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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소나무, 2002)에서 히브리어 성서와 푸시킨과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철학적 관심을 형성했다는 레비나스를 예로 들어 “성서와 더불어 문학 작품은 철학적 사유로 이끄는 매개자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 본인의 철학적 관심을 형성한 책, 또는 더 넓게 교수님께 깊은 영향을 끼친 책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내게 최초로 지적 충격을 준 것은 함석헌 선생의 책인 것 같습니다. (강 교수는 함석헌의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라는
회고록에서 본인이 중학교 2학년 때 받은 지적 충격과 영향(빠른 걸음걸이 습관), 그리고 함석헌의 사상에 대한 견해를 길게 설명했다.)
그렇지만 나에게 더 깊은 영향을 끼친 책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읽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입니다.
이 책이 ‘나에 대한 발견’을 하게 했습니다.
「고백록」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면서 동시에 나의 죄에 대한 회개요 고백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감사라고 하는 것은 ‘나의 죄’ 인식으로부터,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그 죄로부터의 해방, 구속, 그리고 그것에 대한 감사를 통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감사로 인해 찬양이 가능하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나의 과거의 상태와 현재에 대한 인식과 이해로부터
감사가 나올 수가 있기 때문에, 회개와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은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깊은 인식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찬양이 가능하지 않고, 내가 정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면
여전히 나는 죄 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지요.
「고백록」을 읽으면서 ‘나 자신은 누구인가’ 하는 발견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어거스틴의 생애를 통해서, 어거스틴과 동일시해가는 과정을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고백록」은 그 뒤에도 여러 번 더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대학 시절, 유학 갔을 때,
그리고 몇 년 전에 미국 칼빈대학에서 강의할 때, 그렇게 대여섯 번 읽을 때마다 정말 새로운 책이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처음 「고백록」을 읽으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요즘 고등학생들은 「
고백록」을 얼마나 읽을까요? 오늘날의 독서, 글을 읽는 문화에는 짚어 봐야 할 것이 많아 보입니다.
우선 매체의 다양성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어떤 사상이나 정보, 지식을 전달해 줄 수 있는
매개 역할을 한 것이 오직 책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신문이었고, 라디오였습니다. 텔레비전은 아직 보편화되기 전이었지요.
주로 활자 매체에 의존해서 지식이나 정보 같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매체가 훨씬 활성화됐지요. 이제는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으로, 여러 매체를 통해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나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정보의 양이나 질도
우리가 자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해졌습니다.
문제는 ‘풍요 속의 가난’입니다. 선택 가능성이 너무나 높기 때문에 선택 자체에 대한 관심을 오히려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정보의 양이 너무나 많고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라도 가지고 싶은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가질 수 있으니까 실제로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 인간은 신체적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을 가지고 있지요.
지식이라는 것도 인터넷 화면에 펼쳐진 것을 보는 지식과 내가 직접 적어보는 지식은 다릅니다.
인터넷 화면 속의 지식은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지만, 막상 내 몸을 적시지는 못합니다.
내 마음을 푹 적시지를 못하지요. 적시는 것은 결국 내가 내 손으로 적어보고 고민해보고 생각해본 지식입니다.
인간 존재의 정신적 활동은 신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지극히 정신적인 것은 지극히 신체적인 것을 매개로 자리를 잡습니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이지만, 어떤 사상이나 정신의 크기, 정신의 풍요로움은, 신체적인 것에 뿌리를 둬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학생들이나 사람들에게 나는 스크린을 보면서 스쳐지나가듯이 확인하는 것보다는,
정말 자기의 정신에 양분이 되고 자기를 키우는 하나의 양식으로 만들려면 실제로 그것을 손으로, 연필로 적어보라,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귀로 듣고 마음에서 되씹어보고 때로는 반발하기도하고, 거기에 반론을 제기해보기도 할 때,
어떤 말, 어떤 주장이 나한테 영향을 주는 것이지, 그냥 듣고 지나가버리면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교수님이 책이나 강연을 통해 소개하신 주자 독서법이나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 聖讀 또는 영적 독서)에서도 지금 말씀하신 신체성이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중세 렉치오 디비나에서 강조한 것은 우선 읽기(렉치오, lectio)이고, 두 번째가 묵상(메디타치오, meditatio)입니다.
