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 짜 :
  • 2003.04.27
  • 제 목 :
  • 모험적 신앙
  • 본 문 :
  • 마태복음 14 : 22 ∼ 33

      세 종류의 장애를 이겨낸 헬렌켈러 여사가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안정성이란, 미신과도 같은 것이다. 위험을 피하는 일이 위험에 철저하게 노출되는 것보다 결코 더 안전하지 않다. 인생이란, 과감한 모험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특별하게 인생을 산 사람만 인생이 모험일까요? 그렇지 않은 거 같습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서도 인생이란, 모험입니다. 인생이란, 도전하는 것입니다. 모험 없는 인생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나오는 그 순간부터 인생은 모험의 연속입니다. 어떤 친구를 만날 것인가? 어떤 학교를 결정 할 것인가? 어떤 직장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릴 것인가? 인생은 모험이라고 하는 이 놀라운 도전에 연속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큰 모험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갖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약속의 말씀을 향해서 내 인생 전체를 그분에게 던지면서 시작하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20여년 동안 몸담고 있었던 장로회 신학 대학교를 사직하고 소망교회의 부르심을 받으면서 제 주위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회 하게 되었으니 축하한다.” “왜 어려운 목회를 이제 시작하려고 하느냐? 학교에서 쌓아놓은 영예를 더 높이고 그리고 후학을 양성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제자신도 이문제의 대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이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가? 소망교회는 귀한 목사님을 통해서 26년을 지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 세계 속의 교회로 이렇게 자리 매김을 했습니다. 이 교회의 후임자가 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영예라고 생각이 들어졌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큰 부담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다시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새로운 모험을 도전을 허락해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소망교회를 통해서 한국교회를 섬기고, 소망교회를 통해서 한국의 이 민족을 섬기고, 이 땅의 백성들을 섬기는 교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저에게 명령하는 것으로 받으면서 이것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또 하나의 모험이라고 마음속에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스위스의 상담 심리학자인 폴 트루니에 라고 하는 사람은 모험으로 사는 인생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조 자체가 모험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것이 모험이시고, 이 역사의 현장에 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 모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분의 인생을 산 전체가 모험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그의 제자들도 실은 모험과 도전의 의해서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긴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 생각을 하면서 소망교회 첫 번째 주일 설교를 어떤 본문을 택할 것인가? 곰곰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떠올린 구절이 오늘 본문입니다. 깜깜한 밤중에 바다 위에 서는 베드로 그것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삶의 사건도 아닙니다. 자기의 삶 전체를 내건 모험적인 결단이고 실존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어떤 성격의 소유자 이었을까요? 다혈질 적인 사람입니다. 소위 말하는 화끈한 성격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었습니다. 근데 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먼저 선택하셨을까요? 갈릴리 바닷가에서 나를 따라오라고 했을 때 자기의 직업과, 그물과, 부모를 내려놓고 따른 첫 번째 인물이 베드로 이었습니다. 가이산의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냐?” 하고 물으실 때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당신은 그리스도시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한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른 모든 제자들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죽기까지 따라가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저는 복음서를 읽다보면 아마 예수님이 베드로가 없으셨으면 무척이나 심심하지 않으셨을까? 하나님 나라 운동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곧장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이 질문만 하시면 언제나 먼저 대답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다른 인물보다도 그 마음속에 이 모험적 정신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캄캄한 새벽이었습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 가운데 베드로는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다! 두려워말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알고 베드로는 당참 발언을 합니다. “만약 당신이 주님이시면 나로 물위로 걸어오라” 명하셔서 어떤 동기로 이렇게 했을까요? 호기심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처럼 한번 똑같은 행위를 해보겠다는 도전일까요? 기백일까요? 분명한 것은 그 속에 주님 때문에 시작하는 모험적 정신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이란, 새로운 모험의 출발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신앙을 갖은 그 자체가 모험 그 자체입니다. 베드로의 행위를 우리의 눈으로 보면 결코 용기라고 할 수 없는 만용입니다. 이성적으로 볼 수 없는 미친 짓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라고 하는 말씀 한마디의 자기 삶 전체를 내건 그 베드로는 용기 있는 인물입니다. 배 밖을 향하여 자기의 사람 전체를 건 모험하는 인간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모험하는 사람을 좋아하시는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니, 뒤집어서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택하신 사람을 아예 모험 속에 끼여 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시지 않는가? 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런 점에서 모험하는 백성이었습니다. 정겨웠던 애굽 땅에서 그것은 노예이긴 했지만, 그런 대로 먹고 살수가 있었습니다. 불만족 하지만 그런대로 인생을 한세상 살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애굽을 떠나라고 말을 합니다. 새로운 가나안 땅을 비전으로 주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라고 그곳을 향해서 가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냥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야 됩니다. 광야라고 하는 들판을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그곳을 향해가라고 모험을 시작하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 이셨습니다. 우리가 잘아 는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라함도 모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실 때에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본토를 버렸습니다. 친척을 버렸습니다. 아비의 집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약속을 위하여 그의 삶 전체를 내걸고 나아가는 모험하는 인간이 아브라함의 생애 이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나그네적 방랑의 길일지라도, 지금 현재는 암울할지라도, 지금 현재는 보장이 없는 것 같을지라도, 지금은 흔들리는 삶의 여건일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것만을 바라보고 그의 생을 걸을 수 있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의 첫출발이란 이른 것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걷는 것처럼 신앙이란 낯선 땅이 드려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아깝던 그것! 그것보다 우리 하나님이 더 위대한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가장 소중한 분임을 내 삶 전체로 깨닫는 여기에 신앙이 시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런 낯선 곳에 물위에 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베드로는 그냥 뛰어 든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를 향해서 “나다! 두려워 말라.” 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의 초청 때문에 이 모험적 신앙의 길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나다…….’ 