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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 이젠 어디로 가야 합니까? 댓글[0]
뒷 모습이 아름다운 (2006-07-08 오후 10:08:51) http://blog.somang.net/56dhyoon/2491

어제 아침 다른 때보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 흥분이 넘치는 

許블라디슬라브씨가  국적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요 정말 잘되었네요!

그럼 우린 한국 사람이 되는 거죠. 감사합니다..... 연이어

전화를 받은 후

반가워야 할 마음은 웬지 모르게 서글퍼지기 시작 하였다.   


국적 취득 후 보상 문제 2인 이상 5천5백만 원 주택지원금 이외는 전무하며

독립유공자후손이 국가기관 취직은 35세 이하 손자들에게만 주어지며

증손자들에게는 해당되질 않는다는 법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고려대학교에서 18개월 동안 한국어 공부를 하는 증손자들에게 혜택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을 하여야 하는 가.  


許게오르기 형.許블라디슬라브씨가 국적 취득 후  한국서 일하는 문제는

중소기업회사에 간곡히 요청하여 회사를 다닐 수 있도록 해 보겠지만....


그러나 한국어공부를 마친 후 아들들이 직장보장이 되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다


한국국적을 받게 되면 5천만 원의 주택지원금이외는 아무 것도 없다 

62세의 初老의 노인이 되어버린 허게오르기 형 한국에서 살아 갈 여력이 없고

아들들은 직장을 보장 받질 못한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던 1907년 아버지 4형제가 만주. 러시아로 피신

1937년 연해주에서 또 다시 카자흐스탄사막으로 유배, 우즈베키스탄으로 .

키르키즈스탄에서 떠 돌다 아버지형제 3명이 조국으로 돌아 오지 못하고

돌아 가신후 허블라디슬라브 가족 6명이 100년만에 조국으로 돌아 왔지만 .


할아버지와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후손들이 또다시 바람처럼

떠도는 유랑의 길을 걷게 되는 것 같다. 고종황제시 현 국무총리에 버금가며

대법원장까지 지내시고 13도의병대장으로 일본 통감부를 격파하기 위해 동대문에서

격전을 치루었으나 최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하여 1908년9월27일 서대문형무소

1호로 사형를 당하셨고 격전을 치룬 동대문에서 청량리를 旺山路를 정하였고

공훈를 인정하여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으신

허위선생의 업적을 보아서라도 안식처를 제공하여 주지 못할망정 평생보장이

될 직장을 증손들에게 마련을 하여 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이 든다.



국가보훈처에 등록이 된 약15,000명 독립투사 중

왕산허위.안중근.윤봉길.김구.손문.송미령등 31명이 건국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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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다녀온 허게오르기씨 댓글[0]
뒷 모습이 아름다운 (2006-07-01 오후 1:18:16) http://blog.somang.net/56dhyoon/2483

제 42주차 기본교재 기본정훈교육

호국사상의 전통과 상무정신

조선시대와 근현대사에 나타난 우리민족의 호국사상과 상무정신을 이해하고 본 받는데 있음

        일본 재판에 불응한ꡐ허위(許爲) 의병장''

왕산허위선생은 고종황제시 영희전참봉(현국무총리급)의정부참판외 최고의 관료로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함께 군대까지 해산 당하자 허위선생은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원주에서 활동하던 이인영 의병장과 협의하여 전국의 의병을 통합(13도 창의군)한 후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일제통감부를 격파하기 위한 연합의병의 선봉으로 동대문까지 진격했으나 현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퇴했다. 현재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길 왕산로(旺山路)는 당시의 의병활동을 기념하여 선생의 호를 딴 것이다.

서울 진공작전에 실패한 후 선생은 임진강으로 이동해 의병활동을 계속했다. 당시 임진강 일대는 허위 의병부대의 군정(軍政)이 실시될 정도로 기세를 떨쳤으며 소단위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여 유격전술로 일본군을 타격하였다.

이후 선생은 의병 연합부대 5천명을 집결,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결정적 전투를 준비하던 중 1908년 6월 일본군에 체포되었으나ꡒ나는 한국인이므로 일본인의 재판에 응할 수 없다ꡓ며 투쟁하다가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훗날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ꡒ만일 2천만 동포가 모두 허위만 같았다면 오늘의 굴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ꡓ라며 추모했을 만큼 선생은 불굴의 투혼으로 기울어 가는 나라를 지키려 했던 위대한 의병장이었다. 정부는 1962년 허위 의병장의 공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국방부 정훈공보관실 자료발췌 )


허위선생이 사형당한후

아들4명은 일경에게 쫒기어 러시아로 피신 끝내 조국으로 돌아 오지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소수민족으로 차별대우를 받고 일자리가 없어 러시아에서 바람처럼 떠돌던

손자들이 100년만에 조국으로 돌아 왔다 .

그러나 조국은 시베리아보다 더 추웠다 국적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정부에서 부모 없는

고아들 처럼 냉대를 받았으나 지인들의 도움으로서 행복을 찾게 되었다.

왜 ! 대한민국이 의인들에게 인색한지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구절이 생각 난다.

여러해 동안 정부기관에 많은 글과 소리도 외쳐 보았고 대한민국사람으로 인정을 받기위해

노력을 하였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서야 거대한 정부가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에서 고생하시는 형님은 왜 한국으로 모셔 오지 않습니까?

네  ! 모셔 왔습니다 그리고 아들까지

고려대학교 한국어과정장학생으로 7월3일 부터 1년동안 굥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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