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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히브리어와 한글의 감칠맛 4) 댓글[0]
히브리어와 한글 (2009-12-22 오전 9:16:31) http://blog.somang.net/bhkim79/5523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시편 125:2은 우리들 사는 곳을 산이 에워싸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듯이 여호와도 우리를 에워싸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로부터 도움이 옴을 찬양한다.
 
히브리어와 한글을 좌우로 거울비추듯 나누어 새겨보면 다음과 같은 pararell 번역이 된다.
 ורושלם הרים סביב לה
그를 빙둘러 산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듯(두르듯이)
 ויהוה סביב לעמו מעתת ועד-עולם
영원-까지 지금부터 백성을 빙둘러 여호와께서도 에워싸신다 (두르신다)
 
둘러싼다 두른다, 에워싼다는 우리말은 참 감칠 맛이 날 뿐 아니라, 서울 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산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곳이나 이곳 중앙아시아 텐산(天山)산맥의 눈덮힌 연봉이 밥상처럼 와 닿는 곳에서는 예루살렘 못지 않게 참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는
이러한 마음에서 절로 나온 찬송이리라.
 
시편 121편에서 나온 찬송이다.
 
히브리어와 한글을 좌우 거울로 비추어 나눠 본 parallel 번역은 다음과 같다. (어디서와 올까만 자리 바뀜 ∿ 을 하였다)
 אשא עיני אל ההרים מאין יבא עזרי
나의도움 어디서∿올까 산을 향하여 내 눈을 들리라
 עזרי מעם יהוה עשה שמים וארץ
땅과 하늘을 만드신 여호와로부터 나의도움(이 온다)
 
                                                              200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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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파견 선언문 (히브리어와 한글의 감칠맛 3) 댓글[0]
히브리어와 한글 (2009-12-22 오전 1:11:31) http://blog.somang.net/bhkim79/5521
예수님의 mission statement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시고 성령이 충만하여 갈릴리로 와서 나자렛 고향의 회당(시나고그)에서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이 적힌 양피지의 성경말씀을 펴서 읽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파견 선언문 (mission statement) 을 읽으신 셈이다.
 
이사야서에 적힌 히브리어 원문과 누가복음 4:18-19의 헬라어를 대조해보면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를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사야 서 61:1-2의 히브리어에 맞추어 원어 분해에 가까운 한글 새김은 다음과 같다.
 רוח אדני עלי יען משח יהוה אתי
내게 여호와가 기름부었으니 내게 여호와 내주의 영혼이라
 לבשר ענוים שלחבי
그가 나를 보내셨으니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לחבש לנשברי-לב
마음이 부셔진 이를 감싸라고
לקרא לשבוים דרור ולאשרים פקח-קוח
놓임을 갇힌 이에게 그리고 자유를 붙잡힌 이에게 외치라고
 לקרא שנת רצון ליתוה ויום דקם
되갚음 날을 여호와 은혜의 해를 외치라고
 לנחם כל-אבלים 우는 자 모두를 달래라고.
 
우리말로 새겨보면 히브리어를 거울로 거꾸로 좌우를 바꾼 어순 그대로에서 크게 어긋나지않고 원어의 뜻과 비슷한 감칠 맛 나는 parallel 번역이 된다.
 
