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윤열(潤悅), 호는 영계(靈溪)이다.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선도(仙道)를 공부하면서 한의학(漢醫學)을 연구하였으나 1897년 기독교 교인이 되면서 세례를 받았다. 같은해에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평양지부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07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를 졸업하였으며,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목사로 있으면서 목회(牧會)활동과 구국운동을 함께 전개하였다. 또한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하여 남녀 좌석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포장을 철거하였으며,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교육사업에도 참여하여 숭실학교(崇實學校)·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 때에도 수난을 당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북간도를 포함하여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부흥사(復興師)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평안남도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설교 도중에 죽었다.
문집에 《영계 길선주 목사 저작집》, 저서에 《해타론(懈惰論)》 《만사성취(萬事成就)》 《강대보감(講臺寶鑑)》 《말세학(末世學)》 등이 있다.
길선주 목사… 신앙부흥 일으킨 한국기독교의 선구자
초창기 한국 기독교는 월남 이상재나 백범 김구의 사례에서처럼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문화적 무기로 장려된 측면이 강하다.
서양이 부강해진 원인이 기독교에 있으니 우리도 하나님을 믿어 민족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길선주 목사(1869∼1935)는 뜨거운 성령 체험을 통해 기독교가 단순한 정신무장 운동이 아니라 생명의 진리라는 점을 깨닫게 한 한국 기독교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길목사는 기독교로 귀의한 뒤 2만번 이상의 설교를 통해 380여만명에게 복음을 전했으며그가 세운 교회는 60여개에 이르고 이를 통해 배출된 목사 전도사 장로 교사가 800여명, 세례를 받은 성도는 3000여명에 달한다.
1896년 3월15일 평남 안주 성내 후장동에서 태어간 길선주 목사는 어릴 때 한학을 배우고 19세 때에 사교에 빠져 여러 해 입산수도했다.
1890년 평양에 온 미국 북장로교의 새뮤얼 마펫 선교사를 만나 길선주 목사는 비로소 성경이나 천로역정같은 기독교서적을 접하고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
천로역정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길선주 목사는 깊은 밤 기도하던 중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울며 회개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1897년 29세로 세례를 받은 그는 금식과 철야기도에 힘쓰고 손에 한번 성경을 쥐면 놓을 줄 모를 정도로 열중했다. 당시 외국 선교사는 우리 말에 능숙하지 않아 주로 그가 집회를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
1903년 평양신학교가 문을 열자 그는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입학했다.
길선주 목사는 1905년 영국에서 교회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국에서도 그같은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1906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의 갈등을 회개하는 집회를 계기로 불같은 부흥집회가 시작됐다.
신학생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앞장서서 복음을 전했으며 통회하고 자복하는 기도 속에서 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때의 부흥집회는 ‘사경회’라는 말처럼 성경을 읽고 목사가 그 뜻을 풀이하는 형태였다. 한국교회의 부흥이 군중심리에 의한 감정적 폭발이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깊은 통회와 회심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길목사는 이미 그 당시에 자주 설교를 통해서 교회가 양적인 팽창에만 몰두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사랑이 없는 교회는 지탱할 수 없다”며 신앙의 성숙을 강조했다.
길목사는 부흥사로서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2년동안 옥고를 치렀다.
경제자립과 국산 장려,농촌 개발,금주운동과 같은 사회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다만 그 때까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이용해 사회활동을 했다면 길목사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그같은 운동에뛰어든 것이었다.
1935년 11월20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 부흥집회에서 폐회 축도를 마친 길선주 목사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졌다. 뇌일혈이었다.
길목사의 장례식에서는 평소에 그가 즐겨 불렀던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송가 364장)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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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靈界)의 거성(巨星) 길선주
①. 얼굴이 창백한 청년.
구한국 마지막 때,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될 무렵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이 나라를 구해 보려고 동쪽으로 달리기도 하고 서편으로 달리면서 애를 쓸 때 장차 이 백성의 영혼의 지도자가 될 청년들은 고요히 산 속에서 도(道)를 닦고 있었다.
