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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댓글[1]
아침햇살 (2009-08-22 오전 8:42:17) http://blog.somang.net/1234/530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5~7)

 

예수님의 가르침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종말에(세상 끝 날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였다.

물론 예수님 안에서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이기도 했다.

더 쉽게 말하면 영생(3:15)이었다.

 

그렇다! 예수님의 오직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 세상이 결코 아니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인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인간에게 이보다 더 고상하고 귀한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해답(대답)이 어디에 있으랴!

 

해답이 존재함에 감사하며,

그 해답은 명확하다. 진리는 명백하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 영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모태에서 출생하는 출생은 육적 존재가 되는 육적인 출생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이 육적인 출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성령에 의한 영적 출생으로,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사도바울의 표현(고전15:50~58)대로 말한다면,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15:50)

 

세상 끝 날에

변화하게 될 사람(우리),

썩지 아니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사람(우리)

사망이 삼킨바 된 부활한 몸을 입게 될 사람(우리)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얻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존재의 변화를 입어야한다

육적인 존재인 우리가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한다.

이 세상의 현 실존(육적인 존재)에 대한

철저한 부정(NO)!

완전히 새로운 존재, 성령 하나님에 의한 영적인 존재가

되어야한다(must be spiritual).

이 절대적인 ‘요구’를 누가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절대적인 ‘요구’앞에서 누가 자신이 ‘해당 안 된다’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중생의 이 절대적인 필요성 앞에서 누가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단 말인가?

‘영혼’의 구원의 필요성 앞에서 누가 한가롭게 세상일에 몰입할 수 있단 말인가?

“헛되고 헛된 것이 세상일인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절대절명의 일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세상 끝 날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텐데,

세상을 심판하시어, 인류를 둘로 나누고,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시면서

천국으로 들어갈 축복받을 자들과 지옥으로 들어갈 저주받을 자들로

나누 실 텐데,

이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다가오는 현실)앞에서,

누가 예수그리스도의 이 복된 말씀을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방법이 있다는 것

영생 얻고, 구원 얻을 방법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예수님은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 끝 날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천국)만을 오직 선포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시급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영생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임을 가르치셨다.

 

이 세상에, 이 세상 관심에만

몰입되어 있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천둥소리’ 그 자체다!

 

SOLI DEO GLORIA!

 

 

 

 

 

 

 

 

 

 

요한복음 전체의 구조와 핵심 메시지

1. 요한복음은 ‘표적들’과 ‘긴 강화들’로 이루어져 있다.-표적의 책과 긴 강화의 책.

2. 요한복음은 “천상에서 시작하여 천상으로 끝맺는”(하늘에서 시작하여 하늘로 끝나는, 영광에서 시작하여 영광으로 끝나는) 책이다.-예수님은 “성부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으로, 성부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분”(선재에서 시작하여, 인간이 되신 성육신후, 십자가에 죽으신 후 다시 부활 승천하여 선재 상태로 다시 돌아가신 분)으로 선포된다.-다른 복음서와의 차이점이다. 시작도 끝도.

-who are you(너는 누구냐?) 예수님을 향한 이 질문이 요한복음의 핵심 질문이다.

너는 그리스도냐?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당황하게 할 만한 충격적인 말씀을 선포하신다.

-나는 하나님과 동등하다, 성부하나님과 동등한 아들하나님이다. 나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다!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인간(사람)만을 보고, 인식하는 유대인들과 신(아들 하나님)이심을 주장하고 선포하는 예수님의 긴장관계가 요한복음 전체에서 펼쳐진다. 너는 부모가 요셉인 요셉의 아들아니냐? 갈릴리 출신아니냐?(하늘에서가 아니고, 땅, 그리고 갈릴리에서)

-“성육신”이란 비밀을 두고서 형성되는 긴장관계, 그리고 죽음!

-요한복음 전체에서 유대인들(빌라도)은 계속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를 질문한다. 하늘에서냐 땅에서냐? 신이냐 인간이냐? 그리고 ‘어디로 가느냐’! come from where(어디서 왔는지), go to where(어디로 가는지)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질문으로 반복된다.

 

3.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심”(성육신)을 초점으로 강조한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의 중재자로 합당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계시의 중재자, 계시자로 합당하신 분이시다. 성부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영광을 누렸던 성자하나님만(말씀)이 성부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합당한 계시자가 될 수 있다.

4. 요한복음은 계시의 내용이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얻는 것임을 선포한다.

성경 계시의 대전제

1

-인간의 현 실존과 현 세상(이 세상)에 대한 철저한 부정(문제제기):구원의 필요성 있음.

-우리는 현 실존과 현 세상을 당연시하고, 문제 제기 없이 그냥 받아들이나(세상적 관점), 성경은 그렇지 않다(성경적 관점-성경은 이것을 ‘생명’이라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현 실존은 ‘생로병사’로 요약되는 것으로, 출생으로 시작하여, 성장, 삶과 병, 늙음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현 실존과 현 세상을 철저히 부정하고, 구원 받아야할 필요성이 있는 존재로 폭로한다(드러낸다).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생명 얻는다’-‘생명’이란 무엇인가?(요한복음의)

-현 실존(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존재됨)은 ‘생명 없음’으로 특징지워진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육적인 생명, 죽기 이전에 이 세상에서 사는 육적인 생명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이지, 성경의 ‘생명얻음’의 ‘생명’, 예수님이 선물로 주시는 ‘생명’이 아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오는 세대의 생명을 말한다. 현 세상(이 세상, 이 세대)과 오는 세상(오는 세대)-2가지 세대가 있다-시간적인,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즉 종말에 이 땅에 임할 천국(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사는 부활생명, 영원히 죽지 않고 영화를 누리는 생명이다. 부정적으로는 종말의 지옥 심판을 받아, 영원히 지옥에서 멸망당하지 않고, 세상 끝 날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마지막 날에, 재림)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사는 영화의 삶(부활의 몸은 전제-죽지 않는 몸을 입고 죽음을 영원히 정복한 영화의 몸으로서의 삶). 이 세대의 삶은 임시적인 삶이다.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을 향하여 가는 임시적인 삶으로, 심판으로 멸망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삶으로, 구원얻어야할 삶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대의 삶은 ‘생명’이 아니다. 어두움이라고 말하고, 영적 죽음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실존, 현 실존과 인간에 대한 철저한 부정은 이런 종말론적인 배경에서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온 세상(모든 민족에 대한 세상 끝 날에 심판)에 대한 심판! 철저하게 부정적으로는,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빵 문제 해결해 주려고 오신 것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하나님의 심판하에 있는 인간-를 해결해주러 오신 것이다. 이 세상성에 함몰되고, 지배된 우리 인간들에게는 낯선 선포일 뿐이다. 이 세대, 이 세상이 ‘다’라고 생각하고, 죽음이후의 내세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 끝 날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이 어찌 예수그리스도의 복된 말씀의 영광을 알 수 있으며, 복음을 배척할 경우에 임할 그 위험성(위기)을 알 수 있으랴!

-성도들은 철저히 이 세상 소망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 아니다. 종말에 들어갈 영광의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을 삼아 사는 존재들이다. 땅을 바라보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유업을 상속할 종말의 임함을 고대하며 사는 자들이다. 종말론적인 신앙과 그 영광의 전망을 잃어버린 우리(기독교인들 조차도)에게 복음의 영광이 소망이 되지 못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베드로가 말하는 성도들이 예비하여 세상사람들에게 대답해야할 소망은 종말천국의 소망이다. 이 세상 소망아니다! ‘빵’을 구하는 사람들(유대인들)에게, 정치적인 독립과 해방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고개를 돌리신다! 예수님은 열심당(혁명당)이 아니다. 일반적인 사회개혁가 아니다-마르크스나 간디나.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회개혁가이다-하나님의 나라의 이 땅에 임함! 그런데 철저히 오는 세대의 관점에서 이다. 이 세상의 빵 문제, 생존문제 해결하려고 오신 것 아니다. 이것은 충격이다!! 유대인들의 세속적, 정치적 메시야관을 예수님은 철저히 배척하신다! 혼자 산으로 가신다!

