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5 오전 6:40:17)http://blog.somang.net/1234/4952
고린토 전서 15장 죽은 이의 부활
--고린토 전서 15장 죽은 이의 부활
*** 이제 바울로는 고린토 신자들이 조언을 구해 온 것 중 가장 까다롭고도 가장 중요한 문제인 부활에 대해 다룬다. 인간 육체는 중요치 않은 것이고 경멸해도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그리스 영지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이끌렸던 고린토의 일부 신자들의 견해는 부활에 대한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문제는 부활 자체라기보다 육신부활을 부인하는 경향이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영혼 불멸을 믿고 있었고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영혼 불멸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고린토신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셨다는 것은 믿는 것 같지만 자기들도 역시 영혼과 육체를 지닌 채 부활하리라는 것은 믿지 않았다.
이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신과 영혼 모두를 포함한 전인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 신앙의 핵심에 해당하는 이 주제를 다각적으로 다룬다.
<15, 1-11> 우선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자신이 가르쳤던 바, 곧 그가 받은 <가장 중요한> 초대교회 케리그마인 부활을 새롭게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이 선포한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증거하신 사건일 뿐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의 수단이다.
비록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위하여’ 천번 만번 죽으셨다고 하더라도 그분의 부활이 없다면 인간은 죄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그러므로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설교의 토대이며 믿는 이들의 전존재의 기초가 되며, 믿는 이들이 매달리지 않으면 안되는 복음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로의 사도직의 근원이고 그가 사도로 불리움을 받은 것도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것이다.
<15, 3-5>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준 것”,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전존재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고린토인들은 교회의 핵심에 해당하는 이 주제를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 이를 들어야 한다. 바울로는 고린토신자들에게 사도가 전하는 메시지와 그의 가르침이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사도 전승 교회로부터 직접 전수 받은 메시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한다(15, 7. 8. 14).
그것은 고린토교회가 성령의 은사로 인해 어떤 개인적인 또는 유행에 좌우되는 해석들을 따라 교회의 신앙의 진수를 잃어버릴 위협에 처할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들에게 확인시켜 주려는 듯 자신이 전승을 굳게 지켜 왔음을 거듭 강조한다.
<15, 3b-5> 사이에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초대 그리스도교의 케리그마이며(kerygma),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최초의 信經: Credo)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역사적인 구속업적의 네 가지 사건이 나열되어 있다. 즉, 그분은 “죽으셨고”, “묻히셨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나타나셨다”가 그것이다.
우리의 信經의 핵심을 이루는 이것들은 초기의 그리스도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신앙선포의 중심에 해당한다. 바울로는 이것을 복음의 중요핵심,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표현한다.
*** “사흘만에”; 이 간결한 신앙고백에 왜 이 시간적 요소가 중요한 것으로 포함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신경 안에 본시오 빌라도가 포함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임이 틀림없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세상과 시간의 역사 안에서 시일을 추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건으로 확립하려는 의도이다.
*** “성경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에 성취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계획되고 결정된 것임을 의미하여 또한 그것이 하느님의 영원한 목적의 완성을 이룬 것임을 의미한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죽음이 구약성서 전편을 통해 예고되어 왔다고 믿었는데 (루가 24, 26 이하, 44 이하)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사야서의 고통받는 야훼의 종에 대한 노래 (49, 1-6; 50, 4-8; 53, 1-12)와 시편 22편 등이다.
<15, 6-11>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을 길게 열거하면서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철저히 밝히려 하는데 이는 미래에 이루어질 우리 자신의 부활의 실재를 확인시키는 의도이다.
그는 여기서 자기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일로 끝맺는다. 바울로는 자기가 교회를 박해했다는 사실, 곧 지상 교회에 이미 몸을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를 증오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으며 또 잊으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은총으로 그는 하느님의 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으며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으며 또 성과를 거두었다고 고백한다.
--고린토 전서 15, 12-34 죽은 이의 부활
<15, 12-19> 우리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달려 있다. 사도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믿음의 근거를 그처럼 강력하게 설명하도록 만든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부활이 없다고 말했는데, 문제는 부활 자체보다 육신 부활의 부인이며 이미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리라는 사실에 대한 의심이다.
바울로는 그들의 이러한 의심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을 보여준다. 죽은 이들의 장래 부활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을 수가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거짓에 기초한 공허한 것일 뿐이며, 따라서 믿는 이들은 “가장 가련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과연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교의 선포와 믿음은 둘 다 “헛된 것”이며 부활을 제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15, 20-28> 여기서 그는 구원역사의 총체적 구조를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독적인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부활을 보증해 주는 사건임을 말해준다.