갑오(甲午) 전 어느 해 봄, 날씨가 점차 따스하여질 무렵 평안남도 순안(順安)군에 있는 안국사(安國寺) 뜰에 얼굴이 창백하여 중병을 치르고 난 듯한 청년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그가 곧 평양에서 온 길선주(吉善宙)라는 청년이었다. 이 청년이 그 해 겨울에 이 절에서 승방(僧房) 한 간을 빌어 가지고 백날기도를 마친 것이다. 백날기도를 하는 동안에는 조밥에 깨소금으로 겨우 연명이나 하는고로 백날을 지나고 나서는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져 몇 날 동안이나 기운을 차리고서야 그 절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이 때에 길선주가 백 날을 지난 바로 그 옆방에서 얼굴이 백지장 같이 된 청년 또 하나가 문을 열고 나온다. 그는 숙천(肅川) 고을에 사는 김찬성(金燦星)이라는 청년으로 그도 승방 한 간을 빌어 거기서 백날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것이다. 장지 한 겹 사이를 두고 백날을 지나면서 곁방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이날에야 비로소 얼굴을 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몇 날 서로 사귀는 중 마음이 서로 통하고 뜻이 서로 같은 바 있어 어느 날 밤 삼경(三更)에 안국사 뒷산에 올라가 맑은 물을 떠 놓고 천지신명 앞에 형제를 맺는 맹세를 하였다.
그들은 전에도 여러 번 백날기도를 하였고 서로 만난 후부터는 해마다 겨울이 되면 산 속 고요한 곳을 찾아 백날기도를 하였다.
백날기도를 하는데 있어 제일 어려운 것은 잠을 자지 않는 것인데, 길선주는 잠이 많은 탓으로 견딜 수가 없어 독한 풀을 다려 그 물로 눈을 씻곤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눈이 상하여 일평생 반소경으로 지냈다.
②. 구름을 보고 울다.
길선주는 평안남도 안주(安州)땅 출생(1870年生)으로 소년 시절에 부모를 따라 평양에 옮겨 살았다. 그는 어려서 구름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울었다고 한다. 자라서 글을 읽을 때에도 이다음 돈을 모으겠다거나 벼슬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고 나이 열대여섯 쯤 되어서부터 그의 친구 김종섭(金鍾燮)으로 더불어 신선이 되려고 선도(仙道-老子敎)를 연구하였다 한다. 옥추보경(玉樞寶經)을 읽고 정좌심공(正坐心工)의 훈련을 하고 선약(신선이 되는 약)을 먹는 것들의 수행을 다하였다. 그러나 공을 들일 수록 선도에 대하여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풍진세상을 떠나 산에 들어가 기도하는 것으로 그의 청춘시절을 거의 다 보내었다.
③. 전도자가 되기까지.
그러다가 27세 되던 해에 같이 선도를 하다가 먼저 예수를 믿은 김종섭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에 미국인 선교사 이길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와 형제를 맺은 김찬성을 예수에게로 이끌었다.
길선주는 한번 듣고 본 일은 잊지 않는 기억력이 있었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닫는 총명과 무엇이든지 그 근본 이치를 캐어 알지 않고는 포기하지 않는 정열을 가지었다. 게다가 유교와 불교와 선도에서 구하다가 얻지 못한 구속의 도를 깨달은 기쁨에 성경을 밤낮 읽고 그리스도교 서적을 구하여 읽고 연구하였다. 이 같이 하여 점점 평양에서 그의 존재를 알게 되고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교회의 장로(長老)가 될 때에는 전국 교회에서 특출한 지도적 인물로 등장하였다.
그는 본래 웅변가이어서 강단에 나서기 시작하자 사자처럼 부르짖고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열변에 모든 청중은 도취하였다. 장로가 되면서부터 각 지방으로 돌아다니며 성경을 가르치고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평양에 있는 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장로교회에서 첫째로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김찬성은 제2회로, 김종섭은 제 3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세 사람은 어릴때 부터 술과 담배를 알지 못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았던 도사(道士)로,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그 생활이 더욱 엄격하고 경건하였다. 그들은 다 진심으로 교회를 섬겼다.
④. 그의 신앙의 특색.
길선주는 우리나라 교회의 선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보다 먼저 믿은 모든 사람보다 앞서고 그의 신앙생활과 교회를 먹이는데 있어 우리 한국교회가 길이 길이 간직하여야 할 여러 가지 아름다운 규범을 남겨 주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교회에 훌륭한 특색이기도 하다.
여기에 그 특색 몇 가지를 기록하면 아래와 같다.
성경 읽는 것 - 그는 젊어서부터 사서삼경을 읽었고 불교의 경전도 많이 읽었다. 그는 글 읽느라고 눈을 상하여 잘 보지 못하므로 책을 읽음에는 많이 읽는 것보다 정밀히 읽고 정밀히 읽기보다 외우기를 힘써 왔다. 그런데 그는 남보다 뛰어나게 외우는 재주를 가지었다. 믿은 후에 성경을 외우는데 힘썼다. 이는 후의 일이지만 신약성경 중에 있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히브리서, 요한서 등 몇 책은 눈을 감은 채 줄줄 외울 수 있었고 묵시록은 1만 2천번이나 읽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중요한 성경 구절은 거의 다 외우는 것이었다. 구약과 신약성경 전부가 다 그의 머리 속에 들어 있었다. 그의 감화인지는 몰라도 그의 친구목사들은 다 오늘의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따르지 못할 만치 성경에 정통하였다.
