으면 기뻐도 하지만 고뇌하는 삶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감을 줍니다. 직장에서 누가 제일 고뇌를 할까요? 사실은 CEO가 제일 고뇌하는 것입니다. CEO가 고뇌하지 않으면 그 직장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이 제일 고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고뇌하기 싫다. 그러면 자리를 놔두어야 하지요. 여러분, 집안에서는 누가 제일 고뇌 할까요? 물론 아버지이지요. 그런데 아버지인 내가 내 집안에 대해 고뇌를 멈춘다면 가장의 자격이 없는 것이잖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시대에 필요한 것이 고뇌하는 삶입니다. 고뇌하는 삶은 사명감이 있다는 뜻입니다. 고뇌하는 삶은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은 고뇌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정말 하루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정말 의미가 없다. 이는 고뇌 해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고뇌해야지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고, 아마 내가 이렇게 해야 할 일이 있구나.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에 내가 참여 해야겠구나. 내가 있음으로 축복의 통로가 되겠구나. 이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마다 모든 신앙의 인물들은 고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그리고 예언자들이 그랬고, 신약에 들어오면 예수님이 고뇌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시대를 보면서 아파하고 고뇌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모습이 기쁘고 감사하지만 그것은 고뇌를 거쳐나간 기쁨이어야지 고뇌를 통과한 하늘로 부터 주시는 흡족함이어야지 그냥 천박한 흡족함, 천박한 기쁨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신앙 선배들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번째로 미켈란젤로의 조각작품을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대리석으로 조각한 모세 상입니다.


미켈란젤로, 모세 상


고뇌하는 삶의 첫 번째로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을 보려합니다. 이것은 대리석으로 조각한 모세 상입니다. 이를 보면 어떻게 대리석으로 이처럼 섬세하게 만들 수가 있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크기는 높이가 253 Cm 입니다. 모세는 아주 체격이 좋습니다. 팔뚝과 다리의 근육도 탄탄하고 대단한 근육질의 몸매로 손과 발에 힘이 들어 가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얼굴 표정이나 수염 등이 아주 섬세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Michelangelo. Moses. 1515 Marble, height 235 cm, San Pietro in Vincoli, Rome, Italy. < 출처: WEB GALLERY of ART >



여기 보면 몇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오른쪽 손은 하나님이 주신 돌판 두 개를 잡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출애굽기 34장 29절)



오른쪽 손은 그렇고 왼쪽 손은 어디에 놓여 있느냐 하면 배를 움켜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식하는 것, 아파하는 것, 동정하는 것의 핵심이 어디에 있느냐하면 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슬퍼하셨다. 민망히 여겼다. 긍휼히 여겼다. “스플랑크 니조마이” 라는 헬라어를 쓰는데 그게 무어냐 하면 창자가 막 뒤틀어지는 아픔을 갖고 있다. 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을 보면 대단한 위엄과 카리스마가 넘쳐나 보입니다. 그런데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머리에 뿔이 두 개가 나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할 때 왜 이런 모습으로 했을까 하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구하다가 히브리어 성경에 나와 있는 광채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라틴어 볼게이트로 번역하게 될 때 뿔이라는 말로 잘못 번역하여 미켈란젤로가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이 뿔이라는 상상적인 개념은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보면 무엇을 가르치느냐하면 영광을 가르칩니다. 광채를 가르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자체적으로. 요한계시록 5장 6절을 보면 예수그리스도가 어린양으로 오시는데 일곱 눈을 갖고 있으면서 뿔이 몇 개가 달려있느냐면 일곱 뿔이 달린 분이 다가오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영광을 뿔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1절을 보면 한나가 임신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찬양의 노래를 할 때 뭐라고 표현하느냐면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도다. "내 뿔이 높아졌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성경의 곳곳에 나타는데 바로 이는 무엇을 뜻하느냐하면 영광을 뜻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누군가가 화가나있는 것을 보고 저사람 뿔이 났다고 합니다. 아주 들이받을 것 같이 그렇다. 그런 표현으로 봐도 한 부분은 맞는다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갖고 시내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게 되었는데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사라졌다고 아론에게 가서 모세 대신 우리가 섬길 신을 하나 만들자 하면서 만든 게 금송아지입니다. 모세가 내려올 때 금송아지를 만들고 축제를 벌이며 술판을 벌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모세가 이 돌 판을 던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모세는 시내 산을 두 번 올라가게 됩니다. 첫 번에는 화가 나서 돌 판을 던지고 또 다시 하나님 앞에 나가 매달려서 두 번째 돌 판을 받고 있는 것을 성경은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민족에 대한 아픔이 함께 들어가져 있는데 여기 모세 상에서 모세의 눈을 보면 아주 부릅뜨고 있고 이마의 미간은 찌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강렬한 눈빛으로 앞을 직시하고 있고 머리에 뿔 2개는 영광의 표시입니다. 뭔가 심각하게 자기 민족을 들여다보는 듯 강렬하게 응시하는 눈동자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십계명 돌 판을, 왼손은 자기의 배를 움켜잡고 백성을 어찌할꼬? 하는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모세를 미켈란젤로가 그대로 표현해 주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모세가 하나님의 대행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로서 백성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우상숭배를 하면서 헛된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을 통곡하며 가슴아파하면서 오른손에는 돌 판을 왼손으로는 배를 움켜쥐고 눈은 아주 강렬하게 직시하며 영광의 모습으로 모세가 등장하고 있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에서 하늘을 붙잡고 땅바닥에 서있고 현실은 막 복잡하고 그땐 어떤 마음으로 이것을 대하야 될까?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한손으로는 긍휼히 여기는 가슴이 아픈 이 시대를 바라보는 이 모습이 미켈란젤로가 만든 대리석 모세 상입니다.



렘브란트,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는 예레미야



렘브란트가 그린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림의 크기가 58 x 46 Cm의 그리 큰 그림이 아닙니다.



Rembrandt. Jeremiah Lamenting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1630. Oil on canvas. 58 x 46 cm, Rijksmuseum, Amsterdam. The Netherlands.<출처: WEB GALLERY of ART>



이 그림의 왼쪽에 무언가가 감춰져있는데 이 부분은 다시 보겠습니다.
예레미야가 왼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는 모습의 상이 감옥 속에 갇힌 베드로와 비슷해 보이는데 렘브란트는 아버지를 한편으로는 싫어하면서도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모델로 그렸습니다. 그림의 아래쪽을 보면 보석상자가 있고 그 옆에 성경이 있는데 이를 조금 자세하게 보겠습니다. 먼저 성경 구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예레미야 34장 1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했다 이를 선포하라 바벨론에게 너희 들이 복종하라고 아주 슬픈 메시지를 전하게 됩니다. 그때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쳐들어오게 되는데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 예레미야의 모습입니다. 왼손으로 얼굴을 괴고 있는데 그 밑이 성경입니다.

