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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댓글[0]
십자가, 순교 (2014-08-02 오전 8:22:58) http://blog.somang.net/holylove/8177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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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브리서 13: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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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에서 약400년간의 침묵 시대(신구약 중간기)는 영적 암흑기입니다. 바벨론이 망하면서 메대와 바사가 등장하고, 메대와 바사는 바사 곧 페르시아로 통합됩니다. 페르시아는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망합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헬라 제국은 수하의 네 장군에 의해 애굽지역의 톨레미, 시리아 쪽의 셀레우코스, 소아시아의 리시마쿠스, 그리스 쪽의 카산더로 나뉩니다.
처음 이스라엘은 종교 탄압을 하지 않았던 톨레미에 속했으나 전쟁으로 셀레우코스에 넘어갑니다. 셀레우코스는 헬라화를 주장하며 이스라엘 땅에 헬라 문화를 심고자 했고, 전성기에 이르렀던 안티오쿠스4세는 이스라엘성전에 제우스 신상까지 세우고 성전 마당에서 격투기,레스링등의 올림픽경기를 열었습니다. 고대 올림픽은 제의(際儀)의 성격을 가졌고, 옷을 벗고 경기했기에 남자들만 입장 가능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저항하자 안티오쿠스4세는 입구에 돼지고기를 매달아 놓고는 한 번씩 핥지 않으면 못 들어가게 하고 성전 번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드리는 등 그의 신성모독은 극에 달했습니다.
또한 톨레미와 전쟁으로 입은 국고의 손실을 보충하려고 이스라엘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 종교적, 경제적으로 막대한 핍박을 가하고 학대했습니다. 이런 핍박과 학대에 이스라엘사람들은 메시아를 대망하게 됩니다. 다니엘서 마지막 장의 예언은 묵시 문학에서의 카운트로 이젠 주님이 오셔서 해결하기만을 기다리라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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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히틀러정권은 유태인의 학살을 비롯한 장애자와 연약한 환자들까지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1940년 4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살려둘 가치가 있다'와 '살려둘 가치가 없다'로 선별하였습니다. 이른바 '환자우송공익유한회사'를 설립한 다음 장애인들을 안락사 시설로 옮겨다가 그곳에서 살해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잡았습니다. 프리츠는 자신의 시설에 수용된 장애환자들에 대한 존재의 가치를 주장하며 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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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억울하게 갇힌 자와 아동학대, 여성학대, 동물학대, 노인 학대뿐만 아니라 신앙 때문에 학대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북한 땅에서는 많은 백성들이 자유와 인권을 잃고, 굶주리고, 학대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에 학대받고 핍박과 박해 받기를 스스로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핍박과 박해를 받지 않고서 성장. 성숙한 종교 또한 없습니다. 학대받고 핍박과 박해는 괴롭고 아픈 것이지만 인격의 성숙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입에 쓴 약'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이라.’(마태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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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의 경우 많은 아이들이 거리를 헤맨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구걸을 하기도 하고, 갱단에 가입해서 소매치기가 되기도 합니다.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은 그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어서 거리에서 죽는 아이들은 매년 수천 명에 달하지만 이들을 돕는 손길은 많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캄보디아 아이들은 관광객을 보면 일 달러를 외칩니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구걸하는 법부터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아프가니스탄은 평균 수명이 44세이고, 국민의 53%가 밥을 먹기 어려운 가난한 나라입니다. 여성의 3%만이 글을 읽을 수 있으며 30분마다 임신 질환으로 여성이 한 명씩 죽는 나라입니다.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여자들은 여전히 일을 할 수도 없고, 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특히 지방에 사는 여자들은 거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집안의 빚에 팔려 노인의 몇 번째 아내가 되는 일은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아편의 3/4을 수출하는 나라입니다. 아편으로 인한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북한 등지에는 학대받고, 빈궁과 질병과 열악한 환경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 빈곤층과 학대받는 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확장하기에 힘씁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하시려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서 학대받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와 평등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슬픈 자를 위로하며 고통받는 자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사61:1-3)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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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되면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의 주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는 10일이 세계 인권선언의 날이란 점에서 인권적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25일이 성탄절이란 점에서 구주 강생의 의미와 연관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학대받는 자의 입장과 자기를 동일시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동병상련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소자와 자기를 동일시하여 그들에게 한 것이 바로 자기에게 한 것이라고 말한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학대받는 자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몸을 가졌는데 동일한 대우를 받으므로 같은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든지 세상에 태어날 때 똑같은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출생했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본래의 기본권을 유린당한 채 인간이 인간에게 학대받는 상황이야말로 결코 있어서 안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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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약한 자를 말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학대받는 법은 없습니다. 언제나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이는 세상입니다. 만일 여기에 그 사회가, 법이, 제도가 약한 자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강한 자의 세상이요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노예로 전락되어 인권이 짓밟히고 온갖 학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은 나보다 약한 자가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나서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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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현재 곤란 중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여러 가지 제약과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자를 말합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런데도 한 제사장이 지나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가버렸고 한 레위인도 역시 그리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의 상처에 붓고 싸매어 응급조치를 한 다음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여기서 강도 만나 죽어가던 사람이야말로 곤란한 처지에 떨어진 학대받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은 위기와 곤란에 직면한 이웃들에게 냉담하지 말고 훈훈한 인정을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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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억울하게 당하는 자를 말합니다. 아무리 호소해도 통하지 않은 채 손해를 보는 경우를 말합니다. 사실 세상에는 원통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억울한 옥살이에서 심지어 사형당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원통함을 신원해 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입니다. 오히려 강자의 편을 들어 그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방치하거나 묵살해 버리면 우리마저 그들을 억울케 하는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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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고통당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땅에는 고통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병중에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물질에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마실 것이 없어서, 입고 쓸 것이 없어서 가난 가운데 고통당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인권상 고통당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부당하게 정치적 박해를 당하고, 인신을 속박 당한 채 물리적 행사를 통하여 고문 받는 일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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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병중 고통이건, 옥중 고통이건, 물질적 고통이건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자를 도와줘야 합니다. 똑같은 인신을 가진 자로서 얼마나 부자유스럽고 자존심이 상하며 몸이 고통스러울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내 살 꼬집어 아프면 남의 살 꼬집어도 아픈 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고난 받는 이웃을 돌본 자는 오른편에, 외면한 자는 왼편에 두어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합니다(마25: 31- 46). ?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시74:21)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욥3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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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엉클 톰스 캐빈’이나 ‘뿌리’ 등의 작품에 나오는 백인들의 노예 학대가 보여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노예제도는 어디까지나 기독교 복음을 왜곡하고 변형시킨 데서 발단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참된 기독교 복음은 소자들의 것이요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에서 이것을 삭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복음이야말로 학대받는 자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간직하는 것임을 인식해야합니다.
기독교 복음은 루터의 말처럼 ‘가장 낮은 날품팔이하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목사와 꼭 같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사회에서 지위가 어떠하든지 간에 자기 의무를 수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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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재앙의 날에 하나님께서 저를 건지십니다. 그러나 학대받고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는 자는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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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자의 입장에서 갇힌 자를 생각하고, 학대받는 심정으로 학대받는 이웃을 바라보고 내가 고난당하는 심정으로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생각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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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여러분, 이 땅에서 억울하게 갇힌 자와 의로 인해 핍박받고, 연약하고 힘이 없어 학대받는 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찾아가 돕고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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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학대받고, 가난과 질병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을 주시고 이들에게 하루속히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 나라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시고, 범사에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뜻이 이 땅에 임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하옵시고. 소외되고 궁핍한 자들을 주님처럼 섬김과 베품의 자세로 대하게 하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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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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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댓글[0]
십자가, 순교 (2014-08-02 오전 8:22:58) http://blog.somang.net/holylove/8176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
 