 

2.

-성경은 현 실존과 현 세상을 인간이 헤쳐 나가는데 필요한 ‘세속적 지혜서’가 아니다. 윤리적, 도덕적 측면에서 그런 측면이 있으나, 성경계시의 근본 성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즉 이 세상에서 현 인간이 먹고 사는 생계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지혜서 책 아니다.

 

3.

성경의 관심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현 인간을 응원하고, 뒤처리해주고, 지원해주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을 ‘이용’하면 안된다. 이것이 신앙이 아니다. 요6장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역하시면서 배척하시는 것이 ‘정치적, 세속적 메시야관’이다. 예수님께서 ‘빵 문제’(경제적인 생존의 문제), 정치적인 해방의 문제(로마의 지배로부터의 해방) 해결해줄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 아니다!

 

4.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근본 문제-영생, 생명, 종말의 부활생명’ 때문에 오신 것이다. ‘육신의 떡’ 때문이 아닌, ‘영생의 떡’ 때문에 오신 것이다. ‘육신의 물’때문이 아닌, ‘생명의 물’ 때문에 오신 것이다. 우리와 한국교회는 이 정치적, 세속적 메시야관에 사로잡혀 있다. 세상에서 성도들이 ‘잘 되는 것’을 뒷받침하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 세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 세상, 현 실존은 관심 밖이다. 충격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근본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과 현 실존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요6장에서 ‘자기 기대’(정치적, 세속적 메시야관)와 다르게 행동하는(‘자기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떠난다. ‘그들의 기대’는 예수님의 관심 밖이다. 예수님의 오직 관심은 현 인간의 ‘구원, 생명’이다. 현 인간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경제적 빵 문제 해결, 정치적 해방의 문제 해결이 아니다. 현 실존의 인간은 ‘구원받아야할 상황’에 있다.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는 실존, 존재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해(죄인) 심판받아야할 존재,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는 존재!

 

5.

요한복음에서 ‘어디서 왔느냐’와 ‘어디로 가느냐’가 반복된다. 예수님을 향한 질문으로!

요1:1ff은 처음부터 우리의 시선을 천상으로(영원으로, 하늘로) 향하게 한다-다른 복음서와 달리!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성육신) 예수님은 누구신가?(who are you) 요셉의 아들-땅의 모습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들(유대인들).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 맞다! 그러나 성육신 하신 하나님(성자)이시다! 성육신(성자하나님의 인간, 사람이 되심-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자 하나님)의 신비(mystery)! 요한복음에서는 ‘이 신비’로 인해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대화의 어긋남과 불통과 긴장이 형성되고, 결국 죽음의 위협을 받아, 죽음에 처하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결국 예수님은 신성모독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다(사형집행)! 미친 사람으로! 요한복음은 천상(하늘)에서 시작하여 하늘로 돌아감으로 끝난다. 태초이전의 영광으로 작하여 부활,승천후 영광으로 끝난다!

 

6.

요6장의 ‘물’과 ‘떡’(bread-빵)은 이 세상의 삶(육적 생명-성경에선 이것을 ‘생명’이라 부르지 않는다. 당연히 오는 세대의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 생명이 생명이다)을 유지하는 필수 양식, 음료수인데, 이 세상의 이 필수 양식을 공급해주어, 이 세상의 현 실존(인간)을 유지시키러 오신 분이 아니다. 오는 세대의 부활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고자 함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성자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이다-성부하나님의 아들 파송목적!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영광중에 거하셨던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이유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분이다.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성부 하나님께로 돌아가신 분이시다!

 

7.

예수님은 누구신가?(who are you) 하나님의 아들, 신성을 가진 성자하나님이라고 자기 주장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으로 십자가에 죽인다. 그러나 죽음 이후 부활하심으로, 당신이 ‘성자하나님’(신성주장)이 참임을 증명하신다. 도마의 고백-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은 요한복음 전체의 핵심 질문이다. 대답은 장엄하다-나는 하나님이다!(성육신-성자하나님). 가장 의심많은, 깨닫지 못하는 도마로부터 나온 고백(20:28)-나의 주, 나의 하나님-신성인정과 고백과 경배! 부활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신 예수님! amen.

 

8.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왔고’(내려왔다), 그리고 ‘간다’(나의 가는 곳, 올라간다)는 말씀을 반복하신다. come from where, go to where!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시는지 당신은 안다!-유대인들은 모르지만! 그들이 소경이라!

성부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성부하나님에게로 부활, 승천후 돌아가신다!(20:17) coming down from God the Father in Heaven. and going up to God the Father in Heaven.

 

 

9.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인간적인 평가(신이 아닌 인간으로만 보는 평가-예수님이 ‘신’이라고 주장, 선포했을 때 유대인들의 반응과 평가)를 추적해보면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전체의 핵심 질문-예수는 누구인가?

-요한복음은 사실 이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따라간다. 예수라는 청년은 누구인가?---1---

