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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어주시고 대속하시는 하나님 댓글[0]
중앙아시아 (2010-01-26 오전 2:29:41) http://blog.somang.net/bhkim79/5586
덮어주시고 대속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6:8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세상 다른 사람은 아니지만 노아(Noach) 만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 노아 (Noach)는 nuach 쉬다 안식하다 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 그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מצא חן בעיני יהוה
여호와 눈 안에 은혜를 입었다/찾았다/만났다 라고 나옵니다.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은혜를 입다’라는 이전의 제 글을 참고바랍니다.)
 
9절에 은혜를 입은 노아를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한글과 히브리어의 좌우가 바뀐 거울 비추기 parallel 번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נח איש צדיך בדרתין     את האלהים התהלך נח
노아는 걸어갔다 하나님과함께 그 시대사람에서 완전하고 의로운사람이었다 노아는
 
13절에 하나님이 그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14절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잣나무(gopher)로 너를 위하여 방주(tebah)를 짓되 그 안에 간(間) (qen)들을 막고 역청(kopher)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kaphar)” 는 것이고 15절에 그 방주(tebah)의 크기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 kipher כפר kaphar (스트롱 코드 3722)는 덮(어주)다 속죄하다는 동사로 כפר kopher (스토롱 코드 번호 3724a) 몸값 (ransom) 속죄금 (the price of life) 대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kaphar 가 kopher (스트롱 코드 번호 3724b) 송진이나 역청과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히브리어로는 같은 철자에 발음이어서 연상작용을 하고 언어 유희 (말장난)로 쉽게 이 단어를 떠올리게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히브리서 11:7을 봅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그렇게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서 하나님이 그를 의롭게 한 것입니다. 이른바 칭의(稱義)입니다.
 
창세기 6장 22절에 노아는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고 써있습니다. “너는 너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tebah)에 들어가고” 라는 말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믿고 그대로 행한 것입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그리고 아이들도...
 
히브리서에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였고”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사라도 잉태함을 얻었다” (히브리서 11:11)라고.
 
창세기 6장 18절은 또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은 아니겠지만 의인으로 칭한 노아(Noach)와는 하나님이 언약을 세웁니다.
 והקמתי את בריתי אתך
너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러나
히브리어와 한글의 좌우가바뀐 거울비추기 번역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언약을 세우십니다. 믿음이 없으면 언약도 설 수 없습니다. 믿고 청종하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시고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또 그 믿음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역청(kopher)을 칠합니다 (kaphar). 우리에게 예수님을 몸값 (kopher)로 주시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덮어주십니다.
 
                                                    2010년 넷째 주일 비쉬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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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복음의 꿈꾸는 사람들 댓글[0]
중앙아시아 (2009-12-20 오전 11:49:54) http://blog.somang.net/bhkim79/5516
중앙아시아에서 복음의 오아시스를 꿈꾸는 사람들 중앙아시아에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처럼 ~스탄으로 끝나는 5나라가 있는데, 그중 키르기즈스탄은 키르기즈공화국(Kyrgyz Republic, 이하 키르기즈)으로 국명을 바꾸어 구분된다. 이들 국가들은 회교권 국가인데 최근 쏘련에서 독립한 후에도 러시아 정교의 입김이 가시지 않아, 이 둘 종교가 지배적인 곳이다. 본래 이곳에는 불을 숭상하는 조로아스터교(拜火敎)와 샤마니즘이 자리를 잡았으며 한때 불교의 영향도 받았지만, 751년 고려유민 고선지(高仙芝)장군이 이끌던 중국 당(唐)나라 군대가 아랍연합군에 패배한 후 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천년 이상을 아랍 권에 들어가 회교의 영향을 받았다. 19세기말 제정러시아와 20세기 초 쏘련의 지배 하에 회교의 영향이 약해졌다. 러시아 정교도 파고들었다. 그러나 천년이상 영향을 준 회교는 ‘종교는 아편’이라는 공산주의의 종교 탄압 속에도 중앙아시아인들의 영혼 가운데 살아남았고 그 사회에 내린 깊은 뿌리는 쉽게 죽지 않았다. 모스크가 파괴되었고 종교가 탄압받았지만 회교는 스러지지 않았다. 좀 이울었을 뿐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종교 환경은 고르바쵸프가 페레스트로이카 (perestroika 고쳐 짓는다는 뜻에서 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 새 목소리라는 뜻에서 개방)을 표방하면서 달라졌다. 회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선교사들은 중앙아시아까지 아우르던 광활한 쏘비에트사회주의연방(쏘聯)이 수많은 독립국가로 해체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복음의 대상지로 적(赤)크리스트가 판치던 舊쏘련지역과 회교권 중앙아시아를 눈여겨 두고 이곳에 찾아왔다. 오랫동안 종교가 탄압받았고 특히 복음의 단비가 오지 않아 사막처럼 황량해진 중앙아시아가 한국 선교사들로는 매력적인 새 복음 전파 대상지로 떠올랐다. 천년이상 회교 영향 후 70년 넘게 공산주의의 폭정에 시달린 영혼에 복음의 초록빛 희망을 주려고 왔다. 복음의 단비가 내리지 않아 사막처럼 메마른 중앙아시아를 복음으로 오아시스로 바꾸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그러나 천년 넘게 메마른 그 험한 곳을 초록으로 이루려는 노력은 쉽지 않았다. 복음화 노력에 여러 어려움이 뒤따랐다.
 
