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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댓글[0]
행복 (2013-07-14 오후 6:01:35) http://blog.somang.net/holylove/7891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본문: 시144:15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복을 추구하며, 아니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행복할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아니하며, 불평불만에 집중하고 있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쾌락과 방종 혹 강인한 무언가에 자신의 몸을 의지한 채 잠시간의 행복감(?)을 갖기도 합니다.
 
“저는 행복을 몰랐습니다. 행복한지 불행한지 제 마음과 제 감정을 정말 몰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행복과는 상관없이 살았던 것 같네요. 늘 아버지한테 죽을 만큼 맞고, 형한테도 지독하게 맞고,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삶이었어요. 그래서 그랬나봅니다. 아내한테도 자식한테도 늘 비난만 하고, 모든 게 다 거슬리고… 이제는 가족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가 되었어요. 제 감정을 억누르고 살았는데, 이제 그것을 알겠네요…. 이제라도 행복하게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의 노인이 상담실을 찾아와 비통한 심경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는 황혼 이혼을 요구하고 있고, 자녀들은 모든 불행을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면서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10년 혹은 20년 더 남았다면 늦지 않았습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노인은 70평생에 한 번도 울지 못한 울음을 목 놓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학대 받았던 경험,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버림받고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눈칫밥을 먹었던 기억,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가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고생했던 기억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고 늘 무시만 당해왔던 수많은 고통의 기억들을 들추어내면서 그동안 억제하고 참고 참았던 분노와 슬픔의 눈물을 쏟아내었습니다.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해야 했는지, 왜 그토록 뭔가에 집착했는지, 아내를 못 살게 굴었는지, 자녀들을 그렇게 매몰차게 대하고 심하게 매질을 했는지, 왜 그토록 쫓기듯 살았는지, 왜 그렇게 열흘 굶은 것처럼 늘 마음이 공허하고 텅 빈 것 같았는지, 그 모든 것들을 탐색해가면서 자신의 억눌러져서 곪아터진 마음 밑바닥의 감정과 정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보니, 자신의 옆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어 더욱 외로워지고, 자녀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심경을 토로할 수 없는 아픔을 진솔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상담 치료를 하는 동안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분의 마음에 평안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도 미세하나마 이분의 변화를 눈치채기 시작했습니다. 행복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 14)

 
어느 해 국내 굴지의 그룹의 회장 딸이 미국에서 자살했다는 내용의 뉴스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부자집 딸이고 명문대학에 유학 중인 그녀가 무슨 힘든 일이 있기에 스스로 자살한 것일까. 그 이유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촌 어디에도 인간의 삶 가운데는 진정한 행복이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이룰 수 없던 그 행복이 주어지는 곳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와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마음의 불행을 걷어내면 행복한 느낌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거나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그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두렵기 때문입니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감정 자체가 두렵습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느낌을 먼저 느껴야 불행에 대한 수많은 심리적 파편들이 치료가 되어집니다. 행복은 늘 우리들 곁에 있습니다. 단지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불행이나 고통의 감정을 부인하면 행복도 느낄 수 없습니다. 슬픔, 고통, 수치심, 열등감, 우울감, 분노 등의 수많은 부정적 감정은 회피하면 할수록 우리들 마음 내부를 휘저어 놓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행복한 감정을 못 느끼도록 방해를 합니다. 자신의 진짜 감정과 만나서 그것을 주님 앞에 꺼내어 놓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행복감과 만나게 됩니다.

 
벨기에의 극작가 마테를링크는 1908년 파랑새라는 동화극을 발표했습니다.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 형제가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하며 파랑새를 찾았지만, 파랑새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형제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 그렇게 헤매고 찾아다니던 파랑새는 자기 집 새장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옛말에 길은 가까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행복도 가까운 데 있지만. 사람들은 그 행복을 가까운 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먼 곳에서 찾으려 애를 씁니다. 행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34:9)

 
행복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모습일까요? 돈 많은 부자, 모든 권세를 가진 사람,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남자, 많은 지식을 가진 부모, 외로운 고아, 아무것도 없는 거지,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행복 추구방법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직접적인 복을 주시기보다는 좀 더 한걸음 나아간 행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를 들면, 기도를 하고 말씀을 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되고 찬양하는 중에 나의 것들을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며, 전도중에 오는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예수님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동참하였다는 뿌듯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가 나의 노래가 되고, 찬양이 나의 생활이 되고 예배가 나의 주권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백성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 16- 18)