처음부터 요한복음은 과격하게 시작하면서, 과격하게 선포한다. 태초에 존재해있었던 신(하나님)이신 말씀(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성자하나님)이 육신이 된 것을 선포한다-성육신! 말씀(신)이 사람이 된 성육신! 성자하나님, 독생자 하나님이 사람이 된 성육신!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과격하게 이 신비(mystery)-성육신-로 시작한다! 요한복음은 줄 곧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이 모순-육신으로 존재하는 사람이나, 실상은 ‘신’(성자하나님)인 신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예수-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예수의 주장과 가르침은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죽음’이라는 목적지까지 가야만 해결되는, 죽음이라는 목적지까지 가야만, 그 문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정녕 드러나는 문제로, 요한복음 전체에서 계속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문제다!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던 그 문제-성육신-가, 또한 여전히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도 문제가 된다. 납득하고 믿기 어려운 예수의 ‘사기’와‘미혹’주장! 1세기의 유대인 사회에서 예수의 운동은 큰 문제거리로, 그냥 놓아둘 수 없는 걱정거리였고,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가볍게 볼 수 없는 사안으로, 중대한 사안으로, 요한복음 처음부터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산헤드린, 공회)은 예수의 운동을 처음부터 주시한다. 세례요한의 운동부터! 이렇게 주시하는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와 아울러 정치적인이유도 같이 있었다! 예수로 인해, 사회적인, 정치적인 폭동(반란, 소요)이 일어난다면, 로마의 지배를 받는 유대의 입장에선 큰 손실과 혼동과 타격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어찌하든지 예수의 운동을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승인’하든지 아니면 ‘배쳑’하든지 하여,판결을 내림으로서, 예수의 운동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예수의 운동은 큰 세력을 형성하는 하나의 운동이었다. 요한복음은 역사적인 정직함을 가지고서, 우리를 예수의 운동 속으로 이끌어간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요한복음은, 그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큰 소용돌이를 일으킨 예수가 태초에 성부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신-성자하나님)임을 과격하게 주장하면서 시작한다! 이 첫 주장이후로, 요한복음은 ‘역사속에서’ 예수의 신성주장이 참임을 증명해나간다!-부활에 이르기까지-이야기의 끝까지! 요한복음은 하나의 논문같다! 흥미롭고 놀라운 ‘증명’!----2- 요한복음의 역사적 증명은 ‘세례요한의 사역’으로 시작한다. 세례요한의 운동은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세례를 주고 있었는데, 유대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는 큰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1:28-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이런 배경에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산헤드린, 공회)는 세례 요한의 운동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고, 조사에 착수하여, 조치를 취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한다. 1:19~28에 보면, 예루살렘 당국(종교지도자들, 산헤드린, 공회)에서 세례요한의 운동을 조사하기 위해 대표단(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파송하고, 세례요한과 공식적인 대화(심문)를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누구인지?(너는 그리스도냐?) 왜 세례를 주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에 세례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 선지자, 엘리야도 아니요,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로, 광야에서 메시야(그리스도)의 길-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전령’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한 세례 주는 이유는 자기 뒤에 올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선포’하기 위한 것에 불과함을 말한다-즉 ‘누가’ 그리스도인지 증거하는 역할이 자신의 역할이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1:26, 31~34)에 보면, 세례요한은 “너희가운 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라고 말하는데, 즉,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지만, 누가 그리스도인지 알지 못한다. 또한 세례요한도 알지 못한다. 누가 그리스도인지!(1:3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 주는 사역을 통해서, 누가 그리스도인지 알려주시겠고, 확실한 증명증거-세례요한이 세례주면서 볼 때, 성령이 비들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러있는 사람-를 보여주시면서, 세례요한에게 그 분이 그리스도인-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것을 알려주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확증사건을 통해서 세례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신성)임을 만천하에 증거한다! 예수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그리스도-이라고 증거한다. 바로 이것이 세례요한의 역할이었다-바로 ‘예수’라는 청년이 메시야(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전령자의 역할! 세례요한의 운동의 존재 목적은 그 자체,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이니었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신 예수와 예수의 운동(하나님의 나라)을 위한 준비차원에서 존재 이유가 있는 성격이었다! 1:35~42에 보면, 세례요한의 제자들 2명이-안드레와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세례요한의 ‘증거’-예수가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어린 양-를 듣고서, 메시야인 예수를 따라가, 예수의 제자가 되고, 예수의 운동에 합류한다. 안드레는 자기 형제 시몬을 데리고, 예수께로 와서, 같이 예수의 제자로, 메시야 운동에 동참하게 하는 인도자가 된다. 그 다음에는 예수는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청년인 빌립을 만나서, 그를 자기를 따르라고 초청하면서, 자기 제자로 삼는다. 예수의 메시야 운동에 참여하여, 예수의 제자가 된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서, 그를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라고 증거하면서, 그를 예수께 데려온다. 결국 나다나엘도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1:49), 신앙고백하면서, 메시야 예수의 운동은 제자들을 얻으면서, 발전해 가게 된다! 이렇게 메시야 예수의 운동은 세례요한의 증거로 커나게 된다! 3:22~30을 보면, 세례요한의 운동과 메시야 예수의 운동의 본질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본문에 보면, 세례요한과 메시야 예수는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는, 같이 세례 사역을 했다! 같은 공동체를 형성하시 않고, 따로 각 운동을 했고, 두 운동에 각각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두 운동은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끌어모으고 있었는데(1:23), 이것으로 ‘긴장’이 조정된다! 세례요한을 추종하는 제자들은 세례요한은 살렘 가까운 에논(세겜 동편 와디 바라인 것으로 추측됨-에논에서 세례사역중-예수는 유대에서 세례사역중-세례요한이 세겜 동편 에논에서 세례주었는데, 그곳은 사마리아 지역이다. 즉 세례요한이 사마리아지역에서도 복음전하고 세래주었음을 의미한다! 즉 세례요한은 요단계곡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지역에서도 활동함. 전형적인 유대인들에게는 사마리아인들은 형식적으로 부정하였지만, 세례요한은 그런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예수님도! 이렇게 세레요한이 사마리아 지역에서 활동했음에 반해, 예수님은 유대에 남아서 자신만의 세례 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운동과 예수의 운동사이에 긴장이 조성된다-예수의 제자가 된 세례요한의제자들과 여전히 세례요한을 추종하는 제자들사이의 긴장과 이걸 이용하는 바리새인의 악용으로!)에게 급기야 질문한다-선생님(랍비)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세례요한은 이 질문에 대해 세례요한은 자신의 운동이 궁극적으로 ‘그를’ 위한 준비의 운동이며, 쇠퇴하여 사라지게 될 운동이며, 그것의 존재목적인 ‘그를 위한 준비’를 다 한 후에는 사라져야 할 운동임을 말하면서, 세례요한 자신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그 자체-메시야 준비사역-가 ‘기쁨’임을 말한다! 세례요한의 말은 놀랍지 아니한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자에 불과하다! 나는 신랑 아니다. 신부를 취하는 신랑 아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렇게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그리스도-메시야를 안내하는 전령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제 상황이 바뀌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산헤드린, 공회)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운동은 세례요한의 운동으로부터 예수의 운동으로 시선이 바뀐다! (4:1) 이제 예수의 세례 운동과 표적 행함과 가르침 운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당국에 요주의 운동이 된다!(4:1)-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 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이제 제자들의 숫자에 있어서도, 백성들 속에서 미치는 영향력에 있어서도 예수의 운동은 세례요한의 운동을 뛰어 넘고 있었다! 이제 유대사회의 주된 문제거리와 관심은 예수라는 청년이 일으키는 폭발적인 운동에 있었다! 핵심적인 12제자들 외에도 일반 유대인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어, 그 운동의 제자 숫자가 많아져서(2:23), 예루살렘 종교 당국의 요주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유대인 백성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나,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유대인들도 생기고, 어떻든지 예수의 운동은 유대인 사회에서 Hot issue 였다.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와 예수의 운동과 예수가 일으킨 표적과 예수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지를 놓고서 논쟁하고, 이젠 유대인 사회의 중심 문제가 된다! 이런 배경에서 요3장에선 유대의 종교지도자들 중에서도 예수의 운동에, 예수의 메시야되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한다-큰 변화가 아닐수 없다! 일반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종교 당국 지도자가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이 니고데모다(3:1-바리새인, 유대인의 관원-산헤드린, 공회의 회원). cf) 위의 밑줄의 연속:바리새인의 악용으로, 두 운동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자(세례요한은-사마리아 에논지역 세례사역, 예수님은 유대 세례 사역중), 예수님은 북쪽으로 물러가신다(4:1ff-예수께서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세례요한은 북쪽 갈릴리에서는 사역하지 않았지만, 베레아(요단강 건너편 배다니-1:28-요단강 서쪽 제방에서 뿐만 아니라 동쪽 제방에서도-배래아)에서도 사역하였다(거긴 헤롯 안디바의 통치지역-북쪽 갈릴리와 더불어, 그에 의해 처형됨). 요한은 사마리아 지역 세겜 동편 에논에서 배래아로 돌아왔다(,come back)-거기서 해롯 안디바에 의해 체포됨.-마키루스의 배레아 요새에 투옥시킴-세례요한은 감옥안에서 제자들과 면회하고, 갈릴리의 예수의 사역소식을 듣고, 조금 자유로운 상황이었으나, 결국 처형됨-세례요한이 군중 동원 폭동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어).