본문: 히브리서 13: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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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역사에서 약400년간의 침묵 시대(신구약 중간기)는 영적 암흑기입니다. 바벨론이 망하면서 메대와 바사가 등장하고, 메대와 바사는 바사 곧 페르시아로 통합됩니다. 페르시아는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망합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헬라 제국은 수하의 네 장군에 의해 애굽지역의 톨레미, 시리아 쪽의 셀레우코스, 소아시아의 리시마쿠스, 그리스 쪽의 카산더로 나뉩니다.
처음 이스라엘은 종교 탄압을 하지 않았던 톨레미에 속했으나 전쟁으로 셀레우코스에 넘어갑니다. 셀레우코스는 헬라화를 주장하며 이스라엘 땅에 헬라 문화를 심고자 했고, 전성기에 이르렀던 안티오쿠스4세는 이스라엘성전에 제우스 신상까지 세우고 성전 마당에서 격투기,레스링등의 올림픽경기를 열었습니다. 고대 올림픽은 제의(際儀)의 성격을 가졌고, 옷을 벗고 경기했기에 남자들만 입장 가능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저항하자 안티오쿠스4세는 입구에 돼지고기를 매달아 놓고는 한 번씩 핥지 않으면 못 들어가게 하고 성전 번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드리는 등 그의 신성모독은 극에 달했습니다.
또한 톨레미와 전쟁으로 입은 국고의 손실을 보충하려고 이스라엘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 종교적, 경제적으로 막대한 핍박을 가하고 학대했습니다. 이런 핍박과 학대에 이스라엘사람들은 메시아를 대망하게 됩니다. 다니엘서 마지막 장의 예언은 묵시 문학에서의 카운트로 이젠 주님이 오셔서 해결하기만을 기다리라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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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히틀러정권은 유태인의 학살을 비롯한 장애자와 연약한 환자들까지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1940년 4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살려둘 가치가 있다'와 '살려둘 가치가 없다'로 선별하였습니다. 이른바 '환자우송공익유한회사'를 설립한 다음 장애인들을 안락사 시설로 옮겨다가 그곳에서 살해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잡았습니다. 프리츠는 자신의 시설에 수용된 장애환자들에 대한 존재의 가치를 주장하며 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습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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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억울하게 갇힌 자와 아동학대, 여성학대, 동물학대, 노인 학대뿐만 아니라 신앙 때문에 학대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북한 땅에서는 많은 백성들이 자유와 인권을 잃고, 굶주리고, 학대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에 학대받고 핍박과 박해 받기를 스스로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핍박과 박해를 받지 않고서 성장. 성숙한 종교 또한 없습니다. 학대받고 핍박과 박해는 괴롭고 아픈 것이지만 인격의 성숙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입에 쓴 약'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이라.’(마태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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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에 따르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의 경우 많은 아이들이 거리를 헤맨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구걸을 하기도 하고, 갱단에 가입해서 소매치기가 되기도 합니다.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은 그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어서 거리에서 죽는 아이들은 매년 수천 명에 달하지만 이들을 돕는 손길은 많이 부족한 형편입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캄보디아 아이들은 관광객을 보면 일 달러를 외칩니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구걸하는 법부터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아프가니스탄은 평균 수명이 44세이고, 국민의 53%가 밥을 먹기 어려운 가난한 나라입니다. 여성의 3%만이 글을 읽을 수 있으며 30분마다 임신 질환으로 여성이 한 명씩 죽는 나라입니다.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여자들은 여전히 일을 할 수도 없고, 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특히 지방에 사는 여자들은 거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집안의 빚에 팔려 노인의 몇 번째 아내가 되는 일은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아편의 3/4을 수출하는 나라입니다. 아편으로 인한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북한 등지에는 학대받고, 빈궁과 질병과 열악한 환경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 빈곤층과 학대받는 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확장하기에 힘씁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하시려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서 학대받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와 평등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슬픈 자를 위로하며 고통받는 자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사61:1-3)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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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되면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의 주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는 10일이 세계 인권선언의 날이란 점에서 인권적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25일이 성탄절이란 점에서 구주 강생의 의미와 연관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학대받는 자의 입장과 자기를 동일시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동병상련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소자와 자기를 동일시하여 그들에게 한 것이 바로 자기에게 한 것이라고 말한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학대받는 자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몸을 가졌는데 동일한 대우를 받으므로 같은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든지 세상에 태어날 때 똑같은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출생했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본래의 기본권을 유린당한 채 인간이 인간에게 학대받는 상황이야말로 결코 있어서 안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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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약한 자를 말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학대받는 법은 없습니다. 언제나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이는 세상입니다. 만일 여기에 그 사회가, 법이, 제도가 약한 자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강한 자의 세상이요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노예로 전락되어 인권이 짓밟히고 온갖 학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은 나보다 약한 자가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나서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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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현재 곤란 중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여러 가지 제약과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자를 말합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런데도 한 제사장이 지나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가버렸고 한 레위인도 역시 그리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의 상처에 붓고 싸매어 응급조치를 한 다음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여기서 강도 만나 죽어가던 사람이야말로 곤란한 처지에 떨어진 학대받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은 위기와 곤란에 직면한 이웃들에게 냉담하지 말고 훈훈한 인정을 보여주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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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억울하게 당하는 자를 말합니다. 아무리 호소해도 통하지 않은 채 손해를 보는 경우를 말합니다. 사실 세상에는 원통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억울한 옥살이에서 심지어 사형당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원통함을 신원해 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함입니다. 오히려 강자의 편을 들어 그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방치하거나 묵살해 버리면 우리마저 그들을 억울케 하는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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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는 자’란 고통당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땅에는 고통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병중에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물질에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마실 것이 없어서, 입고 쓸 것이 없어서 가난 가운데 고통당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인권상 고통당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부당하게 정치적 박해를 당하고, 인신을 속박 당한 채 물리적 행사를 통하여 고문 받는 일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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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병중 고통이건, 옥중 고통이건, 물질적 고통이건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자를 도와줘야 합니다. 똑같은 인신을 가진 자로서 얼마나 부자유스럽고 자존심이 상하며 몸이 고통스러울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내 살 꼬집어 아프면 남의 살 꼬집어도 아픈 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고난 받는 이웃을 돌본 자는 오른편에, 외면한 자는 왼편에 두어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합니다(마25: 31- 46). ?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시74:21)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욥3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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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엉클 톰스 캐빈’이나 ‘뿌리’ 등의 작품에 나오는 백인들의 노예 학대가 보여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노예제도는 어디까지나 기독교 복음을 왜곡하고 변형시킨 데서 발단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참된 기독교 복음은 소자들의 것이요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에서 이것을 삭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복음이야말로 학대받는 자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간직하는 것임을 인식해야합니다.
기독교 복음은 루터의 말처럼 ‘가장 낮은 날품팔이하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목사와 꼭 같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사회에서 지위가 어떠하든지 간에 자기 의무를 수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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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재앙의 날에 하나님께서 저를 건지십니다. 그러나 학대받고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는 자는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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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 자의 입장에서 갇힌 자를 생각하고, 학대받는 심정으로 학대받는 이웃을 바라보고 내가 고난당하는 심정으로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생각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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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여러분, 이 땅에서 억울하게 갇힌 자와 의로 인해 핍박받고, 연약하고 힘이 없어 학대받는 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찾아가 돕고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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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학대받고, 가난과 질병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을 주시고 이들에게 하루속히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 나라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시고, 범사에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뜻이 이 땅에 임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하옵시고. 소외되고 궁핍한 자들을 주님처럼 섬김과 베품의 자세로 대하게 하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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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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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십자가 지고 가라 댓글[0]
십자가, 순교 (2014-03-08 오전 8:14:22) http://blog.somang.net/holylove/8073
너 십자가 지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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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19:1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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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곳은 해골 모양의 바위 언덕이었습니다. 언덕 이름은 라틴어로는 갈보리라 하였고 히브리어로는 골고다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는 악한 죄인을 처형시키는 사형틀입니다. 사형수가 십자가를 지고 현장에 도착하면 옷을 벗기고 십자가 형틀에 두 손과 두 발을 고정시킵니다. 그러면 손과 발이 찢어지면서 몸속의 피가 흘러나와 결국 죽게 됩니다. 어떤 죄수는 3일동안이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6 시간만에 운명하셨습니다. 채찍에 너무 많이 맞아 기진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로 타락한 모든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습니다.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대속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오늘은 성 금요일.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와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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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찬송가 147장)라는 유명한 흑인영가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거기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태어나기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존 스토트의 지적처럼 우리는 '단순히 구경꾼으로만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음모를 품고, 배반하고, 흥정하고, 넘겨주어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그 모든 일에 참여한 유죄의 가담자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을 하며, 그로 인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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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성화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통 당하시는 십자가 아래에서 마리아와 여러 사람이 울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이 실감 납니다. 그런데 그림 한쪽 구석에 당시 유대 사람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이것은 렘브란트의 신앙고백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현장, 거기에 내가 있었다.'
내 죄가 예수님을 못 박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참된 구원이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2,000년 전 먼 유대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나를 위한 사건으로 믿어져, 지금 여기에서 나를 구원하는 능력의 십자가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갈보리 산위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거기 너 있었는가?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거기 너 있었으면 너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는가? 십자가는 주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을 당한 표로서, 우리가 험한 십자가를 사랑함은 주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혈을 흘리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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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앞에는 4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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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십자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의 로마 군병들은 십자가 앞에 있었으나 그들의 관심은 오직 현실적인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요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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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십자가를 회피한 사람들입니다. 빌라도와 구경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없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심을 알고도 자기 직책이나 일신의 안전을 위해 구경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15:32)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요19:19)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막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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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 25)
그런데 베드로는 십자가 앞에서 넘어졌습니다.(마26: 69-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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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는 사람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숨겼다가 후에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 같은 사람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19:38-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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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다시 분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네 부류의 인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신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주인공이 될 인물들입니다. 신앙이 훌륭하고 날마다 찬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선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꾼들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변함없이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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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주시옵소서.’ 하고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무리들입니다. 많은 죄를 짓고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게 되면 천국의 백성이 되는 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세상적인 스펙이나 지식이 아니라 오직 순수한 믿음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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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빈정거리며 무신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천국의 존재도, 하나님도, 구원도 믿지 않는 물질주의에 빠진 인간들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예약을 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거기 천국이죠? 제가 하나님의 나라에 예약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가능할까요?’ 하고 천국의 정문에 전화를 걸었을 때 ‘고객님은 신앙불량자라 하나님의 나라엔 예약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지옥훈련소엔 예약이 됩니다.’ 하고 멘트가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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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우두커니 선 채로 구경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는 않지만,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십자가 앞에서 아직도 구경꾼으로 남겨져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마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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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번 째 사람에 해당되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번인 사람은 정말 하늘의 축복을 받은 예수님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번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하지만 3번은 회개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무신론자들입니다. 4번은 복음전도를 받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3번의 강도 같은 사람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동등하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 우리의 오해받음, 우리의 배신, 우리의 눈물, 우리 죄악의 치욕과 부끄러움을 이해하십니다. 그렇게 내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쏟아 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 앞에 나오는 사람을 우리 주님은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위로입니다. 십자가는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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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58장, <통> 513장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고’ 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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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도