기도하는 것 - 소년 시절부터 묵상과 백일 기도에 정성을 다하던 그는 믿은 후에는 더욱 기도에 힘썼다. 먹지 않고 밤을 세워가며 기도하였다. 기도하기 위하여 자주 산에 올랐다. 그의 일평생은 기도로 일관하였다. 믿은 후에는 새벽기도를 빠뜨린 날이 없었다. 교회를 먹이면서부터는 모든 신도들에게 새벽기도를 권장하였고 사경회와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매 다른 어느 나라 교회에서도 없는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의 특색의 하나이다. 그는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새벽잠만 자는 것을 여러 번 책망하였다.
[설교] - 그는 설교할 때에 한시(漢詩)를 지을 때에 쓰던 기승포결(起承布結)의 방식을 채용하였다. 이것을 오늘날 말로 바꾼다면 起는 서론이요 承은 문제의 중요한 뜻을 설명하는 것이요 布는 넓은 의미의 이론을 전개하다가 結에 가서 청중이 몹시 긴장된 순간을 포착하여 문제의 요점을 들어 돌격하는 태세이다. 그는 이 같은 설교방식을 동역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법은 당시 우리나라 강단에 한 표준이 되었다. 그의 설교에는 웅위한 기풍이 나타나고 사람을 매혹하여 그 감화력이란 놀라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사람은 몇 만으로 헤아리게 되고 그의 손으로 세례(洗禮)를 베푼 것이 여러 천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의 설교는 매양 십자가를 중심하고 내세(來世)를 고조하는데, 그가 십자가를 명상하면서 예수의 일곱 가지 보배로운 행적이라는 문제의 설교를 할 때에는 방울 방울 피가 괴인 주님의 발자취가 눈앞에 나타나 보이는 듯 하였고, 나라를 잃어버린 원한을 가슴에 품은 그가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끔뻑이며 오직 그가 소망을 두고 사는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소리칠 때에는 금방이라도 하늘 문이 열리는 듯 하였다.
한국교회가 교리에 치중하지 않고 십자가에만 의지하는 감상적인 태도와 지나치게 말세만을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좋지 못한 경향이라 하여도 길선주가 그 장본인이요, 그것이 좋은 것이라 하여도 길선주가 그 주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교회를 먹이는 데에도 여러 가지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교회 관내에 구역을 나누고 권찰(勸察)을 두는 것이라든지 부인 신도 중에 덕망이 높은 이를 권사(勸師)로 세우는 것 등은 다른 선진 국가 교회에도 없는 일이요 교회 헌법에도 없건마는 평양교회에서는 이 같은 제도가 실행되었으니 이는 길선주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⑤.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성 한복판에 우뚝 솟은 언덕 위에 날아갈 듯이 선 장대재 예배당은 길선주가 세우고 목회하던 터전이다. 그는 일생의 정력과 심혈을 부어 그 당시 동양 제일가는 큰 교회로 육성하였고 또한 여기서 반도 강산의 영계(靈界)를 지도한 것이다. 그 당시 평양 장대재 교회 길목사는 이 나라 안 어느 교회 어느 신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이름은 외국에도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평양성에 있는 각 교회도 왕성하여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고 이나라 각지에 교회가 봄비 내린 후 댓순 솟듯이 일어나서 세계선교 역사상 놀랄 만한 결과를 나타내었다.
⑥. 나라를 위하여 울다.
그 동안 이 나라 운명은 어찌 되었던가? 길선주가 예수를 믿던 을미(乙未) 년에 과거 2백여 년간 청국의 속국으로 있던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고 이왕(李王) 희(고종)가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다 허수아비 놀음이요 일.러전쟁을 치르고는 을사(乙巳) 년에 가서 보호조약을 맺고 경술(庚戌)년 8월 29일에 한국과 일본이 합병되고 보니 4천년 역사도 5백년 사직(社稷)도 서산에 걸린 해처럼 떨어지는 비운을 만났다. 나라가 망한 슬픈 이야기를 해서 무었 하리오.
구름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울었다는 길선주는 꺼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라 보며 피눈물을 뿌리기 몇 번이었던고!
