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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방 (2009-05-02 오전 6:15:50) http://blog.somang.net/1234/4925
영성신학적 입장에서 본 내적성장에 대한 이해

유해룡

1. 영성신학적 고려

전통적으로 영성신학에서 관심하고 있던 영역은 修德的(ascetic)인 면과 神秘的(mystical)인 면이다. 수덕적이란 인간의 행위적 측면과 관련되어 있다. 이 영역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이 어떻게 응답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제를 다룬다. 하나님을 향한 응답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윤리적인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수덕신학으로부터 윤리신학(혹은 기독교 윤리)가 도출되었다. 반면에 신비적 측면은 ‘하나님이 내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시는가?’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에 대한 주제를 다룬다. 그리고 그 신비적 경험의 정도나 유형을 이해하고 기독교적 측면에서의 그 경험의 진정성(authenticity)을 이해하기 위해서 분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즉 수덕적인 차원은 행위(doing)의 문제이며, 신비적인 차원은 존재(being)의 문제로 정리할 수 있다.
영성 신학자들은 이 두 영역 사이에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즉 수덕적인 면과 신비적인 면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별개의 영역인가 하는 문제와 씨름을 해왔다. 불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외적인 수덕생활은 자연적인 영역이며, 내적인 신비경험은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구분하려고 한다. 자연과 초자연의 영역을 나누는데 있어서 어떤 뚜렷한 기준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전자는 인간 의지가 작용하는 능동적인 일이며, 후자는 비교적 인간 의지와는 별로 상관없는 수동적인 작용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이라고 이해함으로서 이 두 영역을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역을 뚜렷이 나누기보다는 인과적이고 연속적인 관계로 보려는 시도도 있다. 뿌리와 열매라는 성경적 주제를 인용하면서 수덕적인 삶의 결과로서의 신비적 삶을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과적인 어떤 원칙이나 합리적인 신학적 성찰로부터 비롯된 사고라기 보다는 수도원적 삶이라는 실험장으로부터 비롯된 경험적인 이해이다. 이 두 개의 영역을 별개의 것으로 나누기를 원하는 신학자들은 수덕적인 차원을 기독교 윤리학(혹은 윤리신학)으로 발전시키고, 신비적인 차원을 순수한 영성신학의 영역으로 독립시키려는 성향이 있다.
수덕적인 차원과 신비적인 차원을 불연속성보다는 연속성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사람들은 실존적인 인간의 내면을 고려해 볼 때 엄밀하게 자연과 초자연을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일반적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기초를 전제로 하는 외형적인 행위는 자연적인 것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내적인 신비체험은 초자연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 인간 실존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기반으로 하는 초월적인 실존(supernatural existential being)이라고 할 때, 우리의 경험 어느 부분에서도 초자연적인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수덕적인 영역과 신비적인 영역을 경험론적 차원에서 인과적인 관계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엄격하게 자연과 초자연의 영역으로 우리의 삶을 구분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점점 영성신학에서는 수덕적 신학과 신비적 신학의 구분을 “영성”이라는 말로 통합하고 있다. 수덕적인 행위이든지, 신비적인 경험이든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서로 침투되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영성의 중심주제로 삼고 있는 것은 “영”(spirit)의 문제이다. 영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구성요소중의 하나요, 또 구성요소중의 하나인 “육”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론적으로 가능하나, 실제적으로는 그 구분이 가능하지 않다. 이 땅에 사는 존재로서 우리의 영은 육신의 실존을 통해서 발현된다. 그러므로 영은 어떤 다른 인간구성 요소를 구분해 내는 상대적인 용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연과 초자연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영이라는 것은 보이는 실체는 아니나, 우리의 실존의 복합적인 영역 안에서 엄청난 힘을 지닌 상징이요, 보이지 않는 실체이다. 우리의 영은 영원을 시간 속으로 파고들게 하며, 신비적인 깊은 세계를 현상의 지식 세계 속으로 파고들게 하며, 성스러운 내면 세계가 외면세계로 표현되게 하며, 유한한 생명성이 무한한 생명성으로 파고 들게 한다. 즉 시간과 영원, 현상과 신비, 외면과 내면, 생명성과 무생명성(무한한 생명성에 비추어 볼 때 유한한 생명은 가히 무생명성이라고 할 수 있음)을 통합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영이다. 이 두 영역이 조화롭게 연결되고 통합될 때 비로소 건강한 영성생활이 시작된다.

2. 영성생활이란?

