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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날들을 돌아다 보니 주님 은혜 아닌 것이 없고, 내가 어디에 있던지 주님도 함께 계셨던 것을 알 수 있었음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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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라파(중보기도의 힘) 댓글[0]
신앙간증 (2010-08-31 오후 10:04:29) http://blog.somang.net/joyslee/6089
 
 여호와 라파(중보기도의 힘)

 

우리 가정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두 아들을 주셨는데 큰 아들은 하나님의 종(목사)이 되고 둘째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결혼을 하였습니다.

  큰 아들은 전도사 시절부터 지금  소속되어 있는 서울교회에서 사역을 하였는데 반포에서 개척교회를 하시다가 지금의 서울교회를 신축하신 목사님께서 신축한 교회에서의 첫 결혼식을 우리 아들을 시키시려고  우리 내외를 불러 의향을  물으시기에 아직 일이년 후에나 시키려고 한다고 말씀드리니 사귀는 아가씨도 있고, 목회자가 요란하게 준비 할 필요도 없으니 한 달 내로 날을 정하여 결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축한 교회에서 결혼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도 우리 아들을 신축교회에서의 첫 결혼식을 시키시겠다는 이종윤 목사님의 강권적(?)인 권유로 2001년 3월 31일에 새로 지은 교회에서의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둘째는 침례교회 목사님의 사위가 되었는데 자기 형이 결혼한 이야기를 드렸더니 마침 교회가 너무 오래되고 협소하여 개축을 하고 있던 중이라서 교회를 다시 짓고서 첫 결혼식을 하자고 하여 둘째도 2003년 2월 22일에 새로 지은 예배당에서 첫 번째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아들이 모두 신축한 교회에서의 첫 결혼식을 하는 복을 우리 가정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정년퇴직을 한 우리 부부는 두 아들 집을 오가며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면서 노년(?)을 보내며 이런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주님 앞에 가려는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2005년 5월 5일에 미국에 있는 둘째가 먼저 결혼한 형보다 먼저 손녀를 출산하여서 8월에 가려고 항공권을 예약하고 준비를 하고 있던 중 7월 어느 날 감기 기운이 있어서 역삼동에 있는 개인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은 결과는  쓸개에 돌이 가득 차 있고, 콩밭과 간에 염증이 심하고, 취장이 깨끗하지 못하고, 당뇨도 있다고 하면서 당장 큰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술을 받게 되면 미국 가기도 어렵고 당뇨가 있으면 수술 받는 것이 어렵다는 주위의 말을 듣고 그냥 통원치료를 받겠다고 버텨 보았는데 날이 갈수록 몸 상태가 나빠지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춥고 더운 것이 번갈아 오는데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오한이 나면 한 여름인 7월인데도 오리털 잠바를 입고 더운 물에 발을 담그고 이불을 둘러쓰고 있어도 아래윗니가 딱딱 소리가 나도록 마주 치면서 덜덜덜 떨려왔고, 열이 나면 체온 이 40도 가까이 올라가는데 온 몸에서 땀이 나면 온 땀구멍이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는 것같이 수건으로 닦으면 뒤따라서 주르르 흘러 내려 작은 수건으로는 감당을 못해 커다란 목욕수건으로 온 몸을 감고  흐르는 땀으로 축축이 젖으면 다시 다른 수건으로 바꾸는 등 "땀이 비 오듯 흐른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일을 하루에 한 두 번씩 겪고 나면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입맛이 없어 밥도 먹히지를 않으니 몸이 하루에 1Kg 씩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20여 일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ㅡ 양의도 찾았고 유명하다는 한의사도 찾아서 ㅡ 치료를 하려 하였으나 아무런 차도가 없이 70Kg이던 몸이 52Kg으로 줄었습니다. 미라(mummy)같았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수술 받기로 결정을 하고 보훈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에게  개인병원에서 발부한 진료의뢰서를 보였더니 그 의사가 제 얼굴 한번 처다 보고 의뢰서 한번 보고, 제 얼굴 한번 처다 보고 의뢰서 한번 보고 하기를 여러 번 하더니 고개를 흔들면서 “병원에 병실이 없어 입원할 수 없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십시오.” 하고 의뢰서를 돌려주면서 진찰료까지 환불받아 가라고 하였습니다.