누가복음 4:18-19에는 이사야서의 히브리 어가 헬라어로 새겨나오는데
 
"주의 성령이 내게 (오셨으니)
복음(ευαγγελισσθαι)을 가난한 이에게 주라고 내게 기름부으시고
선포하라고 잡힌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라고 보내셨고(αποσειλαι)
눈먼 이에게 다시보게 함을 선포하라(κηρυξαι)고
주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라고" 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갇히고 붙잡힌 이가 눌린 자라고 파악했고, 눈 먼 이에게 다시(ana-) 보게하는 것이 미션에 추가된 것으로 누가가 쓴 것이 눈에 띤다. 누가는 의사였고 아마도 예수님이 하신 일중에 소경의 눈에 흙을 발라 다시 보이게 한 기적이 아마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신약에는 구약의 내용이 삼투막처럼 조금씩은 다르게 흡수되었고, 그런 차이를 보인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첫 귀절은 가난한 자에 복이 있나니 땅이 그의 것이요라고 시작한다. 아마도 마음이 욕심으로 걱정으로 정욕으로 가득차지 않은 가난한 심령에 복음이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배고픈 자가 음식을 주신다는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복음이 잘 흡수되어 그런 사람이 복을 받도록 하시겠다는 것을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과 이 예수님의 mission statement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2009년 대강절 4째 주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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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 통하는 선진국 통하지 않는 후진국 댓글[0]
밖에서 본 우리나라 (2009-12-20 오후 12:13:06) http://blog.somang.net/bhkim79/5519
상식이 통하는 선진국 통하지 않는 후진국
 
오랜만에 종로 1가에 친구들을 만나러 갔는데 시내버스 환승 연결이 잘되어 약속시간보다 20여분 일찍 왔는데 약속장소 입구에 헌혈부족이 심각하다며  적십자 요원이 빗속에서 헌혈을 호소하고 있었다.
 
약속 장소 바로 옆이 적십자사 헌혈센터였고 남는 시간에 헌혈을 해보려고 신청서를 다 채워 채혈실에 들어갔는데 혹시 최근에 외국에 다녀온 적이 있냐는 확인 질문이 있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미안하지만 외국에서 온 사람은 신종바이러스(H1N1) 위험 때문에 헌혈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이에 대해 전 국민 중 불과 두 자리 숫자의 신종바이러스 확진환자 밖에  없는 ‘청정’ 나라에서 왔고 오히려 한국에 수많은 확진환자와 사망자 소식에 신종바이러스 걱정을 하면서 왔다고 설명했다.
 
채혈 간호사는 그런 나라에서 여행 온 재외국민이라도 보건부의 방침이고 적십자사로서 어찌할 수가 없다면서, ‘이러니 헌혈을 할 사람이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상부부서의 획일적인 관료주의적 지침은 하부 부서의 재량을 인정하지 않는다. 언젠가 러시아에 근무할 때 하절기 거리에 물을 뿌리는 살수차가 비가 오는데도 물을 뿌리는 것을 보고, 왜 그런 것인지 물었더니 공산주의 시절에 위에서 시키는 것에 대해 하부조직은 판단이나 의견개진이 없었던 것이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헌혈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도 신종바이러스에 철저한 대처는 필요하겠지만 이런 획일적인 행정은 곰씹어 볼만 한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나라별로 상황을 파악하여 우리나라보다 못한 상황이라면 당연히 제한하여야 하겠지만, 오히려 우리가 못한 상황에서 외국이라고 획일적으로 선을 그어 대처하는 신축성이 필요할것 같다. 그렇지 못한 획일적 관료주의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여러 분야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음하는 우리나라에서 탁상공론식의 획일적인 행정지침에 현지의 목소리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를 시정해야 하는 것 아닌지 생각에 접하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면서 챙겨할 것이 무엇이며 그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자문하게도 되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경제, 정치, 사회 지표 등 여러 기준이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라면, 상식이 통하면 선진 사회와 국가이라고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이런 것은 이렇게 되었으면 한다는 것은 되어 있고, 상식적으로 이런 것은 안 되어야 한다면 안 되는 사회와 나라가 선진사회요 선진국가라고 할 수 있다.
 
후진국에서는 상식적으로 되어야 할 것은 되지 않고, 반면 되어서는 안 될 것은 되며, 이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이 길고 견강부회하는 논리가 뒤 따른다. 상식이 아닌 상식에서 동떨어진 이해관계에 따라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파적 이해일 수 도 있고 독재가의 개인적인 판단과 선호에 따른 것일 수 도 있는데 이를 정당화하려고 설명이 길어진다. 결국은 진실을 호도(糊塗)한다. 그래서 후진국에 가면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이 전개된다.
 
