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5 오전 6:35:05)http://blog.somang.net/1234/4951
고린토전서 11장
--고린토 전서 11, 2-16 전례에서 여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
*** 이제까지 그리스도인들과 이교적인 환경간의 접촉에 있어서의 중요한 영역을 정화한 후 이제 11-14장에서는 공동체 내부의 문제에 관심을 둔다.
그 내부의 문제란 1) 공동체 모임에서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워야하는 문제(11, 2-6). 2) 올바른 성찬례 거행에 대하여(11, 17-34). 3) 성령의 여러가지 은사의 바른 수위와 사용(12, 1-14, 40) 등으로 여기서 사도는 “공적인 예배에서 좋은 질서”를 지키라고 권고한다.
*** 11장에서 사도는 공동모임에서 여자가 머리수건을 착용해야 한다는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현대인들에게는 좀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는 이 주제를 “전승들”(traditions)을 잘 지키는 데에 대한 칭찬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그 가운에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예배 모임 중 여인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우지 않고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공적인 모임에서 발언하는 것 자체가 벌써 유대인의 관습은 물론이고 그리스 관습까지도 넘어서는 일이지만 그것은 바울로에 의해 여러 번 제기된 그리스도 안에서의 근본적인 남녀평등(갈라 3, 28)에서 온 결과였다. 바울로는 그러나 “나는 무엇이든 할 자유가 있다”라고 한 말이 고린토와 같은 도시에서는 방종적인 의미에서 잘못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제동을 걸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여자도 남자도 없다”는 원리를 분명히 한 바울로가 교회 안에서 여자들이 갖는 역할과 기능에 있어서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의 관습을 많이 수용해 왔었는데 그 중 하나가 여자들이 공적인 모임에서는 수건을 쓰는 것이었다. 유대교에서는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사람 앞에 나다니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고 非유대인의 사회에서도 당시 여자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외출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상스럽게 여겨지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서야 한다는 생각은 당시 문화의 일부분이었고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바울로는 일상적인 관습을 존중한다는 그의 논의를 펼친다.
더욱이 고린토교회 안에는 제사 음식이나 성생활 문제 등에서 본 바와 같이 ‘자유’ 문제를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고린토교회 안의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 “남자도 여자도 없다”는 원리에 대한 급진적인 해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징표라고 바울로는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질서와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울로는 성서적인 전통과 자연적인 감수성에 호소하면서, 머리수건 문제 같은 외면적인 모습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기이하게 보임으로써 당대의 풍습을 거슬러 물의를 빚지 말 것을 권한다.
그는 여기서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답 즉, 예절 중 여자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워야 할 지에 대한 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대하여 가장 높은 수준의 신학적인 답변을 한다.
<11, 3-9> 바울로는 성서적인 전통에 따라 자연적이고 확실한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목적에 있어서의 남녀의 상호 의존성과 동등성을 말한다. 바울로의 가르침의 핵심은 남녀의 성을 구별 짓는 것이지 결코 다른 성에 종속 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하느님-그리스도-남편-여자”를 하나의 계층적 서열로 배열하면서 우월한 존재로부터 열등한 존재의 순서를 기술한다. 이것을 보고 열등한 존재는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우선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로는 고린토 전서 첫 부분에서 “다 너희의 것이요”(3, 22),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이다”(3, 23)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속해 있으므로 그는 더 이상 어느 인간에게도, 세상이나 “생명이나 죽음이나 현재나 미래” 어느 것에도 매어 있지 않다고 단언하였다.
같은 논리로 바울로는 11장 12절에서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났느니라”라고 하느님의 절대 주권과 그 안에서 모든 이의 동등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8-9절에서 남자가 여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로부터,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할 때 그는 창세기 2, 18-23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남자를 위하여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여자의 열등성이나 여자는 남자에게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여자가 “남자와 같이” 창조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남자가 외로워 하기 때문에 그의 반려자가 되도록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을 반드시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나 여자를 비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분명히 여기서 남녀 구별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고린토교인들이 너무 지나친 종교적 열정 때문에 남녀 구별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면서 교회 예배에 참석할 때에는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서도 그는 11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다”고 다시 그의 원론을 단언한다.
중요한 점은 남녀간의 상호 의존성과 남녀 모두가 하느님의 주권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사도가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12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통일성을 강조할 터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의 사회적 지위와 性과 인종이 다른 것과 같이 그들의 은사와 기능이 비록 다를 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하나이고 서로 의존하면서 한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리를 둔다(갈라 3, 27-28 참고).