 

**1***cf-1) 부록-예수의 수세의 의미와 광야시험의 의미!-요한복음에는 등장하지 않지만!(부르스의 신약사,200~202참조), 또한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사역의 의미(위의 책, 204~207-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멍에를 지고 있는 자에게 자유함을! 포로:영적인 포로다, 정치적 억압받는 피지배의 포로가 아니다!) -1-예수의 수세의 의미:::

 

 

**2***와 -2-광야시험의 의미!-

 

cf_2) 부록-예수그리스도의 12제자의 면면-1-

일단 예수의 노선은 열심당의 노선과 정반대의 노선을 취한다.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열심당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취하도록 가르쳤다. 즉 폭력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보복하지 않고, 오른편 빰을 치면 왼편 뺨까지 돌려대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기를 자원할것을 가르쳤다. 또한 예수는 그의 청중들에게 경고했다. 만일 이 평화의 방법이 무시되고, 대신 로마에 대항하는 반동의 방법이 택해진다면, 빌라도 군대에 의해 성전뜰에서 목배임을 당했던 난동부리던 갈릴리 사람들에게 파멸이 임했던 것과 똑같이 이스라엘 땅에 파멸이 임할거라 하였다. 예수는 왜 회당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다가, 나중엔 언덕이나 갈릴리 바닷가를 찾았는가? 그건 갈릴리 지역의 회당 당국자들은 예수가 회당을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를 위한 연단으로 사용하는 걸 점차 꺼림직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예수는 설교하기 위해 회당 아닌, 언덕이나 갈릴리 바닷가를 찾았다. 예수는 너무나 많은 점에서 바리새인적 정통의 기정표준들을 공격하고, 도전하였다! 특히 안식일 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예수는 ‘주권적인 너그러움’에 의해서 하였고, 대개의 종교인들이 거리감을 두어 왔던 평판이 좋지않은 인물들을 찾아내어 그들과 교제함으로서 도전했다!(challenge) 예수는 힐렐이나 샴마이 학파가 해석하는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대신, 안식일은 인간들의 구조와 복지를 위해 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 ‘목적’을 증진시키는 행위는 어떤 것이든지 안식일에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경우가 위급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안식일은 그러한 긍휼을 배푸는 일에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한편으로 안식일 법을 무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 것이나 그 목적에 저촉되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2-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과의 예수의 교제에 대해 말하면, 그들 중에는 일반적으로 세리들이 포함되어 있는 바, 예수가 세리를 12 중에 하나로 실제로 자기 ‘핵심’ 제자로 불렀을 때, 그가 상당한 반칙을 범했었음이 틀림없다. 세리인 레위가 세리란 직업을 포기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할지라도, 그가 과거에 세리였다는 사실은 많은 ‘경건한’ 사람들의 소견에는 그에게 불리한 지울수 없는 얼룩이었다. 헤롯 안디파스가 갈릴리의 분봉왕이었을 때, 갈릴리의 세리들은 로마인들에게 아부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그래서 비난받게된 이유는,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데 있어서 ‘착취’가 세리의 생활방식과 실재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세리들은 종교단채의 책임있는 직위를 얻을수 없엇고, 그들의 증언은 유대인법정에서 수납되지 않았다(미쉬나, 네다림3:4). 그러한 ‘타락한’ 인물들이 참된 회개를 경험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가(문제가) 율법학자들의 학파에서 심각하게 논란되었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자들도 그것이 매우 어렵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회개한 세리가 부당하게 착취한 모든 돈을 반환한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수가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고 먹는 것은 그의 대부분의 종교적 동시대인들에게 커다란 불명예의 원인이었다. -3-예수는 갈릴리 헤변에서 어부들을 그들의 일터에서 부르셨다. 그들은 가버나움의 부둣가에서 그들이 잡은 고기에 대해 세금을 바치도록 자주 강요를 받았다. 누구애게 였던가? 지금 새로운 동료가 된 레위(와 같은 자)에게 였다. 그러면 그 어부들이 이 새로운 동료를 어떻게 생각했을 것인가? 아마도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의 경우, 그가 그의 새 동료를 관용하고 교제하기란참으로 어려웠을 것이 틀림없다. 열심당원인 시몬이 12제자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 선택의 보편성을 보여준다.그리고 열심당원인 시몬은 그의 새로운 주인(예수)의 가르침이 전에 그가 배웠던 열심당의 가르침과 판이하게달랐음을 깨달았을 것이 분명하다. -4-우리가 열둘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난폭한 개인주의자들의 집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성인들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은 ‘우뢰의 아들들, 폭동의 아들들’로 불린 자들로서, 아주 성미가 급한 형제들이었고, 사도들 중에 첫째인 자는 ‘바요나’라는 부칭(아버지 칭호)을 지니고 있었다. 그 용어는 율법학자의 문헌에서 반역자의 계급으로 칭하는 용어와 비슷하다. 유다의 별명인 가롯은, 여호수아15:23의 그리옷을 의미한다면, 유다는 12중 유일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여 성전 당국자들에게 팔아넘긴 것으로 판단하면, 그는 아마도 좌익 열심당원이었든지 아니면 우익당원이었을것이다.(부르스, 신약사, 215~219 참고).

 

**3***cf-3) 부록-시몬, 안나, 아리마대 요셉(보다 남쪽사람), 엠마오2사람-눅2:25, 38, 23:51;24:21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 사람들! 이들의 메시야 소망을 더 자세히 연구하라!(부르스, 신약사, 220)

 

 

 

 

 

 

 

 

 

 

요한복음1장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의 핵심 구절)

-왜 예수의 가르침이 유일한 계시의 원천인가? 다른 사람은 왜 안되는가?

‘구원의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선지자들이야말로, 바로 그런 자들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임하여, 말씀해주시고,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그렇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도록 위임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계가 있다!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은 아니다. 하나님을 직접 얼굴로 본 사람이 이 세상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의 온전한 전달자(중재자)가 될 수 없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이 사용하셨지만, 그러나 완전한 의미에서 선지자들은 ‘부분적인 계시의’ 전달자일뿐이다. 여기에 예수의 차이가 있다. 예수는 하나님과 영원전부터 함께 존재하시는 아들하나님이시기에, 즉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같이 계시면서,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를 하실 때도 같이 창조하신 하나님(말씀)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의 완전하고 유일한 계시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당신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하나님의 것임을 반복해서 말씀하신다(성경구절 찾아보라)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계시의 유일하고 온전한 전달자로서의 예수의 자기 주장이 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선지자)중 최고로 친다.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모세는 하나님이 그에게 시내산에서, 그리고 평생 말씀하신 선지자요 종 맞다! 그러나 예수를 유대인들은 무시한다! 여기에서도 큰 간격(big gap)이 존재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부르신 선택한 사람이요,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를 무시한다! 여기서도 큰 간격! 급기야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물어본다(8:53~59)-“53-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너는 선지자보다 크냐?)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58-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너는 아브라함보다, 모세보다 크냐? 선지자들보다 크냐? 크다! 그 이유는? 하나님(말씀-logos)이시기때문에! 성육신! 이것은 신비다. 아브라함 나기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 당연히 모세를 능가하는 하나님, 세례요한은 오실 분(he who will come after him)-그리스도-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알고, 선포한다-성육신의 신비를 안 세례요한!. 1:15, 30-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큰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그리스도란 이름과 하나님의 아들(신성)의 관계성을 주목해야한다. 그리스도란 말은 칭호다. 직책을 의미하는 말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구원사역을 하도록 기름부은 사람을 가리키데, 직책의 차원에서 일컫는 말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을 계속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정체성에 있어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계속 알려주시고, 보여주셨다! 놀라운 신비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이 되어, 임마누엘하셔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하실 것을 하나님은 예언, 약속하셨던 것이다.(1:49-나다나엘의신앙고백-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잠시 누가복음으로 눈을 돌려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성육신의 계시는 구약에서 예언된 공공연한 약속이었으나, 신약시대에는 비밀(감추어진 계시)이었다! 한 예로, 세례요한을 수태한 엘리사벳이 예수를 수태한 마리아의 문안인사를 들을 때,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큰 소리로 한 말을 들어보라-눅1:43:“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1: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을 사람들의 빛이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5-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할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의 핵심구절), (30).