이를 밝게 하면 성경에 독일어로 Bibel 이라 쓰여 있고 옆에 쟁반에 보석이 있는데 이것은 느브갓네살이 하사한 것입니다. 왜 그랬냐하면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복종하라 했는데 시르기아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애굽을 향해 의존했습니다. 시르기아가 갖고 있던 정치적인 방향이 바벨론 느브갓네살에게는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일종의 포상금을 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고민이 되어 한 쪽은 성서 한 쪽은 자기백성을 파괴하할 느브갓네살이 선물한 것이 앞에 있고 아마도 입고 있는 옷도 멋있는 것이 느브갓네살이 준 것이 아닌가 보입니다.
여기서 예레미야 40장 5절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사령관이 그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내매
(예레미야 40장 5절)



여기서 그 사령관은 느브갓네살의 사령관이고 그는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에게 바빌론에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한 것을 이 느브갓네살과 사령관이 알고 예레미야를 후대한 것입니다.

그림의 왼쪽을 따로 확대해 보면





렘브란트는 이 작은 그림에서도 아주 섬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이는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인데 두 눈을 빼앗겨 바벨론으로 포로로 가게 되는데 이 그림에서는 두눈을 꽉 부여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옆과 그 위에는 병사들이 있고 그리고 그 위에 예루살렘 돔이 있고 예루살렘이 불타는 모습이 그리어있습니다.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니
(열왕기하 25장 7절)



여러분 이 예언자가 당면하고 있는 이 위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예루살렘이 불타고 있고 시드기야가 두 눈을 꽉 잡고 도망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 성경책이 있고 적대국인 느브갓네살이 준 보석이 앞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레미야는 고민 한 것입니다. 어찌할꼬. 자기민족은 지금 파멸 당하고 바벨론왕은 내게 선물을 주고 있는데 이는 무슨 선물일까 하나님 말씀을 보고 깊이 시름하는 장면인데 이것을 보면 이 백성을 어찌할꼬.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내가 선포할꼬. 적군이 들어오고 백성은 망하고 이를 어찌할꼬. 하면서 아파하는 장면입니다.



고흐, 별이 빛나는 밤



세 번째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입니다.
고흐가 거의 만년에 프랑스의 한 정신과 요양원에서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파란색과 노란색이 조화를 이루면서 거의 대부분을 파란색으로 그렸습니다.



Gogh. Starry Night. June 1889. Oil on canvas. 74 x 92 cm,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출처: WEB GALLERY of ART>



고흐 그림의 특징은 다이내믹하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2/3정도가 하늘이고 옆에 사이프러스(Cypress)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측백나무 또는 삼나무라고도 하는데, 특별히 사이프러스 나무를 고흐는 굉장히 좋아해서 풍경을 그릴 때 거의 빠진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그리면서 그 속에 역동적인 것, 쭉쭉 뻗어나가는 기개, 위엄, 이런 것을 사이프러스 나무를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고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나는데 해와 별과 달이 다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별들만 있는 것인지, 달과 별들만 있는 것인지는 논의가 부분합니다. 실제로 오른쪽 상단의 이것이 해이고 동시에 달인지, 어쩌면 해와 달과 별을 다 그린 것처럼 보입니다.



하늘은 막 빛이 나고 있습니다. 아주 찬란하게 해와 달과 별이 빛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엄청나게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막 다이내믹하게 생동적이고 역동적인 느낌이 강하게 보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고흐의 영혼의 세계에 대한 그림, 하나님에 대한 그림, 신앙에 대한 그림을 표현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고흐는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세계에 대한 그림을 늘 간직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왼쪽의 사이프러스 나무는 하늘을 향해서 치솟듯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가 동생 테오(Theodorus)에게 쓴 편지를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사이프러스의 매력에 빠져있다. 나의 해바라기 그림처럼 지금까지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의 그림을 창조해 낼 것 같기도 하구나. 사이프러스는 마치 이집트의 뾰족탑처럼 균형 잡힌 아름다운 나무다.”


그러면서 이 사이프러스 나무를 예찬하는 아주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가 역동적이잖습니까? 불길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그림의 아래 부분은 마을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 교회가 있습니다. 마을에는 곳곳에 빛이 있습니다. 이를 확대해 보면 교회 주변에는 빛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교회는 모든 창문이 캄캄합니다.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을 통해 당시에 교회를 비판하고 있는 고흐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찬란한 영원한 세계, 구원의 세계가 하늘에 가득하다고 하는 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의 통분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닫혀졌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불이 꺼졌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생동감을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습을 도대체 누가 대신합니까? 하늘에 올라가는 역할을 이 사이프러스 나무가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를 향한 고흐의 고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고민이라고 생각되고, 우리가 고뇌할 점이라고 여겨지게 됩니다. 정말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반영하고 있는가?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있는가? 교회가 자기들이 좋다고 혼자 잔치만 벌이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에 대해 관심과 사랑에 대한 열정도 없는 그런 우리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그림입니다.


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이 빛나고 있습니까? 해와 달과 별들이 소용돌이치는 하늘의 아름다운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데 교회는 불이 꺼져있습니다. 그리고 사이프러스 나무가 하늘의 세계를 향해서 끌어 올라가고 있는데 이게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삶에 우리도 고민하고 아파해야 할 우리 현실의 문제점이 아닌가 생각해 보고 우리 실존의 모습을 보아야 되지 않겠는가 여겨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20절)



이 시대가 고뇌하는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습니다. 내 마음을 갖고 아파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 우리들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아파하는 이 시대를 보면서 애통하는 우리교회 남선교회 회원 되시기를 바라면서 함께 드리는 기도를 하겠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시대의 타락과 슬픔을 지켜보며
고뇌할 줄 아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글 김지철 목사

 

by  seolee

 

이 포스트를...
기도하는 삶 댓글[0]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2013-09-20 오후 8:56:01) http://blog.somang.net/seolee/7964

이 글은 2013년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화요조찬 성경공부[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를 강해하신 내용을 게시자가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기도하는 삶



우리의 영적 삶에서 오늘은 기도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복 된 것인가 오늘 몇가지 사건이 나오고 있는데 그림을 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샤갈의 그림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입니다. 샤갈은 창세기의 그림들을 마지막에는 아주 거대하게 그리었는데 이 그림도 251 x 205Cm의 커다란 그림입니다. 프랑스 니스에 샤갈 미술관이 있습니다. 샤갈의 그림만 있는데, 창세기 그림이 중심이고 아가서의 사랑이야기의 그림 등이 있습니다.



샤갈,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 마지막 자기 인생의 실존을 내건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들은 대체적으로 레슬링하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마치 샅바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 처럼 그렇게 그려져 있는데 샤갈의 그림은 조금 다릅니다. 샤갈은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도 갖고 있고 샤갈의 화풍은 어디에 비교할까? 초현실주의도 아니고 또 그런 모습이 어찌 보면 그런 모습인것 같기도 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화려한 색채감을 자랑하고있는 샤갈입니다.


