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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Mammon 댓글[0]
묵상 및 QT (2013-08-13 오후 6:12:00) http://blog.somang.net/bhkim79/7937
 
God Mammon

'마모나스' (재산, 재물)는 아람어 명사 '아만' (사람이 의뢰하는 것)에서 나왔을 것으로 킷텔 사전에서 F. Hauck은 추측하고있는데 '아만'에서 나왔다면 그 어원은 '아멘'과 같아진다.

마태6:24에는 우리도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우리말과 비슷한 발음의 헬라어가 나와 재미있다: 두(두오) 주인(퀴리오스)을 섬길(둘로스- 둘류오) 수(뒤나마이)없고 하나(헤나)는 사랑하고 다른 것(헤테로스)은 미워한다는 것.

Biblos interlinear bible Matthew 6:24의 이미지인데 각 단어끝에 u o i a가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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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모나스' (재산, 재물)는 아람어 명사 '아만' (사람이 의뢰하는 것)에서 나왔을 것으로 킷텔 사전에서 F. Hauck은 추측하고있는데 '아만'에서 나왔다면 그 어원은 '아멘'과 같아진다. 
마태6:24에는 우리도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우리말과 비슷한 발음의 헬라어가 나와 재미있다:  두(두오) 주인(퀴리오스)을 섬길(둘로스- 둘류오) 수(뒤나마이)없고 하나(헤나)는 사랑하고 다른 것(헤테로스)은 미워한다는 것. 
Biblos interlinear bible Matthew 6:24의 이미지인데 각 단어끝에 u o i a가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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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및 QT (2013-08-13 오후 6:12:00) http://blog.somang.net/bhkim79/7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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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모나스' (재산, 재물)는 아람어 명사 '아만' (사람이 의뢰하는 것)에서 나왔을 것으로 킷텔 사전에서 F. Hauck은 추측하고있는데 '아만'에서 나왔다면 그 어원은 '아멘'과 같아진다.

마태6:24에는 우리도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우리말과 비슷한 발음의 헬라어가 나와 재미있다: 두(두오) 주인(퀴리오스)을 섬길(둘로스- 둘류오) 수(뒤나마이)없고 하나(헤나)는 사랑하고 다른 것(헤테로스)은 미워한다는 것.

Biblos interlinear bible Matthew 6:24의 이미지인데 각 단어끝에 u o i a가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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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모나스' (재산, 재물)는 아람어 명사 '아만' (사람이 의뢰하는 것)에서 나왔을 것으로 킷텔 사전에서 F. Hauck은 추측하고있는데 '아만'에서 나왔다면 그 어원은 '아멘'과 같아진다. 
마태6:24에는 우리도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우리말과 비슷한 발음의 헬라어가 나와 재미있다:  두(두오) 주인(퀴리오스)을 섬길(둘로스- 둘류오) 수(뒤나마이)없고 하나(헤나)는 사랑하고 다른 것(헤테로스)은 미워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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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시는 하나님 댓글[0]
묵상 및 QT (2010-01-10 오후 9:01:56) http://blog.somang.net/bhkim79/5559
질투하시는 하나님
- 시샘(嫉妬)하도록 열정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 외아들(獨生子)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 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 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 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 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 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 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 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20:1~7]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의 길에서 시내山에 이르러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10계명을 주셨다. 그 중 1-4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출애굽기 20:1-7중에서 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은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고 특히 질투라는 단어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 고민 가운데 질투의 말과 뜻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간관계에서 질투(嫉妬)는 일반적으로 사랑을 잃거나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의 표출이다. 서양의 문학에서는 이런 감정을 파란 눈의 악마와 같은 질투라고 표현 (쉐익스피어)했다. 모든 문화에서 질투가 표출된다고 한다.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감정의 표출인데 부정적인 뜻이 많고 많은 인간관계에서 이 감정에 휩싸인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5-6 달 된 갓난아이도 질투를 안다고 한다. (Draghi-Lorenz, R.의 2000년 연구 및 Hart, S. 2002년. Jealousy in 6-month-old infants. Infancy, 3, 395–402쪽)
 
한자어 질투(嫉妬)는 여인네와 관련이 있어 보이고 비슷한 시기(猜忌, 현대중국어에서는 妒忌로 표기)라는 표현은 파란 눈의 악마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다. 우리말로 ‘시샘하다’, ‘샘내다’ 로 새겨볼 수 있는데, 여전히 부정적인 단어이다.
 