반면 선진국은 법령이 아무리 복잡하게 발달해도 대체로 상식에서 어긋나지 않고 쉽게 이해된다. 상식대로 하면 대체로 맞고 상식적인 판단이 올바른 판단이 된다. 후진국에서는 엄청나게 복잡한 지침이 서로 어긋난 상태로 혼재하고 이를 해석하는 관료나 하급 공무원의 부패의 원인을 제공한다.
 
그런 잣대로 한국의 사회와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를 재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와 국가의 하는 일에 후진적인 면이 많이 드러난다. 국회나 지방의회에서 의결 방맹이를 지키거나 빼앗으려고 몸싸움하는 것이나 국회 의사당이나 회의실을 점거하거나 이를 깨부시는 폭력을 휘두르는 행태는 상식에서 볼 때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우리 국회 역사를 살펴보면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고 한다. 한밤중에 의사당을 옮겨가며 날치기 통과했던 것을 막기위한 고육지책이었고 한다면 ‘아 그래서 이렇게 되었구나’ 어렵게 이해는 하게 되나, 상식에 맞지는 않는다. 외국의 언론에는 이런 상식에서 벗어난 행태는 재미있는 가십성 보도거리가 된다. 한국의 국가 체면이 구겨지고 얼굴이 화끈해진다.
 
국력이나 국격은 나무통 짜는 데 나무길이라야 같고 틈새가 없어야 물을 통의 높이 만큼 담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어느 한 쪽의 나무가 짧게 통이 짜지면 물은 그 짧은 나무 높이 만큼만 담긴다. 담겨지기 시작하는 물은 그 통에서 물이 빠져나갈 틈이 없어야만 그 수준을 유지하면서 높아질 수 있다. 새로 들어오는 물 못지않게 일단 들어온 물의 수준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에 걸쳐 꾸준히 국력을 높여왔고 국격이 높아졌다. 그러나 모든 부서 모든 분야에서 국력을 높이고 수준을 높이는 노력이 어우러져야만 노력한만큼 국력이 높아지고 국격도 뒤따른다. 이런 의미에서 헌혈을 둘러 싼 보건부의 획일적인 행정, 불합리한 지침에 만감이 교차한다.
 
현장의 목소리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어쩌면 국력을 높이는 통 짜는 노력에서 길이가 짧거나 수준이 맞지 않는 구석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 헌혈의 획일적인 지침은 이러한 면을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적십자 채혈 간호사의 한숨이 뇌리에 맴돈다.    
                                                        2009.11월 비내리는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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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귀담아 듣고 몸을 낮추고 가는 믿음 댓글[0]
묵상 및 QT (2009-12-20 오후 12:04:27) http://blog.somang.net/bhkim79/5518
말씀을 귀담아 듣고 몸을 낮추고 가는 믿음 (지구환경과 주님의 말씀)
 
사람은 말씀을 듣을 수 있는 귀와 그 말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귓전에 말이 맴돌뿐 주어 담지 못하고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메아리처럼 스러져버린다. 그러나 마음에 와 닿은 말은 우리를 낮추고 겸손케하고 그 말씀에 복종케한다.
 
우리는 살면서 인생의 오르막 내리막을 겪으면서 자신의 귀에 자신의 마음에 들리는 목소리를 듣는데 이를 담느냐 아니면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느냐, 그리고 그 말이 우리 마음에 와 닿느냐 아니면 마음을 닿고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그 말은 달라진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 말은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하고 귀에 주어담고 마음에 닿는 말은 힘을 가지고 변화시킨다.
 