그런데 렉치오 디비나 전통에서는 묵상에 대한 입장이 둘로 나뉩니다. 후기에는 이것을 일종의 정신 활동(mental activity)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초기에는, 사실 이게 유대 전통인데, 신체 활동(physical activity)입니다.
‘신체적’이라는 것은 곧 성경을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하는, 그러니까 씹고 또 씹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시 1:2)라고 했는데, 유진 피터슨도 이야기하지만,
여기서 ‘묵상한다’는 말의 히브리어 동사는 ‘하가’입니다. 이 말은 ‘씹는다’는 뜻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책을 먹으라」(IVP 역간)에서 아주 인상 깊게, 개가 뼈다귀를 두고두고 씹고 또 씹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유대 전통에서 ‘신체적’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것과 분리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 전통은 몸과 영혼이 하나이니까요. 나중에 희랍 전통에서는 몸과 영혼이 다른데,
유대 전통에서는 몸으로 반복하는 그것이 곧 영혼입니다.
말씀을 씹고 중얼대면 그것이 어디로 갈까요? 머리에 박히고, 머리에 박히면 마음으로 내려가고, 마음에 새겨지고,
마음에 새겨지면 손발로, 실천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주자 독서법에서도 ‘반복’을 강조합니다. 반복하기 위해서 암송을 하는 것이지요.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논어를 읽었다’ 하면,
그것은 논어를 펼치고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하면서 한번 쭉 읽는다는 뜻이 아니고, 모두 외운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주자가 붙인 주석, 주자 집주까지 다 외워야 ‘논어를 읽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 책 한 권 다 읽으면 책거리를 했는데, 집에서 시루떡을 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지요.
그때는 책을 모두 암송했기 때문에 그만큼 애를 많이 쓴 것이지요.
그렇게 암송한 것만이 나중에 다시 농사지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되새김할 수가 있지요.
되새김할 수 있는 조건이 암송인 것입니다. 되새김하면 머리에 박히고, 머리에 박힐 뿐만 아니라 몸에 박힙니다.
몸에 박히면 실제 행동에서 드러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방식의 독서법이 주자 독서법입니다.
렉치오 디비나와 공통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자 독서법이나 렉치오 디비나의 또 다른 공통점은, 이것은 독서의 또 하나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인데,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해서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둘은 ‘자기를 형성하는 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나 자신’을 하나의 인격으로 빚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인격으로 빚어간다는 것이,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고, 내 속에 하나님 성품을 빚어나가서 그리스도의 모습,
즉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 모습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지요. 그리고 주자 독서법에서는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누구입니까? ‘성’(聖)이라는 한자를 보면, 귀 ‘이’(耳)에, 입 ‘구’(口)에, 임금 ‘왕’(王)으로 되어 있습니다.
귀가 크고 입이 있는 사람이지요. 이것을 김용옥 씨는 ‘무당’이라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것은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곧 하늘을 닮아가는 사람이지요. 그러고 보면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님 성품을 빚어가려고 하는 것과
유교 전통에서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거의 동일한 목적을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서, 곧 암송하고 되씹고 하는 것은 나의 성품을 빚어가는 것, 품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품성 형성의 독서법이 근대 교육에서는 거의, 어쩌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되살려야 합니다.
주자 독서법과 렉치오 디비나의 유사성을 반겨야 할까요, 아니면 경계해야 할까요?
둘은 독서 형식이나 방식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유교의 경서 읽기와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성독’ 렉치오 디비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 렉치오 디비나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유교 전통과 기독교 전통의 근본 차이는 바로 성령론입니다.
유교적 경서 읽기 전통에는 성령이 없습니다. 문자 속에서 활동하는 영, 문자 안에서, 문자를 통해서 활동하는 영이 없습니다.
유교 전통에서는 ‘백 번을 읽으면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고 그럽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顯).
