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년전 어느 봄날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청춘 남녀가 결혼하게 되었다며 인사를 왔다. 그런데 청첩장의 신랑 신부의 이름엔 그들 자신의 이름이 아닌 성경 인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신랑 김요한, 신부 강한나’ (가명)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요한과 한나’는 자초지종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군과 김양은 성장 과정 중에 지속적으로 가정에 불화를 겪었다. 두 사람 모두 부모님들이 잦은 다툼 끝에 이혼을 하게 되었고, 친인척 중에도 별거하거나 갈라서는 경우가 많았다. 5년 전 김양의 오빠조차 별거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들은 반복되는 가정의 불화를 우연한 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마침내 자신들의 가계에 좋지 않은 일들이 자신들부터는 끊겨지기 원하는 마음에 개명(改名)했다고 하였다. 새 가정을 이루는 그들의 마음의 각오와 간절한 희망이 깃든 새 이름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지만, 복음에 대해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2. 가계에 흐르는 저주론 : 과연 우리의 가정에는 저주가 흐를 수 있는가?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현재의 질병이나 잘 풀리지 않는 어떤 일들의 원인을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사상의 핵심 인물은 서울 송파에서 꿈의 축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이윤호 목사이다. 그의 책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베다니출판사)는 1999년에 발행되어 2004년도까지 10쇄를 인쇄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그의 핵심 사상은 가계의 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영적 법칙으로 조상을 통해 복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며, 저주 또한 후손들에게 대물림 된다는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조상이 죄를 심으면 죄의 보응은 당장 나타나지 않지만 그 자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엄청난 죄의 열매를 먹게 되며, 조상들의 죄는 사단이 자손들을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준다고 한다. 이윤호 목사가 강조하는 하나님 이미지는 보응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현재 우리가 행한 것을 후손에게 상과 벌로 갚으신다는 것이다. 모든 이단들의 특징은 성경을 왜곡되이 해석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무력화시킨다는데 있다. 이는 가계저주론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가계저주론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성경말씀은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 이윤호 목사는 이 말씀을 한 가정이 받게 될 죄의 결과로 본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는 가운데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며, 또한 ‘나를 미워하 는 자’는 강력한 적대감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라는 뜻이므로 일반적으로 범죄하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 없다. 가계저주론자들은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는 격려의 부분보다 3-4대를 저주할 것이라는 부분을 부각시킨다. 게다가 여기서 3-4대는 문자적인 의미도, 주술적인 의미도 아니다. 이윤호 목사는 시편51:5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에서 신디 제이콥스를 인용, 다윗의 조상 중 라합이 기생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다윗이 잉태할 때부터 죄인이었고, 밧세바와 간음하게 된 것이라 주장한다. 김정우 교수(구약학)는 이 말씀은 죄의 보편성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 출생과 잉태 자체가 죄 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하나님은 저주의 하나님이 아니라 축복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기생 라합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게 하시며, 밧세바에게 아들 솔로몬을 주시고, 니느웨 심판을 철회하셨다. (욘4:11)
우리는 때로 죄의 결과에 직면하기도 하고, 죄의 영향력 하에 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후천적인 것일 수는 있어도 유전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연약함과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더 컸음을 증거 한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구원에 대한 확신과 기쁨 속에서 살지 못하게 하고 저주와 두려움 가운데 떨며 살도록 하기에 반 복음 적인 것이다. 그들의 사상에서는 고난이나 고통마저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볼 수 없다. (롬8:28)
3. ‘내가 만든 하나님’에서 ‘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으로
도날드 맥클로우 목사는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기대와 요구 필요에 따라 불러내기 위해 하나님을 만든다. 그 결과 구원의 하나님을 하찮은 신으로 전락시켰다.”고 했다. 가계저주론자들은 인간의 불행을 설명하기 좋은 하나님을 만들었으나, 구원의 하나님을 상실하였다. 하나님은 신비이시다. 신비란, 이해할 수 없지만 기대할 수 있는 미래란 뜻이다. 우리가 잘못해서 매를 맞는 것은 당연하며,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이해되지 않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그리고 그 분이 주시는 축복은 우리가 날마다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의 희망인 것이다. 하나님은 ‘축복, 그 희망의 세례’ 안에서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