중앙아시아는 징기스칸에서 알 수 있듯이 ‘칸’이라는 절대 지배자의 종신 권력의 전통이 강한 곳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독 키르기즈만 그런 ‘칸’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했다. 2005년 튤립혁명(tulip revolution)을 통해 부정부패한 대통령을 쫒아냈다. 동유럽의 체코 (velvet revolution), 우크라이나 (orange revolution)에 이어 이른바 색깔혁명(colour revolution)을 겪었다.
 
옛 ‘칸’의 전통과 장기집권, 비민주적인 행태가 자리 잡은 중앙아시아의 나라들은 서방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외치는 서방과 연계된 기독교 선교노력에 고운 시선이 아니었다. 전제적인 국가일수록 이들 중앙아시아국가들은 종교법을 제정에 앞장섰다. 종교법을 통하여 기독교라는 신흥종교의 진입에 장벽을 쌓고 이를 높여갔다. 종교단체 등록 요건을 강화했고 선교사들을 추방했고 교회를 빼앗았다. 그런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도 일찍이 개혁과 개방을 내세운 키르기즈 만은 사막가운데 오아시스라고 할 수 있다. 종교법이 있지만 아직 복음 활동을 펴기에 그렇게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인근국가에서 복음을 펴다가 쫒겨 난 선교사들이 밀려 둘어왔다. 그렇게 키르기즈는 중앙아시아의 복음 사역의 새 중심(target)이 되었다. 한국 선교사들은 중앙아시아의 복음의 푸른 오아시스를 일구겠다고 러시아 말로 키르기즈 말로 말씀을 증거하면서 키르기즈인들에게 복음의 단비가 되고 있다. 그렇게 중앙아시아에의 복음의 꿈은 키르기즈를 중심으로 키워졌다.
 
그러던 키르기즈에도 어려움이 닥쳤다. 사막의 열사바람이 불어와 애써 이룬 오아시스를 덮치고 있는 형국이다. 인근지역으로부터 밀려드는 선교사들이 키르기즈에 발을 붙이는 것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종교법의 규제가 강화되었다 개정된 종교법은 종래 10명이면 족했던 종교단체 등록요건이 200명으로 엄청나게 늘렸다. 그것도 키르기즈 국적을 가진 성인 200명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 활동을 매우 광범위하게 규정하면서 어떠한 종교 활동도 등록된 종교단체에서만 하도록 제한했다. 또 가정의 평화를 깬다면서 타종교로의 개종(proselytism)을 금했다. 선교사들의 체류기간을 3년으로 제한했다. 이제부터는 싫던 좋던 3년이면 키르기즈를 떠나야 한다. 인근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종교법의 개정, 더러 그보다 더 앞서간 종교법 개정은 키르기즈에서 복음의 터를 일구는 선교사들에게는 큰 시련으로 닥쳐왔다. 선교사들의 비자 기간도 짧아져 보다 자주 비자를 신청하게 되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로부터 오는 하계봉사 선교활동에도 새 종교법은 장애가 되고 있다. 종교법에 규정된 종교 활동이 너무 광범위하여 자칫 이들의 선교봉사활동이 관계당국이나 관리들의 단속의 대상이 되고 그 활동이 이루어진 키르기즈 교회가 탄압받는 빌미가 되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다하고 있다. 이곳 선교사들은 주기적인 모임을 가지고 정보를 교환하고 어려움에 ‘뱀처럼 슬기롭게’ 대처하도록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고 있다. 종교법이 개정된 날부터 3년이면 어김없이 선교지를 떠나야 하는 까닭에 키르기즈 인 목사에게 그 동안 사역하여 일군 교회를 물려주는 작업도 개척교회별로 이루어지고 있다.
 
