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칼빈과 웨슬레를 버려야 개혁이 보인다! |
평신도 혁명이 교회 개혁의 대안...교조화된 기독교를 뛰어 넘자 |
입력 : 2009년 04월 26일 (일) 00:36:59 [조회수 : 2970] |
마이클 송 |
오늘의 한국 교회에 개혁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개혁이 교리의 개혁이든, 절차의 개혁이든, 교회 행정의 개혁이든, 혹은 조직의 개혁이든 간에, 우리는 그 개혁을 “분열의 방지”와 “교회의 일체(一體) (unity) 지향”이라는 전제 아래 추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소수의 다른 분파들이 존재했겠지만,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속했던 교회는 로마 가톨릭이라는 한 개의 거대한 교회였다. 그래서 극소수의 신부들이 그 큰 교회 개혁을 이룬다는 것이 불가능했음을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그 소수 개혁자들은 그들이 속했던 교회를 개혁한 것이 아니고 사실상 새로운 종교, 즉, 개신교를 창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들은 개신교라는 새로운 교회를 전통적 교회 밖에 세우는 것으로 개혁을 완성했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종교개혁은 사실상 실패한 개혁이었다. 그들의 개혁의 대상이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에는 실패한 개혁이었다는 말이다. 교회 내부를 개혁한 것이 아니고 가톨릭 전제 군주적 정치체계에 대한 일종의 실패한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실패한 개혁의 전통은 오늘까지 지속되어 왔다.
실패한 루터의 개혁의 결과와 전통은 엄밀히 말하면 분열의 전통이다. 칼빈은 장로교를, 웨슬레는 감리교를 창시했다. 특히 그러한 현상이 심각하다 못해 분열이 체질화된 교회가 오늘날 62개 이상의 교단으로 구성된 한국교회이다. 이러한 분열은 특히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 있어서 극심한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숫자로 입증된다. 무언가 신앙적 견해가 다르면 조정과 타협과 포용을 부정하고 선을 긋고 무조건 갈라서는 분열의 전통은 루터의 실패한 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진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파의 창시자의 입지가 우상화되는 것 역시 어떤 교파에 있어서는 매우 심각한 것이 한국교회의 문제점으로 발견된다. 특히 장로교회의 창시자인 칼빈에 있어서 그러하다. 근간의 기독교 신문의 기사의 제목은 “칼빈 탄생 5백 주년 기념사업회 – 칼빈 정신 되새기자 - 한국 칼빈 신학의 공로자 6인 기린다” 등으로 마치 기독교가 칼빈교인 것으로 착각하고도 남을만한 제하의 기사들이 보이며, 칼빈의 교리상의 위치가 마치 예수와 동등한 것으로 착각할만하게 우상화되어 숭앙(崇仰)되는 것이 발견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어휘마저 칼빈과 그의 신학을 공부했다는 목사나 학자들에 대해서, 가톨릭으로 말하자면 시성(諡聖-canonization) 절차를 시작하자는 말로 착각이 든다고 말한다면 그 “기림”을 받는 당사자들은 뭐라고 자신의 입장을 말할지 모르겠다.
존 칼빈도 위대하고, 마틴 루터도 위대하고, 존 웨슬레도 위대하고, 존 스미스도 위대하고, 찰스 파함도 위대한 교회 개혁가들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개신교라고 총칭되는 우리의 종교에서 그들은 어떤 위치에 앉아있는가를 규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개신교에 없는 성자(Saint)로 시성(諡聖)할 수도 없다.
미국의 어떤 교단에서는 목사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사도인가? 글쎄다. 물론 그들은 결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선 중보자들(intercessors)도 아니다. 그들은 신약이라고 일컬어지는 언약에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의 중보자로 세운 이들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새 포도주를 새 포도주 자루에 담은 자들도 결코 아니다. 그들을 받들어 섬기는 이들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야기시킨 문제 중 하나는 그들이 주장한 수많은 론(論)과 설(說)이 없이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는 영적 불구자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그들이 준 안경이 없이는 성경을 읽고 깨달음을 얻을 수 없도록 근시안적 영적 안목을 가진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의 자리에 편만하게 앉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위에 언급한 신문 제목이 보이듯이 칼빈 신봉자들에 있어서 매우 심각하다.
요한복음에는 우리 주 예수께서 “나는 ~이다“고 말씀하신 구절들이 많다. 그 중에 ”나는 선한 목자라“하신 구절이 있고,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그는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하신 구절이 있다[요10:7-]. 또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ONE)”니라“고 말씀하셨다.