 

 

요한복음2장-표적2개&이상.-‘표적’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눈으로 ‘보고’ 믿도록(목적/그래서 구원얻도록-요2:23) ‘보여주는’ 설교-가르침은 사람이 귀로 ‘듣고’ 믿도록(그래서 구원얻도록), ‘들려주는’ 설교. 문제는 볼 눈이 있느냐? 들을 귀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믿음의 문제인데, 이 믿음은 ‘신비’로 성령에 의해서만 소유하는 것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다. 이것은 올바른 방식이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참 선지자인지 알아보는 방법이 표적을 행하는지 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로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말이 참이면 볼수 있는 증거로서 표적을 행함이 참 선지자의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표적을 구하는 것은 맞지만, 표적을 보고도 소경이 되어, 눈이 멀어서 표적을 보지 못하여, 믿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표적의 문제가 아니라, 관건은 믿음이란 결과를 발생시킬수 있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고, 그 눈으로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의 차원인 것이다! 많은 표적을 행해도 믿지 않으니 ,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표적을 행하시지 않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가 행한 표적과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모세,등등)이 행한 표적과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행한 표적은, 하나님의 영광(성자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보여준’(눈으로 볼 수 있도록 보여준) 표적인데 반해, 선지자들의 표적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는 입증과 증거의 차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가 행한 표적은 하나님이 파송하신 단순한 인간 선지자가 행한 표적(증거-proof)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서 임재해계시다는 ‘가시적인 증거’로서의 기능을 하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자신이 ‘신’(하나님되심,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성자 하나님되심)이라고 선포하는 과격한 자기 주장(신성주장)이 ‘사기’가 아니라고, ‘참’임을 증명하는 증거라는 데에, 예수가 행한 표적의 근본적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예수의 표적은, 예수 당신이 겉으로는 ‘인간’(요셉의 아들, 나사렛 출신, 50이 안된 젊은 청년)이지만, ‘실질상’(존재의 정체성)차원에서는 ‘신’(성자하나님-하나님과 동등한 자-아들 하나님)이라는 것-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가시적인 증거’다. 예수가 가르치면서 계속 자신이 ‘신’이라는 신성주장을 하니까,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하면서 어이 없이하고, 분노하고, 죽이려고 하는데, 예수의 자기 주장과 유대인들의 반박주장 사이에서, 누가 옳은지 판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준(증거, 시금석)이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표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계속 보여달라고, 행하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게임은 이미 끝났다! 예수가 행한 표적이 있고, 바로 이 표적은 예수라는 인간 청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성육신하여 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입증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잘 알고 있었다. 구약에서 기록된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너무 잘 알기에, 예수의 ‘표적’이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시적인 sign)임을 보고, 알고, 믿을수 있었다! 놀라울 따름이다! 성육신 이것은 신비(mystery)다! 그러나 인간이 눈으로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신비’다. 표적을 볼 수 있도록 허락되었고, 예수는 당신의 자기 주장(신성주장)이 참임을 표적으로 ‘보여줌으로서’ 공공연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공공연한, 밖으로 드러난(오픈된) 신비(mystery)다. 예수가 행한 표적은 만인이 보는 앞에서 행한 표적이었다! 한적한데서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눈으로 자명하게 볼 수 있도록 행한 표적들이었다! ‘증거’(표적)가 없어서, 예수의 신성주장을 못믿겠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계속된 시비는 그 자체로 그들의 악함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이 거짓말하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유대인들이 ‘보고’ 믿게 하는 증거(표적들)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즉 유대인들이 소경이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다! 표적을 행함으로, 그들의 눈 앞에 자명하게 ‘보여주어도’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다! 예수가 몸을 입고 있는 육신적인 차원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큰 걸림돌이며, 장애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도 본질적인 걸림돌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 그리고 백성 유대인들은 예수가 행한 ‘표적’을 보고, 그 표적 속에서 예수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심(하나님의 영광, 독생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증명해보이셨고,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눈’(신령한 눈)으로 보았기에, 예수를 그리스도이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했다! 눈으로 표적을 ‘본’ 예수의 제자들과 일반 유대인들은 예수의 신성주장을 자연스럽게 믿을수 있었고, 그들에게는 예수가 인간이라는 사실(겉으로 드러난 인간정체성)이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성숙하고, 온전한 의미에서 예수가 진정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아는데는 시간이 필요했고, 점진적인 지식의 향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부활이후에야 비로서 완전하게 그 신비(예수의 신성주장)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가 표적을 행함으로 보여주는 그 ‘의미’를 매 단계마다 알고, 믿고, 예수를 따를수 있었다! 예수가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가 큰 걸림돌인 것이 사실이다. 1세기 유대인들이나 21세기 현대인들에게나. 그러나 그것이 본질상 문제가 아니다. 표적을 보느냐, 못 보느냐의 문제가 본질이다! 눈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성육신은 진정 신비다!(mystery) 그러나 오픈된, 드러난 신비다. 그 성육신이 참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문제다. 증거 없이, 맹목적으로 추종되어야하는 맹신의 신비가 아니다. 말씀이신 성자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 신비다. 또한 우리 인간이 그 영광(하나님의 영광)을 보니(‘표적을 통해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고백하는 것도 신비다.(1:14-요한복음의 요약 구절) 예수가 행한 최고의 표적은 ‘부활’이다!(2:18~22) 부활하심으로, 예수는 당신이 인간이 아닌,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입증하신 것이다. 증거가 없다고?! 천만이다. 눈이 없음이 본질이다. 보지 못함이 본질이다! 보고, 믿는 것(신앙, 믿음) 이 자체가 신비다! 신앙으로 나아갈려면, 많은 걸림돌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인간이라는 사실(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되심, 육신이 되심), 부모가 알려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청년이라는 사실, 50도 안된 젊은 청년이라는 사실, 그리고 표적을 행했어도, 세속적, 정치적 유대인의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고, 표적 행하고, 가르치는 예수의 표적과 가르침, 등등은 유대인들에게 많은 걸림돌이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신’(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받아들이기에는! 그러나 놀랍고, 신비롭게도 신앙은 이 많은 장애물들이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쉽게 넘어가고, 극복되고, 자연스럽게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신성)로 믿고, 영접한다! 이 차이는 어떻게 생기는가? 인간적으로는 많은 걸림돌이 있어서, 예수의 자기주장을 믿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고, 불가능한데, 이 차이는 오직 성부하나님의 이끄심(leading) 때문에 생긴다. 이 믿음은 인간적인 지식이나 육적인 지혜가 아니다. 철저히 성령에 의한, 성부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신령한 영적인 지식이다! amen.

 

 

2:11-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표적을 보고)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6-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제자들이 성경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1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 20-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3-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4***cf) 부록-성전정화(요2)의 사건의 의미:복음서들에 따르면, 순례자들의 광신적인 환호와 성전정화 이렇게 사건순서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이 2가지 사건을 분리시켜, 2년간의 공백이 2사건사이에 있고, 성전정화 사건은 요한복음 초두에 배치한다. 이것의 신학적 의미와 의의와 취지가 무엇인지 살펴보라-전문서적활용! 성전정화사건의 의미에 관해서는 부르스, 신약사, 224~226참조하라.