그런데 샤갈은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을 어떻게 그리고 있느냐 하면 씨름이 끝난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천사가 축복하는 장면으로 그려져 있습니다.그래서 샤갈의 그림 속에 나타난 야곱은 이 천사와 함께 샅바를 잡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이미 꿇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Marc Chagall.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1960-1966. Oil on canvas 251 x 205 cm. Musee national Marc Chagall,Nice, France. < ⓒ Musee national Marc Chagall ⓒ cliche RMN Gerard Blot >



여기에서 보면 이 자체가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을 줍니다. 땅바닥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떠 있는 상태로 그려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란색을 쓰고 있고 보라색으로 야곱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초록색으로 색체감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그리면서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샤갈은 야곱이라는 인물의 전 생애를 이 그림 속에 담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의 하단은 약간 어두은 색으로 되어 있는데 이 어둠의 색 속에 있는 것은 러시아 출생인 샤갈이 자기의 고향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테 샤갈은 실제적으로 유태인입니다. 그리고 국적은 프랑스 사람입니다. 세 가지 삶의 여건들이 통합 되어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어릴 때 자기 고향을 표현하면서 야곱의 탄생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것으로 보여집니다.


야곱이 형의 밑에서 늘 형을 이기려고 했던 암울한 시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림의 위 쪽으로 올라가 보면 왼쪽 상단에 우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것은 샤갈과 애인 벨라의 모습이다 라고도 하지만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그냥 성경적으로 보면 야곱이 축복을 받는 그 자리에 들어가면서 자기의 인생을 회고한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자기 삶의 누추한 어둠의 모습 그러나 아주 화려했던 야곱과 라헬이 갖고 있는 우물가에서 만났던 따뜻하게 포옹하고 있는 사랑의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른쪽 중간 위 부분을 보면 야곱의 아들들을 그린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기에 벌거벗은 젊은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으로 보여집니다. 자그마한 구덩이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수탉이 있는데 샤갈에게 있어서 수탉은 어떤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냐 하면 남성이 갖고 있는 욕망 그리고 남성의 정욕, 일종의 탐심 같은 것을 상징적으로 그릴 때 수탉을 그리면서 남성들이 갖고 있는 삶의 그런 것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숫탉은 인간의 야망들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가족의 해체 그런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막내아들 요셉을 저렇게 버려놓고 가게 되는데 회상 속에서 라헬과 자기 모습을 그리면서 요셉이 모든 것이 벌거 벗겨졌지만 그래도 회복 되는 그런 것들은 부모가 갖고 있는 사랑의 기억같은 것 들을 여기에 같이 집어넣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빛으로 야곱으로 부터 천사로 부터 확대 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른쪽 하단을 보면 야곱의 모습입니다. 요셉이 옷이 벗겨진 채로 끌려가 광야에서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그 옷을 가져다 준 찢겨진 요셉의 옷을 갖고 있는 아주 슬픈모습으로 통곡하며 오열하는 그 모습은 놀랍게도 샤갈은 천사와 씨름하는 모습에서 야곱의 전 생애를 압축하여 그려주면서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기도의 마지막 단계의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샤갈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글을 잠깐 읽어 보겠습니다.

청년기 이후 나는 성서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에게 성서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가장 위대한 시정. 내 속에서 나오는 영감의 원천이다. 나는 내 삶괴 예술에서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성서는 내가 전달하려고 하는 이 비밀과 자연의 반향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샤갈은 성경을 읽으면서 창조적인 영감과 그리고 아름다운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적인 그런 것들을 성서를 통해서 받으면서 그는 성경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려놓은 화가입니다.
샤갈의 그림을 보면 색채를 이렇게 현란하게 그릴 수가 있을까, 아주 무어라 할까 그냥 대충 대충 그린것 같으면서 색채감 속에 나타나는 그런 모습이 아주 아름답고 밝게 다가오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바로 이[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속에서 이런 것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 성경 말씀 한 구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세기 32장 24절)



그리고 축복과 너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라 이제는 이스라엘이라 부르라고 하는 그런 축복받는 장면의 이야기인데 인생의 파노라마가 좌-악 기도하면서 그의 생을 스쳐갔다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렘브란트, 감옥 속에 갇힌 베드로



두 번째 그림은 렘브란트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어둠 속에 큰 기둥이 있는 동굴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감옥이라고 표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데 렘브란트가 탁월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렘브란트의 탁월성은 다른 것보다 빛과 어둠의 명암을 조정하는 능력이 어떤 화가 보다 탁월하고 두 번째로는 사람의 얼굴 표정을 그리는 탁월함이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얼굴 표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의 눈 표정, 이마의 주름살 표정, 그의 입 표정 입의 모양 이런 것들을 보면 야, 이런 명화하고 다른 보통의 것과 바로 구분이 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볼 때는 그 두 가지. 하나는 밝음과 어둠의 조화, 또 하나는 얼굴 표정의 이 모습을 살펴 보면 좋을 것입니다.



Rembrandt. Apostle Peter in Prison. 1631. Oil on canvas. 58 x 48 cm, Israel Museum, Jerusalem. Israel.<출처: WEB GALLERY of ART>



렘브란트의 그림[감옥 속에 갇힌 베드로]는 그리 큰 것은 아닙니다. 이 그림에서 빛나는 부분은 첫 째 얼굴이고, 두 번째가 손이고 다음이 열쇠입니다. 이 세 가지를 유의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감옥 속에 갇힌 베드로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 나갔는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인데 표정을 이야기 했는데.

여기 확대한 베드로의 표정을 보세요. 아, 이 표정을 보면 완전히 갔어요. 눈동자의 표정을 보세요. 힘이 다 빠져 있어요.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아요. 눈의 동자가 풀린 것 같이 그냥 멍하니 앞을 보고 있어요. 머리는 하얀 백발이 벗겨지고 흐트러져 있고 주름진 얼굴에 하얀 수염이 있는데 눈 표정을 보면 낙심하고 실망하고 모든 것이 어디에 소망이 있는가? 기대가 있는가? 아! 인생이 다 끝났구나 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한 그런 인생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빛나는 그의 모습입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 있는 상황인데 이것을 보려면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것을 상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12장에는 헤롯왕이 교회의 지도자를 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누구를 먼저 죽이느냐 하면 예수님의 수제자 야고보를 죽이게 됩니다. 그런 다음 베드로를 수소문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처넣습니다. 그 것이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문맥상의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힘이 다 빠져 있는데 손을 보면 놀랍게도 손은 강력하게 깍지를 끼고 있는 모습인데 베드로의 손이 아주 큽니다. 그가 평생에 어부생활을 하면서 고기를 낚았고 노를 저었던 단단한 손입니다. 손으로 깍지를 꽉 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얼굴 표정은 모든 것이 다 끊어졌는데 손깍지에 담아져 기도하는 모습은 얼마나 강력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주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한테 요청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빛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를 보기 전에 당대에 렘브란트 보다 선배였던 루벤스가 인기였습니다. 여러분도 루벤스의 작품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파리 루블 박물관에 루벤스의 작품이 많이 있는데 루벤스의 작품은 대체로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밝게 그렸는데, 당대의 최고 인기화가 였습니다. 렘브란트는 그에 비해 시골에서 그곳에서만 알려진 버려진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작풍 중 누구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면 대부분 렘브란트의 것을 선택합니다. 그만큼 렘브란트 이름이 더 커졌는데 여기에서 보는 루벤스의 그림은 나이가 든 노인이지만 눈동자는 하늘을 향해 명백하게 올라가 있고 옷은 사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 손에는 천국의 열쇠가 들려져 있고 왼 손에는 땅의 열쇠가 들려있습니다. 루벤스가 그린 베드로의 모습은 당당하고 힘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은 아주 인간적입니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Peter Paul Rubens. Saint Peter. 1611. Oil on canvas 107 × 82 cm, Museo del Prado, Madrid, the Spain. <출처: Olga's Gallery>