바울로와 여성 *** 고린토 전서 11장의 본문은 공적 예배를 인도하는데 있어서 남녀가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바울로나 고린토 교인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예배를 인도하는 일에 있어서 남녀가 동등하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의가 더 이상 언급되고 있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로가 여기서 문제로 삼는 것은 여자가 공적 예배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여자가 예배 때에 기도하거나 예언하면서 머리에 수건을 쓰느냐 아니냐이다.
그러므로 11, 2-6절의 가르침 안에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고 바울로가 다른 곳에서 주장하고 있는 원리와 모순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실 바울로가 교회 안에서 여인들과 가졌던 관계를 종합해 보면 그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남녀의 구별이 없다는 원리를 그의 삶 속에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린토 전서 12, 11에서 그는 “글로에 집에 속한 사람들”을 통해 고린토 교회의 분쟁을 들었다고 말하는데 글로에라는 이름은 여자의 이름이고 이 편지를 보면 그 여자는 바울로와 교인들 중간에 서 있었던 같다.
필립비서 4, 2-3에서 사도는 그의 “협력자”로 여겨지는 유오디아와 신디케, 두 여인의 불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누군가의 중재를 권면한다. 이것을 보면 그 두 여인의 불화가 상당히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이 여성들이 그들 교회 안에서 특별히 중요한 책임을 수행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로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던 디모테오와 클레멘스를 존중히 여겼던 바와 꼭 같이 복음을 위해 힘썼던 이 두 여인의 헌신을 존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바울로와 가장 가까웠던 여자는 아퀼라의 아내 브리스카였다. 바울로는 고린토 전서 끝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아퀼라와 브리스카가 자기네 집에 모이는 교회와 함께 주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16, 19).
그런데 이 인사는 남자에게 가장의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고 있던 당시의 법과 관습에 비추어 보면 결코 자연스런 일이 아니다. 바울로가 그들을 함께 언급한 것은 바울로의 결혼관을 반영할 뿐 아니라 브리스카가 교회 안에서 지도자로서 중요하다는 그의 이해를 반영해 주는 것이다.
이런 언급은 로마서에서도 반복된다(16, 3-5; 사도 18, 26). 또한 바울로는 로마서 16, 1-2에서 “겐크레아와 교회의 봉사로 우리의 자매 페베를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교회의 봉사자( : diakonon minister)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든 추천받은 페베는 자신의 교회와 바울로의 통역자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서 16장에1-2에서 그는 페베 외에도 그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몇 명의 다른 여인들을 언급한다. “여러분을 위해 수고를 많이 하는 마리아”(6절), “주님 안에 수고한 드리패나와 드리포사” 그리고 “주님 안에 수고한 사랑하는 베르시스”(11절), “나의 어머니이기도 한 루포의 어머니”(13절), “율리아 네레의 누이”(15절) 등 그들의 바울로가 편지를 보내고 있는 교회들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탁월한 여신도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은사와 기능과 활동들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에서 결코 과소평가되지 않았고 그들이 성차별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결론적으로 바울로가 그의 사도직에서 만났던 가까운 동료들 가운데는 여자들도 있었고 그들은 교회 안에서 탁월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교회 안에서 여자들이 갖는 지위에 대한 바울로의 원리는 아주 명백하다. 즉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는 그의 가르침을 그의 삶 속에서 실천하였다.
--고린토 전서 11, 17-34 주님의 성찬에 대한 가르침
*** 여자의 머리 수건 문제에 이어 또 다른 전통이 남용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성찬식의 거행에 관한 것이었다. 고린토교회는 소규모의 가정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기도를 따로 모여 했었지만 성찬식은 함께 모여 거행 하였다. 그런 경우 그들은 각 사람이 자기 신분과 재산 정도에 맞게 음식을 갖다 내고, 모인 사람이 다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형제적 일치를 나누었다.
이 모임은 형제적이고 축제적인 식사로서 고대 사회에서 그러했듯이 저녁 때 하였으며, 신분이 서로 다른 각양각층의 사람들이 함께 친교를 나누는 유일한 자리였다.
그러나 고린토교회에 일어난 일은 이때에 어떤 이들, 곧 부자들은 배불리 먹고 술에 취하는 반면, 늦게 온 가난한 이들은 굶거나 거의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러한 모임은 사람들이 만나기는 하되, 참된 [만남], 우정의 나눔은 아니었고, 오히려 형식적으로 갖는 이기적인 모임은 공동체에 분열을 조장하거나 공동체가 분열된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게 할 뿐이다.