  진단서에 적힌 병명대로 수술을 한다면 허약해진 체력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도 마음은 한없이 담담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여러 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가 있었음에도 제대로 감사하며 살아오지 못한 지난날을 돌이켜 보는데 문득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부자의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 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누가복음 12:17-21)

 

  정년퇴직을 하고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는 저로서는 큰 걱정이 없었습니다.

두 아들은 장가를 들어 제 밥벌이는 하고 있어서 이제는 두 아들집을 오가며 귀여운 손자 손녀를 보면서 노년(?)을 지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계획할 지라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란 말씀처럼 이러한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김권사에게 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더니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기도원에 올라갑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다 고 하였다면 하나님에게 조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겠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인데, 김권사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떼를 써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김권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 떼를 써서 하나님 아버지를 이긴(?) 경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지금 주의 종(목사)이 되어 있는 장남은 출생 때부터 “영양공급기능마비”라는 특이한 체질로 태어났습니다.  결혼한지 3년 만에  그렇게 기다리던 아이가 약하디 약하게 태어나서 엄마의 젖을 먹어도 올칵올칵 토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이런 아이가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느냐며 시험 삼아 수술을 하여보자고 하여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을 물으니 10%도 안 된다고 하는 의사 말을 듣고 아이를 업고서 교회로 달려가 강대상 앞에  엎드리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목 놓아 울면서 “아버지. 이 아이와 저를 한 몸으로 보 아 주십시오. 이 아이가 죽으면 저도 죽습니다. 아버지. 이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하고 시간만 있으면 병원에는 가지 아니하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떼를 썼더니 아이가 비실비실 하면서도 백일 지나고 돌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 하였습니다.  어쨌든 병원에서 시험 삼아 수술하여 보자던 큰 아들을 하나님아버지께서 고등학교 때 대입체력검정에서 전교에서 5명 나온 특 A급에 속하도록 튼튼하게 키워 주셨고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자란 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목사님이 되겠다고 서원을 하고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 후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을 나와서 목사가 된 일입니다.

 

  제가 기도원을 올라가면서 가지고 간 것은 커다란 가방(이민 백이라고 하는)에 타월만  가득히 넣고 갔습니다. 집에서처럼 세탁기를 마음대로 쓸 수 없을 테니 땀이 나면 쓰 고 버릴 생각으로 가지고 갔는데 신기하게도 기도원에 들어서서 발로 땅을 밟는 순간 흐르던 땀이 뚝 그쳐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춥고 덥고 하던  증상이 사라져 버려서 10일 간 있는 동안에 가지고 간 타월을 한 번도  써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메여달려 기도하여야 하겠다는 생각과 행동의 시작만으로 몸을 괴롭히던 사단이 물러간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기도원에 있는 동안 많은 목사님들에게 기도를 받았습니다. 평생 그렇게 많은 기도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기도원에서는 하루에 다섯 번 오전 5시에 새벽기도회. 오전 11시에 오전예배, 오후 3시에 대예배, 오후 7시에 저녁예배, 오후 11시30분에 철야기도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중에 11시, 3시, 7시 예배는 초빙 강사님이 인도하시는데 강사로 오시는 목사님들은 전국에서 1,000 명 이상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그 기도원에 전도사로 계신 분이 제가 있던 직장에 ㅡ우리 부서가 아 닌 다른 부서에ㅡ 근무하다가 신학을 하고 기도원에서 수석전도사로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 년에 몇 번은 기도원을 올라가서 만나서 함께 이야기도 나누던 전도사였는데 미라 같은 나의 모습을 보고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방도 지정해 주고 나를 위해서 부부가 금식 기도도 하면서 전심으로 신경을 써 주었습니다.  수석전도사이고 보니  기도원의 제반 사항에 대하여 모두 관계를 하는 터라 외부에서 오시는 강사목사님들께 안수를 받게 하여 주어서 하루에 3번은 꼭 안수를 받았습니다. 

기도원에 있는 동안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를 하여 주셨고 기도원까지 찾아와서 격려도 해주었습니다.