좋은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 은혜를 받은 예를 우리는 백부장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아들이 죽었다고 찾아온 그에게 예수님은 아들은 살았다 가보라고 말씀하셨고, 그 백부장은 그말을 듣고 믿고 갔다. (요한복음 4:46, 49-50) 과연 그렇게 믿고 가기 쉬울까? 백부장은 그 말을 듣고 반가운 말이지만 귀를 의심하여 심부름꾼을 보내어 - 오늘날 같으면 손전화를 걸어 - 정말 그런지 확인해보고 믿던지 했을텐데, 그냥 믿고 갔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좋지 않은 말을 듣고도 그 말씀이 마음에 와닿고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을 들어준 예를 우리는 유다왕 요시아에게 자신은 아니라 거민들에게 재앙이 내릴 것이라는 말씀에 마음이 약해지고 (라카흐) 자신을 낮추고 (카나 겸손해지다) 옷을 찢고 통곡하므로, 하나님도 그의 말을 들었다(역대하 34:27)는 데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좋지 않은 일이 언젠가 닥칠 것이라는 말씀에도 설마 그런 일이 있겠는가라고 의문하고 또 당장 자신에게 내릴 재앙도 아닌데 라고 흘려버리기 쉽다. 또 그런 말에 당장 나에게 닥칠 것도 아닌데 자신의 마음이 약해지며 두려움을 가지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복종하기란 쉽지 않다.
 
당장 우리 지구에 찾아오고 있는 기후변화가 - 그 이유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지만 - 그대로 두면 당장 자신이 아니라 언젠가 지구의 거민 모두에게 닥쳐올 재앙이 될 것이라는 말에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유하게 하여 겸손해져서 이를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옷을 찢는) 일을 하기 쉽지 않은 예를 보아도 그러하다.
 
현대인들은 그가 대단한 지위나 돈을 가지지 않더라도 불과 3세기전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의 주인인 프랑스 왕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보통 우리는 쉽게 백마력을 넘는 차를 타거나 몬다. 3륜, 4륜, 6륜 마차를 탄 귀족들과 왕 보다 높은 마력으로 그 만큼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왕도 겨울에 망토를 입었다. 우리는 집에서 겨울에도 가벼운 옷만 입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쓴다. 그것도 지금 태양이 주고 있는 에너지, 물과 바람이 주고 있는 에너지가 아니라 오랜 세월 땅속에 쌓여있던 화석 에너지를 쓰면서...
 
이 지구의 어떤 생물, 세대보다 비교가 되지 않게 많은 에너지를 쓰는 우리들은 이제 그런 문명의 습관과 폐해를 반성하고 돌이키라는 말씀이 우리 귀에 맴돌고 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귀담고 마음에 와 닿는 믿음이 필요하다. 유다의 왕 그리고 이스라엘의 백부장처럼 말씀을 귀담아 듣고 믿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다의 요시아 왕처럼 거민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말을 듣고 회개하고, 백부장처럼 죽은 아들이 살아났다는 말에 듣고 가는, 그런 맑은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맑고 굳센 믿음이 우리와 지구의 거민을 살리고 축복을 주게 될 것이다.
 
                                      2009.12.15 중앙아시아 비쉬켁에서 새벽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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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와 한글의 재미있는 거울 모습 댓글[0]
히브리어와 한글 (2009-12-20 오전 11:58:09) http://blog.somang.net/bhkim79/5517
히브리어와 한글의 거울 모습
 
