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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方舟)로 들어오는 걸음 (bo 步) 댓글[0]
히브리어와 한글 (2010-02-01 오전 12:39:31) http://blog.somang.net/bhkim79/5598
방주(方舟)로 들어오는 걸음 (bo 步)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창세기 6장 8-9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방주를 짓고 가족들을 데리고 방주(方舟)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과의 새 언약에 들어갑니다.
 
창세기 6: 18 그러나 너희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세기 7:7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창세기 7:13 곧 그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아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방주에 들어갔고
 
여기 밑줄 친 우리나라 말로 ‘들어가다’로 새겨진 히브리어 동사는 모두 בוֹא bo입니다. 이 בוא 라는 동사는 ‘걷다’ ‘걸음’의 한자말 步를 생각하면 쉽게 기억됩니다. 이 동사는 구약성경에 약 5천 번 나오는 말(씀)하(시)다 אמר amar 동사 다음으로 가장 많이 (2530번이나) 나오는데, ‘(들어)오다’의 뜻에 가깝고 ‘가다’ 라는 동사는 הלך halak 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방주에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들어가다로 새겼는데 방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원래 뜻은 들어오는 것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안으로, 방주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막/성전으로 들어오는 것에 בוא bo 라는 동사를 쓴 것을 보면 이것이 보다 분명해집니다.
출애굽기 28:29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 28:35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갈 때에...
레위기 16:23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온 것이나 아론이 성막, 성소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들어오다 בוא bo 라는 동사가 매한가지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들어오는 것, 방주(方舟) 에 들어오는 것, 하나님의 성막(聖幕)에 들어오는 것, 말씀을 청종하고 언약 안으로, 믿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 이것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첫 걸음(bo 步)과 같습니다.
                                   2010년 1월의 마지막 날 비쉬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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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축복, 형통 댓글[0]
히브리어와 한글 (2010-01-07 오후 1:52:10) http://blog.somang.net/bhkim79/5549
복 받고 형통하는 삶의 새해
 
경인년 2010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 모두들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를 한다. 새해 더욱 건승하고 다복하라고 인사를 한다. 새해 만사형통하시고 댁내 만복이 깃들라고 인사를 건네고 또 받는다. 우리는 설빔 옷에, 원앙베게에, 숟가락 젓가락에 이르기까지 목숨(壽)과 복(福)을 새겨놓는다.
 
복을 받는다는 뜻으로 히브리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동사 ברך(바라흐)는 ‘무릎을 꿇고 복을 빈다’ 뜻에서 ‘복을 받는다’, ‘축복한다’라고 우리말로 새겨진다. ברך(barak)는 무릎이라는 뜻이다. 미국 대통령 바락 오바마의 바락도, 이집트의 무바락 대통령의 바락도 바로 이 무릎을 꿇는 경배와 축복과 연계되어 있는 이름이다. 아랍어 아람어 히브리어는 서로 연관성 있는 단어들이 많다.
 
이 ברך(barak)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 ברכך(berakah)가 ‘축복’ ‘복’이다.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히브리인들도 복을 갈망했다. 그래서 구약에 ‘복을 빈다’, ‘축복한다’는 ברך는 328번이나 나오고 여기서 나온 명사 축복 ברכך도 71번이나 나온다. 총 약 4백번이나 된다.
 
히브리인들에게 축복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한 첫 사건은 창세기 12:2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세기12:1) 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은 昌大케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의 될지라” (창세기12:2)고 약속하신다.
 
히브리어 원문과 parallel 한글 번역은 다음과 같은데, 축복하다 (바라흐)와 축복(베라카)가 나온다:
ואעשׂך לגוי גדול ואברכך וגדלה שׁמך והיה ברכה
축복이 있으리라     네이름을 크게하고    너를 축복하고 큰 민족을 네게 이루리라.
 
히브리인들의 축복 기도(민수기 6:24-26)에도 ברך(바라흐)가 나온다. 축복과 은혜의 축도인데 히브리어 원문과 한글 parallel 번역은 다음과 같다: 
יברכך יהוה ושׁמרך
너를 지켜주시고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고
 יאר יהוה פניו אליך ויחנך
네게 은혜 베푸시고 네게 얼굴을 여호와께서 비추시기를 원하고
ישׂא יהוה פניו אליך וישׂם לך שׁלום
평화를 네게 주고 네게 얼굴을 여호와께서 돌리시기를 원하노라.
 