열사 바람이 불어와도 복음의 오아시스를 일구려는 뜻을 꺾지 않고 이곳 영혼과 삶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마음에 위로가 되고 그 육신에 힘이 되는 양식이 필요하다, 주리고 목마른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날라다 준 까마귀처럼 (열왕기상 17:4-8), 그리고 구운 떡과 물 한 병으로 먹여준 천사처럼 (열왕기상 19:5-8) 이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북돋아줄 기도와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곳 텐샨(天山)산맥의 만년설 연봉이 어둠을 벗고 새벽 여명을 받기 시작할 때면 산속 나뭇가지에 홰를 틀고 밤을 지센 까마귀들이 무리지어 빛 고운 고을로 내려온다. 그 수많은 새들의 날개 짓이 마치 냇물이 흐르는 듯 스산한 소리를 내는데, 수천 마리의 무리들이 아침 하늘을 가득채운 그 모습을 보면서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 천부가 기르시나니’ (마태 6:26)라는 말씀이 문득 실감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몰아치는 열사 바람 속에서도 메마른 땅에 다시 초록을 이루기까지 묵묵히 선교의 비전을 지키는 이곳 중앙아시아의 선교사역자들에게 음식을 날라줄 까마귀가 새벽하늘을 가득채운 무리처럼 많아졌으면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로뎀나무 아래 죽음을 청하다가 천사가 떡과 물로 먹여 호렙산에 이른 엘리야의 모습,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곳에서 한 모금 물과 떡이 아쉬운 가운데 복음의 오아시스에 이르러는 이곳 선교사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QT 명상을 깨운 무리의 날개 짓의 비쉬켁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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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연주에 내 몸을 맡기라 댓글[0]
중앙아시아 (2009-12-20 오전 11:38:47) http://blog.somang.net/bhkim79/5515
하나님의 연주에 내 몸을 맡기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중앙아시아에서 비교적 작은 나라 이곳 키르기즈공화국의 수도 비쉬켁은 예전 쏘비에트사회주의연방(쏘聯) 시절에 휴양도시로 키워진 도시답게 나무가 많고 집들도 ‘다챠’ (주말 농장의 집) 같은 모양을 띤다. 쏘련의 공연예술이 발달되어 독립한지 불과 18년 밖에 되지 않은 이곳의 오페라 발레 하우스에는 겨울이면 주말 저녁 시간을 문화를 즐기며 보낼 수 있다.
 
지난주 중에는 어느 외국 개발원조 단체가 귀가 먼 아이들의 콘서트를 마련했다.
 
귀먼 아이(聾兒)들이 무슨 음악 콘서트를 할까 궁금해 가보았는데 진풍경이었다.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배경 음악에 맞추어 마치 음악에 오래 동안 율동을 연습한 아이들처럼 안무된 율동을 펼쳤다. ‘천개의 손을 가진 부처’의 율동은 약 20여명의 농아들이 겹쳐 보이는 천개의 손을 가진 부처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음악에 맞추어 연출해냈다.
 
그처럼 정교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눈을 끈 것은 약 10쌍의 남녀 농아들이 ‘오케스트라’단원과 악기가 되는 율동이었다. 10쌍의 아이들이 함께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트럼펫, 드럼 악기가 되고 연주가 되는 율동이 이어지다가, 마지막에는 각각 이들 악기와 연주가 되어 ‘오케스트라’가 되는 율동이었다. 남자아이는 연주가, 여자 아이는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트럼펫, 드럼을 연상하는 모습으로 남자아이의 악기가 된다.
 
율동은 무대 바로 밑에 손짓 지휘를 하는 율동 선생의 손짓 만 보고 따르면서 음악에 맞추어 연주하는 일사불란한 오케스트라 율동이었다. 러시아 어로 선생, 지도자를 ‘루코바텔’이라고 하는데 루카 즉 손에서 나온 단어일 것이고, 아마도 손으로 가리키고 가르치는 모습에서 이 단어가 나온 것이 아닐까 깨달아졌다.
 