영성생활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선 영성생활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위하여 이와 유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용어들을 제시해 본다. 영성생활(spiritual life), 내면생활(internal life), 종교생활(religious life)이라는 용어들이다. 이 세 부류의 말들이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가? 영성생활을 곧바로 내적생활로 환원할 수 있는가? 혹은 영성생활을 곧바로 종교생활과 동의어로 사용할 수 있는가? 적어도 기독교적 영성생활에서는 구분되어져야 한다. 만약 영성생활을 내면생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면, 시인이나 음악가나 기타 예술가나 그리고 철학가들을 일컬어 영성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내면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로서 충분하다. 거기에 ‘영성생활’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예술 활동이나 형이상학적인 작업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세계와 반드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영성생활을 종교생활과 일치시킬 수 있다면, 경전을 읽고, 정기적인 예전에 참여하고, 종교의식에 꼬박 꼬박 잘 참여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영성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어색한 일이다. 내면적인 경험이나 내면적인 숙고나 결단이 없이도 예전적이고 의례적이고 문화적인 종교생활은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보아도 오늘 모든 종교인들이 영성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만 생각하여도 그들 모두가 영성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성생활은 반드시 의식적인 자아성찰과 심층적인 내면생활, 그리고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일정한 예배와 의식에 참여하고 초월세계에 대한 갈망과 추구가 있어야만이 성립할 수 있는 용어이다.
이제 범위를 좁혀 기독교 영성적인 측면을 생각해 보자. 위에서 두 상반된 세계, 자연과 초자연, 현상과 신비, 시간과 영원을 통합시키는 능력이 우리의 영에게 있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여러조치가 영성생활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능력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지 자발적으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활동성은 아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되어 있는 가능태적인 영성에 불과하므로 영성생활을 통하여 활동태적인 영성으로 회복시켜 가야한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영성생활을 단순하게 “영성의 회복과정”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성을 회복하게 하는 완전한 모델이 되셨다. 동시에 그 자신이 이 모델을 이룰 수 있는 능력으로서 우리에게 임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이란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혹은 성령)이 우리 영(가능태적인 영성)에 침투됨으로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곧 온전한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인간성의 형성을 지향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길이다. 성경은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새로운 인간성이란 죄로 인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치유함을 받고,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대로 변모(transformation)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라고 되어 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세계로, 아니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귀속본능(歸屬本能)을 일컬어 영성이라 하며, 이 귀속본능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해 가는 과정을 기독교 영성생활이라 한다