이 축도는 히브리인들의 조상으로부터 자손들에게 이르도록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축복의 기도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민수기 6:22), 아론과 그 아들에게 - 즉 사제, 목사님에게 -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민수기 6:23)라고 하여 가르쳐 주신 축도이다. 유럽교회에서는 이 축도로 예배를 마친다. 아마도 오랜 기독교의 전통을 유지해온 그들에게는 이 축복의 기도가 마땅하게 여겨졌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처럼 히브리인의 축복은 하나님이 돌아보고 지켜주는 복이고 사랑과 자비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 복이다.
טוב(tob, 좋다)에서 나온 טוב(tub, 좋은 것, 형통하는 것)이다. 그 좋은 것, 즉 복은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욥기 20:16절에 ‘그들의 복록이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바로 이를 잘 말해준다.
 הן לא ביךם טובם
그들의 복은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보라!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다.
 
또한 구약의 복은 올바른 길로 가는 것과 연관이 있다. אשׁר(ashar, ‘곧바로 가다’)는 동사는 ‘복되다고 하다’, ‘축복하다’는 뜻도 가진다. 여기서 나온 אשׁר(esher)는 행복, 축복의 뜻으로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로 45번 나온다.
 
구약의 אשׁר(esher  축복)는 ‘복된 자, 복받은 자’로 그 전통이 신약으로 이어진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말씀하신 8복, 즉 “심령(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온유한 (겸손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 긍휼히 여기는 자 (자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마음이 청결한(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의를 위하여(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 복된(Μακάριοι)은 바로 히브리어의 אשׁר(esher, 행복, 축복)와 연관된 개념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돌아보고 얼굴을 비추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그 복,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마음에 들어와 채워질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이라야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곧은 길로 가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라야 받을 수 있는 복이다.
 
그런 복이 경인년 2010년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에게 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해본다.
                          
               2010년 1월 7일 러시아력 성탄절 눈덮힌 비쉬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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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히브리어와 한글의 감칠맛 4) 댓글[0]
히브리어와 한글 (2009-12-22 오전 9:16:31) http://blog.somang.net/bhkim79/5523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시편 125:2은 우리들 사는 곳을 산이 에워싸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듯이 여호와도 우리를 에워싸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로부터 도움이 옴을 찬양한다.
 
히브리어와 한글을 좌우로 거울비추듯 나누어 새겨보면 다음과 같은 pararell 번역이 된다.
 ורושלם הרים סביב לה
그를 빙둘러 산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듯(두르듯이)
 ויהוה סביב לעמו מעתת ועד-עולם
영원-까지 지금부터 백성을 빙둘러 여호와께서도 에워싸신다 (두르신다)
 
둘러싼다 두른다, 에워싼다는 우리말은 참 감칠 맛이 날 뿐 아니라, 서울 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산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곳이나 이곳 중앙아시아 텐산(天山)산맥의 눈덮힌 연봉이 밥상처럼 와 닿는 곳에서는 예루살렘 못지 않게 참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는
이러한 마음에서 절로 나온 찬송이리라.
 
시편 121편에서 나온 찬송이다.
 
히브리어와 한글을 좌우 거울로 비추어 나눠 본 parallel 번역은 다음과 같다. (어디서와 올까만 자리 바뀜 ∿ 을 하였다)
 אשא עיני אל ההרים מאין יבא עזרי
나의도움 어디서∿올까 산을 향하여 내 눈을 들리라
 עזרי מעם יהוה עשה שמים וארץ
땅과 하늘을 만드신 여호와로부터 나의도움(이 온다)
 
                                                              200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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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파견 선언문 (히브리어와 한글의 감칠맛 3) 댓글[0]
히브리어와 한글 (2009-12-22 오전 1:11:31) http://blog.somang.net/bhkim79/5521
예수님의 mission statement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시고 성령이 충만하여 갈릴리로 와서 나자렛 고향의 회당(시나고그)에서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이 적힌 양피지의 성경말씀을 펴서 읽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파견 선언문 (mission statement) 을 읽으신 셈이다.
 
이사야서에 적힌 히브리어 원문과 누가복음 4:18-19의 헬라어를 대조해보면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를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사야 서 61:1-2의 히브리어에 맞추어 원어 분해에 가까운 한글 새김은 다음과 같다.
 רוח אדני עלי יען משח יהוה אתי
내게 여호와가 기름부었으니 내게 여호와 내주의 영혼이라
 לבשר ענוים שלחבי
그가 나를 보내셨으니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לחבש לנשברי-לב
마음이 부셔진 이를 감싸라고
לקרא לשבוים דרור ולאשרים פקח-קוח
놓임을 갇힌 이에게 그리고 자유를 붙잡힌 이에게 외치라고
 לקרא שנת רצון ליתוה ויום דקם
되갚음 날을 여호와 은혜의 해를 외치라고
 לנחם כל-אבלים 우는 자 모두를 달래라고.
 