삼위일체의 가르침의 정수는 우리의 종교가 ”일체(一體)“의 종교라는 것이다. ”하나“를 이루는 종교, 한 무리의 종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하나의 문을 통해 들어가는 하나의 양의 우리 속의 한 목자의 종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터의 종교개혁 후 생겨난 수많은 분파의 창시자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찌 호칭하고 대우해야 할까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좋게 말해서 그들은 기독교 분파들(denominations)의 창시자들이고, 다른 측면으로 보면 교회의 기초인 “일체(Unity)”에 분열의 씨앗을 뿌린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목자인가? 물론 그들이 목자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수 있으나 “선한 목자”라고 칭송할 수 없을 것은 분명하다.
사도 바울 역시 주 예수와 같이 교회의 일체를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 이 인용구절에 있어서, “권하노니”는 영어성경들에서 “강력히 권하다, 혹은 명하다(urge), 혹은 간청하다(appeal/beseech)”로 번역되었다. “다 같은 말을 하고”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적 지도자로 부르는데(혹은 고백(profess)하는데) 모두 동의한다”는 의미이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의 문자적 의미는 “같은 생각과 같은 관점 안에서 조절해 나가서(adjusted) 완전한 일체를 이루라(perfectly united)"의 의미이다. 궁극적으로 고린도전후서를 통해서 바울이 역설한 것은 교회의 일체(一體-unity)이다. 그리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는 바는, 주께서 이루어 놓은 그 ”하나“ 속에 불화의 씨를 뿌려서 분열시키는 것은 ”마귀(Satan)"라는 것이다. 우리의 종교의 기초(基礎)는 “일체(一體, unity)”이며, 일체를 해치는 모든 가르침과 행위가 바로 이단(異端)이라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요10:7-]의 말씀을 오늘로 이끌어 와서 해석한다면, 일체에 분열의 씨를 뿌린 이들은 주 예수의 “뒤”에 온 도둑이요 강도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기림"을 요구하는 당신들이 숭배하는 루터나 칼빈이나 웨슬레를 도둑과 강도로 만들지 않는 길은 분명해진다. 루터도 버리고 칼빈도 버리고 웨슬레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 아래 칼빈이 준 온갖 론(論)들과 설(說)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제공한 온갖 견해를 버리고 성경을 대할 때, 도둑으로서 혹은 강도로서가 아닌 개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자도 중보자도 아니라는 확실한 교회적 선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일체에 대하여 주께서 역설적으로 말씀하신 [마12:25-6, 막3:23-26]을 생각해 보자. 아니 심지어 세상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전라도 사람들이나 충청도 사람들이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더 이상 대한민국의 한 지방으로 남아있기 싫다고, 주민투표해서 독립국가를 세운다면 대한민국이 유지 되겠는가?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가 미국 연방에서 독립한다면, 미연방이 유지 되겠는가?
우리가 추진해야 하는 개혁이 어떤 개혁이든 간에 분열을 자초한다면 그 개혁이 참된 개혁이겠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왜 루터를 버리고 칼빈을 버리고 웨슬레를 버리고 스미스를 버리고 파함을 버리지 않으면 개혁이 보이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아니 어떤 이들이 지극히 숭앙하는 그들을 하나님의 적으로 만들지 않을 방안을 찾는다면 그들을 버리는 길 밖에 없음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들 구절에 무슨 칼빈이나 유명한 신학자들의 무슨 설이나 무슨 논을 들이대지 말고 상식을 적용해서 교회의 일체에 대한 주 예수의 명령을 이해해 보자: [마12:25-26]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막3:23-26]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유태교에 대한 종교개혁가로서의 주 예수를 들어 “루터도 버리고 칼빈도 버리고 웨슬레도 버리자!”는 논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의 입장은 매우 위태한 입장일 것이 분명하다. 유태교 내부에서 구약을 신약으로 개혁해서 온 유태교를 신약교회로 만든 것이 아니고 그의 열두 제자들을 기초로 신약교회를 세우신 주 예수에게서 루터와 칼빈과 웨슬레의 실패한 분열의 개혁을 교회의 전통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 역시 매우 위험한 시도임이 분명하다.