 
행복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행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행복을 심고, 행복의 농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포도나무이십니다. 말씀은 영원한 생명나무입니다. 마음에 예수를 심는 자, 마음에 말씀을 심는 자는 그 나무로부터 날마다 기쁜 노래, 복음의 노래를 듣게 될 것입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리라”(잠16:20)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행복지수가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Helper's high 라고 명명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봉사와 사랑의 대명사 같은 존재입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실험한 바로는 마더 테레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침에 들어있는 면역항체가 뚜렷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반면 근심이나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침이 마르면서 이 면역항체가 확실히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남을 사랑하고 돕는 활동을 통해 일어나는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변화에 대해 ‘마더 테레사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남을 위해 봉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의 선행을 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 기능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이릅니다.
행복은 인생의 정도를 갈 때에만 비로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내 가까이에 있는 행복의 씨앗을 어떻게 심고 가꾸는 가에 달려있습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시편 1장 말씀대로 환경과 여건에 관계없이 주 안에서 의롭고 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마5: 3-5)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세계의 많은 명화 중 우리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19세기 작품인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만종'이라 하겠습니다. 한 젊은 부부가 하루 종일 밭에서 땀흘려 일하다가 황혼이 될 무렵 하던 일을 멈추고 엄숙하고 경건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은 인간의 숭고한 사랑과, 노동과 종교가 혼연일체가 된 성스러운 면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가정도 원만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요소가 반드시 구비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노동을 떠나서는 생명을 유지, 보존할 수 없고 사랑이 없는 노동은 고역스러울 뿐인데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국의 식민 정치가였던 '쎄실 존 로즈'는 건강 관계로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가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고 큰 거부가 되었던 사람인데 그의 재산은 600만 파운드의 다이아몬드를 옥스포드 대학의 장학기금으로 기증할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잠시 영국으로 귀환하였을 때에 구세군의 2대 대장이었던 부드 장군과 기차로 여행할 기회가 있어 담화하던 중, 부드 대장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고 생각되십니까?"하고 묻자 로즈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행복이라니요?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하고 반문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드 대장은 다시 말하기를, "천하에 진실로 행복한 곳은 오직 한곳뿐인데 그 곳은 주님의 십자가 슬하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만이 우리의 죄가 사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전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인생일기'란 책에도 보면 프랑스의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의 말을 인용,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속세적인 행복을 찾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기진맥진 한 두 팔을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씀했고,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이전에 바라고 따르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한때 인간들은 자연을 공경의 대상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이유는 자연을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움직이는 자존적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헤라클레토스가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라고 한 다음부터 진정한 행복을 영원불변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에 두고 그 세계로 가기 위해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선행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부정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성도가 몸은 세상에 속해 있어도 마음은 천국에 두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시민권이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밀려오는 파도에 쉬 무너지는 모래성을 쌓는 것이 행복일수 없듯이 쉽게 없어지는 인생의 탑을 쌓는 것 역시 행복일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예수 안에 살면서 천국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존 웨슬레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이란 없다”고 했고, 아브라함 링컨도 “행복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므로, 서로 사랑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사는 인생의 행복자, 신앙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행복의 근원되신 주님! 주님을 믿음으로 행복을 찾고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물질에 매여 진정한 행복을 상실하지 않도록 인도하소서. 돈을 사랑치 말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따름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서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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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본문: 시144:15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복을 추구하며, 아니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행복할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아니하며, 불평불만에 집중하고 있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쾌락과 방종 혹 강인한 무언가에 자신의 몸을 의지한 채 잠시간의 행복감(?)을 갖기도 합니다.
 
“저는 행복을 몰랐습니다. 행복한지 불행한지 제 마음과 제 감정을 정말 몰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행복과는 상관없이 살았던 것 같네요. 늘 아버지한테 죽을 만큼 맞고, 형한테도 지독하게 맞고,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삶이었어요. 그래서 그랬나봅니다. 아내한테도 자식한테도 늘 비난만 하고, 모든 게 다 거슬리고… 이제는 가족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가 되었어요. 제 감정을 억누르고 살았는데, 이제 그것을 알겠네요…. 이제라도 행복하게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의 노인이 상담실을 찾아와 비통한 심경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는 황혼 이혼을 요구하고 있고, 자녀들은 모든 불행을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면서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10년 혹은 20년 더 남았다면 늦지 않았습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노인은 70평생에 한 번도 울지 못한 울음을 목 놓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학대 받았던 경험,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버림받고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눈칫밥을 먹었던 기억,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가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고생했던 기억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고 늘 무시만 당해왔던 수많은 고통의 기억들을 들추어내면서 그동안 억제하고 참고 참았던 분노와 슬픔의 눈물을 쏟아내었습니다.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해야 했는지, 왜 그토록 뭔가에 집착했는지, 아내를 못 살게 굴었는지, 자녀들을 그렇게 매몰차게 대하고 심하게 매질을 했는지, 왜 그토록 쫓기듯 살았는지, 왜 그렇게 열흘 굶은 것처럼 늘 마음이 공허하고 텅 빈 것 같았는지, 그 모든 것들을 탐색해가면서 자신의 억눌러져서 곪아터진 마음 밑바닥의 감정과 정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보니, 자신의 옆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어 더욱 외로워지고, 자녀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심경을 토로할 수 없는 아픔을 진솔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상담 치료를 하는 동안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분의 마음에 평안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도 미세하나마 이분의 변화를 눈치채기 시작했습니다. 행복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 14)