왜 그런 부정적인 질투(嫉妬)단어를 하나님과 연결하여 하나님 스스로 말씀하시고 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일까?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자.
 
히브리어 qanah 라는 단어는 영어로 be jelous (질투, 질투하다) 또는 envy (부러워하다)로도 번역되는데, 질투는 사랑과 연계된 감정인데 반하여 부러움은 꼭 사랑과 연계된 것이 아니라는 차이가 있다.
 
프랑스어 jalousie는 jaloux (jealous)라는 형용사에서 나온 명사인데 이는 라틴어 zelosus (zeal 즉 열정이 가득 찬), 그리스어 ζήλος (zēlos),에서 나온 것이다. 이 표현은 굳이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기 보다는 열정과 열심(emulation, ardour, zeal)과 같이 긍정적 뜻을 가지는데, 끓다, 발효하다(to boil, ferment) 동사와 빵을 부풀리는 데 쓰이는 이스트(yeast)와 같은 어근을 가진다고 한다.
 
한편, 독일어로는 일종의 병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질투의 독일어 Eifersucht (인도유럽어 ai = 불火과 고대독일어 eiver = Herbe, Bittere; Erbitterung 쓴 맛 또는 고대독일어 = Krankheit, Seuche 병 疾病 또는 疫病이 합쳐진 단어)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주의, 사랑, 존경, 굄 (Aufmerksamkeit, Liebe, Respekt 또는 Zuneigung)이 부족한 상태 즉 미흡한 인정을 받을 때에 생기는 병적인 감정 상태를 뜻한다고 한다.
 
 히브리어 ‘질투하다’ qanah 동사는 구약에 34번이나 나오고 그 명사형 질투 qinah 는 43번이나 나온다. 이 단어는 꼭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꽤 많이 쓰이고 있다:
창세기 26: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사람이 그(이삭)를 시기(시샘)하여...’;
창세기 30: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 (레아)을 투기(질투)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민수기 11:29 ‘모세가 그(한 소년)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시샘)하느냐...’;
민수기 25:10-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민수기 25:13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시편 37: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시샘)하지 말지어다’
시편 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질투)하였음이로다’
잠언 3:31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시샘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말라’
잠언 23: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말고 (시샘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잠언 24:1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시샘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
잠언 24:19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질투하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이사야 11:13 ‘에브라힘의 투기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는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투기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러나, 역시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 이라는 뜻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구절이 많고 그 표현의 반복된 형태로 나온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신명기 6: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신명기 32: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신명기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질투하게 하였으니)... 나도 ...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여호수와 24:19 ‘여호수와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열왕기상 14:22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열조의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으니(질투하게 하였으니)
시편 78:58 ‘자기 신당으로 그 노를 격동하며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를 진노케하였으매(질투하게 하였으매) ...’
시편 79: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리이까 주의 진노(질투)가 불붙듯하시리이까
에스겔 8:3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던 곳이라’
에스겔 39:25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투기)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지라’
나훔 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스바냐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지키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스바냐 3: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스가랴 1: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스가랴 8: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악에 하나님이 분을 격발하고 질투하신다 히브리어 ‘질투하다’ qanah 동사의 그 명사형 qinah 는 주로 인간관계의 시기, 질투, 시샘 외에 하나님의 열정으로도 새겨져 나온다. 열왕기하 19:31, 이사야 26:11, 요엘 2:18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열왕기하 19: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잠언 6:34 ‘그 남편이 투기함으로 분노하여 원수를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잠언 27:4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전도서 4: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시샘)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서 9:6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시샘)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아가 8:6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간치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사야 26:11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나이다마는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
에스겔 35:11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노하며 질투한대로 내가 네게 행하여 너를 국문할 때에 그들도 나를 알게 하리라’
에스겔 36:6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땅을 대하여 예언하되 그 산들과 멧부리들과 시내들과 골짜기들을 대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투기와 내 분노로 말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이방의 수욕을 당하였음이니라’
요엘 2: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질투하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하나님의 형상을 딴 사람들이,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으로 전능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바꾸어 그런 것들과 견주거나 같이 놓는다면,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에 하나님인들 가만히 잠잠코 있겠는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진노를 격발하며 이 어리석고 우둔한 짓을 그만두게 하지 않겠는가?
 