우리말로 새겨보면 히브리어를 거울로 거꾸로 좌우를 바꾼 어순 그대로에서 크게 어긋나지않고 원어의 뜻과 비슷한 감칠 맛 나는 parallel 번역이 된다.
 
누가복음 4:18-19에는 이사야서의 히브리 어가 헬라어로 새겨나오는데
 
"주의 성령이 내게 (오셨으니)
복음(ευαγγελισσθαι)을 가난한 이에게 주라고 내게 기름부으시고
선포하라고 잡힌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라고 보내셨고(αποσειλαι)
눈먼 이에게 다시보게 함을 선포하라(κηρυξαι)고
주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라고" 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갇히고 붙잡힌 이가 눌린 자라고 파악했고, 눈 먼 이에게 다시(ana-) 보게하는 것이 미션에 추가된 것으로 누가가 쓴 것이 눈에 띤다. 누가는 의사였고 아마도 예수님이 하신 일중에 소경의 눈에 흙을 발라 다시 보이게 한 기적이 아마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신약에는 구약의 내용이 삼투막처럼 조금씩은 다르게 흡수되었고, 그런 차이를 보인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첫 귀절은 가난한 자에 복이 있나니 땅이 그의 것이요라고 시작한다. 아마도 마음이 욕심으로 걱정으로 정욕으로 가득차지 않은 가난한 심령에 복음이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배고픈 자가 음식을 주신다는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복음이 잘 흡수되어 그런 사람이 복을 받도록 하시겠다는 것을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과 이 예수님의 mission statement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2009년 대강절 4째 주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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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와 한글의 재미있는 거울 모습 댓글[0]
히브리어와 한글 (2009-12-20 오전 11:58:09) http://blog.somang.net/bhkim79/5517
히브리어와 한글의 거울 모습
 
עזרנו בשם יהוה עשה שמים וארץ
땅과 하늘을 만드신 여호와 이름에 우리 구원(이 있다) 시편 124:8
קול קורא במדבר
사막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다) 이사야 40:3 을
히브리어와 함께 읽다가 우연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한글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히브리어에 한글 번역을 붙이면 그대로 parallel 번역이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히브리어와 한글 두 언어가 거울에 비춘 좌우가 거꾸로 된 모습으로 맞아떨어진다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울 모습의 parallel 번역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 S. 다른 거울의 예나 히브리어와 한글만이 가지는 감칠 맛을 계속 생각해보고 연구를  하신 분은 여기에 댓글을 달아 알려주시고 글을 통해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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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와 한글의 감칠 맛 (2) 댓글[0]
히브리어와 한글 (2009-12-20 오전 11:34:36) http://blog.somang.net/bhkim79/5514
 히브리어와 한글의 감칠 맛 (2)
 
시편 106:6에는 다윗이 “조상때부터 빗나가다가 (חטא) 비뚤어져 죄를 짓고(עוח) 사악한 죄를 짓는다 (רשע) 죄의 3단계 점증(漸增)이 잘 구분되어 나타난다. 영어 성경도 이렇게 점증되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데 이처럼 우리말로 새기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점증의 뜻을 낸다. 죄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고, 비뚤어져 죄를 짓고, 결국 사악한 죄를 짓는다는 죄의 3차원이 시편 한 구절에 잘 나타난다.
 
야고보서 4:17에는 ‘좋은 것을 할 줄 알면서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이 죄 (ἁμαρτια)’라고 했다.

 
올바른 길을 알면서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로 들어가는 첫 단계임을 말해준다. 그렇게 잘못된 길에 일단 들어서면 - 그것도 조상 때부터 그런 잘못된 길에 들어가면 - 여기서 벗어나기 어렵고 구부러진 줄도 모른 상태에서 죄를 짓게 마련이고, 결국은 사악한 죄를 짓게된다는 뜻이다. 우리자신이 죄의 어느 단계에 있는지 살펴보고, 첫 단계에 있다면 잘못 들어간 길을 거슬러 올라가든지 아니면 방향을 틀어 방향을 맞추어 올바를 길에서 만나는 노력을 해야 하고, 둘째 단계에 들어가 있다면 굽은 것을 펴고 왜곡된 것은 바로잡아 죄를 알든 모르든 밥 먹듯이 하는 관성에서 빠져나와야 할 것이고, 마지막 단계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굽은 것은 펴고, 잘못 들어간 길은 다시 되돌아가는 회심과 회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2009.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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