 

**5***cf) 부록-순례자들의 광신적인 환호와 예수의 나귀로 입성 사건의 의미는? 이 신학적 의미를 위해서는, 부르스, 신약사, 222~224참조하라.

 

요한복음3장(내가 참 좋아하는 성경 장)

-니그데모는 왜 예수를 찾아왔을까? 요3장에서, 우리는 예수의 운동이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며, 영적인 운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세속적, 정치적 메시야로 오신 정치적,세속적 운동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인 것을 알 수 있다. 메시야 예수의 운동의 정체는 무엇인가? 운동의 존재목적과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는 무슨 목적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표적을 행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예수 운동의 정체성(identity)은? 메시야 예수의 운동은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으로, 철저히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운동이다!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이 아니다! 이 세상의 빵 문제 해결하고, 정치적인 해방과 독립을 추구하는 정치운동이 아니다! 세속적, 정치적 메시야관을 가지고 , 그런 ‘기대’를 고대하고 있었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의 ‘표적’과 가르침은 걸림돌이었다! 이 큰 간격! 결국 예수의 죽음으로 끝나는 예수의 운동은 세속적, 정치적 메시야관에서 보면, 완전한 실패였다! 헛 소망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의 세속적, 정치적 메시야관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메시야관의 큰 간격과 차이를 아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과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다! 이것은 1세기의 유대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21세기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된다. 성자하나님(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셔서,이 땅에 이 세상에 가지고 오려고 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나라의 이 정체-영적인, 종말론적 정체성, 세속적, 정치적성격이 아닌-를 아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다! 나는 오늘날에도 세속적, 정치적 메시야관(세상적인 가치관)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 오류 때문에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속으로 재대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믿는다! 이 ‘오류’(거짓된 세계관)을 극복하고, 종말론적,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사고와 관점을 받아들여야만 예수님의 말씀 이해하고, 예수의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다. 경제적 빵 문제, 정치적 해방 문제등 이 세상의 문제와 이 세상의 인간 실존에 함몰되고, 지배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이 오류 시정이 시급하다!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영적인 관점이 우리의 관점이 되어야,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요한복음 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의 끝에 가면, 예수의 메시야 운동은 백성들에게서 외면당한다! 당연하다! 기대가 달랐으니! 세속적, 정치적 매시야 기대를 가지고 있고, 그런 기대를 배척하고,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란 어리석은 이야기다! 부활 조차도, 세속적, 정치적메시야관하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의 가르침은 철저히 종말론적,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시는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무엇’!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3,5,15,16~18,36) 요3장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정리해보자! cf) 부록-요한복음설교3:1~15-누구나 사람은 거듭나야한다(must be born again, above)-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얻으려면!

 

요한복음4장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던 중 중간통과지역인 사마리에서 벌어진, 우물가의 한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다.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선물)은 무엇인가? 생수! 3:1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gift)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1-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where)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12-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ㅇㄹ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 1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 14-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25-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26-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29-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9-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으니라, 40-거기 이틀을 유하시매, 41-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3;43~54 갈릴리에서 행하신 메시야 예수의 두 번째 표적-53-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 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54-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메시야 예수의 운동이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도 받아들여지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제자들이 많아져서, 예수의 운동이 확장된다! 메시야 예수가 우리, 인간에게 주시려고 오신 그것은 무엇인가? 영생이다.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이신 독생자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무엇인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영생!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3:5). 이 말씀 자체가 충격이다!! 21세기의 현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니 말이다. 영적으로 소경된 현대인들! 이것이 현 실존, 현 사람과 현 세상의 실존이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 무지와 소경’ 도대체 진리의 말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소경된 상태. 니고데모처럼!(3:10) 11,32-위로부터 오셔서, 만물위에 계신 창조주 로고스께서, 하늘로서 오셔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에게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세상을 그의 증거를 받지 않는다! 영적소경의 상태! 성부하나님이 아들 성자하나님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인간이 ‘영생을 얻도록’!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이 말씀의 의미는?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은 종말론적이고, 초월적인, 영적인 말씀이다. 이세상적이고,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말씀이 아니다! 세상 끝 날에(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란 종말론적인 배경을 두고서, 현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받아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실존임을 전제로 하고서, 선포하신 종말론적인 말씀이다! 현실존과 현 사람과 현 세상에 대한 부정이 대 전제다! 현 사람, 현 실존, 이 세상은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문제이기에, 하나님의 심판하에 있는가? 이 대 전제의 심오한 의미를 알아야 ,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그 복음의 영광을 알고, 구원의 감격을 누릴수 있다. 날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물’은 자연적인 물이 아니다. 물은 생명에 필수요소다. 물없이 어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나? 절대 없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물은 이 세상의 물, 자연적인 물이 아니다, 절대! 이 세상의 빵(떡)을 주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아니다. 영적인 물과 영적인 떡! 예수그리스도는 철저하게 세속적, 정치적 메시야관을 배척하신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은 티브이나 신문이나 영적인 것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는다. 오직 경제와 정치관심사다. 경제적인 생존의, 이 세상에서의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인 물과 빵뿐이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는 세상이 오통 관심을 기울이는 이것(마6:31,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에 관심을 조금도 두지 않는다.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얻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이 커다란 간격! 이 간격이 생기는 것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예수님에게 있는 영적인 관점이 결여되어있다. 이방인과 이 세상사람들에겐! 그들에겐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란 영적인 차원이 없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관심과 이 세상의 실존에 갇혀있는 포로다! 철저히 소경이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참된 삶인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열심히 산다. 그러나 그들은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할 뿐이다. 그들에겐 인간이 죄인으로, 하나님의 심판하에 있어서, 멸망을 향하여가는 인식이 결여되어있다. 이것이 근본이것만, 이런 전망은 세상에서 철저히 무시된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인간의 실존(육적인 실존)을 예수님은 왜 부정하시면서, 현 출생이 아닌, 육적인 출생이 아닌, 영적인 출생(위로 출생, 성령에 의한 출생)이 있어야만 종말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시는가? 인간은 영적으로 위로부터 다시 출생해야한다(must)! 이 세상의 현 인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이 세상과 현 인간에 대한 부정이란 판결을 내리신 예수그리스도의 전망의 의미의 깊음을 알고싶다!-이것은 성경계시 전체의 핵심 진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전제와 전망이다. 분명한 것은 영지주의처럼, 예수그리스도께서 물질과 육체를 악하다고 생각하시면서 오직 영적인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의 영적인 것은 비성경적이다. 여기서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을 말씀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영적인 측면은 종말론적이고, 부활의 차원이고, 육체적인 차원이되 영광스러운 영화의 차원이다!절대 타계적인 것이 아니다. 중간상태의 구원도 성경적인 것이지만, 성경의 구원의 완성은 부활로 이루어지는 몸과 영혼의 부활로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다-영화와 영광의 나라로, 죽음이 정복된 부활영생에 구원얻은 성도들이 참여하는 것!). 어두움(요1:5-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이라고 일컫어지는 세상과 현 사람의 상태! darkness! 진리에 관한 한 소경된 상태. 그 세상의 어두움은 이 세상성에 갇혀있는 모습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죽음이후 심판도 없고, 부활도 없고!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불신앙의 어두움!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우리는 2중적인 장애물을 걷어야한다-세상적인 사고의 한계, 비유대적인 사고의 결핍! 우리는 소위 말하는 철학적인질문들을 물어야한다. 왜? 바로 그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이 하고 있기에!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 어디서 온 건가? 어디로 가는가? 죽음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죽음 이후는? 현재의 인간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등등..더 나아가 유대적인 개념의 배경, 구약적인 개념의 배경속으로 들어가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계속 던져야한다. 죄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시는가, 어떤 분인가? 악은 무엇인가? 사탄은 무엇인가? 예수는 무엇인가? 예수는 인간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죽었는가? 부활하였는데, 그 의미는? 다시 오시어 심판하시는데, 그 의미는? 우리 안에 철학적인 질문, 신학적인 질문을 묻는 진지성이 회복되고, 그 차원에서 성경계시로부터 진정한 해답을 듣고,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살아야한다. 헛된 허구를 다 부수고,진리로 무장해야한다!

 

요한복음5장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예수!

-내용 추가할 것.

