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03 오후 12:00:05)http://blog.somang.net/1234/4382
" 사랑과 영혼 "
비판의 종류가 있다.
사랑하는 사이기 때문에 비판하는 사람 직장상사이기 때문에 비판하는 사람 교회안에서의 교만으로 인한 비판하는 사람
이 세종류는 모두 시험과 올무에 걸리게 된다.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비판하는 사람
비판은 받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 모두 중요하다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비판이 가능하나 뒤돌아 서서 비판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즉 비판해야 할것은 하되 비판하는 자가 자신의 신념과 이론과 교만과 인간적방법으로 육신의 안일과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 위한 비판은 더 큰 올무가 된다.
비판하는 자는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더라도 절대로 흔들리거나 상처받지 말아야 함에도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시는 스스로 시험들고 낙심하고 불평하고 원망아닌 원망을 스스로 하는 사람이 많다.
신앙의 성숙없이 비판하는 사람은 책망의 소리도 시험이되며 자신이 남을 비판하거나 책망하는 소리도 스스로 시험에 빠진다.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판단과 비판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의 영이 충만해야 할것이다. 즉 영혼을 사랑함이 부족한 사람은 절대로 비판하거나 충고해서는 절대로 사단.마귀가 틈을 탄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충고하는 사람이나 비판하는 사람은 오직 성령의 사람이어야 하며 사람의 영혼을 제일 사랑하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어야 하며 나보자 타인을 더 존경하는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
특히 상담이나 권면.비판은 사랑의 은사없이는 절대로 불가능 한것이다. 영혼사랑없이 권면이나 비판한다면 이미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것이다.
회개란? 자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회개란? 자신의 죄를 찾는 것이다. 회개란? 타인의 죄보다 자신의 죄가 더 커보이는 것이다. 타인의 죄가 10가지라면 나의 죄는 100가지가 넘는다.
정당한 핑계와 합리화 시킴은 영적 발전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겸손한 사람? 회개한 사람은?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안에 ***무엇때문이란 핑계마귀를 우선 잡아야 하리라. 우선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읽을 수 있어야 판단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는 절대로 시험과 불평이 없다.
환경과 사람을 통해 시험당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아직 내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올무에 걸린 이유는? 사욕과 교만이 앞섰기 때문이다. 내 안에 말씀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시험에 빠지지 않는다.
자신의 들보를 보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요 신령한 사람이리라. 자신의 들보가 보이지 않는 사람은 회개가 없다 감사가 없다.겸손이 없다.순종이 없다.사랑이 없다.
시험드는 이유는 자신을 볼 수 있는 말씀의 눈이 없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부터가 문제이며 내 자신이 죄인중에 괴수임을 깨닫는것이 우선해야 할 과제이다.
지금부터라도 내 안에 죄악과 사단.마귀.귀신의 역사들을 몰아내는 찬양과 기도와 회개가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말씀에 따라 속죄를 위한 내적 사역을 이루고 있는가? 중보에는 함정도, 극단도, 교만의 위험도 없다. 이것은 숨은 사역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열매를 맺게 한다.
나는 영적 삶을 낭비하는지 아니면 주님의 속죄에 내 삶을 몰두시키고 있는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구석구석까지 밀려와서 나를 온전히 지배하고 계신가? 내 삶의 축이 되는 구심점이 주님의 속죄라면 내 삶의 각 부분에는 주를 위한 열매들이 달리게 될 것이다.
나는 내 삶의 구심력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 시간을 내어야 한다. 단 1분이라도 이구심점에 몰두하기 위해 마음을 쏟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보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요한 15:7) 이것이 당신 삶의 구심점이다. 모든 것을 이 축에서 출발하여 생각하고 행하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 15:7) 나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가? 내가 힘써 주 안에 거하려고 힘쓰는가? 내 삶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무엇인가? 사업인가, 봉사인가? 남을 위한 희생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힘써 일하는 것인가? 내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주님의 속죄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