마치 사랑하는 자녀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고 입혀주고 공부시킨 부모를 외면하고, 예를 들어 사이버 세계의 가상을 부모로 여기고 넋을 빼놓고 있다면, 마약을 한 중독자처럼 환상에 잡힌 허상을 쫒고, 부모와 담을 쌓고 폐인이 되는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면 그 부모인들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하겠는가? 하물며 사람이 자녀에게 그럴진데, 자신의 형상을 인간이, 인간보다 못한 피조물이나 물건을 인간보다 높이 모시고 심지어는 하나님보다 높이 모신다면, 그런 넋 빠진 짓을 하나님이 가만히 보시고만 있겠는가? 지아비가 사랑하는 아내를 속이거나 사랑하는 아내가 지아비를 져버리는 데 사랑하는 가족이 아내와 지아비가 가만히 잠잠코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 것이 얼마나 가정과 그 당사자와 주변 사람에게 아픔과 슬픔을 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혹시 돈과 명예와 권위 아니면 그 무엇인가에 휘둘려 그 우상에 빠져 있다면 이는 분명 하나님의 질투를 격발케할 것이다. 또 성령을 슬프게 할 것이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너무도 크고 신실하셔서 질투하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기에, 그리고 너무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시기에 가만히 잠잠코 있을 수는 없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고 성령을 슬프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일이 있는지 회개하면서, 우리는 찬송가 357장의 노래처럼 회개하고 하나님만을 향하고 섬겨야 할 것이다.
 
1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하나님 이름 높여 기리세 온 천하 백성 모두 나와서 다 같이 하나님만 섬기세
 
2 세상의 헛된 우상 버리고 인간의 모든 부귀 영화와 거짓과 불의 모두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세
 
3 ....                                          아멘
 
우리를 항상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의 사랑에 맞게 우리도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을 몸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2010년 둘째 주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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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חן)를 입다 댓글[0]
묵상 및 QT (2009-12-28 오전 10:05:22) http://blog.somang.net/bhkim79/5533
은혜(חן)를 입다
 
찬송가 495 “내 영혼이 은총 입어”는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1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化하도다(바뀌도다)
2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同行하니(함께 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괄호안의 우리말로 바꾸어 불러도 좋겠다.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1. Since Christ my soul from sin set free, This world has been a heav`n to me; And`mid earth`s sor-rows and its woe,`Tis heav`n my Je-sus here to know.
2.Once heav-en seemed a far-off place,Till Je-sus showed His smil-ing face; Now it`s be-gun with-in my soul,`Twill last while end-less a-ges roll.
3.What mat-ters where on earth we dwell? On moun-tain- top,or in the dell, In cot-tage, or in man-sion fair--Where Je-sus is,`tis heav-en there.
(Refrain) O hal-le-lu-jah,yes,`tis heav`n!`Tis heav`n to know my sins for-giv`n; On land or sea, what mat-ter where? Where Je-sus is,`tis heav-en there.(A-men)
은총은 은혜로 새겨볼 수 있겠다.
 