 

요한복음6장(내가 참 좋아하는 성경 장)

-6:14-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25-바다 건너편(가버나움-빌립의 영토)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30-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5-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를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41-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리니라,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며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7-~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60-제자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수 있느냐 한대,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obstacles)이 되느냐, 62-그러면 너희가 인자가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6-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니 아니하더라, 67-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시몬 배드로가 가로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기대(세속적, 정치적 메시야관)와 예수의 지향점과의 메꿀수 없는 간격! 사람들은 이 세상의 떡(빵)을 구하는데, 경제적 문제, 정치적 문제의 해결을 구하는데, 예수님은 일어지하에 그걸 배척하신다(6:15)-예수는 자신이 열심당처럼 군사력을 동원하여, 혁명과 반란을 일으켜, 로마의 정치적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투쟁에 나서줄 것을 기대한 갈릴리 사람들의 기대를 배척한다(이 배척으로 많은 추종자들이 예수를 결국 떠난다) 예수는 갈릴리 사람들이 원하였던 종류의 왕은 아니었다. 예수가 준비하고 있었던 종류의 왕은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useless). 그러므로 예수를 따랐던 많은 갈릴리 사람들이 그 이후로 예수를 떠났다. 예수는 세속적 목적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온 것 아니다! 그래서(사람들이 당신을 임금과 왕과 군대 지휘자로 삼아, 정치적, 경제적 압제에서 그들을 무력으로 해방시킬 자로 알고, 왕으로 삼으려고 하기에) 예수는 갈릴리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빌립의 영토-갈릴리 바다 건너편) 피해 가신다! 이 세대의 빵과 오는 세대의 빵!(의 대립) 예수님은 오는 세대의 빵(떡)을 위해 오신 것이다. 내세의 생명! 충격이고 놀라움이다! 인간의 이해 못함과 예수의 과격한 자기 주장(‘신’-성자하나님)의 대립! 그 부모가 요셉의 아들인데(맞는 말인데!), 어찌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요, 아버지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자하나님)이요, 자기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생명의 가르침을 어찌 유대인들이 믿을 수 있는가? 성육신은 ‘신비다’, 믿음은 ‘신비다’. 인간의 지혜로운 믿고, 받아들일수 없는 계시의 비밀이다. 전적으로 성부하나님이 이끌지 않으시면, 계시를 알게 하시지 않으면, ‘미친소리’를 짓거리는 미치광이로 취급하는 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는 , 예수의 가르침이다. 예수의 과격한 자기주장-신성주장-은 ‘걸림’ 그 자체이다. 이 걸림을 누가 넘어서, 인간 예수를 신(성자하나님)으로 믿고, 인정하고, 영생을 얻을수 있을 것인가? 오직 하나님아버지의 계시를 받은 자들 뿐이다. 성육신의 신비는 놀랍도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파탄이여, 전적으로 무능함이여, 그 실상을 누가 알리요?!

 

요한복음7장

-7:1-이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11-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있느냐 하고 12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13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15-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않았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인간적인 학위나 license가 없다), 19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무리가 대답하여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3-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24-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25-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냐,26-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줄 알았는가,27-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그,28-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가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29-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30-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31-무리 중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랑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32-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3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34-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라,35-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where this man go)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38-나를 믿느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39-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40-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41-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43-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45-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46-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제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52-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죽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가? 물론 예수의 과격한 자기 주장 때문이다-신성주장!. 자세히 말하면, 예수의 운동이 사람들 속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에게 모아져 있었다. 이미 예수의 운동은 당국자들에겐 큰 문제거리로 등장하여, 예수를 죽여야만 이 운동을 잠잠하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지경까지 간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의 권세를 느끼고 있었다. 놀라고 있었다! 랍비도 아닌데, 배운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놀라운 권새의 가르침(교훈)을 배풀고 있고, 선포하고 있단 말인가?! 어찌하든지 유대인들의 성전관계당국은 예수의 운동이 과격한 운동으로 문제가 많기에, stop and 근절시켜야 하고, 그 주동자 예수를 죽임이 마땅하고,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죽음 조치’를 언제 취할 것인지 고심하면서, 준비하고 있었다. 유대인들 중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으로 믿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이 예수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 속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백성을 미혹하는 사탄적인 운동이라고 판단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임으로, 이 운동을 잠재우려고 계획할 정도로, 예수 운동의 백성들 속에서의 가르침의 영향력과 파급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 예수란 사람은 어디서 온 것인가? 갈릴리 출신이 맞는 이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신성주장을 하는 정신 나간 미친 청년을 가만 둘 수는 없었다. 죽음!을 통한 제거!만이 이 사태를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책일 뿐이었다.-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대화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한계성! 진리를 알아 듣지 못하는 철저한 한계성! 이 간격을 인간적으로 도저히 메꿀 수 없는 성격이었다. 세상적인 지혜는 하나님의 계시에 접근조차,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미혹’(거짓된 가르침으로 진리에서 이탈하게 하는 이단-나사렛 이단)하는 가르침이라고 ,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할 운동(49-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이라고 판단하니, 어찌 이 간격을 메꿀수 있단 말인가! 충격 그 자체다! 진리를 알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계시를 받을 자만이 가능하다! 철저히 가능하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를 믿고, 알고, 영생을 얻는데, 파산 그 자체이다! 인간적인 신학학위나 랍비 자격이나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예수! 진리의 원천은 인간적인 학위나 전문신학 이수 과정 이수한 랍비이거나 그런 인간적인 표준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성자 하나님만이 유일한 계시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믿음은 신비다(mystery). 성육신은 신비다. 누가 그 진리를 깨닫고, 그 계시의 영광을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성령의 조명으로만 진리를 알 수 있을 뿐이다.amen!

 

요한복음 8장

-8:12“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1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9“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1“다시 이르시되 나는 가리니(I will go-to God the Father in Heaven)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 22“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23“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니라”, 24,“이러므로~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5“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7:“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니라” 28:“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30:“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48:“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52“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ㅎ니”, 53“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 보다 크냐 또 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예수께서 대답하시되~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원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간격이 커도 보통 큰게 아니어서, 결코 서로 메꾸어질수 없는 간격이 존재함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대화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언제 ‘죽음’이라고 하는 시한폭탄같은 사건이 임박하게 터질듯 모르게, 팽팽한 긴장속에 대화가 진행된다. 관계성은 ‘긴장’그 자체이며, ‘적대’ 그 자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의 자기 주장은 과격 그 자체이다! 예수의 자기 주장은 신성주장이기에 말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때에(자기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사기치지 않나! 50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 보다 먼저 존재한 신적 선재(pre-existence)를 주장하여 신성주장하지 않나!), 귀신들린 자, 마귀의 영에 사로 잡힌 자, 하나님에게 절대 속할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라고 절대 믿을수 없는 자일 뿐이다. 사람이 주제에, 자기가 하나님이라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아브라함 태어 나기전부터 있는 자라니, 자기 믿으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는다고 하니,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말 통하지 않음을 넘어서, 과격한 주장 그 자체로 예수의 입을 막고, 돌로 쳐서 죽임이 마땅한 신성모독자이다. 인간이 주제에, 하나님이라니! 예수의 과격한 자기 주장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 그 자체였다! 예수를 죽임으로, 그 운동을 끝장내야할 사탄적, 마귀적인 운동이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왜 사람들이, 지성인들이 예수를 ‘신’(성자하나님)으로 믿지 않는가? 그들은 인간 성자로는 인정하고, 그 윤리 가르침이 탁월함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자하나님(신)임을 왜 믿지 않는가? 유대인들처럼,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도저히 믿을수 없는 것이다! 걸림돌(obstacles)이 많아도 보통 많은게 아닌 거다! 모순 투성이! 누가 예수의 과격 주장을 진리로 믿을 수 있겠는가? 인간의 지혜와 판단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가르침과 성령의 가르치심이 아니면 불가능한 성질의 진리이다. 신앙은 ‘비밀’ 그 자체다! 이성적으로 보면, 허점 투성이 이다. 그러나 그 이성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한계성’속에 있으며, 죄로 부패하여 눈이 먼 것을 사람들은 아는가?! cf) 부록-요한복음 8:31~37 설교(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유명한 본문)-죄를 짓는 자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캐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한복음 9장