3. 기독교적 내면생활

기독교적 영성생활의 핵심은 내면생활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영성가들은 우리의 내면에서 경험되어지는 현상들에게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 현상들을 은유적으로 혹은 상징적인 언어들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외적으로 가늠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들은 내면의 성숙에도 단계가 있다고 믿었다. 일찍이 오리겐은 성경의 66권을 수평적인 차원으로 보지 않고, 우리 내면의 세계를 밝혀주는 수직적인 차원으로 보았다. 예를 들자면 잠언은 도덕적인 면을 일깨워 주고, 전도서는 내면의 지혜를 일깨워 주고 진리에의 조명을 비추어 주는 말씀이다. 아가서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일치체험과 자신을 내어주는 헌신의 극치를 전해주는 말씀이다. 각 말씀들은 내적인 성숙의 정도에 따라서 소화해 낼 수 있는 정도가 다르다. 그리고 오리겐은 각 성경의 말씀은 문자적인 차원(literal), 도덕적인 차원(moral), 영적인 차원(spiritual), 신비적인 차원(anagogical)을 열어주는 정도가 각각 다를 수 있으며, 어떤 말씀은 이 네가지의 차원을 모두 고려할 때만이 그 말씀이 완전히 열려진다고 믿는다. 그것은 각 사람의 내면적인 성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말씀과 마음이 서로 부딪힐 때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을 통하여 내적인 성숙으로 이어진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드는 사랑의 성숙정도를 통해서 영성적인 성숙정도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영혼은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그 둘 사이의 성숙도는 사랑을 통한 헌신 정도에 비례한다고 설명한다. 베르나르드는 아가서 1장 1절의 말씀을 근거로 영혼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입맞춤을 유비로 그 관계의 진전을 설명한다. 예를 들자면 영혼의 입은 그리스도의 발과의 입맞춤을 통하여 영적생활이 출발된다. 발에의 입맞춤은 누가복음에서 죄인인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기고 그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는 사건을 근거로 한다(7: 36-40). 그것은 자기 부인과 참회의 삶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손에의 입맞춤이다. 중세 봉건시대에 신하가 제후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 제후가 손을 내어 밀면 신하는 무릎을 꿇고 그 손등 위에 입맞춤을 한다. 그것은 곧 신하로서 군주를 위하여 생명을 내걸고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손에 입맞춤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헌신적인 결단을 의미한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입과의 입맞춤이다. 그것은 아가서 1장 1절의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는 말씀을 유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스도를 향한 최대의 헌신은 사랑에의 일치이다. 영혼과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주체와 객체로서의 관계가 아니다. 더 이상 주체와 객체가 별개로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실체의 연합이나 혼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의지와 영혼의 사랑의 의지가 일치된 상태를 말함이다.
근대에 들어서서 이 내면적 상태를 보다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아빌라의 테레사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요한이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우리의 영혼을 가꾸어야 할 정원으로 비유하고, 기도생활은 잡초가 우거진 정원에 물을 주면서 가꾸어 가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영성생활의 초기단계는 마치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서 잡초가 우거진 정원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정화되지 못한 내면에는 혼란과 혼돈이 잡초처럼 우거져 있어서 기도하기가 매우 힘든 상태이다. 이 경우 주로 음성기도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 단계를 극복하고 나면 기도가 마치 도로래를 이용하여 물을 퍼올리는 것과 같다. 보다 쉬워진 느낌을 가지나 여전히 힘든 과정이다. 내면생활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며, 의도적이고 고된 훈련이 요구된다. 이 때는 주로 기억과 이해와 상상력을 사용하는 추리묵상 기도를 한다. 이 때 내면을 정화하기 위해서 자아성찰과 자아정화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물레방아와 수로를 통하여 정원에 물을 공급하는 것과 같아서, 그 이전보다 영성생활이 수동적이고 자발적이 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능동적인 노력과 의지가 동원되어야 하기에 불완전 관상상태라고 한다. 그리스도와 내면적인 일치에 가까워 가지만, 여전히 한쪽으로는 고된 노력을 요구한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정원 한가운데에서 솟아나는 샘물과 같다. 전적으로 수동적이고 자발적인 영성생활 상태이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에의 일치에 도달한 완전관상 상태이다. 이러한 비유적인 내면의 상태들에 대한 설명은 내면의 성숙도에 따라서 사용하고 있는 기도도 다양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가장 조직적이고 영성신학적인 틀을 갖추고 있는 내면에 대한 설명은 십자가의 요한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십자가의 요한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어둔 밤’이라고 한다. 요한에게 있어서 영성생활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또한 사랑의 사귐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나 자신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밤’이란 우리의 감각이 잠든 상태를 의미한다. 감각은 언제나 제한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상상하게 되고, 그 결과 우리 안에서 불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것일지라도 감각의 세계에서 구성된 하나님의 이미지란 그 분 자신에게 이르기에는 너무나 큰 간격이 있다. 인간의 감각적인 세계로 하나님을 그려보고 이해한 것이 아무리 하나님에 관한 최상의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그 자신과 비교할 때 유사성보다는 비유사성이 월등히 많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모든 피조세계는 無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무한하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 사랑의 사귐에 이르려면 감각의 세계는 닫혀져야 한다. 이것이 ‘어둔 밤’이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의 일치의 세계인 역설적인 밤에 이르기 위해서 능동적인 밤과 수동적인 밤을 거쳐야 한다.
능동적인 밤이란 영혼이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해서 감각적인 영역에서의 밤을 능동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이다. 모든 감각적인 욕망과 욕정 등을 씻어버리고 끊어버림을 의미한다. 여과되지 못한 욕망을 능동적으로 일으키지 않게 하고,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부정하고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모든 ‘감각적인 욕망에 맛이 없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며, 마침내 능동적인 감각의 밤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일치의 길에 이르는 첫걸음을 내디딘다. 이제 감각의 밤으로부터 영의 밤으로 옮겨간다. 여기서 영의 밤이란 구체적으로 이성과 기억과 의지의 정화를 의미한다. 특히 정화의 수단으로 십자가의 요한은 철저히 믿음을 강조하는데 합리적인 이성의 빛에 비추어 볼 때 믿음은 매우 어둔 밤에 해당한다. 이 어두움은 이성이 캄캄해져서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성의 논리를 말끔히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서 나타나는 수동적인 밤은 하나님 자신이 영혼정화의 원동력이 되신다는 측면에서 수동적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으로 인간에게 다가서시어, 용광로 속의 금같이 인간을 정화하시고, 통나무를 태우는 불처럼 인간을 싸신다.”(󰡔깔멜의 산길󰡕, 제1권 11, 6, 81쪽). “하나님은 어머니처럼 인간을 어린이 같은 미숙한 상태에서 끌어내어 보다 높은 것에로 향하게 하신다”(󰡔어둔밤󰡕, 제1권, 1,2 20쪽). 영혼이 정화되는 것은 성령의 개입으로 인간의 모습을 취한,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서서히 참여함으로서 가능하다. 여기서도 수동적인 밤은 감각으로부터 시작하여 영의 밤으로 옮겨간다. 이 사중적인 정화의 밤은 수동적인 밤에서 절정에 이르고 그것이 다시 자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삶에로의 참여로 이어진다. 자아는 자기 자신 안에 있던 모든 것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살게 된다. 요컨대 인간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벧후 1: 4). 인간이 하나님과의 일치한다는 것은 사랑의 연합에 의해서 신성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간에게 내어 주실 때 그 요체는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연합되고 사귐을 가지게 된다.

