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목회자들인데, 남들 하는 대로 무난하게 한 세상 살아보려고 하다가 교회도 망하고 자신도 망해. 지금은 비상 시기다 생각하고, 뜻을 세우고 목회를 해야지."
10월 마지막 주간이 종교개혁 488주년을 기념하는 주간이다. 일부 교회에서는 이 주제를 놓고 설교를 했거나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게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축에서는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웅성거림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에도 교회의 개혁, 혹은 종교의 개혁을 촉구하는 사건들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세상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궁극적 문제에 해결책을 주겠다는 종교가 오히려 사람들을 오도하고, 눈앞의 문제도 풀지 못하는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모습이 되었다. 이를 어찌해야 할까.
종교개혁의 주도적 인물 마틴 루터를 긴 잠에서 깨워 호출했다. 그가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한국교회의 병세가 심각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까. 문을 열고 들어서는 루터의 육중한 체구가 먼저 눈에 든다. 아직 건강미가 있다.
양: 종교개혁은 꼭 일어나야만 했습니까? 가톨릭 내부적 개혁운동으로 갱신될 여지는 없었나요?
루터: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내가 처음부터 가톨릭을 붕괴시키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말하는데, 그렇지 않네. 쇠락의 기운이 있었다고는 하나 가톨릭은 서구세계를 통치하는 거대한 체제야. 감히 일개 수도사가 그 체제 전체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지. 처음에는 내가 강하게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 교황청이나 주교단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깨우치고 내부 개혁에 나설 것으로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지. 교황에 대한 자극적 표현도 그래서 사용한거고. 그러나 결과적으로 교황청은 나의 문제 제기가 당시의 봉건영주들이나 지역의 실력자들인 제후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정치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본 것이지. 반박문을 둘러싼 논쟁이 2~3년에 걸쳐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와 나의 동료들은 교황체제가 이 문제를 개선할 의지도, 역량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어. 일말의 희망을 거두어야 했지.
양: ‘저항자들’이라 불리는 개신교(Protestant)가 그렇게 세상에 등장한 셈인데요. 그 개신교가 요즘 한국 땅에서는 교황체제 못지않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루터: 한국에 루터파가 별로 없고 칼빈주의자가 많아서 그런가. (웃음) 농담일세. 모든 구조나 체제는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늘 그 경향성과 싸워야 하네. 칼빈주의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개혁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 라고 하던데, 별로 그 기치에 충실하지 않나 보구먼.
체제와 싸우려면 연구하라 양: 말과 삶이 따로 노는 것이 문제의 본질 같습니다.
루터: 그거 왜 그런지 아는가? 고민도 안 하고 고생도 안 해서 그래. 개신교 전래 초기의 순교 따위를 추억만 하고 있지. 우리들의 개혁 시기에는 하나의 신조, 미묘한 신학적 해석의 차이에까지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고. 그러면서 불필요하게 희생된 사람도 엄청나게 많지만, 그렇게 얻어낸 신앙고백이니까 그것에 따라 사는 것 이상으로 감격스러운 게 없잖아. 한국교인들 보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괜찮다는 식으로 사는데, 제발 좀 그러지 말았으면 해.
내가 한국교회를 보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이 공부를 안 한다는 거요. 교회개혁 이야기하면 꼭 ‘기도 했냐?’ 물어보는 사람 있는데, 기도는 필수고 개혁운동은 연구해야 해요. 종교개혁이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나온 운동이 아니라구. 중세의 수도원들은 매일 최소 세 번은 기도회를 갖는 수도공동체였지만, 동시에 신학자의 도서관이자 연구실이기도 했소. 나도 어거스틴 수도회에서 수 년간 신학과 성경 연구를 꼼꼼히 할 기회가 있었으니 나중에 신학 논쟁에서 내 입장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고, 내 동료들도 다 신학의 전문가들이었소. 생각해봐요. 교황체제 자체가 거대한 교리와 역사의 결집체인데, 이를 극복하겠다는 사람들이 턱도 없이 모자란 공부로 무얼 한단 말이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지 않소.
나는 평생을 개혁운동에 매진했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빠져들거나 지도자들의 탈선으로 추종자들이 목숨을 잃는 사례도 보았네. 개혁운동은 객기로 할 운동이 아니오. 진짜 다 걸고 해야 할 운동이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내용과 방향을 찾는 일은 결사적으로 해야 하오.
양: 개혁자들의 자기 연마를 뼈저리게 강조하셨는데요. 그래도 비난은 고스란히 받으셨지요.