  

  기도원에 와서 이상한 환상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를 하려고 두 손을 모으면 눈앞에 황금 동아줄이 하늘로 뻗어 올라가고 그 동아줄에 풀잎도 날아와 붙고, 단풍잎도 날아와 붙고, 은행잎도 날아와 붙고, 참새 도 날아와 붙고, 비들기도 날아와 붙고, 독수리도 날아와 붙는데 붙기만 하면 황금색으로 변하여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아줄에 붙은 것들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모두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분들의 기도가 하나님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도그룹에서, 공동체에서, 집사님들과 권사님들과 장로님들과 목사님들 이 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을 날마다 환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2005년 8월 30일에 기도원에 올라와서 10일째 되는 9월 8일 저녁에 기침이 나기 시작을 하는데 잠을 잘 수가 없도록 밤새 기침을 하였습니다. 9월 9일 아침에 당뇨  체크를 하여보니 너무 높아서 표시할 수 없다는 HIGH로 나왔습니다. 기도원 목사님과 상의를 하니 병원에 가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서 큰 아들에게 전화를 하여 차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오후에 영동세브란스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개인병원에서 진단한 병명을 말하여 주고 진찰에 참고하라고 하였으나 진찰결과는 “급성폐렴”이었습니다. 콩팥과 간의 염증도, 쓸개에 가득 차 있다던 돌도, 취장에 있다던 깨끗하지 못한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약간의 당뇨증세와 급성폐렴증세인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원에 있는 동안에 모두 낫게 하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허약한 몸이 산속의 차고 맑은 공기가 아침저녁으로 약한 몸에 들어가 급성폐렴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병원 입원은 9월 9일부터 11월 3일까지 56일간 있었는데 그중에 중환자실에서 보낸 기간이 33일이었습니다. 목에다 구멍을 뚫고 호스를 폐에다 넣어서 가래를 꺼내는 수술 을 하였는데 너무 몸이 약하여서 회복이 되지를 않아 중환자실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에 면회를 30분씩 두 번 하는데 한 사람씩 들어오도록 되어 있어서 집사람과 아 들 내외가 잠간 들어와서 보고 나가는 것이 외부 사람을 대하는 시간이었고 나머지 시간은 산소 호흡기를 끼워 놓아서 말도 못하고 침대에 누어서 지내야 했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을 동안에 간호하는 김권사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간호하는 일도 아니고, 병문안 오는 사람들을 접대하는 일도 아니고, 대기하는 장소거나 먹고 자는 일도 아니 고 담당의사의 절망적인 태도였습니다.  오후 회진이 끝나면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있는 김권사를 핸드폰으로 불러내어서  “할아버지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하고 똑같은 말을 매일 저녁 들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하고나서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데 담당의사가 하는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다시 마음이 혼란스러워 밤새도록 불안한 마음으로 지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김권사는 어느 날인가 오후 회진을 마친 담당 의사가 또 똑같은 말로 “할아버지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준비하십시오.”하고 돌아서는 의사에게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선생님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하셔야 할 치료만 최선을 다하여 주십시오. 할아버지가 죽어도 선생님께 책임을 묻지 않을  터이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수렁에 빠진 사람을 건저주지는  못해도 발로 밟는 말은 마십시오.”하였더니 그 후로는 그런 말을 하지 않더랍니다.

 

몸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허약하였습니다.  몸을 움직일 힘이 없어서 간호원이 등창 이 나지 않도록 하루에 서너 번씩 양 옆으로 눕혀주면  눕혀준 대로 몇 시간이건 꼼짝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환자실은 정사각형 모양인데 중앙에 간호사들이 있고 외각에  환자들이 벽을 따라 누워있는데 내가 있는 곳이 입구를 바라보는 모서리에 있어서 양 옆 두 줄에 있는 환자들을 모두 볼 수 있고 들고 나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볼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하얀 천으로 덥혀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보일 때는 남의 일 같지를 않았습니다. 살아 온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잘못한 일들, 죄진 일들만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살려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에서도 기도를 하려고 두 손을 모으면 기도원에서 보이던 환상이 나타나서 황금 동아줄을 타고 저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분들의 기도가 풀잎으로, 나뭇잎으로, 참새로, 비둘기로, 독수리로 변하여 하나님께로 계속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기도를 하는데 보잉747비행기가 황금 동아줄에 붙어서 황금색으 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나서 보잉747비행기가 무슨 뜻이 있는 것인지 궁금한 마음을 가지고 하루를 지났는데  면회 시간에 집사람이 들어와서 궁금증을 풀어주었습니다.

  우리 김권사가 기도실에서 기도를 하다가 면회시간이 되어 나와 보니  서울교회 부목사님들이 보여 인사를 드리니 이종윤 목사님께서 가보라는 말씀이 있으셔서 오셨다면서  중환자실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기도를 하고 가셨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님들께서  합심하여 드린 기도가 보잉747비행기가 되어서 황금 동아줄을 타고서 하나님께로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중환자실에서 33일 만에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니 이제는 정말 “살려 주셨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모든 일에 힘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다리로는 걸을 수도 없었고 앉고 서는 것 까지 김권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소망교회의 많은 공동체에서 매일처럼 찾아오셔서 기도를 하여 주셨습니다.