주가 즐겁게 하시리라
아침 해 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너 십자가 지고 가라
2. 때를 따라서 주시는 은혜로써
갈한 심령에 힘을 얻고
주가 언약한 말씀을 기억하고
너 십자가 지고 가라
3. 네가 맡은 일 성실히 행할 때에
주님 앞에서 상 받으리
주가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너 십자가 지고 가라
<후렴>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받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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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내 자아와 고집, 욕심을 함께 못박아야 합니다.(갈5:24) 십자가는 곧 죽음입니다. 자기 자존심, 자기 만족, 자기 쾌락, 자기 욕심, 자기 이익을 모두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백 년 동안 아무리 부귀 영화를 다 누리면서 산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에 비하면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 상대방으로 하여금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는 일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막8:34, 눅9:23, 눅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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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었지만 나를 위하여 저 참혹한 십자가를 묵묵히 지셨고 그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뜨거운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고 품지 못하고, 사랑허지 못하고..
그럼에도 늘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씻어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제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기를 원합니다.
고난 주간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해 묵상하는 주간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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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희생'을 원하십니다. 자기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교회 청년들 가운데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을 가졌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쫒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곳곳을 향해 선교사로 떠나는 것을 봅니다. 기꺼이 주님의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YES'라고 답하면, 그분의 뜻에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주님은 내게도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예수 믿으니까 좋지? 죄 용서받고 기도하는 대로 응답받으니까 좋지 않니?" "그럼요, 좋지요. 제 머리털까지도 헤아리시고, 어디를 가든지 동행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니 정말 좋아요."
나의 마음은 그저 좋기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향해 또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네가 예수 믿고 받은 복을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전부 드린 후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련?"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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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즉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사랑을 세상에 전한 설교단이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큰 복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은 그 복을 가지고 희생하고 헌신하며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세계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억지로 마지못해 지는 자에게는 너무 무거워 지기 힘이 드나, 기쁜 마음과 신앙으로 지는 자에게는 매우 가볍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이 오라 하시는 길을 따라감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진정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구레네 시몬(마27: 32) 처럼 억지로 라도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시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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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큰 복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은 그 복을 가지고 희생하고 헌신하며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세계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이 오라 하시는 길을 따라감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진정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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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 내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를 지신 주님,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죽은 사람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변화되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제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에 복을 내려주소서. 저에게 십자가를 질 힘을 허락하시어, 진실로 사랑하는 기쁨으로 이웃을 만나 삶을 힘차게 이어가게 하소서. 사랑의 주님, 제가 만약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 영원에 이르려 하고 있다면, 가슴 아프게 찔리는 벌을 내려주소서. 힘들이지 않고 평화를 얻으려 하거나, 누워서 하늘나라의 자유를 차지하려는 헛된 마음을 없애주시어 오직 이웃을 용서하는 아픔의 기쁨,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봉사의 기쁨을 허락하소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고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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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십자가 지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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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19:1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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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곳은 해골 모양의 바위 언덕이었습니다. 언덕 이름은 라틴어로는 갈보리라 하였고 히브리어로는 골고다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는 악한 죄인을 처형시키는 사형틀입니다. 사형수가 십자가를 지고 현장에 도착하면 옷을 벗기고 십자가 형틀에 두 손과 두 발을 고정시킵니다. 그러면 손과 발이 찢어지면서 몸속의 피가 흘러나와 결국 죽게 됩니다. 어떤 죄수는 3일동안이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6 시간만에 운명하셨습니다. 채찍에 너무 많이 맞아 기진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로 타락한 모든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습니다.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대속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오늘은 성 금요일.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와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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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찬송가 147장)라는 유명한 흑인영가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거기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태어나기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존 스토트의 지적처럼 우리는 '단순히 구경꾼으로만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음모를 품고, 배반하고, 흥정하고, 넘겨주어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그 모든 일에 참여한 유죄의 가담자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을 하며, 그로 인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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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성화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통 당하시는 십자가 아래에서 마리아와 여러 사람이 울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이 실감 납니다. 그런데 그림 한쪽 구석에 당시 유대 사람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이것은 렘브란트의 신앙고백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현장, 거기에 내가 있었다.'
내 죄가 예수님을 못 박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참된 구원이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2,000년 전 먼 유대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나를 위한 사건으로 믿어져, 지금 여기에서 나를 구원하는 능력의 십자가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갈보리 산위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거기 너 있었는가?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거기 너 있었으면 너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는가? 십자가는 주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을 당한 표로서, 우리가 험한 십자가를 사랑함은 주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혈을 흘리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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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앞에는 4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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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십자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의 로마 군병들은 십자가 앞에 있었으나 그들의 관심은 오직 현실적인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요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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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십자가를 회피한 사람들입니다. 빌라도와 구경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없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심을 알고도 자기 직책이나 일신의 안전을 위해 구경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막15:32)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요19:19)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막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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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 25)
그런데 베드로는 십자가 앞에서 넘어졌습니다.(마26: 69-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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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는 사람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숨겼다가 후에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 같은 사람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19:38-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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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다시 분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네 부류의 인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신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주인공이 될 인물들입니다. 신앙이 훌륭하고 날마다 찬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선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꾼들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변함없이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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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주시옵소서.’ 하고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무리들입니다. 많은 죄를 짓고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게 되면 천국의 백성이 되는 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세상적인 스펙이나 지식이 아니라 오직 순수한 믿음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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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빈정거리며 무신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천국의 존재도, 하나님도, 구원도 믿지 않는 물질주의에 빠진 인간들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예약을 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거기 천국이죠? 제가 하나님의 나라에 예약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가능할까요?’ 하고 천국의 정문에 전화를 걸었을 때 ‘고객님은 신앙불량자라 하나님의 나라엔 예약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지옥훈련소엔 예약이 됩니다.’ 하고 멘트가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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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우두커니 선 채로 구경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는 않지만,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십자가 앞에서 아직도 구경꾼으로 남겨져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마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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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번 째 사람에 해당되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번인 사람은 정말 하늘의 축복을 받은 예수님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번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천국의 백성들입니다. 하지만 3번은 회개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무신론자들입니다. 4번은 복음전도를 받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3번의 강도 같은 사람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동등하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 우리의 오해받음, 우리의 배신, 우리의 눈물, 우리 죄악의 치욕과 부끄러움을 이해하십니다. 그렇게 내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쏟아 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 앞에 나오는 사람을 우리 주님은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위로입니다. 십자가는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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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58장, <통> 513장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고’ 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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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도
주가 즐겁게 하시리라
아침 해 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너 십자가 지고 가라
2. 때를 따라서 주시는 은혜로써
갈한 심령에 힘을 얻고
주가 언약한 말씀을 기억하고
너 십자가 지고 가라
3. 네가 맡은 일 성실히 행할 때에
주님 앞에서 상 받으리
주가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너 십자가 지고 가라
<후렴>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받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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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내 자아와 고집, 욕심을 함께 못박아야 합니다.(갈5:24) 십자가는 곧 죽음입니다. 자기 자존심, 자기 만족, 자기 쾌락, 자기 욕심, 자기 이익을 모두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백 년 동안 아무리 부귀 영화를 다 누리면서 산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에 비하면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 상대방으로 하여금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는 일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막8:34, 눅9:23, 눅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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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었지만 나를 위하여 저 참혹한 십자가를 묵묵히 지셨고 그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뜨거운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고 품지 못하고, 사랑허지 못하고..
그럼에도 늘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씻어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제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기를 원합니다.
고난 주간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해 묵상하는 주간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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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희생'을 원하십니다. 자기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교회 청년들 가운데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을 가졌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쫒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곳곳을 향해 선교사로 떠나는 것을 봅니다. 기꺼이 주님의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YES'라고 답하면, 그분의 뜻에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주님은 내게도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예수 믿으니까 좋지? 죄 용서받고 기도하는 대로 응답받으니까 좋지 않니?" "그럼요, 좋지요. 제 머리털까지도 헤아리시고, 어디를 가든지 동행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니 정말 좋아요."
나의 마음은 그저 좋기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향해 또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네가 예수 믿고 받은 복을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전부 드린 후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련?"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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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즉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사랑을 세상에 전한 설교단이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큰 복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은 그 복을 가지고 희생하고 헌신하며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세계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억지로 마지못해 지는 자에게는 너무 무거워 지기 힘이 드나, 기쁜 마음과 신앙으로 지는 자에게는 매우 가볍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이 오라 하시는 길을 따라감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진정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구레네 시몬(마27: 32) 처럼 억지로 라도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시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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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큰 복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은 그 복을 가지고 희생하고 헌신하며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세계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이 오라 하시는 길을 따라감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진정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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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 내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를 지신 주님,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죽은 사람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변화되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제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에 복을 내려주소서. 저에게 십자가를 질 힘을 허락하시어, 진실로 사랑하는 기쁨으로 이웃을 만나 삶을 힘차게 이어가게 하소서. 사랑의 주님, 제가 만약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 영원에 이르려 하고 있다면, 가슴 아프게 찔리는 벌을 내려주소서. 힘들이지 않고 평화를 얻으려 하거나, 누워서 하늘나라의 자유를 차지하려는 헛된 마음을 없애주시어 오직 이웃을 용서하는 아픔의 기쁨,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봉사의 기쁨을 허락하소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고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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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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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라 댓글[0]
십자가, 순교 (2012-05-25 오전 9:27:14) http://blog.somang.net/holylove/7362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라