 
어느 해 국내 굴지의 그룹의 회장 딸이 미국에서 자살했다는 내용의 뉴스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부자집 딸이고 명문대학에 유학 중인 그녀가 무슨 힘든 일이 있기에 스스로 자살한 것일까. 그 이유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촌 어디에도 인간의 삶 가운데는 진정한 행복이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이룰 수 없던 그 행복이 주어지는 곳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와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마음의 불행을 걷어내면 행복한 느낌을 찾게 됩니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거나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그 감정을 부인하는 것은 두렵기 때문입니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감정 자체가 두렵습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자신이 불행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느낌을 먼저 느껴야 불행에 대한 수많은 심리적 파편들이 치료가 되어집니다. 행복은 늘 우리들 곁에 있습니다. 단지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불행이나 고통의 감정을 부인하면 행복도 느낄 수 없습니다. 슬픔, 고통, 수치심, 열등감, 우울감, 분노 등의 수많은 부정적 감정은 회피하면 할수록 우리들 마음 내부를 휘저어 놓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행복한 감정을 못 느끼도록 방해를 합니다. 자신의 진짜 감정과 만나서 그것을 주님 앞에 꺼내어 놓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행복감과 만나게 됩니다.

 
벨기에의 극작가 마테를링크는 1908년 파랑새라는 동화극을 발표했습니다. 가난한 나무꾼의 아들 형제가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곳저곳 많은 곳을 여행하며 파랑새를 찾았지만, 파랑새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형제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 그렇게 헤매고 찾아다니던 파랑새는 자기 집 새장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옛말에 길은 가까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행복도 가까운 데 있지만. 사람들은 그 행복을 가까운 곳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먼 곳에서 찾으려 애를 씁니다. 행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34:9)

 
행복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모습일까요? 돈 많은 부자, 모든 권세를 가진 사람,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남자, 많은 지식을 가진 부모, 외로운 고아, 아무것도 없는 거지,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행복 추구방법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직접적인 복을 주시기보다는 좀 더 한걸음 나아간 행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를 들면, 기도를 하고 말씀을 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되고 찬양하는 중에 나의 것들을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며, 전도중에 오는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예수님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동참하였다는 뿌듯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가 나의 노래가 되고, 찬양이 나의 생활이 되고 예배가 나의 주권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백성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 16- 18)

 
행복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행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내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행복을 심고, 행복의 농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포도나무이십니다. 말씀은 영원한 생명나무입니다. 마음에 예수를 심는 자, 마음에 말씀을 심는 자는 그 나무로부터 날마다 기쁜 노래, 복음의 노래를 듣게 될 것입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리라”(잠16:20)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행복지수가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Helper's high 라고 명명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봉사와 사랑의 대명사 같은 존재입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실험한 바로는 마더 테레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침에 들어있는 면역항체가 뚜렷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반면 근심이나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침이 마르면서 이 면역항체가 확실히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남을 사랑하고 돕는 활동을 통해 일어나는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변화에 대해 ‘마더 테레사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남을 위해 봉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의 선행을 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 기능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이릅니다.
행복은 인생의 정도를 갈 때에만 비로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은 내 가까이에 있는 행복의 씨앗을 어떻게 심고 가꾸는 가에 달려있습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시편 1장 말씀대로 환경과 여건에 관계없이 주 안에서 의롭고 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마5: 3-5)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1:1)