 

 56일 만에 퇴원을 하였는데 다리에 살이 없고 근육이 없어서 10cm도 안 되는 층계도 오를 수 가 없었습니다.  퇴원하는 날 차를 가지고 온 김흥남 집사님이 저를 가볍게 않아서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회복이 얼마나 빨리 되는지 환자인 제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하루 밤을 자고나면 어제 움직이지 못하던 손가락 발가락이 움직이고, 하루 밤을 자고나면 장딴지에 살이 오르고, 가죽만 남아 있던 몸에는 서서히 살이 오르는데 얼마나 신기했으면 길에서 만난 우리교회 권사님들이 저를 길가에 세워놓고 얼굴을 만지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일도 있었습니다.

 

50여일이 지난 2006년 첫 주일부터 찬양대도 서고 헌금위원으로도 봉사 할 수 있도록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중보기도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때부터 제가 즐겨 부르며 은혜를 받는 복음송이 “주님 말씀하시면”과 “내 마음 주께 바치옵니다.”입니다.

 

           - 주님 말씀 하시면 -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 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 내 마음 주께 바치옵니다 -

                 내 마음 주께 바치옵니다 주께서 말씀 하신다

                 내게로 오라 오직 내게로 그 말씀 따라서

                 이 마음 주께 드리고 이 몸도 드리옵니다

                 내 마음 주께 바치옵니다 오 나의 주님이시여

 

                 내 맘에 성령 임하옵소서 시험을 모두 이기게

                 주님이 계실 성전 삼으사 정결케 하소서

                 주님을 힘써 섬기고 더 사랑하게 하소서

                 내 마음 주께 바치옵니다 오 나의 주님이시여

 

                 내 맘에 친구 주여 오소서 시험을 모두 이기게

                 죽음의 순간 내게 닥칠 때 승리를 주소서

                 주님의 품에 안기어 영원한 안식 얻도록

                 내 마음 주께 바치옵니다 오 나의 주님이시여

 

할렐루야!!

이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

지금도 하나님께서 저를 만지시고 계시는 것을 매일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미국에서 온 손녀와 병상에서의 첫 대면


                                손녀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2년뒤 미국에 가서 2년5개월된 손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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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 댓글[0]
신앙간증 (2006-09-13 오후 1:14:32) http://blog.somang.net/joyslee/2641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