 

본문: 마16: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움베르토 에코의 저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 에는 회자되는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 이 책의 등장인물인 윌리암 수사에 따르면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은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 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엄밀하게는 진리를 위해 죽일 수 있는 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무릇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진리는 자기 부인입니다. 섬뜩할는지 모르겠지만 자기를 죽이는 것이 신앙의 첫 걸음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새로운 나로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자신을 죽일 수 있어야 진리를 누리게 됩니다. 이런 자기 부인이 없는 신앙은 끊임없는 자기 확장의 재생산이라는 경로를 걷게 됩니다. 자기 부인 없는 신앙은 늘 타자를 부인합니다.

한번은 <런던타임즈>가 저명한 작가들에게 "이 세상에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동일 주제로 에세이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중 한 사람이 체스터턴(G.K, Chsterton)입니다. 그의 대답은 역사상 가장 짧고도 가장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나입니다" (I am)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나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합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1-2)

자기를 부인하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큰 은사나 권능을 받으면 그 은사와 권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교만하여지거나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욕과 자기 명예를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이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되면 교회의 독재자가 되거나 삮군목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때로는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집, 편견, 우상, 욕심을 버려야 진리를 바로 알고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마요네즈와피클 그리고 케첩 등으로 전 세계를 석권한 하인츠 식품 회사의 창시자 헨리 존 하인츠는 1919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어머니인 애너 마거레타 하인츠(Anna Mararetta Heinz)를 위해 예배당을 건립하라는 유언을 자식들에게 남겼습니다. 이에 하인츠의 자녀들은 5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피츠버그 대학 캠퍼스 내에 자신들의 부친과 할머니를 위한 대예배당을 완공하고, 그 이름을 ‘하인츠 기념 예배당’(Heinz Memorial Chapel)이라고 붙였습니다. 그 이후,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 예배당은 피츠버그의 상징물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당을 직접 찾아가 그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심지어는 교회 안내서에서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볼 길은 없습니다. 물론 거기에도 목사가 있고 주일마다 예배가 드려지고 있지만, 어느 모로 보아도 그 예배당은 이름 그대로 주님과는 전혀 무관한 오직 하인츠의 예배당일 따름입니다. 하인츠 예배당은 오늘날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이기보다는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교회가 되어 있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 중심의 사고에서 주님 중심으로, 세상을 압도하는 논리에서 영원의 논리로 사고의 축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속적 사고방식이나 자기 과신의 부인 없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의 좁은 문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속적 사고의 넓은 문을 포기했음을 뜻합니다. 바로 여기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순결과 거룩이 샘솟는 법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존심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에게 금전적인 어려움,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욱 더 힘든 일이 있다면 자존심이 상할 때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자존심을 내려놔라”

우리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며 사신 모델이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고, 빰을 때리는 온갖 능욕과 멸시를 했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시며 털깎는 자 앞에 있는 양과 같이 침묵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살 때 다른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다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므로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며 무소부재하신 영광의 하나님이시고 모든 복의 근원아신 하나님,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며, 은밀한 중에 보시고, 은밀한 중에 갚아주시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 하나님 사역의 원리입니다. 광야 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누구나 자기 부인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무시가 아니며, 지나친 자기 비하도 아닙니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멸시도 아닙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분명한 ‘자아인식’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14:9)”고 하시며 자신이 곧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는 주님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죽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불법 재판 앞에서는 어땠습니까?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 앞에서 주님은 그들이 책잡으려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긍정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때로 침묵과 긍정으로 ‘예수님 자신이 곧 그리스도요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결코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 주님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자기를 낮추시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빌2:7-8). 여기에 ‘자기 부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부인하신 예수님, 그것만이 하나님의 구속의 사업을 완성하는 일이었기에 죽기까지 자기를 쳐서 부인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존재의 가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를 부인해야 할 때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모세는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를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애굽 궁중의 40년 생활에서 모든 학술을 다 익혔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잘 훈련받은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학문에 통달했고, 지도력을 습득하기까지 철저히 자기를 훈련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해야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40세 되었을 때의 생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행7:25)”.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인 후에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그의 숨은 애국심을 알아주기를 내심 기대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모세가 이미 40세에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 사명에 대한 인식이 분명히 있었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 하나님 사역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광야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기 증오가 아닌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자기 성취나 자기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실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허물과 죗값을 치르기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남을 위한 자기희생입니다. 남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기가 수치를, 남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 자기가 고난을,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어두운 밤하늘에 빛난 별과 같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보내는 곳에서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롭게 하는 십자가의 원수인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십자가를 져야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좇는 길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 부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김남준 목사는 자기 부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깨어짐이란 신자 안에 있는 부패한 자기 사랑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 하는데, 이는 죄에 대한 사랑과 거기에 기반을 둔 자기 의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세상이 옷 입혀준 옛사람의 모든 가치와 기준, 습관과 형식에서 벗어나 본래 창조된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반드시 자기부인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나 부정이 아닌 세상의 가치관이나 욕심으로 물든 거짓된 자아를 부인하고오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의의 길을 갈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쫓아가는 길, 이것이 진리의 길이요, 하나님께로 가는 영원한 생명길입니다.