עזרנו בשם יהוה עשה שמים וארץ
땅과 하늘을 만드신 여호와 이름에 우리 구원(이 있다) 시편 124:8
קול קורא במדבר
사막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다) 이사야 40:3 을
히브리어와 함께 읽다가 우연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한글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히브리어에 한글 번역을 붙이면 그대로 parallel 번역이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히브리어와 한글 두 언어가 거울에 비춘 좌우가 거꾸로 된 모습으로 맞아떨어진다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울 모습의 parallel 번역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 S. 다른 거울의 예나 히브리어와 한글만이 가지는 감칠 맛을 계속 생각해보고 연구를  하신 분은 여기에 댓글을 달아 알려주시고 글을 통해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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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복음의 꿈꾸는 사람들 댓글[0]
중앙아시아 (2009-12-20 오전 11:49:54) http://blog.somang.net/bhkim79/5516
중앙아시아에서 복음의 오아시스를 꿈꾸는 사람들 중앙아시아에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처럼 ~스탄으로 끝나는 5나라가 있는데, 그중 키르기즈스탄은 키르기즈공화국(Kyrgyz Republic, 이하 키르기즈)으로 국명을 바꾸어 구분된다. 이들 국가들은 회교권 국가인데 최근 쏘련에서 독립한 후에도 러시아 정교의 입김이 가시지 않아, 이 둘 종교가 지배적인 곳이다. 본래 이곳에는 불을 숭상하는 조로아스터교(拜火敎)와 샤마니즘이 자리를 잡았으며 한때 불교의 영향도 받았지만, 751년 고려유민 고선지(高仙芝)장군이 이끌던 중국 당(唐)나라 군대가 아랍연합군에 패배한 후 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천년 이상을 아랍 권에 들어가 회교의 영향을 받았다. 19세기말 제정러시아와 20세기 초 쏘련의 지배 하에 회교의 영향이 약해졌다. 러시아 정교도 파고들었다. 그러나 천년이상 영향을 준 회교는 ‘종교는 아편’이라는 공산주의의 종교 탄압 속에도 중앙아시아인들의 영혼 가운데 살아남았고 그 사회에 내린 깊은 뿌리는 쉽게 죽지 않았다. 모스크가 파괴되었고 종교가 탄압받았지만 회교는 스러지지 않았다. 좀 이울었을 뿐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종교 환경은 고르바쵸프가 페레스트로이카 (perestroika 고쳐 짓는다는 뜻에서 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 새 목소리라는 뜻에서 개방)을 표방하면서 달라졌다. 회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선교사들은 중앙아시아까지 아우르던 광활한 쏘비에트사회주의연방(쏘聯)이 수많은 독립국가로 해체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복음의 대상지로 적(赤)크리스트가 판치던 舊쏘련지역과 회교권 중앙아시아를 눈여겨 두고 이곳에 찾아왔다. 오랫동안 종교가 탄압받았고 특히 복음의 단비가 오지 않아 사막처럼 황량해진 중앙아시아가 한국 선교사들로는 매력적인 새 복음 전파 대상지로 떠올랐다. 천년이상 회교 영향 후 70년 넘게 공산주의의 폭정에 시달린 영혼에 복음의 초록빛 희망을 주려고 왔다. 복음의 단비가 내리지 않아 사막처럼 메마른 중앙아시아를 복음으로 오아시스로 바꾸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그러나 천년 넘게 메마른 그 험한 곳을 초록으로 이루려는 노력은 쉽지 않았다. 복음화 노력에 여러 어려움이 뒤따랐다.
 
중앙아시아는 징기스칸에서 알 수 있듯이 ‘칸’이라는 절대 지배자의 종신 권력의 전통이 강한 곳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독 키르기즈만 그런 ‘칸’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했다. 2005년 튤립혁명(tulip revolution)을 통해 부정부패한 대통령을 쫒아냈다. 동유럽의 체코 (velvet revolution), 우크라이나 (orange revolution)에 이어 이른바 색깔혁명(colour revolution)을 겪었다.
 
옛 ‘칸’의 전통과 장기집권, 비민주적인 행태가 자리 잡은 중앙아시아의 나라들은 서방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외치는 서방과 연계된 기독교 선교노력에 고운 시선이 아니었다. 전제적인 국가일수록 이들 중앙아시아국가들은 종교법을 제정에 앞장섰다. 종교법을 통하여 기독교라는 신흥종교의 진입에 장벽을 쌓고 이를 높여갔다. 종교단체 등록 요건을 강화했고 선교사들을 추방했고 교회를 빼앗았다. 그런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도 일찍이 개혁과 개방을 내세운 키르기즈 만은 사막가운데 오아시스라고 할 수 있다. 종교법이 있지만 아직 복음 활동을 펴기에 그렇게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인근국가에서 복음을 펴다가 쫒겨 난 선교사들이 밀려 둘어왔다. 그렇게 키르기즈는 중앙아시아의 복음 사역의 새 중심(target)이 되었다. 한국 선교사들은 중앙아시아의 복음의 푸른 오아시스를 일구겠다고 러시아 말로 키르기즈 말로 말씀을 증거하면서 키르기즈인들에게 복음의 단비가 되고 있다. 그렇게 중앙아시아에의 복음의 꿈은 키르기즈를 중심으로 키워졌다.
 