 
세계의 많은 명화 중 우리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는 것은 19세기 작품인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만종'이라 하겠습니다. 한 젊은 부부가 하루 종일 밭에서 땀흘려 일하다가 황혼이 될 무렵 하던 일을 멈추고 엄숙하고 경건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은 인간의 숭고한 사랑과, 노동과 종교가 혼연일체가 된 성스러운 면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가정도 원만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요소가 반드시 구비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노동을 떠나서는 생명을 유지, 보존할 수 없고 사랑이 없는 노동은 고역스러울 뿐인데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국의 식민 정치가였던 '쎄실 존 로즈'는 건강 관계로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가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고 큰 거부가 되었던 사람인데 그의 재산은 600만 파운드의 다이아몬드를 옥스포드 대학의 장학기금으로 기증할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잠시 영국으로 귀환하였을 때에 구세군의 2대 대장이었던 부드 장군과 기차로 여행할 기회가 있어 담화하던 중, 부드 대장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행복하다고 생각되십니까?"하고 묻자 로즈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행복이라니요?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하고 반문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드 대장은 다시 말하기를, "천하에 진실로 행복한 곳은 오직 한곳뿐인데 그 곳은 주님의 십자가 슬하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만이 우리의 죄가 사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전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의 '인생일기'란 책에도 보면 프랑스의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의 말을 인용,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속세적인 행복을 찾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기진맥진 한 두 팔을 그리스도 앞에 내놓을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말씀했고,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이전에 바라고 따르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한때 인간들은 자연을 공경의 대상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이유는 자연을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움직이는 자존적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헤라클레토스가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라고 한 다음부터 진정한 행복을 영원불변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에 두고 그 세계로 가기 위해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선행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부정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성도가 몸은 세상에 속해 있어도 마음은 천국에 두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시민권이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밀려오는 파도에 쉬 무너지는 모래성을 쌓는 것이 행복일수 없듯이 쉽게 없어지는 인생의 탑을 쌓는 것 역시 행복일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예수 안에 살면서 천국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존 웨슬레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이란 없다”고 했고, 아브라함 링컨도 “행복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므로, 서로 사랑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사는 인생의 행복자, 신앙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행복의 근원되신 주님! 주님을 믿음으로 행복을 찾고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물질에 매여 진정한 행복을 상실하지 않도록 인도하소서. 돈을 사랑치 말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따름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서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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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댓글[0]
행복 (2012-02-15 오후 1:40:43) http://blog.somang.net/holylove/7179

행복하여라

 

  본문: 마태복음 5장 1~12절

 

예수님이 말씀하신 8복은 천국백성들이 누릴 행복에 대한 예찬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행복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심리적 행복입니다. 산에 올라가서 주변 풍광을 볼 때 행복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재미있는 대화를 나눌 때 기분이 좋지요. 또 땀 흘리고 난 후의 상쾌함도 행복감을 줍니다. 이런 행복들은 심리적 행복에 속합니다. 둘째는 철학적 행복입니다. 이것은 기대치의 문제입니다. 행복의 절대 조건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가진 기대치에 따라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이웃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자신이 불행하게 보이고, 이웃이 불행하게 사는 것을 보면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런 행복은 가만히 있어도 행복할 수 있고 불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신앙적인 행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얼마나 느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것으로 인해 영적인 기쁨이 충만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이 행복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행복을 믿음의 비밀이라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 모든 사람을 엎드려 절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 앞에 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느브갓네살은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말합니다.

“애들아. 이럴 것까지 없지 않느냐. 왜 굳이 죽음을 자초하느냐. 지금이라도 금 신상 앞에 절 한번 하고 목숨을 구하도록 하여라.” 느브갓네살 왕은 천지만물의 대주재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비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믿음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 풀무불과 왕의 손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줄 압니다.”

여러분! 결과는 어떻습니까? 세 친구의 믿음대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아 알 수 있으면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찬송과 기도는 죽은 자가 이미 천국에서 영생복락 누리고 있음을 인정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한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죽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찬송할 수 있는 이 행복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적인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믿음의 비밀을 알고 하루하루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행복의 샘이 늘 솟아날 줄로 믿습니다.

 

* 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까지 주심을 감사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가정이 늘 주님의 구원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는 믿음의 가정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일호 목사(서울 영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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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가정에서 출발 댓글[0]
행복 (2012-02-14 오후 6:49:25) http://blog.somang.net/holylove/7153

행복은 가정에서 출발

 

성경: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잠19:23)

 

퀴리 부부가 순수한 라듐을 제조할 때까지는 4년의 세월이 걸렸다. 마리 퀴리는 창고같은 실험실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과학자이기에 앞서 아이를 키우고 가사를 돌보는 주부로서의 역할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남편 피에르 퀴리의 애정은 그녀가 이 두가지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힘이 됐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좋은 남편을 갖고있어 행복해요.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신 겁니다."

가정은 행복한 삶의 출발점이다.

* 묵상 말씀: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잠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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