감동을 준 그 농아 콘서트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에 접했다.
 
첫째, 듣지 못한다는 것이 장애이지만 그 장애는 오히려 시선 집중을 가져왔다. 아이들은 율동선생의 손짓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고 율동을 했다. 지휘자 선생의 손짓을 통해 음악을 듣고 율동하는 듯 율동이 펼쳐졌다. 세밀한 손짓의 차이에 맴돌고, 흩어지고, 모이고, 어깻짓 하고, 몸짓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그럼 우리는 누구의 어떤 손짓에 움직이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듣고 느끼지 못하는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우리가 그런 장애를 겪고 있다면 우리가 그 말씀과 사랑을 대신 듣는 것처럼 느끼는 것처럼 하여 그 장애를 극복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손짓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의 손짓이 그것일까? 우리는 그것에 주목하면서 우리가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대신 듣고 볼 수 있는 것처럼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접하게 되었다.
 
둘째, 아이들이 연주자로 악기로 바뀐 모습에서 과연 우리도 하나님의 지휘를 받아 연주하는 연주가가 되고 악기가 되어 또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내어 맡긴 것인가 아니면 다음 이야기처럼 우리 자신을 어디 다른 데에 잘못 한눈팔고 맡겨둔 상태는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접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라는 오스트리아 바이올린 연주가 겸 작곡가 (1875-1962)는 듣기 좋으면서(gemütlich)도 지속되는 비브라토(Vibrato)로 누구나 크라이슬러 음악이라고 알 수 있는 소리로 매료시킨다. 그는 바이올린 음악의 명인이며, 명장이 만든 바이올린을 가진 바이올린연주자로서도 유명하다. 그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날 바이올린 가게에서 그의 귀에 뜨이는 소리를 가진 바이올린을 발견하고 이를 팔지 말라고 가게주인에게 부탁해놓고 열심히 돈을 모았다. 세월이 지나 돈을 모아 그 가게를 찾아갔지만 정작 그가 사려던 바이올린은 팔려가고 없었다. 바이올린을 켜지도 못하는 어느 돈 많은 사람의 바이올린 콜렉션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클라이슬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돈 많은 사람을 찾아가 되팔 것을 부탁했다. 그 부자는 그가 싸들고 간 돈에 콧방귀를 끼었다. 결국 단념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던 크라이슬러는 가기 전에 딱 한번 그 악기로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켜보도록 허락해줄 것을 그 부자에게 요청했고, 그거야 못해주겠냐고 그렇게 하라고 부자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크라이슬러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온 마음을 다해 연주했다. 마음껏 연주하면서 크라이슬러 자신도 그 소리에 감동했고, 그 주인에게도 감동이 전해졌다. 마침내 연주를 마친 크라이슬러에게 그 주인은 ‘이 바이올린은 당신 것이요’라면서 크라이슬러가 건낸 돈도 뿌리치고 그에게 이 바이올린을 안겨주었다.
 
하나님은 크라이슬러와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연주가입니다. 연주가일 뿐 아니라 우리 악기를 만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마음껏 연주하도록 우리 자신을 맡긴다면 그 음악은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하나님도 기뻐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를 그 연주가, 만든 그 창조주에 내맡겨야 하는데, 우리 자신을 어디 다른 데에 맡겨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악기를 연주조차 못하거나 잘 못 연주하는 데에 잘못 맡겨둔 상태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접한다.
 
농아들은 자신을 악기의 모습으로 동료 농아가 연주하도록 했다. 몸의 악기를 맡은 농아는 선생님의 손짓에 맞추어 악기 모습의 농아의 몸 악기를 연주했다.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된 셈이다. 트럼펫이 된 아이는 연주하는 아이의 율동에 맞추어 팔다리가 움직였다. 첼로가 된 아이도 바이올린이 된 아이도 훌륭한 율동의 연주에 몸을 맡겼다. 듣지 못하는 장애 아이들의 콘서트는 그런 감동을 주었다.
 
이곳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곳에서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를 내어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율동 콘서트였다.

 
                                          2009년 12월 키르기즈공화국 비쉬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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