세 번째 빛나는 것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열쇠입니다. 이 열쇠는 손에 들려 있지않고 땅바닥에 지푸라기 위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할가요? 어떤 사람은 천국의 열쇠가 아닌가 하는데 베드로의 손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처량한 베드로가 기도하고 두 손을 잡고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미래의 희망과 가능성을 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쇠가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네가 감옥에 들어가 있지만 감옥에서 나올 열쇠를 내가 다 준비하고 있다. 내가 이제 열쇠를 들고 감옥의 문을 열기만 하면 네가 지금 나올 수 있다. 네가 지금 어둠 속에 갇혀 있어서 고통 받는 것에 대해 너무 좌절하지 말아라. 라는 하나님의 희망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메시지가 바로 이 열쇠 속에 들어가 있다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세 가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뇌와 슬픔에 찬 베드로. 절망과 탄식하는 베드로의 얼굴. 그러나 그 속에서도 강력하게 하나님께 의지하려고 기도하는 베드로. 그런데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미 베드로에게 열쇠를 허락하셔서 네가 이땅에서 감옥과 같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이 있고 그 것은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대와 소망을 가져도 괜찮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소망이 바로 이 열쇠 속에 갖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들을 보면 기도 속에 나타난 인간의 절망과 인간의 희망과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받는 모습들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렘브란트, 시므온의 노래



세 번째 그림입니다. 렘브란트의[시므온의 노래]입니다.
시므온은 누가복음 2장을 보면 메시아를 기다렸던 인물입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이 어둠의 세월에 구원의 빛을 비춰주시옵소서 하며 기도했던 시므온을 잘 이해하려면 누가복음 2장을 읽어보면 좋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죽은 해에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렘브란트의 유작으로 나중에 확인 된 그림인데 렘브란트 생애의 심경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판단을 합니다.



Rembrandt. Simeon with the Infant Jesus in the Temple. 1669. Oil on canvas. 98 x 79 cm, Nationalmuseum, Stockholm, Sweden. <출처: WEB GALLERY of ART>



노인 시므온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이 그림 속에 모든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시므온의 표정이 어떻게 느껴집니까? 어떤 사람은 아주 쓸픈 표정이다. 절망하는 표정 같다. 고뇌하고 탄식하는 듯하다. 라고도 하나 시므온의 표정은 가슴 속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놀람과 격정의 눈을 뜬듯 감은 듯 그윽하게 내려 보면서 주체 할 수 없는 감정의 모습으로 내려다 보는 눈이 띄어졌다 감겨졌다 하는 것 같은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입은 약간 벌려져 있어 아, 바로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눈시울이 막 뜨거워 지면서 감격스러운 고백을 입으로 토해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표정은 너무도 멋있습니다. 렘브란트가 누구보다도 이 표정을 잘 그립니다. 기쁨, 감사, 슬픔 같기도 한데 기쁨으로 막 그런 것들이 속에서 솟구쳐 나와 눈시울이 뜨거워져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고 싶어하는 그런 표정이 그려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누가복음 2장 25절)



여기서 그림을 다시 살펴 보면 손을 한번 보세요 아기 예수를 받치고 있는 손을 보면 기도하는 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기를 떠받들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습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시므온이 인생 평생에 하나님 앞에서 그가 기도하고 메시아 오기를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그의 모습 속에서 이제 내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감사할 뿐입니다. 시므온의 마지막 찬양을 보면 이렇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기 예수를 이렇게 떠받드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바치면서 이 시므온이 한 노래가 있습니다.



주제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편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누가복음 2장 29절)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구나 하나님이 그렇게 기다리던 내 기다림을 풀어 주셨구니 이것은 기다림을 갖고 있는 사람의 기쁨과 감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메시아를 보게 되었군요. 내 인생 그렇게 기다림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 영혼이 편히 주님 앞에 서게 하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면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아마도 렘브란트의 마지막 자기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기 모습처럼 하나님께 예배자로 그의 모습을 드리기를 원했던 모습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집니다. 사실 렘브란트가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고 아들들도 여럿이 죽었습니다. 그는 아주 외로웠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마지막을 하나님을 경험하며 감사하면서 내가 내 인생. 이제 여기서 끝내도 괜찮습니다. 내가 더 살지 않도 괜찮습니다. 하면서 하나님께 그렇게 고백하면서 기도의 응답을 받았던 것을 기뻐하는 그런 모습이라고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제목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이 처해 있는 상황이 어떠합니까?
여러분 다시 우리가 영적 삶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사랑의 하나님. 기도할 때에
때로는 생명걸고 진심으로 하게 하시고
기도에 응답 받을 때에
주님과 함께 기뻐 뛰놀게 하옵소서



글 김지철 목사

 

by  seolee

 

이 포스트를...
묵상하는 삶 댓글[0]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2013-09-18 오후 12:38:16) http://blog.somang.net/seolee/7963

이 글은 2013년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화요조찬 성경공부[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를 강해하신 내용을 게시자가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묵상하는 삶



카톨릭의 묵상과 개신교의 묵상이 조금 다른 점이 있는데 마틴 루터가 메디타치오(meditatio; 묵상) 라고 말하면서 기독교 묵상은 늘 망씀과 더불어 하게됩니다. 카톨릭에서 렉치오 디비나(letio divina)라고 하는 성경읽기에서 마지막 단계는 무었이냐하면 컨템프라치온(contemplation)이라고 하는데 관상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인데 컨템프라치온은 일종의 하나님과 나와의 신비적 경험입니다. 어떤 때는 감성적이고 어떤 때는 더 개체적이고 주관적인 때도 있는데 우리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은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깊이 있는 사고와 묵상을 하는 것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우리가 배우고 경험 할 것인가 생각해 보면서 성경 한 구절을 읽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1서 1장 1절)



요한1서 1장 1절 말씀인데 재미 있는 것이 태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감각 전채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귀를 동원하고(들은 바요) 눈을 동원하고(자세히 보고) 손을 동원(손으로 만진 바라)하고 있습니다. 기도교적인 메디테이션(meditaion)이라고 하는 것은 입체적이고 인격적이고 우리의 5관 전체를 동원해서 말씀과 나 사이의 교류가 있는 것이 기도교적이고 성서적인 묵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상은 단순히 지성적인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채 삶의 인격 전체가 동반 되어 있는 것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말씀을 통해서 그림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렘브란트, 마태와 천사