-9: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9:27,“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8“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3:“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4“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9:“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40“바리새인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come from where?)-바리새인들은(유대인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어디서 온 사람이냐? 하나님이 모세처럼 보낸 선지자, 하늘로부터 온 성자 하나님임을 인정할 수 없었다.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의 문제인데, 이것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눈을 열어서 보게 해주시는 자들만 보는 ‘비밀’(mystery)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믿고, 받아들일 수 없는 과격한 자기 주장이다. 신앙은 철저히 신적인 것이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인간적인 산물이 아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인간(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야만 알 수 있는 선물의 차원인 것이다. 지식이 없는 자들은 진리를 이해못하고, 신학자들과 성경전문가들이 진리를 안다고 말할수 있는가? no. 진리는 인간적인 지혜의 차원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이것이 ‘신비’다(mystery). 세상의 빛이신 예수그리스도, 아버지 하나님, 성령하나님이 눈을 열어, 보고, 믿게 하셔야 보는 진리는 천상적인 것이다. 쓰레기 같은 소리를 하며, 진리를 모르는 신학자들은 얼마나 많은가?! 진리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인간아니다. 인간의 전문지식과 신학지식, 탁월성이 아니다. 오직 세상의 빛이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의 눈을 열어, 보고, 믿게 하신 주 예수그리스도와 아버지, 성령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Amen!

 

요한복음 10장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다(사탄과 마귀의 종이다! 마귀의 영을 받은 자다! 놀랍고 끔찍한 평가다!-요10장20,21“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 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10:24“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31“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32“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33“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신성모독)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6“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issue를 놓고서, 팽팽한 대립과 날카로운 긴장!-예수님의 자기 주장은 너무 과격해서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의 주장이셨다-‘나와 하나님은 하나’다-자신의 신성주장!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쳐 죽일려고 하고, 결국 십자가에 죽인 그들의 ‘과격한 행동’이면에는 예수님의 ‘과격한 자기 주장’이 있었다!-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신성주장과 신성모독! 팽팽하게 맞서는 과격성! 유대인과 유대인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유대인 당국(공회)은 공식적으로 이 ‘예수 운동’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인정하든, 부정하든! 양당의 결정과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근데 유대인들이 예수의 과격한 자기 주장(신성)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많은 유대인들이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주류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예수의 주장은 너무 과격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과격한 자기 주장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수 없다’하시지 않는가! 인간적인(세속적인) 지혜와 판단으로 누가 예수의 과격한 자기 주장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을 수 있겠는가? 성부와 성령의 가르침과 이끄심이 아니면 믿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의 예수의 과격한 자기 주장!-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과격한 자기 주장에 여전히 고개를 저고, 예수님을 미친사람이라고 말하는 유명한 철학자들(일반인)이 많음을 그대는 아는가!

 

요한복음11장-

요11장의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상황-십자가 죽음-의 전환적인 사건’이다-요11:42:“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나는 아버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파송하신 아들하나님임을 저희로 믿게),45(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니),47(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48”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우리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53”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예수님의 메시야 운동(movement-부활생명&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stop시켜야겠다고 공식적인 결정-어떻게? 예수를 죽임으로써 why? 예수의 운동의 영향력이 대단했기에-어느 정도로?모든 유대인들이 그를 메시야로 믿는 일이 발생하여, 결국 사회적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의 상황까지! 근본 이유는? 신성모독!(19:7”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메시야사칭!-사기꾼! 거짓말쟁이! 혼란 일으키는 자!(19: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6***cf-1) 부록-예수의 심문과 처형-에 관해서는 부르스, 신약사, 231~242보라!

 

요한복음12~13장-

1-유월절 엿새전에 예수께서 배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6:71,17:12)가 말하되~7-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3-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고대 축제의 환호성인 호산나-오 주여 승리를 주소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9-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2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왔도다, 27-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31-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32-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4-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 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6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 숨으시니라, 37-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애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38-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39-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2-그러나 관원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44-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50-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유월절 엿새전에 배다니에 도착, 그 후 예루살렘에 ‘메시야-왕’으로 나귀타고 입성-광신적인 순례자들의 환호가운데! 예루살렘에 ‘메시야-왕’으로 나귀타고 입성하신 예수의 사건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앞의 부록을 참조하라)! 한마디로 말하면, 메시야로, 이스라엘의 왕, 임금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등극(왕위에 앉음)하려는 ‘공식적인 의식’인데, 이 ceremnoy는 ‘감추어져 있는 의식’으로, 부활이후에야 비로서 그 ‘의미’-등극식-가 밝혀진다! 예수의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하신 사건은 당신이 메시야임을 공공연하게 시위하는 것이지만, 유대인들의 세속적, 정치적 메시야관(군사적 정복 , 소요와 반란의 지휘할 왕,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고, 다윗왕국을 회복할 왕)을 배척하는 차원도 있다. 이것은 ‘군말’이 아닌, 평화의 방법, 무저항의 방법인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한 가운데, 예수가 보여주는 매시야 시위다! 지금은 겉으로는 예수를 메시야로 환영하고, 환호하지만, 이 군중들은 예수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자(!), 십자가에못박아 처형하라는 그 판결에 동의한다!

 

‘죽음’이 임박할 수록, 예수에게 ‘죽음’은 무엇이었는가? (23절). 그것은 일반 유대인들과 산해드린,모든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된 것이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란 의미는, 요13:1~3에 분명히 보여진다.-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2-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3-저녁 먹는 중에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32-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를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리리라, 33-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6-시몬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go to where)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예수는 누구신가? 예수라는 청년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경외감을 가지고서,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성자하나님(신)! 하나님아버지로부터 오셨다가 다시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시게 되는 성자하나님(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으로). 이 세상에 인간 가운데 ‘인간의 몸을 입고서, 함께 동거하셨던’ 신이 있었고, 그 신이 예수라는 사람(청년)이었단 진리에 경외심으로 대면할 수 밖에 없다! 놀라운 진리이다! 충격! 이 진리-성육신-는 철저히 ‘감추어져 있었다’! 베드로 조차도 알지 못하여, 이렇게 말한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where do you go?) 이 감추어진 진리를 인간이 어찌 인간의 지혜와 판단으로 알 수 있단 말인가? 주 예수여 당신은 ‘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성자하나님-도마의 고백)! 이 도마의 고백외에 우리가, 내가 예수 앞에 무엇을 드릴수 있단 말인가! amen.

 

요한복음14장-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자가 없느니라, 7-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으니라, 8-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갰나이다, 9-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2~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6-20-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8-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도마의 질문, 빌립의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참 ‘절정’에 이르는 말로, 감탄과 경외심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영적으로 무지한 가운데 있는’ 제자들..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이 어딘지 모르고,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어이없는(무지한) 질문에 예수는 단호하게 분명히 말한다-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에 거하시는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성부하나님을 대리한다-계시에 있어서나, 임재에 있어서나! 하나님과 예수의 일치(하나됨)는 완벽, 완전하다! 놀라울 따름, 충격 그 자체다! 인간 예수의 사기인가? 신성모독인가? 미친병신으로서, 아니면 참된 말인가?(신성주장). 이 문제를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내내 씨름하면서, 대답을 추적해나간다! 그러나 대답과 결론은 너무 분명하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성자하나님)!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그것을 예수는 표적으로서 입증하신다. 이땅에서 행하는 수많은 표적들로, 종국에는 부활이라는 표적으로서! 십자가에서 부활과 승천하심으로서, 당신이 ‘신’(성자하님)이심을, 죄인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는그리스도, 하나님의아들임을 입증하셨다! 주님..............................

 


[출처] 남원산성(둥가타령) 흥겨운 가락입니다.^^*~ 흥~ 흥 ~ 얼 ~ 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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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1234)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락이 때로는 흥겨워 ...............깊은 영혼의 잔치에도 ....  (2009-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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