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 짜 :
  • 2001.12.16
  • 제 목 :
  •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 본 문 :
  • 시편 46 : 4 ~ 11

     안소니 드 멜로 라고 하는 분이 쓴 ‘1분 지혜’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 수도사가 나이 많은 스승을 찾아가서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벌써 많은 시간 명상도 하고, 고행도 하고, 수도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쳐다보던 노스승께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네 옆에 계시는구나” 라고 했습니다.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다가 젊은 수도사가 또 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그분을 못 뵈옵는 것입니까?” 스승은 뜬금없이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네는 술 취한 사람이 자기 집을 못 찾고 헤매는 지 아는가? 왜 술 취한 사람이 사람을 똑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비틀거리는지 아는가?” 대답이 없었습니다. 스승은 다시 말했습니다. “무엇이 너를 취하게 만들었는지 알아내어라.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취해있지 아니하여야 하느니라. 취한 것으로부터 깨어야 하느니라. 그래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느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현대인의 큰 병은 무엇이겠습니까? 깊이 취해있고, 미쳐서 산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없어요. 돈에 미쳤어요. 그 돈이 좀 벌리고 못 벌리고, 그것에 미쳤어요. 그 증권회사 보도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 보니까 미쳤더라고요. 그저 얼굴이 그냥 피었다가 죽었다가 하더라고요. 명예에 취해있는 사람들, 출세욕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리고 성취욕에 끌린 사람들, 조급함과 자기 집착에 미쳐가지고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맑은 정신, 맑은 양심은 다 어디 가고 완전히 술 취한 사람처럼 몽롱하게 비틀거리며 그렇게 허구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성공하려면 세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가 뭐냐하면, 공부해야된다 이것입니다. 공부가 먼저입니다. 여러분, 경험이 먼저가 아닙니다. 철학이 먼저입니다. 실제가 먼저가 아닙니다. 이론이 먼저입니다. 먼저 공부부터 해야 됩니다. 뭐, 바둑을 3단을 두는 친구가 바둑 못 두는 친구를 만날 때마다 구박을 합니다, 바둑도 못 둔다고. ‘아, 그러냐’고. 이 사람은 10년을 바둑을 뒀거든. 아, 그러냐고 그리고 이 친구가 안되겠다 생각을 해서 ‘1년 후에 보자’ 해놓고 1년만에 다시 처음으로 만났는데 3단을 두는 친구가 보기 좋게 졌습니다. “거, 어떻게 자네가 이렇게 바둑을 두게 되었나?” 이 친구는 아주 본격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책을 사다 놓고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를 했습니다. 1년만에 남 10년 한 것보다 더 우수한 성적을 나타낼 수가 있었어요. 공부가 먼저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철학과 이론이 먼저입니다. 생각 없는 경험, 죽을 때까지 해도 소용없습니다. 공부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공부만 해서는 안됩니다. 실천을 해야됩니다. Practice, 행동에 옮겨야 됩니다. 중국 고대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는 듣는다, 그러면 곧 잊어버릴 것이다. 너는 본다, 그러면 얼마를 기억하기는 할 것이다. 너는 행한다, 그러면 이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많은 말을 들어도 그건 잊어버립니다. 많은 것을 봅니다. 기억은 됩니다. 지식으로 남죠. 기억은 할 수 있으되 이제 이것을 행해야 됩니다. 경험 속에서만이 깨달음이 있습니다. 비로소 산지식이 되고, 산지혜가 됩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내 지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경험함으로만이, 실천함으로만이 이해된다’ 그랬어요. 사실입니다. 들은바 대로 깨달은바 대로 실천해야 됩니다.