그러던 키르기즈에도 어려움이 닥쳤다. 사막의 열사바람이 불어와 애써 이룬 오아시스를 덮치고 있는 형국이다. 인근지역으로부터 밀려드는 선교사들이 키르기즈에 발을 붙이는 것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종교법의 규제가 강화되었다 개정된 종교법은 종래 10명이면 족했던 종교단체 등록요건이 200명으로 엄청나게 늘렸다. 그것도 키르기즈 국적을 가진 성인 200명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 활동을 매우 광범위하게 규정하면서 어떠한 종교 활동도 등록된 종교단체에서만 하도록 제한했다. 또 가정의 평화를 깬다면서 타종교로의 개종(proselytism)을 금했다. 선교사들의 체류기간을 3년으로 제한했다. 이제부터는 싫던 좋던 3년이면 키르기즈를 떠나야 한다. 인근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종교법의 개정, 더러 그보다 더 앞서간 종교법 개정은 키르기즈에서 복음의 터를 일구는 선교사들에게는 큰 시련으로 닥쳐왔다. 선교사들의 비자 기간도 짧아져 보다 자주 비자를 신청하게 되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로부터 오는 하계봉사 선교활동에도 새 종교법은 장애가 되고 있다. 종교법에 규정된 종교 활동이 너무 광범위하여 자칫 이들의 선교봉사활동이 관계당국이나 관리들의 단속의 대상이 되고 그 활동이 이루어진 키르기즈 교회가 탄압받는 빌미가 되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다하고 있다. 이곳 선교사들은 주기적인 모임을 가지고 정보를 교환하고 어려움에 ‘뱀처럼 슬기롭게’ 대처하도록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고 있다. 종교법이 개정된 날부터 3년이면 어김없이 선교지를 떠나야 하는 까닭에 키르기즈 인 목사에게 그 동안 사역하여 일군 교회를 물려주는 작업도 개척교회별로 이루어지고 있다.
 
열사 바람이 불어와도 복음의 오아시스를 일구려는 뜻을 꺾지 않고 이곳 영혼과 삶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마음에 위로가 되고 그 육신에 힘이 되는 양식이 필요하다, 주리고 목마른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날라다 준 까마귀처럼 (열왕기상 17:4-8), 그리고 구운 떡과 물 한 병으로 먹여준 천사처럼 (열왕기상 19:5-8) 이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북돋아줄 기도와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곳 텐샨(天山)산맥의 만년설 연봉이 어둠을 벗고 새벽 여명을 받기 시작할 때면 산속 나뭇가지에 홰를 틀고 밤을 지센 까마귀들이 무리지어 빛 고운 고을로 내려온다. 그 수많은 새들의 날개 짓이 마치 냇물이 흐르는 듯 스산한 소리를 내는데, 수천 마리의 무리들이 아침 하늘을 가득채운 그 모습을 보면서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 천부가 기르시나니’ (마태 6:26)라는 말씀이 문득 실감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몰아치는 열사 바람 속에서도 메마른 땅에 다시 초록을 이루기까지 묵묵히 선교의 비전을 지키는 이곳 중앙아시아의 선교사역자들에게 음식을 날라줄 까마귀가 새벽하늘을 가득채운 무리처럼 많아졌으면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로뎀나무 아래 죽음을 청하다가 천사가 떡과 물로 먹여 호렙산에 이른 엘리야의 모습,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곳에서 한 모금 물과 떡이 아쉬운 가운데 복음의 오아시스에 이르러는 이곳 선교사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QT 명상을 깨운 무리의 날개 짓의 비쉬켁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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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연주에 내 몸을 맡기라 댓글[0]
중앙아시아 (2009-12-20 오전 11:38:47) http://blog.somang.net/bhkim79/5515
하나님의 연주에 내 몸을 맡기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중앙아시아에서 비교적 작은 나라 이곳 키르기즈공화국의 수도 비쉬켁은 예전 쏘비에트사회주의연방(쏘聯) 시절에 휴양도시로 키워진 도시답게 나무가 많고 집들도 ‘다챠’ (주말 농장의 집) 같은 모양을 띤다. 쏘련의 공연예술이 발달되어 독립한지 불과 18년 밖에 되지 않은 이곳의 오페라 발레 하우스에는 겨울이면 주말 저녁 시간을 문화를 즐기며 보낼 수 있다.
 