이것은 렘브란트가 그린 [마태와 천사]라는 유화입니다. 1661년에 그린 것인데 앞에 있는 사람이 마태입니다. 특히 렘브란트의 그림을 볼 때는 환한 것과 어두운 것을 구별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Rembrandt. St. Mathew and Angel. 1661. Oil on canvas. Louvre, Paris, France. <출처: Olga's Gallery>



여기에 빛나는 곳이 크게 4가지가 있습니다. 제일 빛나는 마태의 얼굴 그리고 수염과 손이 빛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밑에 성경과 오른쪽 손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의 뒤에 있는 사람은 천사의 표시입니다. 천사가 가까이 다가와서 약간 빛이나는 오른 손을 마태의 어깨에 가만히 내려 놓고 무언가 속삭이 듯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뭔가 들은 것 같으면서 아래다가 필체로 쓰고 있는데, 다만 책처럼 되어 있지만 아마 이런 책은 마태 당시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양피 두루마리나 아니면 파피루스 같은 형태로 되어있이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책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만 상상 속에서 렘브란트가 그렇게 그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것은 제일 빛나는 것이 마태의 얼굴과 성경에 들어난 빛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구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마태와 천사가 같은 선상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 부분은 그동안 전형적으로 나타났든 다른 그림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렘브란트(1606-1669) 보다 조금 앞선 세대라는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그림입니다. 이 카라바조도 성경을 여러 형태로 이야기를 그려 놓고 있는데, 구조가 좀 다르잖습니까?



Caravaggio. St. Mathew and Angel. 1603. Oil on canvas. San Luigi dei Francesi, Rome, Italy. <출처: Olga's Gallery>



그림에서 마태와 천사가 같은 선에 놓여 있는 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천사가 함께 마태와 동역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런데 카라바조의 그림은 천사가 하늘에 있습니다. 계시가 하늘에서 부터 내려옵니다. 그래서 계시의 말씀을 천사가 이야기하면, 지금 마태는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까? 천사를 향해서 얼굴을 돌리고 있습니다. 밑에다 성경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 천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쳐주는 느낌이 듭니다. 아, 천사여 말씀하십시오 지금 쓰겠나이다. 하고 내려 쓰는 일종의 게시적인 하늘과 땅의 수직적인 종속성이다고 한다면 렘브란트의 그림은 종속성이 아니라 평행성이고 동역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유물주의적 사고가 발달이 되면서 나타나고 있는 인간의 귀한 특성, 존엄성들이 부각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천사는 입을 얇게, 작게 벌리고 마태의 귀에다 대고 소근 소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마태는 그냥 딕테이션(dictation; 口述)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그림은 그냥 딕테이션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하면 그냥 받아쓰겠다. 그런데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마태의 눈동자를 보면 지그시 앞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뭔가 생각하고 있구나, 사고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언가 하나님의 영감적인 것을 받으면서도 인간이 갖고 있는 마태의 경험, 마태의 지금까지 모든 신학적 신앙적인 생각들, 삶의 그 모든 것들, 문화적인 가치들, 이 모든 것들이 합해져 말씀을 들으면서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영감적인 것들을 다시 자기의 언어와 생각으로 써 넣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런 부분에서 보여지는 것은 성경과 아주 맞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게시의 말씀인 것처럼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느낌을 주도록 그려져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사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마태가 왼손으로 수염을 만지작만지작 거리는 모습입니다. 아마 수염이 있는 남자들이 수염을 만지작 거리는 모습은 전형적인 생각하고 사고하는 그런 패턴을 보여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특성은 게시와 그리고 인간의 지성이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 거의 하나님의 영감적인 것이 일방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마태는 인간의 지성과 감성이 하나님의 게시와 만나서 그것이 안에서 조화되고 변화되어 글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렘브란트의 그림이 오늘에 있어서 우리에게 더 적절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러분, 신앙은 두 가지 형태가 인잖습니까? 하나는 성경 말씀을 하나 하나 암기하는 것이 공부의 최고 비결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암기만 해서는 안 되잖습니까. 암기한 것이 어느 날 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면서 거기서 구절 하나 하나가 내 삶에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변화를 주고, 성숙을 주고 그러면서 나갈 수 있는 그런 길을 열어주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것이구나, 객관적으로 쓰여진 말씀이구나, 내 삶에 나와 더불어 움직이는 것이구나, 그래서 하나님의 게시는 인간의 지성을 면제시키지 않고, 인간의 감성을 사라지게 만들지 않고, 인간이 갖고 있는 의지력을 약화 시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게시와 영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 인간의 의지, 인간의 감성을 더 크게 풍성하게 만들어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여기 마태가 앞을 직시하고 응시하면서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서 하나 하나 써 내려가는 것. 이런 것을 우리는 묵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말씀, 그냥 들려지는 말씀을 어떻게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내 지성이 다 동원 되게 하시옵소서. 내 감성도 동원 되게 하시옵소서. 내가 갖고 있는 이 삶의 모든 경험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감과 계시 속에 녹아지게 하시옵소서. 이런 묵상의 글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면 렘브란트가 보여주고 있는 이런 모습은 카라바조가 보여주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와서 뭔가 이야기 하여 쳐다보면서 받아 쓰고 있는 그런 모습과 아주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몇 구절이나 암송하고 계십니까?
저는 대학교 다닐 때 외우는 재능이 부족해 외우면 금방 잊어먹고 했지만 그래도 외운 것이 가끔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증거할 때도 그렇고 제 삶에 다가올 때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훈련이 중요한데 첫째로 귀로 듣는 말씀입니다. 다음에는 두 번째로 성경에 나타는 것을 말씀 드리기 전에 성경말씀을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렘브란트, 예언자 안나



두 번째 그림도 렘브란트가 그린 것입니다. 이것은 손으로 만지는 말씀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이 그림을 선택했습니다. 이것도 유채로 1631년에 그린 것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누가 복음 1, 2장에 나오는 안나의 이야기인데 이 안나가 어떤 여인이었는지 성경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아셀 지파 비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누가복음 2장 36-37절)



Rembrandt. Rembrandt's Mother as Biblical Prophetess Hannah. 1631. Oil on canvas. Rijksmuseum, Amsterdam, the Netherlands. <출처: Olga's Gallery>