     세 번째는 꾸준하게 인내해야 됩니다. 무던히 때를 기다려야 됩니다. 이제 기회가 올 때를 말입니다.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야 성공할 수 있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Meditation 이라고 말합니다. 명상이 없습니다. 깊은,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명상이 없습니다. 멀리 생각하는 명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찰나적이고 현재적인 것만 있어요.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제가 결혼주례 할 때마다 늘 그런 얘기를 합니다만은 ‘지금은 신랑, 신부지만 머지않아 아버지, 어머니다. 또 머지않아 할아버지, 할머니다. 그때를 생각하고 오늘을 살아라’ 그럽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보다 먼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명상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영국작가 헉슬리라고 하는 사람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무슨 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가는데 기차가 연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제 시간에 도착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지금으로 말하면 택시를 타겠지만 그 분은 옛날이니까 마차를 탔습니다. 그리고 “빨리 가세.” 달리는 말을 향해서 “더 빨리, 더 빨리!” 그랬어요. 한참 가다가 마부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디로 갈까요?” “아, 그걸 말하지 않았구나” 그랬어요. 이거 얼마나 어리석은 얘기입니까? 빨리빨리가 문제입니까?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냐?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46편은 교회사적으로 유명한 시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로 유명한 마틴 루터가 이 시편을 읽다가 시편 46편을 읽다가 큰 은혜를 받아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고 하는 잘 아는 찬송을 작사, 작곡하게 됩니다. 이 찬송은 독일사람들은 애국가 보다 더 많이 부르는 Anthem입니다. 바로 이 시에서 은혜를 받고 감격하는 중에 작사, 작곡하게 되었다는 거 아닙니까? 바로 그런 시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가만히 있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있으라.’ 여기에 ‘라파’라고 하는 말의 동사형, 명령형입니다. 가만히 있으라, 가라앉히라는 말입니다. ‘조용히 하라. 마음을 편히 하라. 단순하게 하라. 그리고 마음을 비우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동시에 ‘침묵하라’ 하는 말입니다. 요새 심리학적 치유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흔히 말하기를 억울하고 분한 일 있으면 이걸 발산해 버리라 이거예요. 화가 나면 한바탕 해버리라, 그래야 풀어지지 않겠느냐. 그것이 쌓이면 마지막에 어머니께서 병든다고 그렇게 쉽게들 얘기해 왔습니다만은 요새는 학설이 바뀌었어요. 가만히 있으라, 이거예요. 왜요? 화풀이를 하려고 하면 점점 화가 높아져요. 그 액센트가 가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안그렇습디까? 슬픈 마음이 있을 때 가만히 있으면 슬픈마음 없어져요. 그런데 울어보세요. 게다가 중얼중얼 해보세요. 점점 더 슬퍼지죠 이제. 또 누가 옆에서 울지 말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슬픈 이유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게 관련화됩니다. 그래서 점점 더 슬퍼지고, 점점 더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화난 사람을 내버려두세요. 옆에서 뭐라고 하면 점점 더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점점 더 화는 커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가만히 있어라’ 이거야. 조용하라, 입다물어. 조용히 있으면 됩니다. 요새 그 여인천하 보니까 무슨 말만 하면 “입다물어” 그러대요. “그 입 다물어” 그럽디다. 그거 괜찮은 얘기하더라고요 거기서. 말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 입 다물어.’ 오늘 그 말씀을 하는 거예요. 그 입 다물어라. 그리고 생각하라고요.
     출애굽기 14장에 볼 것 같으면 모세가 이스라엘 60만 대군을 이끌고 이제 가나안을 향해 출애굽을 했는데 홍해 광야길로, 하나님 명령대로 갔는데 결국은 앞에가 홍해가 가로막힙니다. 이 홍해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뒤에서는 애굽군대, 대 분노한 애굽군대가 따라 옵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습니다. ‘아이고, 이제는 죽었다’할 때에 이 백성들이 원망불평을 합니다. 원망불평을 하는데 불평하면서도 또 농담도 잘하더라고요. “애굽에 공동묘지가 모자라느냐? 왜 우리를 여기 갖다 죽이려느냐?” 이러더라고요. 원망 불평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생겼어요. 애굽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열가지 재앙, 그 엄청난 능력을 다 잊어버렸어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도 잊어버렸어요. 오직 원망, 원망불평……. 모세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가만히 있어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행하시는 역사를 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로 그러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 네가지 침묵을 말합니다. 말과 행실과 생각과 사고에 있어서 적어도 네가지를 침묵하라. 첫째, 원망과 증오, 시기와 질투, 시비와 비판, 멈추라는 거죠. 조용히 하라, 원망하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 그런 말씀입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 한 분이 당뇨병으로 20년을 고생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본인 스스로 인슐린을 주사하고야 일어납니다. 그런 분인데 그만 뭐 좀 실수해 가지고 이 팔에 종처가 났는데, 이 당뇨병 환자들은 그런 거 잘 낫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약을 발라도 안 나으니까 아무 생각없이 동네병원, 조그만 병원에 가서 “아, 이거 종처가 낫지 않는다”고 그랬습니다. 적어도 노인이고 하니까 의사는 “당신은 혹 당뇨병이 없습니까?” 라고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이게 실수할 때라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고 항생제 페니실린을 주사했습니다. 이 유성주사를 놓으니까 주사 맞으면서 심장이 멎었습니다. 주사 맞다가 돌아가셨어요. 이러고 나니까 난리가 났죠. 의료사고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고소한다, 뭘 한다, 떠들 때 제가 장례식을 맞게 되었거든요. 왜들 떠드느냐고 “조용합시다. 목사님이십니다. 어차피 돌아가셨습니다. 목사님이 남을 위해 사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 젊은 의사 하나를 죽여야겠습니까? 살려야겠습니까?” 어떡하겠냐고. “그리고, 이런다고 목사님이 살아납니까? 아, 20년 고생하고 갔으면 됐지 생명은 하나님께 있는 것인데 거 왜들 불평하시는 거요?” 의료사고는 무슨 의료사고냐고, 조용하라고. 그래가지고 장례식을 한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얼마나 더 원망을 해야 됩니까? 누구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이 시비와 이 판단, 이 비평은 언제까지 가야 되는 겁니까? 여러분, 해결이 날 것 같습니까? 점점 실망과 낙심과 증오, 이거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고로 ‘조용하라. 가만히 있어라.’