누구의 이야기일까요?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서 ‘나다!’ 바깥에서 그러면 여러분들 문을 여러 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남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일 것입니다. ‘나다’라는 그 말속에는 함께 삶을 나눴던 사랑과 친교와 만남의 내용들이 들어가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 사실은 모험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다’라고 하는 그 말은 사실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창조주의 언어입니다. 폭풍우치는 바다 가운데서 ‘나다! 두려워 말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래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말씀하실 때 사용한 언어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풀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친히 만나게 됩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라. 모세는 두렵습니다. 도대체 누가 보냈다 그렇게 이야기 하리이까, 나한테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다……. 나는 나다! 나는 설명 할 수가 없다. 나는 역사 속에서 행하는 것을 보아야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 네가 나를 알려고 하면 내 말씀대로 역사 속에서 순종해봐라. 내가 출애굽을 하는 만 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네가 알 것이다.” 그 때 말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당신이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이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오시는 하나님 때문에 시작하는 모험입니다. 이 모험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시작이 됩니다. 말씀 없는 인생의 모험은 상상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말씀 없는 우리의 열심은 우리의 신념일 뿐입니다. 말씀 없는 우리의 행동은 이기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우리는 말씀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나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시작한 모험적 인물들입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서 물위로 걷습니다. 그리고 물위로 몇 발자국을 주님을 향해서 걸어갔습니다.
     신앙이란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을 도전하는 게 신앙일까요? 비이성적인 것을 향해서 무모한 짓을 하는 행위가 신앙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뒤따르면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현장을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뒤바뀌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말씀과 현실이 갖고 있는 현장에 위험성이 놓여져 있습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 위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곳입니까? 신앙과 불신앙이 교차되는 곳입니다. 한편으로는 의심하고 한편으로는 믿는 그런 곳이 바로 베드로가 서 있는 물위입니다. 29절과 30절에 보니깐 이렇게 베드로가 갖고 있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니, 베드로의 문제가 뭘까요? 주님 때문에 배에서부터 떠나서 몇 발자국을 걸었습니다. 근데 이제는 주님이 보이지 않고 폭풍우 치는 파도가 그를 향해서 달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다시 자기가 돌아온 배를 향해서 뒤돌아보았습니다. 근데 너무 많이 왔습니다. 이젠 되돌아 갈 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갖고 있는 위기입니다. 주님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내가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현실이 폭풍우가 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기 전에 어느 정도의 불안도 있었습니다. 문제도 있었습니다. 죄의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즐기면서 살수가 있었습니다. 배 안에 있는 제자들처럼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그것을 너무 알 수는 없었던 그 실존…….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실존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진리와 생명 예수님에게 있는 것을 알고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앙을 시작했는데 나의 연약함이 더 많이 보입니다. 나의 죄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는 동료들의 부족함과 완악함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교회 안에도 어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 닳으면서 내가 사랑했던 주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이 갖고 있는 위기입니다.
     이때 우리가 다시금 확실하게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더 문제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들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됨에 축복을 끊임없이 경험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게 사실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보면서 배에서부터 한 발자국을 내 놓을 때, 그 때 파도를 안 봤을까요? 그 때도 파도가 일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폭풍이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될 때 인간의 연약성을 몰랐었습니까? 인간의 완악성을 몰랐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 속에 얼마나 하나님 기뻐하지 않는 모습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가 모르셨습니까?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다 알면서 예수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님만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참된 구원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시작한 우리들의 신앙의 모험이 아니었습니까? 환경 때문에 우리가 침몰 당해서는 안됩니다. 흔들리는 풍파 때문에 우리가 무너져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모험은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망가지게 영원히 우리를 망가트릴 수는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례보다 바람이 더 무섭게 될 때 빠져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면 다시금 회복되어 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목사가 됐다고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장로님이 됐다고 권사님이 됐다고 안전판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늘 말씀을 다시금 되새겨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시작했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물위를 걷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주님 앞에 갈 때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잃어버린 순간에 베드로처럼 깊은 물속에 빠지게 됩니다. 어떻게 될까요? 신음해야 될까요? 탄식해야 될까요? 발버둥 쳐야 될까요? 길은 오직 한 길입니다. 나를 초청하신 그 분을 향하여 기도에 부르짖음을 하는 거기 밖에는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 영혼아 너는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려는 몸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까지도 상실합니다. 손에 쟁기를 쥔 자는 뒤를 돌아봐서는 안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한 사람들은 모세의 아내처럼 다시금 소돔과 고모라를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분이 우리를 초청했습니다. 신앙적 모험은 두려움이 없는 신앙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것, 그 사실 때문에 달려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분이 우리를 향해서 초청하고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고 계십니다. 나이가 많이 드셨어도 괜찮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달려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기도
      사랑하는 주님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두렵고 떨며 무서워 할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를 오라고 하신 주님, 나다! 두려워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 앞에서는 그날까지 달려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