안나가 길을 가다가 누구를 만나게 되느냐 하면 바로 성경의 예수님, 그 어린 예수님을 만나게 된 그 유명한 안나. 구약에서는 이 안나라는 말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똑 같은 이름인 것입니다. 한나라고 하기도 하고 안나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림에 있는 성경은 히브리어로 씌여져 있습니다. 그것에 손을 대고 있는데 흥미 있는것은 놀랍게도 분명 눈으로 보고 얼굴로 보는 것 같은데 얼굴은 다 가려져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렘브란트는 굉장한 상상력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 같으면 그 보려고 하는 눈을 여인의 주름살 많은 눈. 그 눈이 성경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야 될터인데 오히려 얼굴은 어둠 속에 묶어 놨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모자, 만초를 입은 듯한 아름다운 옷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특징적인 환한 빛이 결정적으로 나오는 것이 두 군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이고 또 하나는 손입니다. 손이 성경에 닿아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으로 읽느냐? 손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것은 체험으로 읽는 것이고 여태까지 이 여인이 84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예뻐했던 이 여인의 모습을 렘브란트가 상상 속에서 그려주고 있는 것인데 여기서 손 부분을 확대 한 것을 보면 손이 주름살이 가득해 노인의 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이 빛이 나 하얗게 되어 있고 이 성경에 의해서 손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손의 빛과 성경의 빛이 함께 마나면서 이 여인은 그가 그 동안 오랫동안 예언자로서 예수그리스도 메시아가 오실 것을 기대하면서 기도했다가 그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그 손으로 읽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아까 요한1서 1장 1절에서 보여 준 것처럼 우리는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는 겇 처럼 손까지 가야 성경을 읽는 것이 재미 있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성적으로 만 읽으려 합니다. 그러니 성경이 재미 없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 만큼 보이게 되어 있고, 사랑하는 것 만큼 알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면 깨닫기 시작하고 알게 되는 것 만큼 보게 되면 그 동안 감추어졌던 세계가 열려지기 시작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는 것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 사랑하고 알게 되는 그 부분은 가장 중요한 현상적으로 나오는 것, 추상적이 아니라 구상적으로 나오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텃치라고 생각합니다. 텃치. 여러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텃치입니다. 아내가 예쁘다 하고 아내의 얼굴을 만져주고 아내를 따스하게 가슴으로 안아주고, 남편이 아무리 아내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수 없이 말을 해도 아내가 그것을 느낄 수가 없어요. 사랑의 중요한 특성은 텃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지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텃치 하는 것입니다. 여기 주름 진 손과 성경구절이 만나지면서 안나가 갖고 있었던 신앙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 내가 이 말씀을 텃치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이 내 심장을 텃치하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를 하시면서 성경을 읽으면 성경에 몰랐던 부분들, 내가 읽으면서도 생각 안했던 부분들이 그 속에서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흐, 성경과 소설이 있는 정물


세 번째 그림입니다. 이것은 빈센트 반 고흐의 [성경과 소설이 있는 정물]이란 그립입니다.



Vincent van Gogh. Still Life with Open Bible. April 1885. Oil on canvas. Vincent van Gogh Foundation,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the Netherlands. <출처: Olga's Gallery>



이 그림은 참 흥미가 있습니다. 여기 보면 구조가 3개를 표현하고 있는데 성경이 전체 그림의 절반 이상 정도의 거대하게 그려졌고 아래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은 에밀 졸라의 생명의 기쁨이라는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별히 고흐가 아주 즐겨 읽었던 소설책이기 때문에 소설은 막 구겨져 있고, 뒤틀려져 있는데 한 두번 정도가 아니라 수 많이 자주 읽었던 책으로 보여집니다. 오른 쪽에 촛대가 하나 있습니다. 촛대는 불이 켜져 있지 않고 꺼져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해석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하고 있는데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1885년 3월에 63세로 돌아가게 됩니다. 고흐는 아버지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버지와 갈등도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버지는 고흐가 목사가 되기를 원했었는데 아버지도 목사였습니다. 그리고 고흐도 젊은 시절에는 자기도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자기가 그림에 아티스트 적인 생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미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아버지를 추모하면서 그린 그림인데 이것은 상징적으로 어떻게 비유하고 있는가 하면 성경은 목사인 아버지, 그리고 자기가 그동안 신앙으로 열망하고 목사가 되기를 바랬던 그런 마음의 상태를 이 거대한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비밀 이라는 이 에밀 졸라의 책은 고흐 자신을 비유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고흐는 종종 아버지에게 세상의 여러가지 책들도 읽으세요 라고 권했으나 아버지는 인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자기가 읽은 이 책을 보면서 자기 나름대로 영감을 받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영감을 주는 그 밝기가 성경이 굉장히 밝습니다. 그것과 비교해 그만큼은 안 되지만 에밀 졸라의 책도 굉장히 밝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비해 오른 쪽은 촛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의 크기와 소설의 책 크기는 비교가 안 됩니다. 성경은 엄숙하고 거대합니다. 소설책은 약간 흐트러진 느낌을 받게 그려졌지만 여러번 읽음으로서 아버지에게 이 작은 세상의 책도 도움이 되어요 하고 나도 내가 읽은 책도 참으로 소중합니다. 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갖게 해주고 있습니다. 다음에 오른 쪽의 촛불이 꺼져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빛이 사라졌다는 것을 표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빛이 어디서 부터 왔느냐 하면 촛불에서가 아니고 빛이 두 가지로 부터 오는데, 하나는 성경에서 오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읽은 에밀 졸라의 책에서부터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뒷 배경을 보면 아주 꺼멓게 어두은 흑색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만 이 그림을 자꾸 보면서 여러 해석이라든지 여러 사람들이 쓴 것을 보면서 저의 생각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여지고 있는 꺼먼색은 인생의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미래적인 그러나 어둡고 그것은 어떻게 나가야 될지 모르는 오늘의 현실이고 내일의 삶의 내용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두 가지의 큰 빛이 나는 성경책과 자기가 읽은 소설 책. 이 두 가지가 자기 삶에 끊임없이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데 그가 동생 테오도로스(Theodorus)에게 1887년 쓴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성서에 이끌리고 있는지 너는 아마 잘 모를 것이다. 나는 매일 성서를 읽는다. 성서 말씀을 내 마음에 새기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하는 말씀을 비추어 내 삶을 이해하려고 한다.".

라고 동생에게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과 자기가 읽었던 이 책은 삶의 내용입니다. 두 가지가 다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아버지 목사는 세상 속의 책을 다 읽지 말라고 거절했지만 세싱 삶의 현장에 있는 것. 가정, 직장, 사회, 문화 이 모든 삶의 그 것들이 들어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내 인생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내 인생의 노하우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성경 속에서 다시금 확대해 봐야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자기가 읽은 책은 약간 삐둘어져 있습니다. 구도상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 책은 반듯하게 놓여져 있으면서 한 가지 마지막으로 중요한 지점이 나오는데...