지난주 중에는 어느 외국 개발원조 단체가 귀가 먼 아이들의 콘서트를 마련했다.
 
귀먼 아이(聾兒)들이 무슨 음악 콘서트를 할까 궁금해 가보았는데 진풍경이었다.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배경 음악에 맞추어 마치 음악에 오래 동안 율동을 연습한 아이들처럼 안무된 율동을 펼쳤다. ‘천개의 손을 가진 부처’의 율동은 약 20여명의 농아들이 겹쳐 보이는 천개의 손을 가진 부처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음악에 맞추어 연출해냈다.
 
그처럼 정교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눈을 끈 것은 약 10쌍의 남녀 농아들이 ‘오케스트라’단원과 악기가 되는 율동이었다. 10쌍의 아이들이 함께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트럼펫, 드럼 악기가 되고 연주가 되는 율동이 이어지다가, 마지막에는 각각 이들 악기와 연주가 되어 ‘오케스트라’가 되는 율동이었다. 남자아이는 연주가, 여자 아이는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트럼펫, 드럼을 연상하는 모습으로 남자아이의 악기가 된다.
 
율동은 무대 바로 밑에 손짓 지휘를 하는 율동 선생의 손짓 만 보고 따르면서 음악에 맞추어 연주하는 일사불란한 오케스트라 율동이었다. 러시아 어로 선생, 지도자를 ‘루코바텔’이라고 하는데 루카 즉 손에서 나온 단어일 것이고, 아마도 손으로 가리키고 가르치는 모습에서 이 단어가 나온 것이 아닐까 깨달아졌다.
 
감동을 준 그 농아 콘서트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에 접했다.
 
첫째, 듣지 못한다는 것이 장애이지만 그 장애는 오히려 시선 집중을 가져왔다. 아이들은 율동선생의 손짓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고 율동을 했다. 지휘자 선생의 손짓을 통해 음악을 듣고 율동하는 듯 율동이 펼쳐졌다. 세밀한 손짓의 차이에 맴돌고, 흩어지고, 모이고, 어깻짓 하고, 몸짓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그럼 우리는 누구의 어떤 손짓에 움직이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듣고 느끼지 못하는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우리가 그런 장애를 겪고 있다면 우리가 그 말씀과 사랑을 대신 듣는 것처럼 느끼는 것처럼 하여 그 장애를 극복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손짓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의 손짓이 그것일까? 우리는 그것에 주목하면서 우리가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대신 듣고 볼 수 있는 것처럼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접하게 되었다.
 
둘째, 아이들이 연주자로 악기로 바뀐 모습에서 과연 우리도 하나님의 지휘를 받아 연주하는 연주가가 되고 악기가 되어 또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내어 맡긴 것인가 아니면 다음 이야기처럼 우리 자신을 어디 다른 데에 잘못 한눈팔고 맡겨둔 상태는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접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라는 오스트리아 바이올린 연주가 겸 작곡가 (1875-1962)는 듣기 좋으면서(gemütlich)도 지속되는 비브라토(Vibrato)로 누구나 크라이슬러 음악이라고 알 수 있는 소리로 매료시킨다. 그는 바이올린 음악의 명인이며, 명장이 만든 바이올린을 가진 바이올린연주자로서도 유명하다. 그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날 바이올린 가게에서 그의 귀에 뜨이는 소리를 가진 바이올린을 발견하고 이를 팔지 말라고 가게주인에게 부탁해놓고 열심히 돈을 모았다. 세월이 지나 돈을 모아 그 가게를 찾아갔지만 정작 그가 사려던 바이올린은 팔려가고 없었다. 바이올린을 켜지도 못하는 어느 돈 많은 사람의 바이올린 콜렉션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클라이슬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돈 많은 사람을 찾아가 되팔 것을 부탁했다. 그 부자는 그가 싸들고 간 돈에 콧방귀를 끼었다. 결국 단념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던 크라이슬러는 가기 전에 딱 한번 그 악기로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켜보도록 허락해줄 것을 그 부자에게 요청했고, 그거야 못해주겠냐고 그렇게 하라고 부자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크라이슬러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온 마음을 다해 연주했다. 마음껏 연주하면서 크라이슬러 자신도 그 소리에 감동했고, 그 주인에게도 감동이 전해졌다. 마침내 연주를 마친 크라이슬러에게 그 주인은 ‘이 바이올린은 당신 것이요’라면서 크라이슬러가 건낸 돈도 뿌리치고 그에게 이 바이올린을 안겨주었다.
 