  
   대학 1년을 마치고 몸이 아파서 휴학을 했다.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먹으면 속이 거북스러워서 토해내곤 했다.  좋다는 약은 다 먹어 보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병명은 샘창자가 막혀버린 유문부협착증이란다.
   1961년 7월 12일 수요일 오후. 나는 원주 기독병원  수술대위에 누워 있었다.  머리맡에는 마취사 갈신자 선생님이 서 계셨고 집도하시는 분은 김영우 외과과장님이셨으며 여러 명의 보조하시는 분들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맡에 서 계시던  갈신자 선생님이  “함께 기도합시다.  하시는 소리를 듣고 눈을 감았다.
순간 21년간 살아온 짧은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흘러지나 갔다.  6.25전쟁 때 괴뢰군에게 총살당하신 아버지. 아들 3형제를 키우시기에 그렇게도 많은 고생을 하신 어머니. 그리고 지난 2년간 몸이 아파서 고생할 때에 도와주시던 고마우신 분들의 모습이 차례로 지나가고 친구들의 모습도 지나갔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도를 마치는 “아멘”소리에 눈을 떴다. “학생 기분이 어때 ?” 하고 물으시는 말씀에 그냥 힘없는 미소를 보냈다.  숫자를 소리 내어 세라는 말에 “하나, 둘, 셋 넷, 다섯....... ” 하고 숫자를 세다가 혼수상태로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손자들이 장난이 심하고 말을 잘 듣지 않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놈 배(腹)짼다”라고 엄포를 놓으신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어른들의 말도 안 듣고 잘못을 많이 하였기에 배를 째고 배속의 창자까지 잘라내야 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나?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홀로되신 어머니께서 우리 삼 형제를 키우시느라 갖은 고생을 다 하셨다.  농촌 마을을 다시시며 도붓장수를 하시어 우리를 키우셨다. 초등학교 4.5.6학년 시절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까운 산이나 들에 나가 땔나무를 한 짐 해다 놓고는 지게를 지고 어머니 마중을 나갔다.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멀리 머리에 물건을 이고 오시는 어머니 모습이 보였다.  무거워서 비틀거리시는 것 같은 날은 장사가 잘된 날이고 가쁜 가쁜 이 걸어오시면 장사가 시원치 않은 날이었다.  지게에 어머니 짐을 받아지고 하루를 지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집으로 오는 때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 없이 자라서 기가 죽을 가봐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은 다 해주시던 어머니였다.  없는 중에도 옷장 모서리에 지금 돈으로 몇 천 원씩 놓아두시고는 필요하면 가져다 쓰라고 하셨다.  그 돈의 대부분을 내가 써버렸다.  중학교 3학년 때에 사범학교를 나오신 형님이 결혼을 했고  장사를 하지 말고 집에 계시라는 형님의 간청에도  어머니께서는 할 수 있을 때까지 집안을 도우시겠다고 도붓장사를 계속 하셨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철이 들어 어머니를 돕겠다고 신문배달도 하고 가정교사도 하면서 공부를 했다.  대학에 와서도 가정교사를 계속했고 가정교사 자리가 없을 때는 친구들 하숙방을 찾았고 학교 강의실이나 홍릉 뒷산에서 밤하늘 별들을 쳐다보며 잠들기도 여러 번이었다.  대학생 봉사회에서 파는 4개들이 빵을 한 봉지를 사서  10시쯤 2개를 먹고 4시쯤 나머지를 먹으며 하루를 지냈다. 이러다 보니 건강을 잃게 된 것 같았다.  몸이 마르기 시작했고  음식을 먹으면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모두 토해버리기만 해서 1학년을 마친 후  휴학을 하고 고향에 돌아오니 교회의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하시며 좋은 약이 있으면 시다가도 주시고  좋은 의원이 있으면  먼 길도 동행해 주시곤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경과가 좋아지질 안았다. 결국 마지막 방법으로 수술을 받기로 하고  원주 기독병원을 찾은 것이었다.
   그때 기독병원 원장이 문창모 장로님이셨고 충주제일교회 손피득 목사님과 동향 분이셨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궂은 날씨에 어머니와 함께 목사님을 모시고 병원에 도착하여 원장님을 뵙고 사정을 이야기 하니 김영우 외과과장을 불러서 우리가 가지고 간 X-RAY 사진을 보여 주니  이런 상태로 어떻게 살았느냐고 하시며 당장 수술을 하자고 하셨다.  다음날부터 김영우 과장님이 하기휴가를 떠나시기 때문에 당일로 수술하기로 결정을 하고 목사님은 수요 기도회를 인도하시려고 충주로 가셨고 우리는 입원실을 배정 받고 수술준비를 위해 위세척도 하고 간단한 검사를 하였다.     
서약서라고 하는 것에 도장을 찍으라고 하여 읽어보니 수술하다 잘못되어도 병원에는 책임이 없다고 하는 내용이어서 어머니께서 보실가봐 얼른 도장을 찍어서 보냈다.  어떻게 아셨는지 지금은 돌아가신 임영규 전도사님께서 병원에 오셔서 어머니를 위로해 주셨다. 
   위세척을 하기 위하여 고무호스를 코로 해서 넣는데 잘못해서 기도(氣道)로 들어갔다.  간호원이 아플 거라고 해서 참고 견디며 고무줄을 삼켰는데  주사기로 물을 넣으려고 하니 고무줄에서 바람이 나오는 바람에 식도(食道)로 들어가야 할 고무줄이 기도(氣道)로 들어간 줄 알고 다시 뽑아서 식도로 넣었다. 잘못해서 주사기로 물을 넣었으면 죽었다고 했다. 몸무게를
측정하니 45kg이었다.  키가 175cm인데 45kg이니 가죽만 남아있는 꼴이라 수술준비를 하는 간호원 이 측은하게 여기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용기를 주시려고 웃으시는 어머님의 손을 꼭 쥐어보고는 수술실로 들어간 것이었다.