그림에서는 성경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며 어디 부분인지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성경의 오른쪽 부분을 보면 이렇게 씌어져 있습니다. 그 중 왼쪽 위에 이사야(ISAIE)라고 쓰여져 있고 조금 밑에는 L III이라고 쓰여져있는데 좀 자세히 보면 L III(53장)이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여러번 읽은 책은 닫혀져 있고 성경은 거대하게 느껴지지만 열려져 있습니다. 궁극적인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고흐가 위로를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구절이 바로 이사야 53장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장 5절)


이렇게 되어진 모습 속에 펼쳐진 성경 속에서 고흐는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마치 우리가 에밀 졸라의 책처럼 삶의 현장 그 속에서 수 없이 많은 것을 얻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위로를 어디에서 부터 얻어야 될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밖히시고 부활의 생명을 주신 것을 통해서 다시 우리가 위로를 받아야 되지 않을까요. 아버지 같이 내가 밑고 있었던 촛불은 꺼쪄 있지만 내가 세상에서 자랑하는 그 모든 것들은 꺼져있지만 다시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있는 모습을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찾아 볼 수 있지않겠는가, 그래서 이것은 보이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세 가지는
든는 말씀
다음에는 보는 말씀
세 번째는 손으로 만지는 말씀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묵상 할 때.
하나님, 보고, 듣고, 제가 손으로 만지게 하옵소서. 제 인격 전체로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이렇게 오늘도 고백하면서 우리의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손으로 만지게 하옵소서



글 김지철 목사

 

by  seolee

 

이 포스트를...
거룩한 삶 댓글[0]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2013-09-14 오후 7:50:40) http://blog.somang.net/seolee/7962

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


거룩한 삶



이 글은 2013년 소망교회 김지철 담임목사의 화요조찬 성경공부[영성의 삶, 그림과 함께]를 강해하신 내용을 게시자가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전체의 주제는 [영성의 삶], 그리고 오늘 첫 번째는 [거룩한 삶]을 하고 다음 주는 [묵상하는 삶], 몇 가지의 테마를 12개 정도 잡아 놓았습니다. 매주 마다 그림 3개를 소개 해드리면서 그림 안에 담겨져 있는 성경적이고 영적인 부분들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우리 삶에서 결단하고 나아갈 것인가를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거룩을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오늘 거룩에 대한 정의를 그림과 함께 생각해보려 하는데, 첫번 째는 피조물 의식을 가지면 거룩함에 접목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창조주다. 인생은 디자인 시대이고 요새는 창의적인 시대라고 해서 사람들이 굉장히 자존감이 교만으로 바뀌어지기 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마치 창조주인것 처럼 생각하는데, 가장 거룩한 삶의 기초는 창조주는 한분 계시고 나는 피조물이라고 여기는 데서 부터 거룩함을 우리가 부여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거룩함은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는 것을 내가 부여 받는 것인데 그래서 첫번 째로 시스틴 성당의 그레스코 벽화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로마 바디칸에 있는 시스틴 성당은 유대인들의 성전크기와 같이 길이 40m, 폭 13m, 높이 20m로 지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지은 것과 같은 크기입니다. 이 시스틴 성당의 그림 중 대표적인 것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프레스코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 중 천지창조 중에서 아담의 창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1508-1512. Fresco. 시스틴성당, 바디칸 <출처: en.wikipedia>

 

이 그림을 미켈란젤로가 1508년부터 1512년까지 4년여 이상 정말로 고통받으며 열정을 갖고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성서에 나타난 모습과 조금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인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창조하셨다 라고 되어 있는데 그 모습을 미켈란젤로가 어떻게 상상하고 그것을 만들어 놓고 있는가? 그는 놀랍게도 손가락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손가락으로 표현한 것이 반 성서적이고 불경한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내리실 때 손가락으로 쓰셨다. 라고 말씀이 나와 있고, 시편 8편 3절에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말씀으로 만드셨는데 성경기자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만드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낼 때 마태복음에는 "주의 성령으로 쫓아냈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내쫓았다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장 7절)


이 두 그림이 참으로 흥미가 있습니다. 아담은 바위 같은 데에 누어있고 하나님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큰 망토같은 것을 쓰고 있는데 아담은 멈춰섰는데 반해서 하나님은 좌-악 날아오다가 아담의 손과 하나님의 손이 만나기 바로 직전 아주 짧은 공간의 여백을 남겨두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떻게보면 아직 만나지 않은 것 그러나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만나는 것, 그리고 만나야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 속에 상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조금더 자세히 본다면 손가락만을 클로즈업해보면 아담의 손은 축 늘어져 있어 피동성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피조물 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강력하게 뻗어져 있습니다. 그림은 멈춰 선 정지상태 같으나 하나님은 망토가 펄럭이고 움직이며 다가와서 탁 하고 텃치하기 바로 전 순간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아담의 얼굴은 기다림의 얼굴, 뭔가 앙망하는 얼굴, 나는 당신의 도움이 있어야 일어설 수 있습니다. 라는 기다림과 피동성의 눈으로 하나님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뒤에 망토가 펄럭이고 움직임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최근에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망토는 마치 두뇌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시대에 뇌처럼 그려서 누스(n?s)라는 이성적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똑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벌거벗은 모습이지만 하나님은 옷을 입고계셔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여성이 하나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 여성이 누구일까요? 생각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카돌릭 쪽에서는 앞으로 태어날 성모상이다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자료를 찾아 보았는데 이것은 하와처럼 보여집니다. 지금 아담이 새롭게 창조 될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하나님 품에 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함께 일어날 부분들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전체 그림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가요? 거룩함에 이르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다가오는 피조물 의식은 내가 피조의식을 갖게 되는 순간에 인간은 엄청난 기다림을 갖게 되고 인간은 그때부터 기도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은 그때부터 찬양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은 그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삶의 존재의 변화를 갖게 될 수가 있습니다. 거룩한 삶의 많은 부분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내가 피조의식을 갖게 되면 사람이 수동성이 되고 저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접목 되므로서 가장 강력한 힘을 오히려 얻게 되고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게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면서 여기에 나와 있는 아담의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활기를 불어넣는 이 모습 속에서 우리가 거룩한 삶에 어떻게 참여하고 하나님의 거룩성은 우리에게 어떻게 주고 계신지를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렘브란트, 엠마오의 만찬


두 번째는 렘브란트의 그림 "엠마오의 만찬"입니다. 이 그림은 1628년에 그의 나이 22세인 젊을 때 그린 그림입니다. 그리고 1648년 또 다시 엠마오의 만찬을 그립니다. 이 그림에는 예수님 얼굴이 정면으로 나와 있는데 이 그림은 조금 독특합니다. 렘브란트의 이 그림에는 몇 사람이 나옵니까? 세 사람입니까, 네 사람입니까? 얼핏보면 세 사람인데 자세히 보면 네 사람이 나옵니다.