하나님은 크라이슬러와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연주가입니다. 연주가일 뿐 아니라 우리 악기를 만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마음껏 연주하도록 우리 자신을 맡긴다면 그 음악은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하나님도 기뻐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를 그 연주가, 만든 그 창조주에 내맡겨야 하는데, 우리 자신을 어디 다른 데에 맡겨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악기를 연주조차 못하거나 잘 못 연주하는 데에 잘못 맡겨둔 상태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접한다.
 
농아들은 자신을 악기의 모습으로 동료 농아가 연주하도록 했다. 몸의 악기를 맡은 농아는 선생님의 손짓에 맞추어 악기 모습의 농아의 몸 악기를 연주했다.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된 셈이다. 트럼펫이 된 아이는 연주하는 아이의 율동에 맞추어 팔다리가 움직였다. 첼로가 된 아이도 바이올린이 된 아이도 훌륭한 율동의 연주에 몸을 맡겼다. 듣지 못하는 장애 아이들의 콘서트는 그런 감동을 주었다.
 
이곳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를 내어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율동 콘서트였다.

 
                                          2009년 12월 키르기즈공화국 비쉬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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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와 한글의 감칠 맛 (2) 댓글[0]
히브리어와 한글 (2009-12-20 오전 11:34:36) http://blog.somang.net/bhkim79/5514
 히브리어와 한글의 감칠 맛 (2)
 
시편 106:6에는 다윗이 “조상때부터 빗나가다가 (חטא) 비뚤어져 죄를 짓고(עוח) 사악한 죄를 짓는다 (רשע) 죄의 3단계 점증(漸增)이 잘 구분되어 나타난다. 영어 성경도 이렇게 점증되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데 이처럼 우리말로 새기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점증의 뜻을 낸다. 죄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고, 비뚤어져 죄를 짓고, 결국 사악한 죄를 짓는다는 죄의 3차원이 시편 한 구절에 잘 나타난다.
 
야고보서 4:17에는 ‘좋은 것을 할 줄 알면서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이 죄 (ἁμαρτια)’라고 했다.

 
올바른 길을 알면서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로 들어가는 첫 단계임을 말해준다. 그렇게 잘못된 길에 일단 들어서면 - 그것도 조상 때부터 그런 잘못된 길에 들어가면 - 여기서 벗어나기 어렵고 구부러진 줄도 모른 상태에서 죄를 짓게 마련이고, 결국은 사악한 죄를 짓게된다는 뜻이다. 우리자신이 죄의 어느 단계에 있는지 살펴보고, 첫 단계에 있다면 잘못 들어간 길을 거슬러 올라가든지 아니면 방향을 틀어 방향을 맞추어 올바를 길에서 만나는 노력을 해야 하고, 둘째 단계에 들어가 있다면 굽은 것을 펴고 왜곡된 것은 바로잡아 죄를 알든 모르든 밥 먹듯이 하는 관성에서 빠져나와야 할 것이고, 마지막 단계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굽은 것은 펴고, 잘못 들어간 길은 다시 되돌아가는 회심과 회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2009.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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