성경에서 은혜(חן)는 창세기 6:8에 노아가 ‘은혜를 입다’는 표현으로 처음 나오면서 חן(헨)은 68번이나 나온다. 이 חן(헨, 독일어의 바흐의 ch 발음이나 러시아 어의 x 발음)은 ‘은혜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 라는 뜻의 חנן(하난) 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다. חנן(하난) 동사는 구약에 77번이나 나온다.
 
왜 은총/은혜를 입는다고 했을까?
창세기 6:8의 ‘은총(헨, חן)을 입다’의 히브리어 표현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노아(ונח)’는
מצא חן בעיני יהוה
여호와 눈 안에 은혜를 입었다/찾았다/만났다
은혜를 ‘입다’로 새겨진 동사 מצא (마짜)는 ‘다다르다, 만나다, 찾아지다’ 등으로 새겨지는데 구약에 452번이나 나온다. 과녁에 ‘맞다’는 우리의 동사를 연상하면 쉽게 외어진다.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라 ‘어쩌다 만나다. 찾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애써 성취한 것이 아니라 거져 주신 은혜인 것이다. 그렇게 주어진 것을 우리가 이르러 만나고, 찾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성경은 ‘은혜를 입었다’라고 새긴 것이다. 이미 지어진 것, 주어진 것을 입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못지않게 한글의 감칠맛이 잘 드러난다.
 
하나님 눈에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그러기에 그는 말씀대로 산위에서 배(方舟)를 만들어 큰물이 질 때를 대비했던 것이다. 남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들이 장가들고, 시집 들고, 마시고 놀고 있을 때 그는 방주를 지었다. 여호와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달라진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아무리 어려움이 많은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에 이르르는 사람들이다.
 
                                                       성탄절 후 첫 주일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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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된 그 큰 사랑 댓글[0]
묵상 및 QT (2009-12-25 오전 10:44:28) http://blog.somang.net/bhkim79/5530
말씀이 육신이 된 그 큰 사랑 (긍휼, חסד)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και ο λογος σαρξ εγνετο) 우리 가운데 거(居)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라는 구절은 바로 앞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고 (οι ουκ εζαιμτων ουδο εκ θεληματοσ σαρκοσ)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하나님의 자녀” (εζουσιαν τεκνα θεου) (요한 1:12)” 라는 구절과 뗄 수 없게 이어져 있으면서, 대단한 반전(反轉)을 보인다. 이 두 구절 사이에는 우리 성경 번역에는 잘 새겨져 있지 않는 연결사 και 가 연계시켜 주고 있다. 육신의 의지로부터(εκ θεληματοσ σαρκοσ)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바로 그 육신이 되었다(σαρξ εγνετο)는 것이니 대단한 반전이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데’ (요한 1:1) 그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반전처럼 대단한 반전이다.
 
이러한 반전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것도 거져주시는 긍휼(חסד)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109:26
עזרני יהוה אלהי הושיעני כחסדך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하소서 나의 주 여호와여 도우소서” 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חסד)에 호소해야 한다. 크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실 긍휼(חסד)을 감사해야한다. 하나님께서 חסד를 보내시며, חסד가 왔고, 우리와 만나고 우리를 따르므로 (시편 57:3, 59:10, 85:10, 23:6) 우리는 חסד를 기억하고, 생각하며, 기다려야만 한다 (시편 106:7, 48:9, 33:18)고 성서학자 W. Zimmerli는 긍휼(חסד)을 논하고 있다.
 