‘뜻이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이 유교 전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반복을, 깨달을 때까지, 드러날 때까지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그렇게 끝없는 반복이 아니라,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거기서 성령 하나님께서
작용해서 그 성령 하나님께서 조명하시는, 문자에 단순히 매이지 않고 그 문자를 수단으로 해서, 문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를 깨닫게 해주시는 인격적 만남, 인격적 관계가 확실히 드러나지요.
유교 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인격적 만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통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과의 만남, 곧 ‘성인들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내용’이 중요하다면, 기독교 전통의 읽기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무엇보다도,
인격적 만남 자체, 하나님과의 만남 자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인격적 교류라는 만남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둘 사이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성에 대한 경계를 지적했는데, 렉치오 디비나나 주자의 읽기에 어떤 위험성이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자율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속에서, 나의 읽기 행위를 통해서,
자칫하면 어떤 의를 내 속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내 속에서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주신 선의 요소를 발견하고자 하는,
그래서 내 안에만 머물려고 하는 일종의 내재주의, 또는 나 자신의 자율성, 거기에 머물 소지가 있습니다.
나는 이 위험성을 교정해 준 사람이 루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루터가 신학 방법론에서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바로 기도(오라치오, oratio), 묵상(메디타치오, meditatio), 그리고 시련(텐타치오, tentatio)입니다.
오라치오는 먼저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역사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메디타치오는 말씀을 통한 묵상입니다.
그러니까, 묵상 안에 읽기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말씀이 계속 나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쥐고 있으면서도,
내 안에 있는 어떤 자족성에 머물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텐타치오, 곧 유혹과의 싸움, 영적 싸움입니다.
실제 삶에서 말씀을 갖고서 죄의 유혹에 맞서 싸워나가는 것이지요.
루터는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평탄한 여행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위험 요소가 끊임없이 다가오는 여정으로 봤습니다.
따라서, 독서라고 하는 것도 그냥 책상에서, 아니면 침대에 누워서 편하게 읽는 그런 독서가 아니라,
독서 과정에 끊임없이 어떤 개인적인 유혹이나 공동체에 대한 유혹이 들어오고 투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터가, 자칫하면 개인적 신비주의에 빠질 수 있는 가톨릭 전통의 렉치오 디비나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온
하나의 교정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렉치오 디비나에서 조금 불분명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적 독서’라고 할 때, 그 대상은 ‘성서만’입니까? 아니면….
초기에는 ‘성서만’이었습니다. 나중에 수도원 안에서 교부들의 책들, 교황의 문서, 그런 것들까지 포함이 되었습니다.
렉치오 디비나에 대한 관심이 가톨릭 전통에서도 다시 일어나면서, 렉치오 디비나의 주 대상은 역시 ‘오직 성경’이라는
제한을 이제 다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최근에 한 것이고, 중세 후기로 가면 갈수록 다른 많은 책들이 보태졌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루터는 교부들의 책에 아주 부정적 판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찾아가고 하나님과 만나고 사귀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서 오직 성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렉치오 디비나’ 곧 ‘영적 독서’만 얘기하다보면, 성경이 아닌 다른 책들은 무의미하거나 유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독서를 나누어야지요. 나의 인격을 빚어가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가는 과정에서 영적 독서를 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입니다.
그렇지만 그 외의 폭넓은 독서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C. S. 루이스의 지침이 아주 유익한 것 같습니다.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은 고전 50%, 현대 서적 50%를 읽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고전을 읽고 현대 서적을 읽는 것은 성경을 읽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교수님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입니까?
어거스틴이나 안셀무스, 루터, 칼빈을 읽고, 좀 내려오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그런 분들의 책도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책들입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어거스틴의 「고백록」이나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같은 책은 언제 봐도 아주 유익한 책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현대 저자로는, 유진 피터슨이나 필립 얀시,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같은 이들이 있지요.