바울로가 볼 때 이렇게 형제들에 대한 배려 없이 이루어지는 성찬은 진정한 일치의 모임이 아니었고, 그래서 더 이상 주님의 성찬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성찬]은 인간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정점이며 총결산으로 제정되었고 그분의 완전한 자기 봉헌의 죽음이 기억되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일치를 나누는 성찬의 모음이 고린토인들의 이기적인 분위기 안에서는 진정으로 봉헌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이기주의가 노출되는 기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 바울로는 고린토 교인들이 제각기 자기 좋을 대로만 행동하고 있는 그들 스스로의 행위가 주님의 만찬의 내용과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지 깨닫게 되기를 바라면서 주의 만찬을 어떤 정신과 감각으로 거행해야 하는지 제시한다.
<11, 23-26> 사도는 실질적인 답을 주기 전에 주님의 성찬에 대한 신학적인 중요성을 다룬다. 이 부분은 주님의 승천이 있은 지 약 25년 이후에 당시의 신자들의 성체성사를 위한 모임, 곧 미사에 대해 알려주는 첫 문헌이다. 주님의 만찬에 대한 기록은 이 부분과 함께 공관복음의 기록인데(마태 26-29; 마르 14, 22-25; 루가 22, 14-20) 바울로의 이 기록은 가장 오래된 것이다.
<11, 23>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 “당신이 잡히시던 날 밤에” : 그는 당시 거행되던 성찬 예식의 기원이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특히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 전날에 있었던 일과 그분 친히 하신 말씀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본시오 빌라도라는 역사적 인물을 중심에 연결시키는 사도신경 같이, 바울로는 주님의 성찬의 설정에 대한 정확한 기원과 상황과 그 시간을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한 거행해야 할 그리스도교 예배의 핵심은 우리가 [주님의 성찬]이라 부르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관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의 성찬은 그분의 죽으심의 중대한 의미를 전하기 위해 제정되었음을 사도는 못박는 것이다.
*** “여러분을 위하여 내 몸”, “내 피로 맺는 새 계약”.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명백하다. 그 몸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위해 주어질 것이고 머지않아 끔찍한 십자가를 짊어진 구경거리가 될 것이며 지금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떼어지는 빵의 표징으로 건네진다.
[몸과 피], 결국 당신 제자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주님의 전 존재를 바치는 사랑의 압축이 성체성사이다.
*** “나를 기억하여”, 성서적 어투에서 [기억]( ; anamnesis; memoria)이란 단순히 마음으로 뒤돌아보고 과거를 기념한다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출애급 사건, 즉 에집트에서의 구출사건을 기념하고 축하하던 구약 빠스카의 핵심적인 개념이다(출애 12, 1-4).
여기서 [기억]은 과거의 구출을 다만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되는 것이다. 즉 역사적 행동 안에 이루어졌고 또 지금 역시 이를 축하하는 이들에게 [직접 그대로] 이루어지는 구원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은 하느님의 구원 능력, 구원 현실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스라엘은 세대마다 이 [기억]을 통해 [이스라엘이 되었다!] 이제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크신 일, [십자가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로 들어가 그 생명과 구원에 [지금] 참여하고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성체성사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시는 것”이 다만 예수님과 접촉하게 된다는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이 이미 10, 16에서 명백하게 설명되었다.
“기념하여 행하는” 이 모든 예식에서는 단순히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일뿐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이 독특한 방법으로 현실화되고 활동적이 되며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선포한다.”는 것은 어떤 일이 발생하는데 더 멀리 전달해주는 일이다. [선언], 알림을 통해 전에 발생했던 사건이 지금 현존하게 된다. 즉 선포란 “그 사건의 현존을 알리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부여해 주고 효력을 발생케 한다”(S. Shlier).
교회 공동체가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할 때마다 그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거기에 담겨 있는 구원을 효력 있게 하시어 공동체로 하여금 항상 새로운 구원의 힘을 입게 한다.
<11, 27-43> 주님의 만찬이 주님의 사랑의 삶을 압축하는,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인 만큼 신자들은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이 예식을 행해야 한다. 성체성사는 마술적인 것이 아니라 그 정신대로 살아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합당치 못하게 주님의 몸과 피를 마시는 그것으로 자기자신을 단죄하게 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 일치, 이것이 주님의 성찬의 참된 의미이며 성찬에 입각한 그리스도인의 윤리 기본이다.
*** 그러면 교회 안에서 거행하는 주의 만찬에 참여하도록 불림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기준에 따라 자신을 반성할 것인가? 매번 십계명에 비추어 볼 것인가? 바울로의 견지에서 보면 명백하다. 자신의 반성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고 형제들로 구성된 공동체와의 관계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셨고 우리가 함께 행하는 것 안에서 새롭게 재현되는 것이 우리 안에서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 나는 나의 희망 사항들을 다른 사람의 필요와 요구 밑에 예속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가?
** 나는 세상에 더욱 큰 사랑이 지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과감히 자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