유럽에서 30년 전쟁으로 피폐한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חסד)을 전쟁의 참혹한 들판에서 깨달은 독일의 찬송 작사가 게르하르트(Paul Gerhardt)는 다음과 같은 노래의 가사를 지었다:
“우리에게 무엇으로도 잴 수 없을 만큼 사랑하신 것을 주신 바로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시려고,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주셨다. 권력의 보좌와 영광으로 부터” (Sollt uns Gott nun können hassen, der uns gibt, was er liebt über alle Massen? Gott gibt, unserm Leid zuwehren, seinen Sohn aus dem Thron seiner Macht und Ehren.)
 
전쟁의 파괴 속에서 이런 찬양이 나올만큼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도 크다. 주님은 우리의 슬픔에 위로를, 보지 못하는 자에게 다시 봄을,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도록 오셨다. 기쁜 날이다. 성탄이다.
                                                            2009년 성탄절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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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소서 종이 듣나이다 댓글[0]
묵상 및 QT (2009-12-24 오전 11:50:55) http://blog.somang.net/bhkim79/5528
말씀하소서 종이 듣나이다. (사무엘 상3:9, 3:10)
 
엘리 (עלה 올라가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선지자의 이름) 밑에 하나님을 섬기던 사무엘 ( שמואל 즉 쉠(이름)+엘(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가진 이름)이 자다가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냐고 하는데 엘리는 부른 적이 없다고 했다. 여러 차례 이러한 일이 되풀이 되면서, 엘리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는 것을 깨닫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소서. 종이 듣나이다. (삼상 3:9)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쳐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셨고 그제야 사무엘은 엘리에게 쫒아가 묻지 않고 “말씀하소서. 종이 듣나이다. (삼상 3:10)라고 대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뜻이지만 듣는다(שמע)는 동사와 너무나 비슷하여 하나님(말씀)을 듣는 자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마도 이 구절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그 말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주어 담기 전에 듣고 있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모른다면 우리는 그 말을 흘리게 된다. 나에게 들려온 말씀은 귓전에서 흘러버리거나 사무엘이 엘리의 말인줄 알고 잘못 찾아가 묻듯 잘못 대응을 하게 된다. 아니 그 다음 말을 듣지 못하게 된다.
 
이때 바로 필요한 것이 올바르게 일러주고 가르쳐주는 선생님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게 된다. 목사님, 선생님, 언젠가 새겨 읽은 성경 구절, 경험이 많은 선배, 동료가 우리 삶의 길동무이자 선생이 될 수도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여로 저로 어느 때 하나님, 주님의 목소리, 천상의 소리나 그런 메시지를 듣게 되지만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말이 우리 마음에 와 닿고 우리의 하는 짓과 판단을 바꾸고 삶을 재는 잣대를 바꾸고, 결국 사람이 바뀌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은 그런 선생님을 만나 우리가 제대로 듣고 대응하느냐 아니면 귓전에 맴돌고 사라질 것이냐가 결정된다.
 
 “말씀하소서. 종이 듣나이다.” (삼상 3:9)라고 말씀을 듣고 제대로 대응하고, 준 말씀을 마음에 와 닿고 또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우리가 꿈을 꾸다가 깨어나면 스러지는 기억처럼 그렇게 스러져버린다. 메아리처럼... 말씀을 듣고 제대로 대응하고 마음에 와 닿게 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워두어야 한다. 그러면 그 말씀은 우리를 낮추어 겸손하게 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여 삶이 달라진다. 대강절 마지막 날 우리에게 들려오실 말씀 뿐 아니라 몸으로 오신 그 오심을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가난한 심령으로 그 기쁜 오심의 말씀, 즉 복음을 듣고 제대로 대응하라고 말씀하신다.
                                               
                                            2009.12.24 대강절 마지낙 말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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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귀담아 듣고 몸을 낮추고 가는 믿음 댓글[0]
묵상 및 QT (2009-12-20 오후 12:04:27) http://blog.somang.net/bhkim79/5518
말씀을 귀담아 듣고 몸을 낮추고 가는 믿음 (지구환경과 주님의 말씀)
 
사람은 말씀을 듣을 수 있는 귀와 그 말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귓전에 말이 맴돌뿐 주어 담지 못하고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메아리처럼 스러져버린다. 그러나 마음에 와 닿은 말은 우리를 낮추고 겸손케하고 그 말씀에 복종케한다.
 
