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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의 목적.. 댓글[0]
명언,묵언,이야기 (2004-06-08 오후 5:50:20) http://blog.somang.net/bergk/559

만일 항해의 목적이 오직 안전이었다면, 배는 영원히 항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지하철 역에 비치되어 있는 작은 책자 속에서 우연히 읽게 된 글귀입니다.

항해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승무원의 안전, 배의 안전은 물론 항해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것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 안전이 중요한 부차적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간단한 진리이지만, 아퀴나스의 짤막한 말에는 재미있을 정도의 여운이 있습니다.

배는 이미 출항하였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그 분의 도우심을 공급받으며 끊임없이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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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가 말하는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 댓글[0]
명언,묵언,이야기 (2004-06-07 오후 12:00:55) http://blog.somang.net/bergk/542

서지정보

제목 : 네가지 사랑

원제 : The Four Love

저자 : C.S.루이스

출간 : 생명의말씀사

 2000년 2월, 6000원

 

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을 읽고 있는 중이다. 이제 겨우 2장에 들어갔지만, 서론에서부터 이미 그만의 놀라운 비유와 고찰이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그 중 하나에 대해 글을 남겨야 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이 곳으로 향했다....



사실 네 가지 사랑은 번역 상의 문제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전에 읽었던 루이스의 글들과는 "서론" 부분이 매우 다르다. 이전에 읽었던 루이스의 글들은 대부분 "서론"이 아니라 "머리말"이 있었고, 그런 "머리말"들의 특징은 신변 잡기 등의 간단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논리적인 유머들로 가득한 짧고 개인적인 글이라는 점이었다. 이번의 "서론"은 그러한 루이스 특유의 주위의 간단한 소재를 비틀어 논리적인 충격을 주는 형식과는 전혀 다르게, 상당히 실제적인 주제들을 미리 다루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전의 "머리말"들은 기실 안 읽어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던 반면, 이번의 "서론"은 반드시 읽어야하는 전제와도 같은 부분이다.



그는 서론에서 사랑을 두 가지 요소로 나누고 있다. 즉,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그것이다. 그는 이 책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부터 그러한 구분을 지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주는 사랑이 더 하나님의 사랑에 가까운 것이며 받는 사랑은 덜 가까운 것으로서, 자연스럽게 주는 사랑이 더 추구되고 받는 사랑은 상대적으로 지양되어야 할 것이라고 쓰는 것이 처음의 의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순수하게 어머니의 젖을 찾는 아이의 모습 속에서, 받는 사랑이 지양되어야 할 타당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깨닫게 되었다. 받는 사랑은 주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그렇다면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조화되는 것일까? 특히나 기독교와는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하게도 주는 사랑이 아닌가?



루이스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는 사랑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과 매우 가깝다. 어떤 형태로 가까운가 하면, "닮음"의 형태로 매우 가깝다. 즉, 주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형태적으로 "닮아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비록 타락하여 그 형상이 훼손되었다 하더라도 주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받는 사랑은 어떤가? 루이스에 따르면 받는 사랑도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 그러나 앞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형태의 의미가 아니라 "접근"의 의미로 매우 가깝다. 즉, 받는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받는 사랑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하는 사랑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루이스는, 언제나 그렇듯이, 탁월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를 테면 우리가 어떤 절벽 꼭대기에 올라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 절벽 아래 쪽으로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 우리 집이 있다. 현재 상태에서 우리는 집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러나 그 절벽을 통과하여 집으로 갈 수는 없다. 우리가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실제 거리 상으로는 좀 더 멀어진다 하더라도 일단 그 절벽을 내려와 길을 따라 그 마을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루이스는 주는 사랑 - 닮은 사랑이 바로 절벽 위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받는 사랑 - 접근하는 사랑이 바로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길을 따라 마을로 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사랑은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주는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그 사랑은 신이 되며, 바로 동시에 악마가 된다. 그것은 마치 절벽에 눌러 앉아 있는 것과 같아서 우리는 영원히 집으로 갈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비록 더 부족해 보이고, 더 비천해 보이며, 덜 고상해 보이고, 덜 아름답게 보인다 하더라도, 받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욱 다가갈 수 있으며 곧 주는 사랑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002년 7월 9일 프리챌 개인 커뮤니티에 올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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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들에게 꿈을.. 댓글[0]
명언,묵언,이야기 (2004-06-04 오후 12:43:01) http://blog.somang.net/bergk/52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꿈을 품은 자를 변화시키며..

꿈을 듣는 자를 감동시키며..

꿈을 보는 자를 기쁘게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꿈을..

 

이 블로그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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