   얼마 만인가  잠에서 깨어나듯이 눈을 떴다. 
6개월 이상 고통에 시달려 온 나의 몸이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구름 위에 떠있는 느낌이 이럴까? 온몸을 물 속에 푹 담그고 있다고 해도 그런 기분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어디 한군데도 아픈 곳이 없고 결리는데도 없이 말 그대로 평안 바로 그것이었다.
   첫 생각이 “살려주셨구나.” 였다.   살았다가 아닌 전능하신 분이 베풀어주신 은혜로 느껴지면서 감사의 눈물이 주루루 양 볼을 적셨다.   그런데 정말 모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단다.  집도(執刀)하신 김영우 과장님께서 평상시에는 수술을 마친 후에 환자가 깨어나면 어떻게 어떻게 뒤처리를 하라는 지시를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깨어나면 즉시 연락하라고 하고 퇴근을 하셨다고 했고 수술에 참여한 분들도 너무 약해서 가망이 없을 것 같다고 하였단다.  보통 4시간이면 마취에서 깨어나야 할 환자가 24시간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으니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26시간 만에 아무 소리도 없이 빙그레 웃으며 눈을 떴으니 병상을 지키던 간호원이 환성을 올렸고 아들 하나 잃은 줄 알았던 어머니께서 두 손을 모으시며 눈을 감으시는 모습도 보였다.  복부에 수술 자국이 10cm가 넘었고 지네 다리처럼 10군데를 봉합한 곳이 기침을 할 때마다 땅기고 아팠지만  이 고통만 지나면 된다는 생각에 아픈 줄을 몰랐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고  찬송가  535장을 하루 종일 흥얼거렸다.
“어두운 후에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그런데 수술준비를 할 때에 고무관이 기도(氣道)로 들어간 연유로 기도(氣道)가 확장되어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말을 하려면 헛김만 세어 나오고 소리는 나오지를 않았다.  얼마나 말로 죄를 많이 저질렀으면 하나님께서 말도 못하도록 만들어 놓으셨을 가?  이렇게 된 것도 감사했다.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모두가 새롭게 보였다. 그전에는 귀찮던 것들이 이제는 모두 아름답게 보였다.  나의 의지로 병을 이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다시 아플 수도 없고  악화될 수도 없다는 마음이 가득 차서 마냥 기쁘기만 하였다.   의사나 간호원들이 놀랄 만큼 회복이 빨랐다.  같은 병으로 수술한 환자가 1개월 만에 퇴원을 했는데 재발되어 다시 입원을 했다는 이야기를 간호원이 하면서 그 환자는 건강도 아주 좋았다고 했다. 회복이 얼마나 빨랐던지  15일이 되니 병원에서 퇴원해도 좋다는 통보가 왔다.  그런데 간호원들이 퇴원을 못하게 권유를 했다.  이유는 집에 가면 음식 조절을 하지 못해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15일을 더 있다가 퇴원을 하였는데 체중이 58kg이나 되었다.

  하나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려주신 이유가 나를 어여삐 여기신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 있으셨다.  수술 후 며칠 뒤에 충주 교회에서 문병을 오셨다. 목사님께서는 오시지 못하고 어머니 친구 분들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었다.
  목사님께서 나를 병원에 데리고 오신 날이 수요일 오전이었고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문창모 원장님과 말씀을 마치시고 수요기도회를 인도하시기 위하여 목사님께서 충주 가는 버스를 타시러 버스정류장으로 가시는데 정류장 50m앞까지 왔을 때에 갑자기 소나기가 세차게 내려서 키가 1m 80cm가 넘으시는 목사님이 작은 우산으로는 비를 피할 수가 없어 길가에 있는 서점에서 소나기를 피하고 나서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앞차가 떠나버리는 것이 보여서 아쉬운 마음으로 1시간 가까이 기다려 다음 버스를 타시고 출발 하셨는데  충주를 절반쯤 간 지점에서 앞차가 빗길에 미끌어져 전복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 저녁 기도회를 인도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앞차를 못 타게 막아주신 것을 간증하시고 병원에 있는 나를 위해서 300명 교인이 합심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 하였고,  원주제일감리교회에 계시던 임영규 전도사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시고, 담임목사님이신 김흠광목사님께서도 얼굴도 모르는 나를 전도사님 말만 들으시고 새벽제단에서 기도를 해 주셨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주의 종과 성도님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살려주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은혜가 될 것으로 아시고 데려가셨던 영혼을 26시간 만에 되돌려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나의 일생은 21살로 끝을 맺었고 지금부터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의 종과 성도님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덤으로 주신 것이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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