우리는 살면서 인생의 오르막 내리막을 겪으면서 자신의 귀에 자신의 마음에 들리는 목소리를 듣는데 이를 담느냐 아니면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느냐, 그리고 그 말이 우리 마음에 와 닿느냐 아니면 마음을 닿고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그 말은 달라진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린 말은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하고 귀에 주어담고 마음에 닿는 말은 힘을 가지고 변화시킨다.
 
좋은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 은혜를 받은 예를 우리는 백부장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아들이 죽었다고 찾아온 그에게 예수님은 아들은 살았다 가보라고 말씀하셨고, 그 백부장은 그말을 듣고 믿고 갔다. (요한복음 4:46, 49-50) 과연 그렇게 믿고 가기 쉬울까? 백부장은 그 말을 듣고 반가운 말이지만 귀를 의심하여 심부름꾼을 보내어 - 오늘날 같으면 손전화를 걸어 - 정말 그런지 확인해보고 믿던지 했을텐데, 그냥 믿고 갔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좋지 않은 말을 듣고도 그 말씀이 마음에 와닿고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을 들어준 예를 우리는 유다왕 요시아에게 자신은 아니라 거민들에게 재앙이 내릴 것이라는 말씀에 마음이 약해지고 (라카흐) 자신을 낮추고 (카나 겸손해지다) 옷을 찢고 통곡하므로, 하나님도 그의 말을 들었다(역대하 34:27)는 데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좋지 않은 일이 언젠가 닥칠 것이라는 말씀에도 설마 그런 일이 있겠는가라고 의문하고 또 당장 자신에게 내릴 재앙도 아닌데 라고 흘려버리기 쉽다. 또 그런 말에 당장 나에게 닥칠 것도 아닌데 자신의 마음이 약해지며 두려움을 가지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복종하기란 쉽지 않다.
 
당장 우리 지구에 찾아오고 있는 기후변화가 - 그 이유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지만 - 그대로 두면 당장 자신이 아니라 언젠가 지구의 거민 모두에게 닥쳐올 재앙이 될 것이라는 말에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유하게 하여 겸손해져서 이를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옷을 찢는) 일을 하기 쉽지 않은 예를 보아도 그러하다.
 
현대인들은 그가 대단한 지위나 돈을 가지지 않더라도 불과 3세기전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의 주인인 프랑스 왕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보통 우리는 쉽게 백마력을 넘는 차를 타거나 몬다. 3륜, 4륜, 6륜 마차를 탄 귀족들과 왕 보다 높은 마력으로 그 만큼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이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왕도 겨울에 망토를 입었다. 우리는 집에서 겨울에도 가벼운 옷만 입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쓴다. 그것도 지금 태양이 주고 있는 에너지, 물과 바람이 주고 있는 에너지가 아니라 오랜 세월 땅속에 쌓여있던 화석 에너지를 쓰면서...
 
이 지구의 어떤 생물, 세대보다 비교가 되지 않게 많은 에너지를 쓰는 우리들은 이제 그런 문명의 습관과 폐해를 반성하고 돌이키라는 말씀이 우리 귀에 맴돌고 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귀담고 마음에 와 닿는 믿음이 필요하다. 유다의 왕 그리고 이스라엘의 백부장처럼 말씀을 귀담아 듣고 믿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다의 요시아 왕처럼 거민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말을 듣고 회개하고, 백부장처럼 죽은 아들이 살아났다는 말에 듣고 가는, 그런 맑은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맑고 굳센 믿음이 우리와 지구의 거민을 살리고 축복을 주게 될 것이다.
 
                                      2009.12.15 중앙아시아 비쉬켁에서 새벽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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