또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14: 26)

우리가 주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고, 맡은 본분을 다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버릴 마음의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우리 모두 주의 일을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으신 주님,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하오니 주님의 보혈로 사하여 주시고, 주님 믿는 성도로서 맡은 본분을 다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갈 수 있는 귀한 믿음과 성령충만함을 주시옵소서. 온 교회가 회개하고 부흥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받는 일꾼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영육간에 강건하게 하시고,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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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댓글[0]
십자가, 순교 (2012-02-27 오후 8:27:05) http://blog.somang.net/holylove/7237
▣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곳은 해골 모양의 바위 언덕이었다. 언덕 이름은 라틴어로는 갈보리라 하였고 히브리어로는 골고다라고 불렀다. 십자가는 악한 죄인을 처형시키는 사형틀이다. 사형수가 십자가를 지고 현장에 도착하면 옷을 벗기고 십자가 형틀에 두 손과 두 발을 고정시킨다. 그러면 손과 발이 찢어지면서 몸속의 피가 흘러나와 결국 죽게 된다. 어떤 죄수는 3일동안이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6시간만에 운명하셨다. 채찍에 너무 많이 맞아 기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죄로 타락한 모든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은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다.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대속의 은혜로 된 것이다. 오늘은 성 금요일.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 처절한 십자가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처형은 그 당시 로마뿐만 아니라 고대 아프리카, 애굽, 바사, 헬라 등에서 유행했던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하게 치욕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로마 시민들에게는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예나 반란자들, 극악한 강도들에게 이런 십자가형이 주어졌습니다.

보통 십자가에 달리면 약 3일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되는데, 탈진과 아픔 때문에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고 난 후에 사흘째에는 절명하게 됩니다. 고통과 탈진이 너무나 심할 경우에는 자비를 베풀어 주는 방법으로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창으로 찔러서 죽음을 재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형수의 시체는 연고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들에게 주어서 무덤에 장사하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나 아주 극악한 사형수의 경우에는 십자가 틀에 내버려두어 독수리의 밥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3일을 계신 것이 아니라 오전 9시에 처형을 당하셔서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겪으신 십자가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한마디로 표현한 그 말 앞뒤에는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이런 고통스러운 순간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순간들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렇게 처절하게 십자가에 못박하신 것입니다.

/하용조

 

▣ 십자가 고통의 의미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 농부는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했다. 가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 막 병아리들이 삐약 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탉은 죽어 있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그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도 그 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멸망받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는 그 뜻을 깨닫고 즉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였다고 한다.

 

▣ 갈보리 십자가

 

한때 남침례교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계셨던 엘리스 풀러 박사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성지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토요일날 사람들이 박사에게 말하기를 “풀러 박사님, 일요일 아침에는 갈보리로 가게 될텐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바로 그 지점에서 박사님이 우리에게 설교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박사는 설교를 해야 할 책임감 때문에 그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곰곰히 생각했지만 도무지 합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곳에서 설교를 할 자격이 도저히 없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박사는 잠도 자지 않고 마태복음의 십자가 고난의 기사를 그대로 암송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사람들은 갈보리로 걸어갔습니다. 어느 누구도 입을 꼭 다물고 있었고 모든 것이 죽음처럼 고요했습니다. 그가 이야기할 시간이 되자 풀러 박사는 얼굴을 하늘 쪽으로 돌리고는 십자가의 고난을 묘사한 성경 말씀을 그대로 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낭송을 마친 박사는 “저곳이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위해 돌아가셨던 곳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작 왓트의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합소서.

머리와 수족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나셨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사람들이 갈보리에서 발길을 돌렸을 때 그들의 마음엔 만약 목숨이 천 개가 있다면 그의 보혈로서 그들의 구원을 사실 예수님을 위해 천 개의 목숨이라도 다 드리기 원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마음이십니까?

 

▣ 십자가의 도

 

성경: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미국의 흑백갈등이 깊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기차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백인이 칼을 던져 흑인을 죽이려 할 때 옆에 있던 백인 목사가 손을 들어 칼을 막아주었습니다. 칼은 목사의 손에 꼽혔고 피가 낭자하게 흘렀습니다. 싸움은 멈추어졌고 흑인은 목사의 희생으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고마움을 느낀 흑인은 일생동안 그 목사의 곁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종종 일에 싫증이 나면 흑인은 불평과 원망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목사는 칼맞은 자신의 손을 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흑인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었는데 그 손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한 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님의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 십자가의 도

 

어떤 신자가 목사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피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으며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일인 것 같습니다."

불만 섞인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던 목사는 즉시 성경을 펴들고서 말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래도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은 것입니까?"

이 말을 들은 불신자는 무안하여 얼굴을 붉히며 돌아갔다.

 

▣ 곱하기 십자가

 

십자가를 세워 놓고 보면 더하기표가 된다. 그러나 십자가를 등에 지면 곱하기표로 변한다. 기독교는 더하기의 종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하는 곱하기의 종교다. 100만원에 100만원을 더하면 200만원이다. 그러나 100만원에 100만원을 곱하면 10억원이 된다. 더하기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해타산적인 사람은 희생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 곱하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못 박는 십자가를 진다. 이 십자가는 이미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포함된 십자가다. 죄인 된 나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를 질 때 죄인 된 나는 죽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는 십자가다. 사명의 십자가다. 남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과 수치 받음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가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자다. 그로 인하여 수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 그리하여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사명의 십자가를 짐으로 곱하기의 기적을 이룬다.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 텅 빈 십자가

 

지난주 어느 날 기독교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어떤 여자분이 십자가를 사는 것이었습니다. 연약해 보이는 아가씨가 사람 키보다도 더 큰 십자가를 번쩍! 들어서 어깨에 매는데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봤더니 속이 텅 빈 십자가 였습니다. 얇은 베니어판으로 조립한 다음 겉에 나무결무늬의 벽지를 발라 만든 모양만 십자가였습니다. 아마도 교회당 강단 뒤 휘장 가운데 거는 십자가인 모양입니다.

아하! 십자가! 사형틀. 어깨에 매면 장정이라도 휘청거릴 만큼 무겁게 짓누르는 십자가! 내가 달려 죽어야 할 내 십자가를 내가 지고 사형장으로 향하는 그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십자가는 예사로운 물건이 아닙니다.

언젠가 어느 시골교회에서 둥이 휜 소나무로 만든 진짜 십자가가 휘장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반지르르 하고 멋진(?)십자가를 살 돈이 없어서 누군가가 서투른 솜씨를 냈겠지요.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내 십자가를 내가 진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십자가를 지되 속이 텅 빈 무늬만 십자가를 지지 말고, 울퉁불퉁한 옹이가 그대로 있는 무거운 진짜 십자가를 매야 합니다. 멋진 십자가를 사서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그 무늬만 십자가를 진 아가씨를 보면서 쉽지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 네 십자가부터 먼저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에서 주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다. 마카리우스는 또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 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을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다시 한 번 애원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다. 그러고는 마카리우스가 당신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다. 거기에는 그의 십자가가 모래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와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온데 간데 없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마카리우스가 주님께 물었다. 주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셨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진배 없단다

 

▣ 십자가를 진 사람들

 

주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서셨다. 거기서 주님은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건네주시며,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셨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드렸다. 주님은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 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사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그런데도 앞 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 맸다 이 말씀입니까?"