이들이 쓴 책은 어떤 것을 읽어도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매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 서적뿐만 아니고 일반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반 고전과
현대 서적을 동시에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반드시 ‘거룩한’ 독서만 할 것이 아니라 ‘속된’ 독서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영적 유익을 주는 고전이나 현대 기독교 서적들이 많지만, 가끔은 아예 안 읽는 게 나을 것 같은
유해한 책들도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신앙인이 쓴 책이냐 아니면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 쓴 책이냐 하는 것이 책의 선별 기준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신앙에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불신앙을 이야기하는 책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반면교사가 되고 거울이 되어서 오히려 나 자신을 반성하고 나에게 큰 도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나 니체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에 직면할 때에 나 자신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것이 성숙한 신앙이지, 무조건 억지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은 「고백록」에서 어거스틴의 삶을, 인격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자를 통해서 인격을 만났던 것이지요. 문자를 매개로 한 것이지요. 문자 자체보다는 문자의 이면에서,
문자를 통해서 드러나는 어거스틴의 삶을 만났던 것이지요. 그 이야기 가운데 때로는 나 자신을 집어넣기도 하고,
그러면서 어거스틴이 만난 하나님이, 어거스틴의 신앙 체험과 경험이 때로는 나의 체험이 되기도 하고,
나의 경험이 되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같이 기뻐하기도 하는 과정을 거친 셈이지요.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자아를 발견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보면, 어거스틴이 회심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쓴「안토니우스의 생애」를 읽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는 마태복음 19장 21절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사막 은수자(隱修者) 안토니우스의 삶을
알게 되면서 예수를 따르는 삶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어거스틴은 어떤 음성을 듣게 됩니다.
“톨레, 레게”(tolle, lege). “집어서 읽어라.” 이 음성을 듣고서 그는 책상에 있는 책을 펼쳐 읽었는데,
바로 로마서 13장의 “이제는 깰 때라”라는 말씀(11절)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그는 비로소 모든 의심의 구름이 걷히고
확신에 차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결국 어거스틴은 ‘이야기 구조’(narrative structure) 가운데 들어갔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안토니우스의
이야기를 읽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앞으로 완전히 돌아서는 경험을 한 것처럼, 우리는 아주 우연한 상황과 우연한 계기에
읽은 한 구절을 통해서 책 속의 어떤 사람의 생애 속에 빠져 들어가고 그 사람이 경험했던 것을 내가 다시 경험하게 되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오늘날은 우리를 선하게 이끌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아니, 그런 책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무엇을 읽어라’보다 어떤 책을‘조심하라’는 말이 더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분별력을 가진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서평 전문가여야 합니다. 원래 ‘비평가’(critic)는
‘감식해 주는 사람’입니다.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 어떤 기준을 가지고 어떤 책은 좋은 책이다,
어떤 책은 나쁜 책이다, 평가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평가는 서평 전문지 또는 전문 매체에 실려야 하는데,
지금 그 역할을 우리 기독교계에서 어디서 하고 있을까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독서가 생활화되려면 교회나 어느 지역에서 그룹이 많이 형성되면 좋은 책을 가려내는 역할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 같이 소리 내서 읽기도 하고, 남에게 읽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혼자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서로 읽어주고 읽은 책을 서로 느끼고, 단순히 느끼는 것만 아니라 거기서 다룬 주제나 삶의 방식이나 가치를 함께 토론하고,
그렇게 하면서 좋은 책들과 그렇지 않은 책을 함께 가려내고, 어떤 책은 서로 추천해 주기도 하고,
어떤 책은 ‘이건 도무지 아니다’라고 배제하는 그런 평가도 하는 다양한 방식의 읽기 그룹을 교회에서 권장해 줄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존 스토트의「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IVP 역간)이 바로 그런 독서 그룹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주제들을 갖고 함께 토론한 결과로 나온 것이라는 얘기를 존 스토트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대학을 의미하는 ‘칼리지’가 ‘함께 읽는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같이 읽는 사람들이 모여서 칼리지라고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제도화된 대학이 아니더라도 같이 독서를 해나가는 모임이 있다면
그것이 일종의 칼리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훈련시키고 또 각자 자기 자신이 교육을 받는
그런 과정이 되지요. 제도화된 교육, 제도화된 대학에서 받는 교육 못지않게 사적인 모임이 많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교육의 수준을 훨씬 더 높일 수 있는 것이고, 나의 단순한 교양뿐만 아니라 지적인 분별력이라든지,
나의 도덕적인 민감성, 예민성을 키워 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