4. 내적성장의 촉진자로서의 기도

이러한 내적 성장의 변화정도를 고찰하면서, 무엇이 이러한 것들을 가능케 하고 촉진시킬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한 마디로 ‘이러한 것들이 영적성장의 변화를 일으키는 지름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 변화를 가능케 하는 요소는 인위적인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은혜의 사건이요 주어진 성향과 성품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훈련을 하는 것조차도 은혜로 주어진 기회로 여겨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는 가장 오래된 전통이면서 보편적인 영성훈련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이다. 기도 자체가 은혜의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한다는 것은 순전히 어떤 능동적인 행위라기 보다는 은혜의 사건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영성가들의 지혜와 그 다양성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둔다면 기도라는 은혜의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보다 효과적으로 응답할 수 있으며, 내적인 영적진보에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욕구가 기도 생활의 가장 원천적인 동기가 된다. 그런데 쉽사리 그리고 속히 그 욕구에 대한 만족감과 안위함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욕구가 된다. 맹목적인 욕구란 비인격적인 간구에 불과하다. 그 맹목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데에 집중된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류에는 관심을 약화시키기 쉽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을 개의하지 않는 자기 욕구에 대한 성취에 집착하기에 그것을 비인격적이라고 한다. 기도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 집착은 자기의 한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오히려 자신의 약한 부분을 보완하여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 보려는 또 다른 교만이 그 안에 도사려 있을 수 있다. 기도는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연약함 속에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을 나타냄으로 역설적인 강함을 체험하는 것이다. 신뢰와 순종이 없는 자기 욕구에 집착한 기도는 자기 암시적인 효과를 주기 때문에 때로 부정적인 방향으로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이 인식하든지 못하든지 스스로에 대해서 정직하지 못하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지 못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아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구상하여 그것을 하나님으로 인격화 시킨다. 이 이미지들은 우리의 욕구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고 보장해 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욕구의 분출로부터 비롯된 하나님의 이미지는 자신이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못하든지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이다. 이러한 자기 투사(projection)적인 기도는 영성형성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기도는 분명히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청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결코 변덕스러운 신이 아니며, 기도는 하나님께 소원목록을 상정하는 것 이상이다. 기도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비젼과 그 목적을 보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기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운동, 즉 만남의 행위이다. 이 만남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이루어지면 그것이 참 기도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기도는 맹목적인 욕구로부터 벗어나 통찰력과 관계형성과 그리고 적어도 어렴풋하나마 하나님이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신 ‘제일의 언어’를 추구한다. 예를 들어 “내가 무엇을 원합니다,” “내가 만족과 기쁨을 얻기를 원합니다” 등의 욕구가 동기가 되어 기도를 시작했을지라도, 이 기도가 다른 사람들을 포함시키고, 나아가서 하나님 자신에게 이른다면, 그 기도는 자신의 욕구가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든지 안되었든지 이미 기도의 응답은 타자(이웃과 하나님)와의 관계형성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욕구는 기도의 동기부여를 해주기는 하나 욕구의 실현여부가 기도의 응답여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욕구로부터 출발된 기도자의 마음이 그 욕구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때 비로소 그 기도가 살아나기 시작하며 응답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욕구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그 욕구를 취하시고 다루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 순간 하나님과의 사귐과 관계형성이 이루어졌고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로 넘겨지고 있다. 기도는 단순한 욕구실현이 아니고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에 그 초점을 두어야 한다. 자기 암시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기도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는 자기의 욕구의 집착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입은 열려 있으나 들으려는 귀는 닫혀 있기에 이미 그 마음은 욕구의 노예가 되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욕구에 더욱 깊게 달라붙게 된다. 그 욕구가 거룩한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성령님의 인도란 욕구로부터 시작된 기도가 점점 개인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내적인 관심이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인도되어지는 경향을 지닌다.
이상의 기도의 이해로부터 기도의 지향점에 따라서 기도는 청원적 성격, 욕구 정화적 성격, 하나님과 타인과의 관계형성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세가지 성격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각 성격의 기도는 상호영향을 끼치면서 또 다른 성숙한 기도로 인도되며, 그것이 곧 개인의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게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에 대한 이해와 태도는 성숙한 영성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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