*** “맏물이십니다” : “맏물”, “첫사람”이라는 개념 속에는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오게 되어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첫사람은 뒤따르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여 그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 사건은 신자들의 부활의 토대이며 원동력으로서 믿음과 세례로 그분과 한몸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인간의 시작이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인류 부활이라는 수확의 첫 열매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 인간인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죽고, 인간인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살게 되었다. 우리의 죽음이 아담 안에 들어 있듯이 우리의 생명과 부활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고 약속되어 있다.
바울로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타락의 단일성’과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구원에 있어서의 단일성’을 병행시키면서 타락에 있어서의 단일성은 오직 구원에 있어서의 단일성이라는 빛 안에서만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5, 29> “죽은 이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이들” 나중에는 사라진 관습이지만 죽은 친척이나 친구를 대신하여 세례를 받는 일이 있었는데, 바울로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이런 관습도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죽음의 위험을 안고 사는 사도 자신의 삶도 그 예이다.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살겠는가? “아무도 죽은 자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줄 수 없다. 죽은 이에게서 어떤 것도 기대하거나 받을 수 없다.”(쉴라터).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는 고린토인들의 말이 옳다면 이제 그들은 오직 현세만을 살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고린토 전서 15, 35-58 부활 때 완성되는 구원
*** 바울로 자신도 부활의 신비를 입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은유를 통해서 사멸할 육체와 불멸의 육체 사이의 연속성과 차이를 지적한다.
<15, 35-38> 사도는 곡식 씨앗의 변형에서 유추하여 죽음에서 새로운 종류의 몸, 원래의 씨앗과는 다른 생명이 솟아남을 말해준다. 씨앗에 새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썩어버릴 인간의 육체를 영광스럽고 영원불멸의 육체로 변화 시킬 수 있다.
<15, 42-44> “자연적인 몸으로 씨뿌려지지만 영적인 몸으로 일으켜 집니다.” “영적인 몸”이란 하느님의 영에 의해 되살아난 새로운 몸, 오는 세대에 부활을 통해 입게 될 몸이다. 첫 번째 창조와 두 번째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이 놓여 있었으나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의 영광스런 변형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구원의 첫 번째 창조의 손상된 부분을 치유하며 창조가 시작한 것을 완성할 것이다.
<15, 45-48> 부활에 대한 대목에서 바울로는 사멸할 비천한 육체에 비해서 부활한 육체가 갖는 영광스러운 색다른 면모를 비교하면서 부활이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15, 45>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부활 이후 예수는 성령을 통하여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로마 1, 4)이 되었다. 현세의 육체는 최초 인간 아담처럼 살아있는 물리적인 존재, “자연적인 생명체”(a living being)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단지 살아있는 영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생명을 주는 영”(the life-giving-Spirit)이시다. 우리가 장차 갖게 될 부활한 육체도 “생명을 주시는” 영이신 새로운 아담,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어 영원 불멸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강하며 영적인 몸이 될 것이다.
<15, 48> “흙으로 빚어진 사람”, “하늘에 속한 사람”. 자연적인 몸(physical body)과 영적인 몸(spiritual body) : 자연계 안에는 서로 다른 생명체들의 차원이 있어 하늘에 속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땅에 속하는 것도 있다. 흙으로 된 아담처럼 그의 모든 후손들은 흙으로 이루어지고 생기를 받아 자연적인 몸들을 지닌다. 그러나 영적인 몸을 지닌 또 다른 아담의 존재가 인류 존재에 영적인 몸을 입혀준다.
인류가 이러한 영적인 몸을 입게 되는 것은 부활의 때인데 그리스도에게만 이 부활이 이미 일어났고 다른 이들에게는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론적인 것이다. 아담의 형상을 입은 인류는 부활의 때까지 아담의 자연적인 형상, 곧 타락의 상태를 지니고 살지만 부활의 때에는 자연적인 몸이 영적인 몸을 지닌 하늘의 사람으로 바뀔 것이다.
<15, 54-57> 부활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현재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똑같이 새로운 영의 몸으로 갈아입는 변화를 겪어야 한다. 살과 피는 죽기 전이나 죽은 후에도 하느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하느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현세의 우리 몸은 그리스도처럼 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처럼 변화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다른 이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치는 삶,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한 몸으로 ]하는 삶이다.
<15, 55>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있느냐?” 자유롭게 성서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노래한다. 죽음은 십자가에서 이미 패배 당했고 더 이상 이전의 가시와 독침으로 인간을 위협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