주님이 그에게 타이르셨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준 거야.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거지."

 

▣ 내게 맞는 십자가

 

상점을 경영하는 한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상점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네 마음대로 십자가를 골라 보아라.”

그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골랐습니다. 한 십자가는 매우 아름다운 금십자가였는데 너무 무거웠습니다. 다른 것은 가볍기는 한데 표면이 매우 거칠어서 어깨에 상처를 입히기 십상이었습니다. 이것 저것 고르던 끝에 그는 방구석에서 자기에게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십자가 하나를 골랐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보아라!” 그것은 바로 그가 처음부터 지고 있던 십자가였습니다. 고난은 성스러운 것입니다. 고난은 작은 부스러기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에게 지워진 십자가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리차드 범브란트

 

▣ 십자가

 

구전(口傳)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로마 사람들이 주문하는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에 아버지 요셉을 도와 열심히 목수의 일을 하셨으므로 예수님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가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전문가이셔서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한 십자가를 친히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주인에게 두 마리의 소가 있는데 한 마리는 약하고 힘이 없고 또 한 마리는 강하고 힘이 세다면 어느 소에 무거운 짐을 지울까”

물론 강하고 힘이 센 소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나의 십자가가 유난히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질 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성희 목사

 

▣ 가장 작고 가벼운 짐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사나이가 있었다. 사나이는 자신을 늘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마음 사람들이 다 모여서 멀리 있는 곳으로 짐을 옮기게 되었다. 사나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짐을 짊어지고 나섰다. 한참 가다보니 사나이는 다른 이들보다 자신의 짐이 더 무겁고 커 보여 몹시 기분이 나빴다. "난 역시 재수가 없어!" 그는 갑자기 힘이 빠져 가장 뒤쳐져 걸었다. 길이 너무 멀어 마음 사람들은 중간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되었다. 이때다 싶어, 사나이는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몰래 일어나 짐을 쌓아둔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짐을 하나하나 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그 중 가장 작고 가벼운 짐에다 자기만 아는 표시를 해두었다. 날이 밝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젯밤에 몰래 표시해 둔 짐을 찾았다. 그런데 그 짐은 바로 어제 온종일 자신이 불평하고 지고 온 그 짐이었다.

 

▣ 십자가의 은혜

 

우리는 기쁨과 감격 속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맛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은혜가 나를 지배하며 은혜가 나를 강권적으로 주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의 일화입니다. 그녀는 너무 가난해서 노래를 배울 수조차 없는 처지였지만 노래를 너무나 잘 불렀기에 교인들이 후원회를 조직하여 공부를 시켰습니다. 마침내 유명한 음악가가 되어 뉴욕의 맨해튼 홀에서 발표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발표회가 끝난 뒤 많은 백인 기자들이 신문에 악평을 써댔습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실의에 빠져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노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에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와 이런 말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은혜가 위대함보다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오늘까지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이만큼의 생활이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위대함과 재주와 명성도 좋지만, 모든 것보다 은혜를 얻어 매사에 감사하며, 열심히 노래를 불러 마침내 세계적인 가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곽선희 목사

 

*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주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해 볼 때 나의 불성실함과 어리석음을 탄식합니다. 이전의 비참했던 시절과 가망 없던 때에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다시 한 번 감사의 향기를 올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십자가를 지는 삶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챈트니는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5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십자가를 지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보편적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원받은 모든 자들은 모두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십자가를 지는 일은 영구적인 것이다. 예수님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한 번만 지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져야 하는 것이다.

셋째,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의지적인 일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는 것이다.

넷째, 십자가를 지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고통 당하신 것과 같이 봉사할 때도 몸이 아프도록 일해야 하고 내가 즐길 수 있는 시간도 드려서 수고해야 하고 쾌락에 쓸 수 있는 돈도 남을 위해 사용하는 손해도 맛보아야 한다.

다섯째, 십자가는 곧 죽음이다. 자기 자존심, 자기 만족, 자기 쾌락, 자기 욕심, 자기 이익을 모두 죽여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백 년 동안 아무리 부귀 영화를 다 누리면서 산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에 비하면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 상대방으로 하여금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는 일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 신연식

 

▣ 두 개의 나무 십자가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목재 가구와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동생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여동생은 집안 일을 열심히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남동생 춘팔은 도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형이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날도 춘팔이는 도박판에 가서 어울리다 돈을 모두 잃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형 춘삼이 크게 다칠 뻔한 위험에 처한 동생을 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도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춘팔은 형에게 애걸을 합니다. 도박빚을 갚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고 거짓말을 하며 마지막 남은 통장을 달라고 조릅니다. 형은 할 수 없이 도박빚을 갚고는 삼남매가 행복하게 살자며 통장을 내어줍니다. 그 돈으로 도박을 하다가 운좋게 돈을 많이 땃지만 돌아오는 길에 따라붙은 깡패들과 싸우다가 살인을 하였습니다. 피투성이가 된채 집으로 뛰어들어온 춘팔이 공포에 질려 형에게 사실을 말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그러나 경찰이 집을 포위하고 스피커로 자수를 외칩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사형을 각오하며 걸어나가려는 춘팔을 돌려세우고 형 춘삼은 피묻은 옷을 벗겨 자기가 입습니다. 만들다 만 나무 십자가를 꼭 쥐어주며 춘삼은 달려 나갔습니다. 경찰의 정지 명령에도 마구 달려 나갔습니다. 마침내 총성이 들리고 춘삼은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죽었습니다. 경찰은 후에 죽은 것은 살인자 춘팔이 아니고 형 춘삼이였음을 알게 되었으나 형이 대신 죄값을 치루었기에 춘팔을 사면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춘팔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도박을 끊고 형대신 나무 십자가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볼품없던 십자가가 점점 형의 아름다운 작품을 닮아갔습니다. 그와 함께 그의 삶도 아름답게 변했습니다. 어느 날 형의 무덤을 찾은 춘팔은 두 개의 나무 십자가를 무덤에 꽂습니다. 하나는 형이 만들었던 것 하나는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습니다. 춘팔의 십자가에 편지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당신께서 사신 것이라. (갈2:20)" 이것은 오래 전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문기태 목사

 

▣ 아내가 진 십자가

 

스틴리 존스 박사는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남자는 헌신적인 아내의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있게 되면서 그는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이를 모르는 아내의 신뢰가 그를 몹시 고통스럽게 만들어 그는 불행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아내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내가 당장 떠나 버려요! 라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아내에게 고백하면서 자기의 죄가 아내를 얼마나 괴롭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상했던 비난은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아내는 “나는 당신을 여전히 사랑해요. 당신을 떠나진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의 사랑 속에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아내의 사랑으로부터 십자가로 나아갔습니다. 그 시간부터 “나는 구원받은 자였습니다.”라고 그 사람은 고백했습니다.