     또 하나는 욕심과 정욕입니다. 그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심, 끝도 없는 정욕. 갈라디아 5장 24절에 보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요. 끝없는 욕심. 이제쯤은 버리십시다. 여러분, 출세하면 뭘하고 부자가 되면 어쩌자는 얘기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무상하고 아무 소용없다는 것, 이제쯤은 알만하지 않습니까? 그런가하면 과거올시다. 과거에 대한 미련, 과거에 대한 생각, 버려야 됩니다. 그 후회하고 그저 억울해 하는 마음 말입니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되는데, 그 사람 만나지 말았어야 되는데…….’ 결혼 생활 20년 하고도 ‘그때 이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았어야 되는데…….’ 심지어는 주례한 사람 원망하더라고요. 내가 주례 해달라고 하니까 해줬지. 좌우간 지난날에 잘못된 것, 도대체 언제까지 불평하고 원망할 거예요? 과거는 지나갔어요. 그저 잊어버리세요. 또 그런가 하면 근심과 두려움이 있어요, 미래에 대해서. 도대체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불확실한 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미래에 대해서 걱정근심이 많아요. 정말 잠을 이룰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미래를 하나님께 맡깁시다. 본래 그러했듯이 이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겁니다. 다 맡겨 버리고 여러분은 조용하세요.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조용하라. 그리고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엘리야가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하나님을 만나 뵙습니다. 지진이 나고 천둥이 날 때 그 무서운 벼락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더라고요. 이런 시끄러운 일이 다 지나간 다음에 고요하고 세밀한 소리가 들렸어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고요할 때만이 고요한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할 때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겁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잘못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잘되는 거예요. 망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사는 길이었어요.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이제서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그가 나를 보호했고, 그가 우리를 보호했고, 앞으로도 그 피난처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에요.
     그런가하면 새벽으로도 오시리라. 깜깜한 밤입니다만은 새벽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로마서 13장의 말처럼. 그런고로 어두움에 일을 벗어야 합니다. 새벽이 가까워 옵니다. 새벽을 의식하고 새벽을 바라보는 그 은혜를 주실 거예요.
     그런가하면 오늘 본문에 가장 위대한 결론이 있습니다. 이 모든 환난과 전쟁과 이 모든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이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높임을 받을 것이요. 반드시 높임을 받을 것이요. 그 아침을, 그 영광의 날을 우리는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의 날을 바라보게 되며 우리는 고요한 가운데서 주의 음성을 듣고, 주의 역사를 지켜보아야 할것입니다.
     크리소스톰 이라고 하는 분은 유독시아 라고 하는 황후로 인해서 그가 정배되어 가게되는 그는 정배 가는 때에 한 설교문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마음이 고요했습니다. 죽음도 정배도 환난도 상관없어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까. 그리고 이런 유명한 말도 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쫓아내면 엘리야같이 될 것이고, 구덩이에 던지면 예레미야같이 될 것이고, 바다에 던지면 요나같이 될 것이고, 돌로 치면 스데반 같이 될 것이고, 목 베임을 당하면 세레요한처럼 될 것이고, 매로 때리면 사도바울처럼 될 것입니다.” 빙그레 웃으면서 여유 만만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듣는 자세로 전환하십시다. 가만히 있어서 조용히 하여 비우고, 그리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하나되심을 알 것 입니다. 경쟁과 시기와 싸움, 끝없는 욕심, 다 묻어버리고, 현실 속에 역사 속에서 이 사건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너는 조용하라.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네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너와 함께함을 알지어다.’ 그 거룩한 음성이 우리에게 가까이 들려올 때, 우리가 새로운 아침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원망과 시비가 끝이 없고 우리 마음에 근심과 걱정, 두려움도 끝이 없습니다. 이 불확실한 세대를 살면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볼 수 있사오리까. 이 격동하는 세대에서 우리 마음까지 함께 격랑을 일으키지 않게 하옵소서. 항상 고요하고 조용한 가운데서 깊은 명상 속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 되심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