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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린다는 것 댓글[0]
우리사람,우리사랑 (2008-11-12 오전 10:03:05) http://blog.somang.net/3500185/4103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된다.
키가 훤칠하게 크셨던 담임선생님은 수업중에 상당히 철학적인(?) 내용을 가지고 열변을 토할 때가
많았다. 내용이 감동적이기도 헀지만  남자이면서도 감상적인데가 많아서 우리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할 때가 많았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훌쩍거리면서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있었으니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어떤 울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어려웠던 신세를 슬퍼하게 했던 감상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훌쩍거리고 나면 그 가난과 답답한 환경, 그리고 어둡게만 보였던 내일이 다소 밝아지면서 새로운
희망으로 마음이 부풀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십 수년이 지난 사은회 때, 어떻게 어린 우리들을 그렇게 울리셨느냐고 묻자 선생님은 대답하셨다.
"사랑했기 때문이지"
 
     초등학교 같은 학년 시절, 교회엘 가면 너무 열심인, 여자 선생님이 계셨다.
예쁘기도 했지만 툭 하고 건드리기만 하면 성경말씀이 줄줄 흘러나올 것 같은 선생님은 설교를 통해서
곧 잘 우리들을 울리셨다. 성경에 나오는 재미있는 내용들을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와
엮어 구성지게 말씀하시면 마음이 찧해지면서 눈믈을 훔치곤 했다.
아버지가 없었던 가정환경 때문에 "아버지" 하고 부르면 눈시울이 뜨겁던 시절이어서인지 모르나 그
선생님의 설교는 매 번 감동적이어서 자주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랜 교사생활을 하면서 반 아이들에게 그런 감동을 주리라고 다짐하면서 노력했지만 누구도 울먹거리는
친구를 본 적이 없으니 신앙의 문제인지 전하는 방법의 문제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멕시코 지역에 "아나 브랩스"라는 물고기가 있단다.
이 물고기는 특이하게도 눈이 네 개인데 눈 두개는 물속에 있고 눈 두개는 물 밖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물 밖에 있는 눈으로는 곤충등의 먹이를 잡아먹고 물속에 있는 눈으로는 적의 공격을 방지한단다.
그런데 물 밖의 눈은 눈물샘이 없어 오랜시간 물 밖에 있으면 눈이 메마르게 되고 급기야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 그래서 이 물고기는 주기마다 한번씩 깊이 물속에 잠긴다.
그렇게 메마른 눈을 충분히 적시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 그렇게 하면 다시금 잃었던 시력을 회복한다고
한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다고 말하는 이는 독서광으로 알려진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주기마다 한번 씩 기도의 샘에 잠겨라, 통곡의 샘에 잠겨라, 잠겨야 보이고 잠겨야 시력이 회복된다는 것.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바로 통곡과 눈물(히 5:7)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씨뿌리는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에 나온다. 그런데 특별히 누가복음에는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눅 8:6) 라는 말씀이 있다.
화초나 농작물을 길러보면 자라는 상태는 다르나 물기만 있으면 죽지 않는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물기가
바로 생명의 원천인 셈. 습기있는 마음은 깨어진 마음이요, 상한 심령이요, 통회하는 심령(시 51:17)
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다투다가도 상대방이 눈물을 보이면 거의 그 다툼은 끝난다. 물론 위선적인 "악어의 눈물"도 있지만
눈물은 마음에 평안을, 위로를 준다. 눈물은 용서와 화해와 회개에 어울리는 현상.
오늘 날, 우리 크리스챤들이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교회가 사회를 선도하던 그 기능을 상실한 것이 바로
눈믈을 잃어서가 아닌가 돌아본다. 눈물의 기도가 있을 때, 교회가 새롭게 도약했던 역사가 있었다.
통회와 자복이 있을 때, 교회가 그 본분을 감당하면서 사회적인 리더가 될 수 있었다.
이제 교회가 그런 자정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 민족의 역사위에 떳떳한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우리 크리스챤 모두에게 진정스러운 기도의 눈물이 필요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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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을은 어디쯤인가? 댓글[0]
우리사람,우리사랑 (2008-11-12 오전 10:01:22) http://blog.somang.net/3500185/4102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정희성의 "가을날"  
 
     옷깃을 파고드는 선득한 바람에 가을이 간 듯 하기도 하고
따사로운 햇살에 아직은 가을인 듯한 절기. 이미 코스모스는 거의 다 졌으나 아직 철늦은,그래서 초라한 코스모스들이 이 시인의 말처럼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다.
"생의 남은 날들은 누구에게나 짧다. 생에 대한 이 막무가내의 집착이 신비롭다"고 말하는 이는 매경의 이정환 문화부장. 
살아갈 날이 남아 있음은 축복이요, 은총이지만 그만큼의 의무가 남아 있다는 또 다른 뜻.
그래서인가 이해인 수녀는 이런 시로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
 
     "살아 있을 때에 한 번만 이라도 더 한 마디의 기도를, 
한 마디의 찬미를 바치게 하소서.
살아 있을 때에 한 번이라도 더 이웃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과 
웃음을 주게 하소서. 남이 몰라줘도 즐거워 할 수 있는 조그만 선행, 봉사를 한 번 이라도 더 겸손한 마음으로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지난 주말, 문화선교부에서 가평 호명산을 찾아 야외예배를 드렸다.
630m 산 정상에 커다란 호수가 드넓게 펼쳐있어 주변 경관과 함께 한 폭의 그림이었다.
물을 끌어올렸다가 낙차를 이용하는, 양수발전을 위한 인공호수. 가을은 깊었는데 땅에 떨어진 그대로의 낙엽들은 수북히 쌓여 마른 잎 냄새로 겨울을 부르고 바람결의 나뭇잎 소리는 삶의 처연함을 부른다. 이제 내 앞에 마냥 많은 세월이 놓여있는 것이 아닌데 그 끝이 아주 먼 것처럼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은 바보스러움. 이 자연속에서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스스로 낙엽되어 무너져 내리는 나뭇잎들은 오히려 넉넉한 지혜로움.
겨울이 오기 전에 준비할 것들이 많다.
크리스챤에게는 더욱 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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