루터: 교회를 요동시키는 자다, 사탄이다 등등 온갖 악다구니가 다 쏟아졌지. 나는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사람이거든. 노래도 좋아하고, 기분파라고나 할까. 정서적으로 침울해지지 않도록 노력하지. 나는 개혁은 책상머리에서 나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네. 세상 사람들의 삶 속으로 한번 들어가 봐. 나는 수도원 생활이 더 경건하거나 거룩하다고 생각하면 단단히 속는 것이란 점을 잘 알아. 일상생활 속에서 경건과 거룩을 실천하는데 교회가 도움을 주나 못 주나 보면 판가름이 나지. 세속에 사는 이들은 수도원으로 나아오는 것이 필요해. 그러나 수도원을 경험한 사람은 다시 세속으로, 예수를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가는 삶이 있어야만 해. 우리가 믿는 예수는 십자가의 사람 아니던가. 그 거친 십자가를 치장하고 미화해서는 안 되네. 그 거친 질감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하네. 그걸 꾸미는 것은 결코 예수를 위하는 게 아니야. 많은 예배당과 그 거대한 위용으로 예수의 십자가가 더 영광스럽게 된다고 생각하나? 교회가 왕과 귀족을 갈아치울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 예수가 존귀히 여김을 받나? 착각이야. 난 그런 시대를 살아봤어. 아니더라구. 한국교회는 절대 그 길로 가지 말게. 누가 간다면 결사적으로 말려. 그건 교회의 몰락을 자초하는 길이고, 예수를 다시 못 박는 일이야.
십자가를 치장하지 마라 양: 개혁에는 늘 속도 조절과 정도의 문제가 따라붙습니다. 루터 선생님도 다른 개혁자들에 비하면 보수적이었다는 평을 듣습니다.
루터: 한 사람이나 집단이 다 이룰 수는 없는 것이고, 역사적 소명이란 게 있지. 나 역시 처음부터 개혁을 주창한 사람도 아니고, 하다 보니 그 자리에 서게 되었지. 난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지점으로 걷잡을 수 없이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지 않았어. 가끔 혁명적 분위기에서는 지나치게 과격한 양상이 전개되고 통제 불능이 되거든. 후세 역사는 나를 놓고 보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 시대에 내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늘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했어. 그런 과정에서 동지들이 적이 되는 경우가 가장 고통스러워. 늘 내가 옳았다고는 말하지 않겠네(루터는 농민전쟁(1524~25)의 진압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양: 한국교회에 대해 좀 말씀해주시지요.
루터: 직설적으로 말하겠네. 한국교회는 가볍고, 얕다고 보네. 인구의 20%, 선교사 1만 명, 서울 강남 인구의 30~40%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네만. 전 인구가 기독교인이고, 평생 서원을 한 수도원들이 경쟁적으로 설립되고, 왕족과 귀족은 다 교황의 눈에 들려고 했던 시대를 산 내게는 전혀 인상적이지 않네. 당신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지점까지 도달하지는 못할 걸세. 도달하는 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계속 그런 꿈만 부추기고 있으면 큰 일 나네. 명색이 지도자란 사람들은 다른 꿈을 꾸어야지. 소규모 자영업자가 자수성가하는 식의 바람을 무슨 교회의 궁극적 지향점이라도 되는 양 유포시키고들 그러나. 그러면서 교회가 그 수준으로 천박해지는 걸세.
그리고 신학자란 사람들은 왜 다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는 거야. 신학자가 개척교회 창업 컨설팅하는 사람들인가. 신학교에서 그것으로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한국교회 개혁 95개조를 써야 한다면 신학자들의 침묵과 비겁함을 엄중히 물을 걸세. 교수들끼리 서로 헐뜯지 말고, 교회를 향해, 세상을 향해 진짜 싸움을 하라구. 젠장.
문제는 목회자들인데, 남들 하는 대로 무난하게 한 세상 살아보려고 하다가 교회도 망하고 자신도 망해. 지금은 비상 시기다 생각하고, 뜻을 세우고 목회를 해야지. 목회의 뜻이 겨우 아들이나 사위한테 교회 물려주는 게 되어서야 되겠나. 자꾸 그런 식으로 하니 물려줄 자식 없는 신부들이 낫다는 소리나 듣구. 당신들이 잘못하니 오히려 가톨릭이 더 낫다는 소리- 내가 들으면 정말 맥 빠지는 소리-나 나오게 만들고 말이지.
여하간 개신교가 어쩌다 시작되었나를 잘 새겨보기를 바라네. 그 지점을 벗어나면 누군가가 또 나와서 당신들을 다 갈아엎고 새로운 기독교를 세울 걸세. 개혁의 대상이 되려나, 주체가 되려나? 당신들 선택에 달렸어. 끊임없이 고민하는 신앙인이 희망이다 끊임없이 고민하는 신앙인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