Rembrandt, Pilgrims at Emmaus - Musee Jacquemart Andre, Paris


그림을 밝게 한 것을 보면 예수님 앞에 무릅을 꿇은 또 다른 제자가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누가복음 24장 30~31절)


아주 재미 있는 표현이죠 그들이 눈이 밝아져서 알아보더니 보이지 않더라. 보이는데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있는데 붙잡지 못하는 것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갖고 있는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그림의 네 사람 중 얼굴이 나오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인데 유일하게 밝게 얼굴모습 전체가 나옵니다. 그도 제자입니다. 이는 아마도 글로바(Cleopas;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그 밑에 끝까지 남아있던 부인들 중 하나였던 마리아의 남편)일 것이라 추정 됩니다. 여기서 손을 보면 왼손은 자기를 보호하듯이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갑자기 놀라운 사건 속에서 "이게 뭐지?" 하는 의심과 자기를 보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른손을 보면 열려져 있습니다. "야!" 하고 놀라는 표정이 손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글로바라는 사람의 얼굴 표정은 두 가지가 다 있는것 같습니다. 하나는 의심의 눈 또 하나는 놀람의 눈. "아! 이게 뭐지? 이게 뭐야?" 하는 놀람과 의심이 함께 들어간 표정입니다.
두 번째 거룩한 삶에 우리가 참여하는 비결은 의심 속에서 놀람을 경험할 때 거룩한 삶에 참여하게 되는 소중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매일 매일 놀라 본 일이 있습니까?
언제 놀라 보셨습니까?
사실 "나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한번도 놀라 본 일이 없다." 하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이란 놀람이거든요. 신앙이란 놀람의 경험이거든요. 아브라함도 놀랬고, 모세도 놀랬고, 요셉도 놀랬고, 베드로도, 바울도 놀랬습니다. 신앙생활의 놀람이란 위에서부터 오는 충격에서, 새로움에 의해서 놀랬을 때 그는 그의 일생을 놀람 속에 집어 넣고 평생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놀람은 새로움이라 할 수 있고 인간과 격리된 영원성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인간은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하는 이것을 어떤 의미에서 생명의 자리, 부활의 자리라고 하는 또 다른, 인간이 평면적인 눈으로 깨닫지 못하는 초월적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을 때,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 놀람. 그 놀람을 여기서 보면서 글로바라는 제자의 모습을 보면, 아! 이게 거룩에 참여하는 길인데...


여기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이것은 렘브란트의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보여 집니다. 여기 보시면 뒤에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강렬하게 되어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특징은 그것이거든요. 특별히 이 그림은 색채감이 많지않고 단조롭습니다. 그런데 명암 구도가 강합니다. 밝은 데에 초점으로 확- 비춰주고 그 다음에 강조하지 않는 것은 어둠색으로 깔아 놓는데, 여기 보면 예수님으로 부터 나오는 빛이 아주 강렬하게 드러나게 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마치 그림자처럼, 실루엣처럼 나타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 실루엣조차도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다고 합니다. 이 흔들리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강렬하게 들어난 빛과 영광의 예수님인 동시에 감추어지고 사라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타남과 감추임, 들어남과 숨겨짐 이라는 변증법적 관계, 빛과 어둠의 변증법적 관계가 잘 들어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글로바 위의 봇짐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위의 밝게한 그림을 보면 밑에 꿀어앉은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제자입니다. "맞습니다. 당신은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군요." 라고 하며 전적으로 순종하고 경배하는 모습입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이것이. 의심하고 놀라는 자는 환하게 보여주고 오히려 순종하는 자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교회도 보면 정말 순종하고 헌신하는 분들은 오히려 감추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말을 심하게 하는 이런 사람이 들어나 보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빛이 있는데 한 여인에게 나타난 빛입니다. 아마 이 주막의 여주인인 듯한데 무언가 이리저리 찿는 모습입니다. 거기에도 약간의 빛이 있습니다. 뭔가 세상의 빛을 찾아서 움직이고 있는 듯한데 진짜 빛은 찾아보지 못하고 그래서 등을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을 찾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을 통해서 양자를, 예수님을 통한 강렬한 빛과 세상에서 보여지는 어둠의 빛을 대조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렘브란트는 그런점에서 섬세하면서도 빛과 어둠의 모습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두 번째 거룩함에 참여하는 비결은 바로 의심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하심, 영언에 대한 임재, 영광에 대한 임재를 통해서 내가 깜짝 놀라는 놀람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바로 거룩함에 참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고흐, 첫 걸음


세 번째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1890년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것입니다. 고흐는 후기 인상주의 학파로서 폴 고갱과 같은 시대의 인물입니다. 이 그림은 유채화로 자기가 독자적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을 모사한 것입니다.


Vincent van Gogh, First Steps (after Millet) oil on canvas, 72.4 x 91.2 cm,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출처: en.wikipedia>


고흐는 선배 화가 중에서 밀레를 참으로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밀레를 존경했습니다. 어느날 밀레의 작품을 보던 중 밀레의 "첫 걸음"을 보고는 너무 좋아 사본을 달라고하여 받게 되었는데 이 두 그림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밀레의 그림은 파스텔로 종이에 그린 것입니다. 색감이 부드럽고 밀레의 전형적 목가적인 따뜻한 모습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두 팔을 벌리고 얘야 이리오너라! 하고 엄마는 양팔을 붙잡고 아버지에게 가도록 열어주고 있습니다. 아이는 아빠! 하고 나오려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본래 고흐의 동생이 아기를 낳게되어 태어난 그의 조카에게 선물하려고 밀레의 그림을 보고 유화로 다시 그렸습니다. 그림의 따뜻함은 밀레의 것이 더 있고 고흐의 것은 밝고 화사합니다.


Jean-Francois Millet, First Steps1858, Pastel(or crayon) on paper. Lauren Rogers Museum of Art


이 그림은 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 소개했습니다. 제가 소망교회 담임목사로 오게 됐을 때 이 그림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그림의 이름은 The First Steps(첫 걸음) 입니다.
"당신이 이 그림의 아이가 첫 걸음을 하는것 처럼 그렇게 목회를 시작하라."
이 그림에서 첫 걸음을 떼려는 아기가 저라면 손을 벌리고 있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아기를 붙잡고 있는 이는 예수님일수도 또는 성령님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시작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First Steps를 걸어가라."
그래서 이 그림이 저에게는 소중한 그림입니다.


그러든 어느날 이 그림을 한참 보다보니까 내가 그림의 어머니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내게로 오라. 내 역할은 도대체 무었일까?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에게로 보내드리는 것.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가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이 부릅니다. 하나님을 아빠하고 부르며 나가십시오. 그 역할이 제 역할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본문을 말씀 드립니다.
왜 이것이 거룩함인가?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것이 거룩함의 기본입니다.
여기 이 두 그림이 다 얼마나 따스하고 멋져 보입니까? 그리고 아주 풍요로운 분위기가 다가옵니다.
여러분, 거룩함이란 뭐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할줄 알고 사랑을 받을줄 아는 것 그 것이 거룩함입니다. 여기서 우리 성경 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6장 36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
첫 번째.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 의식을 갖는 것.
두 번째. 렘브란트의 그림을 통해서는 내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놀람을 경험하는것.
세 번째. 고흐의 그림을 통해서는 사랑하고 사랑 받을줄 아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삶의 초청입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따라
거룩함을 열망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글 김지철 목사

 

by  seolee

 

이 포스트를...

처음페이지  이전페이지  1  2  다음페이지  마지막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