그는 강단에서도 “슬프다! 감개무량하다!" 고 울부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나라를 사랑하는 이는 나라를 사랑하는 아들을 낳는다. 그의 큰 아들 진형(鎭亨)은 나이 아직 열 아홉 밖에 안 되어 선천 신성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자기 보다 나이 많은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애국열을 불어 넣었다. 그리하다가 나라가 일본과 합한 후, 소위 105인 사건에 걸려서 서울 경무총감부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갈빗대가 부러졌다. 후에 감옥에서 나와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하여 갈빗대는 끊어 내었으나 폐가 또 상하여 치료할 소망이 없으므로 병든 몸을 배에 싣고 고국으로 올라온지 이틀 만에 별세하였다.
길선주는 나라를 잃어버린 설움에 아들 죽은 설움을 더하여 가슴 아파하기 지극하였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길선주가 민족대표 33인 중 그리스도교 대표로 서명한 것은 길이 길이 역사에 빛날 것이다. 그 때에 그는 "독립 아니면 죽음이다." 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의 둘째 아들 진경(鎭京)도 그 당시 열여덟 살 밖에 안 된 소년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평양경찰서에서 혹독히 고문을 당하고 평양감옥 유년감(幼年監)에서 푸른 옷을 입고 복역하였다.
부자와 형제 세 사람이 모두 이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가정은 믿음의 가정인 데다가 또한 애국자의 가정으로 이 나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⑦. 그의 마지막.
독립 운동의 바람이 지나간 후, 길목사는 여전히 평양 장대재교회에 있으면서 전국 각 교회를 순회하며 부흥운동을 계속하였다. 각 교회의 요청에 응하느라고 몸을 편히 쉴 시간을 넉넉히 갖지 못하였다.
1936년 10월 26일이다.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 새벽기도회를 지도하다가 강단에서 거꾸러진 채 회복하지 못하고 저나라로 옮기니 때에 그의 나이 67세이었다.
길선주는 한국교회라는 동산에 피었던 한 송이 꽃이었던가? 길선주라는 꽃이 떨어진 후 한국교회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도 빛을 잃은 듯 하였다.
그는 한국 영계의 용장이었다. 그는 한국 초대교회의 자랑이었다.
그는 초대 교회의 샛별이었다.
출처 :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 金春培 編. 聖文學舍 刊行. 1961년 11월 30일 발행.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
한국인에게 새벽은 남다른 시각이다. 꼭 100년 전인 1907년 1월 6일부터 10일간 평양 장대현(章臺峴)교회에서 시작된 부흥사경회는 길선주(吉善宙) 장로의 회개를 계기로 ‘대부흥운동’으로 발전했다. 한국인 최초의 일곱 목사 중 한 명인 그는 젊은 시절 선교(仙敎)에 심취해 여러 해 동안 입산수도하며 새벽 기도깨나 했던 인물이다. 선교사 데이비스는 ‘선교사’(The Missionary·1910년)에서 ‘평양에서는 길 목사와 장로 한 사람이 교회당에 와서 새벽 기도를 드리곤 했다’며 한국인 특유의 새벽 기도를 기독교와 접맥시킨 인물로 길선주를 지목한다.
교회사 연구자들은 평양 대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 창전(創前)교회에서 열린 각 교파 합동기도회에서 선교사 하디(Hardie·한국명 하리영·河鯉泳)의 회개가 씨앗을 뿌렸다고 보고 있다. 자신의 선교가 효과가 없었던 이유가 한국인에 대한 백인으로서의 우월 의식과 자만심에 있었다는 회개였다. 김영희(金永羲)는 ‘좌옹 윤치호 선생약전’(佐翁尹致昊先生略傳·1934년)에서 선교사들의 우월 의식을 ‘양대인(洋大人)’이란 표현으로 설명한다. 선교사들의 ‘양대인 의식’은 가난하지만 자부심이 강한 한국 민족에게 반발을 샀는데, 하디가 이를 회개하면서 선교사들 사이에 회개의 물결이 일었다. 1907년 부흥사경회에서 길선주 장로가 “형제들을 질시했으며 방위량(Blair) 선교사를 미워했다”고 자복하자 다른 교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를 고백했고, 회개 대열이 줄을 이었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축첩(蓄妾), 조혼(早婚), 음주, 흡연’ 등을 금하는 기독교 사회윤리관 정립으로 발전했다. 곽안전(郭安全)은 ‘한국교회사’에서 이를 계기로 그간 여러 손실을 입혔던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손해를 배상하는 운동이 일어났다고 적는다. 교회사 연구자들은 평양 대부흥운동이 ‘한국 교회와 교인의 도덕성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현재 개신교계에서 이는 대부흥운동 100주년 기념 움직임도 그간 교회가 물적·양적 팽창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거울삼아 한국 사회의 도덕성 향상에 기여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어떨까.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 조선.07.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