 

▣ 자기 십자가

 

성경: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귀찮게 여긴 안경이 생명을 구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대통령이었던 데오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를 암살자의 총알로부터 구해 주셨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독한 근시였던 루즈벨트는 항상 두 벌의 안경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하나는 가까운 곳을 보고, 또 하나는 먼 곳을 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정치 캠페인을 벌이던 중에 밀워키(Milwaukee)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쉬렌크라는 남자가 그를 향해 총을 발사했습니다. 루우즈벨트는 다쳤지만 연설을 마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상처를 검사했는데 그의 조끼 주머니 속에 있었던 강철로 된 안경집이 총알을 그의 심장을 빗나가게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통령은 대단히 놀라와하면서 부러진 안경집과 그 안에서 부서진 안경을 보면서 "나는 항상 두 벌의 안경을 갖고 다니는 것을 귀찮아했는데..." 라고 말하며,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그것을 사용하셨구나" 라고 했습니다. 이제 안경은 더 이상 귀찮은 도구가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자기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지고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 십자가의 사랑

 

본문: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어느 신앙인의 아름다운 고백이 있습니다. 내 가슴 복판에 십자가를 세우고 속죄에의 불타는 사랑을 담자. 이 불로 하나님을 불같이 사랑하고 이 불로 사람을 불같이 사랑한다. 내 가슴에 타오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불길로 이 더러워진 거리 구석 구석을 태우리라. 이것이 나의 종교다. 나의 종교는 교리가 아니다. 예배가 아니다. 가슴에 타오르는 예수의 사랑의 불길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지 교리나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랑 없는 기독교는 울리는 꽹과리, 휴지 같이 쓰레기통에 버릴 것들이다. 아름다운 결단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신앙의 결단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 최후는 최초

 

어떤 사람이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밤에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서 각양각색의 십자가가 진열된 전시관에 갔다. “이 중 하나를 지고 가십시오.” 천사의 말에 그는 ‘가장 가벼워보이고 편해보이는’ 십자가 하나를 골라 짊어졌다. 그러나 보기와는 딴판으로 너무 무겁고 힘들었다. “다른 걸로 바꾸면 안될까요?” 그가 사정하자 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그는 더 간편해보이는 십자가를 골랐다. 그러나 두번째 십자가는 더욱 힘들었다. 그는 다시 간청했고 천사가 허락했다. 결과는 마찬가지. 그는 다시 바꾸겠다고 했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 차례. 그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제발 바꿔주세요”라며 애원하고 최후의 선택을 했다. 그러자 그 십자가를 본 천사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결국 처음에 택한 십자가를 지셨네요. 이제는 바꾸지 않겠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 십자가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를 빼버리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겠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겠다는 뜻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각 사람에게 맞는 적당한 십자가를 정해두고 계십니다. 이미 져야될 십자가는 정해져 있고 누가 대신 져주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이라는 것은 말 안 해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사단은 교회에서 고난의 십자가를 끌어내리려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평안하고 안일하고 재미있게 놀기 좋은 세상 유흥 놀이시설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북적거리게 하는 작전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고난을 더 이상 연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고난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고난이기에 생각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함과 만족함이 그 속에 있습니다. 벗어놓고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십자가를 다시 찾아 등에 맵시다. 잃어버린 십자가를 되찾아야 합니다. 천국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로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천국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 십자가가 없다면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전의 일이다. 폴란드의 수상 야루젤스키 정부는 공장과 병원 등 공공건물에 있는 십자가를 비롯해, 학교 교실에 있는 십자가까지 모두 떼도록 지시를 내렸다. 폴란드의 교회들은 십자가 금지령을 비난했고, 정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갔다. 결국 정부는 한 걸음 물러나서, 문서로는 그런 내용을 남기지만 학교 교실의 십자가를 떼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선에서 타협을 제시했다.

그런데 가르볼린 지역의 학교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어느 열렬한 공산당원은 법은 법이라며, 20년 동안 교실에 설치되어 있던 십자가 7개를 모두 떼어 버렸다. 며칠 뒤 여러 명의 학부모들이 학교로 몰려와서 더 많은 수의 십자가를 매달았다. 공산당원은 또다시 그 십자가들을 떼어 냈고, 다음날 6백 명의 학생들 가운데 3분의 2가 항의에 나섰다. 중무장한 경찰들이 즉시 진압에 나섰고, 학생들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거리 행진에 들어갔다. 항의를 지지하기 위해 마련된 기도회에는 부근 교회의 교인과 학생들 2천5백 명이 참석했다. 경찰들은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교회를 에워쌌다. 십자가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군중들과 경찰 진압대를 향해 폴란드 교회 성직자는 소리 높여 외쳤다. “십자가가 없다면, 폴란드도 있을 수 없습니다!”

- 「청소년을 변화시키는 이야기 131가지」/ 유재덕

 

▣ 즐거운 교환

 

영화에서 종종 보는 마약 거래 장면은 거의 예외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마약과 돈의 교환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돈가방이 비어 있거나 위조지폐로 가득차 있지나 않은지, 혹은 밀가루가 섞인 마약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인다. 그러다가 빈 가방이나 쓰레기를 가지고 나온 눈치가 보이면 양측의 총구는 불을 뿜으며 피를 튀긴다. 손해 보는 교환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환은 다르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은 모두 ‘쓰레기’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천국의 복으로 교환하여 주신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즐거워하신다. 우리의 고통 절망 미움 원망 분노의 쓰레기를 평안 행복 희망 사랑으로 바꿔주신다. 그래서 십자가는 나도 즐겁고 하나님도 즐거우신 ‘즐거운 교환의 장터’이다.

 

▣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주여 ,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말할 정도 였습니다. 어느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뒤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턱썩 주저 앉아 엉엉 우려 예수님을 찾았지만 이미 소용은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자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그 자매는 이에" 아멘! 아멘!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고난은 필수적입니까? 불행히도 그것은 예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몸소 그것의 본을 세우셨거든요........

고난은 축복의 기회라는 애기도 있잖아요...

고난이 힘들어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했던 자매의 모습...

하지만 이 역시 우리에게 남의 일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 왜 꼭 예수여야만 하는가?

 

이전에 봤던 한 영화가 생각난다. 한 사람이 다리에 피를 흘리며 산 속으로 도망간다. 적들이 사냥개를 몰고 피 냄새를 맡으며 쫓아간다. 사냥개들은 점점 그에게 가까이 온다.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한 그는 한참을 도망가다 강을 발견한다. 그리고 강에 몸을 담그자 집요하게 따라오던 사냥개의 추적이 멈췄다. 사냥개들이 피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죄 문제를 집요하게 고소하는 사냥개와 같은 사탄의 소리를 잠재운다. 십자가는 큰 은혜의 강이다. 그 은혜의 강에 몸을 담그기만 하면 누구라도, 어떤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용서받는다. 등산을 하다 갑자기 산불이 나서 불길이 밀려오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 내 주위에 맞불을 지르면 된다. 그리고 다 타 버린 장소에 서 있으면 불길이 오지 않는다.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다. 내가 내 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먼저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서 있으면 된다. 이 놀라운 십자가를 나는 사랑한다. 이 놀라운 십자가에 나는 감격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를 해결하는 것이다.

/ 김원태

 

▣ 착각의 십자가와 복음의 십자가

 

어떤 사람이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참고 살아야지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런 병도 십자가로 생각하고 견뎌야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병의 원인입니다. 이 사람은 평소 너무 많이 먹고 불규칙한 식사 생활로 인해 위장병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몸 관리를 잘 못하고 음식에 지나친 탐욕을 부리다가 얻은 병을 십자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가난이 한때 방탕하고 사치해서 생긴 것인데, 그렇게 해서 생긴 가난을 십자가로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이 다 십자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분명한 잘못과 실수로 야기되는 고난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착각의 십자가’와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착각의 십자가’는 고난은 고난이되 신앙 때문에 얻게 된 고난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죄로 인해서 생긴 고난입니다. 반면 ‘복음의 십자가’는 신앙을 버리면 겪지 않아도 될 불이익과 고난이지만, 순전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맞게 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져야 할 십자가는 ‘착각의 십자가’가 아닌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당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착각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복음의 십자가’입니까?

- 「내가 오늘을 사는 것은」/ 이화영

 

▣ 죽으심의 대가

 

본문: 요한복음 3장 16∼17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한국전쟁 피난 시절 부산은 발 디딜틈 없이 사람들로 바글거렸습니다. 그때 저는 범일동 매축지 근처에 살았는데 부산 항구에서 화차가 석탄을 잔뜩 싣고 범일동 매축지까지 와서 기관차를 바꿉니다. 그 시간이 10분내지 한 15분쯤 걸립니다. 그동안 피난민들은 개미떼같이 그 화차위에 올라가서 석탄을 끌어 내립니다. 그래서 그 석탄을 각각 그릇에 담고 혹은 보퉁이에 담아서 연료로 쓰기도 하고 팔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얻는 길이기 때문에 생사를 걸어놓고 서부활극처럼 차위에 올라가 석탄을 끌어내리면 군인들은 연방 그들을 밀어냅니다. 그 석탄은 훔쳐갈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그 옆에 서 있었는데 한 40대 남자와 한 10살쯤 되는 아들이 그 석탄을 모으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들은 올라가서 석탄을 퍼내고 아버지는 밑에서 받고 그러는데 군인들이 오니까 다 뛰어 내렸습니다. 그 아들도 뛰어 내렸습니다. 그런데 큰 석탄덩어리 하나가 열차 밑으로 굴러들어가니까 아들이 기어서 그 열차 밑에 들어가서 그 석탄 덩어리를 드러내려고 하는 찰나에 덜커덩하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쏜살같이 아버지가 뛰어 들더니 그 아들을 있는 힘껏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열차 바퀴가 아버지의 허리위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아버지는 죽어가면서도 아들을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의 그 처참한 모습이 마음속에 아로 새겨져서 항상 잊혀지지 않습니다.