복음은 낡은 포도주 자루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였기 때문이다. 루터도 칼빈도 웨슬레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새 언약을 제시한 이들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패한 개혁가들이고, 교회의 일체를 파괴한 파괴자들이고, 분열의 전통을 후세에 유물로 남겨준 이들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에서의 사도 바울의 논지를 따라 말해보자: 당신들이 칼빈을 혹은 웨슬레를, 존 스미스 혹은 찰스 파함을 따른다 하니, 묻거니와 칼빈이나 웨슬레나 스미스나 파함이 당신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당신들이 칼빈이나 웨슬레나 스미스나 파함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가? [고전1:12-14의 논지]. 그들이 성경의 한 자 혹은 한 줄이라도 새로 써서 제시한 것이 있는가?
이러한 개혁의 기본 정신 아래,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이 진정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루터나 칼빈이나 웨슬레의 전례를 따르지 말고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교회를 떠나지 말고 끝까지 남아서 개혁의 대상인 자신의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짐을 싸서 새 간판을 걸고 교단이나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조정과 합의와 협조를 통해서, 심지어 투쟁을 통해서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추구해야 할 참된 개혁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범(凡) 교회적 개혁을 필요로 한다. 개교회의 목사들이, 특히 대형 교회의 제 일세 목사들이 교주화(敎主化) 되어가는 뚜렷한 현상이 상존하는 현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 목회자들의 성장추구는 개혁에 매우 불리한 상황을 제공한다. 주요한 개혁의 대상이 다름 아닌 목회자들이라는데 문제가 있고, 그들은 이미 칼빈이나 웨슬레를 초월해서 교주화 된 소(小) 교황(敎皇)들의 기반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한기총이나 기독교교회협의회나 혹은 62개 교단들도 이 교주화된 작은 교황들 위에 어떤 권위를 행사하기에도 역부족인 상태이고, 그들을 교회성장의 모델로 추구하는 젊은 목회자들도 개혁의지와는 동떨어진 목회 이상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개혁의 대상인 목회자들의 집단은 자체 통제권도 자정능력(自淨能力)도 상실한 상태라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루터를 죽이고, 칼빈을 죽이고, 웨슬레를 죽이고, 또 수 없이 죽여야 할 교주(敎主)들이 산적해 있다는 현실이 교회 개혁의 과제라는 것이다.
개혁의 물결이 목회자들 자신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자신들이 스스로 개혁을 위해 노력한다면 지상이겠으나, 어떤 교단도 어떤 기독교 단체도 그럴 의도도 용의도 보이지 않는 현실이 그들 자신들을 개혁의 제 일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온갖 쇼맨십을 동원해서 설교를 어떻게 잘 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개척교회에서 시작해서 수 년 사이로 큰 교회로 성장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포럼이나 세미나를 회비를 받고 개최하고 그 성과를 자랑하는 풍토에서 절대다수 목회자들에게서 개혁에 대한 자성(自省)의 목소리를 기대하는 것은 배를 타고 지나가면서 물고기들이 뛰어 올라서 배 안에 떨어져서 만선을 기대하는 것이나 같은 상황이 작금의 한국교계의 상황이다.
자체 통제권도 자정력도 상식도 상실한 목회자들에게서 교회 개혁을 기대하겠는가? 입으로만 성화를 외치고, 입으로만 성령충만을 외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바리새인과 같은 이들에게서 교회의 일체를 유지하고 성취할 수 있는 개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교인들과 세상에 대해서 빛도 아니요 소금도 아닌 이들에게서 개혁의 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하겠는가? 그렇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면, “우리는 개혁을 포기해야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는 “평신도 혁명”을 주장한다.
오직 평신도들만이 교회 민주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민주적 절차를 감시하고 확립함으로 목회자들의 교주화를 막을 수 있다. 평신도 혁명은 그렇게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해서 궁극적으로 칼빈과 웨슬레가 쌓아놓은 담을 헐어서 일체화된 교회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역사를 보자, 세상의 민주개혁은 시민혁명으로 이루어졌다. 그 시민혁명이 절대군주 제도를 타도하고 압제 받는 민중을 해방했으며 민주적 사고와 민주적 체계의 씨를 심었다. 세상이 해 낸 일을 어찌 교회가 해 내지 못하겠는가? 평신도 혁명으로 혹세무민하는 교주들을 평정하고, 칼빈과 웨슬레가 쌓은 담을 헐고, 주 예수께서 오직 한 분 참된 목자인 일체화된 교회를 이루자! 평신도 개혁이 교주들로, 소 교황들로, 혹세무민자들로 들 끓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임을 발견하자!
마이클 송 / 동서성서학회(East-West Bible Society, Los Angeles, 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