/조용기 목사 설교 중에서

 

▣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님, 제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에 복을 내려주소서. 저에게 십자가를 질 힘을 허락하시어, 진실로 사랑하는 기쁨으로 이웃을 만나 삶을 힘차게 이어가게 하소서.

주님, 제가 만약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 영원에 이르려 하고 있다면, 가슴 아프게 찔리는 벌을 내려주소서. 힘들이지 않고 평화를 얻으려 하거나, 누워서 하늘나라의 자유를 차지하려는 헛된 마음을 없애주시어 오직 이웃을 용서하는 아픔의 기쁨,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아픔의 기쁨을 허락하소서. 십자가의 영광은 용서와 희생의 탑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명심하게 하소서.

/김영수,

 

▣ 십자가 정신

 

핀란드에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추앙받는 한 왕이 있었다. 왕은 백성들의 평안과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 왕에게는 한 가지 말못할 고민이 있었다. 자신의 대를 이을 왕자가 없었던 것이다. 왕은 왕업을 이을 사윗감을 찾는다는 방을 붙였다. 전국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일단 활쏘기 말타기 등 무예시험을 통과한 10명에게 왕이 말했다. “하늘과 땅, 이웃과 이웃을 하나로 이어주는 나무를 일주일 이내에 구해오너라” 일주일 후, 청년들은 저마다 웅장하고 괴상한 나무를 가져왔다. 그런데 존 페로라는 청년은 왕 앞에 십자가를 내밀었다. “폐하, 십자가의 세로막대는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지요. 가로막대는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위대한 상징입니다” 왕은 존 페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십자가정신’을 바탕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 피묻은 십자가

 

오래 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산중턱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여섯 명의 희생자를 내는 사고가 있었다.사고현장 가까이에는 교회훈련센터가 있음을 알리는 68피트 높이의 철탑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AP통신이 전한 사고의 원인은 그 철제십자가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 따라 그 십자가의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는 것이다.그 지역을 운항하는 항공기들은 십자가탑이 밝혀주는 불빛을 보고 그곳을 지나곤 했는데 그날은 불이 꺼져 있던 탓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불꺼진 십자가와 피 없는 십자가는 언제나 비극의 원인을 제공한다.예를 들면 십자군 전쟁도 그 중에 하나이다.도시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저 십자가들, 도시를 뒤덮는 저 높은 십자가들,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하는 메시지여야 하며 민족 구원의 등불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피묻은 십자가의 원색이 바래고 장식용으로 전락한다면 십자가 때문에 존재하는 교회는 설자리를 잃고 말게 될 것이다.고난주간에 즈음하여 십자가가 더욱 그리워진다.

/박종순 목사(충신교회)

 

▣ 십자가를 진다는 것

 

둘째아들 집에 갔다. 저녁식사를 위해 둘러앉았을 때다. 초등학교 2학년 손녀에게 “예림아! 십자가가 뭐지?”하고 물었다. “응, 십자가는 동생 예나가 잘못했는데 아빠한테 내가 혼나는 거!” 아이는 십자가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남의 잘못을 내가 대신 책임지는 것이 십자가임을 알고 있는 손녀딸이 자랑스러웠다.

예수님은 우리 허물과 죗값을 치르기 위해 대신 죽으셨다. 십자가는 남을 위한 자기희생이다. 남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기가 수치를, 남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 자기가 고난을,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죽는 것이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어두운 밤하늘에 빛난 별과 같은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보내는 곳에서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자들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롭게 하는 십자가의 원수인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십자가를 져야 부활이 있다.

/최낙중 목사(해오름교회)

 

▣ 십자가로 무장하라.

 

모든 것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이 죽음에 있습니다. 거룩한 십자가의 길과 날마다 스스로 죽는 것 이외에는 생명에 이르는 길도, 내면의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한마디로 십자가와 순교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편안함과 즐거움을 구합니까? 사람의 일생으로 고난으로 차있고 십자가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만일 고난을 겪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구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높이 성장하면 할수록 더 자주 무거운 십자가를 만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짐으로써 오는 고통이 하나님의 대한 사랑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갖 고난을 겪는 사람도 그가 지는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을 알기 때문에 위로가 됩니다.

십자가에 기꺼이 순종하면 모든 고난을 겪음으로써 육체가 약해진 만큼 내면의 은혜를 통해 영혼은 강건해질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사랑하며, 육체를 채찍질해 복종케 하고 모욕을 기꺼이 참으며, 자기 자신을 낮추고 역경과 손실을 견디며,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바라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면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을 신뢰하고 믿음과 그리스도의 삽자가로 무장하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토마스 아 켐피스

 

▣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찬송가 339장, <통> 365장)

 

1. 내 주의 지신 집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2.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국 가겠네

3. 저 수정같은 길에서 면류관 벗어서 주 예수 앞에 바치며 늘 찬송하겠네

4. 뭇 천사 소리 높여서 늘 찬송할때에 그 좋은 노래 곡조가 참 아름답도다

5. 그 면류관도 귀하고 부활도 귀하다 저 천사 내려보내사 날 영접합소서 아 - 멘

 

▣ 십자가를 내가 지고 (찬송가 341장, <통> 367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가도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복을 얻겠네


주도 곤욕 당했으니 나도 곤욕 당하리

세상 친구 간사하되 예수 진실하도다

예수 나를 사랑하사 빛난 얼굴 뵈시면

원수들이 미워하나 염려할 것 없도다


내가 핍박 당할 때에 주의 품에 안기고

세상 고초 당할수록 많은 위로 받겠네

주가 주신 기쁨외에 기뻐할 것 무어냐

주가 나를 사랑하니 기뻐할 것 뿐일세

 

▣ 십자가에 관한 성경 말씀

 

0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

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0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마 26:2)

0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7)

0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눅23:26)

0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요19:19)

0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0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0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

0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6)

0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0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0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 십자가에 관한 금언

 

0 예수의 십자가는 세계 역사의 중심이다.(루사후오도)

0 십자가는 천국 문턱에 이르기에 충분할 만큼 높으며 유일한 사다리다.(죠지 다나 보드맨)

0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져라. 그리하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너를 져줄 것이다.(토마스 아 켐퍼스)

0 모든 일은 십자가 위에 있다. 매일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는 생명과 평화를 얻을 수 없다.(겜비스)

0 십자가 없는 신앙은 결빙되리라(루사오 오도)

0 십자가 없는 종교는 헛것이다.(롱손)

0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마르틴 루터)

0 십자가는 끌고 가는 것보다 지는 것이 가볍다(오우구스)

0 십자가의 신학은 빛의 신학이다.(마르틴 루터)

0 아! 희생의 사랑 없이 어찌 십자가의 섭리가 이뤄질 수 있을까.(성 어거스틴)

0 중생한 성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난자이다.(제임스 클럭 막스웰)

0 예수를 아주 없애버리려던 십자가는 도리어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는 자석이 되었다.

0 십자가는 억지로 마지못해 지는 자에게는 너무 무거워 지기 힘이 드나, 기쁜 마음과 신앙으로 지는 자에게는 매우 가볍다.(사무엘 루터포드)

0 십자가는 호도와 같다. 십자가의 거죽은 못이 가득한 듯 하나 그 속에는 큰 축복이 숨어 있다.

* 주의: 본 자료를 무단 수집, 제작 배포 출판하면 저작권법에 저촉(위배)됩니다.

/빛의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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